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는 봄 (반양장) 지만지 고전선집 157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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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크 베데킨트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희곡 부문에서 소위 문제적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억압된 성(性)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작품 <눈뜨는 봄>(또는 <사춘기>)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에 대한 관심과 무지, 반면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와 교육관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춘기는 ‘제2의 탄생’ 또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릴 정도로 청소년들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신체는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정신적 성장은 아직 불완전하며, 가정과 사회적으로 그들은 미숙아로서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찬 꿈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장의 신체적 변화와 자연적 욕구의 성장에 당혹감을 품는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문화의 확산이니 성개방 풍조니 하는 일각에서 우려하는 현상도 앞서가는 서구에서도 1960년 이후에나 발생한 추세다. 따라서 이 작품이 배경을 삼고 있는 19세기 말은 전적으로 전근대적 보수적 사고관이 지배하던 시기임을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성은 무조건 감추어야 하는 것,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장 궁금한 질문, 즉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적당히 에두르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우리의 경우,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식으로.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다. 황새가 굴뚝을 통해 들어와서 아이를 주고 간다는 식으로. 그래서 벤들라의 호기심에 엄마 베르크만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국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부인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결혼 후에야 깨우친 내용이므로.

“열네 살짜리 딸한테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태양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했을 뿐이란다.” (P.138)

제6장에서 벤들라가 멜히오어와 우연한 경험을 갖게 된 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미소 짓는 걸 어머니가 보시니까. 넌 왜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난 몰라. 난 정말 몰라.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길이 마치 양탄자 같아....” (P.89)

이 형연할 수 없는 느낌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당사자들의 성적 무지와, 어른들의 허위와 가식적 도덕관이 잘못 결합한 결과다.

모리츠의 자살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교사 회의의 면면을 보자. 베데킨트는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는 어른들, 즉 교사들을 비꼬고 있다. 원숭이 비계, 몽둥이, 주린 띠, 골절상, 혀 놀림, 파리 시체, 일사병 등의 이름을 가진 교사들이 제대로 사안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들이 답답한 실내 환기를 위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설전을 보라.

벤들라는 잘못된 임신중절로 죽게 되고, 모리츠는 자살을 한다. 멜히오어는 청소년 감화원에 갇힌다. 에른스트와 핸셴은 동성애 관계를 가진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성인 중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인격을 갖춘 이는 멜히오어의 어머니 가보어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면에서 솔직하며 사실에 기반을 둔 가정교육을 한다. 그녀는 학교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을 따름이다. 아들이 남녀의 성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화원에 들어갈 중죄에 해당되는가?

다만 당대는 가보어 씨의 다음 의견이 지배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소수자의 발언으로 치부되며, 그녀의 교육관과 그 결과는 다수와 충돌한 것이다.

“멜히오어가 쓴 것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면 깊숙이 썩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골수가 상한 거예요...그 글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솔직한 의도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 자연적 성향, 부도덕한 경향 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부도덕한 것이기 때문이오...” (P.123)

멜히오어가 묘지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순간 나타난 복면의 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어 지평을 환상적인 방법으로 확대시킬 수 있도록”(P.151) 해준다고 약속한다. 즉 그에게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을 빠짐없이 알게”(P.151) 해주겠다고. 작가는 멜히오어를 죽음에 몰아넣어 완전한 비극으로 구성할 수 있었는데도 복면의 신사를 등장시켜 그를 구제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유사한 인상을 준다. 둘 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의 김나지움을 무대로 한다. 베데킨트가 좀 더 성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양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인습적인 교육의 폐해를 노정한다. 엄격하고 보수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욕망을 죄악시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그것을 억누르는데 급급하다.

여기서 양육과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되새겨본다. 자녀를 본성과 자질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발로로 유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순응적이고 보다 성공하기에 유리한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인가? 문득 이런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학부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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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지만지고전천줄 78
작자 미상, 최낙원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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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왜소한 책은 외양과 달리 스페인 문학사,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바로 스페인 문학이 창시한 피카레스크 소설, 소위 악한(惡漢) 소설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본격적인 악한 소설은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마테오 알레만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라고 한다. 다만 이 작품은 국내 번역본은 나와 있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다.

이 책은 16세기 중엽에 씌어졌는데, 주인공 라사로가 자신의 삶과 인생역정을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라사로를 ‘악한’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본격적 피카레스크와 차이점이다. 라사로는 사회 밑바닥 생활을 겪으면서도 가슴 한켠에 따뜻한 온정을 놓지 않는다. 그는 무정하고 냉혹한 악한이 될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한데도 저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는 더 가진 것도 없고, 더 가질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었으니까요. 사실 그에 대해서는 미운 마음보다는 연민이 앞섰습니다.” (P.106)

이 작품은 당대 로망스와 기사 문학이 판치던 시기에, 왕공(王公)이 아니라 평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귀족 생활의 구름 위 세상이 아니라 두 발로 단단히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겪는 사람과 사회의 모습은 결코 우아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남을 속이기를 밥보다 더 자주 먹듯이 하고(맹인, 면죄부 포교사), 인색하기가 자린고비를 능가하며(맹인, 신부), 온통 허세와 위선(하급 귀족, 수석 사제)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속세뿐만 아니라 성직 사회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성직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곳곳에 나타나 있어 한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된 적도 있다.

“주님,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살고 있으며, 주님을 위해서는 조금도 고통을 받으려 하지 않는 저들이 정말 별것도 아닌 하찮은 명예를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P.89~90)

라사로는 가난(대부분은 심한 배고픔)과 고달픈 운명을 벗어나기 위하여 인색한 주인과 속고 속이기를 거듭한다. 그에게 인생의 최고선은 기아를 벗어나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허위와 기만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옛말에도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라사로는 최소한 동냥을 했지 훔치거나 강탈하지는 않는다.

“궁핍은 항상 위대한 스승인지라 저는 밤낮없이 온통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에만 생각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P.74)
“그것은 단지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운명은 왜 그렇게도 나에게 잔인한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P.89)

라사로는 후에 포고 담당 공무원이 되어 자리를 잡고, 수석 사제의 도움으로 그의 하녀와 결혼도 하게 되어 안정된 삶에 다가선다. 비록 그의 아내와 수석 사제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에게 이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라사리요 토르메스의 파장은, 마테오 알레만을 거쳐 그 유명한 세르반테스에게까지 흘러간다. 세르반테스의 <모범 소설>과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의 작용과 반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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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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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품:
1. 단편소설 : 칠레의 지진, O... 후작 부인,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로카르노의 거지부인, 주운 아이, 성녀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미하엘 콜하스
2. 일화 : 일상의 사건, 프랑스인의 정의, 당황한 시장 외 28편
3. 우화 : 개와 새, 교훈 없는 우화, 정원사의 조건
4. 소품 :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세상의 흐름에 대하여, 숙고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
5. 편지 :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3편], 울리케 누님에게

이 책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중 극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으로도 그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조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일화, 우화, 소품 중 일부는 옮긴이의 다른 책 <헤르만의 전투>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새삼 클라이스트의 문학세계에 대해 재삼재사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소설집과 희곡집의 독서단상을 통해 기본적 문학관과 개인적 소회를 밝혀놓았다.

여기서는 그의 산문 소품과 편지에 대한 인상이 주된 관심이다. 당대 비주류의 작가 클라이스트,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영역이 이들이다.

일화로 분류된 31편의 짤막한 단편은 엄밀히 말해 문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클라이스트는 작가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동도 하였다. 여기 일화는 아마 신문 또는 잡지에 게재하기 위해 채집 내지 작성한 듯하다. 요즘도 신문에 보면 일종의 토픽이나 해외화제 등의 흥미로운 단편소식을 전하는 코너가 있는 것처럼.

소품 중에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와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이 비교적 유명하다. 다만 <독일인의 교리문답>은 당대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클라이스트의 일면을 보고, 그의 애국적 작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유익하지 현시점에서는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완전한 생각과 구상이 아니라 모호한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함에 따라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틀을 이룬다는 견해이다.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에 그 모호한 생각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놀랍게도 인식은 복잡한 부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을 이루게 된다네.” (P.363)

“마음에 있는 생각을 진짜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그 표현은 나란히 진행되어 가고, 정신 활동은 그 양자에 똑같이 호응한다네. 이 때 언어는 정신의 바퀴에 붙은 제동기와 같은 족쇄는 아니고, 정신의 바퀴와 병행하여 달리는 동일한 차축에 붙은 제 2의 바퀴와 같네.” (P.36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독창성이 아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누구나 최소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론 보다는 그가 내세우는 예증이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미라보의 사례와, 라퐁텐의 한 우화를 언급하고 있다.

<인형극에 대하여>는 작가와 인형극에도 열성적인 오페라 수석 무용수 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에 따르면 인형극은 간단한 조종만으로도 우아하며 리드미컬한 동작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동작 간에 불필요한 휴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예찬한다.

작가는 그의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의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방해한다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와 무용수는 각자 자신의 체험담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미를 이렇게 장식한다.

“우아함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이거나 또는 무한한 의식을 가진 인체에, 다시 말하면 인형이거나 신에게 가장 순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식의 나무 열매를 다시 한 번 더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것이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입니다.” (P.383)

클라이스트가 평생에 걸쳐 사랑과 우정을 쌓았던 여인은 세 명이다. 전 약혼녀, 그리고 이복누나 울리케, 자신을 잘 이해해주던 친척 마리. 여기에는 그들에게 썼던 서신들을 짤막하게 수록하고 있다.

먼저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클라이스트의 작품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그 유명한, 소위 ‘칸트 위기’를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혹은 그저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소...나의 유일한 최고 목표는 사라졌소. 나는 이제 다른 목표도 없소...” (P.406)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자살을 감행하기 며칠 전과 당일의 기록이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삶의 욕구를 포기한 자신을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동반자 포겔 부인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는 인생을 체념한 자에게만 엿볼 수 있는 편안함과 경쾌함마저 배어나 씁쓸하기조차 하다.

금년은 클라이스트 서거 200주년의 해다. 그는 사후 서서히 재평가 받아 오늘날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에 견주는 대작가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 그의 성가는 미미하다. 그의 작품은커녕 이름조차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사와 작품 특성 상 단시일 내에 국내에 인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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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테질레아 지만지 고전선집 660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이원양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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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1년 클라이스트 사망 10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역이다. 하반기에는 연극 공연도 이루어질 계획이라니 무척 관심 깊다.

작품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두고 있다. 아킬레스[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그리스 군이 승세를 올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인족 군대가 질풍같이 달려들어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을 모두 공격한다.

극은 여인족 군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들의 가공할만한 공격력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아마존 여인군은 연합을 모색하는 트로이군을 격파한 후 그리스군에 도전하여 그들의 여왕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와 결전을 벌인다.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아킬레우스와 그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펜테질레아. 두 남녀 영웅의 대결을 다시 이어지고 아킬레우스는 펜테질레아를 쓰러뜨리고, 그리스군은 아마존 여인군에 강력한 반격을 펼친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펜테질레아의 안정을 위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패배한 것으로 위장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때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그리스군을 공격하는 이유를 밝힌다. 역공을 펼친 여인군으로 그리스군이 다시 패퇴함에 따라 아킬레우스는 싸움의 진실을 밝히고 남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고집 피우다 헤어진다. 아킬레우스는 여왕과 재대결을 요청하고 일부러 싸움에 질 생각이나, 여왕은 오해와 집착으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나중에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 뒤를 따른다.

단막의 전 25장으로 이루어진 극은 발단의 정체모를 여인군의 등장과 그들과의 전투장면을 관찰자의 시각에서 전언 형태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중간도 이따금씩 그러하다가 결말 부분 역시 발단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무대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재현하기는 용이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존 여인국에 대한 설화는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다. 작가는 스키타이, 즉 오늘의 카프카즈를 아마존 국으로 설정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최후에 관하여는 파리스의 화살에 죽었다는 설 외에, 아마존 여인족과 관련되어 죽었다는 설도 존재하는데, 클라이스트는 후자의 가설을 극화한 것이다. 아마존은, 가슴이 없는 여인들이란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 없는 여성들만의 국가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활을 잘 쏠 수 있도록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었다. 그들의 본질은 남성의 독재와 횡포를 벗어나 평화와 온화함을 희구함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살육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극중에 계속 반복되는 ‘장미 축제’로 알 수 있듯이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초적 목적에 근거한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의 관계는 처음에 적대적 대결자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는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전투에 나서고, 펜테질레아는 그를 알지만 그를 꺾으려고 한다. 따라서 대결 장면은 긴장이 팽배하여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아킬레우스는 후에 펜테질레아에게 전사이자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거짓 패배로 둘 사이의 관계는 온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극단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신이다. 전사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그들. 특히 펜테질레아는 자신이 쓰러뜨린 남성을 파트너로 삼아야 하기에 더욱 필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외양만 달리할 뿐 본질상 그들은 동일하다. 여자를 데리고 그리스로 가고자 하는 아킬레우스, 남자를 데리고 테미스키라로 가고자 하는 펜테질레아. 그들은 타협하지 못한다.

여기서 펜테질레아의 돌변하는 인격 변화가 흥미롭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꽃답고 아리따운 처녀로서 언행에 있어 모범적이었음이 결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고 격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그녀의 아킬레우스에 대한 사랑은 외골수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남성을 갈구하는 일개 동물적 여성으로 타락한다. 이는 그녀의 거친 욕설과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이는 아마존 여인족의 본성과 배치되며, 그들의 신의 뜻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극중의 그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지칭이 여왕에서, 미친 여인, 암캐로 점점 추락하며,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예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디아나]의 관계로 비정하며, 펜테질레아의 광란성과 야수성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열광하는 여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왕이자 아들이며, 동생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일화와 연계한다. 또한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우연히 엿보게된 불행한 악타이온의 최후도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멀지 않다. 이는 작가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정말로 미래를 선취한 극작가이다. 고전주의가 득세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의 격동성, 실존주의의 치열한 존재에 대한 의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풍성하다. 후대 작가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를 선구자로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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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부르크 왕자 - 클라이스트 희곡선집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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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품:
암피트리온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홈부르크 왕자

세 작품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유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는 아니다.

클라이스트는 극을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하게 이끌어간다. 그래서 감초 역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극 분위기는 결말을 알 수 없이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래서 독자는 해피엔딩이면서도 환호의 박수를 쉽사리 보내지 못하며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만다. 그것이 클라이스트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암피트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배경을 두는데, 제우스 신이 남편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남편으로 변장하고 부인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후일 태어난 아들이 유명한 영웅 헤라클레스가 된다.

작가는 여기서 남편 변장의 주피터 신과 진짜 남편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부부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또한 암피트리온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진다. 나아가 선의의 인간이 전능한 신 앞에 무력해지는 장면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도 드러낸다. 즉 단순한 신화극이 아닌 것이다.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와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는 주피터 신의 개입으로 파탄으로 이어진다. 주피터 신의 한때의 유희로 인간 사회와 가정은 절대적 위기 상태에 이른다. 남편의 의심을 자신에 대한 불신과 남편의 식어버린 애정으로 오인한 아내 알크메네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크메네는 진짜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한 주피터 신을 선택하는데, 과연 남편을 몰라보았는지 의문스럽다. 변장한 주피터 신은 끊임없이 자신이 암피트리온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알크메네의 마지막 대사 “아!”와 긴 탄식은 자신의 배반이 무위로 돌아갔음과 주피터 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음에 대한 크나큰 절망의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암피트리온 구분하기.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수단은 너무나 미약하다. 외모, 언행, 습관, 기억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동일한 다른 존재가 자신임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나 자신이 틀림없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확신, 그것은 외부로 보여주어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나아가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나를 나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에서 볼 때 무수한 관계로 형성된 상대적 평가의 산물이다.

암피트리온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는 테베의 왕으로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영웅이다. 그는 아내에게도 헌신하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저항할 수도 없는 외적 요인에 의하여 지위와 가정, 자신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날 운명에 처하였다. 주피터 신이 그나마 돌아갔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여생은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한 주피터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제 종전과는 동일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와 신에 대하여 더이상 믿지 않는다. 그에게는 절대적 단독자의 순간에서 겪게 된 개체적 고독만이 남아있다.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순결한 소녀 케트헨은 어느 순간 슈트랄 백작을 보자마자 자석에 이끌린 듯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발뒤꿈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거나 먹고 한데서 잠을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은 슈트랄 백작이 케트헨에게 마법을 걸어 유혹했다고 케트헨의 아버지가 고발을 하여 비밀재판을 열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중세풍을 물씬 풍기는 설정이자 배경이다.

슈트랄 백작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는 황제의 딸과 혼인하게 되리라는 예지몽의 실현을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과 토지 문제로 갈등을 겪는 투르네크 가문의 쿠니군데를 우연히 위험에서 구해주고, 그녀의 가문이 작센 황제 가문의 방계 후손이라는 점에서 꿈의 실현으로 오인한다.

극은 여기에서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쿠니군데가 사실은 마녀라는 점과 케트헨이 실제로 황제의 딸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실로 중세 동화적 사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황녀 케트헨은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달성하게 되고 쿠니군데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 퇴장한다. 선인은 복을 많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결말이 확연하다.

그런데 케트헨은 어찌보면 노력의 결실만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과 고난은 감탄과 안쓰러움을 갖게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딸이 된 것은 우연적 요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즉 순전한 개인적 성취는 아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용어대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데 지나지 않는다.

극에서 이런 우연성의 발현에 대하여 클라이스트는 일단 케트헨의 인물을 상찬하여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리며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대중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반면 너무나 확연한 우연성을 제시하며 외부에서 행운이 주어지는 고전적, 중세적 가치관을 슬며시 재고하게 만든다.

<홈부르크 왕자>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한마디로 문제적 작품이라고 평할 만하다. 여기에는 클라이스트가 길지 않은 생애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거의 모든 테마가 함축되어 녹아들고 있다. 따라서 이해부득하기조차 한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전개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데,  작가는 자신의 최후작을 독자들이 가볍게 넘기는 것을 싫어하였던 듯 하다.

작품의 커다란 골격은 법질서의 준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대립이다. 홈부르크 왕자는 스웨덴 군과의 전투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병력을 움직이는 말라는 선제후의 명령을 거역하고 뛰어들어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명령 불복종의 사유로 재판을 열어 왕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한다. 여기서 의견이 상충한다. 국가와 군의 골격을 이끄는 법질서의 우위를 주장하는 선제후와 명령 위반은 인정되지만 이를 뛰어넘는 탁월한 전과를 더 크게 인정하자는 왕자와 신하들의 주장.

“그는 법이 지배하든, 자의가 지배하든 우리 조국엔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P.271)

“나는 우연히 생겨난 사생아처럼 찾아오는 승리를 원치 않는다. 나에게 승리의 건강한 자손을 낳아주는 내 왕관의 어머니인, 법을 지지한다.” (P.291)

“적이 자기들의 군기를 내동댕이치고 폐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적을 격파하기 위한 규칙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군을 격파한 규칙이 바로 최고의 규칙입니다!” (P.291)

이는 오늘날도 곱씹을만한 소재가 아니던가. 결과가 좋으면 과정(절차)에 잘못이 있어도 문제없다는 결과론자와, 과정의 적법성에 무게를 두는 과정론자.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절차를 중시하여 최선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를 피하려는 장치다. 그럼에도 결과만 좋으면 그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는 사후 결과를 가지고 사전의 행동 및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성공적 결과는 잘못을 판단할 때 참작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 이성의 결론이다. 그런데 홈부르크 왕자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며 이성과 비이성을 방황한다. 그런 그에게는 ‘마음의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원 참 코트비츠 대령! 당신은 왜 그렇게 천천히 말을 몹니까? 당신은 공격하라는 마음의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까?” (P.240)

“선제후께서는 의무가 명하는 대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P.257)

홈부르크 왕자도 죽음이 명백한 절대적 순간에는 삶을 애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솔직해진다고 한다. 목숨이 갈리는 상황에서 체면이고 허위도 부릴 여유가 없다. 여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통렬한 진실, 즉 생명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만약 법률이 그러하다면 저를 파면시켜 군에서 추방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제 무덤을 본 이래로, 저는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명예로운지 어떤지는 결코 묻지 않겠습니다!” (P.265)

이제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왕자. 그는 이미 삶을 단념하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 선제후의 제안, 만일 그가 판결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파기하겠다! 그를 풀어주겠다!(P.272)는 여전히 매우 해독하기 어렵다. - 마음의 명령에 따른다.

“아, 영원불멸이여, 너는 지금 완전히 내 것이야!...내 양쪽 날개에 날개가 솟아남을 느낀다. 내 정신은 고요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P.302)

이제 그에게 삶과 죽음은 더이상 둘이 아니다. 그는 절대적 순간에 자신에 이르는 각성을 통해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였다.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꿈꾸는 홈부르크 왕자로 시작한 드라마는 새로운 꿈을 꾸는 대단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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