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단장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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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쉬킨이 러시아 문학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최초의 문호이지만, 그가 맨땅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폰비진은 푸쉬킨에 앞서 희곡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18세기 러시아 작가다. 폰비진의 대표작은 <여단장><미성년>이라고 하는데, 두 편 모두 희극이라는 점이 독특하며 푸쉬킨과 다른 면이다.

 

특이한 표제는 이 작품이 여단장 가족과 고문관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붙인 것처럼 보인다. 여단장 부부와 고문관 부부는 시골에서 비슷한 신분으로서 교류하며 자신들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딸은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가난하기에 청혼을 거절당한 처지다. 흔한 관계의 구성으로 보이지만, 작가가 힘주고 있는 대목은 극적 구성과 대사의 깊이가 아니다. 고문관의 딸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죄다 전형화된 희극적 속성을 띠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고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희화화는 어쩌면 이 작품을 읽는 묘미가 될 수 있다.

 

가부장적 여단장과 금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아내, 프랑스풍에 매몰된 아들. 이해타산에 재빠른 고문관과 생활 무능력이며 우아하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아내. 이들이 벌이는 대조적인 대사와 행동의 교차와 맞부딪힘이 흥미롭다. 이런 유형의 작품을 탐탁잖아 하는 일부 독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들) 내 불행은 단지 당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거예요.

(고문관 아내) 나의 천사여, 물론 그것은 내게도 무서운 파멸이지요. (P.53, 26)

 

일차적으로 프랑스에 영혼을 팔린 아들이 말끝마다 불어를 사용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을 살짝 무시하는 태도, 불어를 모르는 여자랑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은 작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명백하다. 이것은 단순한 애호의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불행시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프랑스를 무조건 숭상하는 고문관 아내의 짝짜꿍이 이어지다 보니 예비 사위와 예비 장모가 오히려 눈이 맞는 지경에 이른다.

 

(고문관) 당신 부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여단장)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신 부인이 가장 현명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소. (P.105, 47)

 

여단장은 우아하고 고상한 고문관의 아내에게 마음이 끌리니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막장 구조다. 고문관은 자기와 생활 코드를 맞아떨어지는 여단장 아내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녀에게 구애하나 문제는 여단장 아내는 금전 관련 사안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 못하는 형국. 이렇게 비틀린 사랑의 엇갈림이 난무하기에 도덕적 기준으로는 썩 마뜩잖다. 그런 면에서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는 작품 내에서 둘뿐인 긍정적인 인물군이지만, 흥미 측면에서만 보면 별로 흡인력이 없다.

 

그 외에도 여단장의 거친 폭력성이 반복되어 나타남을 비판할 수 있고, 고문관의 입을 빌어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글을 쓰는 서기라든지 판사와 친해지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등의 당대 러시아의 치부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이기에 당혹스럽다. 등장인물은 첫 막부터 끝 막에 이르기까지 한 표정의 가면을 쓴 채 획일적으로 무대를 돌아다닌다. 무대 밖 관객의 역할은 극작가가 원하는 대로 어리숙하고 희극적인 인물을 마음껏 웃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폰비진은 혹시 관객에게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전형적인 역할을 배정한 것이 아닐까.

 

고전극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여단장>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인물의 성격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P.142-143, 해설)

 

낯선 작가, 낯선 작품이므로 해설이 풍부하다. 작품해설과 작가소개는 대부분 책에 있기에 새삼스럽지 않지만 작품해설의 양과 질은 상당하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풍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세태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인간의 속물성에 대한 비웃음이 작품에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서로들 흠결이 있음에도 자신은 잘난 체하고 타인을 마음껏 비웃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독자는 이전투구 내지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사례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부록으로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는 러시아 연극의 발전과정을 개술하고 18세기에 수마로코프를 시작으로 크냐지닌, 폰비진을 위시하여 러시아 연극이 어떻게 근대화하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어 작품 배경 이해에 매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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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타메론 : 열 번째 이야기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지음, 이다희 옮김, 이다혜 해설 / frame/pag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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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은 원체 유명하고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이것의 형식을 모방한 16세기의 <헵타메론>은 문학사에서나 등장할 뿐 그동안 번역본이 없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작품이었다. 수년 전 번역본이 나왔는데, 뜬금없이 달랑 10번째 이야기만 싣고 있다. 옮긴이도 중세 문학의 전공자가 아니라 기획 의도가 궁금하였기에 기획자의 글을 확인해본다.

 

이 책은 72편의 단편이 담겨있는 <헵타메론> 중 열 번째 이야기만을 새롭게 엮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7)과 영화의 원작인 소설 <그해, 여름 손님>(안드레 애치먼, 2007)에서 중요한 소재로 언급됩니다. (P.7, 기획자의 글)

 

영화 개봉에 맞추어 원작의 소개 차원에서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단편적이나마 원작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책을 읽는다. 솔직히 말해서 내용 자체는 그다지 독특하거나 새롭지 않다. 중세 배경으로, 귀부인과 기사의 궁정식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 다만 부분적인 일화가 아니라 주인공 아마두르와 플로리다의 슬픈 사랑과 생을 오롯이 담고 있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아마두르는 플로리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추후 남편이 아닌 연인의 자리를 얻고 싶었다. (P.30-31)

 

아마두르는 플로리다를 사랑하지만, 신분상 차이로 결혼을 꿈꿀 수는 없기에 연인으로 남기를 꿈꾼다. 플로리다 가까이에 머물며 그녀의 얼굴을 날마다 볼 수 있고, 그녀와 스스럼 없이 친밀하게 대화하며 정서적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자체로서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겠다는 아마두르. 신붓감도 그런 까닭에 플로리다와 가까운 아반투라다를 고르는 대목에서는 대단한 노력에 감탄하면서도 치밀함과 집착의 실마리마저 엿보인다.

 

서두에서 아마두르는 빼어난 인품과 태도, 외모를 지닌 젊은이로 소개되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독자는 그가 선행과 악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는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사랑의 집착은 이렇게 훌륭한 영혼마저 변질시키는 마력을 지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으로 더 이상 플로리다 가까이 머물 수 없게 되자 그는 이성을 잃는다.

 

플로리다에 대해 숨겨온 욕망, 그리고 더는 그와 교제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인 아마두르는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결심했다. 플로리다를 아주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P.59)

 

원치 않는 결혼에 대한 실망감으로 아마두르와 명예로운 사랑으로 상실감을 채우려던 플로리다로서는 아마두르와의 육체적 관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사랑을 둘러싼 영과 육의 대조성은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플로리다는 아마두르에게 실망하고 그와 냉랭하게 거리를 둔다.

 

아무튼 이제 됐습니다. 당신에게 약간의 선의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경솔했다면, 이제는 진실을 알 때가 되었지요. 그 덕분에 당신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고요. (P.67)

 

사랑의 실패는 집착을 유발하고 이는 이성과 도덕의 제어를 벗어난다. 아마두르는 이후 플로리다를 갖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고 강제로라도 그녀를 범하려고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기독교 기사로서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남편과 연인을 동시에 잃은 플로리다는 수녀가 되고 만다는 슬픈 결말.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를 들은 참견인들의 논평이다. 무엇보다 아마두르를 어떤 인물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플로리다를 강제로 겁박한 점은 옳지 않기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 혹자는 아마두르에게 매정한 플로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처럼 자신에게 성실하게 봉사한 기사에게 가혹하다는 것이다. 당대 많은 귀부인이 기사 연인을 두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한편 플로리다가 아닌 스페인의 기독교 기사로서 프랑스와, 그리고 이슬람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행동에서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원작을 언급한 소설과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변용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 플라토닉 러브는 남녀 사이에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더군다나 한창 청춘인 선남선녀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일 때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기에, 아마두르와 플로리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길을 택한 것이다. 사랑의 호르몬이 분출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 뛰어난 아마두르가 타락하는 과정을 지켜봐라.

 

선의의 피해자도 생기게 마련이니, 아반투라다의 삶은 과연 행복하였을까. 아내의 사랑을 얻지 못한 카르도나 공작은 어떠하였을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열 번째 이야기는 남녀 사이의 엇갈린 사랑의 귀결을 이야기함을 깨닫게 된다.

 

덧붙인다면 아무쪼록 <헵타메론>의 온전한 번역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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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소극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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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록 작품>

빨래통

파테와 타르트

메트르 미멩 학생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

 

내친 김에 또 다른 프랑스 중세 소극집을 읽는다. 수록작 6편 중 2편은 앞서 읽은 책과 중복이다. 앞선 책은 운문 형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반면, 이 책의 옮긴이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번역”(P.8)을 택하였다. 가급적 원문을 존중하여 운문체가 낫겠지만 어설프면 오히려 못하니 순전히 내용 전달의 측면에서는 장단점이 있으니 선택의 사안이리라.

 

이 책에 실린 소극을 통해서 현대의 일반 독자가 기대하는 건 물론 예술적 감흥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통시대적 보편성도 당연히 아니다. 소극을 읽으면서 정제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중세 서민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서를 통해 활자화되고 박제화된 기술 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미덕이다.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유추해 보자면, 음탕함과 속임수가 노골적이며 의외로 매 맞는 남편이 자주 등장한다. 오쟁이 진 남자는 단골 소재이며, 신부와 변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함도 알 수 있다. 악마조차도 두려움보다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할 정도다. 어쩌면 이들은 모두 중세 민중에 국한할 것 없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거짓 없는 민낯일 것이다.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 맞는 남편의 장면은 오히려 신선하다. 이것이 실제의 반영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극 내에서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빨래통>이 대표적이지만,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에서도 병든 주인은 신부와 외도를 즐기려는 부인에게 애처롭게 두들겨 맞는다.

 

음탕, 음란과 외설은 사실 한 끗 차이다. 적당한 음담이 대화와 문학에서 분위기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서민들의 언행에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성에 솔직하다는 평도 가능하다. <빨래통>에서 아내는 남편 자끼노에게 적어도 하룻밤에 대여섯 번”(P.17, 2)의 봉사를 요구한다.

 

(미멩) 아버지! 엉덩이가 몰랑몰랑한데요.

(라울 마쉬) 어쨌든 그 아이가 숫처녀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지.

(교사) 조심해! 정신 나갔어? 젖가슴이 몰랑몰랑할 텐데. (P.55, 8)

 

<메트르 미멩 학생>은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는데, 학생이 라틴어 공부에 너무 몰두하다가 그만 모국어를 까먹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그에게 다시 모국어를 되살려주려는 여러 노력이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장에서 미멩이 약혼녀를 둘러메면서 이어지는 대목이 성적 골계미를 담고 있다. 현대의 도덕관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파테와 타르트>,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의 공통점은 바로 사기, 즉 속임수에 있다. 전자의 두 편은 사기를 친 당사자가 처음엔 멋지게 성공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가 된통 당한다. 특히 변호사 파틀랭 선생은 만만찮은 옷감 가게 주인을 힘겹게 속여넘기고 득의양양하고, 옷감 가게 주인과 양치기의 소송도 승소를 거둔다. 절정의 순간, 그는 만만하게 보았던 양치기에게 하릴없이 속임을 당하고 만다. 이 작품은 중세 소극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후자의 방앗간 주인 이야기는 가톨릭 신부의 위선적인 음란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극의 소재로 각종 악마를 등장시킨다. 부인과 신부에게 수세에 몰리고 죽음도 멀지 않게 된 주인의 영혼을 가져오기 위한 어리숙한 악마 배리트의 행동을 어처구니없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하필이면 항문이기에 생기는 해학적인 장면은 시원하게 용변을 보는 주인과, 기뻐서 신나게 가방에 영혼을 담아가는 악마가 대조적이기에 비롯한다.

 

소극의 내용과 주제가 항상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극의 작가 중에는 꽤나 높은 지성을 가진 인물도 있는데, <피에르 파틀랭 선생>은 이것에 대한 입증이다. 끈질긴 옷감 가게 주인을 따돌리기 위해 혼수상태에서 헛소리 연기를 하는 파틀랭 선생은 다양한 언어로 문장을 지껄인다. 옷감 가게 주인에게는 헛소리로 들리지만, 일부 지적인 독자에게 작가의 수준을 과시하는 의도도 있다고 하겠다. 5장에서 그가 구사하는 외국어와 사투리는 다음과 같다. 리모주 사투리, 피카르디 사투리, 플랑드르어, 앵글로 노르망어, 브르타뉴어, 로렌 사투리, 라틴어.

 

(쥬냉) 나는 아버지의 아들도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라는 거지. 제기랄! 결국 쥬냉이 쥬냉이 아니라는 말인 셈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이야? 어릿광대 자노? 아니지! 나는 아무의 아들도 아닌 쥬냉이야. 내가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군. (P.72, 9)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은 웃음 속에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어 놀라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쥬냉 앞에 가톨릭 신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선언한다. 반면 어머니는 신부는 절대 쥬냉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혼란에 빠진 쥬냉에게 점쟁이는 한술 더 뜬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려면, 저 아이는 아무의 아들도 아니겠네요.”(P.71, 8) 이렇게 쥬냉은 아무의 아들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쥬냉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굉장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소극이다.

 

중세는 분명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수준 높고 장엄한 종교극의 상연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일반 서민에게 종교와는 무관한 소극이 더욱 친숙하고 일상적이라고 한다. 자기네들의 적나라한 삶의 희비, 애환을 담고 있기에 그러하리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중세 소극을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의 실질적 삶의 모습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은 중세 소극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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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소극선 지만지 희곡선집
작자미상, 정의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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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빨래통

땜장이

구두 수선공 칼뱅

파테와 타르트

 

굉장히 생소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 같았다. 먼저 소극이란 희극의 한 유형인데, 작품해설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 소극의 원제목에는 소극(farce)’이라는 명칭이 항상 붙어 있다. 8음절 운문으로 쓰인 소극은 대부분 300~500행으로 구성된 짧은 단막극이다. (P.116)

 

소극은 군주, 귀족과 영웅 같은 상류 계급이 아니라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다룬다.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극 속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점이 흥미와 당혹감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 부부간에 욕설과 폭력을 직설적으로 주고받는 행동 등이 나타난다. 비천한 소재와 배경, 비속어의 대사, 비루한 인물 행동 등으로 인해 한때는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고전과 현대 희극의 큰 줄기를 이해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중세 소극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P.111)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극은 현학적이거나 젠체하지 않고 솔직한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더 부담 없이 다가온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나 콩트, 코미디로 보자면 슬랩스틱 유형이라고나 할까.

 

<빨래통><땜장이>는 부부간의 주도권 다툼이 팽팽하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남존여비를 떠올리지만, 이들 작품을 볼 때 최소한 서민사회에서 여성의 기세는 남자에 전혀 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에게 욕설을 날리는 것은 예사고, 집안일을 마구 부려 먹는다거나 심지어 폭력도 행사한다.

 

(아내) 없어? 있어, 있다니까! /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 이게 어디서 까불어!

(자키노) 그만해! 하면 되잖아.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 다음부터 주의할게. (P.16, <빨래통> 3)

 

<빨래통>에서는 남편이 잔꾀를 부려서 아내의 순종을 끌어내 결국 우위를 차지하는데, 문득 <베니스의 상인>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연상된다. 반면 <땜장이><구두 수선공 칼뱅>은 아내의 승리로 끝난다. 아내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꼼짝도 하지 않는 내기에서 진 땜장이 남편, 옷 한 벌 사달라는 아내의 간청에도 노래만 부르면 외면하다가 지갑을 탈탈 털린 칼뱅.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파테와 타르트>는 제과점 주인 부부를 속여서 파테를 얻어먹은 두 거지가 타르트마저 속여 먹으려다가 들통 나서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이 작품은 물론 <구두 수선공 칼뱅>에서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거짓이 드러나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칼뱅의 아내는 남편을 무사히 속였고 거지들은 실패하였다.

 

소극은 단독 공연보다는 종교극의 막간에 또는 축제나 장날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상연되었다고 한다. 길이의 제약, 소재의 서민성, 지나칠 정도의 희극성이 요구되었던 까닭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중에 극 전체의 내용과 성격에 무관한 짤막한 상황극이 삽입되는 사례가 있는데, 아마 이것도 비슷한 성격으로 보인다. 이 책의 <땜장이><파테와 타르트>의 끝 장면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즉 이제부터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자는 대사로 공연을 끝맺는다.

 

(땜장이) (관객에게) / 여기 계신 여러분도 / 와서 같이 한잔하죠. / 여성의 승리를 위해 / 다 같이 축배를 들죠.

(아내) 그럽시다. 그거 좋죠.

(남편) 맘껏 먹고 마십시다. / 다들 어서 오십시오. / 남녀노소 직업 불문 / 위아래 가리지 말고 / 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 신나게 놀아 봅시다. (P.43-44, <땜장이> 4)

 

(거지2) (관객에게) / , 우리가 말입니다, / 몽둥이로 맞았지요.

(거지1) 그래요, 어쨌든 이거 / 어디 가서 막 떠들고 / 다니면 곤란합니다. / 자 한판 놀아 봅시다! (P.108-109, <파테와 타르트> 19)

 

이러한 소극 작품을 문학의 예술성 기준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이 항상 우아하고 고상하지 못한 게 현실 아닌가. 차라리 B급 장르로 폄하되더라도 중세 프랑스 서민의 삶을 당대는 물론 현대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다면 자체로서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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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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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표제도 그렇고,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든지 자발적으로 탈영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반전 소설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무의미성을 토로하는 문장이 작중 인물에 의해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반전 테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 보기도 모호하다.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서사적 힘은 누가 뭐래도 남녀 주인공 프레더릭과 캐서린의 사랑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가장 긴요하고 절박한 것은 차라리 사랑이 아니겠는가. 가벼운 장난삼아 시작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진지하게 변하고 불현듯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참여한다는 설정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니만치 소설 상의 설정이라고 치부하기 곤란하다. 프레더릭이 이탈리아군으로 참전한 까닭은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만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군종신부와의 대화에서 단호하게 사랑에 무관심함을 드러냈던 프레더릭. 그의 생각은 캐서린과의 관계 진전에 따라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함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생명과 상통한다. 죽음과 직결되는 전쟁과 상극이다. 사랑과 전쟁, 생명과 죽음이 작중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때 반전사상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반전에 대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는 이미 그 일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행운을 빌었다. (P.361)

 

전쟁에 대해서는 잊을 작정이었다. 나는 단독 강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P.376)

 

프레더릭은 원래 이 전쟁에 무심하다. 3국 출신이니만치 그에게 있어 전쟁의 대의명분은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게 본디 프레더릭의 성향인지 아니면 이 전쟁의 공허함을 일찌감치 깨달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명분과 이상보다는 현실과 실질을 더 중시하는 것만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승전과 패전 전망보다 수면을 더 믿는다고 할 정도다.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P.290)

 

프레더릭의 전선 이탈은 그런 공허함의 극치를 퇴각하는 장교를 총살하는 이탈리아 헌병과 맞닥뜨리면서 발생한다. 실제 전투를 치러보지도 않은 자들이 이탈리아군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면서 즉결 처단을 하는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는 깨끗이 손을 떼버린다.

 

프레더릭은 몰라도 캐서린에게 그는 운명적인 사람이다. 첫 만남 이후 그녀는 프레더릭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장난삼듯 가벼운 태도의 그와 달리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프레더릭을 향한 캐서린의 사랑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동시에 지고지순하다. 그녀는 프레더릭과의 사랑에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지극한 합일에 이른다.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가 스위스에서 호젓하지만 단란한 생활을 즐기던 그들. 사랑의 축복이라고 할 출산은 삽시간에 오히려 사랑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프레더릭은 삶의 의미와 죽음의 필연성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것은 곧 그가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고 실감하지 못하였던 그것. 작가는 작품의 서두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반복해서 독자에게 이를 상기시킨다.

 

[군종신부]는 내가 모르는 것, 일단 배워도 늘 잊어버리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P.28)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P.221)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 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 (P.496)

 

작가에게, 프레더릭에게 그동안 전쟁과 죽음은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이며 머나먼 현상에 불과하였다. 두 사람의 도망병을 향한 사격, 아이모의 허무한 죽음 목도. 그리고 캐서린과의 사랑, 미래에 대한 희망, 갑작스러운 사별 등 일련의 체험을 통해 프레더릭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의미의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 의미를 발견한다. 이처럼 개인적 깨달음에서 사회적 의미 발견에 도달함으로써 이 작품은 가장 뛰어난 반전문학이 된 것이다.

 

간호사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조상(彫像)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한 채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P.503)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쓸쓸한 동시에 차라리 덤덤하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현실로 다가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소리높여 통곡할지언정 떠나간 이가 다시 돌아올 리 없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가 아니던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프레더릭의 마음 깊숙이 캐서린과의 사랑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음을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슬픔을 곱씹을지언정 슬픔에 익사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남은 사람은 어쨌든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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