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이야기 - 영미 여성 작가 단편 모음집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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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루이자 메이 올컷 -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

제인 오스틴 - 세 자매

윌라 캐더 - 폴의 사례

케이트 쇼팽 - 실크 스타킹 한 켤레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 뉴잉글랜드 수녀

엘리자베스 개스켈 - 이부형제

샬럿 퍼킨스 길먼 - 변심

수전 글래스펠 - 사소한 것들

조라 닐 허스턴 -

에이미 레비 - 현명한 세대

캐서린 맨스필드 - 행복

이디스 워턴 - 다른 두 사람

버지니아 울프 - 새 드레스

 

좋아하는 작가 윌라 캐더의 <폴의 사례>를 위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작가 또는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삶은 남성 혹은 여성만을 표방해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종래의 관습과 타성에 묻혀 있던 여성성을 발견하고 추구한다면 몰라도 그것을 과장하고 극단화하는 방향성은 내 선호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성주의 논의는 차치하고 이 책에 실린 13편의 단편들은 자체로서 대체로 흥미롭고 재밌기까지 하다. 맨스필드의 <행복>은 재회가 반갑다. 올컷과 오스틴, 개스켈, 허스턴, 울프 등 나름 친숙한 작가의 단편 작품은 처음 접한다. 워턴과 쇼팽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제 독서는 처음이다. 프리먼, 길먼, 글래스펠과 레비는 완전 생소한 작가인데, 덕택에 존재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단언해도 좋다.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근대 여성의 삶의 공통점을 몇 가지 간추려볼 수 있다. 그녀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거의 전부에 해당한다. 그것은 현대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결혼에 대한 의존도와 절대적 중요도는 현대와는 비교 불가능하다. <세 자매>에서 볼 수 있듯 사랑과 결혼은 분리할 수 있다. 여자는 신분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 남자는 번듯한 가정을 꾸리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뉴잉글랜드 수녀>에서 루이자는 스스로 수녀와 같은 삶을 선택한다. 무척이나 이색적인 결정이지만, 그녀가 조와 오랜 기간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쨌든 그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면 그녀의 선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루이자의 경우는 제한적인 동시에 시사적이다.

 

<현명한 세대>는 독특하다. 여기는 소위 남녀 사이의 밀당을 둘러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자신에게 호감을 나타낸 남자가 부유한 아가씨와 결혼하자, 필립 앞에서 부자 귀족 가이 경과 다정한 장면을 연출한다. 워릭 양이 가이 경을 실제 좋아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녀는 필립을 아직 떠나보내지 않았고, 그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을 품고 있다. 사교계 풋내기 아가씨가 노련한 여성이 되어 두 남자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흥미롭다. 결론은 모호하다. 가이 경의 청혼을 끌어내는데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가이 경을 받아들일까. ‘현명한 세대답게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은 분명하다.

 

결혼으로 남편을 얻고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다. 모든 남자가 부자가 아니기에 경제적 요인은 항상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결혼은 양성의 행복한 결합을 전제로 하지만, 누구 말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법이다. 여기에 전근대적 남성우월주의가 결부된다면 가정폭력은 일상사가 된다.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매맞는 아내의 사례가 남아있다고 하니 과거에는 한층 심하였을 것이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는 나쁘게 보면 주부의 덧없는 허영심을 풍자한 소설이지만, 가정생활의 무게에 짓눌린 여성의 억압된 꿈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록 현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그 꿈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남녀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의복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위치, 결혼생활의 안정성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라는 점을 <새 드레스>는 알려 준다. 메이블이 스스로 위축되고 비참해하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해서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쟁반 중앙에 처박힌 불쌍한 파리와 동일시한다.

 

<행복>에서 버사는 온몸 가득 행복을 느끼지만 그 순간 그녀의 행복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다른 두 사람>은 조금 묘하다. 두 남편과 이혼하고,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앨리스. 그녀의 경쟁력은 매혹적인 미모와 우아한 언행이다. 우연찮은 사건으로 웨이손은 그녀의 전전남편, 전남편과 계속 마주치게 되고 점차로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지 않게 된다. 오늘의 앨리스를 만든 건 어쩌면 두 남편 덕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표제의 다른 두 사람은 과거와 오늘의 앨리스를 너무나 다른 인물임을 뜻하는 걸까?

 

허스턴의 <>은 여성, 그리고 흑인의 열악한 상황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대표작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억압받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드러내고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명확히 표출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흑인 남성은 오히려 여성에 비해 자질 면에서 열등하다. 그것을 만회하는 방식이 바로 폭력인 것이다. 사이크스의 비명에 딜리아가 움직일 수 없었던 건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인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가정생활의 파탄에 처해서 가장 담대한 용기를 보여주는 인물은 <변심>의 매로너 부인이다. 고상한 남편이 어린 하녀에게 마수를 뻗치고 아기를 갖게 했을 때 갈등의 축은 부인 대 하녀가 되기 십상이다. 어쨌든 가정을 깨뜨리기를 원치 않기에 하녀를 쫓아내게 마련이다. 매로너 부인은 달리 생각한다. 게르타 또한 피해자라고 인식의 전환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이제 비난의 대상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지은 죄야.” 그녀가 말했다 이것은 여성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모성을 상대로 범한 죄야. 아기-에게 저지른 죄야.” (P.157)

 

올컷의 <내가 하녀가 되었던 경위>는 목사라는 허울 속에 든 위선에 대한 폭로이자, 하인 또는 하녀에 대한 역할과 처우의 존중 필요성을 유머러스하게-비록 화자에게는 고통의 나날이겠지만-제시하는 글이다. 글래스펠의 <사소한 것들>은 단막극이다. 남편 라이트의 죽음, 정신이 나간 듯 무력하게 앉아있는 라이트 부인.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 목격자 해일, 보안관과 경찰, 집안을 둘러보는 해일 부인과 보안관 부인. 두 부인의 대화에서 독자는 이 집의 분위기와 라이트 부부의 현 상황에 대한 단서를 미묘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다. 개스켈의 <이부형제>는 계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질투와 학대의 전반부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화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바치는 그레고리 형의 장엄한 비극의 후반부를 대비한다.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와 자책, 그리고 유언장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레고리 형의 처지에서 회상했을 때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그가 너무나 가슴 아프다.

 

<폴의 사례>는 다소 다른 성격의 작품이다. 소년 폴은 현실 세계보다 꿈과 환상에 젖어 있다. 학교 교사를 절망에 빠뜨릴 정도의 언행을 보이는 그는 극장과 카네기 홀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대개의 사람은 양자를 조화하거나 현실을 위해 환상을 잠시 잊거나 억누르기 마련인데 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폴의 사례를 나쁜 사례라고 생각한다. 퇴학당하고 극장에서도 쫓겨난 폴에게 우연히 거액의 돈을 횡령할 기회가 생기고, 그는 호텔과 극장을 오가는 화려한 신사의 삶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잃어버린 참모습이며 이제야 간신히 되찾았다는 듯이. 어느덧 횡령은 들통나고, 돈은 바닥나고 아버지는 그를 찾으러 올 것이다.

 

감옥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코델리아 스트리트의 미지근한 물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그를 삼켜 버릴 것이다. 회색빛 단조로움이 그의 앞에 무미건조하고 희망 없는 세월로 펼쳐졌다. (P.86)

 

그가 두려운 것은 잡히는 게 아니다. 그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가 마지막으로 후회한 것은 멀리 미국을 떠나 지중해로 가고자 하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자신의 성급한 실수였다. 우리는 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회도덕과 질서를 깨뜨린 비행소년, 사회 부적응자.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 몽상가, 망상가. 현실에서 포용하지 못한 자유롭고 열정적인 상상력을 지닌 안타까운 소년의 사례.

 

여기 소개된 여러 작가는 초면이다. 케이트 쇼팽의 작품은 주인공의 일탈에 저도 모르게 동정과 공감을 품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계속 나의 목록에 있는 작가다. 윌킨스 프리먼, 퍼킨스 길먼, 수전 글래스펠의 다른 작품들도 몇 권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역시나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련다. 에이미 레비는 글쓰기 양식이 독특하여 좀 더 경험해 보고 싶은데 다른 작품은 출간되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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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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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첫 몇 권을 읽었을때, 그 방대함과 난삽함에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일반독자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책이 있었으면 바랐는데, 딱 원하는 책입니다. 처음으로 펀딩에 참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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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 블루스
고형진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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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고려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면서 펴낸, 일종의 정년퇴임 기념 문집이다. 다만 일반적인 문집과는 구성이 사뭇 다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저자 자신이 아니라 고려대학교다. 평생을 봉직하면서 저자가 지녔던 고려대를 향한 사랑을 고려대의 문학적 유산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겪었던 고려대와 고려대인의 추억을 회고한다.

 

1부는 고려대학교를 제재로 삼은 여러 작가의 시, 수필, 단편소설을 한데 묶은 것이다. 조지훈, 오탁번, 이희중, 강연호, 심재휘 등 여러 고대 출신 문인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시각에서 고려대를 표현한다. 동시대에 학교를 다니거나 학교에 대한 추억을 지닌 독자라면 작가들이 그리는 당시 고려대의 모습에서 맞아, 그랬지 하고 저도 모르게 회상에 빠질지 모른다. 훨씬 후대의 독자라면 당대 고려대의 풍물이 그러했구나 하고 새삼 신기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현대사의 굵직한 고비마다 시대와 함께 풍운을 겪었던 대학이니만큼 수록 작품에서도 이를 담고 있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울분과 답답함, 미안함은 여전하며 <80년대라는 이름의 강의실>(심재휘), <오월의 숲>(이희중)에서 대학의 대학다움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 본다.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문패가 없다”(P.34)라며 도발적으로 시작하는 오탁번의 <고려대학교>는 당당한 자긍심이며, 문과대 옆 스팀목련은 올해도 때아니게 꽃을 피움에 공감을 품는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P.23, 조지훈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굴뚝과 천장>(오탁번)은 본관 건물에서 발견된 오래된 사체를 작가의 상상력이 풍선처럼 부풀려 한 편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작중의 화자는 죽은 그와 친소를 반복하는 라이벌의 삶을 사는데, 그는 민주화의 투쟁으로 화자는 안정된 개인적 삶의 투쟁으로 길을 달리한다. 어딘가로의 실종 또는 잠적으로 그는 화자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머나먼 존재로 승격시키는데 난데없는 사체의 발견으로 그 신비로움이 깨졌음을 화자는 애석해한다. 독자는 화자의 어조가 속이려 하지만 자신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이,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삶을 선택한 그에게 존경과 동경의 마음이 서려 있음을 깨닫게 될 뿐이다.

 

끝까지 끝까지 그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나의 감정이 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증오 때문인지 대결 의식 때문인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P.142)

 

2부는 저자 자신의 글로 오롯이 담고 있다. 본인이 학생 시절 만났던 은사인 정한숙과 오탁번에 대한 회상록이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원로 교수의 인간미 물씬 풍기는 일화를 접하는 재미가 있다. 쏠쏠한 지적 자극을 주는 글도 들어 있는데, <고려대학교 교가의 문학성과 음악성>은 교가의 가사와 악곡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어 고대인조차 미처 생각지 못한 교가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워준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조합이 이루어낸 교가에 대해 저자는 교가로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당시 신진 작곡가였던 윤이상에게 작곡 의뢰한 당시 사람들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할밖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부르기 쉽고 오래 기억되기까지 하기에 학교의 많은 구성원이 집단으로 부르는 교가로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P.208, 고려대학교 교가의 문학성과 음악성)

 

건축학적 분석과 예찬으로 이어지는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나의 백석 연구>는 박동진 건축가가 설계한 도서관이 근대 건축의 뛰어난 작품임을 설명하고, 자신이 시인 백석을 연구함에 있어 도서관 소장 희귀 도서에서 큰 도움을 받아 성과를 올릴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백석 시집 원본을 찾기 위한 노력 등과 같은 연구 비화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사범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을 맡았는데, 그때 사범대 건물인 운초우선교육관 미화를 위해 애쓰던 활동과, 미당 서정주의 시 <동천>에서 영감을 얻어 조명등을 설치한 일을 마지막으로 기술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당시에는 다들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이지만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사라지면 아무도 당시 일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록의 중요성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 책은 고려대 학생이었던 저자가 고려대 교수가 되어 평생을 바쳐온 고려대를 정년퇴임을 하면서 고려대에게 바친 헌서다. 어찌 보면 진부할 수 있고, 특정된 단편적 추억에 지나지 않다고 깎아내릴 수 있을 수 있다. 달리 보면 좁게는 고려대 일개 대학의 대학 생활의 잡사이면서 넓게는 국내 대학의 전반적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개인과 대학, 나아가 사회 전반의 풍물 변천을 조망할 수 있는 통사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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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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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존 르 카레를 알게 된 내가 다시금 그의 여러 소설 중 이 책을 선택한 까닭은 역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되어서다. 이른바 카를라 삼부작의 마지막 소설로 굳이 앞의 유명한 작품들을 제쳐놓고 굳이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가 궁금하였다.

 

르 카레의 연관 검색어인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는 처음부터 늙은 스파이의 레퀴엠”(P.454)으로 기획하였다고 밝힌다. 왕년에 명성을 날리던 그러나 지금은 은퇴한 늙은 스파이가 지친 몸을 이끌고 일선에 다시 등장한 것은 오랜 공작원인 늙은 블라디미르 장군의 살해 때문이다. 블라디미르의 살해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소련의 스파이 대부 카를라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 블라디미르는 그 증거를 확보하고 스마일리에게 알리려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제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문턱을 넘어선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역경을 헤쳐 나온 인생 말기에, 우천으로 순연된 삶의 경기장으로 돌아가 마침내 끝을 맺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P.171)

 

이로써 양 진영의 두 늙은 스파이 대부의 정면 대결이 불가피해졌고, 물론 이 소설은 주인공 스마일리의 관점에서 서사가 전개된다. 시리즈의 앞선 작품을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에 해당 소설을 읽었다면 이 작품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모르더라도 전반적 이해에 곤란하지는 않다. 카를라가 스마일리의 맞수라는 것. 카를라의 공작으로 영국 정보부는 크나큰 위기에 처하였고, 스마일리의 활약으로 이중 스파이를 제거할 수 있었다는 것이 공적인 영역이라면, 빌 헤이든이 스마일리의 아내를 유혹하여 가정생활에 파탄을 나게 만들었다는 점이 사적인 영역에서 스마일리가 카를라를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이유였다.

 

먼저 읽은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르 카레의 글쓰기 방식은 사건의 외적인 기술, 행위의 직접적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스마일리는 행동파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관련 문건의 조사, 무엇보다 자신의 직관으로 제반 요소를 종합하여 번득이는 통찰을 내놓는다. 독자로서는 그저 스마일리가 준비하고 마련한 조치를 통해 사후에야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추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뒤늦게 무릎을 치며 탄복한다면 르 카레의 작품에 무한한 감동과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소설책을 덮는 게 서로 간에 유익하다. 나로 말하자면 대체로 흥미로운 편이지만 흠뻑 빠져들 정도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아냐, 카를라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야. 그저 미친놈일 뿐이라고. 언제가 그자의 종말을 위해 뭐든 해야 한다면 이번엔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겠어.” (P.296)

 

적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리가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 (P.422)

 

카를라는 작중에서 어마어마한 존재로 기술된다. 스마일리의 평생의 맞수이자, 스마일리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기에 어둠의 성배”(P.182)라고 고백하는 인물. 그런 대단한 인물을 낚기 위해 치밀한 공작, 즉 설계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내게는 그게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진 것처럼 읽힌다. 스마일리가 카를라의 계략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언급했듯이 키로프 같은 인물을 대리인으로 쓰고, 오스트라코바에게 접근하는 미숙한 술책, 그리고리예프에게 알렉산드라를 돌보게 한 행동 따위는 전혀 스파이 마스터답지 않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허술하게 만들었을까. 숨겨진 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부성애? 자신의 공작을 절대로 서방에서 알아낼 수 없을 거라는 오만함? 그 또한 늙고 지쳐서 불가피하게 드러난 인간적 약점? 소련의 정세 변화로 위기감을 느껴 은근슬쩍 허술한 점을 노출하여 자신의 전향을 유도하게끔 하는 고도의 공작? 여기서는 어느 요인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내내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가는 왜 여기서 늙은 스파이의 레퀴엠을 기획하였을까. 소설 초반부에서 블라디미르를 둘러싼 스마일리와 다른 사람의 평가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냉전 시대 후기로 넘어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 소련 망명 집단의 효용가치 절하로 스마일리는 구시대의 인물로 취급받는다. 스마일리가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그렇다면 카를라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는 위대한 스파이 마스터 두 사람의 명예롭고도 공식적인 은퇴식을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파리, 런던, 함부르크, 스위스 등지를 배경으로 전개되던 대단원의 무대가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에서 펼쳐진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민낯을 드러낸 카를라의 모습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건 비단 그림말뿐만은 아닐 것이다. “왜소한 사내”, “늙고 지쳤지만 너무도 지혜로운 얼굴”(P.448). 악의 탈을 쓴 것처럼 간계와 술책,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른 냉혹한 스파이치고는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 늙은 스마일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스마일리가 자신의 조국과 신념을 위해 헌신한 것처럼 카를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르 카레가 주장하듯이 냉전과 스파이 첩보는 동서 양 진영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였다. 상대방의 음모와 공작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도 불가피하게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조치와 공작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그것이 국가 안보와 국민 평화를 위해 필요악으로 용납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영국 정보부뿐만 아니라 그의 맞수였던 카를라 포함 적국의 스파이들 또한 같은 부류의 처지에 놓인 존재임을 역설한 셈이다. 그리고 스마일리와 카를라는 닮은꼴이기에 작가는 카를라를 광포한 악인으로 묘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밤새도록 거의 미동도 않은 채 자료를 읽었다. 카를라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까지 함께. 그러다 보니 때때로 둘의 삶이 서로를 보완하는 듯하고, 또한 똑같은 원인의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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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민 & 함신익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 브람스: 교향곡 4


1. 음반정보

- 레이블: VISION Classics

- 음반번호: N/A

- 수록시간: 71:28

 

2. 연주자

- 피아노 : 이형민 (Hyung-Min Lee)

- 지휘 : 함신익 (Shinik Hahm)

- 연주 : Polish National Symphony Orchestra

 

3. 녹음

1) 녹음일자: 1997/03/18-20

2) 녹음장소: Concert Hall of the Polish Radio in Katowice, Poland

 

4. 프로그램

    Mozart : Piano Concerto No.20 K 466 In D Minor

01. Allegro (13:40)

02. Romanze (9:33)

03. Allegro assai (6:42)

    Brahms :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04. Allegro con brio (13:26)

05. Andante (11:05)

06. Poco Allegretto (6:33)

07. Allegro (10:29)

 

* 세줄평

오랫동안 찾던 음반이다. 이형민의 예전 소개글에서 이 연주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전혀 접할 수가 없어 궁금하게 여겼다. 젊은 시절 연주다운 패기가 살짝 드러나는데 그것이 나쁘지 않다. 지휘자가 함신익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역시 함신익 소개글에서 이 녹음이 있음을 알았는데, 한 장의 음반에 두 사람의 연주가 함께 들어있을 줄이야.


[중고] 이형민, Shinik Hahm / Brahms : Symphony No.4, Mozart : Piano Concerto No.20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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