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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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슈로펜슈타인 일가>와 비교할 때 너무나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보면 확실히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천재적 소질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전작과는 월등한 성취에 도달하여 동일 작가의 작품인지 의심마저 일으킬 정도다. 독일 연극사의 3대 희극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 작품은 완벽한 희극이며, 법정극이자 심리극이기도 하다. 단 1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장면간 고조되는 박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의 절묘한 의도라고 하겠다. 확실히 초반 아담 판사의 인물을 형상화하는 부분에서 리히터 서기관과의 대화를 통해 아담 판사의 면모가 짐작된다.

항아리를 깨뜨린 범인을 놓고 벌이는 공방전은 얼핏 하찮고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은 피고 루프레히트의 약혼녀 에바의 정절과 순결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만만치 않다.

“네 명예가 이 항아리에 달려 있었던 거야...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항아리와 함께 네 명예가 깨진 거야.” (P.42)

에바의 어머니 마르테 부인은 따라서 심야에 에바의 방에 있다가 항아리를 깨뜨린 사람이 루프레히트가 되어야만 도덕적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루프레히트는 약혼녀 에바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으로 생각하고 분개한다. 에바는 명확한 해명을 주저한다.

다른 인물들의 성격이 고정되어 크게 변함이 없는 반면, 아담 판사는 극적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한다. 호색하고 욕심 많으면서도 교묘한 척 하지만 사실은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엄숙한 판사에서, 희극적 언행을 보이다가 어떻게 하면 곤경에서 벗어날까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재판을 교묘하게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루프레히트를 범인으로 몰기 힘들자 또 다른 청년, 이어서 악마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웃음과 동정이 교차하는 아담 판사의 인물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실제 무대에서는 대단히 뛰어난 배우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의 연기에 따라 극 전체의 분위기와 흥망이 좌우된다.

검열관 발터와 서기관 리히트는 사건의 실상을 밝히고 이른바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구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매우 상반된다.

발터는 모범적 검열관이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독일판 재현이라고 하겠다. 그는 아담 판사의 두서없는 태도와 모호한 행적에서 사건을 직감하고 교묘히 압박해 들어간다. 그리고 최후에 사법 정의를 선언한다.

서기관은 어떠한가? 그는 아담 판사의 하급자인 동시에 상급자 유고시 판사를 대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실제로 앞마을에서 검열관은 부정을 저지른 판사를 내쫓고 서기관을 판사로 임명하였다. 리히트는 초반부에는 온순한 듯하지만 암암리에 아담 판사를 의심하고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후반부에는 오히려 사건 심리를 주도하여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다. 하지만 새로운 판사 리히트는 과연 아담 판사보다 나은 인물일까?

“공탁금이라던가 이자 절취라던가, 그런 걸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누가 그런 데 대해서 근사한 연설을 하겠나?” (P.18)

이 작품은 아담 판사의 흥미진진한 캐릭터 변화를 지켜보는 즐거움이 넘친다. 또한 자기가 스스로를 재판하면서 범인이 아니게끔 유도하는 우스꽝스러운 시도에서 재판의 역설을 만끽한다. 그리고 아담 판사의 추잡한 에바 유혹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에바의 순결이 빛을 발하며 에바와 루프레히트가 행복한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게 한 치의 삐걱거림도 없이 맞물려서 극적 고양감을 드높이는 수법은 대가의 연륜마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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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펜슈타인 일가
배중환 엮음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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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트는 짧은 생애 동안 8편의 단편소설과 8편의 희곡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비중과 의의를 감안할 때 그의 주력은 단연 희곡이며, 괴테와 실러의 뒤를 이은 19세기 독일 최대의 극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다행히 국내에는 그의 희곡 작품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이제부터 찬찬히 그의 희곡들을 훑어나갈 계획이다. 희곡의 장르적 특성상 문자만으로 온전한 감상과 이해는 어렵겠지만 수박겉핥기나마 그와 그의 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슈로펜슈타인 일가>는 그의 첫 극작품이다. 독일 슈바벤 지역을 배경으로 슈로펜슈타인 가문의 두 가계인 로지츠 가와 바르반트 가의 갈등과 대립, 파멸과 극적인 화해를 서술하고 있다. 착상은 분명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이라는 배경 및 작가의 성향 차이로 어둡고 무거우며 긴박감을 자아내는 극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상속자가 없으면 전 재산이 다른 가계로 넘어가게 되는 오래된 상속계약은 상대방이 자신의 가계를 단절시키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낳게 되고, 이것이 우연한 사고를 오해로 빚게 하고 갈등은 증폭된다. 재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속설은 여기서도 동서양의 구분을 가리지 않는다.

오해와 증오로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 합리적 이성과 설득은 외면되고 처참한 대접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은 오토카르와 아그네스 두 가계의 미래 상속자 간에 싹튼 사랑과 행복한 결합. 하지만 사태는 그들의 사랑을 밝은 빛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만남 사실은 마지막 치명타를 날릴 좋을 기회로 인식되고 만다.

두 젊은 남녀의 죽음으로 양 가계는 극적인 화해를 하는데, 이 화해가 온전할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루페르트의 화해의 손에 질베스터는 얼굴을 돌리고 손을 내미는 장면이 이를 암시하는 게 아닐까.

제재의 선택과 긴박한 구성은 이의 없이 매우 뛰어나다. 가문간 대립과 개인간 사랑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클라이스트 특유의 갈등 증폭적인 긴박한 글쓰기 수법이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다만 우연성의 개입과 인물 대화와 행동의 과도한 비개연성이 작품에의 몰입과 깊은 이해에 역작용을 하고 있어 아쉽다.

<로베르 귀스카르>는 미완성작이다. 현재는 당초 구성에서 단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로베르 귀스카르’ 또는 ‘로베르 기스카르’는 11세기의 실존 인물로서 노르만 왕으로 당시 교황과 연계하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비잔틴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국을 세웠다. 나아가 그는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자 진격하던 중 그리스에서 병사하고 만다.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미완성작이니만큼 전체적 구조와 연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 어렵다. 다만 페스트에 발목 잡혀 귀국을 청원하는 병사들, 병마에 시달리지만 굴복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귀스카르,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는 아들 로베르와 조카 아벨라르 등 극의 재미와 긴장을 강화하는 대립적 요소들이 중첩하고 있어 편린에서나마 흥미진진함을 느낄 수 있다. 완성본이 존재했다면 어쩔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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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진일상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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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으로 서거 200주년을 맞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모음집이다. 짧은 생애 동안에 쓴 8편이 모두 실려 있다.

- 미하엘 콜하스
- O... 후작 부인
- 칠레의 지진
-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
-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
- 버려진 아이
-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 결투

일독 후 클라이스트의 작품 특징에 대한 섣부른 상념은 사건 중심의 서술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묘사가 생략되어 있거나 극히 간략하다. 오직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작품전개가 이루어진다.

더구나 단편에 장편 분량의 사건이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작품의 극적 박진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긴박한 사건전개로 팍팍하여 여유를 갖기 어렵게 한다. 또한 배경묘사 및 심리묘사 등의 부재로 사건의 미묘한 뉘앙스나 암시 등을 느끼기 힘들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골조로만 이루어진 집 같다고나 할까. 그의 글에서 풍윤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클라이스트는 사건 구성과 인물 행동도 매우 극단적이다. 살인, 방화, 교수형, 지진, 타살, 강간 등 상상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인간성의 극단적이고 어두운 면모에 대한 집착, 그의 작품은 결코 밝고 따스하지 않다. 이러한 한계상황의 설정은 인간의 본질적 면모(정신, 행동 등)는 이 순간 드러난다고 생각한 탓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실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대표작 <미하일 콜하스>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고 가정과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정의감은 콜하스를 강도와 살인자로 만들었다.” (P.7)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당한 모욕에 대해 명예를 회복하고, 미래의 시민들에게 질서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P.16)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P.32)

융커에 대한 공격 선언은 점증하는 시민의식과 체제 반동적 귀족제도 간의 갈등 심화 및 폭발을 보여주며, 미흡하나마 정의가 실현되고 자신의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믿기에 콜하스는 행복한 심정으로 단두대에 오른다.

현재의 시각에서 콜하스는 황제-제후에 대한 태생적 의존과 기존 체제의 틀 내에 안주하였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당대에 그의 급진성은 많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O... 후작 부인>은 여주인공의 고독한 양심이 인상적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순결한 그녀는 겸손하지만 의연하게 비난에 대처하며 운명적 삶을 감수하려고 한다. 섣부른 자결을 하지 않고 꿋꿋함으로 버티며, F...백작의 청혼을 거부하는 그녀에게서 20세기 이후 진취적 여성상을 예감할 수 있다.

<칠레의 지진>은 인간성의 연약성과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헤로니모의 자살 결심과 이어진 대지진 후 생의 기쁨 표현은 가식 없는 인간성의 본성이다. 한편 압도적 재난과 불행의 결과로 달라진 지진 후 사람들의 태도는 나중에 부정적 집단정신의 처참한 표출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특히 교회와 광장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비극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야수성으로, 인간정신의 부정적 극한이다.

<버려진 아이>에서 니콜로의 추악함에 치를 떨면서도 참회를 거부하고 지옥에 가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피아치에게 공감도 비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의 불완전성과, 이성과 진실에 대한 작가의 불확실성을 인식하게 한다.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과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는 어떠한가. <버려진 아이>에서 피아치를 통해 형식적 종교의례를 거부한 작가는 일변하여 오히려 신의 [무정한] 섭리를 드러낸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처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선악의 경계와 무관하지만 인간은 대항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구스타프가 토니에게 총을 쏜 원인이며, 외관상 중상을 입은 프리드리히가 멀쩡하고 가벼운 상처를 입은 야코프 백작이 종양으로 죽어가게 된 근본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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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팽 양 열림원 이삭줍기 18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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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걸작이자 마이너리티의 명작.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가로 저명한 테오필 고티에의 존재는 내게 있어 우선적으로 제라르 드 네르발의 친우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서문과 소설로 구분되는데, 서문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갖고 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불과 23세의 젊은 고티에는 나폴레옹 이후 왕정복고 시절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공리주의자들의 예술 검열을 단호히 거부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P.41)

고티에의 공리적 비평가들에 대한 공격은 화려하고 현란하며 재기발랄하다. 서문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보다도 고티에의 대담하며 재치 있고 유려한 문체에 매혹된다. 엄격하고 정연한 이성적 논리를 찾지 말자. 그것은 고티에의 영역을 벗어난다. 고티에는 비판의 화살마저도 아름답고 화려한 세공과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서문과 소설 <모팽 양>이 결합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비록 <모팽 양>은 서문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였지만 서문을 의식하고 지은 글은 아니다. 이 작품은 고티에의 평소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견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몇 가지 초점을 생각해본다.

먼저 관음증의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즐거움이다. <모팽 양>은 도덕 교사나 윤리 교사의 시각에서 볼 때 썩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주인공 달베르의 애인을 갖고자 하는 열망과 아쉬운 대로 로제트와 지내는 정사의 나날이 그러하며, 또한 테오도르 즉, 모팽 양의 남장 차림과 아름다운 미모로 로제트의 열렬한 애정의 육탄공세에 시달리는 모습이 줄타기를 하듯 펼쳐진다. 게다가 테오도르의 시각으로 여성이 보는 남성, 여성이 보는 여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것을 여과 없이 보게 된다. 마지막의 여성으로 돌아온 테오도르와 달베르의 정사 장면은 아름답고 관능적이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남장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은 외형은 어찌되었든 본질에서 있어서는 여성 동성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요즘이야 성적 소수자들의 커밍아웃 목소리가 커지면서 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상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한층 더 음지에 머물던 소재가 아닌가.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테오도르(외관상 남성)에 대한 달베르의 남성 동성애적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테오도르(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로제트의 여성 동성애적 사랑이다. 후자의 경우 물론 로제트는 한치도 모르고 있지만, 테오도르는 이를 의식하고 있으며 가벼운 부분에서는 받아들여 즐기기도 하며, 외부적 방해가 없었으면 선을 넘어갔을 수도 있다. 더구나 마지막에서 테오도르가 떠나기 전 로제트의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다는 표현은 매우 복합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온 사람들로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남성과 남성간, 남성과 여성간, 여성과 여성간에 주고받는 사상과 행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성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연인과 부부간이더라도 완전한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장 여성 테오도르가 바라보고 겪게 되는 남성 사회와 남성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은 여성에게는 충격이며 그들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식적으로 대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며, 외형상 우아하고 정중한 남성일지라도 돌아서서는 바로 술집여자를 품에 안을 정도로 흐트러지고 방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여성에게 남성은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못 된다. 이것은 남성의 본질에 대한 여성주의의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분석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고티에 자신도 예술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문체, 표현과 수사 등에서 최고로 절차탁마함으로써 더더욱 Z을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티에 작품은 매우 아름답고 한편의 아름다운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바라보는 심미안적 즐거움과 호사를 누리는 기쁨을 제공한다. 비평가가 아닌 이상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아름다움을 제쳐놓고 분석을 하려는 미련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티에의 작품은 주제의 심오함과 진지함을 고민하지 말자. 고티에의 미덕은 독자를 아찔하게 하는 빼어난 표현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에 유달리 집착하는 달베르(P.181)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테오도르가 남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는 여자와 같은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갖가지 직업의 남성을 풍자적으로 야유하는 장면(P.424)은 신랄한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테오도르가 달베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치는 연유가 되는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결코 국내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문학계와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깊은 감동과 심오한 사상을 기대한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달리 사랑받는 것이며, 주제의 진지함 대신에 구성의 경쾌함, 문체와 묘사의 탁월함, 재기와 풍자의 신랄함을 주특기로 삼는 작가가 저평가되는 것이다. 아, 물론 후자의 경우 번역상의 난점이 크다는 현실적 장벽도 무시 못 한다.

테오필 고티에를 모르는 이, 고티에를 알지만 이론가로만 알고 있는 이,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는 이,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진부하지 않으며 색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싶은 이의 일독을 권한다.

*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대체적 얄팍함에 익숙하였다면, 섣불리 이 책을 펼쳐들면 큰코 다친다. 판형도 제대로고, 분량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티에의 글은 속도감과 전혀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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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비르지니 - 그린북스 92 그린북스 92
생 피에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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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비르지니>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하다가 라마르틴의 <그라지엘라>에 비중 있게 작품내용이 소개되면서 구체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가이드북으로 삼고 있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가람기획)에도 작가와 작품소개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번역본은 참으로 구하기가 어려웠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1960년대 박영사 판(이헌구/이상로 공역)과 1980년대 청목사 판(김종건 역)이 전부다. 하지만 둘 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어 시중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웠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동안 끙끙대다가 중고서점을 통해 간신히 입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용으로 기획된 청목사 판이다.

사연이 남달랐던 만큼 무엇보다 작품내용이 궁금하였다. 비극적 결말의 순결한 사랑의 명작으로 세간에 알려진 평가가 정말로 적정한지...

작품은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 상의 당시 프랑스 식민지 프랑스 섬(현재의 모리셔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문명의 손때가 덜 탄 열대의 섬, 이는 단순한 지역적 배경이 아니라 폴과 비르지니의 순수한 사랑이 잉태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작가는 섬의 자연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일찍이 이 섬의 기행기를 썼던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

폴과 비르지니의 어머니들은 각기 프랑스 본토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섬에 흘러들어왔다. 주류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당대 사회의 패배자이며 주변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상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들과 자녀들의 삶을 꾸려나간다.

생-피에르는 계몽사상가 루소에게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인위와 겉치레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작품 내내 시종일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화자인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긍정적 인간상으로 그려진 반면, 비르지니의 어머니의 백모로 대변되는 프랑스 본국의 사람은 부정적 인간상으로 대비된다.

작품 전반부는 섬에서의 행복한 목가적 생활에 대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찬미가다. 그 속에서 폴과 비르지니의 사랑은 가족에서 연인의 감정으로 서서히 자라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소박하며 아름다운 삶을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밝고 따뜻하며 때로는 감미롭기조차 하다.

작품의 그림자는 비르지니가 프랑스로 떠나게 되면서이다. 부유한 백모에게 수년간 머물며 유산 상속을 받은 후 폴과 결혼하여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주변에서 권유한 결과다. 그 후 작품의 분위기는 급격히 어둡고 무거워진다. 프랑스로 쫓아가고자 하는 폴과 이를 만류하는 화자 간의 기나긴 대화는 세상사의 가식과 허위, 모순, 부패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비르지니가 본국에서 결코 순탄하고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리라는 것의 암시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진지한 대화이므로 오히려 전반적 작품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느낌마저 든다.

조금씩 암시를 드리우며 불길하게 예고된 결말은 마침내 비르지니가 탄 배가 폭풍우로 인하여 섬 앞에서 좌초하고, 비르지니가 거치적거리는 옷을 벗고 구조되기를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본국에서 몇 년간 교육의 결과는 그녀에게 문명인의 수치심을 목숨보다 중시하도록 만들었다.

비르지니와 가족의 비극은 그들이 그릇된 문명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순수한 자연성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폴과 비르지니가 노동을 하며 땀 흘리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만족하였다면 눈물을 웃음이 대신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태의 먼지에 물들어 삶과 사랑의 순수성에 쉽게 감동하지 못하지만 이 작품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제대로 출판되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영어판 중역이 아니라 프랑스어 원전으로 반듯한 새 번역본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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