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충지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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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지의 <술이기>는 위진남북조시대 남제의 대표적인 지괴소설(P.159)이다. 시기적으로는 앞서 읽은 <열이전><수신기>보다는 후대에 지어졌으며,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록된 총 95조의 고사 중 거의 대부분이 다른 책과 중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수신기>를 시기적으로 보완하는 장점이 있다.

 

초반부의 고사는 신기한 지역을 소개하는 등 박물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반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위진남북조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대체로 연도와 인물을 명기하고 있어 지괴라기보다는 당해 시기의 비사와 일화를 읽는 기분이다.

 

전대의 지괴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순괴 고사(P.126)처럼 종래의 신선, 선인 및 도사 등도 소수 등장하지만 법사, 부처님, 불경 등에 대한 언급 및 신통력이 더욱 강력하다. 백도유 고사(P.15)에서 자신이 머무는 산에 자리 잡은 법사를 쫓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산신은 방법이 통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산을 법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슬퍼하며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다. 호비지 고사(P.89)를 보면 소란을 피우는 귀신에게 맞대응한 게 무례했다고 지적받고 부처에게 귀의해야 무사할 수 있다고 한다. 나여의 부인 비씨 고사(P.155)에서 죽을병에 걸린 비씨는 오랫동안 법화경을 열심히 독송하였으니 부처의 가호로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신령과 부처가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도교보다 불교의 위력이 큼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법의 능력과 정당성을 알리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산신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법사님의 위덕이 이토록 높으시니 지금 이 산을 당신께 드리고 이 제자는 달리 의탁할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백도유, P.15)

 

이 책은 착한 귀신과 올바른 저승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다. 황묘 고사(P.60)를 보면 신령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묘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렇다 해도 괜히 30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만들고 황묘는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신령의 처사는 납득 불가이다. 진민 고사(P.133)처럼 진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그나마 깔끔한 조처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자신에 대한 약속 위반자에게 무자비한 벌칙을 내리는 궁정묘 신령은 사람들과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런 귀신이라면 굴복하기보다는 맞서 싸우고 물리치는 자세도 나쁘지 않다. 부양 사람 왕 아무개 고사(P.68)에서 귀신 산소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이름을 알려달라고 간청해도 소용없이 불에 타죽는다. 잡귀의 출몰을 목도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귀신을 끝내 물리친 박소지 고사(P.78)도 귀신에 겁먹지 않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전형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저승은 이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전의 잘못이 드러나고 처벌받는 사후세계라면 응당 엄정해야 하겠지만, 비경백 고사(P.99)에 따르면 저승사자도 인정과 대접에 약한 면모를 보이며, 뇌물도 유효적절하게 통하는 모습(영천 사람 유 아무개 고사, P.102)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승에서 유능한 관리를 저승 세계도 탐을 내 관리로 데려가고자 하는 대목(조종지 고사, P.83)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과 귀신 간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으니 유막의 연인이었던 죽은 여인 곽응의 대답을 통해 알게 한다.

 

사람과 귀신은 길이 다르니 날 생각하는 수고는 하지 마세요.” (유막, P.136)

 

귀신, 사람, 동물 구분할 것 없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상대에게 선을, 괴롭히는 상대에게 악을 베풀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충견인 황이 고사(P.23)가 전자라면, 석현도 고사(P.71)와 오고지 고사(P.146)는 후자의 사례다. 잡아먹힌 새끼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어미 개의 모성애를 생각하며 석현도의 병이 나을 수 없는 까닭을 짐작게 하며, 새끼 밴 어미 원숭이를 잔혹하게 죽인 오고지가 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호랑이가 된 태수(봉소 고사, P.20)에서 봉사군이 호랑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봉소에 대한 평가가 세인에게 좋지 않았음을 당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봉사군은 되지 말지니, 살아서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죽어서는 백성을 잡아먹는다.” (봉소, P.20)

 

마지막으로 흐뭇하고 긍정적인 내용도 하나 덧붙인다면, 비견인 고사(P.21)가 그러하다. 비견인(比肩人)은 비익조와 연리지와 같은 의미로 애정 깊은 부부를 지칭한다.

 

이 책이 더욱 특징적으로 인식되는 사유는 지은이의 독특한 배경 때문이다. 조충지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그는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과학자이자 발명가라고 한다. 원주율을 소수점 7자리 이하까지 계산하고 전문 수학 서적을 썼으며, 새로운 역법인 대명력을 제작하였고, 지남거(나침반 수레), 수대마(물레방아), 천리선(쾌속선) 등을 발명하였다고 하니 보통 능력자가 아니다. 이러한 작자가 지괴 작품을 지었으니 허투루 넘길 게 아니다. 귀신 세계의 실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바탕에 깔린 게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대체로 명계(冥界)와 인간 세계가 비록 그 존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이나 귀신이 모두 실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이한 일을 서술하는 것과 인간세계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 진실과 허망함의 구별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P.168)

 

인용한 루쉰의 발언처럼 당대인들은 귀신 세계 또는 저승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를 유치하고 야만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현대의 우리도 꿈과 환상, 이성과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많은 영역을 알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네들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가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참된 즐거움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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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비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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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록한 내용보다도 책 자체가 흥미를 끈다. 실린 고사의 수도 많지 않고 그나마 대체로 짤막한 이야기라서 후대의 것과 비교하면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최초의 지괴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참작하면 납득할 만하다. 게다가 내용 자체도 별다른 꾸밈이나 과장 없이 진솔하게 사건을 전달하고 있어 오히려 질박한 감흥을 준다. 지은이도 유명한 조조의 아들인 조비다. 동생을 괴롭히는 악역 군주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조조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다. 반대 의견도 있는데, <박물지>로 유명한 장화라는 설도 있다. 옮긴이의 의견에 따르면 원작은 조비이고, 장화가 속작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열이전>에는 귀신, 요괴, 신선, 도술, 저승, 유혼(幽婚), 기이한 물건, 재생, 변신, 민간전설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위진남북조 지괴소설의 전형적인 내용이 된다. (P.107)

 

기억에 남는 몇 편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요괴가 등장하는 고사인데, 초왕의 딸을 치료한 노소천 고사(P.16)에서 뱀 요괴가 노소천에게 대접한 음식과 돈은 모두 관청에서 훔친 것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노소천이 뱀 요괴의 제안에 응하였다면 골치 아프게 되었을 것이다.

 

주류를 이루는 유형은 귀신과 저승이 나오는 고사들이다. 죽어서 누명을 쓰자 귀신으로 나타나 자신의 누명을 벗긴 선우기 고사(P.23)는 오죽 억울했으면 대낮에 귀신이 나타나서 장부를 확인하고 상소를 올릴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장제의 아들 고사(P.49)<수신기>에도 나온 이야기인데, 저승에서도 지위 고하가 있고, 청탁의 효력이 여전하여 저승도 이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해준다. 역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명한 담생 고사(P.77)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인이 마른 뼈만 있는 하체로 어떻게 부부 관계를 하였고 아들을 낳았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우연히 신계에 들어가고 마침내 죽은 아내를 되살린 채지 고사 (P.81)도 흥미롭다.

 

신선에 대한 호기심은 당대에 널리 퍼진 듯하다. 비장방 고사가 3, 진절방 고사가 2, 채경 고사 2편이 실려있다. 초월적 존재로서 신선보다는 인간적 면모에 가까운 선인들인데, 비장방 같은 경우 주석에 따르면 스스로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신선의 부적을 얻어서 귀신을 제압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부적을 잃어버려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딱하다.

 

사슴으로 변한 팽씨 고사(P.63)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땅에 쓰러지더니 문득 흰 사슴으로 변신한다. 아버지는 무슨 까닭으로 사슴으로 변신했을까? 사슴으로 변신은 본인의 의사였을까? 아버지에게 이미 사슴의 본성이 내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슴으로 변한 아버지는 행복하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이야기다.

 

생사의 일은 쉽게 말할 수 없고, 귀신의 일은 사람이 알 바가 아니다.” (P.19)

 

죽었다가 되살아난 공손달의 혼령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인간은 귀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산자는 이승에서, 죽은자는 저승에서 각기 맡은 소임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죽은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떳떳한 마음을 지닌 포선과 자손의 영달 고사(P.31)은 이것을 보여준다. 쥐가 아무리 왕주남에게 저주를 반복해서 말해도 미동도 하지 않자 결국 쥐 자신이 거꾸러져 죽는 왕주남 고사(P.92)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열이전>은 위진남북조 최초의 지괴소설로서 후대 지괴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진 간보의 <수신기>. 현재 <수신기>에는 <열이전>의 고사 25조가 채록되어 있는데, 일부 고사는 그대로 전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래 고사보다 훨씬 편폭이 길고 구성이 짜임새 있으며 문학성이 높게 묘사되어 있다. (P.108)

 

이 책의 원서는 일찌감치 잃어버렸고, 현재는 다른 책에서 실린 이야기를 수집하여 재구성된 것으로 총 51조만 전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 자체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는 없으며 다른 책과 중첩되는 이야기들이다. 주로 <태평광기>가 출전이며, 그 외 앞서 읽은 <수신기><열선전> 등이 언급된다. 특히 <수신기><열이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확실히 <수신기>에 실린 내용이 이야기로서 세부적 구성과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 지괴의 발전을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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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기 - 신화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간보 지음, 임대근 외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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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지괴소설집이다. 지괴 설화가 다루고 있는 귀신, 신선, 도사,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거의 모든 유형의 이야기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수신기> 전체를 다 읽어볼 의도는 없었고, <수신기, 괴담의 문화사> 정도의 개략과 해설로 만족하려는 생각이었다. 막상 그 책을 읽고 나니 전체 이야기가 궁금해져 다소간 반복적이고 지루한 내용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결국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시중에는 <수신기>의 네 가지 번역본이 나와 있다. 전병구(자유문고), 임동석(동문선/동서문화사), 도경일(세계사), 그리고 이 책이다. 전병구 판과 도경일 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임동석(동서문화사) 판은 이야기 내용보다는 원문과 주석 등 한문 번역과 해석에 관심 있는 이에게 적합한 유형으로 판단되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이 책은 원문을 수록하지 않고 있으며, <수신기> 내용 자체를 현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초심자를 배려하고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신기한 일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P.9)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가 신기한 이야기 모음’(P.5) 책을 만들어 낸 까닭에 대해서는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보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에 열린 자세를 보인다. 신기한 일이 반드시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견해다. 당시의 상식과 문명 수준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먼 훗날 현실화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적지 않다. 따라서 지은이가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개연성이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그 당시 식자층의 일반적 견해에 해당할 것이다.

 

20권에 기록한 수백 편의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일화도 제법 많다. 조조와 좌자(P.31), 조조와 원소(P.441) 설화가 그러하다. 죽은 원소가 도삭군이라는 신령이 되었는데,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살아서와 죽어서 모두 조조에게 패배하는 원소가 딱할 지경이다. 공자의 이야기도 있다. 공자가 사후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상세하게 예언(P.70, P.231)하는 사례는 공자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일 것이다.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은 공자가 설화에서 천연덕스럽게 귀신과 도깨비의 이치를 설파하는 대목(P.318, P.488)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육축(六畜)과 거북, , 물고기, 자라, , 나무 등은 오래되면 신령이 붙어 요괴로 변한다. 그래서 오유(五酉)라고 했다. 오유는 오행의 다섯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요괴가 있다는 것이다. ()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P.488)

 

신기한 자연현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일식과 월식을 군주의 품행에 결부시킨다거나 가뭄과 폭우에 대해 임금 또는 지방관이 하늘에 빌거나 하는 등, 사람 또는 가축이 기형을 출산하거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남자와 여자의 성이 바뀌는 사례의 함의를 찾으려는 노력 등은 그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려는 어떤 행동에 대한 징조로 해석하고 있음을 이 책의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존재이어서다. 따라서 자연의 변괴는 인간 세상의 재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어찌 허투루 넘길 수 있겠는가. 또한 남녀관계, 신분질서, 하다못해 패션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어긋나는 현상도 역시 재앙을 가져온다. 이것이 당대인의 전통적 해석이다.

 

여러 제후와 패악한 수장들이 천자의 권위를 침탈하거나 나눠 가지면 수말이 망아지를 낳는 해괴한 일이 일어난다. 위에 천자가 없고 제후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말이 사람을 낳는 괴변이 생긴다.” (P.149)

 

음기가 극에 달해 양기로 변했으니, 이는 신분이 낮은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를 징조다.”

그 뒤 조조가 벼슬도 없는 평범한 신분에서 시작해 훗날 결국 왕업을 일으켰다. (P.184)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시대와 등장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상당한 역사적 개연성을 보여준다. 얼핏 읽으면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이니 우리가 잘 모르는 숨은 일화로 생각하기 딱 좋다. 점을 잘 치는 순우지와 곽박의 고사라든지 유명한 의사인 화타의 고사가 그러하다. 장자문, 즉 장후가 등장하는 5’의 여러 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박물지>의 저자인 장화에게 도전한 천년 묵은 여우의 비참한 최후(P.460)는 당대에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장화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신기>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다.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게 귀신이 등장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눈앞의 상대방이 귀신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귀신의 존재 여부가 과거부터 논란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귀신이 온갖 사물에 달라붙어 있음을 볼 때 애니미즘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개의 귀신이 인간을 괴롭히거나 해악을 끼치지만, 간혹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든가 하는 예도 있고 때로는 인간이 귀신을 다스리거나 심지어 잡아서 팔아먹는 고사도 있다. 인간과 귀신 간 애틋하거나 아쉬운 사랑 이야기도 전한다. 담생의 고사는 대표적이며, 특히 귀신과 결혼하는 노충(P.419) 이야기는 한편의 잘 구성된 서사를 보여준다. 인간과 귀신의 인연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데, 결혼하여 해로가 가능한 경우 결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례 아니면 인연을 맺었지만 3일 밤낮이 시한인 경우와 같이 다양하다. 주목할 점은 남자 인간과 여자 귀신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들의 은밀한 욕망과 판타지를 반영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반대의 사례는 거의 없지만 있더라도 귀신인 줄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지며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여자 인간은 수치심으로 목숨을 끊는 결말로 이어진다. 남성 중심 사회의 전통 봉건적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육신이 없고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이승의 지방관에게 호소하는 귀신도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종요의 고사(P.426)를 보면 피 흘리는 귀신도 나타나니 사람과 귀신의 경계가 모호하기조차 하다.

 

오래 묵은 동물이 사람으로 변신한다든가 신선과 귀신의 존재, 꿈과 백일몽, 죽은 사람의 부활, 기이한 자연현상, 은혜 갚은 동물 등 세인의 호기심을 끌 만한 온갖 소재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건 신기함에 끌리는 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인과응보라는 공통점은 있다. 사람, 동물, 귀신 등에 대해 친절과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게 된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개 이야기, 단장(斷腸) 고사를 낳게 한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고사를 통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다양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하는 겸양의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다.

 

억울하게 죽어 나무가 된 채 가지와 뿌리가 엉키는 상사수(相思樹)가 된 한빙 부부 고사,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을 바친 아들의 처절함이 돋보이는 간장과 막야 고사, 당대의 가치관으로서는 절대적인 하늘도 감동할 만한 효자, 효부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만든다.

 

당대에는 우주 현상을 음양오행설로 이해하던 시기였다. 음과 양의 두 정기는 오행의 이치에 따라 형상을 달리한다. , 하늘, 인간, 남자는 양이며, , , 귀신, 여자는 음에 해당한다. 만물의 형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변화한다. 당대인들이 귀신에 대해 긍정적인 연유도 이것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차면 넘치듯이 한쪽 정기가 극에 달하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이렇게 보면 인간과 귀신, 인간과 동물 등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다른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동질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 신화와 관련된 고사도 눈에 띄는데, 복희와 여와에게는 용납되었던 남매혼이 인정되지 않아 비극으로 마친 몽쌍씨(蒙雙氏) 고사(P.353)가 안타깝다. 반호 고사는 유명한데, 이 책에서는 반호의 자식들이 만이(蠻夷)임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결국 개의 자손이므로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명왕 고사(P.356)가 소개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지은이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듣거나 읽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설화집이나 지괴소설집의 내용과 중첩되는 이야기도 제법 있을 것이다. 차이점은 지은이가 단순히 이야기 기록자에 그치지 않고 뼈대를 가다듬고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살을 붙여 훨씬 이야기답게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여럿 있다는 데 있다. 아마 이 책 정도라면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진수를 감상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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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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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한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신선 70명의 사적을 기록한 열전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신선 설화집이자 신선 전기집”(P.181)이라고 하는데, 후대 신선 관련 저작의 원전에 해당한다. 해설에 따르면 저자는 전한의 유향이라는 설과 후대인의 위작이라는 설로 대립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유향은 이 책 외에도 <전국책>, <열녀전>, <설원>, <신서> 등을 남긴 유명한 저술가이므로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책의 구성을 보면, 70명의 전기는 각 몇 줄에서 한 면을 넘기지 않는 간략한 내용이다. 48구로 된 찬사가 매 편 덧붙여 있으며, 맨 뒤에는 총찬(總讚)’이라고 해서 저자 후기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책을 쓴 의도와 신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오늘날 우리는 신선(神仙) 또는 선인(仙人)은 옛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공의 신적인 존재 정도로 치부한다. 저자는 신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 다만 그가 이 책에 기록한 인물 모두를 진짜 신선으로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무에는 [......] 180여 종이나 있으며, 풀에는 [......] 장생불사하는 것이 1만여 종이나 있는데, 한겨울에 서리와 눈을 맞고도 시들지 않고 울창하다. 이러한 부류를 본다면 어찌 신선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겠는가? (P.178)

 

70명의 신선은 신농씨, 황제 등과 동시대를 살았던 적송자, 영봉자에서 시작하여 목우, 현속처럼 전한 시대의 선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은 6(노자, 여상, 개자추, 범려, 동방삭, 구익부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실존 인물의 행적이 사서의 기술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예컨대 개자추는 역사에는 산에서 불에 타서 죽는 결말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신선이 되는 결말로 미화하고 있다.

 

신선의 성별은 대다수가 남자이지만, 구익부인을 포함하여 강비이녀, 창용, 모녀, 여환처럼 여자 신선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중에서는 여환(女丸)의 사례가 주목할 만한데, 주막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방중술의 요체를 알게 된 후 여러 젊은이와 교접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선이 되는 데는 도덕성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나 보다. 방중술로 선인이 된 사례는 용성공(容成公)도 해당한다. 이처럼 신선이 되는 데 있어 성별은 물론이고, 신분상에서도 위로는 왕족에서 아래로는 서민과 거지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귀천의 제약이 없는 점에서는 비교적 평등하다고 할만하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선인을 꼽아보면, 악전(偓佺)은 장생의 소나무 열매를 요임금에게 보내주었는데, 요임금이 너무나 바빠 복용하지 못하여 장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할 때 소극적 반대를 한 무광(務光)은 훗날 백이 숙제를 연상시킨다. 육통(陸通)은 접여(接輿)와 동일인인데, <논어>에서 공자에게 봉황의 덕이 쇠퇴했다고 말한 인물이다. 계부(桂父)는 저 멀리 베트남 남부 지역 출신이며, 하구중(瑕丘仲)나중에 부여(夫餘) 호왕(胡王)의 역사(驛使)가 되어 다시 영 땅에 왔다”(P.80)라고 하여 우리 역사와 관련성을 지닌다. 안기선생(安期先生)은 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퉁소로 봉황 소리를 낸 후 봉황과 함께 날아가 버린 소사(簫史)와 농옥(弄玉)의 고사는 아름답고 애틋하다. 한편 자주(子主) 편을 보면 다른 신선의 하인이었다고 하니 신선 세상도 신분 제도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실재성과 진실성에 대한 의심의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기술된 내용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옛사람들의 은밀한 욕망과 상념을 살짝 들여다보는 흥미로움을 느끼게 된다. 신선이 되는 방법에 따라 세 가지 등급이 있다는 점, 즉 천선(天仙), 지선(地仙), 시해선(尸解仙)에 대한 설명(P.67)이 그러하다. 신선은 대개 불로장생하는 존재이지만, 신과 같이 영생하는 유형도 있는 반면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장생하는 유형도 있어 방법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신이라고 할 때, 여러 선인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부활하지만, 어쨌든 이런 점에서 신선은 신과 인간의 중간 수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선 사상은 도교에 기원하고 있는데, 황제와 노자를 자신들의 원류라고 믿기에 황로(黃老) 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70명 중에 황제와 노자가 들어있음은 당연한 까닭이다.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구하기 위해 삼신산으로 많은 사람을 보냈던 진시황과, 못지않게 신선을 찾아 헤맸던 한무제를 보면 인간의 숙명을 향한 두려움과 이를 회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다. 최고의 권력자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처지의 사람들도 수명, 지위, 신분, 빈부를 초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너무나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내재적 약점에서 비롯하거니와 믿고 꿈꾸는 동안 현실의 가혹함을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중국 민간신앙에서 도교와 신선이 인기를 끈 점이 이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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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다음 이야기 1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삼국지 다음 이야기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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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의 애독자로서 결말을 항상 안타깝게 느꼈다. 의로운 촉한이 패자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반삼국지>를 읽기도 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궁금하였다. 시중에 이 궁금증을 달래줄 마땅한 대중 역사류의 책은 마땅치 않았다. 이후 시대는 역사서에서 흔히 516국 시대니 아니면 위진남북조라고 일컫는 중국사에서 별로 인기 없는 시기였다.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지기는 과도기 정도로 여겨지는 주목 받지 못하는 때로서.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동양고전 연구자이자 번역가로서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갑자기 대중 역사서를 들고나왔다. 이 책에서 당연히 학문적 깊이와 새로운 학설 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망각의 늪에 빠져있던 위진남북조 시대에 빛을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독자의 시선과 구미에 맞도록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롭게 기술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성공적이다. 물론 읽다 보면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의 홍수와 각종 사건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을 지켜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이를 저자에게 책임 지울 수 없다. 10권 분량으로 풀어쓰더라도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격변기이자 전환의 시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혼란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본격적인 역사 서술에 앞서 저자는 제1장에서 새삼스레 시대구분을 거론하고 있다. 요컨대 516국과 위진남북조, 혹은 양진남북조라는 시대 구분명은 역사의 본질을 오도할 의도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신 저자는 서진남북조 명칭을 내세운다. 삼국 시대를 잇고 있으므로 역사 전개로 볼 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하면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용어였건만 시대구분을 통해 당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준이 바뀔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진남북조는 서진남북조로 바꾸는 게 타당하다. 사실 그래야만, , , 오 등 삼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다툰 삼국 시대와 그 이후의 서진남북조 시기가 확연히 구별될 수 있다. (P.20)

 

시대구분의 용어와 관계없이 이 시대는 일대 혼란기다. 후한 멸망 이후 당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어떤 왕조도 보통 몇십 년, 잘해야 백여 년을 겨우 버텨냈을 뿐이다. 조조가 기틀을 다진 위나라는 자손들이 사마씨에게 찬탈당했으니 역사는 반복됨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일국의 개창자 또는 중흥자는 당대의 영웅이다. 조조, 유연, 석륵, 석민[염민], 부견이 그러하다. <삼국지연의>에서 악역을 도맡아 비난받고 있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 의론이 분분함을 기억하자. 소설과 역사는 분명 다르다. 하물며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성한(成漢)조차도 나라를 세울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 있었기에 개국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 이치다.

 

문제는 영웅의 후손들이 항상 선조에 걸맞은 인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명군 뒤에 암군(暗君)이 뒤따르는 게 세상 이치다. 보통 정도만 해줘도 수성에 문제가 없을 터인데 군주 자리에 있는 자의 수준이 밑바닥에 있다면 나라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지 못하게 된다. 서진의 사마염 자신은 재위 동안 호색과 방종으로 점철하였지만, 최소한의 임금 노릇은 하였다. 그가 자신의 후계자로 자타공인 우둔한 혜제에게 물려주는 순간 서진은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평한다.

 

진혜제는 비록 암우하기는 했으나 포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광대한 진 제국을 이런 어리석은 군주 아래 다스리도록 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무제 사마염은 멀리 보는 식견이 없었다. (P.142)

 

황권을 가황후가 좌지우지하면서, 왕족들과 다툼이 생겼으며 이것이 팔왕의 난으로 이어져 결국 서진은 외침이 아닌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였다. 오랑캐의 침입은 쐐기를 박은 정도에 불과하다. 모든 조명(詔命)은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당당하게 설파하는 가황후를 통해 황권 유린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중심의 한족 주변에는 항상 유목민족이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다. 통치가 잘 이루어질 때면 평화가 이루어지지만, 혼란기에는 국경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쉽게 중원을 욕심내지 못하며 한번 휩쓸었다가 다시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유목민족이 비로소 중원에 터전을 잡고 중국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이 된 것이 서진남북조 시대다. 서진은 혼란에 빠져 제풀에 무너져 사회질서를 잡을 주도 세력이 사라졌으며, 동진은 회수와 장강으로 멀리 내려가 자기네 체제 안정과 유지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이때 흉노족, 갈족, 강족, 저족, 선비족 등은 중원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게 되어 제각기 나라를 창건했기에 ‘516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정보와 통신이 제한된 옛날에 서진이 혼란하다고 해서 유목민족들이 쉽사리 들어올 생각을 품지 못한다. 그래도 어떤 계기가 있어야 그들이 중원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언제나 야만족의 힘을 빌려 세력 다툼에 이용하고자 하는 한족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팔왕의 난이 바로 이러한 계기가 되었다.

 

도독유주제군사 왕준은 산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곧 변경 지역의 연합 세력인 선비족과 오환족의 기병들을 이끌고 동해왕 사마월의 동생인 동영공 사마등과 합세한 뒤 업성을 향해 진공했다. (P.135)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유목민족의 약진을 일대 재앙이자 흑역사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당시 유목민족이 침공했을 때 한족을 대상으로 무지막지한 살육과 탄압을 자행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석민의 무시무시한 살호령(殺胡令)의 배경이 이의 반작용이라고 해도 과언을 아니다. 기실 한족과 유목민족을 상대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인권 개념이 희박한 당대로서는 피점령민들은 노예이자 착취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동아시아의 역사가 아닌 한족의 중국사로 바라보게 하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의 역사공정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 관건은 북방 민족이 중국사의 전면에 등장해 주도권을 장악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있다. 필자가 본서를 펴낸 이유다. (P.31)

 

중국 역사를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서진남북조 시대는 새롭게 다가온다.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지리적 무대에서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다투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수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유목민족이 전 중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이의 전초가 서진남북조 시대다. 또한 결과적으로 좋건 싫건 간에 한족과 유목민족은 중원에서 한데 어울려 살게 되었다. 상이한 민족 집단 간에 교류가 발생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국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문화 발전의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호족의 문화는 한족 문화에 침전돼 있던 낡은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는 역할을 했다. 이는 훗날 수.당이 천하를 통일한 후 풍부한 사상적 기초를 닦는 근본 배경이 되었다. (P.143)

 

분열과 통일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난세의 영웅들은 진시황과 한 고조처럼 제각기 천하통일의 군주를 꿈꾼다. 전진(前秦)의 부견에 유달리 저자가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유는 그가 대업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인물인 동시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장 어처구니없이 몰락한 영웅이어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참모 왕맹이 더 살았다면 중국 역사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비수 전투의 참담한 결과는 외화내빈의 전진의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부견의 꿈은 웅대하였지만, 다민족국가를 이루고 유지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전진의 사례를 통해 주축 민족의 존재가 필요함을 더욱 깨닫게 한다.

 

야만적이지만 역동적인 북조의 왕조들과 비교해 남조의 동진(東晉)은 정적이고 유약함을 적나라하게 노정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유목민족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지 않았다면 동진은 일찌감치 몰락하고 말았을 정도로 취약한 국가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어두운 군주, 임금과 귀족 간 권력다툼, 가문의 이익과 번영을 중시하는 거대귀족 등이 어우러진 동진에서 북벌에 나선 유곤과 조적의 존재가 돋보이고, 실패로 끝났지만 환온의 수차에 걸친 마지막 시도는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왕돈이나 환온과 같은 인물이 차라리 옥좌에 올랐다면 그토록 형편없이 스스로 몰락하는 국가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돈 및 환온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동진의 무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환현의 찬위 역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에 실패로 끝났으니 유유(劉裕)와 같은 호걸을 수하로 거두고자 하는 과욕을 부렸다. 맹수를 다스리려면 스스로 그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환현이나 석륵의 일족을 도륙한 석호를 볼 때 토사구팽의 역설적 정당성을 생각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안정과 평화 속에 전열을 정비하여 통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동진, 끊임없는 내홍으로 자기 역량을 갉아 먹고 마침내 자멸하고 말았으니 100년여를 버틴 것만 해도 차라리 장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정사(正史)는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남쪽으로 쫓겨난 동진에서 바라보았을 때 북조의 소위 오랑캐 왕조들에 대한 평이 좋을 리가 없다. 한족이 기록한 역사를 맹종하게 되면 중국 역사의 이해는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통해 삼국 시대 이후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점이 커다란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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