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살라메아 시장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9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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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칼데론 극작 세계의 한 중요한 축이었던 성찬신비극에 속한다. 성찬신비극이란 성서를 기반으로 인물과 의인화된 사물을 등장시켜 주의 영광을 칭송하고 가르침을 따를 것을 훈계하는 일종의 도덕극이다.

이 작품에서 칼데론은 창조주와 세상을 등장시켜 천지창조 부분을 극화하고 있다. 그런 후 부자, 농부, 왕, 거지, 지혜(사제), 아기, 미인 등을 세상에 나오게 하여 각자에게 지위와 신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후 세상에서의 공과로 사후세계에 천국과 연옥, 지옥에 영원한 자리를 배정한다. 지극히 상투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에 뿌리박고 있다고 하겠다.

주목할 장면은 상대적으로 나쁜 역을 맡는 데 대해 거지와 농부가 불만을 제기하자, 창조주가 설득하는 논리다.

“애정과 혼을 가지고
연극에서 거지 역을 훌륭히 연기해낸다면,
왕의 역할을 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
모든 인생은
연극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여된 역을 제대로 한 사람은
연극이 끝나면
내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P.28)

여기서 두 가지 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인생은 꿈입니다>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인생은 꿈 또는 연극에 불과하며, 진정한 삶은 꿈 또는 연극이 끝난 후, 즉 사후세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은 사후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에 가기위한 사전 단계에 불과하다는 어찌 보면 염세적 가치도 다소 내포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기독교적 세계관을 현세에 정착시키려면 부득불 현세의 정치체제와 모종의 타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민평등은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현실사회에서는 지극히 위험하다. 왕과 귀족, 평민, 천민은 어떤 식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따라서 계급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바로 인생은 연극이라는 논리다. 현세에서 맡은 역할이 다소 불만스럽더라도-아기, 농부, 거지- 연극에서 자기역할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부합하게 충실히 연기한다면 사후세계에서 창조주에 의하여 보답받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부당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지극히 지배층의 논리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살라메아 시장>이 훨씬 더 흥미롭고 뛰어난 문학성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작품은 코메디아에 속하는데, 오늘날 희곡 개념에 보다 부합한다.

훗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작품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평민이 귀족계급의 부정과 비리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페드로 크레스포와 미하엘 콜하스는 닮은꼴이다.

크레스포의 뛰어난 미모의 딸 이사벨을 두고 하급귀족 돈 멘도가 탐을 내던 중, 잠시 머무르던 군대의 돈 알바로 대위는 물리적 힘으로 크레스포를 감금하고 그녀를 납치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돈 알바로 대위는 귀족으로서 평민인 이사벨을 동등한 반려자로 맞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단지 자신의 정욕 해소를 위해 평민 여성의 처녀성을 짓밟은 것이다.

크레스포-어떤 부모가 가만히 참고 있으랴!-는 분노에 치를 떨고, 복수를 준비하던 중 자신이 시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장으로서의 권한은 십분 활용하여 대위를 체포하고 심문한 후 사형에 처한다. 사실 민간인이 군대 장교를 직접 처분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 것으로서 신분차이를 떠나 사이가 좋았던 지휘관 돈 로페 장군과 대립하게 된다. 이때 국왕이 나타나서 정의의 손을 들어준다.

크레스포는 부유한 농민으로, 자존심과 명예 관념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군대가 오면 반드시 품행이 나쁜 장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딸을 다락방에 숨기는 예방책을 사용하지만, 열 장정이 한 도둑 못 막는다는 속담은 여기도 적용된다.

사건이 발생한 후 크레스포는 돈 알바로 대위에게 자신과 딸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딸과 결혼하도록 간청하지만, 오히려 돈 알바로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귀족 신분인 자신이 평민과 결코 혼인할 수 없다는 돈 알바로의 사고는 당대 귀족들의 보편적 가치관의 반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평민 처녀는 그저 즐기고 버리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예우를 해주고 존중하는 것은 같은 신분에만 적용된다.

미하엘 콜하스처럼 크레스포도 복수를 이행한다. 콜하스가 법적 절차로 해결 안 되자 무력을 동원하여 올바른 법적 절차를 요구한 것처럼, 크레스포는 시장으로서 자신의 법적 권한을 최대한 활용한다. 여기서 귀족에 대한 평민의 계급의식 타파 의식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에 의한 사태 해결은 결국 국왕이야말로 당대 사회질서와 정의 수호의 최고 판관임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연극관람자들에게 국왕에 대한 존경을 제고하는 목적이 배어있다. 일개 시장이 장교를 처단한 것은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위법이지만, 국왕은 부당한 처사에 반발한 시장과 평민들의 정의감에 힘을 실어준다. 이것은 일석이조이다. 귀족에게는 경고인 동시에, 평민에게는 충성 요구.

칼데론의 수백여 편의 극작품 중에 겨우 세 편을 통해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17세기 당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그는 주로 왕실의 비호 아래 창작활동을 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종교와 국왕에 대한 찬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극작품은 상연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글로만 이해하는 것은 명백한 태생적 한계를 내포한다. 그럼에도 <인생은 꿈> 및 <살라메아 시장>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조화롭게 모색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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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꿈입니다
뻬드로 깔데론 데 라 바르까 지음 / 서쪽나라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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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칼데론은 스페인 바로크문학의 최후 대가이면서, 로페 데 베가와 함께 황금세기 문학시대 희곡 부문의 양대 거장이다. 100여 편 이상의 다작가인 그의 작품 중 다행스럽게도 국내에는 두 권의 번역본이 나온 바 있다.

<인생은 꿈>, 그럴 듯한 표제다. 어찌 보면 인생무상 또는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혹 동양적 가치관과의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표제만 그러할 뿐, 순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으로 보면 장자 보다는 전개에 있어 남가일몽(南柯一夢)과 유사하다.

현실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기독교에서는 현실 세계는 한갓 스쳐지나가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덧없는 꿈에서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을 누려본 들 그것이 사후 영원한 세상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다. 오히려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는 인성을 수양하지 않고 타인을 억압하는 불의를 저지르면 영원의 세계에서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각자는 현실의 자기 본분에 안주하고 신께 감사하는 생활태도를 견지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은 꿈’의 기본 논리다. 이것은 사실 모든 권력자들의 종교에 대한 바램이기도 하다.

칼데론은 이 작품에서 위 사고와 운명 예정설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우위를 결합시켜 극을 전개해 나간다. 고대 및 중세의 문학에서 오이디푸스 등의 인물이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기 위하여 행한 모든 행동은 무위로 그치고 결국 운명은 실현된다. 그런데 칼데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고 이로 인하여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란 단어는 작품 곳곳에 등장하여 작가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난,
더 많은 자유의지를 갖고도
자유는 적단 말인가? (P.24)

하지만 이 작품을 지배하는 기본 정신은 역시 ‘인생은 꿈’의 사상이다. 감금된 왕자 세히스문도는 감금된 삶과 잠시 맛본 화려한 왕자로서의 삶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인지 혼란스럽다. 자신이 왕자가 되어 권력을 쥐게 된 것을 안 순간, 그는 억압으로부터의 분노를 거칠게 표출한다. 하지만 재차 감금되어 왕자의 삶이 꿈이 되어버리자 그 후 다시 군인들에 의해 풀려나고 나서도 혹시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움이 그의 행동과 태도를 조종한다.

“끌로딸도,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P.74)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네가 자라난 곳으로 넌 돌아 갈 것이다.
네게 일어난 모든 일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다 그러하듯 꿈을 꾼 것이니.” (P.102)

그래서 세히스문도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데, 기실 이는 작가가 작품에서 독자에게 말해주고 싶은 요지이다.

“산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꾸고 있다는
그토록 분명한 세상에 있으니.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깨어날 때까지
현재의 자기를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P.123)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열정.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환상이자
그림자이며 허상이다.
그리고 최대의 선도 부족하다.
모든 인생이 꿈이며
꿈은 단지 꿈일 따름이다.” (P.124)

“내가 잠에 든 것이라면 나를 깨우지 말고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를 자게 하지 마라.
그러나 현실이든 꿈이든
중요한 것은 잘 행동하는 것이다.” (P.135)

이 극의 아름다움은 도덕적 교훈에 있지 않다. 작가가 주창하는 자유의지 사상도 아니다. 작가는 인물 간 대립의 긴장- 끌로딸도와 로사우라, 세히스문도와 왕 바실리오-의 미학을 잘 살리고 있다. 여기에는 인위적으로 숨겨왔던 그러나 영원히 감출 수 없는 천생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로사우라와 아스똘포, 에스뜨레야와 아스똘포 간에는 남녀 간의 사랑의 진정성과 배신이 얽혀있어 또다른 흥미를 준다.

이 극은 산문 희곡이 아니다. 작가는 운문의 형식에 바로크 시대의 양식에 맞는 매우 화려하며 장식적인 표현기법을 다채롭게 활용하고 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게 수사적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당대에는 그것이 일상적인 표현기법이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숲과 들 사이로 흐르는 냇물의 정경을 묘사한 한 대목을 여기에 적는다.
“꽃 사이로 풀려 나온
구렁이인 시냇물도 태어난다.
은으로 된 뱀이
꽃 사이로 미끄러져 다니며
자기의 속삭임으로
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꽃들은 그가 도망가도록
광활한 들판을 활짝 열어 놔준다.” (P.25)

이러한 유의 작품은 원어의 낭독을 통해서만 작가가 추구하는 운율과 음악적 요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독자에게 주는 즐거움과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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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트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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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품을 읽고 그 소회가 다수의 견해 또는 소위 정설(定說)과 차이가 있을 때, 문득 고민하게 된다. 내가 근본적으로 오독(誤讀)을 한 것인지. 혹은 작품 자체가 상이한 독후감을 낳게 하는 열린 구조일 가능성은 없는지.

카이트 후작은 철저하고 냉혹한 이기주의자이며,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부정과 사기를 서슴지 않는 부정적 인간형이다. 이렇게 작품해설과 등장인물의 대사는 알려준다.
“당신처럼 냉혹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예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관능과 향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이예요.” (P.16)
그렇다면 그의 사기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가 몰락하게 된 상황을 독자는 기뻐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카이트는 이방인이다. 그는 당대 부르조아 사회에서 활동을 하지만,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한다. 그는 선녀궁이라는 예술과 오락의 복합공간을 건축하려는 웅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어렵게 자라온 자신의 삶과 불안정한 생활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다. 그는 자기자본이 없으므로 타인자본, 즉 투자유치나 채무를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다. 투자자는 냉철하다. 그들은 개인적 형편이나 감정을 고려치 않는다. 오직 투자에 대한 수익 가능성에 예민하다.

이렇게 보면, 카이트는 불운한 벤처사업가다. 벤처가 반드시 정보통신업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실행에 옮길 재원이 없을 때 벤처캐피탈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카이트의 선녀궁은 어찌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시민사회가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귀족사회가 무너지는 시기, 그들에게는 문화예술 향유에 대한 열렬한 수요가 잠재되어 있음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카이트는 지니고 있다.

그의 독단성은 과단성의 다른 면이며, 이기적 모습은 목표에 극도로 집중함에 따른 외연적 모습이다. 그가 투자자들의 돈을 회계장부 없이 임의로 지출하는 것은 자신의 말마따나 체계가 잡히지 않는 초기임을 감안하면 용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투자자들에 의해 축출된다. 투자자들인 부르조아는 더 이상 카이트가 없어도 선녀궁을 완성하고 운영함으로써 수익을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외관상 유능하고 타산적인 사업가로 비쳐지지만 그것이 허상임이 막판에 드러난다. 그는 오히려 단단한 외피에 상처입기 쉬운 연약함을 감추고 있으며, 치밀하고 정교한 사업계획을 하기에는 감정과 인간관계에 취약하다.

마지막 장면에 권총과 일만 마르크의 돈을 번갈아 보다가 권총을 내려놓으면서 하는 카이트의 대사는 삶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상기시킨다.
“인생이란 미끄럼틀이지...”

놀이터의 미끄럼틀에서 사람들-주로 아이들-은 계단을 올라가 높은 곳에서 쌩~하며 타고 내려온다. 그리고 올라감과 내려감을 반복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한 번 내려왔다고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비록 다시 내려가게 될지라도 쉼 없이 다시 올라가려는 노력, 그것이 인생이다. 산언덕으로 계속 커다란 바위를 굴려올리는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스와 마찬가지로.

카이트는 자본주의 성숙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한 당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순수함을 꿈꾸었던 순진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속이려던 부르조아 사회의 속물들에게 오히려 사기를 당하였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와 부르조아는 처음부터 결코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내 재능이라는 것은 단지 부르조아 사회 분위기 속에선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실뿐이오.” (P.14)
“그런 재능은 가져서 유리하다기 보단 오히려 불신감을 일으키게 한다오. 그래서 이 부르조아 사회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줄곧 나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거요.” (P.15)

친구 숄쯔는 모든 면에서 카이트와 대비된다. 그는 인본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귀족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의 선한(?) 인간성은 자기중심에만 머문다. 그래서 그는 향락인간이 되고자 카이트를 찾아오고, 카이트와 도덕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는 현실 감각이 없이 관념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가 택한 관능에서 버림받자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군다, 정신병원뿐이다. 외관상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카이트보다도 부정적 인물로 귀결된다.

카이트의 동거녀 몰리는 일찍부터 카이트와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그에게 시골로 가서 안온한 삶을 살 것을 계속 요구한다. 그녀는 부르조아 사회의 비정함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모두가 당신을 몰락시키는데 혈안이 된 이 살인굴에서 빠져나가요...야비하고 비열한 사기꾼들한테 사기당하면서 모가지를 비틀게 내버려 두고있는 거예요.” (P.84~85)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데, 그녀의 비극은 카이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데 있다. 카이트는 영락을 거듭할지언정 소시민적 근근한 삶을 영위할 인물이 아니다.

극중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며 부르조아적 인물상은 안나와 카지미어이다. 안나는 카이트를 이용하여 가장 이득을 본 인물이다. 그녀는 부유한 상인 카지미어와 결혼함으로써 백작부인의 허울만 좋은 명예를 던지고 부를 선택하였다. 그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한편 카지미어는 작품의 또 다른 원동력이자 숨겨진 주인공이다. 그는 카이트의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다가 성공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를 쫓아내고 모든 것을 차지한다. 선녀궁과 안나 모두를.

카이트는 정말 지탄받아 마땅한 악당일까? 숄쯔의 대사를 빌려본다.
“슬픈 건지 다행인 건지간에-난 자네를 이제까지 지독히 교활한 악당으로 생각해 왔어. 이젠 그 환상도 버렸네. 악당이라면 말이야...그런데 자네는 나와 마찬가지로 운이 없어. 게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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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셀레스띠나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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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쓰인 스페인의 고전문학이다. 이 작품의 의의는 “‘만일 스페인에 <돈 키호테>가 없었다면 대신 그 영광을 누렸을 작품’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된다.”(P.5)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수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이 인류 최고의 문학 유산으로 손꼽는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택하고 있다. 대화체 소설 또는 희곡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어 명확한 장르 규정이 어렵다. 아직 문학의 세밀한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이렇게 형식상 혼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우리 고전문학에서 판소리와 판소리체 소설의 관계와 유사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갈리스또와 멜리베아. 갈리스또는 멜리베아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중개인으로 셀레스띠나를 요청한다. 셀레스띠나의 계책으로 멜리베아도 갈리스또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다. 이때 중개 성공에 대한 보상의 분배로 갈리스또의 두 하인은 셀레스띠나와 다투다가 죽이게 되고 자신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한편 갈리스또는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급히 넘어오다가 실족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절망한 멜리베아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문학상 영원한 테마인 남녀 간의 사랑이 이 작품의 핵심 소재이다. 하지만 여기엔 사랑과, 탐욕, 질투와 시기 등 인간사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져 있다. 중세의 신성을 벗어나 서서히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과정의 세계상이다.

갈리스또는 당당하게 멜리베아에게 청혼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결혼 등 미래에 대한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문 간에 철천지원수 사이도 아니다. 귀족과 평민(또는 천민) 등 신분상 격차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통상적인 만남과 교제 절차를 따랐다면 연인 간, 하인과 셀레스띠나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갈리스또는 처음부터 은밀하게 만남을 주선할 방책만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셀레스띠나가 개입할 여지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옮긴이는 해설을 덧붙인다. 갈리스또는 정통 스페인 귀족가문이며, 멜리베아 집안은 개종한 유대인이라는 사실. 따라서 귀족이라는 타이틀은 획득했지만 정상적인 통혼은 꿈도 꾸지 못할 관계라는 것.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갈리스또와 멜리베아의 세간의 이목을 피하는 사랑과 괴로움이 다소 이해된다.

작품의 표면상 주인공은 두 연인이지만, 실질적 주인공은 셀레스띠나다. 그래서 작품 표제도 변화하였다. 셀레스띠나는 마녀로 불리는 노파로, 창녀들의 포주이며, 마을의 만능해결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약품을 사용하여 창녀의 머리털 색을 바꾸거나,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심지어는 숫처녀로 감쪽같이 위장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사기꾼이기도 한 셈이다. 여하튼 그녀는 복합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서, 작품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갈리스또의 두 하인, 셈쁘로니오와 빠르메노, 그리고 셀레스띠나와 같이 지내는 두 창녀, 엘리시아와 아레우사도 각기 당대 서민사회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두 하인의 탐욕, 특히 빠르메노의 충직한 하인에서 일탈하는 과정은 과연 갈리스또라는 인물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뛰어난 인물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갈리스또와 멜리베아의 귀족적 고상과 우아함과 대비되는 속인들의 생생하면서도 비속하기까지한 일상을 네 남녀는 말과 행동으로 숨김없이 예증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셀레스띠나는 멜리베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숨겨진 불이요, 즐거운 상처며, 맛있는 독약이며, 달콤한 비통에, 유쾌한 아픔에, 즐거운 고통, 그리고 달고도 쓰라린 상처에 부드러운 죽음이죠.” (P.112)

그리고 이 작품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바로 철저한 현세주의다. 인생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것, 한창 젊고 아름다울 때 인생을 즐겨라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 너희들 고유의 일이란 즐기는 것뿐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면 어느새인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리는 게 젊음이야.” (P.58)
“오늘 먹을 것이 있는 한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 많이 가진 자나 가난한 자나 죽는 건 매한가지.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게 아니잖아요? 즐기자구요.” (P.70)

<라 셀레스띠나>는 중세 엄격주의와 신성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발인 셈이다.

*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다. 옮긴이는 스페인 문부성에서 라디오 방송용으로 각색한 작품을 참조하였다고 적어놓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맛보기 또는 소개작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근에 옮긴이가 새로이 완역본을 출간하였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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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판도라의 상자 독일현대희곡선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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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킨트를 대표하는 작품은 소위 이 ‘룰루’ 2부작이다. 룰루는 2부작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베데킨트의 극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알반 베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더욱 유명하다.

룰루 2부작은 등장인물의 파격성과 사건 전개의 극단성, 그리고 적나라한 성(性)의 노출 등으로 당대에 매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오랜 세월 음지에서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숭배 받다가 근자에 들어서 서서히 베데킨트 재평가에 힘입어 빛을 쐬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작품해설에 따르면 음란물로 취급받기까지 한 대담한 성적 표현은 초판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베데킨트는 후일 작품을 수정하면서 이를 대폭 온건하게 손보아 현재의 수정본에서는 암시적으로만 그려진다.

룰루는 사회 밑바닥층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신분 상승과 안락한 생활을 이루어낸다. 그녀에게 사회적 윤리와 도덕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현세의 즐거운 유희와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지표다.
“룰루는 현재 자신의 존재 이외는 달리 누가 생각해 주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평가가 어떠하던 개의치 않는다.” (P.217)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쉐엔 박사이다. 쉐엔 박사는 어린 그녀를 수렁에서 구해준 인물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룰루를 병원장인 골 박사에게 넘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화가 슈봐르츠와 결혼시킨다. 이어 슈봐르츠의 자살 후에는 무대에 올려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남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룰루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지령>을 보자. 젊은 룰루를 감시하다가 늙은 골 박사는 사고로 죽게 된다. 슈봐르츠는 룰루의 과거를 알고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쉐엔 박사는 어떠한가. 그는 결국 룰루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젊고 부유한 귀족 약혼녀와 파혼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이제 행복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되지만, 룰루는 한 남자에 매이는 여성이 아니다. 쉐엔 박사는 주위의 모든 남자들, 심지어는 자기 아들 알봐마저 룰루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악연을 끊기 위해 룰루에게 자살을 요구하다 룰루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드리고 크봐스트는 룰루를 위협하다가 룰루의 계략에 의해 쉬골흐에게 목숨을 잃는다. 알봐 쉐엔은 매춘에 나선 룰루를 견디다 못해 그녀가 데려온 남성을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앞당긴다. 여성동성애자인 게슈뷔츠 백작부인은 룰루를 위해 대신 감옥살이도 하고 일생을 헌신하지만 살인마 잭에게서 룰루를 구하려다 오히려 처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이렇게 룰루는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에게 파면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발산하려 애쓰는 면에서 그녀는 분명히 그러하다. 반면 그녀는 관능이 뚝뚝 배어나오는 그러한 유와는 다르다. 겨우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아직 소녀티를 간직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와 행동도 때로는 여인보다는 소녀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쉐엔 박사를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뭇남성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이란 즐거운 파티이며, 파티에서 다른 사람에게 잠시 웃음과 수작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과 상충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눈 뜨는 봄>에서 청소년들의 성(性)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성애를 언급하기도 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슈봐르츠 백작부인을 등장시켜 본격적인 여성동성애를 드러낸다. 비록 작중에서는 미묘한 암시로 제시하고 있지만, 슈봐르츠 백작부인의 처절한 헌신은 연민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룰루에게 매혹당하지 않는 존재, 그럼으로써 극중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쉬골흐다. 그는 룰루의 아버지인 동시에 때로는 연인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파악하기 힘든 묘한 인물이지만, 그는 룰루의 육체에 물론 관심을 가지지만 그녀를 이용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이며, 마지막에는 룰루를 매춘으로 내모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다. 그는 성과 속, 선과 악에 초연하다.

<지령>은 쉐엔 박사, <판도라의 상자>는 아들 알봐 쉐엔이 각각 룰루의 파트너로 나온다. 아버지의 살인자와 결혼하는 아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알봐에게 룰루의 매력은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알봐는 믿고 있던 주식이 휴지쪼가리로 바뀌면서 영락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며 중병에 걸리지만, 룰루가 매춘에 나서는 것에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임을 알면서도 내면으로는 인정하지 못한다. 전편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양보로 가슴속에 꾹 눌러 담았고, 후편에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룰루에 충실한 알봐 쉐엔이야말로 이 연작에서 가장 충실하면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룰루의 본질을 알면서도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신의 타고난 재주 때문에 누구나 자기 주위 사람들을 모두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범죄자로 만들고 말어...언젠가 자기 내부가 온통 무너져버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어. 자제력에 얽매여 있는 남자일수록 더욱 쉽게 쓰러지고 말지. 그럴 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P.104)

주위 사람들을 불나방으로 만든 룰루는 자신도 결국 살인마에게 끔찍한 최후를 당하게 된다. 그녀는 비극의 우아한 주인공으로 끝맺지 못한다. 그것은 룰루의 속성 내지 본질에 기인한다.
“룰루는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보잘 것 없는 짐승처럼 죽게 된다. 룰루의 속성은 변태 살인자 잭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모두 파멸되어 있었던 것이다.” (P.217~218)
실제 사건에서 참조한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변태살인자다. 그에게 룰루의 육체, 특히 음부는 더할 나위 없이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다.
“지에미!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조갑지는 처음 보았어.” (P.204).
초판본을 보면 이후 대사는 현재의 수정본과는 매우 다른 성격임을 알 수 있음을 해설을 통해 알게 된다. 룰루 2부작은 어찌 보면 룰루의 높은 의학적 가치를 갖는 음부가 빚어낸 비극적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룰루 2부작은 과격하다. 거칠고 적나라하여 구성과 표현에서 숨김이나 주저함이 없다. 귀족계급과 시민사회의 고상하고 우아함에 젖어있던 당대 사회의 관념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하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누가 룰루를 악녀라고 매춘부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겠는가. 또한 룰루에 의해 스러져가는 인물 군상도 복합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회의 내재하는 모순적 이중성을 헤집어 대낮에 환히 드러내고 있다. 그 상처는 햇볕에 쓰라리다. 쓰라림은 거부를 일으킨다. 그러나 상처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다. 다만 제대로 된 도서라고 하기엔 오자(誤字)가 너무 많다. 전혀 교정을 보지 않은 듯하다. 겉표지의 작가명이 ‘프랑크 붸데칸트’로 나와 있으니 본문의 무수한 오류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런 책이 저명한 대학교의 출판부 이름으로 게다가 <독일현대희곡선>이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오다니 의의를 찾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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