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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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킨트의 대표작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와 이 작품의 조나단 조엘 씨의 공통점은 양자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조나단의 유년 시절 전쟁 체험을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물론 부모님이 모두 끌려가 사라진 사실이 가볍지는 않지만 - 다루는데, 말미에서 다시 한번 이번에는 무겁게 다룬다.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조나단이 집의 지하실에 갇힌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점은 그의 심리 속에 깃들인 강한 영향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아니, 그것은 어렸을 때 쓰던 방이 아니라 지하실, 정말 부모님이 살던 집의 지하실 같았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P.105)

 

솔직히 처음엔 조나단의 행동이 와닿지 않는다. 일찍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자랐으며, 부정한 아내가 가출해버렸다는 사실은 동정할 법하다. 그렇다고 조나단처럼 세상과 사회를 단절하고 멀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 허름한 아파트의 조그만 자기 방을 안식처와 도피처로 삼고 애인처럼 간주하는 조나단처럼.

 

비둘기 사건은 분명 조나단에게 생경하고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결말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면 차라리 그에게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거부하고 폐쇄적인 그만의 세계의 문을 열고 사회 속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두 마디 인사 외에는 대화 자체를 꺼리던 로카르 부인에게 당당히 불만을 토로하는 조나단의 용기와 변화를 주목한다. 옷이 찢기자 원인 제공의 우유 팩을 꽉 구겨서 잔디밭이든 모랫길이든 상관도 안 하고 아무 곳으로나 휙 집어던지는행동은 이전의 그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떠나 그가 비로소 실제, 현실에 눈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 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레바퀴는 자꾸만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눈을 깜짝거릴 때마다 그 괘씸한 모서리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것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 나뒹구는 찢겨진 신문 조각이라든가, [......] (P.53)

 

조나단이 갈구하는 평화와 안온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 20년이 넘는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거리의 광경이 이제야 비로소 그에게 실체로서 다가왔다. 잇단 불운에 평온하였던 그의 심경은 불안과 자기혐오로 싹 트고 이어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로 흔들리고 일그러지는데, 겉보기와는 다르게 위험한 현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관용과 평온으로 위장한 채 거짓 삶을 살던 조나단의 가면이 벗겨지고 맨얼굴과 정신으로 실제 세상의 풍파를 마주친 놀라움과 두려움의 반응이 적절하다.

 

그의 몸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P.85)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조나단과 거지의 비교에 있다. 힘들게 세상을 버텨나가는 자신에 비해 너무나 무위도식하는 거지를 향한 시기와 분노를 갖던 조나단은 어느 날 거지의 똥 누는 모습을 목격한 후 부러워하는 일말의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공원에서 거지와 자신의 점심 식사를 비교한 후 다시금 자괴감에 빠진다. 퇴근길에 잡화상에 들러 산 저녁 식사 메뉴는 거지의 점심과 똑같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사실 비둘기는 바퀴벌레와 쥐처럼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물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새에 불과한 존재에게 조나단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는 왜 그럴까 하는 의아심만을 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신과 약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대하고 유의미한 그 무엇. 그것이 조나단에게 있어 비둘기로 촉발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하게도 조나단은 자살하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자기 집 아파트 복도는 말끔하게 치워졌고 비둘기는 사라졌다. 이웃과 세상과 단절하고 소외된 채 살아오던 조나단의 코와 귀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더는 홀로 된 존재가 아님을, 세상의 일원이 되었음을 감각적으로 일깨워주는 발견이다. 아마 그는 다시는 비둘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아래층 세대들이 있는 곳에서 일찍 깬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 문이 닫히는 둔한 소리, 낮게 틀어 놓은 라디오 음악 소리. 그리고 그에게 아주 친숙한 냄새가 갑자기 코를 찔러 왔다. 라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자 마치 직접 커피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공포가 사라져 버렸다. (P.109)

 

조나단은 주변인이다. 앞서 읽은 소설을 포함하여 쥐스킨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그러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항상 따뜻하다. 외면하고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그네들의 미묘하고 연약한 행동과 감정선의 떨림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세상에 무심히 툭 던진다. 우리는 조나단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문득 깨닫는다, 마치 이전에 없었던 현상을 처음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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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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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면 정도의 길지 않은 소설인데, 짧은 1부와 긴 2부의 구성이다. 1부는 요한네스의 탄생을, 2부는 요한네스의 죽음을 다룬다. 표제는 탄생을 아침, 죽음을 저녁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탄생이 짧고 죽음이 길다는 것은 인생이란 어차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삶은 죽음에의 전주곡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P.15)

 

이 작품에서도 포세의 문학적 스타일은 여전하다. 짧고 압축적 문장, 반복적 문구, 마침표 대신 마침표의 생략 또는 쉼표의 사용 등.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면 자연스레 리듬감을 느낀다. 문장은 완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 아 저기 저기 아 아 아 저기 아 그리고 아 우 그렇게 아 에 아에 에 아 쏴쏴 아 윙윙 [......] (P.18-19)

 

우우 오 희고 우 그리고 부드러운 오 단단하고 오 오 희고 거의 뜨거운 그리고 오 오 고요한 아이는 요한네스라고 부를 것이다 (P.20)

 

이 고요하고 고요한 소리들 쉬쉬 그래그래 쉬 아 쉬 에 쉬쉬 우 오 우 그리고 스스로 느끼며 쉬 그렇지 그리고 그 고요함 (P.25)

 

어둠, 부드러움, 평온과 적막, 그리고 고요함은 태아의 세계다. 엄마 뱃속의 세상이다. 따뜻함에서 벗어나 혼자 고요히 고요히 앞으로 나아갈 때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1부에서 특징적인 대목은 의성어의 사용이다. 작품 전체에서 아이의 탄생 장면에만 등장하는 의성어는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일반적인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다는 뜻일까.

 

신생아 요한네스는 2부에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에르나도, 서로 머리를 잘라주던 페테르도 이미 죽었다. 자녀와 손주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고, 막내딸 싱네만 근처에 살아서 가끔 들러준다.

 

2부는 늙은 요한네스가 환상과 회상 속을 넘나드는 하루의 여정을 담고 있다. 어느 날 하루를 시작한 요한네스는 뭔가 평상시와 다른 점을 느낀다. 몸이 유달리 가뿐하며, 사물도 낯설고 새롭게 보인다. 날마다 아침이면 게우던 것도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페테르와 함께 낚시하는데 루어가 물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둥둥 떠 있기만 한다.

 

페테르, 이미 오래전에 죽은 그가 눈앞에 살아있다. 의아해하면서도 요한네스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그의 몸이 여위고 머리가 희고 덥수룩한 게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와 페테르가 자신들의 아내와 처음 만나는 장면의 환상, 집을 향해 가는 길에 죽은 아내 에르나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 행복감을 느끼는 요한네스, 무엇보다 막내딸 싱네가 자신과 마주 오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이상함과 서운함을 품는다.

 

자네도 이제 죽었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를 바라본다, 그런 말을 하다니, 고약하게도, 내가 죽었다니

내가 죽었다고?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도 이제 죽은 거라네 요한네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P.128)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무엇이며 어떤 느낌과 의미를 갖는가?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이 소설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처럼 페테르는 요한네스를 죽음의 세계로 안내한다. 죽음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게끔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기게끔 서서히. 그럼에도 요한네스는 여전히 당혹스럽다. 마치 산 사람이 여행 떠나는 것처럼 이것저것 질문하니까, 페테르는 그가 아직 산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정도로.

 

작가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죽음 또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할 때 날개가 돋은 듯 가볍고 자유롭다고 한다. 이날 아침 요한네스의 공기와도 같은 투명한 가벼움은 그래서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인은 모르지만 예리한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법하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요한네스가 페테르와 함께 보내는 하루의 나날을 범상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그는 분명 오래전 페테르가 죽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페테르의 변해버린 외모를 딱하게 여길 뿐 그의 존재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노처녀 페테르센을 기다리는 것, 안내 페테르센이 요한네스의 팔짱을 끼는 장면, 일순간 그들이 환복한 채 마르타와 에르나와 첫 만남을 갖는 대목 등. 단순히 젊었던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의 회상이라고 치부하기엔 애매한 부분조차도 그는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심지어는 에르나의 출현 자체도.

 

작품의 결말부는 요한네스와 싱네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들이 길에서 마주 지나치는 순간의 섬찟한 온기와 냉기의 대조. 싱네는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와 함께 길을 떠난다. 목적지도, 어떤 장소도 아니고 이름도 없는 그 어딘가로. 삶이란 원래 그러하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사라지는 것. 모든 생명의 피할 수 없는 숙명.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P.134)

 

포세의 글은 대체로 모노톤이다. 화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침잠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는 말수가 적으며 그나마도 눌변이다. 독자는 인물의 말보다도 그의 침묵과, 말과 말 사이에 오히려 주목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과 더불어 첫인상은 생경하지만, 일단 그의 글에 맛을 들이면 저절로 몰입하게 되는 묘한 맛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작품을 썼다는 노벨문학상 선정 사유는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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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린 - 낭만주의 시대를 물들인 프리마돈나의 사랑
빌헬미네 슈뢰더 데브리엔트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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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무슨 계기로 알게 되고 읽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단기 기억력이 감퇴하는 징조이리라. 무엇보다 베토벤, 베를리오즈와 동시대 프리마돈나의 자서전이라는 점, ‘카사노바의 회상록에 버금갈 유일한 여성의 자서전이라는 아폴리네르의 말을 인용한 선전 문구 등이 끌렸다. 얼마나 짜릿하게 썼길래 19세기 중반에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을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내가 평생 고고하게 살아왔으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이런 고백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쾌감을 즐기려 했고, 또 즐겨왔던 모든 순간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P.85)

 

유럽 에로티카 문학의 걸작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적나라한 장면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 28세 이전의 성적 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노골적이고 세밀한 성적 묘사는 일체 없다. 저자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자신의 성적 호기심이 어떻게 발현되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여정과 노력, 양태가 어떤 식으로 행해졌는지를 기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대 숙녀에게 요구되는 성적 정숙을 표면적으로 위장한 채 암암리에 동성애와 이성애를 즐기는 저자의 욕구는 솔직하기에 당당한 면도 있다. 지금이야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추세지만 2백 년 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방탕에 대해서 대다수 사람과 다른 입장이다. 누구나 남녀 가릴 것 없이 자기 몸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신체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자유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P.223)

 

성의 향유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이렇다.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견해지만, 자유의사에 따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성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였던 저자는 부모님의 은밀한 부부관계를 엿보면서 성에 눈뜨게 된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소녀는 자신이 본 것의 실체를 알려고 애쓴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에도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 소녀는 훗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것의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비로소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도 어머니처럼 살고 싶었다. 항상 남편에게 참신해 보이려 애쓰면서 말이다. 남편의 공상에 응하면서 한편 욕망을 감추려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열쇠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숨기는 것 말이다. (P.98)

 

데브리엔트는 동성애를 꺼리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쾌락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동성애를 통해서다. 마르그리트, 루돌핀, 로즈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그녀는 여성에게 있어 성의 의미와 자세를 배웠으며 남성과의 사랑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즐거움을 얻고 정서적 만족도가 높았다고 밝힌다. 확실히 이성 간에는 모종의 긴장이 흐른다면 동성 간에는 훨씬 더 자유롭고 느슨한 분위기가 허용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녀는 동성애의 부도덕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다운 성은 더럽고 추잡한 개념이 없으므로.

 

저자는 오페라 가수로 성공을 거두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항상 처신에 신경 써야 했다. 겉으로는 고고하고 정숙하되, 속으로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는 그녀는 다양한 성적 모험을 경험한다. 일찍이 청년을 유혹하고, 이탈리아 왕자와 루돌핀과 함께 쓰리섬을 한다든지 마조히즘을 구경하거나 사형 장면을 지켜보고,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헝가리 산적들과 막무가내식 관계를 갖는다든지, 영국에서는 화제가 된 시간(屍姦) 소문을 듣고 경악하기도 한다. 도중에 상드와 뮈세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누군가 주장했지만, 성과 윤리는 사랑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특별한 여건에 의해 좌우된다. 이제부터 나는 이런 경험들을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한다. (P.11, <글을 시작하며>)

 

애정행각과 성적 탐닉의 모험담을 자랑하고자 아님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는 당대 사회에서 성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를 비판한다. 그토록 중요하고 성에 대해 무지하기에 많은 처녀들이 구렁텅이로 빠져든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성적 일탈에는 관대하지만 여성에게는 냉혹한 사회,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에게 올바른 성 이해는 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이브의 호기심으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으로 낙원의 문은 닫히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리기도 한다. (P.73)

 

저자는 원죄를 거부한다. 성을 통해서 인간은 더욱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숙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솔직해야 한다. 연인 내지 부부관계에서 정념과 욕정에 휩싸여 황홀을 맛보지 못한다면 누구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저자의 모험과 편력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성적 탐닉은 일개인으로서는 무해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에 만연될 때 그것은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이어짐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정당하고 떳떳한 법적 관계에서 인정받는 이성과의 성행위라면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거야말로 외설, 퇴폐, 변태 등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동의하였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회고록은 당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그 자유로움이 사회적 억압과 금기를 깨뜨리는 해방감을 여성 독자들에게 주었던 데서 연유한다고 본다. 여성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성이 숨기고 움츠려야 하는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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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기타맨 지만지 고전선집 386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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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의 희곡 작품집이다. 데뷔도 소설이고, 근래는 소설가로 더 각광받지만, 포세가 세계적 지명도를 얻게 된 바탕은 극작가로서다. ‘입센의 후계자라는 칭호는 연극 무대에서 포세가 갖는 입지를 알려준다.

 

기존 포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 글에서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으로 반복과 축약, 침묵과 사이의 공간을 언급하였다. 마침표의 부재와 쉼표의 사용, 끝없는 반복은 소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 무엇을 가리키는지 와닿지 않았다. 이제 희곡 작품을 읽으니 그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포세의 희곡은 읽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여 무대 위에서 배우가 실제로 발성하고 연기할 때 빛을 발한다. 음악적 요소의 문학화라는 특성도 실제 상연에서 두드러진다. 대사의 반복은 고저장단, 감정이 깃들어 있을 때 리듬이 발생하며, 늘였다가 줄었다가 하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짧은 사이와 침묵을 통해 이어짐과 중단을 통해 긴장과 여운이 어우러진다.

 

청년

(불안해하며)

집을 금방 못 찾았어

(짧은 사이)

하지만 결국 집을 찾아서 / 문을 두드렸는데 /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어

(짧게 웃는다)

... (P.25)

 

대사 못지않게 많은 지문은 단지 인물의 행동을 알려주는 범위를 넘는다. 작가는 대사와 함께 지문을 통해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와 진행을 이끌고 있다. 유독 많이 등장하는 “(짧은 사이)”는 기나긴 대사가 줄줄 이어지는 고전적 연극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면서, 인물의 사고와 행동이 단편적임을, 독자는 행간의 의미를 찾아야 함을 뜻한다.

 

처녀

(체념한 듯)

넌 귀담아듣는 적이 없어 / 그냥 서 있을 뿐이야 / 내가 뭘 말하면 / 넌 제대로 듣는 적이 없어 (P.34)

 

<이름>에서 독자는 등장인물 간 단절과 불통을 우선하여 발견한다. 처녀는 청년에게, 여동생은 엄마와 아빠 간, 무관심과 소통단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이다. 처녀의 엄마와 아빠는 각각 청년을 처음 만나지만 무관심하다. 후자는 아예 청년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청년이 일어서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버지는 안락의자에 앉기 전에 여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아버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청년을 의식하지 않는다.) (P.57)

 

아버지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쉽게 비난하지 말자. 그는 온종일 일에 허덕이다 지쳐서 귀가하는 가련한 인물이다. 엄마의 무심함도 마찬가지다. 그는 몸이 아파서 잠시 움직였다 다시 누워야 한다. 예비 처갓집에 와서 주구장창 책만 읽고 있는 청년도 딱하기 그지없다. 처녀와 청년이 결혼을 진정 생각하고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처녀는 어떠한가? 옛 남자친구 비아르네를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는 결코 훌륭하지 못하다.

 

떠난 청년, 뱃속 아기의 아빠인 청년을 처녀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가 돌아올까, 그럴 거라고 믿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처녀 또한 청년을 진정 사랑하거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처녀는 옛 남자친구 이름을 아기 이름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비아르네가 과연 달가워하고 동의할지 알 수 없다.

 

<기타맨>은 모놀로그다. 문득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가 떠오른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포세의 인물은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는 중년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모놀로그는 오롯이 화자 자신에 집중하는 장르다. 화자의 생각,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 모두가 철저하게 화자의 기준에 따른다. 상대역 없이 홀로 극을 이끌어가기에 모놀로그는 내면적으로 고독하다. 대체로 분량이 짧다. 길게 이어갈 극적 요소가 부재해서다.

 

기타맨은 외롭고 가난하다. 가족도 주변에 없다.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나날을 버텨나가는 정도다. 조금 전에 아내를 화장한 남성과 기타맨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다. 이 작품을 시종 관통하는 독특한 대사가 있다.

 

그런 거야 /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 말하자면 그런 거야 (P.187)

그런 거야 / (사이) / 모든 것을 위한 / 시간이 있지 (P.198)

모든 건 그 자체로 오는 것 / 생길 일은 그냥 그렇게 생기는 거야 (P.202)

 

달관적이면서 조금은 체념하는 듯한 대사. 기타맨의 비감의 정조와 함께 무기력함마저 자아낸다. 여기서 그의 삶이 이렇게 암울하게 스러져갈 것임을 예감하는 독자는 섣부르다. 그는 자신의 삶이 피동적으로 흘러감을 거부한다. 자신의 기타 줄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그에게는 일종의 단호함마저 엿보인다. 내 생은 내가 정한다.

 

끝내는 거야 /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 그것이 가져다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이제 가장 멋지게 끝내는 거야 (P.212)

 

살아생전, 이승에서는 행복과 평온을 누리지 못한 그가 이제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며, 자신의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 더 이상 기타는 필요 없고, 기타 케이스도 버린다. 우리는 기타맨의 삶을 불행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길을 주도적으로 선택하였기에 삶에 있어 그는 당당하였다. 소시민이지만 그는 비극적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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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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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3(<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주인공은 알리다와 아슬레이다. 두 연인이 고향을 떠나서 벼리빈[베르겐]으로 오기까지의 사연,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아슬레의 죽음, 이후 홀로 남은 알리다의 삶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포세 소설의 특징인 마침표 없는 문장, 쉼표로 쭉 이어 나가는 문장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표현 기법도 동일하다. 비교적 중후기에 발표한 작품이니만큼 초기작과는 달리 어색함과 맹목적 집요함을 덜고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유연성을 보이고 있어 형식과 문체에 내용이 매몰되지 않고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포세는 많은 것을 묘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단답에 그치거나 때로는 침묵으로 웅변하기에 시적이고 추상적이며 때로는 신비함마저 자아낸다. 독자는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언어와 행동의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데 외형을 좇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면의 흐름을 파악하는 건 다른 사안이다. 특히나 아슬레의 생각이 그러하다.

 

아슬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졌음을 느낀다, 중요한 건 내가 아냐, 크게 떠오르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바이올린 연주가 내게 가르쳐 주었어, 그걸 아는 게 바로 연주자의 운명이야, 크게 떠오르는 것, 나에게 그것은 알리다야 (P.77)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단연 사랑에서 찾고 싶다. 진부한 용어이지만 불멸의 주제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공간과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두 사람의 선택, 특히나 아슬레의 범법적인 행위에는 동조할 수 없다. 아슬레로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함을 우선시했겠지만, 보트하우스의 남자와 산파 노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노인과 조우하지 않았거나 차라리 노인의 요구대로 맥주 한 잔 사 주었더라면 교수형에 이르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한편으로 아슬레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과도 연결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호의적이지 않다. 두 연인은 거창한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고향의 보트하우스에서도 내쫓기고 알리다의 집에서도 냉대받는다.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서두가 비 내리는 밤에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두 사람과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대치는 벼리빈이라는 도시의 비정함을 잘 보여 준다.

 

반지를 사러 서둘러 벼리빈을 향하는 아슬레와, 일말의 불안한 예감을 품는 알리다. 그가 반지를 사고 곧바로 돌아왔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반지조차도 힘겨운 형편에 화려한 팔찌는 무모한 동시에 무의미하다. 반지는 두 사람이 결혼한 사람임을 표시해주며, 특히 임신한 알리다를 위한 방비책이라도 되지만 팔찌는? 나중에 사도 괜찮은 건 바로 팔찌였음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언가 더 귀하고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공통된 욕망이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은 비단 사마귀 수컷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도덕과 법률의 일탈, 눈부신 보화에 대한 현혹, 끝내 벗어나지 못한 금발 여인의 유혹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이처럼 <올라브의 꿈>은 근본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이라는 빛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올라브는 춥다고, 덥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그저 앞으로 걸으며 비명과 외침을 듣는다 더는 아무것도 없어, 지금 존재하는 것은 떠오르는 것뿐이야,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어, 남은 것은 떠오르는 것뿐, 내가 떠오르고, 알리다가 떠올라, 하고 그는 생각한다 (P.185)

 

그럼에도 독자는 아슬레를 비난할 수 없으며 알리다에 대한 더 없는 연민과 동정을 품게 된다. 두 연인의 운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며 알리다도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아슬레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귀하게 여기고 높이 떠받드는 것, 상대방을 위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고통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조차 아깝지 않고 세상 전부를 적으로 하더라도 꺼리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슬레의 사랑을 더없이 깊고 진한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아슬레가 나는 당신 안에도 그리고 아기 시그발 안에도 존재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그러자 알리다가 그래,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알리다는 이제 아슬레는 오직 나와 아기 시그발 안에서 살아 있는 거야, 이제는 내가 살아 있는 아슬레야, 하고 생각한다, 그러자 아슬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기 있어, 난 당신과 함께,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라고 아슬레가 말한다, (P.232)

 

사랑은 세월의 경과도 비껴감을 <해질 무렵>은 보여 준다. 알리다가 오슬레이크와 재혼해서 낳은 딸 알레스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죽은 어머니 알리다의 영혼을 집안에서 자주 맞닥뜨린다. 알리다는 오래전 스스로 바닷물에 들어간 걸로 알려져 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이승과 집안을 떠나지 못함은 무엇일까. 작가는 알레스를 알리다의 현현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바다를 아슬레로 여기고, 아슬레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옛날의 알리다와 현재의 알레스. 여기서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어 시간의 개념은 스러지며,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어둡고 그윽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지 않다. 새벽녘 어슴푸레하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불분명하고 신비로운 시간, 세상 만물이 잠들어 있고 깨어나지 않은 고요함에 휩싸인 시간. 아슬레와 알리다의 사랑과 삶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는 정서는 이것이다, 백야(白夜). 독자는 포세의 글과 문장을 통해 시와 음악의 문학적 발현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그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아내는 북구의 지리적, 기후적 특색에 서서히 스며들게 된다. 그 속에서 시시비비를 분별하고 논한다는 짓은 어쩌면 덧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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