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이은진.정윤미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두꺼운 책을 굳이 읽는 연유는 무엇보다도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며, 한국전쟁에 대해서 보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미국과 미군측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복합적인 것이다.

저자 핼버스탬은 일찍이 월남전을 다룬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이라고 한다. 그의 유작이 된 이 책에서 핼버스탬은 소위 ‘잊혀진 전쟁’이 미국에서 철저히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 사회적 맥락과 군사적 실패를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금도 딱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능숙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국전쟁을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투현장의 말단 병사의 행동과 목소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미국 행정부 최고위층의 정치 외교적 파워게임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환자재는 글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어 저자의 주장에 한층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다.

이 방대한 저작물을 심도 깊게 검토하고 중점사항을 논의한다면 전문적 연구역량을 필요로 할 것이므로 몇 가지 인상 깊은 대목을 중심으로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


1.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공포

‘운산에서 얻은 교훈’으로 이 대작을 시작하는 것은 중공군과의 첫 교전과 걷잡을 수 없는 퇴각이 미군에 미친 충격의 강도를 말해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켜 북진을 한 유엔군은 청천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당시 중공은 유엔군이 자국의 국경까지 진군할 경우 참전할 것임을 개전 초부터 강하게 천명하였다. 이는 북한군에 대한 원조와 아울러 장제스의 대만을 돕는 미국에 대한 적대적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핼버스탬은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와 전선의 미군지휘체계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의도적인 정보의 왜곡이 개입(P.584)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후, 맥아더는 총사령관이 되어 유엔군을 지휘한다. 지휘관이 전선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쟁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맥아더는 전쟁 중 한국에 단 하룻밤도 머물지 않았다(P.28). 동경에서 참모들에 둘러싸여 원격 지휘를 하였다. 전선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맥아더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된다.
“한국전쟁에는 단층선이 있었다. 단층선의 한 면은 야전부대가 직면하는 전장의 위험과 현실의 세계고, 다른 면은 안일한 명령만 쏟아내는 도쿄 사령부에 있는 환영의 세계였다.”(P.46)

저자를 포함한 미군사관들은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 북진에 있다고 한다. 적당한 장소, 예컨대 평양 정도에서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숨고르기를 하지 않고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데만 급급하여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저질렀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였다. 이는 인민군 외에 숨어있는 적은 없다는 오만한 단정에 근거한 것으로 중공군의 존재를 외면 내지 무시하였다.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오판은 단순 시위용 해석 또는 정치적 판단의 가능성을 포괄한다. 당시 미국 정계는 대중국 정책을 놓고 입장이 팽팽하게 갈려 있는 상태였다. 소위 차이나핸즈의 객관적 중국정세와 장제스 측의 차이나로비의 친대만, 반공산 세력으로. 맥아더는 진작부터 차이나로비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인민군을 단숨에 싹쓸어버려 최소한 한반도에서 공산세력을 일소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중공국의 참전 후 만주 폭격 및 핵공격 등 확전을 통해 기회를 틈타 중공과도 전면전을 불사할 의도도 감추지 않았다.

저자는 중공군의 공격방식에 대해서도 참신한 분석을 제시한다. 중공군은 병력 수만 믿고 막무가내로 전진하는 소위 ‘인해전술’로 유명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유엔군에 비해 화기와 장비 면에서 열악하므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철저한 전략을 마련하여 매복전과 심리전으로 상대를 압박하였다. 그런 면에서 유엔군의 북진 후 전면 퇴각은 바로 중공군의 함정에 빠진 결과이다. 중공군은 진즉에 북한에 진주하였지만, 철저한 은폐로 유엔군의 눈을 속이고 그들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중공군]은 북한의 산악 지대에서 남한군과 유엔군 부대가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격하여 이미 무리하게 늘어진 보급선이 더 길어지기를 기다렸다...미군이 북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P.31)
“미군이 덫에 걸려들면 중공군은 바로 전쟁에 뛰어들 게 분명했다. 중공군은 이미 수적으로 열악한 미군과 남한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북진하면 거대한 산악지대에 부딪혀 결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P.33)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당한 참패와 치욕, 그리고 뒤이은 걷잡을 수 없는 퇴각으로 미군은 중공군에 대해 공포심에 떨게 되었다. 평지보다 산지를, 낮보다 밤 행군을 선호하며, 종적을 남기지 않고 어느새 후방으로 가서 포위하는 신출귀몰한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 어지간한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병력 등.

저자는 미군이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싸우는 요령을 찾아낸 것을 지평리전투와 원주전투를 계기로 삼고 있다. 아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막대한 수의 적군에 포위당했다 하더라도 포병의 화력 지원과 공군을 이용한 군수물자의 지속적 공급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 양상을 고지를 둘러싼 소위 땅따먹기 형태로 변화한다. 개전 초기 같은 전면적 전진과 후퇴는 더 이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변화된 전투방식은 가장 큰 단점은 무수한 인명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전부대원이 전사하는 순간까지 절대 후퇴 없이 적진을 향해 총격을 가해야 겨우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다.


2. 맥아더의 신화 깨뜨리기

우리나라 사람에게 맥아더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한때 월미도의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강력한 역풍은 오히려 그의 존재의 거대함을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맥아더와 트루먼 간의 정치적 대결 상황을 기본적 갈등구조로 삼고 있다. 대통령에게 복종하지 않는 장군의 이미지는 경례를 하지 않은 장면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전쟁의 신화, 맥아더의 참모습은 우리가 알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저자는 그의 부친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계를 분석하여 그의 명예욕과 권력욕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패퇴하여 호주로 철군하였을 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 초기의 패전은 전적으로 그의 적정에 대한 무지와 인종차별적 편견에 따른 오만의 결과라고 말이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군 총사령관은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은 물론 그 이후 까지 태평양 지역의 미군을 총괄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의 명성은 웬만한 정치인을 능가하고 그의 화려한 경력은 대통령보다도 뛰어났다. 그의 자존심과 명예와 경력과 그리고 나이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군인이라는 지위를 망각시켰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일본 동경에서 제왕처럼 군림하였으며, 그 주변에는 자신의 사람들로 장벽을 둘렀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서로를 무시하였으며, 또한 두려워하였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명성과 권위를, 맥아더는 트루먼의 지위를 부러워하였다. 그들의 관계는 총사령관과 군통수권자의 관계를 뛰어넘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해 대통령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 자신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P.195)

양자가 모두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역사는 맥아더의 과오에 더 비중을 둔다. 어쨌든 그는 상관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군인으로서 가장 나쁜 잘못이었다. 맥아더 자신 또한 부하의 명령 불복종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3. 미국과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는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짙게 배어있다. 이념에 관한 한 우리사회는 아직 닫힌사회다. 그것은 이념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전쟁과 결부된데 연유한다.

그렇다면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무엇인가? 한국전쟁은 월남전과 다르게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어 왔으며 정당성도 취약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P.110)

저자 역시 최근의 역사인식을 따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국제전과 내전이 묘하게 결합된 형태로서 외부세력의 영향과 내부적 모순이 증폭작용을 일으켰다고 본다.

미국에게 있어 남한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애치슨라인에서도 남한을 제외한 것인데, 전후 국방예산의 대폭적 삭감과 국방력의 약화를 겪는 미국으로서는 남한에 최소한의 치안유지 병력을 남긴 채 보다 중요한 일본 방어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세력은 미국의 대응을 완전히 오판하였으며,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도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거였다.” (P.132) 즉 공산세력의 도발을 방치하면 나치가 슬금슬금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먹어치운 것과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남침을 저지한 것과 북진은 전혀 다른 사안이었다. 미국은 중공과의 충돌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이는 맥아더가 북진을 주장한 이유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대만에 쫓겨와있던 장제스의 바램대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필연적으로 장제스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 갈등을 유발할 게 분명했다.” (P.481) 장제스와 차이나로비는 중공과의 전면전을 통해 공산세력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서구권에 복귀시키기를 고대하였으며, 맥아더는 이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 중 미군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무모한 북진에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적군을 추격한 일이었다.” (P.974)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거에 다시금 한강 이남까지 퇴각하면서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장기전이 되었으며, 유엔군을 포함한 미군은 커다란 인명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미국의 시각에 북진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관적 시각에서 북진이 없었다면 그 후 전쟁과 국내외 정치사회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국민의 감성 측면에서도 패퇴한 적을 소탕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북진 자체가 실수가 아니라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외면하고 아무런 대비 없이 무작정 북진한 것이 잘못이라고 보는 게 보다 옳은 논지라고 하겠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아무런 역사적 의의도 갖지 못한 잊혀진 전쟁으로 인식되는 게 타당할까? 저자는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의 정당성을 참전용사의 시각을 빌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민군이 두 번 다시 남한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정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P.1014)

“어차피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참전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P.1015)

※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워커의 자취는 광진구 워커힐에 남아있다. 그는 맥아더의 무시와 참모진의 외면, 그리고 열악한 지원에도 꿋꿋이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낙동강 방어전의 성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반이 되었지만, 생전은 물론 전사 이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지휘했던 월튼 워커는 미군 역사를 통틀어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가장 불운한 사람이 되었다....무기 상태도 엉망이고 병력도 턱없이 부족한 군대를 이끌고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사나운 적의 진격을 막고자 힘겹게 사투를 벌였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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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 모범소설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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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범소설 1>에서 작가가 자부했던 재미와 윤리 양 측면에서 가히 소설의 모범이라는 주장이 근거 없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가진 모든 재능을 쏟아 붓고 애정을 기울였(P.7)던 그로서는 자기과시가 아니라 역으로 지극히 겸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 나이 벌써 64세로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7)

1권에 이어 2권에 수록된 여섯 작품은 다음과 같다.
<사기결혼>
<개들이 본 세상>
<세비야의 건달들>
<말괄량이 아가씨>
<남장을 한 두 명의 처녀>
<관대한 연인>

<사기결혼>과 <개들이 본 세상>은 내용상 독자적이지만, 구성상 엮여져 있는 작품이다. 전자는 차라리 후속 이야기를 위한 도입부 성격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사기결혼>은 다소 평범하다. 촉망받던 군인 깜뿌사노는 사랑보다는 재산에 욕심을 부려 도냐 에스떼파니아와 결혼을 하지만, 여자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과 건강을 날린다. 하지만 재산상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한데, 이는 깜뿌사노 역시 여자를 속이기 위하여 가짜 장신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깜뿌사노는 친구 뻬랄따 석사에게 계속하여 자신이 재활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겪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개들이 본 세상>이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에 병원의 개 두 마리, 시삐온과 베르간사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베르간사가 자신의 일생을 시삐온에게 들려준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개의 삶도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히 견공(犬公)판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들이 인간처럼 사고하고 말을 한다는 허구적 설정을 바탕에 깔지만, 그 내용이 지극히 사실적이고 풍자적이다. 개보다 못한 인간, 인간보다 덕성에서 우월한 개를 대비하여 당대 스페인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파헤쳐진다. 고전과 현대를 잇는 우화 작품의 뛰어난 예라고 하겠다.

<세비야의 건달들>은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소설에 상당히 유사하다. 두 소년 주인공 꼬르따도와 린꼰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가출하여 길을 나선다. 각자 카드놀이와 도둑질 수법으로 생계를 이어나간 그들은 대도시 세비야로 간다. 빛과 기회의 땅으로. 세비야에서 그들은 악당 짓도 조직의 관리를 받아야 함을 알게 된다. 모니뽀디오라는 악인을 우두머리로 한 나름 치밀한 조직은 도둑질과 해결사 노릇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적정한 수준에서 경찰과 거래를 주고받아 사업의 안정도 도모하는, 단순한 무뢰배 이상이다.

그들의 은어를 적절히 나열하여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작가는 세비야를 비롯한 스페인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모니뽀디오와 그들의 무리는 사회의 어두운 층을 그물망처럼 뻗어나가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생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에게 덕성이 존재하며 신의 구원을 갈구하는 그들.

동양고전인 <장자>로 기억되는데, 춘추시대의 유명한 도척(盜跖)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도둑에게도 진정한 도(道)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지키는 도둑이야말로 대도(大盜)라고 강변한다.

어찌 보면 모니뽀디오 또한 도척의 말과 그리 멀지않다. 사회의 가치관이 전복되면, 선과 악, 의와 불의에 대한 기존 관념이 뿌리째 뒤바뀐다. 그래서 모니뽀디오와 그 일당처럼 자신들이 악이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정상사회는 아니다.

<말괄량이 아가씨>의 주인공 볼로니아의 꼬르넬리아는 표제처럼 그렇게 말괄량이는 아니다. 그녀는 외모와 그에 못지않은 정숙함으로 평판이 자자했는데, 명문거족 페라라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비밀리에 출산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진행자 돈 후안과 돈 안또니오와 엮이게 된다.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됨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말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바로 소위 ‘명예’를 지키는 것에 대한 가치의 중요성이다. 꼬르넬리아는 미혼 출산을 함으로써 벤띠볼리 가문에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안기게 되었다. 그래서 오빠 로렌소 벤띠볼리는 가문상의 고귀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라라 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려고 한다. 그리고 두 명의 스페인 기사는 매 고비의 순간마다 스페인 기사답게 명예의 소중함에 손을 들어준다.

또 하나는 작가의 스페인에 대한 자긍심이다. 작가는 곳곳에 스페인 기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문구를 집어넣는데 부지런하다. 하나만 예를 들겠다.
“당신을 통하여 저는 스페인 사람의 호의와 예의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은 생각했던 것처럼 매우 숭고했기 때문에 한층 더 빛나게 될 거예요.” (P.258)

세르반테스는 일찍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그의 극작에도 열정적 애국주의를 담은 <누만시아> 같은 작품도 있다. 작가가 당대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변함없는 듯하다. 이러한 사랑이 그가 회의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 낙관주의 밝은 세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 게 아니겠는가.

<남장을 한 두 명의 처녀> 역시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나 저나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데 사랑 이야기만한 게 없다. 이 작품이 두드러지는 점은 여주인공이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에 나선다는 데 있다. 떼오도시아는 순결을 바친 마르꼬 안또니오를 찾으러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레오까디아 역시 사랑을 약속한 안또니오를 찾으러 고향을 떠난다. 두 여성 모두 순결과 정숙을 제일 덕목으로 삼는 당대 가치관의 기준에서 보면 파격적 행동을 보인다.

우연히 떼오도시아의 오빠 라파엘과 동행하게 된 그들은 싸움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롭게 된 안또니오를 만나게 된다. 두 여성의 동시 구혼, 그리고 안또니오의 선택. 레오까디아의 절망과 라파엘의 구애. 그리고 마지막 양가 아버지들의 결투 에피소드는 덤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 받고, 명예는 명예롭게 지켜진다. 그래서 한순간 실망과 슬픔은 존재하지만 결국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이 작품집에서 나타나는 사랑 이야기의 전형이다.

<관대한 연인>은 다소 스타일이 다르다. 여기는 작가 자신의 참전 경험과 포로 체험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 그 세부 묘사는 상상적 허구만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

사랑은 복수형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일치할 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런데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을 바라보고 나를 외면한다면 무척이나 슬픈 경우이다.

리까르도의 레오니사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다. 그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터키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다. 시칠리아에서 포로가 된 그들은 운명의 장난으로 멀리 키프로스에 노예 상태로 끌려온다. 레오니사의 미모에 전임총독과 신임총독, 그리고 최고법관의 삼자가 모두 욕심을 부리며, 중간에 레오니사와 리까르도는 각기 부정한 사랑의 중개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비로소 상대의 진심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안전하게 그리고 수많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그들. 응당 리까르도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을 레오니사의 선택에 양보한다. 그리고 레오니사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자유로운 의사로 리까르도를 선택한다.

이 작품 또한 주인공들의 인생 편력과 역경이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다. 세르반테스는 단편 분량에 장편에 걸맞은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력과 입담이 부족한 작가라면 갈고 다듬어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끙끙거릴 텐데 말이다.

<모범소설>은 <돈키호테>에 못지않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돈키호테>를 읽은 지가 까마득하지만. 12편에 수록된 다양한 인간과 사회의 군상은 당대 스페인 사회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와 장소가 다르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보편적 인간상의 재현이다. 더욱이 작품 전체에 내재된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당대와 이후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이며, 소토마요르의 작품집처럼 표제를 모방하는 사례도 생겼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이 <돈키호테>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주요작품들이 잇달아 번역 출간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서양문학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최소한 언급도 안 될 형편없는 수준의 작품이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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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 모범소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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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돈키호테>로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중단편 소설집이 바로 <모범소설>이다. 그러데 작품명이 주는 선입견 탓인지 그다지 인구에 회자되지 않으며, 섣불리 읽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표제로 손해 보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모범’이라는 어휘가 원래 그러하다. 네모반듯하지만 개성 없고 재미없는 인간 유형처럼, 이 작품집도 그러하지 않을까?

작가는 왜 이런 타이틀을 붙였을까?
“이 소설들은 앞뒤 없이 막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작품들에서 보게 될 사랑의 밀어들은 매우 정직할 뿐더러 이성과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조심성이 있든 없든 이 소설을 읽게 될 어떤 독자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독자들께서 작품을 잘 읽어본다면, 그 속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교훈이 없는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제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작품들은 아마도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번역본 <모범소설 2>에 수록된 작가의 머리말에서 세르반테스는 실로 대담무쌍한 발언을 한다. 이 작품집이야말로 재미와 윤리 모든 측면에서 가히 소설의 모범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집은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말이다.

이제 작가의 주장이 독단적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차례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
<피의 힘>
<유리석사>
<집시 여인>
<영국에서 돌아온 여인>
<고상한 하녀>

이상이 1권에 수록된 여섯 작품들이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그의 8편의 막간극에도 동명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만큼 이 소재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음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바로 인간의 탐욕, 즉 욕심이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노인 까리살레스가 10대 중반의 레오노라에게 끌려 청혼을 하는 것 자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탐욕이며, 가난한 레오노라의 부모가 까리살레스의 재산을 보고 결혼을 허락한 것도 결혼의 순수한 의미에 역행하는 욕심의 발로다.

까리살레스가 레오노라를 타인의 시선에서 감추기 위하여 벌이는 삼중 장벽에 수많은 조처를 보자.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동굴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처사인데, 이 또한 레오노라를 홀로 독점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닌가?

레오노라를 정복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는 로아이사는 어떤가? 그는 사랑과 열정의 포로가 된 것도 아니다. 레오노라에 대한 그의 집념은 오직 비장해둔 보물을 훔치려는, 또는 순결한 정조를 뺏는 기쁨을 누리려는 불의한 욕망에 기인한다.

탐욕의 결과는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까리살레스는 슬픔과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며, 레오노라는 수녀원에 들어가 버렸고, 로아이사는 유언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다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레오노라를 비난할 수 없다. 그녀는 더럽혀진 욕망에 의해 노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게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움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다. 새장 속의 새가 아닌 보다 인간다움에 대한 갈구.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로워지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는 열쇠와 굳건한 문 그리고 담들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P.81)

<피의 힘>은 다소 작위적이다.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사고를 당한 아이를 구한 이는 다름 아닌 생조부였다. 여인이 아이를 찾아간 곳에서 자신의 과거의 장소임을 깨닫고 자신과 아이의 숨겨진 삶이 드러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아이의 생부가 돌아오고 둘은 정당한 법적 관계를 회복한다.

아이의 ‘피의 힘’으로 해피엔딩으로 매듭짓지만 이 작품은 그리 녹록치 않다. 여기는 순결한 여성에 대한 강압적 육욕 추구라는 비인간적 범죄가 묻혀서 용인되고 있다. 개인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는 만행이 쉽게 용서되는 것이다.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득이한 사유의 원치 않는 임신이라도 낳을 수밖에 없다. 미혼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자신의 미래의 삶을 포기하는 당사자의 처참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작가는 모른척한다. 그것을 작위적 구성으로 우연한 계기로 당사자들을 조우시킴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레오까디아의 로돌포에 대한 태도는 클라이스트의 <O...후작부인>의 후작부인과는 대조적이다. 후작부인은 기절한 자신을 범한 F...백작의 끈질긴 구애와 용서 구걸에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권리마저도 상당히 빼앗은 후에 정식으로 청혼을 받아 당당히 결혼한다. 반면 레오까디아는 과연 로돌포를 사랑했을까 의문스럽다. 자신을 범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생부라는 사실만으로 급작스러운 애정이 샘솟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로돌포의 입맞춤을 허용하고 아주 쉽게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극적인 흥미로움에도 일각의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유리석사>의 소재는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다. 그 비일상성과 광기, 그리고 기이함은 바로 환상소설의 특징이 아니던가?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당대 사회를 풍자하고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또마스는 자신의 몸이 유리로 되어 있어 깨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한편 다년간의 공부와 여행을 통한 깨우친 지식이 광기와 결합하여 “모든 질문에 대해 기지와 정확성을 가지고 대답”(P.135)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또마스는 각계각층의 인물과 직업에 대해서 촌철살인의 평을 쏟아내는데, “훌륭한 화가들은 자연을 모방하지만 나쁜 화가들은 자연을 토해낸다”(P.145)거나 “놀라운 점은 이 세상에 속임수를 쓰는 재단사는 수없이 많지만 정직하게 옷을 만드는 사람을 이 업종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P.153)는 등 그가 언급한 인물군은 매춘부, 뚜쟁이 여인을 비롯하여 시인, 서적상, 포주, 가마꾼, 노새몰이꾼, 짐마차꾼, 선원, 마부, 의사는 물론 판사, 가짜 학사, 검사, 변호사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또마스의 목소리는 바로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다. 최전성기를 지나는 스페인 제국의 휘황한 위용은 사람들의 눈을 압도하여 사회에 내재한 자멸의 부조리를 외면하게 하지만, 영민한 세르반테스의 눈은 이미 사회가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 차있음을, 조만간 내재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임을 예감하였던 것이다.

제정신을 차린 유리석사에 대한 세인들의 무관심은 대중스타의 덧없는 인기를 연상시킨다. 대중은 겉보기 화려하고 멋있거나 특이한 존재에 열광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인기는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다. 그래서 유리석사는 스페인을 떠나 플랑드르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후안무치한 사기꾼들은 배불리 먹여 살리고 겸손한 인격자들은 굶겨 죽이는”(P.166) 당대 스페인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는 삶과 죽음이 한 발의 총탄에 좌우되는 엄연하고 진지한 현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집시 여인>은 뛰어나다. 제재와 구성, 그리고 전개가 훌륭할뿐더러 집시 세계에 대한 지적 흥미마저 충족시켜 준다. 집시의 원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인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는데, 확실한 건 오늘날도 살아남은 집시가 유럽 문화에 끼친 수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더불어 가장 비참한 대우와 편견에 피해본 집단이라는 점이다. 안드레스가 집시 사회의 일원으로 가입할 때 집시 노인이 장문(P.224~227)으로 들려주는 집시의 계율과 문화는 그들의 언뜻 이해 불가능한 삶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이 작품집에서 출생의 비밀은 일상적인 제재가 되어 사실 별다른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집시가 귀족 여자아기를 납치하여 집시로 키우다 이러저러한 사건의 경과 후 원래의 출생 신분을 되찾아 행복해진다. 비록 집시일망정 그런 여주인공은 사고와 몸가짐에 있어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우월한 면모를 보인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 또한 인종차별이 아닐는지.

사랑의 콩깍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혹자는 사랑의 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돈 후안은 쁘레시오사를 사랑하여 그녀의 요구에 따라 2년간 집시가 되기로 하고 자신의 신분과 집안을 버리고 출가하여 집시 안드레스가 된다. 일견 부잣집 도련님의 철없는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그의 솔직한 사랑과 대담한 실천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쁘레시오사에게 바쳐진 로만세와 시들, 그리고 끌레멘떼와 안드레스가 벌이는 한밤의 사랑의 노래의 경연이다. 이 시들은 쁘레시오사의 매력을 찬미하는 한편, 산문에 운문의 감흥을 배가하며, 더욱이 세레나데의 경연은 로맨틱한 정감을 극대화하여 이 부분만 떼어서 보면 목가적이기도 하다.

<집시 여인>과 유사한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작품이 <고상한 하녀>이다. ‘고상한’이라는 수식어는 당대의 관점에서 하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찬의 문구다. 하녀는 하녀일 뿐이다. 그런데 한 여관집 하녀는 그 미모와 독실한 신앙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소설 초반부는 피카레스크 풍이다. 까리아소는 악동적인 기질에 못 이겨 가출을 하여 스스로 고생을 자초한다. 그리고 악자로서 갖가지 체험을 한 후 고향에 돌아오나 참치 어장의 파란만장한 생활을 못 잊어 다시 친구와 길을 나선다. 세르반테스가 스페인 문학의 한 전통인 피카레스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훌륭히 계승하였음은 이 짤막한 소설뿐만 아니라 유명한 <돈키호테>가 이를 입증한다.

여관집에서 고상한 하녀 꼰스딴사에 마음을 뺏긴 아벤다뇨로 인해 두 사람은 각기 성명과 신분을 감추고 기꺼이 여관집 하인 행세를 한다. 여기서 작품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데 고상한 하녀에 대한 아벤다뇨의 사랑과, 다른 하녀들의 추근거림과 물장수 아스뚜리아노가 된 까리아소의 불운과 고난, 특히 “꼬리를 내놓아라”에 얽힌 일화는 웃음과 아울러 당대 서민사회의 단면을 직관하는 작가의 날카로우면서 따스한 시선을 볼 수 있다. 고상한 귀족사회는 그의 관심세계가 아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하인>은 주된 배경이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여기에는 영국과 스페인의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의 역사가 바탕에 깔려있다. 기사 끌로딸도의 인신 납치는 비록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결과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비열한 짓이다.

여왕의 곁에 있게 된 이사벨라와 결혼하기 위하여 리까레도는 영국 해적선을 이끌고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데, 흥미진진한 해전의 스토리는 작가 자신의 참전 경험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후에 생사가 불투명해진 리까레도의 극적인 귀환도 역시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수도사들이 성금을 모아 해방시킨 자전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즉 드물게 보는 작가의 삶의 경험이 작품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외적인 아름다움, 즉 미모를 상실한 이사벨라에 대하여 리까레도가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의 숭고함에 있다.

“그녀는 추한 괴물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없는 몰골로 사느니 차라리 독으로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P.334)

“이사벨라! 그대를 사랑한 순간부터 난 관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과 종말이 있는 그런 사랑과는 사뭇 다른 사랑을 느꼈다오. 그대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감정의 포로로 사로잡았고 그대의 끝없는 덕은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오. 한때 내가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추한 모습도 역시 사랑하오.” (P.336)

이러한 사랑이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찬란한 행복의 결실을 맺었음에 기뻐함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제시하는 사회와 인간상은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므로 부분적으로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적합하지 않고 긍정할 수 없는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귀족 사회의 공허함에 한눈팔지 않고, 사회의 실체인 서민과 하층 계급에 관심을 기울인 점,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미덕에 대한 옹호와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은 책장을 계속 넘기게끔 만드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결합하여 과연 스스로 <모범소설>이라 자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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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이야기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물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민음사판 <세계의 환상소설>에 <잔혹한 이야기>의 일부 내용-‘진실보다 더 진실한’-이 수록되어 처음으로 릴아당[릴라당]을 알게 되었다. 매우 짧은 내용이라 제대로 된 면모를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인상과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후로 <잔혹한 이야기>를 한번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았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동안 장편소설로 생각했던 게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27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시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다양한 시기에 개별적으로 쓰여진 작품들을 작가는 한 권의 작품집으로 묶어놓고 그럴듯한 표제를 붙였다.

‘잔혹한 이야기’, 표제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유혈이 낭자하고 뼈와 살이 튀기는 처참한 B급 고어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서 그런 재미를 기대한다면 일치감치 책을 덮을 것을 권고한다.

공포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유혈장면도 더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지만, 일변하여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암시와 분위기만으로도 섬뜩함을 자아내는 게 보다 고단수의 솜씨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이 바로 그러하다.

몇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의도한 잔혹함은 육체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 면에서의 잔혹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도약기, 사람들은 배금주의와 물질주의의 마력에 점차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고전주의와 계몽주의 시기의 이성적 인간관, 고상한 미덕을 갖춘 바람직한 인간형에 대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돈과 부가 가치관의 주류로 부각한다.

저자는 당대야말로 잔혹한 시대임을 인지하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비정상적인 잔혹한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정신과 영혼이 타락하고 비정상인 경우보다 더 잔혹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전체 수록작품들이 모두 생경한 인상을 남기며, 깊은 여운을 드리워 새삼 곱씹을 만하다. 숨어있는 명작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몇 작품의 인상을 기록한다.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에서 언니 앙리에트와 동생 올랭프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몸을 판다. 고결하고 숭고한 동기는 그들을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올랭프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의무에 태만하고 망각하기조차 한다. 둘 중에서 누가 타락한 아가씨인가? 작가는 앙리에트의 당당함과 올랭프의 수치심을 극적으로 대조하여 전복된 가치관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랭프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여자아이(P.19)일 뿐이다.

우주와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는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유물론적 관점이 지배적인 오늘날, 물질이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관념의 고도 집약이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서 떠도는 먼지들이 강력한 중력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뭉치듯이 말이다. 관념만으로 존재가 형성되는 현상을 그린 작품이 <베라>이다. 아톨 백작의 지극한 아내 사랑은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P.36)
되살아난 베라는 아톨 백작의 관념이 만들어낸 실체이다. 그러기에 관념이 흔들리면 실체의 존재마저도 흔들리게 된다. 백작이 문득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베라의 실체는 사그라진다, 돌이킬 수 없이.
“그는 고작 한마디 말로 자기를 지니고 있는 눈부신 생명의 실을 끊어버린 것이다.”(P.37)

<복스 포풀리>는 샹젤리제에서 시대에 따라 반복하여 거행되는 웅장한 열병식 장면과 불쌍한 거지의 외침을 통해 진정한 민중의 소리-염원과 바램-가 무엇인지를 냉소적으로 웅변한다. 정권이 바뀌고 지배층이 변경되어 군중은 환호하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지만 그들의 삶은 변함없다.
반복되어 외치는 거치의 구걸 소리-“제발 이 불쌍한 장님에게 동정을 베푸십시오.”. 그것은 진실의 소리(P.43)이자 야경꾼의 목소리(P.44)이며 청렴한 보초병의 목소리(P.44)이다.

<두 사람의 점술사>는 한 신문사 편집주간과 예비 저널리스트 간의 대화를 통해 당대 부르조아 사회,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편집주간의 말은 아프기 이를 데 없다.
“우린 절대로 아무도 출간 안 할 거라고 확신한 원고만 읽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원고들만 인쇄하지.”(P.51)
여기는 당대 부르조아 독자층의 지적 수준과 선호도에 대한 작가의 경멸스러운 냉소가 깊게 어려 있다. 편집주간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바로 “영혼”(P.57)이라고 지적하며, 예비 저널리스트에게 문필가의 진정한 좌우명은 “범인(凡人)이 되시오!”(P.58)라고 설파한다.

<하늘의 선전물>은 우울한 과학기술적 배경을 취하고 있다. <영광 제조기>, <마지막 숨의 분석기>, <트리스탕 박사의 치료> 등이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기술의 가면으로 위장한 부르조아의 천민자본주의와 배금 만능주의에 대한 얼치기 예찬 형식을 빌린 실체 고발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비생산적이었던 하늘을 활용하여 실리와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예찬을 나열한다. 그리고 가져올 엄청난 광고효과와 막대한 실질적 가치를 예시한다. 작가가 말한 하늘은 오늘날 사이버공간으로 훌륭하게 대체 구현되어 있다.

<영광 제조기>는 엄밀히 말해 극장에서의 영광에 국한하며, 박수꾼을 기계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정신’은 바로 기계에 있는 거랍니다.”(P.91)
“정신적 대상에 도달하는 물질적 수단, 즉 성공은 현실이 되는 것이죠.”(P.91)
당대 연극계에 만연한 부조리에 대한 일침을 통해 작가는 관객과 박수꾼 부대, 훼방꾼, 평론가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박수꾼은 물론 평론기사도 기계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오늘날 대중예술계에서 박수부대의 적극적 활용과 노이즈 마케팅 등은 비록 기계화되어 있지 않을 뿐 릴아당의 지적한 바를 여전히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작품을 통해 릴아당은 당대 부르조아 사회와 시민을 풍자 및 조소하고 그들의 상업성, 태금주의, 위선적 교양과 도덕 등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비르지니와 폴>은 유명한 <폴과 비르지니>를 뒤집어놓는다. 더 이상 순결하고 무구한 폴과 비르지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듬뿍 버는 것에 기뻐하며, 하잘 것 없는 선물대신 저금통을 듬뿍 채워주길 바라며, 시골생활이 경비를 절감해 줄 것을 기대한다. 릴아당의 시대는 그들마저 세속주의에 물들게 한다.

<마지막 만찬의 손님>은 사튀른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과 점증하는 이상함이 작품을 주도한다. 반전으로 드러나는 정체와 충격.
“확실히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는 그 완벽성에 미친 사람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요.”(P.144)

<혼동하는 만큼!>은 앞서 언급한 <진실보다 더 진실한>과 같은 작품이다. 시체공시소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식거래인들이 모여 있는 카페의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면서 작중인물은 “두 번째로 본 광경이 첫 번째보다 한층 더 불길한 징조”(P.156)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감상주의>는 감각에 대한 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점을 시인 자신의 입을 빌어 열정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바다로 다가가면서 듣게 되는 큰 파도 부서지는 소리처럼 점점 커지는 것이지요. 오묘한 감각의 연장을 인식하는 것, 그 무한하고 신비로운 울림을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 예술가 혈통의 우월성을 결정짓지요.”(P.182)
그것은 또한 시인 막시밀리앵의 실연에 따른 죽음에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사후에 은은한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찬>은 한편의 우화이다. 라이벌 페르스노아 씨와 르카스텔리에 씨 는 가장 멋진 만찬 대결을 벌인다. 르카스텔리에 씨의 만찬은 외관상 일 년 전 페르스노아 씨의 만찬과 완벽히 동일하다.
“똑같은 만찬이었지요?”
“네, 똑같았어요.”
그리고는 한숨 한 번과 침묵, 그리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떨떠름한 우거지상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정말로 똑같았지요?”
“그러나 무언가 다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다른 무언가가 있었어요.”
“결국...그래요, 올해 쪽이 더 좋았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묘하네요. 똑같았습니다...만, 그러나 훨씬 멋졌습니다!”(P.199~200)

전년과 올해 만찬의 차이는 단 한가지였다. 각자의 접시 위에 하나씩 놓인 이십 프랑짜리 금화 한 닢(P.197)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극배우 쇼드빌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연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망령을 보고 회한을 통해 진짜 인간다운 감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는 방화를 저지르고 이 흉악한 범죄로 수많은 인명이 불에 타죽는다. 그는 외딴 등대로 몸을 피하고 망령이 찾아와 자신이 회한에 떨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엇 하나 전혀 느끼지를 못했다...”(P.216). 절망과 고독에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그는 망령을 보길 간구하면서 죽어갔다. “그 자신이야말로 그가 찾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P.217) 깨닫지 못한 채로.

<마지막 숨의 분석기>는 죽음 앞에서 탄식과 눈물은 사회 차원의 시간낭비(P.228)이므로, 이 분석기가 상주들이 망자 앞에서 견식있고, 동정심 있고, 호감이 가고, 격식에 맞게 무관심(P.226)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잊혀지게 마련이니, 즉석에서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P.228)

<노상강도>는 막연한 공포가 집단 발작을 일으켜 자멸의 길로 빠져드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팽팽한 공포와 긴장 상황에서 사소한 계기가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구실을 하게 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새삼 절감하게 한다.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사실이 허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본래 허구가 사실로 둔갑되었다가 다시 허구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D씨의 ‘사실’ 이야기는 듣는 이를 모두 매료시킨다. 후에 ‘나’가 들은 대로 친구에게 전달하였다.
친구의 반응은? “으음, 완전히 소설이네요!...그걸 글로 쓰지 그래요!”
‘나’의 대답은? “예. 이제 이걸 쓸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완성됐으니까요.”(P.265)

‘이제’라는 시점을 통해 작가는 허구화가 완성되었음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펠리시엥은 극장에서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쫓아가 구애를 하지만 의외로 그녀의 대답은 차갑다.
“몇 년 전부터 제게는 언제나 똑같은 대화였답니다. 이런 역할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해진 대사를 해야 하는 역할이에요.”(P.304)

그녀는 자신이 귀머거리임을 밝히며, 일반 여성들을 정신적 귀머거리(P.308)로 혹평한다. “말의 표면상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 속에 숨겨진 것을 나타내는 심오한 말의 본질, 즉 진정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상대가 아첨을 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P.307)

그녀는 사랑의 맹목성과 결혼 생활이 오히려 잔혹한 순간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총총히 떠난다. 이것이 <미지의 여인>이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잔혹성을 현실의 부조리를 먹고 크는 환상의 아들로 지칭한다. 현실이 상식성에서 일탈하여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울 때 현실은 잔혹성을 띤다. 일상성을 떠난 현실,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환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동전의 양면관계이다. 환상이 꿈과 몽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일상에 근접하고 현실에 가까운 기반을 두면서도 우리에게 생경한 연유는 바로 이러한 의외적 편재성이 주는 당혹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록작품>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
베라
복스 포풀리
두 사람의 점술사
하늘의 선전물
앙토니
영광 제조기
포틀랜드 공작
비르지니와 폴
마지막 만찬의 손님
혼동하는 만큼!
군중의 성마름
옛 음악의 비밀
감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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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재판관
박철 지음 / 연극과인간 / 200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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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1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마지막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범소설>등에 이어 <돈키호테>2편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을 1615년에 발표한다.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은 세르반테스가 꾸준히 써왔던 극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으로 연극 장르에 대한 작가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막간극’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막간극은 귀족들의 연회 도중 휴식시간에 상연하거나 긴 연극의 막 사이에 분위기 전환용으로 상연하는 짧은 극작품을 가리킨다. 어떻게 보면 장편 연극에 대응되는 단편 연극이라고 하겠다.

8편의 막간극은 다음과 같다.
–  이혼 재판관
–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
–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
–  성가신 감시
–  가짜 비스까야 사람
–  기적의 인형극
–  살라망까 동굴
–  질투심 많은 늙은이

각각의 작품은 짧은 분량에도 온전한 개성을 드러내며 성격이 명확하다. 더욱이 돈키호테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고상하고 젠체하는 귀족과 왕정에서 멀리 떠나 범인(凡人)과 속인(俗人)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가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허점투성이다. 따라서 조소와 해학을 아끼지 않지만 그가 보는 시선을 결코 차갑지 않다. 그는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에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악인도 악인답지 않으며, 인간은 선과 악이, 그리고 고결과 비속이 혼재된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게 된다.

<이혼 재판관>에는 이혼 허가를 요청하는 네 쌍이 등장한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성적인 욕구 불만, 남편의 생활 무능력, 상호간의 증오, 창녀와 술김에 결혼한 인부의 아내의 나쁜 성격과 행실 등 그 사유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재판관은 “이런 이유가 이혼 사유가 된다면 끝없는 이유를 대며, 결혼의 속박에서 지을 털어놓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소?”(P.15)하며 이들을 만류한다. 반면 서기는 “그렇게 되었다가는 여기 이 법정의 서기들과 검사들은 굶어죽게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혼신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P.17)라는 입장이다.

결론은? “제 아무리 나쁜 부부라도 가장 좋은 이혼보다는 낫다.”(P.18)는 악사의 노랫말.

과연 그럴까? 가장 좋은 부부를 능가하는 것은 없겠지만, 때로는 가장 좋은 이혼이 인간관계의 파탄을 막아줄 수도 있는 법.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는 창녀와 기둥서방이 등장한다. 당대는 몸을 파는 직업에 대하여 커다란 거부감을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겸손한 순응이랄까. 뜨람빠고스는 자신의 창녀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있다. 뜨람빠고스와 다른 뚜쟁이 치끼스나께 간의 대화는 그야말로 진지한 해학의 참면모를 보여준다. 뜨람빠고스가 진정으로 뻬리고스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천만에, 단지 그는 수입원이 사라진 게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녀를 고른 후 파티를 벌인다. 이때 레뿔리다의 애인이었던 건달 에스까라만이 증장하여 한바탕 걸쭉한 춤과 노래로 막을 내린다.

대체 이게 뭐냐고? 막간극에서 뭔가 진지한 것을 기대하지 말자. 막간극의 용도가 무엇인지 벌써 잊었는가?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는 시장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자를 학사와 서기, 시의원이 면접시험 하는 희화화하고 있다. 두 시의원 빤두로와 알론소의 말꼬리 잡는 험담은 그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후보자들도 만만치 않다. 암송만 잘하는 이, 뛰어난 포도주 맛 감별력, 새총 맞추기에 탁월한 솜씨 등.

분위기는 뻬드로 데 라나의 진지하며 성실한 시장 직무관 피력으로 사뭇 엄숙해지지만 곧 등장한 집시들의 가무로 흐트러진다. 지켜보던 성당지기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지자 바로 치도곤을 당하고 쫓겨난다.

“정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걸세.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P.58)

복합적 결말이다. 막간극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종교의 정치 간섭에 대한 거부감, 어리석은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소박한 정치에 대한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성가신 감시>는 군인이 자신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인의 집 밖을 지키고 서서는 경쟁자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는 내용이다. 구두상인과의 얼토당토 않는 흥정이 웃음을 선사한다. 결국 하녀는 집주인 앞에서 군인 대신 성당지기를 선택하고, 투덜과 자축의 말로 극이 끝난다.

<가짜 비스까야 사람>은 두 젊은이가 자칭 영특하다고 하는 세비야 출신의 매춘부를 놀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유는 묻지 말자. 막간극에서 그런 질문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가짜 비스까야 사람으로 위장하고 끄리스띠나에게 값비싼 목걸이를 담보로 맡겨 공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한 다음, 목걸이가 가짜로 바뀌었다며 소동을 벌인다. 매춘부 여인은 당당하게 시장 앞으로 나가 진실을 주장할 수 없다. 직업적 연유로 시장이 그녀를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 판국이다. 결말은 놀림이었음을 밝히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해피엔딩! 만약 놀림이 아니고 진짜 발생한 일이라면 끄리스띠나의 앞날은 샛노랗게 변했을 터인데 장난이 죄없다고 누가 주장하는가?

<기적의 인형극>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과 유사한 제재를 다룬다. 아무것도 상연되지 않는 인형극 무대, 하지만 관객들은 기적이 보이는 양 연출가의 대사에 맞장구치기 급급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거나, 합법적인 결혼을 한 부모에게서 임신되고 출생되지 않은 사생아들”(P.110)로 비난받을까 두려워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니 그야말로 ‘기적의 인형극’이 아닌가?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아무 사정도 모르는 기병대 장교를 저주받은 창녀의 아들이나 천박한 유태인으로 마음껏 희롱한다. 바보들의 행진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치들 중 하나가 틀림없소!...개종한 유태인이나 사생아 같은 자들은 용감하지 못하지! 따라서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요. 그들 중 하나야.” (P.123)

또 하나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바로 <살라망까 동굴>이다. 첫 장면은 애틋하지 그지없다. 나흘간 집을 비우는 남편의 부재를 눈물로 슬퍼하며 기절까지 하는 아내, 진정한 부부애의 전형이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여자의 반응은?

“꺼져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사라져버리고 마는 연기처럼!” (P.128)

아내는 정부(情夫)를 불러 즐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하녀와 더불어 몸이 달아있다.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가난한 살라망까 출신의 대학생의 등장. 남편의 갑작스런 귀가는 이들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고 대학생은 살라망까 동굴에서 터득한,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불러오는 기술을 능청스러운 연기한다. 졸지에 악마가 돼 버린 두 명의 정부(情夫)! 순진한 남편은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한다.

인간 악마와 남편 빤끄라시오 간의 대화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악마가 식사를 하며, 노래도 부르며, 유명한 춤도 잘 춘다는 사실에 남편은 놀란다. 악마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친근한 동네 이웃과도 같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나이어린 여성과 결혼하여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늙은이와 이를 속여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젊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늙은이는 일체 외출을 금하고 문과 창문에 자물쇠와 철책을 설치하며, 이웃조차도 대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한다. 그에게 도냐 로렌사는 늘그막의 “여생의 동반자이자 선물”(P.151)에 불과하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억누를 수 없는 법, 그래서 도냐 로렌사와 하녀는 이웃인 오르띠고사와 짜고서 한 사내를 몰래 집안으로 들이고 굶주린 아내는 회포를 푼다. 그림 속의 사내와 현실의 사내. 남편을 속이기 위한 아내와 하녀, 오르띠고사 간의 절묘한 화음은 부조화 속의 조화를 연상시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유명한 4중창 장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세르반테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짤막한 단편극에 진지하고 심오한 사족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부조리, 결혼제도의 모순과 불평등, 억압당하는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지위 등 이것저것 주워오면 꽤나 그럴듯하다.

세르반테스는 요컨대 외형적 가면과 속박을 벗어난 소위 생얼의 인간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쑥스러움과 재미를 동시에 관객에게 안겨준다. 물론 비평가들의 현학성도 충족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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