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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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사상 영원한 인간형으로 일컬어지는 돈 키호테, 햄릿, 파우스트, 그리고 돈 후안[또는 돈 환, 돈 주앙]. 그 돈 후안의 원형이 바로 이 작품 <돈 후안,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이다. 돈 후안은 후대에 많은 오마쥬를 낳았다. 몰리에르, 푸쉬킨 등 문학적 후배는 물론 음악에 있어서도 모차르트와 리햐르트 쉬트라우스가 표제를 붙였다. 무수한 예술가와 독자를 끌어들인 작품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돈 후안은 여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인물이다. 극중에서는 겨우(?) 4명의 여성을 유혹하고 비록 1명은 실패하고 마는데 그치지만, 유혹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위선의 가면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혹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냉혹함과 비열함마저 드러낸다.

작가는 돈 후안이 석상에 초대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을 통해 악덕을 저지른 불신자의 최후를 경고하는 종교적 도덕적 교훈을 표면적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원형적 인물 돈 후안의 캐릭터 창조에 있다.

돈 후안의 성적 방황은 자포자기와 체념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성적 유린을 통해 얻는 찰나적 쾌락에 의해서만 현세의 삶을 유지해 갈 에너지를 보급 받는다. 그는 세상에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감히 신에게 도전적 언사를 거듭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주위에서 그의 악행에 대한 신의 분노를 경고하는데 대한 반응이다.

“그래, 정말 오래도록 참아주는군!” (P.49)
“정말 오래도록 내버려 두시는군!” (P.52)
“죽어서까지 그렇습니까? 참으로 오래도록 봐주시는군!” (P.77)
“죽을 때 큰 상을 내리시려는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3)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6)
“그나저나 당신도 참 인내심이 강하오.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P.120)

돈 후안은 신도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과 담대함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뻔뻔스러운 무모함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석상과 만찬을 나누며, 기사답게 석상의 무덤으로의 초대를 회피하지 않는다.

“두렵다는 단어를 썼소? 나한테? 당신이 지옥 자체라 해도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소이다.” (P.129)

그리고 돈 후안은 불신자로 죽어간다.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은 당대 여인들의 행태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기도 하다. 유혹된 네 명의 여인은 모두 당대의 도덕률에 비추어 볼 때 흠결을 지니고 있다. 이사벨라 공작부인은 정혼자 옥타비아인 줄 알고 몸을 허락하지만 이들은 아직 혼전이다. 티스베아는 신분의 차이와 남자의 겉과 속이 다른 속성을 알면서도 신분 상승의 욕구에 이를 눈감는다. 이 점에서는 아민타와 그녀의 아버지 가세노도 마찬가지다. 한편 유혹에 속지 않은 도냐 아나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버지의 의사에 반해 모타 후작에게 마음을 주고 심야에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돈 후안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과 여성들의 허영심을 적절히 조합하여 유혹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불신자로 징계받은 자>는 전자보다 더 극적이다. 전자가 단일한 주인공의 단일한 성격으로 시종여일 일관하는데 반해 복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들은 선과 악의 변신을 넘나든다. 이 점에서 평면적 구성의 전자에 비해 입체적인 구성미와 성격묘사가 크게 부각된다.

여기서는 신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수도사 파울로와, 세상의 온갖 악을 저지르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무뢰한 엔리코가 처음부터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파울로가 선일 때 엔리코는 악이었으며, 파울로와 엔리코가 중간에 모두 악을 행하다가 마지막에 엔리코는 선으로 구원받지만 파울로는 끝내 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옥불에 빠진다.

파울로와 엔리코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신학적 논점은 별로 관심이 없다.

엔리코는 한마디로 사회악(194면~199면에 걸친 엔리코 자신의 악행의 진술을 들어봐라)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연민과 사랑은 그가 절대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하느님이 저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저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조차 그분의 자비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P.254)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위대하시다. 그분의 자비하심에 경배를! 그 자비하심으로 나 구원받으리!” (P.277)

파울로는 10년간을 수도했지만 악마의 유혹에 빠져 타락자의 길로 들어선다. 신은 파울로의 타락을 방관하였다. 이는 그가 순간적으로 교만의 죄에 빠졌다는데 연유한다. 악마는 절묘하게 이 틈을 노렸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하느님을 믿기보다 의심하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지.” (P.166)

흔들리는 어린 양을 악마에게 방치하기 보다는 천사의 보살핌으로 어루만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면 엔리코와는 달리 어차피 파울로는 악에 넘어갈 운명이었던가? 악마의 유혹에 비해 꼬마 목동은 너무 약하다.

“의로웠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았던 이를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나는 세상의 재앙이 될 겁니다.” (P.204)

“주님, 제가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님을 벌써 저를 심판하셨으니, 이제 다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렵니다.” (P.205)

나는 여기서 파울로라는 인물에 동정심을 품는다. 그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기 쉬운 보다 인간적인, 어떤 측면에서는 보다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신성과 이성 사이의 흔들림은 종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종교에서는 오히려 무지하지만 신성에 대한 몰입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파울로에서 나와 멀지않은 고독한 현대인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의 뛰어난 점은 탁월한 성격 창조에 있다고 하겠다. 돈 후안과 파울로라는 대조적인 불멸의 캐릭터. 그는 진정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에서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중간을 잇는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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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구) 문지 스펙트럼 11
작자 미상,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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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는 고대 영어로 씌어진 최초의 장시로서 고대 스칸디나비아를 배경으로 베오울프라는 한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한 영웅 서사시이다. 흔히 그렇듯 작자는 미상이며, 10세기 이전에 문자화되었다.

지리적 배경이 비교적 생소한 북유럽 지역이므로 등장인물과 계보, 괴물마저도 낯설다. 무엇보다도 아직 기독교에 완전히 융화되기 이전 토속적 세계관과 문화를 접할 수 있다. 3천행이 넘어가는 대작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고대 영웅을 다룬 소설처럼 술술 읽혀나간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도 후에 영화화되었다고 하므로 기회가 닿으면 한 번 감상하리라.

각설하고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와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어 기분 좋은 생소함을 안겨주는데, 주인공 베오울프는 영웅적 업적 외에도 외에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현재의 스웨덴 남부와 핀란드 남부 지역의 예이츠 세 왕국의 물고물리는 치열한 전쟁과 은원 관계가 작품의 깊이와 폭을 더해주고 있다.

베오울프는 예이츠 출신의 용사이다. 덴마크 왕국에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잡아먹지만 아무도 이를 처치하지 못한다. 베오울프는 용사들과 함께 덴마크로 건너가 그렌델을 해치운다. 무기가 아무 소용이 없자 맨손으로 그를 잡아 죽인 것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그 어미마저 괴물들의 호수로 들어가서 해치운다.

여기서 이야기는 오십년을 훌쩍 넘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예이츠의 왕이 된 베오울프는 평화롭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땅속에 잠자고 있던 용이 깨어나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다. 노령의 베오울프는 죽음을 각오하고 용의 동굴에 뛰어들고 젊은 용사 위글라프의 도움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용을 죽이는데 성공하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고대 영웅들의 위업과 그를 기리는 문장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어, 문학사적 의의 외에 현대의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좀 다르다. 그의 영웅으로서의 업적은 인간을 상대로 한 참혹한 전쟁에서가 아니라 인간을 괴롭히는 괴물을 소탕한데서 비롯한다. 또한 그의 최후 역시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용을 쓰러뜨리는 싸움의 결과이다. 그는 휴머니즘적 영웅인 셈이다.

또한 통상 화려하고 당당한 찬미로 끝나는 영웅 이야기와는 다르게 베오울프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젊은 시절이라면 패기와 용기, 자신감과 체력 등 명예를 위하여 모험을 무릅쓰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령의 늙은 영웅, 그에게는 괴물과 싸우는 게 버겁다. 승리에 대한 확신보다도 싸움의 패배, 즉 죽음에 대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의 마음은 슬펐고 불안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노라. 그 고령의 왕이 맞이해야만 하는 운명은 그에게 바짝 다가와 영혼의 보고를 찾아 육신에서 그의 생명을 떼어놓으려 했노라. 이제 군주의 생명은 육체에 오랫동안 묶여 있을 수가 없었노라.” (P.120)

그럼에도 그는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과는 다르다. 그는 목숨을 아끼고자 운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무릅쓴 고독한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명예는 죽음과 더불어 스러지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곳곳에 기독교의 자취가 드러나 있지만, 이것은 표피에만 머물고 있다. 즉 작품의 온전한 보존을 위하여 종교의 외피를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가혹한 검열에도 버티어 나갈 수 있으므로. 한 꺼풀 벗겨보면 기독교의 세례 이전 영국인들의 선조인 고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거칠고 생생한 호흡을 가감 없이 체험할 수 있다.

북유럽에는 흔히 알려진 그리스 로마신화 체계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신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들의 방대한 신화 체계는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일부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 그들은 익숙하지 않다. 이번 참에 북구의 신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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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 시드의 노래 대산세계문학총서 76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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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76

‘엘 시드의 노래’로 세간에 알려져 온 중세 스페인의 영웅 서사시다.

원제를 감안하면 ‘엘 시드’보다는 ‘미오 시드’가 보다 올바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주군의 노래’보다는 ‘나의 주군의 노래’가 더 명확하므로. 어쨌든 미오 시드 또는 작중의 캄페아도르 모두 주인공인 실존 인물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를 지칭한다. 작중에서는 ‘캄페아도르’로 많이 불리며, 그 외에도 ‘호시절에 태어나신 분’, ‘아름다운 턱수염을 가지신 분’ 등의 표현도 사용된다.

번역이 어려운 시 장르이지만 그래도 서사시므로 최소한 기본적 내용 전달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번역자가 운문에 기울인 관심의 정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산문 이야기로서 받아들인다.

이야기의 배경은 스페인이 아직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소왕국으로 분산되어 있던 12세기 무렵, 사라센 제국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이슬람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뿌리내리고 있다.

대체적 줄거리는 이렇다. 알폰소 왕에게 참소를 받아 추방된 미오 시드는 자신의 추종자와 더불어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지역을 정복해 나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지며 마침내 전략적 요충지인 발렌시아를 점령하여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그럼에도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없어 드디어 사면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 꼭지다.

후반부는 왕의 주선으로 내키지는 않지만 카리온의 왕족들을 사위로 맞아들인 미오 시드와 그의 사위들의 이야기다. 막대한 지참금을 탐낸 사위들은 비겁함이 드러난 걸 창피하게 여겨 미오 시드를 떠나고 아내들에게 모욕을 가한다. 분노한 미오 시드는 왕에게 재판을 요구하고 모든 명예를 회복하며, 딸들은 더나은 남편감을 찾게 된다. 이윽고 미오 시드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전체적 구성은 첫 번째 노래와 두 번째 노래가 창업을 다룬다면, 세 번째 노래는 수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구전문학으로서 원작의 묘미를 느낄 방도는 없지만 산문으로서도 전체적 이야기는 제법 흥미롭다. 미오 시드가 영웅으로서 전승되어 온 이유는 타고난 개인적 탁월성과 불우한 처지를 극복하는 뛰어난 업적, 그리고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가톨릭 세력을 확대하는 종교성이 결합된 후대 국토 회복 운동의 원조라는 측면이 결합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내와 딸들은 감금되고 전 재산은 몰수당한 채 국경 밖으로 추방된 기사. 이쯤되면 웬만한 이라면 자포자기할 법하다. 그러나 미오 시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화석화된 영웅상이 아니다. 딸들의 치욕에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이 작품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미오 시드가 미약한 처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이슬람 지역들을 차례차례 점령하며 캄페아도르로서 명성을 드날리는 과정에 있다. 오늘날 스페인 중부에서 시작하여 동남진하여 카스테혼 데 에나레스, 알코세르 점령을 시작으로 마침내 발렌시아를 획득하여 근거지로 삼고, 탈환을 노리는 모로코 이슬람 파병군을 격파하여 지배권을 확고히 한다.

미오 시드는 지방 귀족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능력으로 입신양명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이 그의 사위인 카리온의 왕족들이다. 그들은 고귀한 혈통을 자부하는 이들로서 오로지 미오 시드의 명성과 재산 만을 목적으로 결혼을 노렸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아내를 버리며 그에 대해 당당하다.

“우리는 카리온 백작의
고귀한 혈통으로
왕이나 황제의 딸들과
결혼해야 합니다.
하급귀족의 딸들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지요.
그녀들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권리를 행사한 것이니
우리는 더 높이 평가되지
나쁘게 평가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P.333)

“우리는 최고 순혈의
백작 가문 사람들이니,
미오 시드 돈 로드리고와
인연을 맺은
이 결혼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가 그의 딸들을 버린 것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녀들을 버림으로써
명예롭게 되었던 것이다.” (P.339)

이들은 자신이 결혼을 원했다는 사실을 슬쩍 외면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미오 시드의 고귀함과 카리온의 왕족들의 미천함이 대비됨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미오 시드는 영웅으로 살다가 평온하지만 당당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후의 역사는 미오 시드의 의의를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즉 미오 시드가 있었기에 발렌시아를 지킬 수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곧 발렌시아의 상실로 이어졌다. 아직은 가톨릭 세력의 힘이 그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왕은 미오 시드의 잔존 세력이 치외법권적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진해서 이슬람 세력에 발렌시아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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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뉴 -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
키몬 스코르딜스 지음, 송인엽 옮김 / 오늘의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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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국가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UN군의 기치 아래 16개국이 참전하였다. 그 중에서 이색적인 것은 남미의 콜롬비아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의 파병이다.

이 책은 그저 우리나라에게 있어 가난하고 비참한 아프리카의 한 약소국으로 인식되는 에티오피아가 당시 머나먼 아시아의 자그마한 분단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전투 병력을 파병하고 그들의 전투 활약상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에티오피아의 한국 파병부대명은 ‘강뉴’인데, 현지어로 ‘초전 박살’과 ‘혼돈에서 질서를 세우다’를 뜻한다고 하며,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가 파병부대에 직접 하사한 부대명이라고 한다. 강뉴 부대는 대대 규모로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총 5진이 파견되었으며, 전원이 최정예인 황실근위대에서 선발되었다.

이쯤에서 에티오피아 황제가 파병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독특한 종교, 문화적 독자성을 가진 국가다. 기독교 국가로서 수천 년간 독립 국가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전반에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수년 간 강점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부당한 침공에 맞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원조를 호소하였으나 국제연맹은 이를 외면한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불법 침공이 묵인되는 것을 지켜본 나치의 히틀러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가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당시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의 불법 침공을 강력히 제재하였다면 그 후 세계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어쨌든 약소국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집단안보가 최선의 방법임을 인식한 에티오피아는 UN군에 적극 참여한다. 비록 과거 자신은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UN 결성 후 최초로 집단안보를 선언한 한국전쟁에 동참하는 길이 후일 자신들의 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인류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하고 이상적인 수단으로 집단안보를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는 집단안보 정신이 결여되어 1935년부터 이탈리아에 의해 5년 동안 점령되었던 뼈아픈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집단안보의 결여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P.27)

한국전쟁에서 강뉴 부대의 엄정한 규율과 과감한 용맹성은 많은 우방국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들은 크고 작은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으며, 단 한 명의 포로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한 그리스 종군기자가 그들의 활약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펜을 들어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4년에 출간하였고, 그것이 이제 50여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순전히 책의 내용만을 살핀다면 단조롭고 평면적이다. 구체적인 전투의 기록이 생생하게 묘사된 게 아니라 부대의 지휘관 소개와 전투일지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흥미로운 전쟁 다큐를 기대하고 책을 집어 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그동안 외면당했던 한국전쟁에서 에티오피아 군대의 의의와 역할을 재발견하고, 그들이 머나먼 타국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목숨을 바치러 온 연유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데 있다.

강뉴부대 출정식에서 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축사를 잠시 들어보자. 황제의 축사는 과거의 체험과 맞물려 피를 토하는 절규가 느껴진다.

“집단안보 장치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동료애가 있는 어떤 작은 나라도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어떤 국민도 유엔의 집단안보 장치에 의해 그 독립이 보호되어야 한다...(중간생략)...집단안보에는 국경도 물리적 거리도 초월하도다. 이곳에서 머나먼 극동의 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집단안보 원칙에 참가하는 데에는 아무런 주저도 없으며 단지 유엔에 대한 회원국의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도다.” (P.280~282)


우리나라는 집단안보 덕택에 국가의 명운을 존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UN의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지원을 제공하는 유일한 국가, 세계가 주목하는 모범국가로 발전하였다. 이제 우리의 역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가난하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가난하고 처참한 처지였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국제사회에 진 영원한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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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험
세르반떼스 지음 | 조구호, 임효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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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의 최후 작품이다. 일단 탈고는 하였으나 최종 교정을 마치지 못한 채 그는 임종 하였고,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따라서 작가의 세심한 손길이 다소 미흡하여 산만하다는 인상이 곳곳에 드리워진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 (P.9)

그렇다.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다. 그렇다고 세르반테스답게 무겁고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재기발랄하고 곳곳에 유머와 해학이 넘친다. 이게 세르반테스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작은 활자로 빽빽하게 5백면을 훌쩍 넘기는 분량을 사실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으로 분책하는 것이 독자에게 심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일 것이다. 막상 책장을 넘기게 되면 다종다양한 모험이 잇따르기 때문에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품 속에 등장하고 전개되는 무수한 인물과 사건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진지하고 구축적인 작가라면 에피소드 하나 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편은 거뜬히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이므로.

세르반테스는 <사랑의 모험>에서 <모범소설>과 <돈키호테>의 스타일을 결합시키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편력 및 우연한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후자를, 그리고 에피소드들의 제재 즉 인생과 사랑이라는 점에서 전자를 계승한다.

주인공 뻬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는 북구 출신(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임이 밝혀진다)의 왕자와 공주인데, 각기 뻬리안드로와 아우리스뗄라라는 가명을 쓴 채 남매로 위장하고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의 목적은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성스러운 도시인 로마로 가서 서원하는 것, 즉 성지순례이다.

그들의 배는 폭풍우를 만나서 조난당한 채 북해와 발트해를 떠돌아다닌다. 야만족들의 섬에서 목숨을 뺏길 뻔하고, 얼음바다에 갇혀 죽음을 기다린 적도 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통해 더욱 단련된다.

여기에서 아우리스뗄라의 불세출의 빼어난 미모를 연모하는 덴마크 왕자 아르날도와의 경쟁 관계는 흥미를 배가하는데, 그를 포함한 야만족 출신의 안또니오와 여동생 꼰스딴사 등 개성미 넘치는 인물들의 등장은 소설에 재미를 배가하지만, 한편 혼란스러움과 산만함 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북구에서의 고난을 마친 채 마침내 포르투갈에 당도한 일행은 육로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로마로 입성한다. 여기서 작품의 분위기는 일대 전환한다. 전반부의 북유럽 장면이 신화와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면, 남유럽의 순례 길에서는 보다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요소가 강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집에서와 매우 흡사한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세 가지 축은 사랑, 순례, 신앙이다. 이 삼 요소는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인공들은 삼 요소를 지키고 달성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의 결실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우직하고 무모한기도 한 그들의 선택은 차라리 현실 세계의 불의와 부조리에 지친 작가가 꿈꾸는 참다운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작가는 사랑과 인간에 대하여 너그럽다. 늙은 뽈리까르뽀 왕의 아우리스뗄라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그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음험한 계획은 주인공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였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음에도 작가는 그리 비판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면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충분히 변명되는데, 사랑의 열정이 한 사람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 어떤 추리력으로도 사랑의 열정을 알아 맞출 수 없고, 그 어떤 이성도 사랑의 열정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P.266~267)

한편 당대의 사랑은 여인의 외모에 대단히 집중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아우리스뗄라의 비견할 수 없는 미모는 뭇남성들의 혼을 빼놓는다. 불행한 뽈리까르뽀 왕은 물론, 아르날도 왕자를 더불어 방랑하게 만들며, 네무르스 공작도 불원천리 달려오게 만들 정도다. 그런데 주술사의 저주로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시들자 상황이 변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랑이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듯,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사랑도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무덤에 도착할 때까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영혼 속에 많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 추한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것인가 보다.” (P.537)

이런 사례는 작가의 <모범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외적 아름다움에 빠진 구혼자는 아름다움의 상실에 실망하며 여인을 떠난다. 오직 진실한 구혼자만이 외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대로임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말대로 기적적인 경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의 시대나 21세기 현대의 우리 사회나 미모지상주의에 대한 선호 풍조는 변함없다.

이 소설이 <돈키호테>와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물 유형의 창조에서도 주제와 작품 전개의 집중력과 일관성 면에서 확실히 어수선한 인상이 강하다. 역시 작가의 죽음에 기인한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굳이 세계 최고의 명작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체로서의 재미를 찾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당시의 추세-작가의 <모범소설>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임을 이해한다면 보다 너그럽게 열린 가슴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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