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물고기
J.H.B. 드생 피에르 지음, 채운정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원제는 <인도의 초가집[오두막]>이며, 1790년 작이다. 이 책도 후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재출간 되었을 때는 <인도의 초가집>이라는 원제로 정정하였다.

생-피에르는 <폴과 비르지니>라는 순결한 애정소설을 대표작으로 남긴 작가로 서양에서는 꽤 유명하다. 물론 국내에서는 아는 이가 별로 없지만. <폴과 비르지니>를 읽기 위한 전초 단계로 이 책을 읽는다. 시중에서는 구판과 신판이 모두 절판 상태이다.

번역자의 약력과 겉표지 상단의 독일어 표기를 통해 이 책이 프랑스어 원전 번역이 아니라 독일어 판본의 번역본임을 알 수 있다. 출판 당시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는 거의 잊혀진 작품이라고 작품 해설에서 알려주고 있다. 이 경우는 원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번역하여 출판해 준다는 자체에 무조건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비교적 간단한 구성의 작품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도 명료하다. 영국 왕립 학회에서 진리 탐구를 위하여 파견한 한 철학자가 인도의 최고 브라만 승려를 방문하지만 실망에 싸여 돌아오던 중 폭우를 만나 우연히 몸을 피한 파리아 계급, 즉 불가촉천민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담화를 나누다가 진정한 진리와 행복의 길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이국 취향[인도]을 배경에 깔고, 인위와 허식을 배격하고 자연과 순수를 예찬하는 정신을 높게 옹호하고 있다. 그가 브라만 승려계급의 아집과 독선, 그리고 허식을 간결하지만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이에 바탕을 둔다.

반면, 파리아 계급의 한 남자를 통해 그가 찾고자 한 것, 즉 “어떻게 해야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과연 어디서 그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P.37)에 대한 해답을 깨우친다.

“인간은 순수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 진리를 자연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진리는 오로지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말할 일입니다.” (P.129)

파리아 사내는 자신의 타고난 불행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듣고 본 황제와 귀족들의 자신에 대한 노예가 되는 삶을 통해서 자유롭고 소박한 자연 속 삶의 미덕을 발견하였다.

“저는 그래서 자연보다도 더 현명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정한 법칙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지 않았죠.” (P.104)

생-피에르가 글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대체적으로 동양적 가치관에서 참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지만, 이것만이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세련된 사교계의 취향이 당대를 휩쓸던 서구에서는 미지의 신비스런 동양의 것은 감성적 호기심과 아울러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파리아 사내의 가치관이 보통의 전통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우리 선조들도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가.

오히려 작가의 도덕적 훈육보다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로 받아들여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흐뭇하게 하는 정서적 진정 효과를 만끽하면 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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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운정 2011-04-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군지 정말 글 잘써놨네요
 
나체즈 족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366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지음, 문미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유의할 점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먼저 이 책은 원작의 요약본이다.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원전의 약 34%를 발췌 번역하였다. 따라서 원전과 같은 문학적 흐름과 향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만 국내 초역인 이 작품의 개괄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그쳐야 한다.

다음으로 이 책 단독으로 읽어도 괜찮지만, 가능하면 <아탈라>와 <르네>도 같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두 작품은 작품의 독자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체즈 족>의 일부이기도 하며 배경과 사건과 인물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으로는 완전한 이해에 부족하다.

나체즈 족은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 주를 중심으로 미시시피 강 동안 중남부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인디언으로서 프랑스 군의 탄압으로 종족이 몰락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 중이던 샤토브리앙은 나체즈 족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명작을 포함한 대작을 구성하였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이국취미의 발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국 프랑스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으로 몰락하는 힘없는 피압박민족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일 수도 있다.

<르네>에서는 소홀히 취급되었던 나체즈 족에 정착한 르네의 신대륙 생활이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르네의 우울과 고뇌가 <르네>에 못지않게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어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도자라는 작가의 명성을 헛되지 않게 하고 있다.

“르네는 무료한 시선으로 자신의 은둔 생활을 둘러보았다. 그의 행복은 참회를 닮았다. 그는 사막과 한 여인과 자유를 원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소유를 망치고 있었다.” (P.85)

“나는 삶이 지겹습니다. 나를 삼킬 듯한 권태에 늘 괴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것들에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나는 기쁨이 없는 덕망 있는 자입니다...나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영원히 잊혀진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P.122)

자신에 대한 우투가미즈의 우정을 보답하고자 셀루타와 결혼하지만 그는 아무런 열정도 기쁨도 갖지 못한다. 그의 마음속에 뿌리깊은 슬픔과 우울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이 아멜리와의 이루어지지 못할 근친상간적 연정의 작용인가 아니면 프랑스 대혁명 전후 당대에 떠돌던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에 대한 작가 자신의 예민한 감성의 기인인가.

작품의 결말은 시사적이다. 르네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나체즈 족은 근거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악인 옹두레는 우투가미즈에 의해 처단된다. 르네는 그 불신앙의 처벌을 받은 것이며, 옹두레는 악의 대가를 받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나체즈 족의 불운과 셀루타의 불행은 무슨 잘못인가? 역시 불신앙과 서양에 대한 불예속의 과오의 대가인가.

이 작품은 한 고독한 프랑스인과 불운한 인디언 종족에 대한 웅장한 비극적 일대 서사시이다. 이 작품이 후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대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탈라>와 <르네>가 제대로 포함된 완역본을 읽을 수 있다면 샤토브리앙이 나체즈 족의 운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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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딸라르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
샤토브리앙 지음, 신곽균 옮김 / 새미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 샤토브리앙의 대표작 모음이다. 샤토브리앙?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당장 네이버 검색에 도움을 요청한다. 아, 안심 스테이크의 일종이란다. 샤토브리앙의 요리사가 개발하였다고 하니 샤토브리앙의 까다로운 미식가적 취향을 알 만하다.

어쨌든 국내에는 명성만이 자자한 샤토브리앙의 작품집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지만지고전천줄로 발간된 <나체즈 족>의 요약본이고, 작가 이문열의 이름을 빌린 편집판에 <르네>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샤토브리앙의 명성에 비하여 국내 소개가 미약한 연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조금씩 해소되었다.

<아탈라>와 <르네>는 <기독교의 정수>라는 총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샤토브리앙은 기독교의 호교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영광과 승리를 찬양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도 작품의 기본 입장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순문학적 의의와 가치는 논외로 하고, 작품의 제재와 작가의 주장은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우리나라의 보편적 정서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 영국에 망명하는데, 이 기간에 신생 아메리카대륙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방문하여 신대륙의 문물을 체험한다. 이때 알게 된 나체즈 족은 순진한 무지와 신앙의 영광이라는 테마를 작가에게 각성시킨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이 문학으로서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낭만주의 문학의 개시를 알리는 듯 한 우울과 알지 못할 불안의 정서가 이국적 취향과 결합되어 독자에게 묘한 설레임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문체의 특징으로 생각되는데, 정물화의 박제된 듯 한 세부 묘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듯한 역동적이고 현란하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영탄적 수법 등. 한마디로 독자를 작중 인물에 몰입시키는 능력이 대단하다.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당대에는 소위 세기병이 유행하였다고 하며, 그의 감화를 입지 않은 자유로운 작가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세 작품의 공통점은 참된 신앙 즉, 기독교의 승리다. 인디언인 아탈라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으며 샥타스의 애정에도 신에게 바쳐진 언약을 죽음으로 수호한다. 아멜리는 동생 르네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면서도 수녀원에 들어가서 신에 대한 헌신으로 생을 마친다. 그리고 마지막 아벵세라지인 아벵 하메트와 스페인 귀족의 딸 블랑카는 열렬히 사랑하지만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나 결국 아벵 하메트가 굴복하고 만다.

작가는 독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요령을 알고 있다. 선남선녀의 깨끗하지만 아슬아슬한 사랑, 엇갈리는 사랑과 신앙의 약속, 그리고 순결한 죽음과 카타르시스.

여기에는 단순한 종교적 태도 외에 갈등과 비판이 은연중에 내재해 있다. 아탈라는 굳이 독약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헌신 약속은 정당한 권위를 지닌 신부가 파기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광신적 신앙과 종교적 무지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와 아멜리의 사랑은 남매간의 근친상간적 요소라는 위험하면서도 줄타기의 재미를 제공한다. 외로운 처지의 남매간에 끈끈한 애정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은 이를 점차 인식하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당대의 가치관과 인륜에 위배된다. 아멜리의 선택은 동시대의 수많은 귀족 미혼여성들의 선택처럼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불같은 열정 대신에 물의 평온을 선택하였다.

아벵 하메트와 블랑카의 사랑은 조금 더 복합적이다. 여기에는 종교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다. 블랑카는 이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멋진 아벵 하메트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신앙은 사랑보다 우월하다. 서로는 상대가 신앙을 바꾸기를 기다리면 세월을 보내는데, 무수한 사랑의 예에서 보듯이 결국 남자가 지고 만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행복한 결합을 맺지 못한다. 각자 쓸쓸한 여생을 보낸다. 왜일까? 신앙의 차이는 극복하였지만, 조상의 직접적 원수라는 인륜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 편의 작품은 작가의 종교관을 배제하고 문학적 접근만으로도 상당한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르네>에서 전반부의 르네가 말하는 모호한 우울과 멜랑콜리는 진정 낭만주의의 선도라고 할만하다.

다만 조금 더 세밀한 번역이 뒤따랐으면 좋겠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에서 블랑카와 돈 카를로스의 관계가 누나와 남동생 관계인지 아니면 오빠와 여동생 관계인지 혼용하고 있어 작품 이해를 방해하고 있음은 용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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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노인 열림원 이삭줍기 9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열림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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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프터의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보헤미아의 숲>보다는 <숲 속의 오솔길>과 성향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서두부터 압도적인 자연 풍광이 묘사되지 않고,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소소한 일상사가 전개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두드러지게 하는 점은 대조의 미학이다. 여러 요소 간의 대비와 긴장이 주는 팽팽함은 작품 중반 이후를 끌고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작품 표제는 ‘외로운 노인’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빅토르라는 약관 남짓한 청년이며, 빅토르의 싱싱한 생명력이 전체를 휘감는 가운데 ‘외로운 노인’인 백부의 쇠잔함과 극적인 대비 효과를 보인다.

또한 빅토르는 비록 고아이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의 따뜻한 우애와 보살핌을 받으며 건전한 인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백부는 스스로 산중 호수의 섬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외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며 하인들도 믿지 않고 출입구를 비밀로 한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빅토르의 집과 백부의 것은 어떠한가. 둘 다 자연 속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에 불과하다. 빅토르 집은 인간을 오붓하게 감싸 안고 포근함을 제공하는 숲과 빛나는 햇살로 가득한 양지인 반면, 백부의 호수 집은 접근조차 어려운 깊은 산속 오지이며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산준령으로 가로막혀 있어 햇볕조차도 슬그머니 비껴가는 음지이다.

빅토르가 명에 따라 도보 배낭여행을 하면서 백부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슈티프터의 장기가 발휘된다. 즉 탁월한 회화적 자연묘사이다. 알프스 호반의 정경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주인공이 맞닥뜨리고 극복해야 할 시련의 험난함과 깊이를 암시한다. 그리고 섬에서의 하릴없는 산책과 수영을 통해 풍경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각성을 하게 되는 주인공과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조카를 성숙하고 대담한 청년으로 키우고자 하는 백부를 통해 작품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

백부가 빅토르에게 요구했던 도보여행은 조카가 안온한 품에서 뛰쳐나와 세상에 당당하게 두발로 서기를 원했던 의도였으며 빅토르는 이를 훌륭히 실현하였다.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크고 넓어졌고, 경관은 더욱더 화려해졌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온갖 만물들이 그를 환영해주었다.” (P.59)

빅토르와 한나의 결합은 암시된 예정이었다. 한나의 갑작스러운 키스, 한나를 빼닮은 루트밀라의 초상화, 그리고 귀향한 빅토르와 한나의 어색한 인사 등.

슈티프터의 글은 읽고 나면 기분이 흐뭇하고 평온해진다. 시대와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아름다운 감성을 충족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 2011. 2. 12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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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숲. 숲 속의 오솔길 대산세계문학총서 34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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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프터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상념은 그의 작품 속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그를 가리켜 ‘보헤미아 숲의 작가’라고 부르는 것에 매우 공감한다.

<보헤미아의 숲>의 서두에 수 쪽에 걸쳐 묘사된 보헤미아의 숲, 뵈머발츠의 장관은 대자연과 숲의 문학적 형상화의 일품이다. 초기에 유장한 흐름으로 전개되던 작품은 후반부에 이르러 급박한 변화를 거쳐 쓸쓸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숲 속을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연상시키며.

클라리사와 로날드의 엇갈린 사랑의 결말은 작품 중후반을 이끄는 원동력이지만, 작품 전체를 휘감지는 못한다. 그들의 애사(哀史)는 잠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지만 호수는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그들의 비애는 나무 사이로 바람이 되어 흩날리지만 숲은 바람을 가두어두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생성되고 활동하다가 소멸되는 것처럼. 자연은 인간사를 포용한다.

“거대한 숲은 서쪽으로 길게 드러누워 조용히 원시림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레고르는 숲 속의 집을 불태워버리고 그곳에 씨를 뿌렸다. 씨앗들은 단풍나무, 떡갈나무, 소나무 등 숲 속 초원에 있던 갖가지 묘목으로 자랐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들은 곧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다시 옛날처럼 울창한 원시림으로 돌아간 숲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P.134)

이 작품은 슈티프터의 숲의 찬가이다. 서두의 장대한 묘사를 제외하고도 곳곳에 아침이슬 같은 아름다움이 반짝인다. 자연의 아름다운 평온과 인간의 탐욕스러운 전쟁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힘이 생기면 심술궂고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숲은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고요한 숲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장엄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설픈 선입견으로 숲을 바라보곤 하죠.” (P.74)

“저 바깥 세상에도 전쟁의 소용돌이와 파괴가 사라져 이곳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비쳤으면 좋겠소. 화려하게 번쩍이는 암벽, 간간이 떨어지는 저 단풍잎을 보시오. 귀뚜라미는 울고, 부드러운 미풍은 여린 거미줄 하나 건드리지 않는군요. 가늘게 떨리는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잿빛 바위 위에 살며시 내려앉아 있소...” (P.103)

<숲 속의 오솔길>은 표제만 보면 <보헤미아의 숲>의 한 장으로 받아들이기 딱 좋다. 하지만 조금 더 훈훈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보다 읽는 재미가 많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자연은 인간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성숙시킨다. 속세에 물들어 바보가 되어버린 티부리우스를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킨 것은 온천장의 숲이다. 티부리우스는 숲 속의 산책과 도중에 만나게 된 시골 아가씨 마리아와의 깨끗한 만남을 통해 내면적 충일에 도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온천장의 숲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해피엔딩적 연애 이야기로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있겠지만, 슈티프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남녀 간 연애와 결혼의 소재가 아닐 것이다. 그는 숲이 가지는 올바른 치유력, 도시에서라면 일탈로 흐르기 쉬웠을 남녀간 숲 속 데이트를 티없이 맑게 이끌고 가는 정서적 순결함을 속세의 우리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언뜻 보면 비현실적일정도로 기이한 티부리우스의 삶의 모습도 후반부의 평범한 일상적 삶의 기쁨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은은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얻고자 하면 매우 추천할 만하다.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아취를 느낄 수 있다.  

- 2011. 2. 10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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