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텟 케이(Quartet K) (1) -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2/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14'죽음과 소녀'

 

1. 음반정보

- 레이블: SONY Classical

- 음반번호: S80114C

- 수록시간: 68:57

 

2. 연주자

- 콰르텟 케이 (Quartet K)

  1 바이올린 : 임가진 (Kajin Lim)

  2 바이올린 : 김덕우 (Duck Woo Kim)

  비올라 : 이수민 (Soomin Lee)

  첼로 : 주연선 (Yeonsun Joo)

 

헤르만 헤세는 니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작품에 음악에 대한 사랑을 헌신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삶과 꿈의 괴리,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 문명사회의 비이성적 독재와 억압 같은 정신적, 물질적 문제가 음악적 숭고함과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콰르텟 K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말년의 작품 <유리알 유희>에 등장하는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이름을 빌었다. 크네히트 역시 헤세가 만든 지적, 예술적으로 완성된 인격체이자 유토피아적 미래 지식인의 표상이다. 콰르텟 K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현신한 헤세의 음악적 신념을 동경하고 그의 음악에 대한 헌신에 자극 받았다. 2013년 창단과 동시에 철학콘서트의 파트너로서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앙상블의 탄생과 철학콘서트의 동행은 이같이 운명처럼 시작됐다.

 

콰르텟 K는 서울시향의 바이올린 수석 임가진, 김덕우, 첼로 수석 주연선, 그리고 최고의 현대음악 단체인 독일 앙상블 모데른의 멤버로 활동한 비올라 이수민으로 구성되었다. 최고의 지성과 실력을 겸비한 이들이다. '사랑과 배려를 통한 조화로운 음악'을 모토로 한국을 대표할 최고의 현악 사중주단 콰르텟 K의 역사가 시작됐다.

[내지에서...]

 

3. 녹음

1) 녹음일자: 2014/06/26-28

2) 녹음장소: Studio of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Seoul

 

4. 프로그램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2 in A minor Op.13

01. Adagio - Allegro vivace (8:01)

02. Adagio non lento (7:13)

03. Intermezzo. Allegretto con moto -Allegro di molto (5:11)

04. Presto - Adagio non lento (9:36)

    Schubert, String Quartet No.14 in D minor D.810 "Death and the Maiden“

05. Allegro (11:11)

06. Andante con moto (14:31)

07. Scherzo. Allegro molto (3:47)

08. Presto (9:03)

 

* 세줄평

콰르텟 K 또는 콰르텟 크네히트의 두 번째 음반이다. 상대적으로 귀한 국내 현악사중주단, 그것도 서울시향 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연주 단체다. 슈베르트 곡이야 원체 유명하지만, 멘델스존의 작품이 내게는 의외로 숨은 명곡이다. 연주도 좋고, 녹음도 우수하다. 이들의 활동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게 안타깝다.


멘델스존 : 현악사중주 2번 / 슈베르트 :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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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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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대중에게 오펜하이머의 이름이 비로소 각인되었다. 이전에는 일부에게 기껏해야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자 정도로만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당대의 저명한 양자물리학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원자폭탄 개발 이후 핵 통제를 위해 활동하다 곤욕을 치른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전이다. 본문만 900면이고, 색인 등을 포함하면 1,000면을 넘긴다. 빽빽한 조판을 고려하면 상당한 분량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 책은 오펜하이머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사망하기까지 그의 개인, 가족생활, 학자로서, 행정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핵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다 끝내 좌초하고 마는 삶 전부를 샅샅이 훑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꼭 이 정도로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로 내밀한 삶의 영역까지 다루고 있는데,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미 이렇게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한 사람의 공적인 행동과 정책 결정 과정이 (오펜하이머의 경우에는 심지어 그의 과학 업적들마저도) 일생에 걸친 개인의 경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믿음으로 쓰인 극도로 개인적인 전기이다. (P.15)

 

우선 궁금한 것은 오펜하이머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을 만한 과학적 업적을 성취하였는가이다. 저자들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고 기술한다. 오펜하이머의 뛰어난 재능은 그가 한 분야에 집중하는 걸 막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로스앨러모스 책임자를 맡지 않았다면 과학자로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에 학문 연구에 집중하여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는 이론물리학계에 일파를 이룰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오펜하이머는 한 가지 문제를 오랫동안 파고들 만한 참을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결과 그가 새로운 분야의 문을 열어젖히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중요한 발견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P.150)

 

오펜하이머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성격상 결함이 온전히 메워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높은 자존심과 금욕적 성향, 무모할 정도의 반항심 내지 오만함, 캠프장 얼음 창고에 갇혔을 때 보였던 수동적 태도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에게 엿보이는 성격이다. 케임브리지 시절 지도교수에게 독을 먹이려고 했던 행위는 그가 극단적 압박 상황에서 이성의 끈을 놓치는 성향의 출발점이다. 훗날 그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청문회에서 보인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그의 성격적 결함이다.

 

그는 평상시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으나, 긴장만 하면 깊이 후회할 만한 말을 했고, 이는 그를 심각한 곤경에 빠뜨렸다. (P.506)

 

오펜하이머는 이제 자신에게는 끝까지 절차를 진행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금욕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이었다. (P.789)

 

사회적으로 명성 높은 인물의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사례가 흔하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다. 그가 사랑했던 여성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대목에 이르면 부부보다도 아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다. 과학 연구밖에 모르는 아빠, 가정을 꾸리는 일에 전혀 무관심한 엄마. 그곳에서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기를 기대한다면 과욕이 아니겠는가. 두 자식의 삶이 훗날 불행으로 점철된 것은 외부적 요인을 참작하더라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개발에 진력한 행위는 극단적 반핵주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납득할 수 있다. 나치 독일이 개발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미국이 폭탄 개발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승전을 바라는 처지에서 있을 수 없다. 실제로 나치 독일의 개발과 실험을 방해하는 공작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는 달라졌을 수 있었다. 요는 개발 자체는 당시 전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개발이 완료된 시점에 독일은 이미 항복하였고, 일본은 조만간 패망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핵폭탄 기술을 독점하여 그것으로 국제정치에서 힘의 우위를 발휘하려 한 선택에서 이론이 생긴다. 오펜하이머 역시 이 점에서 정부 관료들과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라비와 오펜하이머는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국제 원자력 기구를 제안했고, 그것이 폭탄과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P.518)

 

허울 좋은 동맹관계를 벗어던지고 냉전으로 돌입하는 시점에서 핵무기 기술을 공개하여 누구도 독점하지 못 하게 하고 국제기구를 통해 실질적으로 통제하자는 주장은 순진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인 조치다. 오늘날 핵확산을 강조하는 목소리의 원류가 보어와 오펜하이머에게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정부 관계자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주장이었고, 매카시즘과 정치 역학이 결부하여 원자폭탄의 아버지오펜하이머를 몰락시키는 공작을 펴게 하였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P.245)

 

매카시즘 광풍에서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인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다. 저자들이 속속들이 밝혀낸 자료에 따르면 비교적 젊은 시절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건 사실이다. 어쩌면 당시에 지식인치고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두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참여하지 않은 이는 별로 없을 정도다. 오펜하이머 역시 대공황의 참담함에 연구실 밖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로 물망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는 계속해서 의심과 감찰과 도청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과연 참다운 의미에서 개인적 삶이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전시 상황에서조차 통과되었던 그의 이력과 사상이 새삼 1950년대 다시금 제기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없는 상황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어처구니없지만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까 회의적이다.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좌파, 빨갱이 같은 색깔 논쟁을 전개하며 치명타를 안길 수 있다. 불과 얼마 전에만 해도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념으로 시비를 걸고는 하지 않았던가.

 

그가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이주하는 건 애국심 차원에서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박해받는 상황에서 청문회의 그 모든 모욕을 오롯이 감수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오펜하이머 망신 주기를 목적으로 하는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절차와 자료로 도저히 정당한 항변이 불가능하다면 아인슈타인의 조언처럼 차라리 과감하게 청문회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뛰쳐나올 수 있었다면 어떠하였을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부인당하고 살갗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무력하게 감내하는 한 마리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오히려 부당한 피해자로서 동정심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다 겪고 난 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재판과 그레이 위원회의 평결을 둘러싼 소동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오펜하이머의 유명세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만 알려져 있던 그는 이제 박해받는 과학자로 갈릴레오와 같은 반열에서 추앙받게 되었다. (P.826)

 

로스앨러모스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설계한 고등연구소장직도 끝내 내놓고 야인생활을 하게 된 그에게 남는 건 무엇이었을까? 야망이 남다르게 강렬했던 그가 타의에 의해 하차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과 아내, 자식들의 정상적 삶은 이미 불가능해진 셈이다. 그의 급격한 건강 악화는 커다란 실의와 지독한 흡연의 절묘한 콜라보의 결과다.

 

국제적 핵 통제를 주창한 그의 노력은 무산되고 미소 강대국의 무한 군비 경쟁이 냉전 시대를 특징 짓게 되었으며, 원자폭탄은 이제 강대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그토록 반대했던 슈퍼 폭탄, 즉 수소폭탄도 결국 원자폭탄의 기술적 우위가 사라지자 군사적 목적에서 추진되었으니 그가 예언했던 것처럼 인류는 인류의 멸망을 순식간에 초래할 위험을 침대 밑에 깔고 누워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은 한 시대에 굵직한 선을 그은 한 과학자의 삶을 통해 과학기술 개발과 인류의 진보, 개인과 정부의 관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파렴치한 공작 전개 등의 작태를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냉전 시대를 관통하여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라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신화 속 거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을 겪게 되었지만 그로써 그의 이름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100년간 끊임없이 생겨날 무책임한 정부들과 새로운 기술적 발견에 맞서, 누군가 우리를 핵무기로 기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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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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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해설을 보면 이 작품을 쓰던 시기가 윌라 캐더의 개인사에서 매우 힘든 시기였음을 알게 된다. 가족과 지인의 잇따른 죽음, 오랜 거소에서의 원치 않는 이사 등.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상실과 기억이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도드라지는 젊은 여성의 얼굴로 채워진 겉표지. 영롱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또렷이 응시하는 모습은 바로 루시의 표상이다. 루시의 개인적 특성 자체는 현재, 여기보다는 미래와 저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화자도 수차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해버퍼드를 사랑하지만, 고향과 고향 사람을 벗어나려고 한다. 루시는 빛과 자유의 세계”(P.205)로 나아가고 발전하고 싶어 하는데, 고향은 정체와 속박의 표상이므로.

 

아주 오래전부터, 앞으로도 영원히!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복은 영원한 것이었다. 루시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사소한 일에 들뜬 것이 아니었다. (P.17)

 

루시가 서배스천에 매혹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뛰어난 예술가에게 흠뻑 빠진 여성의 사례는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무수히 많다. 더군다나 루시처럼 예술적 감성이 충만하며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성을 지닌 경우에는. 우리는 여기서 서배스천과 루시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의 사랑, 정확히 표현하여 중년남성과 젊은 여성의 사랑으로 깎아내려 생각할 필요가 없다. 루시의 사랑은 너무나도 뛰어난 예술에 대한 도취에 가깝다. 서배스천은 그녀를 이성으로 보다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 삶의 불꽃이 쇠잔해지는 시기에 삶에 활력과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두 사람의 포옹과 입맞춤은 에로틱보다는 친밀감을 풍긴다.

 

루시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내주는 기분이었다. [......] 무언가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 서배스천의 마음에서 루시의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지혜와 슬픔이었다. (P.94)

 

루시는 이상과 현실, 도전과 안주의 기로에서 전자를 선택한다. 그녀가 해리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작중 모두는, 아마 서배스천마저도 기쁘게 여겼을 것이다. 누구라도 두 사람의 결혼을 탐탁잖게 생각하거나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해리를 거절한다. 그녀의 마음 가득히 이미 서배스천과 그가 일깨워준 예술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기에 해리라는 현실을 수용할 여지가 없었던 탓이다. 루시는 적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오로지 전심전력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일말의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꿈과 이상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후 루시에 대한 해리의 반응과 태도를 두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자기 여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상대에 대한 배신감은 그토록 컸던 것이므로. 오히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에게 이전의 우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루시가 너무 한 게 아닐까. 차라리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고향마을은 좁고, 루시는 여전히 해리가 필요하였다. 특히 서배스천이 죽은 후에는 더더욱.

 

루시를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유학 생활이 가계에 얼마나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것인지 경시하며, 이를 완화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도 신경쓰지 않는다. 더욱이 언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언니 폴린은 고향집을 지키는 존재에 불과하다. 해리를 향한 심경과 태도로 이중적이다. 자신이 해리의 청혼을 거절하자마자 해리가 다른 여성과 결혼한 사실에 분개한다. 자기가 해리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자기와 해리는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해리는 그래야만 했다고 착각한다. 이처럼 그녀의 남다른 생명력과 활기는 다른 사람을 매혹시키지만 그녀의 이성과 사고란 측면에서 인간적 약점을 보인다.

 

,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 광휘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니 구하고 싸워 얻어야 했다. 그 속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192)

 

서배스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루시는 주저앉지 않고 서서히 벗어난다. 단지 추억과 회상에만 침잠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으로 뛰어들어 그가 남긴 영혼과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추구하고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욕을 품는다.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루시의 앞날과 예술은 어떤 변모와 발전을 이루어냈을지 안타깝다.

 

그리고 루시의 죽음으로 인생이 뒤바뀐 인물이 있다. 바로 해리다. 우리는 해리가 루시를 미워하지 않았음을 안다. 루시의 거절로 화가 났지만 결국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존재는 루시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봐 내보이지 않으려고 오히려 외면하고 남모르듯이 행동해야 했던 해리는 얼마나 딱한가. 그런 자신의 잘못으로 루시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해리는 여전히 루시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추억한다. 그건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루시만의 독특한 개성이 그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루시와 부부가 되었다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광휘로 가득한 삶이 되었을 것인가.

 

삶이란 부질없는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만사가 일말의 아쉬움 없이 성취된다면 후회는 남지 않겠지만, 더불어 추억도 회상도 없다. 사람은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에 더한 미련을 갖는 법이다. 그것이 귀할수록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해리는 루시를, 루시는 서배스천을, 서배스천 역시 자기 가족을. 그리고 해버퍼드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로서 루시를 계속 떠올린다.

 

작중에서 서배스천이 바리톤 성악가이고, 루시가 피아노 반주자로 나오기에 슈베르트를 포함한 클래식 성악 소개가 제법 많이 나온다. 음악적 배경지식이 있으면 작품 이해에 좀 더 유리할 것이다. 성악 가사는 소설 전개에 있어 미묘한 복선과 암시 역할을 하는 때도 있어 더욱 음미할 이유가 있다.

 

독특한 정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했던가. 이따금 빛나고 활기찬 대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은은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서를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제3부는 해리가 추억하는 루시로 온전히 채워져 있기에 이러한 분위기가 한층 짙다. 하지만 슬프고 비감 어린 정조로 빠지지 않는 건 그네들의 삶이 불의의 사고로 꺾였지만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한치의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일생을 불살랐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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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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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캐더는 미국의 대표적인 지방주의 내지 지역주의 작가이다. 그녀가 어릴 적 거주하였던 네브래스카의 거칠고 황량한 자연, 개척민들의 평범한 삶을 위한 끈기와 노력 등은 작품세계의 핵심을 이룬다. 수년 전 읽은 그의 대표작 <나의 안토니아><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자못 감명 깊었다. 번역된 다른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 참에 근년 들어 몇 권이 새로이 출간된 걸 알았을 때 매우 기뻤다.

 

<로스트 레이디>방황하는 부인또는 길 잃은 부인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Lost Generation’과 흡사한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전통적인 시대 가치와 살고자 하는 개인으로서 뜨거운 열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방황하는 포레스터 부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면에서 표제는 적확하다. 최초의 번역본은 아니며, 아주 오래전에 도서출판 오상에서 <그는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렸다>라는 표제로 나온 적이 있다. 다만 그 책은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P.67)

 

이 소설은 20세기 초 서부 개척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척정신이 퇴색하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변하는 시대와 더불어 퇴장하는 인물과 새로운 세태에 재빨리 적응하여 번영하는 인물 군상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포레스터 대령과 포머로이 판사가 전자의 전형이며, 화자인 닐 역시 구시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들은 사리사욕보다는 명분과 양심을 중시하며, 고상한 품위가 스러지고 얄팍한 영리가 득세하는 현상을 수용하지 못한다. 은행 파산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인물들이라든가 아이비 피터스 같은 사람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캐더는 찬란했던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에 동정과 안타까움을 표출한다. 오늘날 미합중국을 완성한 서부 개척은 장엄한 낙조와도 같이 자신의 수명을 다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며, 그 아름다움과 미덕을 간직한 채 흘러갈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깊은 감정을 담아 문장을 서술한다.

 

실로 이것은 서부 개척시대의 끝이었다. 쇠의 힘으로 초원과 산을 다스렸던 남자들은 이제 늙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해졌으며, 심지어 성공한 이들도 죽음으로부터의 짧은 유예와 휴식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막이 내린 시대였으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P.194)

 

작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포레스터 부인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한다. 아주 빼어난 미모는 아님에도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개개인을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드는 능력은 선천적 재능이다. 그녀가 있기에 포레스터 플레이스는 방문객들이 항상 끊기지 않는 유쾌하고 따뜻한 집으로 인식되어 동경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이처럼 독자와 세인의 눈에 외양의 포레스터 부인과 내면의 그녀는 전혀 상반되기에 당황하게 된다. 부인은 부도덕한 가면의 여왕일까.

 

포레스터 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편과 같은 시대적 인물과 함께 우아하게 소멸하기를 기대하는 시각에서 그녀는 참으로 부도덕하다. 그녀는 표면적 고상함과는 달리 은밀한 혼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남편의 죽음 이후 아이비 피터스와 불건전한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며, 특히 어릴 적부터 그녀를 우상시하였던 닐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야생장미 다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그는 철조망 너머로 꽃다발을 던져 냇가 아래 가축들이 짓밟아 놓은 진흙탕에 버렸다. (P.102)

 

한편 포레스터 대령 부부의 결혼 생활은 과연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관계였을지 의문스럽다.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 플라토닉한 감정만으로 행복한 결혼이 존속하는 건 아니다. 육체적 관계 맺음을 사랑을 완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메리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대령에 대한 보은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성공한 중년남성이 주는 안정감을 선택했을 것이나, 만족스럽지 못함은 프랭크 엘리저와의 외도를 통해 드러난다.

 

포레스터 부인은 본성적으로 도회풍 여성이며, 사람들 속에서 화려함과 사교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나름대로 스위트워터라는 시골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겨울철마다 도회에서 보냈던 덕택이다. 대령의 파산으로 그녀는 연중 시골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건 그녀를 정신적 고통과 절망,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심정은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내년 겨울에도... 내후년 겨울에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 봐! 내가 어떻게 되겠니, ?”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의심할 여지 없는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P.92)

 

개척 시대의 화신이었던 남편이 죽고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처사일 수도 있다. 고대의 순장 풍속도 아니며, 지아비가 죽으면 평생 수절해야 하는 전통 유교 사회도 아니다. 아직 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살아갈 이유가 있다. 그녀라면 더더욱 생의 의지는 강렬할 것이다. 이것이 닐을 실망케 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곱게 늙어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살려는 힘이 내 안에서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진단다, .” (P.145)

 

이것이 그가 포레스터 부인에게 품은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녀가 이 위대한 남자들 모두의 과부를 자처하여 스스로를 제물로 희생하고 자기가 속한 개척시대와 함께 소멸되기를 거부했다는 것. 어떤 조건에서라도, 그녀는 살기를 원했다는 것. (P.194)

 

F. 스콧 피츠제랄드가 윌라 캐더의 팬이었으며, <위대한 개츠비> 속 데이지와 포레스터 부인과의 우연한 유사성을 밝힌 부록의 대목은 흥미로운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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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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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읽은 책을 이제야 겨우 끄적거린다. 나태의 만연은 이토록 무섭다. 솔직히 찰스 디킨스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겼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개개가 방대하다. 천 페이지를 넘기는 작품도 있으며, 당장 이 책만 해도 빽빽한 조판으로 6백 면을 넘긴다. 보통은 두 권으로 분책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 가난한 고아가 비참한 생활을 겪다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는다는 줄거리는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이지 않은가. 도중에 다소간 행복을 찾으려다 작가의 변덕으로 이내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길 여러 차례. 독자의 입장에서는 비상과 나락을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전개에 흠뻑 빠져들 수 있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반복되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불행에 차라리 황당함을 품기조차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범죄 공모자들의 고리를 실제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 즉 그들의 뒤틀린 모습과 비참함과 그들의 불결하고 궁핍한 생활상을 현실 그대로 보여주고, 한결같이 삶의 가장 더러운 길을 불안스럽게 숨어다니다가 마침내 저 거대하고 어둡고 끔찍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매우 필요하고 또 사회에 이바지하는 시도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시도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P.11, 저자 서문)

 

근묵자흑(近墨者黑)라는 성어처럼 사람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올리버가 자신을 둘러싼 어둡고 비참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순수하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였음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실제적 가능성은 얼마나 그러할지 의문이 들 정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주인공의 비참과 비극의 정도가 심할수록 그의 순결함은 더욱 빛난다. 따라서 작가는 런던의 어두운 뒷골목 사회를 시종일관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음지의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페이긴, 사익스, 멍크스로 대변되는 악인- 범블 씨도 잊지 말자 -은 올리버의 앞날을 가로막는 인물이므로 그들의 말과 행동, 사건은 철저하게 악에 기울어져 있다.

 

올리버를 괴롭히는 존재가 단지 악인에만 있지 않다. 그가 고통을 겪고 뒷골목 생활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이를 부추기고 가능케 한다. 당대의 형편없는 구빈원 제도는 오히려 희극적이기에 한층 생생하다. 교육 제도, 산업 구조, 물질 만능주의 등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흥으로 경제적 부가 축적되던 시기에 영국 서민의 삶이 어떠했을지 디킨스는 냉철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은 사회 고발 소설이기도 하다.

 

올리버는 말단 교구관의 지시에 따라 꾸벅 감사인사를 올린 다음, 서둘러 커다란 보호소 건물로 끌려가서 거칠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축복 받은 나라의 자상한 법률에 따른 사례를 어디에서 이토록 고귀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다니! (P.32)

 

이 광경을, 배 속에서는 고기와 술이 썩어나고 얼음 같은 피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좀 보았으면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개도 거들떠보지 않을 진수성찬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말이다. (P.59)

 

올리버가 악의 소굴에서 벗어나 빛의 삶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계기는 브라운로와 메일리, 로스번의 덕택이다. 인간에 대한 선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그들의 인내와 용기는 올리버에게는 필수적이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지극하다. 그가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일개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가 그들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까닭은? 그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배금주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어려울수록 더욱 드러나는 인본주의.

 

아가씨, 우리를 가엾게 생각해줘요. 가엾게도 우리에게는 여자로서의 감정 중에 단 하나만이 남아서, 위안과 행복이 아니라 폭력과 고통의 원천이 되어버렸거든요. (P.455)

 

세상 사람이 모두 양극단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다. 낸시를 보자. 일찍이 페이긴에게 붙잡혀서 어두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올리버에게 동정적이다. 올리버를 타락시키려는 페이긴에게 낸시가 퍼붓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그녀로서는 이미 자신의 삶은 회복 불가능하지만 올리버만큼은 더러워지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낸시와 로즈의 만남 장면은 구원을 거부하는 낸시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기에 처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 [......]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상상 속에서 어떤 권력이나 자만심으로도 없앨 수 없는 망자들의 깊은 증언을 듣는다면, 과연 나날이 이어지는 우리 일상에 상처와 불의, 고통과 비참함, 잔인함과 잘못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있으랴! (P.330)

 

이 소설은 문학사적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여러 비판을 받는 작품이다. 인물들의 변치 않는 전형성, 올리버와 로즈가 남매지간이라는 설정, 올리버의 일생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 무엇보다도 우연의 반복 등. 하지만 온갖 고초에도 올리버가 선심을 유지하는 것, 당대 런던 하류 사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잘못된 제도를 고발하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작품 자체가 상당히 재밌다는 요소. 끝내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대리만족도 빠뜨릴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디킨스에게 발을 담갔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천천히라도 그의 작품을 하나씩 펼쳐보련다. 아주 장기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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