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 신종 감염병 시대, 비인간 동물과의 공존 이야기, 2021년 11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추천도서, 2022년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곰곰문고 5
이항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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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팬데믹을 경험하고, 중국 우한지역의 박쥐에게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옮겨왔다는 게 점차 정설이 되어가는 현재. 인수 공통 감염병을 예방하려면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동물과 인간의 건강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원 헬스(one health) 개념의 접근이다.

 

자연보호, 환경 보전, 생태계 유지 등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에서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둔 보전과 개발의 조화로 변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큰 틀에서는 여전히 미흡하지만 조금씩이나마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동물에 대한 우리네 인식은 과거에 여전히 묶여 있다. 즉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다.

 

일부 반려동물을 제외하면 대다수 동물은 일상 환경에서 사라진 상태이며 자연 속에 사는 동물들의 서식지도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어 조만간 멸종이 임박한 동물도 많다. 어디 그뿐이랴, 육식에 대한 선호로 식육 동물의 사육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돌림병으로 떼죽음을 겪는 게 일상화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실험동물과 동물원의 동물에도 저자들은 주의를 환기한다. 인간의 안녕과 편의를 위하여 숱한 동물이 죽어 가며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불편하고 단순한 일상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즐겁거나 재미있는 변화가 아닐 것입니다. (P.35)

 

이 모든 사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예도 있지만, 대체로 관심 밖에 있던 사항이므로 각성과 자기반성을 하게끔 한다. 벤담의 의견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인정된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동물의 생명을 끊거나 고통을 줄 만한 행위가 금지되어야 하는데,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부정적이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천연가죽 옷이나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게다가 실험동물은 어찌할 것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인류는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크게 줄여 나가기라도 할 수 있을까요? 인류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럴 준비가 되었을까요? (P.41)

 

근본적 변화가 어렵다면 현실적, 실용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소위 동물 복지에 힘을 쏟는 것이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최대한 보전하도록 노력하며, 식용동물의 사육 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에 동참하며, 동물실험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우하는 등이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애완용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 책임감을 지니고 돌봐야 할 것이다.

 

여러 유형의 동물 복지를 주장하지만 저자들의 의견은 결국 하나로 합일한다. 동물을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유지하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동물도 건강하고 인간도 건강해질 것이라는 점,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의 삶의 질을 향상하도록 노력하는 게 결국 인간 자신의 복지와도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람과 동물을 가르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두루 걱정할수록, 주어진 상황과 문제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갈수록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질 거예요. ‘동물 복지와 사람 복지가 하나라는 의미로 원 웰페어라는 말이 주목받는 까닭입니다. (P.114)

 

실험동물과 동물원 동물의 현황은 당혹스럽다. 그렇게나 많은 동물이 각종 연구 개발의 목적으로 생명을 잃는다니 게다가 그들의 거주 환경의 열악성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그나마 동물실험에 대한 기준과 절차가 정립되기 시작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동물원이 결코 동물을 위한 시설이 아님은 조금만 생각해도 분명한데 우리는 외면해 왔다. 아무나 동물을 사서 동물원을 차려 수익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 놀랍다. 우리네는 동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그토록 무관심했고 윤리적 기반마저 이토록 허술했다니,

 

저는 대다수의 동물원을 생추어리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원은 동물을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 보호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물원의 기능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차순위로 하더라도 동물원이 생추어리로 바뀌면 동물을 보호하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P.157)

 

동물 보호에 대한 관심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동물에 대한 사랑과 보호 의식이 명확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은 물론 찬성조차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것이다. 요즘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반려동물의 에티켓, 길고양이에 대한 먹이 주기는 격론이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동물 보호와 복지는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기준과 한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종으로서 동물의 안녕과 생존은 말할 나위도 없고, 궁극적으로 우리네 자신의 건강한 삶과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동물 복지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도 결국 동물의 일원이므로. 곳곳에서 부르짖는 저자들의 외침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독을 시험하고, 새로운 외과술을 시험하고, 백신을 시험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일까요? 이렇게 많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 고통스럽게 죽어 가도 괜찮은 것일까요? (P.135)

 

인간을 물리적으로 동물원에 전시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만, 인간은 가두면 안 되고 동물은 가둬도 된다는 명쾌한 윤리적 근거를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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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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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아동 청소년 문학으로 소개되던 작품이다. 원제는 <Green Mansions>인데, 화자가 나중에 리마와 조우하게 될 울창한 원시림을 산마루에서 조망하며 감탄하는 대목(P.77)에서 따왔다. 다만 자연미에 대한 순수한 예찬과 함께 소유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면 나의 기우일까.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이국적 배경의 로맨스 소설이다. 한 젊은이가 황금을 찾으러 당대로서는 낯선 지역인 베네수엘라 남부의 아마존을 배경으로 원주민들과 맞닥뜨려 겪게 되는 모험이 작품 내내 이어진다. 화자 아벨과 신비한 처녀 리마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중시한다면 이 소설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험과 사랑, 흥미진진한?

 

작품 전개에서 손에 땀을 흘릴 정도로 극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의외로 드물다. 노다지를 향한 주인공의 기대감은 이미 전반부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중반 이후부터는 그와 리마, 그리고 야만인 루니 일족 간의 적대적 삼각관계가 주를 이룬다. 전형적인 모험소설과는 달리 주인공은 사랑과 모험에서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환멸뿐.

 

작가가 중점을 두어 강조하는 대목은 자연 묘사에 있다. 서양인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아마존의 오지. 오직 자연 그대로만 있을 뿐으로 기후와 지형, 숲과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담백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미사여구로 장식하지 않았음에도 아마존 오지의 온화함과 강렬함을 과부족 없이 잘 살리고 있는데, 박물학자로서의 이력을 새삼 깨닫게 한다.

 

폭풍 같은 움직임과 혼란스러운 소음이 지나고 나자 숲의 적막이 굉장히 깊게 느껴지더군.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금세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네. 환상적으로 순수하고 표현이 풍부해서 이전에 들어본 그 어떤 음악 소리와도 달랐지. (P.50)

 

작품의 핵심적 내용은 아벨과 리마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과 죽음이다. 리마는 작품 내에서 신비하게 등장한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리마의 정체는 끝내 애매하게 마무리된다. 그녀의 고향인 리올라마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종족들의 운명은 어찌 된 것인지도 안개에 잠긴 채 말이다.

 

리마가 아벨을 만나지 않았다면, 숲의 파괴와 리마의 죽음 모두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숲의 여신으로서 자신의 순수한 힘을 통해 숲과 숲속 생물과 더불어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을. 누플로는 리마의 생활방식을 따를 순 없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그 아이가 꽃 피우고 노래하는 그 넓은 숲에서는, 그 아이의 집이자 정원이고 그 아이가 만물을 관장하는 그 숲에서는, 색칠한 날개를 지닌 작은 나비 한 마리조차 그 애의 말을 듣는 그 숲에서는 난 동물을 한 마리도 잡지 않소이다. [......] 그 숲에서 법은 하나뿐이거든. 리마가 정하는 법. 그 숲 밖에서는 다른 법이 적용되고. (P.154)

 

물론 리마는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자신의 감정이 아벨에게 이해되고 응답받고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행복은 본디 찰나라고 했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해 떨어지는 순간 아벨을 외친 그녀의 심정은 사랑과 그리움, 두려움과 원망의 중간 어디쯤이었을까.

 

리마와의 앞날을 꿈꾸던 아벨의 복수는 처절하고 냉혹하며 스스로 인정했듯이 야만적이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야만인보다도 더욱. 지성을 갖춘 계몽된 서구 귀족은 더 없다. 복수에 혈안이 되어 무자비한 칼을 휘두르는 한 남자 외에는. 복수에 성공하였으니 아벨의 심정은 후련하였을까. 루니 일족에 대한 학살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을까. 이후 전개되는 그의 신체적, 정신적 방황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를 보금자리인 숲을 떠나게 만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는 점과,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리마는 동족을 찾으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사실을 그는 부정하지 못한다. 원주민 일족의 학살과, 리마의 유골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자책감의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아벨의 고백은 당대의 관점으로는 충격적이다. 허무주의적인 동시에 비기독교적이므로, 신에게서조차 용서받지 못할뿐더러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아벨이.

 

그녀는 말했네. 천국마저도 내가 한 일을 돌이킬 순 없다고. 또 내가 나를 용서하더라도 천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 또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나의 철학으로 남아 있네. 기도도 금욕도 선행도 전부 아무 소용 없고, 중재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의 바깥에는 죄를 사하는 천국도, 죄로 가득한 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P.370-371)

 

이 작품은 모험소설의 외형을 빌리고 있지만 대중소설의 값싼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아벨과 리마의 교감은 매우 은은하고 정묘한 정서에 기반하다. 아벨이 쿠아코를 죽이는 장면, 마나가 일족을 꼬드겨 루니 일족을 몰살시키는 대목도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묘사를 통해 대중의 흥미를 돋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탓으로 그는 후대에 잊혀진 작가가 된 것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견해가 제법 눈에 거슬린다. 이는 그만의 개인적 오류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이니 어찌하겠는가. 후대의 우리로서는 작가가 그려낸 환상적인 작품 세계에 빠져들되, 인종주의 결함을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골즈워디가 쓴 서문은 이 작품의 진가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단순한 낭만적 서사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빛으로 은은히 채석되어 산문시로 승화되었다. 이 이야기는 질적인 품격에서 한 번도 이탈하지 않으면서, 이승에서 완벽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얻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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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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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은 그동안 평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을 교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함께 가기 위해 우선 평등해야 한다. 과학은 교양이다. (P.14)

 

인문학에 관심을 지닌 이론물리학자가 쓴 교양 과학서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은 서문에 해당하는 내용의 바로 아래 문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속으로 뜨끔하다. 나조차도 제법 독서를 좋아함에도 감히 과학책을 읽어보겠다는 발칙한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한다. 이 책도 순전히 나의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읽어보도록 권유하기 위한 학교 추천도서의 하나라서 펼치게 된 것임을 밝힌다.

 

우리는 왜 교양으로서 과학에 등한시하는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지 않아서일 것이다. 소위 인문학은 첫째, 진입장벽이 낮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면 극단적인 사례를 빼면 대부분 따라갈 수 있다. 둘째, 우리 주변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다룬다. , 가족, 사회, 국가, 세계와 같이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이해와 관계설정이 필수 불가결한 현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심도와 집중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타인과 대화에 소외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정확히 반대 사유가 과학에 적용된다. 첫째, 진입장벽이 높다. 수학적 지식을 기본으로 한다. 자연과 현상에 흥미를 갖고 다가서다가도 수학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학생에게 수학은 공포의 대상이며, 학업을 마친 성인들에게 수학은 학창 시절의 추억일 뿐이다. 둘째, 과학적 지식은 잘 알지 못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물론이려니와 저자가 전공하는 양자역학은 다른 세상 얘기다. 일상적 화제에 과학 관련 사안이 오르내리는 때는 사회적 이슈와 연관된 아주 드문 경우뿐이다.

 

그럼에도 과학 없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 컴퓨터, TV, 전기, 가전제품은 물론 의류, 생활용품 등은 모두 과학기술의 혜택이다. 날씨를 예보하고 지진과 태풍을 예측하며,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행위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이해와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근년 들어 전 인류를 괴롭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그리는 암울한 미래는 과학기술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할 때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과학기술이 비관적 미래를 가져올까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보다 더 제대로 과학기술을 해야 한다. (P.59)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의 편익을 누리면서도 미래에 한 가닥 두려움을 느낀다. 이를 주제로 한 무수한 SF소설과 SF영화도 있다. 과학의 발전 끝에는 어떠한 미래가 있을까. 유토피아 아니면 디스토피아?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이 가져오는 의구심에 저자는 돌직구를 날린다.

 

저자의 이 책이 여타 과학자들의 것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순수한 과학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과학적 사고와 과학 정신에 충실하지 못하다. 권위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P.127) 과학자로서는 사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노력을 방해하고 죄악시하는 불합리한 권위와 여론, 권력을 인정하지 못하리라. 세월호 참사, 국정원 부정선거 의혹, 부조리한 총장선거 등과 함께 국정 교과서의 폐해를 토로하는 저자의 심정이 절절하다.

 

과학에서 올바른 답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으로부터 얻어진다. [......] 만약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부가 결정하는 거라면, 우리는 지금도 천동설을 믿고 있을지 모른다. 노벨상은 이렇게 우리에게서 더 멀어져간다. (P.146)

 

저자가 언뜻 본령을 넘어서는 영역에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가 우주에 고립된 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이전에 그는 인간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과학 지상주의자가 되고 만다. 저자는 과학과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변하지만 이의 해악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자이기에 잘못될 가능성에 더욱 경각심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경고한다.

 

과학적 지식 역시 독점되면 해악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과학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과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는 시민사회는 그 중요한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P.166)

 

교양 과학서이므로 당연히 과학 지식을 얻는 즐거움도 누리게 되는데, 특히 저자의 전공인 양자역학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고전물리학조차 낯선 빈약한 독자에게 최첨단 물리학 이론은 접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저자는 어려운 내용을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설명할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한 자취가 역력하다. 어조를 가볍고 편하게 사용한다든지, 중첩 상황은 짜장면 우주와 짜장 우주로 비유한다든지, 확률론적 해석을 동전 던지기로 예시하는 등이다.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깊숙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지만, 양자역학이 발견한 낯설고도 당혹스러운 진실의 세계에 독자를 보다 가까이 이끄는 유인으로서는 충분하다. 카오스계와 프랙털에 대한 소개, 자유의지의 실재에 관한 뇌신경과학자의 관점 등도 흥미로운 주제다.

 

과학이라는 두 글자가 세상만사의 만능 치트키처럼 인식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확대되고 중요성이 커질수록 인간 자체는 점점 왜소해진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과 인문학에 대한 시대적 요구는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학을 외면하지 않고 교양으로서 소양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자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그 점에서 이와 같은 교양 과학서의 지속적 대중화 노력의 가치가 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는 그 자체로 상상이기에 우리의 상상으로 지켜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비과학적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해질 거다. (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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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벨린 - 전예원 세계 문학선 324 셰익스피어 전집 324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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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소재 중 하나는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는 남편의 이야기다. 최근에 읽은 <겨울 이야기>도 부인의 정조를 의심하는 남편에 관한 작품인 걸 보면, 여성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한 남성 배우자의 경계심이 자고로 매우 강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굳건한 나머지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욕망도 마음 한구석에는 동일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머젠) 차마 들을 수가 없군요. 당신이 비록 주피터 신의 아들이라 해도 아무 쓸모 없는 자이니 내 남편의 마부도 될 자격이 없는 야비한 사람이야. 사람됨으로 따진다면 내 남편은 국왕이고 당신은 기껏해야 그분의 왕국의 처형장의 망나니의 부하가 알맞으며 그것도 너무나 과분해서 사람들의 시기를 살 거고 너무나 출세했다 해서 미움을 살 거구. (P.71, 23)

 

이 희곡에서 포스튜머스는 신분을 제외하면 공주 이머젠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로 소개된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머젠의 자부심도 매우 드높다. 그런 포스튜머스조차 야키모의 제안에 쉽사리 넘어갈 정도이니 탁월한 이성도, 고매한 품성도 이런 면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믿음이 크면 배신감도 큰 법이랄까, 야키모의 교묘한 속임수에 빠진 포스튜머스는 배신한 아내를 비난하며 심지어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조차 내린다. 이성과 연관된 사안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불타오르기 쉽다.

 

왕이 왕비를 잃고 재혼하였는데, 새 왕비는 전남편의 아들을 데리고 온다. 왕을 사랑하지 않는 왕비, 자기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획책하는 왕비. 역시 생소한 글감은 아니다. 독자의 시각에서는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악인을 사랑하고 선인을 박대하는 왕이 답답하겠지만, 새 왕비에 홀딱 빠진 왕은 이미 귀먹고 눈먼 존재이다.

 

이 작품은 세 가지 사건이 뒤얽혀 진행한다. 포스튜머스와 이머젠, 클로텐의 결혼과 증오에 관한 것과, 벨라리어스와 두 아들- 사실은 두 왕자 -이 웨일즈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브리튼 왕국과 로마제국 사이의 갈등과 전쟁. 각각 진행되던 사건은 서서히 응축되고 양국 사이의 전쟁을 계기로 합쳐져 감춰진 진실이 밝혀지고, 해묵은 은원이 세상에 드러난다.

 

(포스튜머스) 난 어차피 죽어야 하는 사람이니, 어느 편에서든지 숨을 거두기는 매한가지. 이 이상 더 살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죽고 싶으니, 이머젠을 위해서도 말이다. (P.160, 53)

 

아내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시달린 포스튜머스는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나 그는 다만 스스로 죽기를 원할 뿐이다. 이때 그의 선조 유령이 나타나 주피터 신을 비난하고 하소연하는 장면은 뜨악하지만, 이 모든 게 훗날의 은총을 위한 시련이라는 신의 말을 통해 장차 기쁨이 다가올 것이라는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벨라리어스를 충신으로 평가해야 할지 애매하다. 그가 제아무리 왕의 처분에 분개하였더라도 왕자 둘을 유괴한 행동은 분명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다. 그럼에도 왕자 둘을 훌륭하게 키워냈다는 점과, 대 로마 전쟁에서 두 아들과 참전하여 위기에 빠진 왕과 브리튼을 구원한 점은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이 양립한다. 궁금하다, 전쟁이 없었다면 벨라리어스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려고 했을지 어떨지.

 

주인공은 아니지만 피사니오의 충성과 사리분별은 돋보인다. 왕비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이머젠의 곁을 꿋꿋이 지키며, 분노에 이성을 잃은 포스튜머스의 명령에 침착하게 대응한다. 위기에 빠진 이머젠에게는 남장을 하고 궁궐을 떠나라고 조언하는 등 단순한 하인 이상의 소임을 수행하지만, 오해를 받아 이머젠의 비난을 받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그의 존재감은 흔적조차 없다. 그야말로 이 작품의 이름 없는 영웅이다.

 

<심벨린>에서 이머젠은 영특하면서 매우 지혜로우며 분결같은 고운 심성을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 그녀의 사랑은 줄리엣처럼 서정적은 아니지만 적극적이며 정결하며 그녀의 숨결은 이사벨 못지 않게 지순하게 묘사되어 있어 감동의 진폭을 넓혀주게 된다. (P.202)

 

이머젠 공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허울과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민 출신의 포스튜머스를 남편으로 선택한 혜안과 용기. 왕비와 클로텐의 간사한 욕심을 간파한 현명함. 남편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과 흔들림 없는 믿음. 야키모의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지조. 남편 가까이 찾아가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낯선 세상에 뛰어드는 대담함 등 통상적인 여성상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면모의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이머젠) , 어서 가자. 생각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아, 하지만 어떻게 하든 뚫고 나가 봐야돼. 군인의 기개를 가지고 왕자다운 용기를 발휘해 끝까지 나가 보겠다. , 어서 가자구. (P.105, 34)

 

이 작품은 마지막 장에서 모든 고난과 갈등, 비밀이 해결되면서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비희극이다. 심벨린은 모든 포로를 풀어주며, 포스튜머스는 야키모를 용서한다. 심벨린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적장을 풀어주고 로마와 평화 관계를 제안한다. 기쁨, 용서, 평화로 넘쳐나는 대단원이다, 죽은 왕비와 클로텐을 제외하고는.

 

죽은 왕비와 클로텐은 극 중에서 그다지 동정받지 못할 악역이지만, 그들의 모든 언행을 완전히 무시하고 비판하는 건 곤란하다. 그들은 심벨린 왕을 부추겨 로마에 대한 조공을 끊도록 하였다. 로마의 지배에 대한 억눌린 감정을 표출한 건 동기의 선악을 떠나 왕과 귀족, 국민에게 잠재돼 있던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심벨린) 오만한 로마인이 조공을 강요하기 전까진 우리 브리튼은 자유로운 나라였다. 시저가 전세계를 다 집어삼킨다는 부푼 야망 때문에 부당하게도 그런 멍에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용감무쌍하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그 멍에에서 한사코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P.87, 31)

 

사극을 제외한 셰익스피어의 전 희곡 작품 읽기를 끝낸다. 한숨 돌린 후 남은 사극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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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귀족 친척 셰익스피어 전집 4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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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가장 최후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희곡이며, 같은 시기의 <헨리 8>와 더불어 그의 단독작이 아니라 존 플레처와의 공저이다.

 

셰익스피어 : 1, 21, 31-2, 51, 53-4

플레처 : 22-6, 33-6, 4, 52

 

작품해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이상과 같다. 합작이니만치 전체적 짜임새는 단독적인 만큼 유기적이지 않고 다소 느슨한 면이 있다. 특히 1막은 테세우스의 테베 정벌의 불가피성을 끌어내기 위한 배경인데, 나머지 막과의 유대감에서 현저히 괴리되어 있다. 제프리 초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고 하거나 작중 배경이 고대 테베와 아테네라는 점, 그리고 테세우스와 히폴리타가 <한여름 밤의 꿈>과 마찬가지로 등장한다는 점 등은 참고만 하면 될 뿐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테베의 크레온의 폭정을 테세우스가 징벌한다는 것도 아테네 정통론에 입각한 서사 전개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팔라몬과 아사이트가 보이는 우정과 사랑의 갈등,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의 강력함이자 동시에 바보스러움이다. 22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우정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사촌 간 혈연의 정과 우정을 갖춘 아름다운 모습이다. 크레온의 폭정에 실망하면서도 조국을 버릴 수 없어 아테네에 맞서 싸운 그들, 포로가 되어 아테네에 갇힌 처지가 차라리 죄악에 물든 테베보다도 낫다고 위안 삼는 그들은 건전한 사고와 윤리관을 지닌 인물들이기도 하다.

 

(팔라몬) 우리가 크레온의 궁정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 죄가 정의이고, 높은 나리들의 미덕이라는 것이 / 욕망과 무지가 아닌가. 아사이트, 자애로운 신이 /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 남들과 같이 불운한 노인이 되어 저승길에 가고, 누가 / 서러워하지도 않고, 비문에는 대중의 저주가 새겨질 거다. (P.61, 22)

 

22장에서 포로가 된 두 사람이 에밀리아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그들은 더는 친구이자 동료가 아니라 사랑의 경쟁자가 된다, 에밀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랑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단지 적에 불과하다. 적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분출하는 장면은 매우 낯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의외가 아니다.

 

(팔라몬)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나고,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 남자에게 인식된 것을 처음 이 눈으로 / 확인한 것도 나지. 만약 네가 그녀를 사랑하고, / 나의 소원을 망쳐버리려고 한다면, / 너는 배반자다, 아사이트, 비겁한 놈이다. / 너는 사랑할 권리 같은 건 없다, 우정, 혈통, /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모든 연결된 매듭을 포기하겠다, / 네가 그녈, 한번이라도 사랑한다면 말이다. (P.65-66, 22)

 

젊은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구애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이다. 더구나 대상이 에밀리아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다. 인류 문화가 역사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아울러 남녀 간의 사랑을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서 열렬히 찬미함은 이런 까닭이다. 극 중 대사에서도 모든 신을 지배하는 사랑의 여신을 우월성을 추앙하고 있어 이것의 당연성을 인정한다. 문제는 사랑의 호르몬의 부작용은 이것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이성과 도덕이 마비된다는 점이다. 사랑 외엔 모든 것이 맹목적으로 된다.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에밀리아는 원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팜므파탈이 되었다. 그녀는 극 중에서 남자에게 관심 없어 하는 인물인데 42장에서 갑작스레 팔라몬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대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예도 있다. 쌍방의 감정이 서로를 향한다면 좋겠지만, 일방이 바라볼 때 다른 한쪽이 등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딱한 상황이 된다. 에밀리아는 어쨌든 팔라몬과 아사이트를 외면하지 않는다. 반면 팔라몬은 교도관의 딸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여성에 불과하다. 물론 신분상의 격차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팔라몬을 향한 지고한 사랑이 보답을 받지 못하자 그녀는 광기의 지배를 받고 교도관의 딸이 보여주는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는 독자 또는 관객에게 그만큼의 아픔과 동정을 유발한다.

 

() 몹시 추워. 별들도 다 사라졌어, / 장식용 술 같이 보이던 작은 별까지 말이야. / 해님도 보았을 거야, 내 바보스런 꼴을. 팔라몬! / 아 아냐. 그이는 천국에 있어, 나는 지금 어디 있지? (P.106, 34)

 

이 작품은 통상 셰익스피어의 로맨스 희곡으로서 비희극으로 분류된다. <겨울 이야기>, <템페스트>, <페리클레스>, <심벨린>과 달리 이 작품은 비희극으로 평가하기 애매하다. 팔라몬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시련 끝에 에밀리아와 결혼하게 되므로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아사이트를 외면하기 어렵다. 아사이트는 역할과 비중 면에서 결코 팔라몬에 못지않은 공동 주인공이다. 팔라몬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에밀리아와의 결혼 권리를 쟁취한 이가 아사이트라는 점을 놓치지 말자.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덧없이 목숨을 잃고 자신의 권리를 친구에게 양보한다. 이것을 볼 때 과연 비희극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팔라몬) , 사촌! / 소망한 것을 얻으면, 소망한 것을 / 잃어야 하다니! 소중한 사랑을 / 잃지 않고서는 소중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니!

(아사이트의 유체가 옮겨져나간다)

(테세우스) 운명의 여신이 / 이렇게 교묘한 승부를 한 일은 없었다. 패자가 이기고, / 승자가 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승부에서 / 신들은 극히 공평하였다. (P.200, 54)

 

팔라몬과 테세우스의 대사는 서로 다른 감정과 해석을 보여준다. 팔라몬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테세우스는 오히려 신이 공평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에밀리아를 먼저 본 사람이 팔라몬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 사랑의 주제에서 테세우스 같은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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