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4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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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극은 아직 완전하게 셰익스피어의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작품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세계 학계의 공인을 받게 된 게 199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단독 창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공동 저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희곡의 국내 번역본은 신정옥과 신상웅 두 사람뿐이다. 이렇게 국내 번역본이 드문 까닭은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공인받은 게 매우 늦어서 1997년 이전의 저본은 이 작품을 수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작품과의 뚜렷한 유사성, 사용단어의 유사성”(P.161)이 있다고 인정된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백년전쟁을 일으킨 왕이고, 이 작품은 백년전쟁의 서막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일정 영토를 보유하고 있고, 결혼을 통한 왕실 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적통 왕계가 끊어지자 방계인 발로와 가의 죤을 왕으로 추대했는데, 에드워드 왕은 모친이 프랑스 왕가의 적통이므로 자신이 더 왕위계승권에서 앞서기에 왕위를 요구하면서 프랑스로 쳐들어간다.

 

(에드워드 왕) 그 놈이 찬탈한 왕관은 나의 것이라고 전하라. / 그리고 그 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굽혀야 한다고. / 내가 요구하는 것은 하찮은 공작령이 아니다, / 프랑스의 전 영토인지라. (P.19, 11)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연달아 읽다 보면 유사한 상황이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왕 vs 죤 왕의 대치는 헨리 5vs 샤를 왕과 닮은꼴이다. 여기서 아르또와는 <헨리 5>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왕의 프랑스 공격을 선동하는 역할이다. 왕권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헨리 6>의 요크 공작 리처드 vs 헨리 6, <헨리 5>의 해리 왕 vs 쫓겨난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양자가 모두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권력을 가진 왕조차도 이 사실을 일정 부분 인정한다. 어디 왕뿐이랴, 귀족이나 시민조차도 그들의 주장이 꽤 타당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왕좌에 있는 왕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왕위를 선선히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정당성이란 면에서 약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죤 왕) 에드워드, 네가 프랑스에서 갖는 권리를 알고 있다. /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왕위를 포기할 바에야, / 이 전장이 피바다가 되고, / 우리는 도살장같이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P.90, 33)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이 벌어지면 평범한 백성 대다수가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만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다. 그네들은 왕권의 정통성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네 국가를 평화롭고 살기 좋게 잘 다스려줄 수 있는 지배자를 원할 뿐이다. 그럼에도 위정자들은 자기네들의 명분과 사욕에 몰입하여 그것이 지상과제인 줄 착각한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산과 생명을 몽땅 쏟아붓더라도 옳다고 여긴다.

 

(죤 왕) 한 왕국의 통치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건 / 얼마나 몸서리치는 공포인가, 너도 알 것이다. / 대지가 아찔하게 떨 정도로 흔들리거나, / 대기가 극열한 불빛을 쏟았다가, 작열하는 것도 / 왕들이 그들의 부풀어오른 / 마음의 원한을 나타내려고 할 때처럼 / 무서운 것도 없다. (P.77, 31)

 

이 작품은 그런 끔찍한 공포를 다루고 있다. 물론 작가의 출신답게 잉글랜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극중에서 에드워드 왕은 실수도 하지만 결국은 잉글랜드의 위엄과 명예를 전 유럽에 휘날리는 영웅적 제왕으로 묘사된다. 설즈베리 백작부인을 향한 그의 무모하고 폭력적 구애는 아슬아슬한 극단 앞에서 겨우 멈춘다. 세상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심이 왕으로서 절대적 권력과 결합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으리라. 욕정에 맹목적으로 된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걸림돌이 된다면 백작도, 자신의 왕비도 제거하면 그뿐이다. 이처럼 12장에서 2막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인륜 도덕마저 무시하고 폭군으로 급전직하로 전락하는 왕과,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성군의 자질을 회복하는 왕의 모습, 그리고 그를 향한 작가의 영웅적 고양감이다. 이후로는 더는 백작부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채롭다.

 

(에드워드 왕) 일어서요. 나의 잘못으로써 당신의 명예를 드높이고, / 장차 당신의 명성을 풍성하게 할 것이요. / 나는 이제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났소. / 워릭, 내 아들, 더비, 아르또와, 그리고 오들리, / 용감한 전사들, 모두 어디 있느냐? (P.67, 22)

 

에드워드 왕의 극단적 태도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에게서도 드러난다. 적군에 포위되어 금방이라도 목숨을 빼앗길 것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그는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며 누구라도 왕자를 돕지 말도록 명령한다. 신하들의 비난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사자 새끼를 키우고 싶어한다. 물론 에드워드 왕자는 부왕의 기대에 전적으로 부응한다. 그 유명한 흑태자 에드워드이므로. 뽀와따에에서 앞서 보다 더한 수적 열세와 포위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오히려 죽음 앞에서 초연하다. 물론 독자는 왕자가 결국 승전을 거둘 것임을 미리 알고 있다. 샤를르 왕자가 언급한 예언은 잉글랜드의 승리를 암시하며, 실제로 프랑스의 패배로 확인되지 않았는가.

 

(에드워드 왕자) 나는 생명을 한 푼만큼도 치지 않을 것이다. / 아니, 엄격한 죽음을 피할 생각은 반에 반 푼만큼도 하지 않는다. / 산다는 것은 죽음을 찾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노라. / 그리고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일 뿐이니까. /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 하시는 마음에 따라갈 것이며, / 살거나 죽거나 다른 것이 없느니라. (P.127-128, 44)

 

이 작품은 전쟁 중임에도 기사도의 정신이 살아 있는 장면을 곳곳에 집어넣고 있어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삼는다. 설즈베리 백작의 포로가 된 빌리에가 샤를르 왕자의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포로가 되기를 선택하는 대목, 포위된 에드워드 왕자에게 프랑스의 왕자들이 빠른 말과 기도서를 보내주는 대목, 왕자가 발행한 통행증을 지닌 설즈베리 백작 일행을 참수하려는 부왕에게 샤를르 왕자가 왕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대목들이 그러하다.

 

이 희곡은 잉글랜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에드워드 왕자의 기도는 전승 감사 기도이며, 에드워드 왕의 평화 선언은 잉글랜드의 전승가라 할 만하다. 잉글랜드는 최대의 적인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 승전을 거두고 두 왕국의 국왕을 포로로 잡았으니. 하지만 왕은 알았을까? 그가 시발한 전쟁이 향후 백 년 넘게 이어져 잉글랜드의 미래를 파란만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줄을.

 

작품 자체가 원래 그러한지 아니면 번역자의 차이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꽤나 매끄럽게 읽힌다. 대사 자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다만, 크래씨 전투 후에 에드워드 왕과 왕자의 대화는 해석하기 모호할뿐더러 필연성도 의문시된다.

 

(에드워드 왕) 도망가는 사냥감을 조심해서 추격하여라.- / 이건 무슨 그림이지?

(에드워드 왕자) (그림을 가리키며) 페리칸입니다. 폐하. / 구부러진 부리로 자기의 가슴에 상처 내며, / 가슴에 흐르는 핏방울로 / 둥우리에 있는 새끼 새를 키웁니다. / 제명은 시크 에 보스- ‘너도 그럴 지어다입니다. (P.103-10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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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8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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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2>의 말미에서 암시되었듯이 이 작품의 내용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 즉 백년전쟁을 다루고 있다. 물론 백년전쟁의 서막은 훨씬 이전에 열렸지만, 헨리 5세 때 맹렬한 기세로 점화되었다. 헨리 5세의 정복욕을 부추긴 인물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그는 분할상속법을 언급하며 프랑스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은 현재의 프랑스 왕이 아니라 마땅히 헨리 5세에 있음을 강변하며, 프랑스로 출병할 것을 선동하고 설득한다. 11장의 서두를 보면 알겠지만 대주교의 순수한 충정만이 아님은 독자도 알고 있으리라.

 

(캔터베리) 폐하의 것을 위해 나서서 펼치세요, 폐하의 피투성이 깃발을, / 돌아보십시오 폐하의 강력한 조상님들을. (P.21, 12)

 

(해리 왕) 프랑스는 짐의 것이니 짐에게 복종시키거나 / 산산조각을 내려 하오. 짐이 그곳에 앉아, / 크고도 풍만한 왕권으로 / 프랑스 및 그녀의 모든 왕국 수준 공작령을 지배하거나 /이 뼈를 보잘것없는 단지에 묻거나 둘 중 하나요, (P.27, 12)

 

캔터베리의 유혹에 넘어간 헨리 5세는 마침내 프랑스 정벌을 결행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넘나드는 전쟁의 전개와 시간의 경과, 그리고 수많은 인물을 제한된 무대에 올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제2막부터 각 막의 첫 장을 0장으로 하여 코러스를 등장시킨다. 코러스의 역할은 시간과 공간을 축약시켜 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보충 설명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의 다른 희곡과 구별되는 이 작품의 특징이다.

 

(코러스) 이렇게 상상의 날개를 달고 우리의 장면은 날아갑니다 / 동작의 민첩함이 / 생각의 그것 못지않게. 여러분은 보았다고 가정하세요. (P.60, 30)

 

<헨리 4> 2부작의 지배자인 존 폴스타프 경을 외면할 수 없다. <헨리 42>의 에필로그에서 폴스타프의 등장을 예고하였음에도 셰익스피어는 여기에 그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의 전언을 통해 그가 중병에 걸렸음을, 그리고 끝내 죽었음을 2막에서 알릴 뿐이다. 무대를 휩쓸었던 사실상의 주인공치고는 매우 초라하고 쓸쓸한 결말이다.

 

이 희곡에서 폴스타프를 대신하여 악역 또는 해학을 담당하는 인물은 피스톨과 플루얼런이다. 전쟁에 참여한 존 경의 친구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유일하게 피스톨만 살아남는다. 극중에서 피스톨은 퀴클리와 결혼하였는데, 전작에서 퀴클리가 자신과의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폴스타프를 비난한 사실과, 피스톨과 결혼하기 전에 님과 약혼한 사이였다고 하는 걸 보면 돌 티어시트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퀴클리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피스톨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악역이다. 바돌프와 님처럼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지만 플루얼런을 욕하고 대들다 비참하게 두들겨 맞는다. 잉글랜드의 승전으로 평화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에 그는 자신의 거취와 장래를 고민한다. 어느 쪽이든 피스톨답다고 할 만하다.

 

웨일즈인 지휘관 플루얼런은 매우 우직하고 용감하며 참다운 군인이다. 그런 그가 극중에서 해학적 역할을 맡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어수룩하게 들리는 웨일즈 말투 때문이다. 그와 피스톨, 그와 윌리엄즈 간의 장면은 해리 왕도 합세하여 우스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전쟁을 다룬 작품이니만치 살인과 파괴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객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자 하는 배려라고 하겠다. 한편 36장에서 플루얼런과 피스톨의 대화는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데 이것이 원문이 그러한지 옮긴이의 선택인지 궁금하다.

 

프랑스 측에서도 묘한 여운을 주는 장면이 37장에 나온다. 부르봉 공작을 두고 오를레앙 공작과 최고관이 평하는 대화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오를레앙은 부르봉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소와 야유를 은근슬쩍 보여준다.

 

작가는 헨리 5세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당한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적국의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의 명령, 배신자를 제 꾀에 빠지게 하고 과감히 처단하는 결단력, 지치고 부족한 병력으로 결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한편 왕이라는 자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탄식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적 면모. 그리고 전장에서 병사와 장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단호한 웅변과 과감한 용기.

 

이런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승전을 낙관한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하는 법, 52장에서 카트린느 공주를 향한 그의 어설픈 구애 장면은 인간적인 동시에 영웅의 허점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다.

 

프랑스 왕의 처지에서도 한판 붙어보지 않고 선선히 자신의 왕관과 영토를 내줄 수는 없는 법. 어쨌거나 무수한 목숨의 대가로 평화는 성립하고, 양국은 결혼을 매개로 한 우호 친선의 관계로 접어든다. 사랑의 결합으로 양국의 영구한 평화를 샤를 왕, 이사벨 여왕, 해리 왕 이렇게 모두가 한결같이 희망하고 피력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실제 역사는 그것이 가능한 바람이 아님을, 권력욕은 인륜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해리 왕) 오 오늘은 제발, 생각지 말아 주소서 제 아비가 / 왕관을 빼앗으면서 저질렀던 잘못을. / 제가 리처드의 시신을 새로 묻었고, / 그 위에 흘린 뉘우침의 눈물은 더 많습니다. / [......] / 지금도 리처드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립니다. 그 이상을 하지요, (P.110-111, 41)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승리를 절실히 간구하는 해리 왕의 입에서 뜻밖의 대사가 튀어나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버지 헨리 4세가 저지른 잘못, 그리고 자신의 뉘우침의 눈물이라니. 연대순으로 전후에 위치한 <리처드 2><헨리 6>를 연결하는 복선의 구실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작가 또한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헨리 6, 강보에 쌓인 아기로 왕위에 오른 /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이 왕을 이었으나, / 국정을 좌지우지하려는 자 너무 많더니 / 그들이 프랑스를 잃고 그의 잉글랜드를 피 흘리게 한 것은, / 우리의 무대가 종종 보여 드린 대로이니-그것들로 하여, / 이 작품을 여러분께서는 좋게 보아 주시기를.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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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2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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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핫스퍼 일당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헨리 4세가 아직 반란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여기 2부에서 헨리 왕과 왕자들, 즉 헨리 왕세자와 존 왕자는 각기 반란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그리고 존 폴스타프다. 1부에서 헨리 왕세자와 존 경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물론 왕세자는 자신의 행위가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2부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양자 사이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퍼시 부인) 핫스퍼의 이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 방어력이 없던 곳에서, 그렇게 아버님은 그를 버렸습니다. (P.59, 23)

 

핫스퍼의 패배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반란세력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아버지 노섬벌랜드 백작과, 요크 대주교, 헤이스팅스 경이 핫스퍼에 합류하지 않은 까닭은 극중에서 분명치 않다. 제아무리 용맹하더라도 중과부적은 당할 수 없는 법, 모튼과 퍼시 부인이 비난 조로 말했듯 반란세력 최고의 전사를 방치한 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후에 요크 대주교와 헤이스팅스 경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류하지 않는다. 반란세력의 내부분열은 결국 헨리 왕이 각개격파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니 마찬가지. 요크 대주교와 헤이스팅스 경은 세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자신들의 사면과 요구 사항의 수용을 조건으로 항복한다. 마뜩잖아하는 모브레이 경을 다독인 결과, 그들에게 체포와 처형이 눈앞에서 기다린다. 웨스트모얼랜드 경과 존 왕자를 기만술을 썼다는 연유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전쟁은 선악과 시비로 판단할 수 없는 현상이다.

 

존 폴스타프 경의 광기 어린 난잡한 행동은 2부에서 한층 심하다. 폴스타프에게 해리 왕세자는 친구라기보다 가치 있는 어수룩한 이용대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왕세자가 없는 곳에서 그에 대한 무시와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 폴스타프의 위선은 미세스 퀴클리와의 허위 결혼 약속에서도 드러나며, 원초적 욕망을 본능적으로 좇는 모습은 창녀 티어시트와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뇌물을 받고 징집 대상자를 바꾸는 장면이라든가, 어리숙한 섈로우에게 돈을 뜯어대는 행위 등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서도 그의 부도덕성과 위법성은 더욱 강화된다. 작가는 이런 폴스타프와 어울리는 왕세자의 행동이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워릭 백작의 옹호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준다.

 

(워릭) 왕세자께서는 아주 적당한 시기 / 내팽개치실 겁니다 그 추종자들을,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 살아 있는 표본 혹은 잣대로 되는 겁니다. / 그것으로 왕세자께서 다른 이들의 삶을 평가하시는, / 전화위복이 따로 없을 겁니다. (P.129, 43)

 

어쨌든 우리는 2부의 존 폴스타프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1부에서 참신하게 다가왔던 그의 악행과 파격적 면모에 비해 2부의 그는 특별함 없는 망나니에 불과하다. 사람은 자극에 익숙해지기 쉬운 탓인가, 존 경은 달라진 게 없건만 폴스타프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초심과 같지 않다.

 

(해리 왕세자) 내가 이 쥐젖 같은 자[폴스타프]한테 곁을 허락한 건 맞는데, 애견처럼 친하게 굴게 해 주었단 말이지, 그랬더니 이자가 아예 그 자리를 뭉개고 드는군, 뭐라고 썼나 한번 보게. (P.53, 22)

 

2부에서 존 폴스타프를 향한 해리 왕세자의 감정 변화가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폴스타프 못지않게 해리 왕세자 역시 그를 향한 자신의 행위가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표출한다. 왕세자 또한 폴스타프를 이용해 먹은 셈이다. 자신의 욕망 실현과 훗날 개과천선의 극적인 기대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내심을 이미 전환한 2부에서 존 경을 향한 왕세자의 인식은 차갑기 그지없다. 특히 왕이 된 해리에게 출세를 기대하고 열렬히 달려온 폴스타프를 향한 해리 왕의 대응은 존 경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모멸감마저 느낄 정도다.

 

(해리 왕) 난 당신을 모른다, 늙은이. 기도나 하거라. / 정말 꼴불견이구나, 백발의 바보 광대라니! / 오랫동안 꿈을 꾸었지, 이런 따위 인간, / 이토록 과잉 팽창한, 이토록 늙고, 이토록 불경한 인간 꿈을, /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정말 경멸한다 나의 꿈을. (P.168, 55)

 

해리 왕세자와의 관계에 있어 폴스타프와 대조적인 인물이 있으니 수석 재판관이다. 그는 시종 폴스타프와 왕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의 법률 시행에 있어 왕세자는 특별 대상이 아니다. 솔직히 수석 재판관의 판단과 태도는 전적으로 옳다. 따라서 해리 왕세자가 해리 왕으로 즉위한 시점에서 가장 안타까움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수석 재판관이다. 해리 왕의 동생인 존 왕자와 클래런스 공작은 수석 재판관에 동정을 표한다. 그럼에도 수석 재판관은 의연하다. 자신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직위에 충실하고 왕의 제도를 준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명한다. 이쯤에서 극적인 흐름과 대중의 기호에 부응하려면 해리 왕세자의 대승적 포용이 필요하다.

 

(해리 왕세자) 그 보답으로 나는 진정 맡기겠소 경의 손에 / 때 묻지 않은 칼, 경께서 익히 지니셨던 그것을, / 이 점을 상기시키며, 경께서 바로 그것을, / 나에게 겨눴던 바로 그 용감하고, 정의롭고, / 불편부당한 정신으로 써 달라는 것. 내 손을 잡으시오. (P.155, 52)

 

이 작품은 후속작에 대한 암시를 가리키는 대목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앞서 읽은 <헨리 6> 삼부작에 따르면 프랑스에 대한 대대적 정복전을 감행한 왕이 바로 헨리 5세다. 헨리 5세의 선택은 단순한 계기와 즉흥적 충동이 아니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 헨리 4세의 충고와 왕의 열정을 이끌어낸 인물이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헨리 왕) 그러니, 나의 해리, / 너는 앞으로 들썩이는 마음들을 바쁘게 만들도록 하라, / 외국과의 분쟁으로, 그러면 부담해야 할 군사 작전이 / 지워 버릴 것이다, 예전의 기억들을. (P.142, 43)

 

(존 왕자) 내 내기를 걸겠소, 올해가 다 가기 전에, / 우리는 가져가게 됩니다, 우리 내전의 칼과 토박이 열정을 / 멀리 프랑스까지. 새 한 마리 그렇게 노래하는 것 내가 들었는데, / 그 음악이, 내 생각에, 국왕 마음에 든 듯하오. (P.171, 55)

 

이 작품은 전 5막 구성에 앞뒤로 <도입><에필로그>가 곁들인 형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에필로그는 차기작에서 폴스타프의 장래를 예고하고 있는데, 그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아래와 같이.

 

여러분께서 뚱뚱한 고깃덩어리에 너무 물리신 게 아니라면, 우리의 겸손한 작가는 존 경을 계속 등장시키고, 프랑스 미인 카트린느로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릴 겁니다. 그 프랑스에서, 제가 아는 바로는, 폴스타프가 죽게 되지요 땀을 흘리는 성병으로-여러분의 혹평으로 그가 이미 살해된 게 아니라면. (P.173)

 

하지만 후속작인 <헨리 5>에서 폴스타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전언을 통해 극중에 알려질 뿐이다. <에필로그>와 실제 후속작 간의 간극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작가는 애초 폴스타프를 한 번 더 써먹을 생각이었음은 분명하다. 1부의 열광적 호응과는 달리 예상보다 2부에서 그에 대한 반응이 썩 좋지 않자 후속작에서 아예 등장시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셰익스피어 또한 존 폴스타프의 인물과 역할이 2부에서 애매하게 변질되었음을 깨달았으리라. 해리 왕세자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냉엄한 반응이야말로 존 폴스타프가 더는 생존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원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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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1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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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계획에 따르면 <리처드 2><존 왕>을 읽어야 하는데, 전자는 도서관에 마침 책이 없어서 빌릴 수 없었고, 후자는 시대와 맥락에서 후속작과 동떨어져 있기에 <헨리 4> 2부작을 먼저 읽기로 한다.

 

이 작품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반대파와 치른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표제는 분명 <헨리 4>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헨리 4세가 아니다. 헨리 4세의 왕세자 해리가 공식적 주인공이며, 그와 대척 관계에 놓인 핫스퍼가 안티 인물로 나온다. 무엇보다 이 희곡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일무이할 정도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의 형상이다.

 

폴스타프라는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오로지 <헨리 4> 2부작과 같은 시기에 쓴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만 등장한다. ‘이라는 호칭이 붙으므로 분명 귀족 계급이라고 해야겠지만, 전혀 귀족답지 않게 배불뚝이 뚱뚱이에 애주가며, 상스럽고 탐욕이 많으며 비겁한 가운데 거짓말도 능수능란할뿐더러 강도질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법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도 떨어진다.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해리 왕세자) 폴스타프가 죽도록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 걸어가면서 야윈 대지에 기름을 뚝뚝 떨어트려 주는군. /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그렇지, 불쌍하기도 하이. (P.51, 23)

 

(폴스타프) 아다시피 아담은 순결한 세상에서 타락했어, 그런데 불쌍한 보통 남자 폴스타프더러 악행의 시대에 어쩌라는 게야? 자네 보다시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살이 더 많아, 그러니 더 유혹에 약하단 말이지. (P.113-114, 33)

 

희극적인 점을 제외한다면 사회악에 가까운 인물이겠지만, 작가가 이 인물에 쏟는 정성과 애정은 각별하다. <헨리 4>는 기실 국왕군과 반란군의 한바탕 격돌이라는 주된 사건보다도 왕세자 해리와 폴스타프, 그리고 포인즈, 바돌프, 개즈힐 등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당탕이 더욱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폴스타프 같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의 왕궁 광대와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작품 자체의 진지함에 가벼운 파문과 일탈을 줌으로써 긴장을 풀고 해방감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또한 극중 인물들이 드러내기 어려운 권력자를 향한 직언과 희롱 등을 마음껏 배출함으로써 관객에 일종의 쾌감도 선사한다. 광대의 농담 속에 일말의 진실과 예언이 포함되었음도 물론이다. 폴스타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처신하며 심지어 자신과 어울리는 왕세자에 대해서도 마구 험담을 늘어놓는다. 5막에서 폴스타프는 해리 왕세자가 죽인 핫스퍼를 마치 자신이 죽인 양 거짓과 조작을 하지만, 해리 왕세자는 오히려 그에게 너그럽게 대한다. 그런 폴스타프가 불쑥 내뱉는 진실을 담은 대사는, 비록 계기가 불순하지만 깊은 함의를 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폴스타프) 명예가 뭐지? 하나의 단어. 명예라는 단어에 뭐가 들었지? 누가 명예를 지니고 있지? 수요일날 죽은 자. 그가 명예를 느끼나? 아냐. 그가 명예를 듣냐? 아냐. 그렇다면 명예는 감지가 안 되는 건가? 그래, 죽은 자한테는. 하지만 명예가 산 자와 함께 살 수 있잖은가? 아니지. 왜냐고? 중상모략이 그걸 용납할 리 없거든. 그러므로 난 명예 따위 안 하겠어. 명예란 문장 새긴 장례식 방패에 불과해. 그리고 나의 교리문답은 거기서 끝. (P.146, 51)

 

철저히 현세적이고 쾌락 지상주의인 폴스타프와 해리 왕세자의 작당은 태생에서 이미 시한부임을 예감케 한다. 해리 왕세자의 방종과 일탈은 그의 본성적 요인보다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계획적 행위에 가깝다. 헨리 왕은 왕세자 해리에 실망하며 그가 명성 높은 핫스퍼와 차라리 바뀌었음을 바랄 정도이지만, 관객은 왕세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린다.

 

(해리 왕세자) 침침한 배경의 찬란한 금속처럼, / 나의 개과천선은, 내 잘못을 배경으로, / 보다 더 훌륭해 보이고 더 많은 시선을 끌 것이다 / 돋보이게 하는 그 무엇이 없을 경우보다. (P.22, 12)

 

3막에서 해리 왕세자는 부왕 앞에서 왕세자다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맹세한다. 무용으로 명성 높은 핫스퍼를 자신이 대적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그가 단지 방탕할 나날을 보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5막에서 해리는 핫스퍼와 맞닥뜨리며 결투를 벌여 자신의 약속을 이행한다.

 

앞서 읽은 <헨리 6> 삼부작과 <리처드 3>에서 만개했던 장미전쟁의 씨앗이 이 작품에서 배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왕세자의 부왕인 헨리 왕, 즉 헨리 4세가 리처드 3세를 추방하고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랭커스터가가 왕권을 잡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된 모티머는 졸지에 반란세력이 되었고, 왕에 대한 우스터, 핫스퍼, 노섬벌랜드 백작 등의 반대파가 헨리 왕을 증오함을 극중에서 찾을 수 있다. 훗날 요크 공작이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헨리 6세에게 반항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핫스퍼) 리처드, 그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장미를 꺾고 / 이 가시 관목, 이 자벌레 해충 같은 볼링브루크를 심었다는 얘기로? (P.31, 13)

 

이 작품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승전이 사태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 게, 아직도 막강한 반대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들을 처리해야 비로소 왕권이 단단히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왕의 일장 연설은 이를 나타낸다. 여기서 잠깐,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핫스퍼,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당한 우스터 등은 어떤 인물인가. 그들은 헨리 왕이 리처드 2세를 내쫓고 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일등공신이다. 반대파가 처음부터 헨리 왕에게 저항의 기치를 들어 올린 게 아니다.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려는 헨리 왕,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귀족층. 일시적으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합치할 수 없는 두 세력의 대결, 그것은 세계사를 통틀어 항상 반복되는 현상이다.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될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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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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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리처드 3세 왕의 비극

 

이 희곡은 연대기적으로 <헨리 6> 삼부작에 이어진다.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른 맏형 에드워드 4, 그의 치세도 왕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불안감이 조성된다. 아직 후계를 이은 왕자는 나이 어린데 왕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인척 세력의 전횡으로 기존 중신들과 갈등이 심화한다. 가슴속 야심을 깊이 숨긴 채 은인자중하던 리처드 글로스터는 서서히 야욕을 표면화시키고.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조선 왕조의 문종과 단종, 그리고 수양대군을 떠오르게 하는 유사한 상황이다. 단종은 보위에 오르지만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어 비극적 최후를 마치고, 수양대군은 권력을 위해 자신의 형제마저 죽인다. 리처드 글로스터도 마찬가지다. 대망의 달성을 위해 장애물은 철저히 제거한다. 자신의 형인 클래런스, 왕비 세력, 왕자들은 물론 자신의 반대파인 중신들까지. 리처드는 철저한 속임수로 상대를 안심시키며 은밀하게 행동을 한다. 상대는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거나 위기에 빠진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가 된다. 클래런스도, 헤이스팅스 경도.

 

(클래런스) 그럴 리 없어, 그는 내 불운을 울어 주었고, / 양팔로 날 안아 주었고, 흐느낌으로 맹세했어 / 나의 방면을 위해 애쓰겠노라고 말이다. (P.54, 14)

 

(헤이스팅스 경) 그때 난 탑으로 끌려가는 죄수 신세였지 / 왕비 일당의 사주에 의해, / 하지만 이제, 내 말해 주네만-자네만 알고 있게- / 오늘 그 원수들이 사형을 당하고, / 나는 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낫다네. (P.94, 32)

 

자고로 봉건왕조에서 서열 순위가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라면 피바람을 모면할 수 없다. 그런 행위가 사회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사례는 군주가 된 이가 어떠한 정치 행위를 남기는가에 달려있다. 이 작품에서 리처드 글로스터는 시종일관 부정적 이미지의 표상이다. 신체적으로 기형인데다 마음마저 삐뚤어지고 권력의 위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의도와 실체 중 어디가 본모습에 가까울까 궁금하다. 확실한 건 스스로 천명한 것과 달리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리처드 글로스터) 내가 연인 팔자가 못 되고 / 이 아름답고 유창한 나날에 응할 길 없으니, / 난 결심한 거야 악당이 되고 / 요즘 세상의 게으른 오락들을 증오하기로. (P.9, 11)

 

리처드는 무지몽매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때가 오자 과감하게 행동에 나섰으며, 친구와 적을 판별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였던 헨리 6세의 왕세자 에드워드의 부인이자 워릭의 딸인 앤 부인을 설득하여 아내로 삼은 까닭은 이를 통해 랭커스터 가와 워릭 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리라. 철천지원수였던 리처드에게 증오의 언사를 내뱉던 앤 부인이 서서히 리처드의 말재주에 넘어가면서 반지를 받는 대목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지만 전혀 터무니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리처드의 설득력은 대단하다.

 

그가 죽은 형 에드워드 4세의 딸, 즉 자신의 조카딸을 아내로 취하고자 애쓴 까닭 또한 요크 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것이 만약 이루어졌다면 그가 그토록 쉽사리 리치먼드에게 왕위를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왕) (방백) 난 내 형 딸과 결혼을 해야 해, / 그렇지 않으면 내 왕국은 깨지기 쉬운 유리 위에 선 꼴. / 그녀 남동생들을 죽이고, 그런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한다? / 잘될지 모르지만, 내 손에 / 묻은 피는 죄악이 죄악을 선동할 정도이니. (P.130, 42)

 

전작에서 에드워드 4세는 워릭의 명예를 손상시킨 연유로 위기에 처하고 수년을 더 고생하였다. 리처드가 버킹검 공작을 박대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역시 리치먼드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가능성이 있었다. 공통점은 일단 왕좌에 오르자 왕이라는 자리에 눈멀어 자신의 최측근이자 최고 공신을 경시하였다는 점이다. 버킹검의 의견에 곧바로 실망하고 외면하지 않고, 약속했던 권리를 이행하였다면 그는 여전히 리처드의 오른팔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직 군주의 권력이 월등히 우위에 있는 절대 왕조가 아니라 귀족과 영주의 독자성이 강하게 잔존하던 시기였음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리처드 왕) (방백) 계략이 음흉하고, 머리가 좋은 버킹검은 / 더 이상 이웃이 아니리로다 내 자문에. / 그토록 오랫동안 줄기차게 나와 보조를 맞추던 그가 / 이제 숨 돌릴 짬을 가져야겠다고? , 그러든가. (P.129, 42)

 

(버킹검)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목숨을 건 내 충성에 대한 보답이 / 이런 경멸? 내 이걸 받으려고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나? (P.133, 42)

 

리처드 3세는 모친에게조차 버림받은 인물이다. 어머니 요크 공작부인은 그를 매우 부정적이고 차갑게 대한다. 그의 신체가 기형이므로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 상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어머니임에도 그녀는 리처드의 뒤틀린 몸과 마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모르는 이라면 생모가 아니라 계모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찌 보면 리처드의 성격 파탄은 그의 어머니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생모에게 인간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누구에게서 동등한 인격적 대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리처드 3세의 비극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요크 공작부인) 피비린 자이므로, 너의 최후 피비릴 것이다. / 치욕이 너의 삶에 동반했고, 네 죽음에 시중들 것이다. (P.147, 44)

 

이 작품에서 유령처럼 출몰하며 작중 인물들을 놀리고 괴롭히며 저주를 퍼붓는 독특한 인물이 있다. 전왕 헨리 6세의 왕비인 마가릿 왕비다. 폐위되어 죽임을 당한 전왕의 부인이 아무 거리낌 없이 궁중에 드나들 수 있다는 설정은 부자연스럽고 역사적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녀에게 일종의 광대와도 같은 역할을 맡기고 저주와 예언을 퍼붓게 함으로써 작중 인물들이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독자는 이를 통해 헨리 6세의 비극이 그대로 끝나지 않고 훗날 가해자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올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마가릿 왕비) 너희 중 누가 나를 보고 떨지 않겠느냐? / 내가 왕비고 너희가 신하라서 절하며 떠는 게 아니라면, / 날 폐위시켰기에, 너희가 역도처럼 몸을 떠는 것이렸다. / (리처드에게) , 고상하신 악당, 어딜 가려구.

(리처드 글로스터) 징그러운 쭈그렁 마녀, 내 눈 앞에서 뭔 짓이냐? (P.35, 13)

 

(마가릿 왕비) 리처드가 아직 살아 있지, 지옥의 검은 염탐꾼, / 그 이유는 단 하나, 지옥의 대리인으로서 영혼을 사들여 / 그리로 보낼 임무 때문에. / 하지만 이제 곧, 이제 곧, / 벌어진다 그의 처참한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죽음이. (P.141, 44)

 

리처드 왕과 리치먼드 세력 간 일대 회전을 앞둔 55장은 리처드의 패전과 죽음이 천명임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세자 유령을 비롯하여 리처드에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꿈속에서 차례로 등장하여 리처드를 저주하고 리치먼드에 축복을 내리는 장면. 독자는 전투의 결과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 희곡은 내내 어둡고 우울함으로 가득한 분위기로 일관하다 대단원에서 갑작스레 밝고 희망찬 메시지를 던진다. 리치먼드 백작, 곧 헨리 7세 왕은 약속한 대로 자신과 엘리자베스의 결합을 공식화함으로써 장미전쟁의 상처가 마침내 아물게 되었음을 밝힌다.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의 적통의 혼인을 통해서. 이는 단순히 두 가문의 사안이 아니다. 이로써 탄생한 왕가는 모든 귀족과 영주의 지지를 받는 명분과 실력을 갖춘 왕조이며 셰익스피어가 모시던 여왕의 선조이므로 당연히 화려하고 당당한 왕조의 개창일 수밖에 없다. 비극은 끝나고 잉글랜드 전체가 기뻐하고 환호하게 될 대도약의 섬돌.

 

(헨리 7세 왕) 무디게 하소서 반역자들의 칼날을, 은총의 주님, / 이 피에 굶주린 나날들을 다시 불러 / 불쌍한 잉글랜드가 피눈물 개울 흘리게 하려는 칼날을. / 그들이 살아서 이 땅의 풍부한 농산물을 맛보게 마소서, / 아름다운 이 땅의 평화에 모반의 상처를 입히려는 그들이. / 이제 내전의 상처는 가셨고 평화가 다시 삽니다. / 그것이 이곳에서 만세를 누리도록, 하나님 아멘하소서. (P.191-192,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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