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정글 - 도시와 야생이 공존하는 균형과 변화의 역사
벤 윌슨 지음, 박선령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 발길이 뜸한 보도블록이나 깨진 콘크리트 틈에 잡초가 자라나면 관리 소홀 또는 퇴락한 느낌이 든다. 건물 사이 공터에 잡풀이 무성하면 보기 흉하게 여기고 위생에 우려를 표시하게 된다. 단독주택의 마당 및 도시공원은 항상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야 기분이 좋다. 지저분한 동네 하천은 눈에 안 띄게 복개해야 미관상 훌륭하다. 저자는 위와 같은 현대 도시인의 인식이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도시 자연의 모습이 삶의 질을 높이고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과 도시, 나아가 지구 생태계에 유익하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이 책에서 주장한다. 상당히 생소하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굉장히 흥미롭고 참신한 의견인 동시에 꽤나 설득력이 높다.

 

왜 도시를 이렇게 변화시켜야 하는 걸까? 도시의 야생성은 도시에 서식하는 생물 수를 늘리고 기후 변화의 영향을 완화하므로 솔직히 말해 인간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P.17)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이다. 순수한 자연 자체는 도시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도시 속 자연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인간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잔디밭처럼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인공 자연을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택 마당의 잔디 관리에 소홀하면 민원과 신고로 처벌받게 되는 현실에 부정적이다. 생태학적 관점과, 종 다양성 측면에서 잔디밭은 사막과 동일하다고 본다. 표제가 의미심장하다. 어반 정글, 도시를 정글화 하자는 대담한 주장이다. 저자는 도시의 변두리, 공원, 콘크리트, 나무 식재, 도시하천, 농작물, 도시 동물로 각각 논의의 렌즈를 다양하게 들이대고 있다. 초점은 단 하나 도시의 야생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변두리 땅은 생명 유지 시스템이다. , 초원, 습지, 조석 습지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생태계는 기후 변화의 다양한 영향에 맞설 필수적인 완충 장치다. 하지만 우리의 개발 욕심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기도 하다. (P.30-31)

 

도시의 확장으로 변두리는 계속 개발되고 자연은 점점 후퇴한다. 도시와 전원을 공존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는 실패하였고, 교외는 공원과 주택 정원으로 양분되었다. 저자는 정원에 주목한다. 정원을 예쁘게 가꾸고자 하는 노력으로 종 다양성은 오히려 시골보다 높다고 하면서. 건강한 생태계는 특정 종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P.68)과 같이 도시와 자연환경을 조화시키는 도시 계획 개념을 소개한다.

 

현대 도시에서 공원의 크기와 중요성 인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도시민 누구나 푸른 녹지와 쾌적한 공기, 서늘한 녹음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배경으로 교목과 관목, 화초류, 아기자기한 연못, 적절하게 배치된 의자, 그리고 여기를 거니는 사람들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도시 속 공원은 자연 자체를 인정하고 허용한 게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장소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도시공원에 생물 다양성을 늘려 생태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시도와 사례를 소개하는데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다. 옴스테드의 뉴욕 센트럴파크, 루던의 가드네스크 스타일, 로버트슨의 버켄헤드 공원, 원스테드 플라츠에 소를 다시 풀어놓은 사례 등을 통해 우리는 도시 녹지에 야생성을 도입하여 자연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생물 다양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도시공원의 조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자연사는 낯설고 모순된 개념이다. 피터와 수코프가 그토록 알리고 싶었던 사상은 도시와 자연이 공존 불가능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 폐허, 콘크리트 균열, 방치된 불모지에서 자라나는 잡초와 식물을 도시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네들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혹자는 폐허와 불모지를 그대로 방치하자는 게 아니냐며 이견을 제기할 수 있지만, 저자는 공지 개발에 찬성의 입장이다. 이쪽의 빈 땅을 개발하더라도 다른 쪽은 빈 땅이 생기기 마련이다. 도시 전체의 항상 완벽한 개발은 불가능해서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빈 땅의 야생성은 일정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 사용되지 않는 모든 장소는 생물 다양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변두리 땅과 불모지에 몰래 숨어들어서 멸시받는 터주식물은 사실 도시 환경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다. (P.157)

 

<4장 캐노피>에서는 주요 요소인 나무의 도시 생태적 중요성과 식재 방식을 다룬다. 인류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자원이었던 나무가 화석 연료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홀하고 외면되었다는 것 하며, 21세기 도시 생태계의 회복과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나무와 숲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단시간 내 식재로 도시를 녹지화할 수 있는 미야와키 방식이 정말로 부작용 없이 효과적이라면 전 세계의 산림 녹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나무는 21세기와 그 이후에 도시가 의존하게 될 녹색 인프라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습지, , 호수 등이 포함된 더 넓은 생태계의 핵심이다. 망가르 바니와 그곳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P.212)

 

개인적으로 복개 하천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경과 생태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 책에서도 소개된 청계천을 비롯해서 많은 도시에서 하천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녹지가 부족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하천 복원은 요원해 보인다.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덮어씌우면 그것으로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되는 게 아니다. 오염된 하천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환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하천을 공원화하지는 말자. 요즘 지자체마다 공원 조성 사업으로 하천의 유로를 바꾸고 주변에 운동시설을 마련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하천 꾸미기에 바쁜데, 도를 넘어서 자연 하천이 아니라 인공 하천에 가까운 경우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로스앤젤레스강을 이름뿐인 강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LA에 이런 강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 기후 변화로 게릴라성 폭우가 빈발하고 있는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표면은 물을 흡수하고 저장하지 못한다. , 호수, 습지 같은 수생 생태계의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게 <5장 생명력>이다. 습지는 메꾸고, 갯벌은 간척하는 게 역사적 흐름이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습지와 갯벌을 보호하는 데 안달이다. 불과 수십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단견과 무지가 새삼 드러나는 사례다.

 

역사 대부분을 달갑지 않은 늪이나 불편한 호수를 메우려고 노력했던 우한 같은 도시들이 이제는 습지를 되살아난 수경 도시 개념의 중심적인 특징으로 삼으려고 애쓰고 있다. 물과 억지로 싸우려다가 잇달아 패배하기보다는 도시에서 물과 더불어 살면서 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P.248)

 

옥상 텃밭, 아파트 화단 가꾸기에 열심인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여유로운 마당이 부족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뭔가를 심고 재배하는 그들을 볼 때면 놀라움과 함께 극성맞다는 양가의 감정이 든다. 벤 윌슨은 이런 우리네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도시와 교외에서 농작물 재배를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인간의 엄청난 배설물을 오염물질로 폐기하지 말고 유기적으로 재활용함으로써 환경오염을 줄이고 식량과 채소 자급자족에 이바지할 수 있고, 근거리 농업으로 원격지 운송에 따른 오염물질 배출 감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의외로 좁은 땅에서도 높은 농업 생산성이 가능하며, 도시민들에게 신선한 농작물 공급이 가능하니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다. 단순히 녹화 사업이라면 나쁘지 않지만, 온통 아파트로 도배하고 지속적으로 반경을 확대해가고 있는, 부동산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아파트 왕국 서울이라면 한숨이 나온다. 그나마 있는 전답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야산은 평탄화하는 상황에서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7장 주트로폴리스>는 더욱 비현실적 주장으로 다가온다. 식물과 달리 도시에 거주하는 동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훨씬 크다. 반가운 심정보다는 두렵고 경계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였던 쥐나 바퀴벌레는 물론, 요즘은 비둘기마저 혐오의 대상이다. 길고양이나 떠돌이개는 어떠한가. 저자의 주장처럼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도시 환경을 악화시킨 인간 자신에게 있음은 사실이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호수와 하천의 물고기, 학과 두루미 같은 인간과 접촉하지 않는 무해한 동물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밤중에 길거리에서 여우, 오소리, 코요테를 마주친다면 기쁨의 감정이 생길지 의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크게 마련이다.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을 복원하는 사업은 분명 의의가 있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반달가슴곰은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산객과 맞닥뜨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지내기에는 지리산 권역이 좁아서 이웃 산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다고 하는데 개체 수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과연 궁금하다. 그래서 저자도 동물에 관한 내용을 가장 마지막에 싣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태까지 도시 속 자연과 식물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깔끔하게 관리되고 정비된 정원과 공원보다 그냥 방치된 무성한 잡초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도시의 자연을 복원하고 공존하는 게 생태 차원을 넘어 인간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중차대한 사안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저자의 이 모든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커다란 방향성 측면에서 그릇되지 않음을 독자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어차피 도시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인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들 공허한 울림만을 남길 뿐이다. 솔직히 이따금 전원생활을 하면 즐겁고 행복하겠지만 일상을 자연 속에서 보내라고 하면 대부분 난감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 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을 기록에 남긴다.

 

잡초에게 기회를 주자. 그들은 미래의 도시 식물이다.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르자빈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가브릴라 데르자빈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데르자빈이 누구인가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푸쉬킨의 일화 중 아직 학생이었던 푸쉬킨의 시재(詩才)에 감탄하였다는 당대의 대시인이 바로 데르자빈이다. 이는 곧 당대 문단에서 데르자빈의 위상을 알려준다. 이 책은 데르자빈 시 총 110편 중 31편을 수록하고 있다.

 

작품해설도 그렇고 수록작을 살펴봐도 데르자빈의 시 작품은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 서정시로 양분된다. 수록작 중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 <폭포>, <펠리사>이며, 아나크레온풍의 시는 <꿈속의 나이팅게일>, <포도주>, <저녁 초대>, <침묵>, <시골 생활>, <첫 이웃에게>, <철학자들: 술 취한 사람과 안 취한 사람>, <러시아 처녀들>, <황제 마을에서의 산책>이 해당한다.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에 속하지 않는 기타 개별적인 작품들도 몇 편 포함되어 있다.

 

1804년 아나크레온 시집의 출판은 러시아 시사에서 대사건으로 간주됨. 19세기 러시아 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 줌. 19세기 비평가 벨린스키는 이 시집을 러시아 서정시의 진주라 칭송. (P.198, 지은이 연보)

 

데르자빈의 서정시를 굳이 아나크레온풍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생의 후반부에 아나크레온풍 시집을 출간하여서다. 여기서 데르자빈은 고대 그리스 시인을 본받아 현세의 삶, 사랑, 쾌락에 대한 예찬을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몇 편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 그의 시풍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난 삶을 즐기고 / 애인에게 자주 자주 키스하며 /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을 거다. (P.18, 꿈속의 나이팅게일)

 

심장에 달콤한 포도주는 / 사랑스런 입술의 키스처럼 우리에게 달콤하리라. / 너는 부드러운 여인, 사랑스런 여인 / 나에게 그렇게 키스해 다오, 내 사랑아! (P.20, 포도주)

 

내가 건강하고 / 먹고 마실 수 있다면 / 나는 부자요, 나의 힘이 지속되는 한 / 밀레나와 장난치며 사랑을 즐길 것이다. (P.43, 시골 생활)

 

지독한 슬픔이 오기 전에 / 마시고, 먹고, 즐겨라, 이웃이여! / 이 지상에서 우리는 시간을 서두르며 산다. /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 쾌락은 오직 순결일 뿐이다. (P.50, 첫 이웃에게)

 

송시는 어떤 인물, 사건, 장소 등을 기리기 위한 성격이므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읊은 서정시와는 완연히 구별된다. 데르자빈이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게 26260행의 송시 <펠리사>를 발표하면서부터였고, 대표작인 <폭포>는 무려 74444행에 달한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이 책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시인이 송시에 쏟는 노력을 짐작게 한다.

 

그의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을 통렬히 비난하거나(<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당대 최고의 부자인 인물의 죽음으로 죽음의 본질을 직시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거나(<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신을 찬미하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운명을 대비(<>)한다. 그의 송시 중 <펠리사><폭포>는 따로 논할 가치가 있다.

 

<펠리사>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키르기스-카자흐 무리들의 여왕인 펠리사에 비유하여 예찬한다. 시인은 예카테리나를 신에 육박하는 위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여제는 그야말로 모든 군주의 전범이기에 펠리사의 영광은 신의 영광”(P.143, 22)이라고 대놓고 칭송한다. 요즘 관점으로는 권력자에 대한 낯간지러운 아첨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당대 러시아인들과 당대 조선인들의 인식 수준으로 보면 순수한 찬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시인은 덕분에 여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가져오는 일은 /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왕이시여! (P.137, 13)

 

진실과 양심이 함께 있는 곳이 어딘가요? / 선행이 빛나는 곳이 어딘가요? / 바로 당신의 옥좌가 아닌가요! (P.144, 24)

 

<폭포>는 방대한 분량으로 단번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폭포 자체를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이어 이 시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함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인간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은 폭포를 끌어들인 것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의 정체는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대는 죽을 운명의 인간 중에 가장 용감한 자! / 지략으로 비상하는 이성이로다! / [......] / 그대는 기적의 지도자, 포툠킨! (P.116, 47)

 

이 송시는 포툠킨[포템킨] 장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그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크림반도 일대를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시켜 그토록 소원이던 흑해 진출과 부동항 확보를 이룬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유력한 애인으로 거의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누렸다고 전한다. 훗날 그의 이름을 기려 러시아 전함을 명명하였고, 근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그의 유해를 반출한 행위 모두 그가 범상치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외의 작품 중에서는 시인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기념비>가 재밌다. <등불>은 데르자빈이 해고당했을 때의 우울한 심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과 정당한 노력이 무참히 깨지는 묘사를 통해 자신이 당한 처지를 나타낸다. <희망>은 시인의 첫 번째 부인의 이름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희망을 주창하는데,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혹시 첫 번째 부인의 죽음 또는 불행을 기리기 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상>은 최만년작으로 말년의 심경을 잘 나타낸다.

 

옮긴이 해설은 데르자빈의 시 세계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어 다소 전문적이지만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푸쉬킨을 가능케 한 러시아 근대 시문학의 원류를 확인하였고, 주요 송시와 특히 아나크레온풍의 시에서 문학적으로도 큰 흥미를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장터극 선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록 작품>

1. 사랑과 마법의 힘

2. 똑똑한 동물들 (퓌즐리에)

3.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 (르사주)

4. 도돈의 숲 (르사주, 도르느발, 퓌즐리에)

5. 판도라의 상자 (르사주, 도르느발)

6. 장터극 유령 (르사주, 도르느발)

7. 아를르캥-데우칼리온 (피롱)

 

프랑스 중세의 파블리오 작품집을 읽으려다가 중세 소극(笑劇)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소극집을 읽다 보니 어느덧 장터극이라는 생소한 유형에까지 이르렀다. 장터극은 글자 그대로 18세기를 전후하여 중세 프랑스 장터에서 공연된 이런저런 유형의 무대 작품을 통칭해서 일컫는 용어다. 장터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외하면 상연된 극 형식은 꽤나 다양하다. 짧은 소극, 마리오네트극, 현수막극, 무언극 등. 이렇게 형식이 다양한 까닭은 장터극이 주류 문화층에 편입되지 못하였기에 지속해서 억압을 받아서이다. 장터극이 인기를 끌수록 정규 상설극장은 경쟁의식을 가지게 되고 권력의 힘을 빌려 탄압하려고 하였다.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 또는 대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대사 자체를 아예 쓸 수 없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장터극의 억압은 역설적으로 장터극의 역동적 발전으로 이어졌으므로 자생적 문화를 인위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사례를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장터극은 위반의 연극, 순종적이지 못한 연극이다. 매끈하고 절제된 규범과 질서의 미학에서 벗어나 있는 장터극은 의도적으로 패러디적일 뿐 아니라 고상한 것을 비속한 것으로, 영웅적인 것을 광대짓으로, 미를 추로 바꿔놓음으로써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다. (P.6, 머리말)

 

철저한 대중문화, 민중 문화적 속성을 지닌 장터극이기에 최우선적으로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재미 요소가 중요하다. 구성과 대사 자체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무대에서 춤, 노래, 곡예 등 다양한 볼거리가 또한 두드러진다. 장터극은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지만 완전히 당대화, 서민화하고 있는데, 관객의 친근감을 유도하기 위해 내용 자체도 평이하며, 등장인물의 행동, 대사도 욕설을 섞는 등 가식 없는 솔직함을 드러낸다.

 

수록작을 살펴보면 단독집필 작품도 있지만, 협업 작품도 많음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가인 르사주는 문학사적으로 <질 블라스 이야기>라는 피카레스크 소설로 더 유명하다.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현수막극이며, <장터극 유령>은 독백 프롤로그극, <아를르캥-데우칼리온>도 독백극이다. 아를르캥, 메제탱, 피에로처럼 전형화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등장인물로 나타남도 독특한 점이다.

 

<사랑과 마법의 힘>은 마법사 조로아스트르가 마법의 힘으로 양치기 처녀와 결혼하려다 신의 개입으로 실패하는 내용인데, 마법사가 자유자재로 부리는 악마들에게 하인 메를랭이 고통을 겪는 장면이 우습게 전개된다. 이 극은 대사 자체의 힘 외에 주변 인물들로 분장한 곡예사들의 여러 곡예 행동이 더 관객의 호응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장에서 메를랭이 사라반드 춤을 추며 끝나는 장면도 그러하다.

 

<똑똑한 동물들><오뒷세이아>의 블랙 오마주라고 할 만하다. 마녀 키르케에 의해 동물이 된 부하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율리시즈. 그의 예상과 달리 늑대, 돼지, 암탉, 황소, 홍방울새는 모두 동물의 삶에 만족해하며 인간이 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돌고래만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아를르캥이 된다. 표제 그대로 동물의 삶을 선택한 그들이 더 똑똑하다는 조소와 풍자가 곁들인 재밌는 작품이다. 이 극은 중간마다 노래가 여러 수록되어 있어 실제 무대로 관람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마지막 장에 악사와 댄서들의 노래와 음악, 춤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보여준다.

 

장터극은 공식극장들의 요청에 따른 고등법원의 개입으로 무대에서 말하거나 노래할 권리를 잃게 되자 공연금지를 피할 수 있는 무언극, 현수막극 등의 여러 수단들을 강구한다. (P.47)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현수막극이다. 배우가 직접 대사를 말하지 못하고, 현수막에 대사를 써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콜롱빈이라는 아가씨를 아를르캥, 메제탱, 스카라무슈, 피에로 등의 젊은이가 모두 좋아하였다. 콜롱빈이 재산 많고 나이 든 박사를 남편감으로 선택하자, 실망한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다. 콜롱빈은 피에로를 연인으로 삼는다. 내용으로만 보면 무겁고 슬픈 분위기여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콜롱빈) , 나리, 얼른 가서 미망인에게 / 넉넉한 재산을 남기도록 하세요. / 그리고 종, /리제트 라 리제트 / 그리고 종, /리제트, 라 리종. (P.51. 2)

 

대사를 못하는 대신 많은 노래가 들어 있어 거의 뮤지컬같은 느낌이 든다. 경쾌한 후렴구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유쾌하고 가볍게 만드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그래도 대단원에서 두 사람의 유령이 나타나고, 동물들이 등장하여 박사와 콜롱빈을 괴롭히며 끝나기에 두 사람에 대해 아주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도돈의 숲>21장으로 구성된 장터극 치고는 긴 작품이며, 짜임새도 훨씬 정교하다. 배우자의 부정과 신부 납치라는 사건이 무시되었던 신탁의 떡갈나무의 개입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내용인데, 역시나 많은 노래가 극 중에 불리는 것은 공통된 특성이다. 신부 콜리네트의 보석을 탐내어 납치하는 도둑 역할이 아를르캥과 스카라무슈인 점도 색다르지 않다.

 

(아를르캥) (떡갈나무에게 다가가며) 거짓말 하시는 거죠!

(떡갈나무) (자기 가지들 중 하나로 뺨을 때리며) ,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

(아를르캥) 살려 주세요! 나무가 말을 하고 뺨을 때리다니! (P.84, 20)

 

떡갈나무에게 호되게 당하는 아를르캥의 행동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마지막 장 이후에 민속 무용곡과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마무리하는 장면은 과연 장터극답다.

 

<판도라의 상자> 역시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다른 장터극과 달리 음악도, 노래도, 춤도 등장하지 않는 산문극이다. 공식 극장과의 대립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서라고 한다.

 

(메르쿠리우스) 무대장치도 없는 곳에서 / 춤과 노래도 할 수 없게 된 불행한 배우들을 / 너그럽게 봐 주세요. / 금지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랍니다. / 춤과 노래는 우리 이웃 배우들만 할 수 있다고 하네요. /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 이렇게 큰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 여러분 지갑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P.114, 24)

 

24장과 마지막 보드빌로 이루어진 역시 규모 있는 작품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작가는 여기서 피에로와 올리베트의 결혼을 앞두고 상자 개봉 전후에 등장인물들의 언행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로 인해 두 연인의 관계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극적으로 대조하여 보여준다. ‘순수믿음으로 대변되는 마을은 에덴동산처럼 일체의 악덕을 모르는 곳이었건만 이후 예의, 질투, 교태, 질병, 분노, 사리사욕, 변절, 거짓말, 복수, 류마티즘, 인색함, 그리고 코리동을 통해 권력욕이 모습을 차례차례 드러낸다.

 

<장터극 유령>은 대화사용을 금지당하던 시절을 타개한 방식의 독백극이다. 제아무리 재미나고 흥미롭게 뛰어난 대사도 주고받지 못하고 혼자서 주절주절 말하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곡예, 몸짓 같은 시각적 볼거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장터 유령이 알려준 대로 낚시질로 건져낸 고등어, 돌고래, 넙치, 곤들매기, 이탈리아 물고기, 송어, 황어 같은 물고기들로 무언극단을 꾸리겠다는 발상의 전환! 예쁜 송어 올리베트가 노래를 부르자 큰일 난다며 황급하게 조용히 시키는 행동은 역시 풍자에 다름 아니다.

 

(아를르캥) 무대는 구구 섬, 여러 라찌, 소음, 마술, 기계장치 등등을 곁들인 독백극.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던 작품이야. (P.130, 11)

 

<아를르캥-데우칼리온>도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3막의 규모가 큰 독백극이다. 대홍수 이후 데우칼리온이 돌을 던져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재조합한다. 익숙한 아를르캥이 데우칼리온 역할을 맡는다. 아내 피라가 죽은 줄 알고 좋아했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자 한탄하는 대목, 천마 페가수스가 당나귀 귀에 칠면조 날개”(P.150, 24)를 한 모양새 등 독백극의 단조로움을 회피하기 위한 희극적 노력이 가상하다. 풀치넬라의 도움으로 여러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농부, 수공업자, 검을 든 남자까지는 괜찮지만 법관에게는 신랄한 비난을 퍼부어대어 당대 민중의 법관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있다.

 

장터극은 실제 무대에서 공연을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한계 속에서도 권력과 지배층의 위선적 도덕률에 지배당하지 않는 중세 민중의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무척 유익하다. 참고로 악보집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어 음악을 잘 아는 독자라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성년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폰비진의 대표작이자 당대 풍자 희극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표제 미성년은 미성년 미트로판을 가리키는 동시에 당대 러시아 사회 수준이 미성년 단계임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풍자를 하려면 풍자 대상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프로스타코프 일가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프로스타코프와 그의 아내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들 미트로판, 처남 스코티닌. 작가는 대놓고 비웃기 위해 이들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유형화한다. 시골 지주 귀족, 극도로 무식한데다 하인과 농노 착취를 기본권으로 인식할 정도다.

 

(프라브딘) 안 됩니다. 부인, 누구에게도 그들을 학대할 권리는 없소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럴 권리가 없다고요! 귀족이 하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럼 귀족의 특권에 관한 법률은 대체 뭐예요? (P.152, 54)

 

집안의 실권을 틀어쥐고 남편을 때리기도 하며 온갖 횡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무식의 극치이자 그것을 오히려 당당하게 여길 정도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족과 신의도 일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고아가 된 소피야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서 남동생과 결혼시키려고 하다가 삼촌 스타로둠이 막대한 유산을 남길 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아들 미트로판과 맺어주려고 표변한다. 스타로둠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자 납치하려는 대담한 범죄행각을 벌일 정도다. 이런 그녀를 손쉽게 좌지우지하면서 기생하는 브랄만이 오히려 대단하게 보일 정도다.

 

그런 그녀가 꼼짝 못 하는 존재가 아들 미트로판인데, 극 중에서 그는 완연한 바보로 행동한다. 가정교사 셋이 달라붙어 수년이 지나도 글쓰기와 셈하기 실력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아들을 너무나 애지중지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오히려 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부할 가치가 없다고 억지 주장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학문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를 힘들게 한다면, 모든 게 필요 없지 뭐. 돈이 없다면 뭘 셀 수 있겠니? 돈이 있다면, 파프누티치 없이도 잘 셀 수 있다. (P.91, 37)

 

어떤 의미에서 미트로판 역시 희생자다. 엄마의 과중한 기대와 풍요로운 지주로서의 삶 속에서 어쩌면 수더분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그는 만사가 실패하고 집안이 몰락하게 되자 결국 엄마에게 폭발한다.

 

(미트로판) 엄마, 따라다니면서 날 귀찮게 좀 하지 마, 젠장...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니 너도! 너마저 날 버리는구나! ! (기절한다.) (P.163, 58)

 

작품의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희극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스타로둠이 이게 바로 악덕의 정당한 결과로다!”(P.164, 58)라고 탄식하는 악덕은 비인간적인 농노제와 잘못된 교육제도이다.

 

누나 못지않게 악독하고 무식한 스코티닌은 프로스타코바 여사와 유사하지만 독특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사람보다도 돼지에 더욱 열광한다. 그가 내뱉는 주요 대사는 항상 돼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소피야와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도 그녀 자체보다 그녀 마을의 돼지가 유달리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폰비진은 노골적으로 그와 돼지를 동격화한다.

 

(스코티닌) 그것도 아니에요. 내가 진짜 바라는 건, 그녀의 마을에 살고 있는 거예요.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게 뭐지?

(스코티닌) 누나, 난 돼지를 좋아해요. 이 주변 마을에 돼지들이 얼마나 큰지. (P.18, 15)

 

(스코티닌) 그 돈으로 난 온 세상의 돼지를 다 살 거요. 듣고 있소? 난 모든 사람에게 소문을 낼거요. 그곳에 돼지들만 살고 있다고. (P.41, 23)

 

이들 일가와 반대 측에 놓인 인물들은 스타로둠, 프라브딘, 밀론이다. 소피야와 더불어 이들은 성년러시아를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고결한 정신과 높은 품격, 올바른 양심, 분별력 있는 용기 등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스타로둠의 도덕론은 응당하면서도 지루하다. 그는 프라브딘과, 밀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지혜와 영혼을 알아보고 교감을 한다. 관리로서, 군인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하는 모습은 단지 스타로둠뿐만 아니라 이 희극을 접하는 모든 독자와 관객이 마찬가지이리라. 나아가 스타로둠은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군주의 의무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대사다.

 

(스타로둠)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군주는 국민들의 영혼을 고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P.142, 51)

 

다만 과도한 설교와 훈계가 이 극을 교훈극 또는 도덕극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하다. 해설에 따르면 당대 관객은 오히려 스타로둠의 장광설에 열광하였다고 하는데,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 오늘날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늘날 이 작품의 가치는 부정적인 인물 군상들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한 자기 옹호와 과시에 있다. 그들이 자부하고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그들 자신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고 뛰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독자에게 그들 스스로의 결점과 악덕을 한층 두드러지게 보여 줄 뿐이다.

 

작품 자체의 정치적 풍자성을 논외로 한다면 차라리 앞서 읽은 <여단장>이 더욱 흥미롭다. 인물의 과도한 전형화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보다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이 제각기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는데 독자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비웃지 못하는 묘한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충실한 작품해설은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부록의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미성년>에 실린 것과 같은 내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중세 파블리오 선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장 보델 외 지음, 김찬자 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은 앞선 중세 소극과 마찬가지로 책[작품]을 읽고 난 감흥보다는 소개 자체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내가 참고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가람기획)파블리오를 이렇게 적고 있다.

 

파블리오는 주로 13세기에 유행한 약 150종 가량의 각각 독립된 운문으로 씌어진 이야기로서, 짧은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콩트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80)

 

이 책은 프랑스 중세에 유행했던 파블리오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해설에 따르면 비교적 잘 알려진 20편을 엄선하였다고 하니 대표적인 파블리오는 모두 수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네 명의 옮긴이의 노력뿐만 아니라 전혀 의외로 화려한 표지와 삽화를 채용한 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파블리오에서는 세련된 궁정풍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계층의 삶이 소개된다. 이문학이 주는 즐거움은 이야기에 산재되어 있는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P.258)

 

파블리오에 대해 보충하자면, 8음절 운문체 형식의 웃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주로 음유시인들이 지어서 낭송하였기에 운문을 택하였으며, 왕공에서 주로 대중에 이르기까지 청중 앞에서 구술되었으므로 흥미진진함과 재미는 필수 요소라고 하겠다. 작가들은 예외는 있겠지만 서민들과 삶과 호흡을 같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중세 서민들의 삶의 양태가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파블리오의 내용은 저속하고 음란하며 감정 곡선이 솔직하다. 인물들의 언행도 품위와는 무관하게 야비하고 노골적이며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다.

 

본능과 욕망 실현을 위해 인물들은 체면과 도덕을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면 상대방을 기만하기 일쑤고 그것은 작품 속에서 상찬받아 마땅한 덕목이 되기도 한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속임수를 노리며, 남의 여인을 유혹하고 탐하기 위해 야밤 잠행을 무릅쓰는 망신스러운 행동에는 농부는 물론 신학생과 경건한 성직자도 예외는 없다. 수록작 중에는 특히 성직자들의 여색과 물욕에 관련한 내용이 많은데 성직자의 위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실제 성직자들의 행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을 속이는 데 특별한 목적 없이 단순히 즐거움과 재미를 노리는 일도 있으며, 구두쇠 상대방의 불친절에 강력한 보복을 날려서 통쾌함을 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착오를 소재로 웃음을 추구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물들의 면면을 나열하면, 장님, 성직자(신부/주교 등), 푸줏간 주인, 매춘부와 기둥서방, 부르주아 여인, 기사, 도둑, 농부, 영국 왕, 신학생 등 각층이 전부 포함된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폭소를 터뜨릴까? 아마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위선의 가면을 벗고 까불다가 된통 창피를 당하는 장면에서 시원한 웃음을 쏟아내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성()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누구나 원하고 좋아하지만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누구에게는 금단의 영역인 그것. 기독교가 지배하는 엄숙한 중세 사회라고 해서 서민들마저 근엄하게 도덕적이라는 기대는 금물임을 파블리오는 보여 준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물들은 기회 있을 때면 성적 쾌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아내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강조하는 일부 작품은 특히 여성의 외도 우려에 전전긍긍하던 남성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음을 알려 준다. 물론 윤리의식에 철저한 인물도 있기에 아무 데나 들이대면 안될 텐데 일순간의 즐거움을 도모하다가 앞뒤 가리지 않다가 호되게, 심지어 목숨마저 잃는 딱한 처지에 놓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개별 작품을 유형별로 잠시 살펴보면 <콩피에뉴의 세 장님>은 세 장님과 신부, 그리고 여인숙 주인을 속이는 교활한 성직자를 다룬다. 이처럼 성직자가 사건을 일으키거나 단초가 되는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브뤼냉, 사제의 암소> <성당 관리 수도사> <당나귀의 유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 해당한다. 신학생도 같은 범주로 취급하면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도 마찬가지다.

 

()을 제재로 한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프로뱅의 부아뱅> <머리 타래>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 관리 수도사>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다.

 

아내가 남편을 속이는 내용도 제법 있는데,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머리 타래> <> <바이열의 농부>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 <의사가 된 농부>가 그것이다. 남성 지배 구조를 뒤엎는 전복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속임수, 사기, 기만 요소가 담긴 작품은 수록작 거의 모두라고 할 만하다. 이런 요소가 없는 드문 이야기가 <에튀라> <옹트의 가방> <당나귀를 모는 농부>. 언어유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에튀라><옹트의 가방>을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파블리오로,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은 선량한 푸줏간 주인이 욕심 많은 사제에게 철저한 복수로 되갚으며, <에스토르미>는 유부녀를 넘보던 세 사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가운데 에스토르미가 고군분투하며, <성당 관리 수도사>도 비슷하다. <에메와 바라>는 도둑 형제와 정직한 농부 간 치열한 두뇌 대결이 펼쳐진다. <의사가 된 농부>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 농부가 아내의 꾀에 넘어가 위기를 겪고 부유하게 되고 마침내 아내를 부드럽게 사랑하게 된다는 드물게 보는 부부의 해피엔딩을 보여 준다.

 

파블리오 작가들의 진정한 의도는 <콩피에뉴의 세 장님>이 밝힌 것처럼, 교훈을 주는 것보다는 삶에 대한 즐거움을 주고 실존의 불행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P.262)

 

이 점을 고려한다면, 파블리오 작품이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더불어 중세 서민 사회 이해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