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반란 - 갈라 드레스/ 뉴잉글랜드 수녀/ 엇나간 선행 얼리퍼플오키드 3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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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엄마의 반란

갈라 드레스

뉴잉글랜드 수녀

엇나간 선행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를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나의 궁금증이 애호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엄마의 반란>을 보자. 남편의 전횡을 참다못한 엄마가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는 유쾌한 설정을 다루고 있다. 남편에 비해 여러모로 엄마가 고매하고 탁월한 인격의 소지자임이 작품 속에 여러 번 되풀이되어 소개된다.

 

코와 입으로 이어지는 선은 순해 보였지만, 남자에게 고정된 눈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 살려는 기개가 엿보였다. (P.8)

 

그런 엄마이지만 남편을 위하고 순종적인 삶을 지향한다. 화가 난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묵묵히 파이를 굽는 엄마의 모습이 눈물겹다. 남편이 아내에게 한 약속, 즉 새집을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열심히 불필요한 창고를 지어대면서까지 새집을 짓지 않는 건 솔직히 억지에 가까운 설정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당당하지도 않으며 그저 언급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맙소사, 여보. 난 당신이 이 정도로 강한 사람인 줄 몰랐어.” 애덤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P.40)

 

결말은 허탈할 정도다. 아내의 과감한 시도에 기가 꺾인 남편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이다. 아내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깔보던 한심한 남편의 비참함이란.

 

<갈라 드레스>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중산층 신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노처녀 자매. 사교모임에 나갈 때 입을 드레스가 한 벌밖에 없어 둘이 동시에 나가지 못하고 한 명만 교대로 드레스를 수선해 입는 장면은 짠하기조차 하다. 여적여란 말처럼 그녀들의 친구이자 시샘하는 마틸다로 인해 그녀들은 곤경에 처한다. 독자는 주인공을 동정하는 만큼 마틸다를 미워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그녀를 동정할 수밖에 없다. 낮은 신분의 그녀는 모임에 나갈 드레스조차 갖고 있지 못한 처지이므로. 우연의 도움으로 두 벌의 드레스를 갖게 된 자매가 자신의 헌 드레스를 마틸다에게 주는 장면에서 아마도 여자들만 절절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엇나간 선행>도 역시 자매가 등장하는데, 둘 다 늙은 데다 해리엇은 귀가 먹고 관절염이 있는 데다, 샬럿은 눈이 먼 처지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자신들의 낡은 집에서 어떻게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나가는 그들, 물론 가끔씩 마을주민이 그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만 그네들은 결코 그것을 바라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섀턱 자매가 주민들의 선행을 거부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상으로 여건 좋은 양로원에 들어갔지만 그네들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힘겹게 탈주하고 자신들의 옛집으로 돌아간다. 언뜻 딱하고 무모해 보이는 그네들이지만 샬럿이 자주 하는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주민들의 선행이 자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한 것임도 알게 해준다.

 

! 해리어, 여기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땐 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배추나, 채소에 싼 돼지고기를 먹으면 빛이 느껴질 텐데!” 샬럿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P.115)

 

<뉴잉글랜드 수녀>는 작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만큼 벌써 세 번째 읽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감흥이 남다르다. 루이자와 같은 생각을 품는다면 이 세상에 결혼은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결혼이란 남남의 결합이니만큼 다소간 불편과 양보와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사랑과 정 아니겠는가. 루이자는 스스로를 수녀처럼 만들었다. 루이자를 향한 작가의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판단하기 어렵다.

 

루이자는 세속과 격리되지는 않았으나 수녀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며 기도하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P.97)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녀가 확실히 여성주의 작가라는 사실이다. 수록작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여성들의 주체적 삶을 강조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다만 남성과 여성의 대비에 치중하지 않으면서 <갈라 드레스><엇나간 선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여성,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 삶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점이 여타 여성주의 작가와는 구별된다.

 

윌킨스 프리먼의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전혀 진부하지 않으며 하나하나가 뜻밖의 설정과 결말을 지니고 있어 읽는 재미와 동시에 곱씹을 만한 뒷맛을 남긴다. 천만의외로 그녀의 더 많은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이 출간되어 있으니 놓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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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하나
윌라 캐더 지음, 정선우 옮김 / 아토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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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지방주의 작가로 알려진 윌라 캐더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작품이다. 네브래스카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지역색이 두드러진 대표작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지역을 배경 삼는다. 주인공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나의 안토니아><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 또는 그의 관구 내에서 삶을 꾸려나간다. 더 넓고 더 큰 꿈을 향해 지역을 떠나고자 하는 이상을 품지 않는다. <우리 중 하나>의 클로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고향에서의 삶에서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기에 유럽의 전쟁터에 자원한다.

 

주인공 클로드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양분된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를 체격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범하거나 낮은 수준으로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가 주립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만 거기에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신학대학에 보내는 판단이 그렇다. 어머니 휠러 부인은 모순적이다. 그녀는 클로드의 마음속에 가진 한 가닥 불꽃의 존재는 의식하지만, 그것의 의미랄까 중요성은 둔감하다. 기독교에 푹 빠져 있는 그녀의 정신세계는 종교와 남편의 의사 양쪽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뿐 자신의 독자적 판단은 거의 없다.

 

반면, 가족이 아닌 주변인들은 클로드를 높이 평가한다. 주립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 부인인 에를리히 부인과 그녀의 사촌 슈뢰더-사츠는 클로드가 완벽한 사윗감”(P.64)이며, 결혼시킬 딸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글래디스는 이니드보다도 클로드의 가치를 더 높이 알아차린다. 그녀는 클로드가 이니드와 결혼함으로써 다른 많은 남자처럼 생활의 함정에 빠져버릴 것을 우려한다. 자기 형이 글래디스를 염두에 두지만 않았더라도 클로드는 글래디스와 결합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며, 이때 그의 미래가 어찌 변했을지 알 수 없다.

 

보람 없고 평범한 농장일, 괴로운 침묵을 안겨주는 가족,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속에 클로드는 괴로워한다. 자신에게 내재한 발전과 성취의 욕구, 인생에서 뭔가 의미 있고 중대한 것을 찾으려는 욕망에 그는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래? 난 가끔 딱 한 번뿐인 인생에 엄청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아.” (P.56)

난 아직 만족감을 주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나도 분명히 뭔가 잘할 텐데.” (P.140)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시도인 이니드와의 결혼도 행복하지 못하다. 존중과 공경을 하지만 결코 애정은 없는 두 사람의 관계. 게다가 이니드는 머나먼 타지에 기독교 전도를 하겠다는 강렬한 꿈을 품고 끝내 언니를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난다. 이후 그녀는 클로드의 기억 속에 단 한 번 나타날 뿐 더 이상의 존재감을 보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방관하던 미국은 마침내 참전을 결정한다. 클로드는 망설임 없이 군입대를 자원한다. 답답한 현실 탈출과 삶의 의미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4장부터의 후반부는 전쟁소설에 해당한다. 미군을 프랑스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항해 장면, 나름대로 저마다의 이상과 모험을 꿈꾸며 지원한 각 지방의 여러 청춘. 열악한 선상 생활에서 질병으로 미처 시도조차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들. 그 속에서도 클로드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옳은 선택을 하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마치 세상이 계속 커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자신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 같았다. 다른 동료들이 병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배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302)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여타의 반전문학과는 궤를 달리한다.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레마르크와 달리 캐더는 전쟁의 잔혹감과 무의미함을 기술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클로드와 게르하르트는 진지한 우정을 쌓아가며, 수녀원 터에서 적십자 활동을 하는 올리브와의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삶의 행복과 슬픔을 깨닫게 한다. 클로드의 깨달음은 차라리 삶의 달관과 해탈에 가깝다. 인류사적 거대 인식에 도달한 듯하다.

 

이상은 구시대적이고, 아름답지만 무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진정한 인간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는 운명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P.408)

 

임시 중대장이 된 클로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버텨내고 매우 위험한 진지를 사수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 클로드. 강력한 포격과 무자비한 총격 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지켜내리라 다짐한다. 끝내 그는 전우들을 향해 공허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인간의 최대 공포인 죽음을 초월한 행위는 독자에게 언제나 감동적인 전쟁 서사에 해당한다.

 

코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만 느꼈다. 자신이 이 훌륭한 사람들을 지휘했다는 것을. 데이비드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예상한 그들에게 지원을 왔고, 그들은 모두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죽기 전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순 없었다. (P.442)

 

실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작가이기에 전쟁과 전투의 생생한 묘사와 박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전쟁 속 인물과 전투는 다른 의미에서 관념적이고 사색적이다. 비난조가 아니라 그 속에서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이 찾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셈이다. 그의 삶과 인식이 밟아온 길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는 잘못된 길을 따라가서 귀중한 시간을 버렸고, 불행을 충분히 목격했지만, 마침내 올바른 길로 돌아왔고, 그 누구도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P.302)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23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캐더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하기엔 논란이 있는 작품임에도 그녀에게 수상의 영예가 부여된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지닌 전쟁 속 주인공의 긍정적 지향성에 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전으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애국심 고취와 전쟁에서 삶의 의의를 발견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이야말로 미국 사회가 바라 마지않던 인물상과 주제 의식 아니겠는가.

 

클로드가 단연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여러 주변 인물의 거취도 궁금하다. 작중에서 동생에게 그토록 경멸받는 베일리스는 어찌 살고 있을까. 형 클로드에게 자극받은 랄프의 삶은 어찌 변했을지. 중국에 간 이니드는 행복할까, 정년 클로드를 그리는 마음이 일도 없는가. 유일하게 클로드의 가치를 알아차린 글래디스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에를리히 부인네 가족의 그것과 함께 매우 궁금증을 자아낸다. 클로드를 잃은 휠러 부인과 프랑스에서 고군분투하는 올리브 쿠르시는 어떤가 등등.

 

워낙 좋아하는 작가의 대표작이지만, 솔직히 읽을지 말지 고민하였다. 워낙에 번역 품질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아서였다. 캐더의 대표작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 한번 부딪쳐 보자는 투쟁심, 어찌 되었든 국내 초역인데 뛰어난 후속 번역본을 언제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 등이 겹쳐 그럼에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읽기 잘하였다는 것. 지적대로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점이 두드러지며, 이따금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단락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글 분위기, 작가가 지향하는 작품의 성격 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적어도 일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견해다, 다만 구입 여부는 신중하도록.

 

이 번역본에서 도저히 요령부득한 대목이 있어 참고 차원에서 소개한다.

 

그들이 프랭크포트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글래디스는 클로드의 미적 대리인이었다. 남자가 너무 깨끗하거나, 옷차림과 예의범절을 따지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점에서 나무랄 데 없는 소녀를 뽑아 같이 라틴어를 공부하고 실험을 한다면, 그녀의 개인적인 매력은 전부 그의 공로였다. (P.113)

 

[로이스]는 자신이 클로드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방대한 경험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비참함처럼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곳에서 고군분투했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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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안은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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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주인공 오콩코의 손자 이야기다. 백인 식민 세력이 우무오피아를 점령하자 결연히 옥쇄를 선택한 오콩코. 어느덧 시대는 흘러 백인 식민 체제의 틀은 강고하고, 이보 족과 같은 아프리카인들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길은 대학 교육을 받고 고급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대학 학위는 현자의 돌이었다. [......] 실제로 봉급이나 문화적 설비의 불균형이 단지 이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유럽인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유럽인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P.136)

 

오비 오콩코는 부족의 도움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정부 장학생을 선발하는 나름의 영향력 있는 업무를 담당한다. 청탁과 뇌물이 오가기 좋은 자리다. 실제로 그에게 마크와 여동생의 장학생 선발 청탁 요청이 들어왔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몸이라도 바칠 각오다. 고등교육을 받고 나이지리아 발전을 위해 의기충천한 오비로서는 부정부패를 혐오한다. 그가 보기에 나이지리아 식민 정부는 온통 뇌물과 부정에 찌들어 있다.

 

귀국 선박에서 오비는 클라라를 만난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인 두 사람은 사랑의 미래를 약속하고 약혼반지를 교환한다. 이제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만 하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수 있고 행복한 꿈에 오비는 빠져든다. 당장 눈앞의 경제적 압박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기독교도인 아버지와 달리 오비는 서양 문화에 무조건 추종하지 않는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고유 전통과 문화를 사랑한다. 삶은 감자는 지겹다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 오비, 더럽고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라고스의 진면모를 포용하는 오비, 오만한 백인들이 외면하지만 나이지리아가 지닌 문화적 풍요로움을 인식하는 오비. 작가는 오비가 쓴 나이지리아라는 시를 두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 식민 치하의 조국 독립과 번영을 기원하는 심정을 여과 없이 내비친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을 언어가 없는 민족이라고 추정할 것이다. 그들이 지금 우무오피아로 와서 훌륭한 대화술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여기로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지배하에서도 여전히 삶의 즐거움이 파괴되지 않은 채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남녀노소를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P.77)

 

작가는 오비의 상관인 그린 씨의 입을 통해 유럽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린 씨는 분명 아프리카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매우 단편적이고 시혜적인 경우에만 해당한다. 보편적 인식은 아프리카인을 타락하고 후진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고급 공무원 자리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평가도 무자비하다.

 

뭣 때문에 교육을 받는 거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잖아. 날마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수백만 명의 동포들에 대해서는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단 말이지.” (P.171)

 

내 주장은 항상 똑같잖소. 나이지리아에는 자기 나라의 공익을 위하여 약간의 권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까. 당신네 장관들로부터 대부분의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래.” (P.223)

 

그린 씨의 평가가 가혹하지만 문제는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음을 작가와 독자 모두 공유한다. 개인 영달과 부정부패를 왜곡된 식민 체제의 책임으로 전가하기는 무리다. 전통 사회도, 독립한 이후의 정부도 모두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료나 국민의 인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제고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음을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도 잘 알지 않는가.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오비에게 점차 시련이 닥친다. 어쩌면 일부는 예고된 곤란이지만, 나머지는 오비의 선택에서 비롯된 위기다. 약혼녀 클라라는 오수.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라면 백정의 자식 정도의 사회적 신분이랄까. 인도 카스트제도에서 언급되는 불가촉천민이 차라리 유사하다.

 

그래, 우리는 기독교도다.”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오수와 결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성명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잖아요.”

얘야.” 오콩코 씨가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아는데 그래도 이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란다.” (P.193)

 

어머니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깊이 쉬었다. “난 이 문제에 대해서 너한테 단 한 가지 외에는 해 줄 말이 전혀 없구나. 그건 말이지, 그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란다.” (P.197)

 

오비의 말처럼 무지몽매한 선조들의 잘못된 문화, 타파해야 할 악습임은 사실이다.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독실한 기독교도인 부모라면 이따위 것은 가볍게 치부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충격적이다. 오비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친구와 가족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오비에게 실망하게 된다. 부모의 반대가 심하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무기력하게 변변한 저항 한 번 못 하고 포기한단 말인가.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공무원인 오비라면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의지로 결혼을 감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클라라가 실망하고 오비를 떠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의 말처럼 문제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은 주변이 아니라 바로 오비 자신이다.

 

한편 오비의 경제적 압박은 한층 심해진다. 고급 공무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 장학금 상환 분담금, 가족의 부양을 위한 비용 등도 벅차기 힘든데 클라라의 임신 중절 수술 비용까지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비용 부담은 그에게 치명타를 날릴 정도다. 잇따른 사건으로 자포자기한 오비는 스스로가 경멸했던 행동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때 오만할 정도로 청렴결백하기는 아주 쉽다고 선포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뇌물 논리를 가볍게 취급하는 친구를 이해 못 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나이지리아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품은 오비가 뇌물을 수수하고 단속에 걸려들어 재판받는 처지에 놓인다.

 

왜 그랬을까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박학다식한 판사는 교육받은 젊은이가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 문화원 직원도, 심지어는 우무오피아 사람들도 알 수 없었다. 또한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그린 씨 역시 알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P.246)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비의 타락을. 그건 개인 차원인 동시에 사회적 단위의 사안이 첩첩이 꼬인 결과이므로. 사회 변혁은 한두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움에도 우리는 흔히 슈퍼맨을 기대한다. 게다가 그것이 한 가족의, 한 가문의, 한 부족의 염원이 담긴 결과라면 그 당사자는 거미줄에 옴짝달싹 못 한 채 걸린 가엾은 희생물에 불과하다. 고급 공무원 오비는 자신의 교육과, 바람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오비가 시가 적힌 종이를 꾸겨 던져버리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시 속의 꿈과 희망은 현실에서 더 이상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두 명의 여인, 즉 클라라와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오비는 진정한 뜻에서 이미 죽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다. 그의 타락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체베의 이 소설은 식민 체제를 배경으로 한다. 고유의 문화와 체제를 갖춘 사회가 이질적인 세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식민지가 되었을 때 받는 충격과 갈등, 혼란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식민 체제에서 독립을 쟁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식민 기간이 길면 길수록 왜곡된 체제를 정상화하는 데 큰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작품 해설에서 밝혔듯이 포스트식민주의 극복은 작가 아체베의 나라 나이지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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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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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문학작품으로서 꽤 유명한 작품인 듯하다. 우연히 케이트 쇼팽의 단편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겨 내친김에 이 소설도 읽게 되었다. 국내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표제는 주로 <각성>이며, 기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 <이브가 깨어날 때>로 의역하는 사례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여성상은 이른바 현모양처다. 가정 내에서 좋은 아내이자 주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자식을 낳아 잘 키워내는 것이 절대 미덕으로 인정받았다. 남성은 가족 부양을 위한 대외 활동을 맡고 여성은 가계를 꾸려나가는 대내 활동을 담당한다는 분업에 기반하여 남성의 지위상 우위를 인정하는 소위 남존여비가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이 작품의 표제 각성은 여성이 전통적 가치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의 주체로 깨어남을 가리킨다. 평안히 잠들어 있던 의식에서 깨어나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울지라도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함을 말이다.

 

퐁텔리에 부인은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P.31)

 

작가는 에드나가 서서히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단조롭고 엄격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롭게 개방적인 크리올 가톨릭 문화에 일견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레 잦아든다. 다만 그녀는 크리올의 개방성이 서로 간의 성적 신뢰와 정조 관념에 기반함은 미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잘못된 첫걸음이리라.

 

에드나가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수영에 성공해서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다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 마음껏, 힘껏 멀리 헤엄쳐 나갈 수 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 이제 고개를 드는 봉인된 독립심.

 

이후 그녀의 행위는 양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화요일 정기 손님맞이 의식을 없애버리고, 남편의 명령조의 말에 반발하여 따르지 않고,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남편의 출장 동안 집을 따로 구해 출가하는 등.

 

무미건조한 일상과 애정을 못 느끼는 남편, 자식과 가정의 구속에 대한 싫증을 강조하면 통상적인 여성주의 견해로 귀결된다. 소설 속에서 에드나의 남편에게 별다른 비난을 퍼붓기는 쉽지 않다. 그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가족 부양에 소홀하지도 않다. 이후 에드나의 독자 행보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한 걸 보면 오히려 소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에드나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분명 상류층이다. 그랜드 아일섬이나 뉴올리안스에서 그녀는 라티뇰 부인, 라이즈 양, 로베르 가족 등에 견주어 보면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누린다. 그녀는 살림과 육아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애쓸 이유도 없다. 삐딱하게 보자면 돈 많은 유한부인의 한가한 넋두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애초 표제는 각성이 아니라 고독한 영혼이라고 한다. 출판업자에 의해 표제가 바뀌게 되었어도 작가는 고독한 영혼을 부제로라도 삼고 싶었다고 하면, 후자가 작가의 집필 의도를, 그리고 에드나의 모습을 더 잘 반영하는 게 아닐까.

 

에드나는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았지만, 골똘히 생각에 몰두한 표정이었다. 주변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거리와 아이들, 과일 행상, 눈앞에 자라는 꽃들이 갑자기 적대적으로 변한 낯선 세계의 일부처럼 보였다. (P.115)

 

맞아요.에드나가 말했다. 지난 세월이 꿈만 같아요. 계속 자면서 꿈을 꾼 것 같아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 그래요!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겠죠.(P.234)

 

남편과 가정에서 벗어나 에드나의 시선은 자기를 숭배하고 쫓아다니며 대화가 잘 통하는 로베르에게 향한다. 로베르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떠나면 그녀는 비로소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의 대상의 부재는 그녀의 영혼을 한층 격렬하고 불안하게 자극함을 독자는 이후 그녀의 행동에서 볼 수 있다. 로베르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성적 욕망을 일깨운 아로뱅. 그녀에게 아로뱅은 로베르의 대체물 자격도 안되지만 그에게 애정 없는 육체관계를 허용한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장면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에드나의 행동을 정당화할 근거는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여성의 각성은 꼭 부도덕한 사랑이나 성욕의 형태로 발산되어야 하는지. 에드나의 선택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가정과 남편과 불평등의 틀을 깨고 독자적 인생을 구현하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을 사회적 문화적 억압의 강도와 깊이로 해명하는 건 그저 핑계로 비칠 뿐이다. 그녀 자신의 성향과 한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게 되었다.

 

퐁텔리에 부인은 라티뇰 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음을 딱하게 바라본다. 오히려 우리는 퐁텔리에 부인을 딱하게 생각한다. 라티뇰 부인은 자신의 삶과 선택에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굉장한 오만함이다. 자유분방한 삶의 동경과, 자신과 라이즈 양의 삶을 바꾼다는 건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이 작품을 향한 세간의 비난에 작가는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에드나를 여성주의 투사로 작가가 설정하였다면 응당 이러한 비난이 있을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작품을 오독하는 건지도 모른다.

 

에드나는 여성으로서 온전히 주체적 삶을 지향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현재 불행감을 남편 탓으로만 여긴다. 사랑 없이 결혼하고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남편 대신 로베르처럼 서로 공감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른 남성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로베르가 자신을 떠나자 절망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에드나의 각성은 불완전한 반쪽짜리 각성이다. 그녀가 아로뱅과 일탈에 빠지는 장면은 작가의 깊은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에드나의 잘못된 길을 더 명확하게 보여 주고자 하는 장치다.

 

레옹스와 두 아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그녀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에드나를, 에드나의 몸과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P.242)

 

세상 누구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부모와 형제는 있게 마련이며, 연애와 결혼을 한다면 이성과 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이 평탄하게 행복하다면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인생은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기 선택의 결과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의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다. 남편과 자식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삶의 전부로 그것에 종속당할지는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작가는 에드나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백사장 위아래 어디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날개 부러진 새 한 마리가 비틀비틀 퍼덕이다가 힘없이 상공을 돌더니 바닷물 속으로 추락했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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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타킹 한 켤레 - 19, 20세기 영미 여성 작가 단편선
세라 오언 주잇 외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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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세라 오언 주잇 - 백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 뉴잉글랜드 수녀

샬럿 퍼킨스 길먼 - 누런 벽지

케이트 쇼팽 - 아카디아 무도회에서

케이트 쇼팽 - 폭풍우

케이트 쇼팽 -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윌라 캐더 -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

이디스 워턴 - 다른 두 사람

수전 글래스펠 - 여성 배심원단

버지니아 울프 - 벽의 자국

캐서린 맨스필드 - 작고한 대령의 딸들

엘런 글래스고 - 3의 그림자 인물

조라 닐 허스턴 -

 

앞서 읽은 책과 마찬가지로 영미권의 여성작가 단편 소설집이다. 먼저 책과 다른 점은 시기도 19세기와 20세기로 한정하였으며, 작품 선정 성향도 여성주의 색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윌라 캐더의 작품이 실려 있기에 이 책도 고르게 되었다. 수록 작품 중 <뉴잉글랜드 수녀>, <실크 스타킹 한 켤레>, <다른 두 사람>, <>은 이전 책과 중복이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작고한 대령의 딸들>도 이전 맨스필드 작품집에서 다루었기에 마찬가지로 언급하지 않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성과의 만남, 교제, 그리고 결혼, 출산, 육아는 인생에서 중요한 통과의례 중 하나다. 성별에 따라서 실질적 비중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순서에 따라 수록 작품을 보면 주잇의 <백로>는 만남에 해당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골 소녀 실비아에게 멋진 청년이 다가왔다. 백로의 둥지를 알려 주면 돈은 물론, 넓은 세상으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 무엇을 망설이랴, 그깟 새 한 마리뿐인데. 숲속의 키 큰 나무꼭대기에 힘겹게 올라간 실비아는 둥지 위치도 확인하였다. 이제 그에게 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실비아는 입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할까. 유달리 자연묘사가 아름다운 이 짧은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끝맺는다.

 

그녀가 놓친 보물이 무엇이든, 숲과 여름이여 기억해주렴! 이 외로운 시골 소녀에게 선물과 은혜를 가져다주고 너희들의 비밀을 말해주렴! (P.35)

 

캐더의 <감상적이지 않은 토미>, 쇼팽의 <아카디아 무도회에서>는 교제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재로 한다. 캐더의 주인공은 당대 시각에서 보면 비전형적인 여성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신 구조를 지니고, 어지간한 남성은 물론 남자 친구인 제이 엘링턴보다도 지적인 측면에서는 뛰어나다. 가족을 떠나 홀로 대학에서 수업받는 길을 선택할 정도로 독립적이기도 하다. 친구인 제시가 제이 엘링턴을 매우 사랑하는 걸 보고 그녀에게 그를 양보하며, 그의 마음을 일깨운다. 확실히 그녀는 감상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토미가 제이 엘링턴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녀는 비혼주의자에 가깝다. 작가가 토미의 외모를 좀 더 여성적으로 기술하였다면 설득력이 더 뛰어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토미는 꽃을 집어들고 잠시 입술을 깨문 채 서 있었다. 그러곤 꽃을 벽난로 안에 던져넣고 마른 어깨를 으쓱하더니 돌아섰다.

멍청한 것들. 절반은 저녁에 뭐 먹나, 그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데. , 그런데도 왜 이렇게 좋은지!” (P.135)

 

연애와 결혼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들 결혼은 현실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알세와 칼릭스타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부유한 농장주와 아름다운 마을 아가씨의 만남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질 거라는 섣부른 기대는 오산이다. 자존심 강한 클래리스가 마음을 굽히자마자 알세는 칼릭스타를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입에 발린 사랑의 말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칼릭스타는 홧김에 보비노와 결혼 맹세를 한다. 어차피 누가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니. 이렇게 작가는 사랑과 결혼의 엇갈림을 <아카디아 무도회에서>를 통해 보여준다.

 

한 시간 전에 칼릭스타의 귀에 입을 맞추며 실없는 소리를 속삭이던 사람도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이제 칼릭스타는 먼 전설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현실은 그의 앞에 서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클래리스뿐이었다. (P.103-104)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혼생활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결혼은 정말로 사랑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사랑은 결코 흔들리거나 변함이 없는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어떠한가. 수많은 예술작품과 TV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바로 결혼생활의 갈등과 파탄, 그리고 배신과 외도가 아니었던가. <폭풍우>를 보자. <아카디아 무도회에서>의 속편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수년의 시간이 지난 후 폭풍우 치는 날에 우연히 알세와 칼릭스타는 단 둘이서 조우하게 된다. 그들이 결혼 후에도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할 독자를 위해 작가는 친절하게도 둘만 본 적은 이게 처음이라고 밝힌다. 마음속에 간직한 원망은 여전한 마음을 뜻하고, 원숙한 미모는 욕망을 자극한다. 두 사람의 열정은 폭풍우의 격렬함 속에서 한껏 불타오르는데. 결론은 다소 시니컬하다. 상투적인 권선징악은 없다.

 

그렇게 폭풍우는 지나갔고 모두가 행복했다. (P.113)

 

<누런 벽지>의 화자는 신경과민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 여름 별장 삼아 빌린 오래된 저택의 누런 벽지에 마음에 들지 않는 화자. 벽지의 누런 색깔과 무늬에 혐오감을 느끼며 자세히 관찰하는 화자.

 

도대체 벽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니! (P.69)

그래서 내가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거다. (P.75)

 

마침내 벽지 뒤에 숨어 있는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화자. 그 여자가 언제 나와서 돌아다니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화자.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려서는 안 되기에 철저하게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화자. 결말은 우울하다. 우리는 그녀의 정신질환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없다 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결혼생활 도중 발생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우울증이 오래된 저택으로 이사 온 지 급격히 악화하였다는 것이다. 남편이 화자의 의견대로 벽지를 뜯어고쳤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드디어 나왔어.”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니가 기를 썼지만 말이야! 벽지를 거의 다 뜯어냈으니까 날 다시 저기에 집어넣지는 못할걸!” (P.85)

 

<여성 배심원단>은 앞서 읽은 책에서 수록한 작가의 <사소한 것들>과 내용을 공유한다. 단막극과 단편 소설로 형식을 달리한다. 전자는 사건의 여러 내용을 압축하여 대사로 표현하였기에 모호하고 추측에 의존하는 대목이 많다. 상징적이랄까 표현주의적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소설은 독자에게 훨씬 친절하다. 우리는 비로소 라이트 씨의 사망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라이트 부인의 이상한 태도도. 게다가 부부 사이 갈등의 골이 매우 깊었음을 텅 빈 새장과 죽은 새의 발견을 통해 슬며시 드러낸다. 이런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것들은 남자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결혼한 여성들은 누구나 괴로움을 안고 산다. 라이트 부인은 마음을 털고 함께할 이웃을 갖지 못하였다. 그것이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여성 배심원단으로서는 그녀의 유죄를 결코 인정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 모두 똑같은 일을 겪으며 사는데-조금씩 다를 뿐이지 사실 다 똑같잖아요! 그게 아니라면-당신과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요? 지금 알게 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차렸겠어요?” (P.202)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목적으로 애정 없는 사기 결혼을 하였다면 그네들의 삶은 얼마나 불행할까. 차라리 몰랐으면 다행일 텐데 남편의 속임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아내. 하지만 사회적으로 워낙에 매력과, 인품과 명성으로 자자한 인물인 탓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수밖에, 게다가 남편이 의사가 아니던가. 아내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꽤나 흥미진진한 소재감이 <3의 그림자 인물>이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광휘를 마주한 채 거기 선 나는 내가 이 집안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결정할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온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매러딕 부인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야 했다. (P.279)

 

야간 간호사로 의사 아내를 돌보게 된 화자가 아내가 제정신임을 알아차리고, 죽은 아이를 목격하게 된 까닭은 그녀가 아직 어리고 순수한 영혼을 지녀서였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파악한 진실과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권위와 체제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막대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의붓딸을 죽이고, 아내마저 정신병원에 수감하는 이중인격자 의사가 승리의 순간에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

 

울프의 <벽의 자국>은 다른 수록작과 결을 달리한다. 독자는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신상 정보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이 남자인지 확실치 않다. 문득 벽에 난 자국이 보인다. 그건 못 자국은 아닌 듯하다. 뭔가 튀어나온 듯한데, 단순히 벌어진 나무 틈새인가. 화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삶의 불가사의에 대해, 인류의 무지에 대해.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지. 튀어나온 모습에서 무덤을 연상하기도 한다. 무덤 그리고 죽음. 나무 틈새로는 나무와 얽힌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흘러간다. 행위와 사건보다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되는, 역시 울프답다. 결말의 어처구니없음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해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 가서 보더라도 십중팔구 확실하게 콕 집어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결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 세상에! 삶은 어찌나 불가사의한지! 사고는 어찌나 불확실한지! 인류는 어찌나 무지한지! (P.210)

 

서두의 <책을 엮으며>에서 옮긴이는 여성과 여성성을 다루는 의의를 주장한다. 여성주의 담론이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많이 개선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에 실린 19세기와 20세기 여성작가에게는 상전벽해의 수준일 것이다.

 

옮긴이가 주장하듯이 여성성사회적.문화적 구조물”(P.7)이라는 논의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과연 전적으로 생물학적 속성을 배제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남성성, 여성성 논의는 결국 우리가 태생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은 양성생식체에게 있어 불가결한 기능적 분화이다. 우리의 지향은 이 자연적 사실을 부인할 게 아니라 그 역할의 차이를 기능과 가치의 우월로 동일시하는 과거의 인식과 사회적 오류를 교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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