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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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실종

늙은 보모 이야기

대지주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

궁금하다, 사실인지

 

<회색 여인>에 이어 개스켈의 다른 고딕 소설책을 읽는데. 수록작 중 <늙은 보모 이야기>만 중복될 뿐,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작품이다. 전자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수록작 중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최후>, <굽은 나뭇가지>가 제법 분량이 길다.

 

<실종>은 옛날에 발생했던 수수께끼 같은 실종의 몇 사례를 소개하고 작가 당대에서는 이런 실종의 두려움을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형사 경찰의 시대에서는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를 당국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작가의 어투는 다소간 희화적이다. 가벼운 고딕 정도에 가깝다.

 

<궁금하다, 사실인지>도 역시 고딕보다는 환상 소설 유형이다. 서두는 그럴듯하다. 칼뱅의 누이가 잉글랜드의 사제와 결혼하였고, 후손 중 한 명이 족보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낯선 땅에 길을 잃다가 한밤에 우연히 어떤 성에 들어가게 된다. 우연과 오해가 낳은 묘한 경험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도 함께할 수 있는데, 서양 동화 애독자라면 등장인물들이 암시하는 신분을 추리할 수 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등등.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설정이라고 하겠다.

 

많은 재산을 지닌 젊고 잘생긴 신사. 영화나 드라마라면 분명히 재벌집 상속자 정도의 신분일 것이기에 뭇 여성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지사다. <대지주 이야기>에서 지주 노인의 딸이 캐서린이 야반도주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독자에게 찝찝한 뒷맛을 계속 풍기는데, 그 신사의 외모에서 사악한 냉정함이 풍긴다든지, 그에 대한 프랫 부인의 이유 모를 반감과 의심이 그러하다. 어쨌든 당대에는 노상에서 임대료를 수금하는 신사가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 양자가 선량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식들이 반드시 부모를 닮는다는 보장은 없다. 꼿꼿한 거목에도 굽은 나뭇가지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많은 부모는 자신들의 육아와 훈육의 잘못을 탓하지만 그게 어디 반드시 부모 탓이겠는가. <굽은 나뭇가지>의 네이선과 헤스터 부부도 마찬가지다.

 

소박하고 순박하며 선량한 농부로서 나날의 삶에 감사하며 아들 벤저민과 친척 아가씨 베시가 결혼하여 자신들을 잇는다면 더없이 만족스럽게 노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아들을 지주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일자리를 구하러 런던으로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벤저민이 선량한 아들로 남아있었을까. 부모의 전 재산을 거리낌 없이 요구하고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는 아들. 어차피 상속받을 거니까 미리 받아서 어떻게 쓰든 자기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식. 오늘날 많은 부모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 눈멀어서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식을 수렁으로 밀어 넣는 데 한몫한다. 한 가닥 희망에 의존하면서.

 

물론 이 소설에서 벤저민은 너무 나아갔다. 그는 패륜에 해당하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죄악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가 보고 겪고 배우고 본받은 세계는 정정당당한 노력과 성실한 땀의 가치와는 무관한 곳이었으므로. 자기 집에 든 강도 중에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내 아들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이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어요. 이 늙은 여인이 조카에게 도와달라 외치니까 소리 지르는 걸 멈추지 않으면 목을 잡으라고 소리치더라고요. , 이제 진실을 알았네요, 진실을. 그러니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지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겠습니다.” (P.328)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투리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아무래도 시골 농부 가족의 지역성과 순박성을 두드러지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하겠다. 이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묘미의 체득이 한층 어렵다.

 

나머지 두 작품 <빈자 클라라 수녀회><그리피스 가문의 최후>는 모두 저주를 다루고 있다. 양자 모두 서두에서 역사적 일화를 연계하고 있는데 서사의 사실성 여부는 알 수 없다. 전자는 저주의 극복, 후자는 저주의 실현으로 상반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고딕 장르에서 저주는 비극과 공포를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잘못으로 죄 없는 후손이 당하는 비극이 전개된다. 저주의 연좌제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마련인가.

 

역사상의 위인이 내린 저주의 영험은 과연 극복 불가능한 것인가. 여러 대가 지난 후에도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현되는 저주를 우리는 숙명으로 체념해야만 할지 애매하다. 여기서 인간 이성은 아무런 역할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언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계모가 현명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오언의 비밀 결혼에 대해 오언의 아버지가 맹목적 분노를 퍼붓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이 필연처럼 외줄타기로 중첩되어야만 실현되는 저주.

 

오언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었어요.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P.245)

 

안타까운 건 귀여운 아기와, 개심한 네스트, 그리고 오언이 이룬 단란한 가족의 한때가 무참하게 깨져버린 비극이다. 아기를 잃고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린 오언. 한 무덤에 누이고자 하는 화해의 바람은 비웃듯 스러지고. 그의 운명은 비바람 치는 바닷속에서 사라져간다. 저주가 실현되었으니 앞으로 더는 비극이 없으리라. 그리피스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빈자 클라라 수녀회>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복잡한 이야기다. 지주 부인의 유모인 브리짓과 딸, 그리고 손녀로 이어진 저주의 흐름이 작품의 핵심이다. 첫째 장, 퇴락한 지주 집안에서 홀로 궁핍한 삶을 버티며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는 늙은 브리짓. 그에게 있어 딸이 키우던 강아지는 유일한 위안이자 가족이요 친구이다. 그래서일까 강아지를 죽인 신사를 향한 그녀의 저주는 혹심하기 이를 데 없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유일하게 사랑하는 생명체가, , 인간이, 죽어버린 내 불쌍한 아가만큼 순수하고 다정한 그 인간이, 차라리 죽음이 행복한 것일 정도로 모두에게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바로 이 피의 이름으로!” (P.114)

 

작품의 화자는 둘째 장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잘나가는 청년 변호사가 우연히 시골에서 낯설면서 아름다운 루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은둔하며 지내는 아가씨.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화자는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알게 되는 끔찍한 진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악마의 형상을 한 루시의 몸서리칠 정도로 사악한 육신. 그것은 바로 저주다.

 

모름지기 저주를 풀려면 원인 제공자와 저주 당사자가 만나야 한다. 화자의 활약 덕택으로 사실 관계가 밝혀진다. 그리고 브리짓과 루시 아가씨도 상면한다. 자신이 건 저주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피붙이임을! 저주의 중도 해지는 어렵다. 저주는 끝장이 나야만 끝나기 마련이다. 브리짓은 클라라 수녀회에 들어가 속죄와 참회의 세월을 보낸다. 브리짓의 기도와 노력에도 루시의 저주는 계속된다. 성직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브리짓의 저주를 실현해 준 이는 진실한 성자가 아니라 악마의 힘이었음을. 그리고 브리짓에게 깃든 악마가 그녀의 참회와 고해성사를 계속 방해하고 있어서임을.

 

분노에 찬 어휘들과 복수의 다짐, 그런 식의 신성하지 못한 기도는 결코 성자들의 귀에 가 닿을 수 없는 법이죠! 다른 힘이 그 말들을 차단하고, 하늘을 향해 던진 저주들이 그녀의 피붙이에게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사랑의 힘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으스러뜨린 겁니다. (P.176-177)

 

결말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저주를 건 당사자의 뼈아픈 고통과 헌신과 희생이 있고 난 뒤에야 루시 아가씨는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작품을 단순히 고딕 문학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함의가 매우 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과 영혼의 다양하고 복잡하여 심원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어서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작가 개스켈의 고딕 문학을 향한 관심이 상당히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표면상 이성을 벗어나 조그마한 계기와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감추어진 비이성과 환상에 매혹된다. 고딕 같은 환상 문학은 이성과 비이성의 양면을 파악하여 인간성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장르 문학으로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나 개스켈처럼 뛰어난 글쓰기 솜씨를 발휘하는 작가의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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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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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회색 여인

마녀 로이스

늙은 보모 이야기

 

개스켈은 일찍이 <크랜포드>를 읽었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남과 북>(또는 <북과 남>)을 읽어볼 생각인데, 고딕 작품을 여러 편 썼다고 들어서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고딕 소설은 요즘으로 치면 장르문학이다. 미스터리, 공포, 환상소설의 요소를 모두 품고 있기에 특히나 19세기 독자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지니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고딕 소설의 관건은 역설적이지만 내용의 사실 근접성에 있다. 허구이지만 사실에 가까운 인상을 풍길수록 독자는 더욱 전율할 것이다.

 

순진한 아가씨가 대지주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악명 높은 산적의 우두머리. 무작정 남편으로부터 달아나는데, 철저하게 가면으로 위장했기에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한시라도 주의를 소홀히 하면 남편의 추격에 붙잡혀 저세상으로 갈 운명에 처한 그녀. 이것이 <회색 여인>의 이야기다.

 

새 남편은 내게 더는 염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지. 내 금발은 회색이 됐고, 얼굴색은 어느새 잿빛이 돼버렸거든. (P.90-91)

 

남편의 마수를 피해 프랑스와 독일 등지를 겁에 질려 아슬아슬하게 떠도는 여인과 하녀 아망테, 악인 남편의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여인과 남편으로 위장한 아망테 두 사람이 불안하지만 단란하게 꾸리는 생활. 항상 두려움 속에 지내다 보니 여인의 아름답던 외모는 시들어서 회색 여인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여인은 성년이 되어 이제 결혼하려고 하는 딸에게 들려준다. 영원히 자기 가슴 속에 묻은 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암울하고 잔혹한 과거를 딸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철천지원수 관계라는 끔찍한 진실을.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개스켈의 고딕 작품을 여성 고딕으로 칭하면서 여성주의 의미를 부여한다. 여인과 아망테의 동거 생활을 새로운 형태의 부부 관계 내지 동성애 코드를 강조하여 풀이하는데 과도하고 부적절한 해석으로 생각한다.

 

<늙은 보모 이야기>는 고딕 소설의 전형적 유형에 충실하다. 장중하지만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오래된 성이 배경이므로. 뭔가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이어서 거기다 유령마저 등장한다. 현실과 환상이 한 시공간에 드러날 때 사람은 기이함과 두려움을 품게 된다.

 

한 남자를 둘러싼 자매의 사랑과 질투, 그리고 증오. 일순간의 감정 폭발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가족을 끔찍한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그리고 매년 되풀이되는 섬뜩하고 괴기한 현상들. 이제는 늙은 퍼니벌 부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유령들에 의해 잔혹한 과거사는 차갑게 재현된다. 유령이 이승을 헤매는 까닭은 이처럼 깊은 한을 품어서일 것이리라.

 

맙소사! 맙소사! 어릴 때 한 짓은 세월이 지나도 절대 되돌릴 수 없구나! 어릴 때 했던 짓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다니!” (P.271)

 

아서 밀러의 <시련>17세기 미국 식민지 시대에 실제 있었던 세일럼의 마녀재판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갈등과 증오가 광기와 결합하면 얼마나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사례다. <마녀 로이스>가 제재로 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중편 소설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하였다. 그만큼 작가가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뜻이리라.

 

로이스 버클리. 부모의 죽음으로 가까운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고아 소녀. 외삼촌네 식구들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 군식구. 청교도 신앙이 강력한 세일럼에서 그녀는 외톨이 영국 국교회 신자.

 

로이스가 마녀로 지목된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가 타자라는 점이다. 외삼촌네 식구 아무도 그녀를 변호하지 않고, 그나마 머내시는 광기에 사로잡혀 오히려 그의 변호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란 존재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내가 나임을, 내가 정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로이스의 외침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마녀가 마녀임을 인정할 리 없으며, 혹 마녀임을 자인한다면 당연하고 확고한 증거가 될 뿐.

 

비겁함은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조차 미신에 사로잡힌 잔인한 박해자가 되어 사악한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P.131)

 

작가는 로이스를 둘러싼 인물들에게 맹목적 비난이 덧씌워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당대 사람들이 목사를 포함하여 마법과 마녀의 존재를 믿고 있었음을 언급한다. 원주민 하녀 네이티는 이러한 믿음에 부채질한다. 놀런 목사를 짝사랑하는 페이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주문을 외고 의식을 행함으로써. 로이스조차도 어릴 때 목격했던 마녀로 누명에 씐 노파의 저주를 떠올리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로이스는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렸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과 미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죄 지은 사람에게 보이는 엄청난 증오와 혐오가 무서웠다. (P.175)

 

그럼에도 광란이 물결이 사라진 후의 세일럼 사람들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이렇게 얄팍할 수 있단 말인가. 로이스의 진술은 차라리 장엄하다. 사방에 인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녀는 죽음으로써 오롯이 인간이기를 지향한다. 온 세상이 술에 취한 곳에서 맨정신인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법이므로.

 

저는 거짓말로 목숨을 구하느니 양심의 거리낌 없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절 마녀라 하시는데 전 그게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용서받을 만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221)

 

로이스의 단말마의 비명은 단 한 마디, “엄마!”(P.230)였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인간은 극단의 순간에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가장 무섭고 두려워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로이스가 내뱉을 수 있는 다른 말은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아무리 참회한들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P.231)

 

로이스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휴 루시는 위의 말을 세 번 반복한다. 광기가 스러지고 재판의 당사자들은 장문의 참회문을 남기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의 말마따나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자기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왜 자기 잘못을 엄히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가. 상대방이, 국가가, 종교가 그걸 용서해 준다고 하면 그 잘못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치부될 수 있는가. 아서 밀러의 희곡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가슴 답답함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차오른다.

 

이 작품을 고딕 소설로 분류하는 게 마땅한가. 여기에 고딕 장르의 특성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의 비이성과 광기만 가득할 뿐. 아니다, 전혀 사실 같지 않고 차라리 꿈과 환상이었기를 바라는 무시무시한 현실, 그 자체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측면에서 지독히 씁쓸하지만 고딕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크랜포드>의 자잘하고 소박하고 안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 개스켈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 가볍게 펼쳐 들었던 책에서 의외로 섬찟함과 묵직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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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제국사 - 기원전 209~216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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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라고 하면 세계사와 관련하여 대체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중국사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과, 한고조의 굴욕과 한무제의 대대적 공격이 하나요, 서양사에서 소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훈족의 침입. 물론 후자에서 훈족과 흉노를 동일시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중국사만 놓고 보면 흉노는 한나라 시기 이후로는 존재감이 없기에 자연스레 소멸한 것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중국 한족의 역사와 구별하여 흉노 자체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역사서다. 솔직히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중국 정통-이것도 편향적인 시각이겠지만-을 벗어난 주변사는 관심과 사료 자체가 빈약하다. 저자는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돌궐과 위구르를 다룬 삼부작 유목제국 역사서를 완성하였으니 일단 그 사실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흉노의 기원과 본격적 대두 이전부터 흉노의 건국과 전성기, 한나라와의 대결과 패배에 이은 제국의 분열, 그리고 해체와 소멸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으로서 흉노의 전모를 꼼꼼히 살핀다. 부제가 기원전 209 ~ 216’으로 되어 있는데, 유목국가로서 정체성을 지닌 기간이 4백 년에 가깝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저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유목민족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대개 단명에 그치는데 흉노는 매우 장기간에 걸쳐 중화 세력과 대결을 벌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흉노 유목제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유목 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흉노의 위상과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다. (P.34)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 또는 새삼 주목하고 싶은 역사적 사실을 복기하고 싶다. 먼저 흉노의 원주지는 현재의 만리장성 이남이라는 점이다. 흉노는 몽골 초원이 아니라 고비사막 남쪽의 초원과 삼림이 혼합된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자신들과 같은 유목민뿐만 아니라 융과 같은 목축민들까지도 한데 아울렀다. 중원과 매우 인접한 지역이니만큼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진, 한나라도 흉노에 굉장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 요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가 갖는 의미도 달리 봐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배웠다. 저자는 이것이 침입 방지와 자국민의 이탈 방지, 그리고 유목민의 동선을 강제로 북으로 이동시키려는 조치라고 한다. 주거에 용이한 땅을 잃고 내몰린 흉노로서는 생존 차원에서라도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후 흉노와 중화의 갈등과 대결은 바로 이 지역의 공고화와 회복의 다툼에 아니다.

 

흉노의 최대 전성기는 명백히 묵특 대선우 시기일 것이다. 그는 한고조와의 일전에서 압승을 거두어 치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강요하였으며, 막남 지역뿐만 아니라 동서로 확장하여 중화와 대등한 거대한 유목제국을 형성하여 흉노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묵특은 이제 과거 융과 호의 일부를 통합한 수준이 아니라, 중국에서 온 반한 세력과 서쪽에 있던 월지 및 월지의 통제를 받던 오아시스와 유목민 모두를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유목제국의 대선우가 되었다. (P.143)

 

중국 역사의 후대에 보면 유목민은 단순히 중원에 침입하여 약탈과 조공을 기대하는 차원을 떠나 중원에 터를 잡고 아예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반면 흉노는 고비사막 남쪽, 오늘날 오르도스 지역 외에 중원 본토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토적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대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으리라. 흉노로서는 자신들의 생활 습속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언제든 인근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1백 년 가까이 수세에 몰렸던 한-흉노 관계가 역전된 계기는 한무제의 등장부터다. 흉노의 기동력을 따라잡기 위해 한무제는 기병을 대거 양성하여 흉노 본거지를 급습하였고, 흉노의 양팔을 자르기 위해 서역과 제휴 내지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고조선의 멸망을 이끌어낸다. 국사 시간은 고조선의 멸망이라는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데, 저자는 한무제의 큰 그림을 고조선과 흉노의 동맹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전쟁의 목적을 밝힌다. 어찌 보면 우리 역사는 한과 흉노의 대결에서 유탄을 맞은 셈이다.

 

한은 흉노와 외부 세력이 연합해 한을 공격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하서(이후에 하서사군 설치)와 조선(이후에 한사군 설치)을 공격해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한은 흉노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며 포위할 수 있었다. (P.371)

 

특히 한나라와 관심을 기울인 곳은 서역이다. 흉노는 서역 제국에서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았으며 사막 교통로를 지배하여 교역 수입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한나라는 장건의 모험 이후 서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서회랑을 거쳐 오늘날 신강위구르자치구로 이어지는 서역 경영에 역점을 두게 되었음은 흉노와 대결을 통한 의외의 소득일 것이다.

 

순전한 외침만으로 패망에 이르는 나라와 민족은 드물다. 대개는 내우외환이 겹치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한나라의 압박으로 흉노 국가가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다섯 선우 쟁립이니 남북 흉노 분열과 같은 내부 요인으로 흉노는 자체 역량을 오롯이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북흉노의 소멸과, 남흉노의 중국 내 편입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다.

 

한과 흉노가 함께 이루던 이원적 질서는 흉노의 분열로 인해 한이 주도하는 일원적 질서로 바뀌었다. 이제 흉노는 스스로 아무리 자존을 지키려 해도 한에 종속된 여러 변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양상은 남북 대결 국도가 심화되면서 더 확고해졌다. 흉노는 이제 각자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P.331)

 

중국사를 훑어보면 일시적으로 중국과 맞먹거나 우위를 보이는 세력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십중팔구는 정복당하거나 패망하는 수순에 이르는데, 단기전으로는 가능하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들면 중국의 막대한 자원과 인력의 힘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비슷한 피해를 입더라도 회복력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전장이 중원이 아닌 경우에는 한층 더하다. 우리는 대표적 사례를 고구려를 통해 볼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 팽팽하게 맞섰던 고구려는 지속된 전쟁으로 약화된 데다가 지배층의 분열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저자는 조조에 의한 남흉노의 해체 이후 병주 흉노와 남북조 시대의 흉노를 짤막하게 다룬다. 그가 남흉노까지만 집중적으로 탐구한 까닭은 이후 흉노는 유목제국으로서의 의의보다는 군소 세력으로의 잔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만약 국가로서의 흉노 외에 흉노 백성의 자취에도 관심을 지녔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등장했을 것이다. 남북조 시대의 유연도 분명 흉노의 후예임을 여러 사서에서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서술 방식은 약간 딱딱하고 건조한 편이다. 본격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에 가깝지만 일반 대중이 흥미롭게 읽어나가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간과하였던 역사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재미는 쏠쏠하다. 책의 부록으로 실은 대선우의 계승과 분열연표와 대선우의 계보도를 함께 참고하면 어지러운 흉노 지배층의 분열과 다툼도 한결 체계가 잡힌다.

 

이 책이 흉노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인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학술적 논란이 있다고 언급할 따름이다. 저자는 애초 이 책을 중국사의 범위 내로 제한한다. 기존 중화 세력 위주 역사서술의 편향을 벗어나 중화 세력과 유목 세력이 이원적 구도로 역사를 펼쳐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북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분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와 한의 대결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분법적 설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장성 안쪽으로 한정된 중국의 범위와는 다른, 초원과 북중국이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판도에서 비한(非漢) 세력들이 서로 얽혀 다원적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P.396)

 

흉노와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일각에서 신라 왕족의 흉노 기원설을 제기하고 있다. 문무대왕비를 비롯한 일부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부정적이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흉노의 역사는 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농경 문화권 중심의 편향된 역사관을 탈피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과거 유목과 방랑은 부정적으로 치부되었지만 오늘날은 디지털 노마드라 하여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더욱 각광받는 세상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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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녀였을 때 - 샬롯 퍼킨스 길먼 단편소설집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장지원 옮김 / 더라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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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내가 마녀였을 때

몰리의 의식

엄마의 자격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

정숙한 여인

전화위복

과부의 힘

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은 동시대의 다른 여성작가보다는 여성주의 의식을 더욱 강하고 확실하게 지닌 작가다. 앞서 읽은 <누런 벽지><전화위복>(또는 변심’)를 보면 알 수 있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다른 단편소설은 물론 <허랜드> 같은 장편의 존재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 책은 길먼의 주요 단편소설 모음집으로서 작가의 여성주의 문학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마녀였을 때>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우연한 계기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흑마법의 능력을 갖게 된 화자가 법적으로 처벌 불가능하지만 좋은 사회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저주를 내린다. 따분한 사람들, 위선자,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신나게 마녀의 능력을 발휘하던 화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대상의 성격을 바꾼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빈다.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갖고 있던 마법 능력마저 상실한다.

 

모든 여자가 마침내 여성성을, 여성성의 힘과 자부심, 삶에서의 위치를 깨닫기를 빌었다. [......]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고 충만한 삶과 일, 행복으로 뛰어들기를 빌었다. (P.30)

 

법망을 넘나들며 사회악을 처벌하는 의적의 활약에 감탄하는 통쾌함과 동시에 여성성의 사회적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임을 작가는 동시에 보여준다.

 

여성주의의 본질과 관련하여 초창기에는 남성의 가치를 높이 보고 남성에 가까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몰리의 의식>에서 알 수 있다. 진정한 여자인 몰리는 남성을 지향한다. 그녀가 바라는 남성의 최고 가치는 경제적 자유와 안정에 있다. 오늘날 많은 외벌이 가정과, 못지않은 맞벌이 가정에서도 주된 수입원은 여성보다는 남성에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역할의 차이가 아니라 예속 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견해는 여전하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소망하는 바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세상이 몰리 앞에 펼쳐졌다. [......] 남자가 만들고, 남자가 살고, 남자가 보는 남자의 세상이었다. (P.37)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미덕을 가르쳤다. <과부의 힘>은 이에 대한 반론이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인 자식들은 남은 재산과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한다. 경제적 여유와 봉양 의무를 놓고 가족 간 낯 붉히는 일은 현대사회도 비일비재하다. 남은 부모가 재산이 별로 없다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말고 끝까지 움켜잡으라는 조언도 있지 않는가.

 

전에는 한 적 없던 일을 할 거야. 난 살 작정이다!” (P.147)

 

너희 어머니가 자신의 관심사가 있고 인생이 앞으로 절반은 더 남은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으면 좋겠구나.” (P.148)

 

여기서 맥퍼슨 부인의 반전이 뒤따른다. 남은 재산은 부인에게 이미 소유권이 이전되었음과 그녀가 불린 재산의 절반을 갖고 혼자서 살며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 주장이라고 해야겠다.

 

여성에게 모성애는 불가피한 속성이다. 여성의 삶을 모성애로만 주장할 수 없지만, 극단적 편협한 모성애가 아닌 건전한 모성애는 시대의 간극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유효하다. <엄마의 자격>은 모성의 가치에 대한 일종의 담론이다.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전형으로 양자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털 하나 뽑지 않을 거라고 맹자에게 비난받는다.

 

엄마의 의무는 자기 자식이야! 에스더는 다른 가족을 돌보느라 자기 자식을 방치했어. 주님께서 에스더에게 다른 애들을 돌보라고 주신 적이 없잖아!” (P.60-61)

 

자기 아이를 희생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바람직한 행동 선택과 가치는 무엇인가. 다른 사안이지만 자율주행차의 윤리적 딜레마와도 비슷한 선택이다. 우리는 엄마의 자격이 없는 엄마라고 에스더를 비난해야 마땅한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작가 나름의 해법 제시다. 전자에서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줄리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 육아에 쩔쩔매는 상황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모성을 이유로 모두가 불행한 처지를 감내하라는 요구는 무리해 보인다. 다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대안이기에 현실성이 부족한 느낌도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온전한 이해, 시어머니의 뛰어난 육아 능력과 의사. 현대사회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어느 가정도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정숙한 여인><전화위복>은 작가가 지향하는 여성주의 해법이라는 생각이다. 양자 모두 남편은 윤리와 책임을 저버리고 가출하거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와 초래할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것을 이해받길 기대한다.

 

전자에서 메리는 전남편의 방문을 받고 자신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심사숙고한 후 그를 거절한다. 후자에서 매로너 부인은 남편에게 오히려 남인 듯이 응대한다. 부부간 관계는 사랑과 신뢰가 결합한 사이며, 일방이 우위와 지배, 다른 일방이 복종과 피지배의 관계는 아니다.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인상은 아마 메리가 아닌가 싶다.

 

건강했고 자기 일을 좋아했으며, 마을에서 존경과 호평을 받는 인물이자 자유주의 교회, 진보적인 여자 모임, 도시 개선 협회의 유능한 구성원이었다. 메리는 평온, 안전, 평화를 거머쥐었다. (P.101)

 

<누런 벽지>는 그런 점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성 이해에 실패한 사례이다. 외견상 의사와 남편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처방을 사용한 것이며, 아내의 예민한 신경에 무관심한 게 아니냐는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아내 역시 너무나 유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병세를 악화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작가는 미치게 되는 사람을 구하고자 쓴 이야기”(P.184)라고 밝히는데, 부적절한 요법에 대한 비판을 벗어나 여성주의의 전형으로 간주한다면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의견으로 참다운 여성주의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성성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여성성의 가치를 되살리고 남성성과 동등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남성성을 공격함으로써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편적이며 교각살우에 가깝다. 진정한 여성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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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 최면 / 아내의 편지 / 라일락 / 데지레의 아기 / 바이유 너머 얼리퍼플오키드 1
케이트 쇼팽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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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최면

아내의 편지

라일락

데지레의 아기

바이유 너머

 

케이트 쇼팽은 장편 <각성>과 몇몇 단편을 읽었지만, 그다지 애호하는 작가는 아니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아카디아 무도회>, <폭풍우>를 보면 제재의 참신성과 반전의 결말이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가운데, 외관상의 포용성과는 다른 왠지 모를 냉소감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단순한 여성주의로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뭔가가 작품 속에 확실히 들어 있다.

 

결혼한 남녀 관계, 즉 부부는 모든 사회와 국가를 물론 하고 바람직한 전형으로 찬미하는 인간관계다. 두 사람의 인연이 사랑, 즉 자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죽을 때까지 지극히 아름답고 굳건한 애정과 믿음으로 이어져야 할 테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수많은 불협화음과 파국으로 점철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아내의 편지>, <데지레의 아기>가 바로 이러한 제재를 다룬다. 결혼을 자유의 상실, 속박으로 받아들인다면 온전한 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 각자는 자유의 회복을 꿈꾸며, 결혼의 종결을 상상한다.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의 맬라드 부인처럼.

 

이제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도 된다고 믿는 이의 아집으로 인해 감정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P.10)

 

그녀의 죽음은 일견 슬프지만, 차라리 다행이기도 하다. 그녀의 남은 결혼 생활은 아마도 지옥에 가까울 테니까. 맬라드 부인 같은 결혼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권하는 결혼 생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내의 편지>의 남편 처지는 맬라드 부인과 흡사하다. 그는 아내와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내의 편지 뭉치가 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남편은 아내의 겉껍데기만 차지했을 뿐, 아내의 속마음은 기실 다른 남자에게로 향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편지 뭉치를 없애면 될 터인데, 이것을 남편에게 떠맡긴 아내의 잔인성이여. 편지 꾸러미를 강물 속에 빠뜨려 없앤 것과 별개로 남편의 마음속에는 묵직한 의혹이 자리 잡는다. 차라리 편지가 없었다면 남편의 마음은 슬픔 속에 평온함과 추억을 가지고 아내를 기릴 수 있었을 텐데, 더 이상 그의 삶에서 평안은 없다.

 

심신이 피폐한 가운데 엄청난 위해가 가해져 존재 자체가 산산이 조각나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남편에게는 자신이 손수 강에 던져버린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간절한 소망뿐이었다. (P.52)

 

결혼과 출산은 부부 사이의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다. 서로 간에 한 남자, 한 여자와 법적, 성적 관계를 오로지 유지한다는 것. 따라서 사랑의 결실인 아기는 부부의 유전자를 공유함으로써 개체로서의 생명체는 사멸하더라도 종으로서의 생명체는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는 만큼 어느 사회를 막론하더라도 중시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 문제가 발생하면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데지레의 아기>처럼.

 

어릴 적 입양된 데지레는 아르망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곧 아기를 낳는다. 누가 봐도 앞날이 행복으로 창창한 데지레이지만, 그녀의 행복은 삽시간에 어둠에 드리워진다. 남편은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주변에서는 작은 소리로 그녀를 향해 수군거린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자신의 아기와 혼혈 소년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신음을 내뱉게 된다.

 

백인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순수 백인이 아니라면 아기에게 유전자를 전해 준 생부와 생모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면 누구인가, 아르망인가 데지레인가. 아르망은 냉정하다.

 

쟤는 백인이 아니야. , 당신이 백인이 아니란 뜻이지.” (P.90)

 

출신이 분명치 않은 데지레인 만큼 완전한 부인은 불가능하다. 데지레의 항변은 비웃음으로 스러질 뿐. 데지레는 아기를 안고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데지레의 물건을 불태우는 과정에 발견된 아르망 엄마의 편지 다발은 충격적인 진실을 아르망에게 전달한다. 사실 작품 중간에 모종의 암시를 작가는 깔아놓았다. 이를 눈여겨본 독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독자는 아르망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 당대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그가 이를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므로. 남편에게 버림받음과, 아기의 피부색을 이유로 한 데지레의 극단적 선택도 아쉬울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제삼자의 시각에서 아르망과 데지레 이야기를 말하기는 쉬워도 요즘 시절에도 친자 여부를 둘러싼 시시비비가 적지 않다고 하니 남의 말 하듯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면>은 부부 이야기지만,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르다. 장기 부재중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잘 돌보도록, 여자친구를 혐오하는 친구에게 최면을 건 그레이엄. 최면에 걸려 싫어하는 여성과 사랑을 하고 결혼하게 된 패버햄.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던 남자친구의 친구의 다정함과 매력에 빠져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하게 된 폴린. 언뜻 보면 끝장 드라마의 설정이다.

 

이 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최면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촉발되었지만 끝내 최면의 작용을 거부한 사랑의 힘에 대한 모두의 공감이다. 그레이엄은 여자친구를 되찾는 데 실패했지만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최면의 효과와 한계를 생생하게 목도하였으며, 사랑의 힘이 갖는 진정한 위력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여자친구를 잃은 게 아니라 행복한 한 쌍의 친구를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의 에너지, 사랑 그리고 위엄 있는 주문이 남자의 잠재의식 안에서 짧고 강렬하게 갈등하고 투쟁한 결과 사랑이 승리한 듯했다. 그레이엄은 이를 의심 없이 믿었다. (P.35)

 

<바이유 넘어>는 극한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라 폴의 이야기다. 바이유 늪지대에서 홀로 살아가는 흑인 여성 소작농 미친 여자. 어린 시절 겪은 무시무시한 공포로 그녀는 늪지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농장주의 어린 아들의 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신이 아이를 안은 채 늪지대를 건너거나 아니면 아이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행동은 시작하기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한계는 한번 뛰어넘으면 다음부터 더는 한계가 아니다. 이제 그녀는 바이유 너머를 성큼성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비단 걸음 이상임을 독자와 라 폴 모두 알고 있다.

 

난생처음 바이유 너머의 새롭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라 폴의 얼굴에 경이와 만족감이 조금씩 자리하기 시작했다. (P.109)

 

<라일락>은 묘한 작품이다. 라일락이 필 무렵이면 수녀원을 방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는 귀부인 에드리언. 그녀는 속세의 부산함을 떠나 수습 수녀 시절의 경건하고 순수했던 내면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가스 수녀는 다른 수녀보다 조금 더 에드리언을 향한 기쁨과 행복이 클 뿐이 아니겠는가. 설혹 그녀가 에드리언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경계할 정도로 신중하고 차분하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고, 사랑하고 공감해줄 준비가 된 하늘에 계신 우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마음과 이 마음이 혹시 다르지는 않을까 걱정돼요.” (P.62)

 

원장 수녀가 에드리언의 방문을 금지한 까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에드리언을 향한 아가스 수녀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였음을 감지한 것일까. 에드리언이 매년 몰고 오는 세속의 바람과 물욕이 수녀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가스 수녀의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었다. 그렇다면 에드리언이 차마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P.72)던 것은 나중의 까닭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해설에서는 이 작품을 동성애 코드로 풀이하고 있는데, 작중에는 동성애 관련한 직간접적인 묘사와 기술이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과거 수습 수녀였던 에드리언의 수녀원 정례 방문과, 그녀를 환영하는 수녀들, 특히 아가스 수녀의 기쁨과 행복을 동성애라는 한 마디 정의와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는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은 케이트 쇼팽의 작품세계를 좀 더 알아보기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느낌을 먼저 언급하면, 여전한 반전의 미학이 인상적이다. 독자는 어지간하면 작품의 결말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반전의 결과는 여성의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이어진다. 신뢰, 사랑, 부부, 의지 등 보편적 인간성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여성성의 맥락에서 어떤 형태를 보이는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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