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발 문학의 이해와 감상 58
이준섭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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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일과성에 머물지 않고 필연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더이상 우연이 아니다. 네르발과의 조우가 그러하다.

제라르 드 네르발. 19세기 전반을 살다간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 당대에는 작품성보다 기이한 행동과 정신발작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사후 망각의 세계에 묻혔다가 20세기 전반부에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선구자로 각광받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라마르틴의 소설을 빌리는 과정에서 달랑 한 권만 들고 나오기 뭣해 별 생각 없이 옆에 나란히 놓인 책 <불의 딸들>을 같이 집어들었다. 단순히 표제가 흥미롭다는 이유로.

라마르틴에 이어 네르발의 작품을 읽으려고 하다 앞뒤 표지의 짤막한 소개 문구를 보면서 녹록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몽상과 광기로 쓴 작품이라면 더구나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는데, 일반 독자가 쉽사리 감당할 수 있을까 저어되어 먼저 그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다행스럽게 이 책이 여기에 부합된다. 문고판보다 약간 큰 판형에 면수도 100여면 남짓하다. 더구나 저자는 국내 유일의 네르발 전문가이니 더욱 신뢰가 간다.

저자는 네르발의 삶에서 유년기 부모와의 단절을 가장 크게 주목한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외가에서 자란 그에게 전장에서 퇴역한 부친의 군인적 태도는 불신과 적대감을 유발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상실한 모성에 꾸준한 그리움을 보낸다.

그의 삶에서 어머니 외에 또 다른 여인, 즉 배우 제니 꼴롱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성의 순수함을 결혼으로 깨뜨리지 못한 게 아닌가하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그녀의 이미지와 사랑은 그의 작품 속에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의 정신발작은 젊을 때부터의 몽상적 기질과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존재의 잇따른 상실, 작가로서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좌절감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실비>와 <오렐리아> 등이 모두 최만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술되었다. 아직 그의 작품을 실제 읽지 못한 탓에서 구체적 작품 내용과 성향을 알지 못하나 삶을 통해서도 대체적 인상과 느낌을 가질 수는 있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여러 작가들 중에서 그들의 삶이 작품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들을 보면 그 인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P.101)

즉 그의 모든 작품은 자신의 체험에 기반하며 그것을 몽상과 교묘히 섞어 버무린 것으로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구자는 물론 독자도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는 그의 문학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요약하여 소개하는 이런 유형의 소책자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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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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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환상 소설
에드거 앨런 포 외 지음, 이탈로 칼비노 엮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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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소설은 비일상의, 기묘하거나 공상의 제재를 다루는 소설 유형이다. 흔히 판타지 소설이라는 용어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깝다. 환상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나 예술적 가치 등등은 내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다만 환상 소설은 일상성 탈출과 상상력의 극대화 지향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신기한 것에 대한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본능도 일정 기여를 하고 있다.

환상 소설에서 다룬 제재는 공포영화 내지 판타지영화 등에서 집중적으로 채택하여 어찌 보면 현대의 시각에서는 그리 새롭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작품이 씌어진 19~20세기 초 당시의 배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분량이 방대하고 각각의 작품이 작가가 상이하며 내용도 뚜렷한 개별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하나하나마다 짤막하나마 소회를 붙이는 것이 옳을 듯싶다.

* 악령에 씐 파체코 이야기 (얀 포토츠키)

수수께끼의 책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 중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 스토리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보면 악인의 시체에 깃들인 악령의 마법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체가 형제간인데, 등장인물을 유혹하고 밤을 보내는 악령의 현신은 자매로 나타난다. 그리고 언제나 시체 곁에서 아침에 깨어난다. 그리고 악령의 추격은 되풀이된다.

여기서 다루는 소재는 시간(屍姦)과 삼각섹스라는 변태적 성관계이다. 여전히 단편적 이해라는 점을 유보하면서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두운 성적 본능을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보다 진지한 이해는 역시 작품 전체를 읽어봐야 될 것이다.

* 가을의 마법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환상소설의 주된 소재에는 환상(환각과 환청 등)과 광기가 빈번히 등장한다.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집착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환상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인간들 사이에 공존하기 어렵다. 광기와 정상 상태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 명쾌하지 않다. 그래서 과거에는 정적을 탄압하기 위하여 광인으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라이문도는 사모하는 여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마법의 영향으로 환상 속에서 살인과 타락의 삶을 즐겼다. 그리고 마법이 끝나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모든 게 가을의 숲 속에서 벌어진 마법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는 수치와 상실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마법의 환상 속에 뛰어든다. 불나비처럼.

* 모래 남자 (E. T. A. 호프만)

호프만의 여러 작품은 당대 및 후대의 예술가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클래식 음악에 국한한다면 이 작품은 들리브의 발레음악 <코펠리아>,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의 원작이기도 하다. 물론 원작의 음울함과 기괴함, 비극성이 희극화되거나 상당히 감소되었다.

또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음울한 힘이 잔인한 놀이에 쓰는 장난감에 불과하며 저항을 해 봐야 부질없기 때문에 겸허하게 자신의 운명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P.72)는 대목에서는 영화 <데스티네이션>이 연상된다. 인간의 불행은 결국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엄숙하면서도 진지한 논고가 아닌가.

18~19세기에 과학과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동시대인의 찬탄을 자아낸 동시에 두려움과 불신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학자는 중세의 연금술사 내지 마법사와 동일시되어 거리낌을 당하였다. 여기에서도 코펠리우스와 스팔란차니의 인물 묘사는 어둡고 음흉하며 악마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당대인의 시각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올림피아, 즉 자동인형은 영혼이 없는 인간을 모방한 존재로 현대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로봇 중에서도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 사이보그에 해당한다. 로봇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은 시대를 달리하지만 여전하다. 과거의 경우 영혼이 없다는 데 주목하여 악마의 변신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지나치게 발달한 로봇에 의해 인간 세계가 파멸에 처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호프만은 당대의 현실에 주목하여 후대를 예지하는 가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셈이다.

* 떠돌이 윌리 이야기 (월터 스콧)

지형과 기후의 특성인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음울하고 기괴함을 자아내는 작품이 제법 있다. 역사소설의 대가 월터 스코트가 남긴 이 단편에는 역사와 환상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사실(史實)이 전설로 변화되듯이.

저승(지옥)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양의 동서 및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각양각색이다. 이승에서 수만 리 떨어진 머나먼 곳이거나 땅속 깊은 곳은 물론 바로 이웃으로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스코트는 로버트 경의 성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정한다.

그리고 옛 서양신화처럼 생자(生者)는 사자(死者)의 세계에서 먹고 마시거나 해서는 안 된다. 영원히 인간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은 화자의 선량한 할아버지의 지옥 방문기를 담고 있다. 그가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선량함의 덕이 아니겠는가.

* 영생의 묘약 (오노레 드 발자크)

비단 진시황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영생에 솔깃하지 않을 이는 자고로 드물다. 하물며 지위와 재화를 모두 소유한 이라면 더할지언정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 영생의 묘약은 현인을 바보로 만드는 달콤한 독약이다.

돈 후안(우리가 아는 그 돈 후안 내지 돈 쥬앙과는 동일 인물일까?)은 부친의 부탁을 저버려 영생을 돕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부친(부친의 눈)을 살해한 그에게 현생의 삶과 도덕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저 생을 즐기면 그만이다. 나이 들어 죽음에 이르면 글자그대로 부활하면 그뿐이지 않겠는가. 다만 부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그는 언제나 고독하다.

아들의 실수로 상체만 삶을 회복한 그의 신체를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삶도 죽음도 아닌 존재가 된 그의 머리가 죽은 육신에서 스스로 떨어져나와 수도원장을 물어뜯는 장면은 하나의 희극이자 동시에 인간, 종교, 도덕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 다름 아니다.

* 눈꺼풀 없는 눈 (필라레트 샬)

다시 스코틀랜드다. 이번에는 정령의 등장이다. 요정과 정령, 유령과 귀신 등은 모두 민간설화의 단골 소재이다. 그만큼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은 항상 존재한다. 물론 현대에도 흉가, 괴담 등 공포영화로 꾸준히 재연되고 있다.

아내를 질투하여 잠도 자지 않고 감시하여 죽음으로 내몬 메를런드는 핼러윈 밤에 악령에 휘말려 정령 스펑키와 결혼한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지만 눈꺼풀이 없는 이상한 빛을 발산하며 결코 잠들지 않는 신부와 그녀의 눈. 메를런드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행위를 그대로 돌려받는다. 아메리카로 도주하여 인디언과 안정을 되찾고 숨어사는 메를런드. 하지만 눈꺼풀 없는 눈의 추적은 집요하고 대양을 뛰어넘는다.

스펑키 신부인 스펠리는 특이한 존재다. 대개의 악령은 밤에만 활동하는데 그녀는 햇볕 아래의 현실 세계에서도 의연하다. 꿈과 현실이 결합한 것이며, 정령이 인간의 육신을 빌려 환생한 셈이다. 메를런드는 끔찍하면서도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매력에 빠져든다. 제발 잠만 자게 해준다면 그런대로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 마법에 걸린 손 (제라르 드 네르발)

사실 이 책은 네르발의 작품을 추적하던 결과이다. 주류 작가들이 아닌 경우 국내에 나온 번역본은 몇 편 없다. 다행하게도 네르발은 이준섭이라는 전문가의 노력 덕택으로 제법 나온 편이지만.

‘마법에 걸린 손’은 나쁜 마법사와 통제권을 상실한 신체가 등장한다. 정신의학 관점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기 이전에 이미 문학은 영혼과 따로 움직이는 손과 발 등을 괴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악마가 씌었거나 마법사가 어둠의 마법을 행한 결과이다.

여기서도 성실하고 착한 재단사는 불가피한 상황에 몰려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투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선처를 부탁하러 방문한 판사를 두들겨 패는 것은 결코 재단사의 본의는 아니다. 그럼에도 재단사는 교수형을 당하며, 잘려진 손은 유유히 마법사에게 돌아간다.

어찌 보면 재단사 외스타슈의 죽음은 나쁜 마법사가 만든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마법사는 교수형 당한 사람의 손이 도둑들에게 매우 값비싸게 거래됨을 알고 있다. 한편 재단사가 정신을 차리고 마법사에게 대가를 지불했다면 그의 운명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마법사가 외스타슈의 미래를 점쳤듯이 그의 교수형은 운명 지어진 사항이라면, 어떤 노력과 모부림도 무위에 그쳤을 것이다.

네르발 특유의 몽상과 환상적 자질은 순문학점 범주에 그치지 않고 이 ‘마법에 걸린 손’을 포함하여 스릴러물 내기 괴기물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을 몇 편 남기고 있다. 흥미롭다.

* 젊은 브라운 씨 (너새니얼 호손)

서양 괴기영화를 보면 악령은 십자가와는 상극이다. 위기의 순간에 십자가가 목숨을 구해준다. 이처럼 사악한 세계는 신심 깊은 기독교 세계와는 병립할 수 없다. 이것이 통상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호손은 이를 뒤집는다. 순수한 신앙과 이교[미신] 숭배가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 소도시 세일럼이다. 낮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인격자, 목사였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이교에 물든 타락한 영혼으로 변신하다.

브라운 씨가 악마숭배자들의 숲 속에서 도망쳐 나온 후 더 이상 인간과 사회, 신앙을 신뢰하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는 인간의 이중성의 근원을 제대로 감지하였다. 그가 세일럼을 떠난다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다른 도시, 사람들이 세일럼과 다르지 않을 텐데.

“브라운 씨의 묘비에는 그 어떤 희망의 문구도 새겨지지 않았다. 그의 삶이 어둠에 덮여 음울했기 때문이다.”(P.229)

브라운 씨는 세일럼의 굴원(屈原)이다. 모두가 술에 취하면 본인도 술을 마시면 되는데 그는 홀로 깨어있기를 원하였다. 세상이 탁하면 자신도 진흙 속에 뒹굴면 되는데 그는 깨끗하기를 주장하였다.

* 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더라. 카프카의 유명한 <변신>이라는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의 코가 사라졌더라. 이것이 고골[고골리]의 <코>라는 작품이다. 고골의 작품 제재의 파격적 선정이라는 면에서 카프카의 대선배다. 카프카는 인간 실존의 추상적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고골은 사회 비판과 풍자의 구상적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그것이 양 작가의 차이점이다.

코를 몰래 버리려는 이발사 이반 야코블레비치의 고민, 잃어버린 코를 되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8등관 코발료프 소령이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코가 당당한 관리로 변장하여 거리를 활보한다니 희극도 보통이 아니다. 어느 날 코가 제자리에 붙으면서 소동을 끝난다.

이 작품은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딸과의 결혼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여 항의 서한을 쓰는 장면, 신문에 코를 찾는다는 광고를 내려는 모습, 되찾은 코를 붙이기 위해 끙끙대는 모습이 이발사의 경관 나리에 대한 관계, 공직사회의 서열 관계 등과 교묘하게 엇갈려 배치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외모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용의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코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소령은 어찌 살아나갈 수 있으려나.

* 죽은 여자의 사랑 (테오필 고티에)

그 유명한 뱀파이어가 출현하는 작품 중 하나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여자 뱀파이어다. 사제를 유혹하는 팜므 파탈. 클라리몽드에 빠져 낮과 밤, 성(聖)과 육(肉)에서 허우적거리는 로뮈알드. 그는 점차로 자신이 사제인지 젊은 귀족인지, 사제 생활이 실제인지 흥청대는 귀족생활이 비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는 클라리몽드가 살아있는 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므로.

세라피옹 신부의 도움으로 이중생활에서 벗어나고 흡혈귀는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데, 꿈에서의 클라리몽드의 마지막 탄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불쌍한 사람! 불쌍한 사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왜 그 신부의 말을 들은 거죠?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다고 가여운 내 묘지를 파헤치고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나를 그대로 드러낸 거죠? 우려 영혼과 몸이 맺은 모든 관계가 이제 끝났어요. 잘 있어요, 당신은 나를 아쉬워할 거예요!” (P.296)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과거 다른 이들처럼 목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몇 방울의 피로 둘 사이의 행복이 계속될 수 있다면 로뮈알드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동서양의 고금을 막론하고 망자(亡者)와의 사랑을 그린 여러 이야기들이 전래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의 법칙에게는 위배되지만 그만큼 그들의 사랑은 절실하고 슬프기조차 하다.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를 만난 이후 과거 흡혈귀 시절의 잔재를 떨쳐내 버렸다. 로뮈알드가 사제가 아니었고, 도덕적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둘의 사랑은 생사를 초월한 한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이 이 짤막한 이야기가 통상의 흡혈귀 물과 차별되는 점이다.

* 일의 베누스 (프로스페르 메리메)

어릴 적 청소년용 동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옆에 삽화까지 그려져서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번역본에 따라서는 <비너스의 살인>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어쨌든 비너스 동상이 살인을 한다는 내용인데,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먼저 비기독교적인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 숭배가 기저에 깔려있다. 고대 유물에 대한 맹목적 찬미는 유물의 진정한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한편 비너스의 살인의 고의성에 대해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기에 비너스는 알퐁스 씨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그를 힘껏 안아주었을 뿐이다. 살인은 고의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동상의 악의적 미소와 화자의 동상 명문 해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비너스 동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알퐁스 씨는 비너스에게 바치는 희생물이 된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여하 간에 아름다운 비너스의 동상에 자리 잡은 악의 속성은 무생물에 깃든 악령이라는 형식으로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 공포영화에서 간혹 사용하는 인형과 마네킹, 또는 박제를 상기하자.

* 유령과 접골사 (조지프 토머스 셰리든 레 퍼뉴)

저승에 관한 아일랜드인의 믿음을 이해해야 작품이 그리는 전반적 무대를 이해할 수 있다. 저승에서 신참 영혼은 갈증에 시달리는 선배 영혼들에게 시원한 물을 끊임없이 떠다 바쳐야 한다.

죽은 노영주가 심야에 이승에 나타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임무에 불편한 부러진 본인의 다리를 치료받기 위하여 접골사가 성에 들어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일견 불쌍하지만, 강압으로 접골을 요구하다가 성수를 들이켜고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유령은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귀를 권고하는 강력한 요청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 일러바치는 심장 (에드거 앨런 포)

문학에서 완전 범죄를 시도하는 대표적 인물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이다. 물론 그는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죄를 고백하고 만다. <일러바치는 심장>에서 노인을 죽인 나는 완전 범죄를 거의 성공할 뻔하였다. 방문한 경관도 여유 있게 속여넘길 만큼. 하지만 점차 드높아지는 죽은 노인의 심장 박동 소리. 그는 경관들도 이를 알아채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이윽고 발광적 분위기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백한다. 미친 사람처럼.

짤막한 단편이지만, 점증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작가의 수법이 대담하다.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긴장을 유발하며 중압감에 화자를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독자마저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 그림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림자는 모든 인간에게 딸려 있어 분신으로 일컬어진다. 한편 그림자는 인간 존재의 증거가 되기도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올바른 의미에서 인간이 아님을 표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귀신의 아이는 그림자가 없다는 속설이 있지 않는가.

정상적인 주종관계가 갑자기 역전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것이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환상소설의 아이디어다. 그림자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그림자처럼 전락하여 이를 피할 수 없는 경우 거기에는 처절한 수용과 비극적 죽음만이 남는다. 나 아닌 나가 나를 대신하여 나로서 행세하는 것, 이것은 누구나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 신호수 (찰스 디킨스)

자신을 지정하는 죽음의 예후를 사후에야 발견하는 것. 생전에는 그 예후를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좌불안석이다. 가뜩이나 불안한 징후를 외진 지역의 기차 터널 앞에 위치한 신호소와 신호소가 위치한 지형, 그리고 기분 나쁜 터널이 배가시키고 있다. 여기에 기차 신호수는 홀로 근무하고 두려움에 휩싸여 예후대로 죽음을 맞는다. 여기에 작품 첫장면에서 화자의 외침소리가 죽음의 유발과 교묘하게 연결되니 신호수의 죽음은 화자가 등장하고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다렸던 셈이다.

* 꿈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가 이런 장르의 작품을 썼을 것으로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대단히 인상 깊다. 어머니의 과거와 화자의 출생의 비밀, 그 숨겨진 과거가 화자에게 나타나는 지속적인 아버지의 꿈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지면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모성애와 불행의 씨앗에 대한 깊은 증오의 엇갈림. 스토킹한 여인의 추억에 대한 집착과 상봉. 남작의 사체 발견과 행방불명. 여기서 이분법적 가치판단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남작이 손가락에 끼고 다녔던 약혼 반지는 일방에게는 추억의 상기이지만, 다른 일방에게는 행복 상실과 파멸의 증거일 뿐이다.

모자간의 관계가 예전과는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양자 모두에게 명백하여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부모의 진정한 사랑의 결실이 아님을 화자는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버리지도 증오를 키울 수도 없다.

* 악마 쫓기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레스코프)

기묘하다. 부유한 인물의 퇴폐적 향락과 참회, 이것이 작품의 기본 구조이지만 뼈대는 아니다. 오히려 어이없을 정도로 방탕한 연회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다. 화자의 외삼촌은 가끔씩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모아서 식당을 전체 세내고 질펀하게 밤을 즐긴다. 그리고 바로 수도원으로 달려가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는다. 화자의 설명에도 그것이 악마 쫓기와 무슨 관계인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특별히 운이 좋고 가장 존경 받는 노인들의 비호를 받을 때에만” 가능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부유함이 구원과 밀접함은 고금이 동일하다.

* 진실보다 더 진실한 (오귀스트 드 비예르 드 릴라당)

<잔혹한 이야기>의 발췌이다. 몇 장 남짓한 짤막한 장편(掌篇)이다. 별다른 사건이나 기이한 인물의 등장도 없다. 단지 화자는 사업상 만남을 위하여 가던 도중 우연히 한 집에 들른다. 이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데 먼저 들렀던 곳과 거의 똑같은 느낌-섬뜩하며 기분 나쁜-을 자아낸다.

전자는 자신의 ‘육체’를 죽인 사람들의 장소이며, 후자는 자신의 ‘영혼’을 죽인 사람들의 장소이다. 화자는 “솔직히 말해 두 번째 시선이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음산했다!”(P.438)고 토로한다. 해설에서는 전자가 영안실, 후자가 증권거래소 옆의 카페라고 알려준다. 이미 근대 자본주의가 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여 자본의 위력에 영혼을 넘기는 현상을 작가는 촌철살인의 시선으로 파악하고 있다.

* 밤 (기 드 모파상)

분량 면에서는 앞의 작품과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역시 장편(掌篇)이다. 어느 날 세상 모든 빛이 사라지고 모든 생물이 사라진 사회를 연상해보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기시감(旣視感)이 아니라 현대영화가 근대 환상소설에 지고 있는 빚의 무게이다.

밤의 분위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화자는 문득 주변 공기가 바뀐 걸 깨닫는다. 인적이 끊기고 한치 앞도 분간 못하는 암흑이 된다. 아무리 외쳐보아도 다가오는 이도 없다. 인가도 시장도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여기에는 악령이 등장하거나 기이한 초자연성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의 순간에 단지 살아있는 존재와 빛이 사라졌을 뿐이다. 일상 속의 공포!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겨 동 분야의 세계적 작가인 모파상은 환상소설에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어 족적을 뚜렷이 하고 있다. 당대의 환상소설은 유명작가들도 손을 댄 또 하나의 주류였다.

* 끝없는 사랑 (버넌 리)

젊은 역사학자. 16세기의 미모와 잔혹으로 악명 높은 메데아 다 카르피. 우연히 그녀의 자료를 접하고 지적인 호기심을 느낀다. 조금씩 알게 되는 그녀에 얽힌 사실(事實)의 진면모. 그녀의 행위는 그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결과이다. 점차 메데아에 빠지고 사로잡히며 이윽고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교수.

대상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생물은 물론 무생물조차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고 자신에게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과도한 의식 몰입은 그들을 깨어나게 한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든.

메데아를 사랑한 사람은 모두 그녀를 위해 죽었다. “메데아의 사랑은 애인에게 치명적이지만 영원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잔혹한 사랑이다.”(P.463)

메데아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가는 스피리디온에게 메데아의 애인의 영혼들이 모두 등장하여 막아선다. 그는 단호하게 뿌리치고 그녀의 부탁을 수행한다. 그리고 차분히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흉기에 가슴이 찔려 사망한 스피리디온은 분명 죽는 순간 행복하였으리라고 나는 단언한다.

* 치카모가 (앰브로즈 비어스)

표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린아이가 집 앞 들판에서 뛰어놀다가 겪는 환상을 서술하고 있다. 사지가 성하지 않고 인면과 신체가 훼손당한 비참한 모습의 인형(人形)들이 끊임없이 행진한다. 전투의 패잔병임은 알 수 있지만, 그들이 왜 그러한지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그들의 존재가 실체인지 허상인지 알 수 없다. 아이는 영문 모른 채 그들을 이끈다는 즐거움과 낯선 두려움 속에 불기둥으로 다가가는데, 그곳은 바로 자기 집이다.

* 가면의 구멍 (장 로랭)

유령의 무도회. 친구와 함께 특별한 무도회에 참석하는데, 참석자들이 수상하다. 표정도 말도 없다. 공포심에 젖어 두건 외투를 들쳐보니 텅 빈 공간 뿐이다. 모든 이들이 그러하다. 문득 거울을 본다. 나는 어떠할까. 거울 속의 가면 쓴 나. 가면을 벗긴다. 아무것도 없다.

친구를 기다리며 마취제를 마신 환각임이 말미에 드러난다. 환각제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가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주요한 수단의 하나이다.

19세기에 환각제를 복용하는 지식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기분전환, 퇴폐와 향락의 즐거움을 위해 또는 예술적 감성의 고양 등을 위해 약물을 가까이하였다. 이들에 대한 일부 기록이 <해시시 클럽>에 담겨 있다.

* 악마의 호리병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의 작품이다. 여기엔 <천일야화>의 알라딘과 마법의 호리병 이야기가 변용되어 있다. 물론 배경도 아라비아 사막에서 남태평양으로 옮겨있다.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지만 죽을 때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호리병. 그 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소망과 영혼의 거래. 이쯤 되면 괴테의 유명한 희곡이 연상되기도 하다. 이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자기가 구입한 가격보다 낮은 금액에 팔아야 한다. 거래가는 점차 낮아진다.

이 작품에서는 아름답고 눈물겨운 부부의 사연이 개입된다. 사랑의 실현을 위해 호리병의 도움을 받지만 영혼의 저주에 괴로워하는 남편,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아내. 이들이 곤경을 벗어난 것은 진부하지만 결국 사랑의 힘이다.

악마의 호리병을 두려워하지 S는 이는 누구일까? 그는 영혼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마 갖은 악행에 물든 갑판장에게 지옥은 멀리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에겐 악마의 호리병은 천사의 호리병이나 진배없다.

이 작품의 묘미는 점차 고조되는 긴장과 압박감, 그리고 케아웨와 코쿠아 부부의 애틋한 사연의 교차점이다.

* 친구 중의 친구 (헨리 제임스)

반복되는 우연은 필연이 된다. 여성 화자는 유사한 초심리학적 경험을 체험한 남녀 친구를 서로 소개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여 수년간 대면을 시키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마침내 약속이 실현되려는 찰나, 화자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어긋나게 한다. 화자의 두려움, 그것은 그들의 만남이 성사되면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밀려날 것이라는 우려다. 그것은 즉 질투다. 잠재된 의식의 질투. 화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지만 너무나 가깝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화자의 방해에도 만남은 성사되고 여자 친구는 심장병으로 죽는다. 이제 화자와 약혼자의 관계는 원래대로 회복되었을까? 아니다. 여자 친구는 죽었지만, 약혼자는 그녀의 영혼과 만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교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그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고 자신이 그 남자의 육신을 소유하는 것은 의미 없음을 알고 헤어진다. 수년 후 그 남자는 조용히 죽어가는데 화자는 여자 친구의 영혼의 부름에 화답한 것으로 이해한다.

* 다리 건설자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을 쓴 키플링은 문명과 자연[원시] 내지 서구 문명과 동양[인도] 문명의 갈등과 대립에 주목한다. 영국계 인도인(인도출신 영국인?)인 그에게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 대립은 갠지스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의 건설이다. 서구 과학기술 문명은 인도인의 정신의 고향 갠지스 강[강가]를 욕보이려 한다. 강가는 이를 막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켜 쓸어버리려 한다. 건설책임자는 파인드레이슨이 떠내려간 섬에서 비몽간에 목격하게 된 신들의 회의. 그것은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다.

동물로 의인화된 인드라, 시브, 칼리, 가네시, 브하이론, 시탈라, 하누만 등이 강가의 호소를 듣고 서로 논의한다. 하지만 늦게 온 크리슈나의 의견처럼 문명의 발전과 신들의 위상 약화 흐름을 저지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오늘 다리를 부수어도 내일 그들은 다시 다리를 세울 것이다.

키플링은 인도의 전통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결국 근대문명이 승리를 거둘 것임을 주장한다. 이를 구루의 등을 때리는 페루의 밧줄이라는 결말을 통해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 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눈뜬 자가 왕이 되는가? 공상과학 소설의 선구자 웰스는 안데스 산맥의 오지에 가상의 공간은 설정해 두고 위의 질문에 대한 글쓰기 실험을 한다.

수세기 동안 철저히 외부에 고립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눈이 멀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고유한 인식체계와 문화를 구축한다. 조난당한 누네스는 왕이 되리란 기대에 몸을 떨지만 현실은 마을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받는 자신의 모습이다. ‘눈으로 본다’라는 이상한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들만큼 청각과 촉각 등이 예민하지 못하며 눈먼 생활에 익숙하지 않는 보고타[누네스]는 그들에게 열등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을에서는 눈의 존재가치가 무의미하다.

시각 기능 없이도 모든 행복한 삶의 영위가 가능한 곳, 그곳에서 시각은 귀찮은 혹에 불과하다. 그래서 메디나사로테와 결혼을 희망하는 그의 병든 뇌를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눈을 제거하려고 한다. 누네스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눈을 포기하고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안온한 여생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대한 절벽을 넘을 것인지.

백년 후 주제 사라마구는 유사한 제목의 소설을 썼다. 사라마구는 환상소설계의 탁월한 선배에게 오마쥬를 바치고 싶었던 것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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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우리 시대의 영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8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오정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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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8

소년 시절에 한동안 러시아 문학에 몰입하였던 때가 있었다. 인터넷은커녕 모뎀을 이용해 겨우 PC통신을 하던 때라 관련 정보를 얻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여기저기의 자료들을 모아서 ‘러시아 문학의 흐름’이라는 러시아 문학 小史를 끄적거리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설익고 풋내기 같은 유치함에 우습지만, 그래도 정겨운 기억이다.

그 당시 나의 관심을 한 몸에 끌었던 작가가 바로 레르몬토프다. 그의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 한 편도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아 실제 그의 문학세계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련한 기억의 흔적만이 가슴 한켠에 자리 잡게 되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레르몬토프의 대표작 <우리 시대의 영웅[현대의 영웅]>이 두 군데 출판사에서 나왔을 뿐이고, 또 다른 소설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발췌 번역 하나가 전부다. 그의 시(詩) 문학은 과문이라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첫사랑은 추억으로 남겨야 아름답다는 속설이 있다. 당시의 감정과 환경이 훗날과 같은 수는 없다.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회는 실망으로 그치게 된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야 조심스레 레르몬토프를 펼치는 솔직한 심경이다.

페초린은 영웅일까 아닐까. 언뜻 표제와는 상반되는 페초린의 삶과 행위를 돌아보면 떠오르는 의문은 숨길 수 없다. 작가는 왜 그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까?

이런 반응은 당대에도 많았던 듯, 작가는 서문에서 “극한에 다다른 우리 세대의 모든 악덕으로부터 구성”되었으며 “하나의 초상이지만 한 사람의 초상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페초린은 결코 긍정적인 인물상은 아니다. 여기에서 영웅 상을 끌어내려면 몇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먼저, 페초린 같은 이가 영웅으로 불릴 만큼 당대 러시아 귀족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음을 가리킨다. 즉 페초린이 그나마 그들보다는 낫다는 슬픈 의견이다.

혹은 페초린이 당당하게 자기의 악덕과 사고를 펼치는 대담성을 통해 전제적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보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도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비치기를 바란다. 비록 위선적일망정. 따라서 대놓고 나는 악인이다라고 선언하는 행동은 그만큼 어려우면서도 두드러진다. 모 CF에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페초린은 영웅의 자격이 충분하다.

또 하나 보다 극단적인 가설은 페초린 같은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근성의 소유자가 귀족사회의 주류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자는 해석이다.

페초린은 훗날 오블로모프와 같은 소위 잉여인간의 부류다. 그는 유복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개인적 자질을 지녔으면서도 이것을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유용하게 기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환멸과 냉소만을 가슴에 품은 채 삶을 허비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 불행인 동시에 사회의 불행으로서 개인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억압적 체제의 잘못이 크다.

“단지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의 원인이며, 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만을 압니다....체첸의 총알세례 속에서 지루함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그녀를 이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함께 있는 게 지루할 뿐입니다......제가 바보인지 악당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도 불쌍한 사람이다는 겁니다.” (P.58~59)

"슬펐다......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의 희망을 파괴하는 일 뿐인 걸까? 살면서 행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운명은 나에게 늘 다른 이들의 드라마를 결말짓도록 해 온 것 같아. 마치 내가 없으면 누구도 죽거나 절망할 수 없는 것처럼!" (P.167)

즉,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봉건적 구체제를 뒤엎고 페초린 같은 이가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구현하자는 것.

이 작품은 카프카즈[코카서스]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와는 다른 기후와 지형, 인종들이 살아가는 곳, 당대에서 이곳은 머나먼 변방이자 최전선이리라. 레르몬토프는 카프카즈에서 유배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에게 날카로운 설산과 황량한 초원은 자신은 물론 페초린의 심경을 대변하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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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마테오 팔코네 - 메리메 단편선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정장진 옮김, 최수연 그림 / 두레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메리메의 주요 단편 모음집이며, 수록된 작품은 다음의 세 편이다.

마테오 팔코네
타망고
일르의 비너스

<마테오 팔코네>는 코르시카 섬을 배경으로 사나이로서의 의리를 저버린 어린 아들을 죽이는 비정의 아버지를 다루고 있다. 작품 자체는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그 여운은 만만치 않은데, 무엇보다도 자식을 죽이는 부모라는 소재 자체가 범상치 않은데 연유한다.

하늘이 내린 윤리[천륜(天倫)]와 인간이 만든 윤리[인륜(人倫)] 간 무엇이 보다 우선순위를 지니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코르시카 섬의 보다 엄격한 의리 중시 문화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남자들의 의리는 남녀 간의 애정, 부자간의 사랑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도덕률의 하나이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도 소위 조폭 영화에 빠져드는 현상도 여기에 무관하지 않다.

다만 대상자가 성인이 아니라 열 살밖에 안 되는 아이라는 게 갈등의 핵심이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고, 아직까지 이성보다 감성과 충동에 더 몸을 움직이는 아이에게 그러한 극단적 조치가 타당할까?

당대의 일반적 도덕률과 코르시카의 특유성, 그리고 마테오 팔코네의 개인적 가치기준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간단하지는 않다.

<타망고>는 배경이 일변하여 아프리카, 그리고 노예선이다. 노예무역을 당사자인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다루었다는 점이 신기한데, 소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럽 각국의 상선들은 노예무역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었다.

대립적인 두 인간이 등장하는데, 노예선 선장과 바로 노예사냥꾼인 자신이 흑인인 타망고이다. 먼저 르두 선장은 악인이 아니다. 그는 당대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로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인 노예무역에 종사한다. 이는 그의 양심에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믿을 정도이므로.

한편 타망고는 노예를 백인에게 넘김으로써 부를 누리는데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마저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보통은 체념하고 말텐데 타망고는 집념과 끈기로 마침내 족쇄를 풀고 풀려난 흑인들과 함께 백인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그런데 배를 조종할 사람이 없게 되어 결국 모두가 죽어가고 혼자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영락한 생을 살다가 죽는다.

작가의 시선은 양비론(兩非論)이다. 선장도 타망고도 작가의 눈에는 긍정적인 인간형은 아니다. 특히 주인공 타망고는 자신이 동료 흑인을 팔아넘긴데 대하여 가책을 갖지 않으며, 흑인들을 이끌고 선원들을 모두 죽이는 한치 앞도 모르는 무모함마저 가지고 있다.

작가의 시선 자체도 또한 양면적이다. 그는 분명히 노예무역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흑인들의 무지몽매함과 미신에의 편향 등 여러 악덕들을 보여줌으로써 은근히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을 드리우고 있다.

<일르의 비너스>는 이미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어 낯설지 않다. 다만 이탈리아어 번역본과 원작인 프랑스어 번역본과의 차이점이 혹시 있지나 않을까 싶어 다시 보았다. 결론은 당연하지만,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비너스의 악의적 이미지가 가져오는 음산한 효과는 여전한데, 이는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여신과 상반되는 것이다. 조소하는 비너스, 사랑의 제물을 요구하는 비너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번역상의 오류로 생각되는 어휘가 있다. ‘스카시’가 그것인데, 알퐁스가 마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운동경기다. 이탈리아어 판본에서는 ‘테니스’로 옮기고 있다. 스카시는 역주에서도 밝혔듯이 네 벽이 막힌 경기장에서 하는 스포츠인데, 작중에서는 야외의 넓은 운동장이 스카시 구장이라고 하여 자체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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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10 마이페이퍼에 쓸 글을 이동
 
까르멘 - 지만지고전천줄 25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흔히 그렇듯 원작과 그 응용작은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응용작이 원작의 충실한 모방이라면 응용작 만의 독자적 개성을 상실하니 의의가 약해진다. 응용작이 제목만 빌려왔을 뿐 원작과 동떨어져 있다면 원작에 대한 배신이다. 따라서 응용작은 언제나 원작과의 관계 설정, 즉 충실성과 고유성의 줄타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제의 카르멘과 메리메의 카르멘의 개성은 분명하다.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을 꿈꾸는 집시 여인. 하지만 비제는 메리메의 카르멘이 지나치게 악독하다고 여겼음인지 다소 순화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물론 돈 호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는 무대에 올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연 후 혹독한 비난에 시달렸으니.

아, 카르멘! 그녀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인형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생명력이 충만하며, 지적이고 고상하지 않지만 야성미가 흘러넘치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혼을 빼앗아가는 마력적인 섹시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야만 순진한 돈 호세가 그녀를 저주하면서도 그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시달리기를 원치 않으며, 특히 명령을 받는 것은 더욱 싫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게 살며, 또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는 거예요.” (P.117)

“당신은 나의 롬이니, 당신에게는 당신의 로미를 죽일 권한이 있어요. 그러나 까르멘은 언제까지나 자유로울 거예요.” (P.129)

카르멘은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야생 동물을 울타리나 새장 속에 억지로 가두어 둔다면, 살아있으되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처럼, 카르멘은 사랑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 거리낌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카르멘이 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각광받는 매력적 캐릭터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카르멘의 악덕마저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분명히 웃으면 칼을 찌르고 총을 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다, 자신이 직접 그렇게 나서지는 않지만. 그녀는 남을 속이고 강도나 살해당하기 좋은 장소를 돈 많은 사람들을 유인하며, 밀수도 서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십이분 충분히 활용한다.

원작만을 보면 카르멘은 매우 개성적이고 관심 가는 인물이지만, 만만치않게 비중이 큰 인물이 바로 돈 호세다. 그는 카르멘에 빠져 인생을 깊은 나락에 빠뜨리는 불행한 캐릭터다. 오페라에서는 부족하였던 그의 남성적이며 강렬한 카리스마(오페라에서는 오히려 투우사 에스카미요가 남성미를 상징하며, 돈 호세는 순수한 청년으로만 표현된다)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는 카르멘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 그가 그녀를 칼로 찌른 행위를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카르멘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카르멘의 존재로 인한 사회의 선한 사람들의 도덕률로 회귀하는 영웅적 결단이다.

돈 호세와 카르멘, 그들은 사랑하지만 결합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더욱 나았을 것이다. 서로에게 충실하기에는 카르멘은 너무나 자유로웠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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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14 마이페이퍼에 쓸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