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유목제국사 - 기원전 209~216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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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라고 하면 세계사와 관련하여 대체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중국사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과, 한고조의 굴욕과 한무제의 대대적 공격이 하나요, 서양사에서 소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훈족의 침입. 물론 후자에서 훈족과 흉노를 동일시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중국사만 놓고 보면 흉노는 한나라 시기 이후로는 존재감이 없기에 자연스레 소멸한 것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중국 한족의 역사와 구별하여 흉노 자체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역사서다. 솔직히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중국 정통-이것도 편향적인 시각이겠지만-을 벗어난 주변사는 관심과 사료 자체가 빈약하다. 저자는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돌궐과 위구르를 다룬 삼부작 유목제국 역사서를 완성하였으니 일단 그 사실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흉노의 기원과 본격적 대두 이전부터 흉노의 건국과 전성기, 한나라와의 대결과 패배에 이은 제국의 분열, 그리고 해체와 소멸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으로서 흉노의 전모를 꼼꼼히 살핀다. 부제가 기원전 209 ~ 216’으로 되어 있는데, 유목국가로서 정체성을 지닌 기간이 4백 년에 가깝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저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유목민족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대개 단명에 그치는데 흉노는 매우 장기간에 걸쳐 중화 세력과 대결을 벌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흉노 유목제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유목 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흉노의 위상과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다. (P.34)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 또는 새삼 주목하고 싶은 역사적 사실을 복기하고 싶다. 먼저 흉노의 원주지는 현재의 만리장성 이남이라는 점이다. 흉노는 몽골 초원이 아니라 고비사막 남쪽의 초원과 삼림이 혼합된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자신들과 같은 유목민뿐만 아니라 융과 같은 목축민들까지도 한데 아울렀다. 중원과 매우 인접한 지역이니만큼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진, 한나라도 흉노에 굉장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 요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가 갖는 의미도 달리 봐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배웠다. 저자는 이것이 침입 방지와 자국민의 이탈 방지, 그리고 유목민의 동선을 강제로 북으로 이동시키려는 조치라고 한다. 주거에 용이한 땅을 잃고 내몰린 흉노로서는 생존 차원에서라도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후 흉노와 중화의 갈등과 대결은 바로 이 지역의 공고화와 회복의 다툼에 아니다.

 

흉노의 최대 전성기는 명백히 묵특 대선우 시기일 것이다. 그는 한고조와의 일전에서 압승을 거두어 치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강요하였으며, 막남 지역뿐만 아니라 동서로 확장하여 중화와 대등한 거대한 유목제국을 형성하여 흉노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묵특은 이제 과거 융과 호의 일부를 통합한 수준이 아니라, 중국에서 온 반한 세력과 서쪽에 있던 월지 및 월지의 통제를 받던 오아시스와 유목민 모두를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유목제국의 대선우가 되었다. (P.143)

 

중국 역사의 후대에 보면 유목민은 단순히 중원에 침입하여 약탈과 조공을 기대하는 차원을 떠나 중원에 터를 잡고 아예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반면 흉노는 고비사막 남쪽, 오늘날 오르도스 지역 외에 중원 본토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토적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대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으리라. 흉노로서는 자신들의 생활 습속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언제든 인근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1백 년 가까이 수세에 몰렸던 한-흉노 관계가 역전된 계기는 한무제의 등장부터다. 흉노의 기동력을 따라잡기 위해 한무제는 기병을 대거 양성하여 흉노 본거지를 급습하였고, 흉노의 양팔을 자르기 위해 서역과 제휴 내지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고조선의 멸망을 이끌어낸다. 국사 시간은 고조선의 멸망이라는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데, 저자는 한무제의 큰 그림을 고조선과 흉노의 동맹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전쟁의 목적을 밝힌다. 어찌 보면 우리 역사는 한과 흉노의 대결에서 유탄을 맞은 셈이다.

 

한은 흉노와 외부 세력이 연합해 한을 공격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하서(이후에 하서사군 설치)와 조선(이후에 한사군 설치)을 공격해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한은 흉노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며 포위할 수 있었다. (P.371)

 

특히 한나라와 관심을 기울인 곳은 서역이다. 흉노는 서역 제국에서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았으며 사막 교통로를 지배하여 교역 수입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한나라는 장건의 모험 이후 서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서회랑을 거쳐 오늘날 신강위구르자치구로 이어지는 서역 경영에 역점을 두게 되었음은 흉노와 대결을 통한 의외의 소득일 것이다.

 

순전한 외침만으로 패망에 이르는 나라와 민족은 드물다. 대개는 내우외환이 겹치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한나라의 압박으로 흉노 국가가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다섯 선우 쟁립이니 남북 흉노 분열과 같은 내부 요인으로 흉노는 자체 역량을 오롯이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북흉노의 소멸과, 남흉노의 중국 내 편입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다.

 

한과 흉노가 함께 이루던 이원적 질서는 흉노의 분열로 인해 한이 주도하는 일원적 질서로 바뀌었다. 이제 흉노는 스스로 아무리 자존을 지키려 해도 한에 종속된 여러 변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양상은 남북 대결 국도가 심화되면서 더 확고해졌다. 흉노는 이제 각자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P.331)

 

중국사를 훑어보면 일시적으로 중국과 맞먹거나 우위를 보이는 세력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십중팔구는 정복당하거나 패망하는 수순에 이르는데, 단기전으로는 가능하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들면 중국의 막대한 자원과 인력의 힘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비슷한 피해를 입더라도 회복력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전장이 중원이 아닌 경우에는 한층 더하다. 우리는 대표적 사례를 고구려를 통해 볼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 팽팽하게 맞섰던 고구려는 지속된 전쟁으로 약화된 데다가 지배층의 분열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저자는 조조에 의한 남흉노의 해체 이후 병주 흉노와 남북조 시대의 흉노를 짤막하게 다룬다. 그가 남흉노까지만 집중적으로 탐구한 까닭은 이후 흉노는 유목제국으로서의 의의보다는 군소 세력으로의 잔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만약 국가로서의 흉노 외에 흉노 백성의 자취에도 관심을 지녔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등장했을 것이다. 남북조 시대의 유연도 분명 흉노의 후예임을 여러 사서에서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서술 방식은 약간 딱딱하고 건조한 편이다. 본격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에 가깝지만 일반 대중이 흥미롭게 읽어나가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간과하였던 역사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재미는 쏠쏠하다. 책의 부록으로 실은 대선우의 계승과 분열연표와 대선우의 계보도를 함께 참고하면 어지러운 흉노 지배층의 분열과 다툼도 한결 체계가 잡힌다.

 

이 책이 흉노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인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학술적 논란이 있다고 언급할 따름이다. 저자는 애초 이 책을 중국사의 범위 내로 제한한다. 기존 중화 세력 위주 역사서술의 편향을 벗어나 중화 세력과 유목 세력이 이원적 구도로 역사를 펼쳐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북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분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와 한의 대결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분법적 설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장성 안쪽으로 한정된 중국의 범위와는 다른, 초원과 북중국이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판도에서 비한(非漢) 세력들이 서로 얽혀 다원적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P.396)

 

흉노와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일각에서 신라 왕족의 흉노 기원설을 제기하고 있다. 문무대왕비를 비롯한 일부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부정적이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흉노의 역사는 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농경 문화권 중심의 편향된 역사관을 탈피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과거 유목과 방랑은 부정적으로 치부되었지만 오늘날은 디지털 노마드라 하여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더욱 각광받는 세상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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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녀였을 때 - 샬롯 퍼킨스 길먼 단편소설집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장지원 옮김 / 더라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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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내가 마녀였을 때

몰리의 의식

엄마의 자격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

정숙한 여인

전화위복

과부의 힘

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은 동시대의 다른 여성작가보다는 여성주의 의식을 더욱 강하고 확실하게 지닌 작가다. 앞서 읽은 <누런 벽지><전화위복>(또는 변심’)를 보면 알 수 있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다른 단편소설은 물론 <허랜드> 같은 장편의 존재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 책은 길먼의 주요 단편소설 모음집으로서 작가의 여성주의 문학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마녀였을 때>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우연한 계기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흑마법의 능력을 갖게 된 화자가 법적으로 처벌 불가능하지만 좋은 사회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저주를 내린다. 따분한 사람들, 위선자,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신나게 마녀의 능력을 발휘하던 화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대상의 성격을 바꾼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빈다.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갖고 있던 마법 능력마저 상실한다.

 

모든 여자가 마침내 여성성을, 여성성의 힘과 자부심, 삶에서의 위치를 깨닫기를 빌었다. [......]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고 충만한 삶과 일, 행복으로 뛰어들기를 빌었다. (P.30)

 

법망을 넘나들며 사회악을 처벌하는 의적의 활약에 감탄하는 통쾌함과 동시에 여성성의 사회적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임을 작가는 동시에 보여준다.

 

여성주의의 본질과 관련하여 초창기에는 남성의 가치를 높이 보고 남성에 가까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몰리의 의식>에서 알 수 있다. 진정한 여자인 몰리는 남성을 지향한다. 그녀가 바라는 남성의 최고 가치는 경제적 자유와 안정에 있다. 오늘날 많은 외벌이 가정과, 못지않은 맞벌이 가정에서도 주된 수입원은 여성보다는 남성에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역할의 차이가 아니라 예속 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견해는 여전하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소망하는 바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세상이 몰리 앞에 펼쳐졌다. [......] 남자가 만들고, 남자가 살고, 남자가 보는 남자의 세상이었다. (P.37)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미덕을 가르쳤다. <과부의 힘>은 이에 대한 반론이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인 자식들은 남은 재산과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한다. 경제적 여유와 봉양 의무를 놓고 가족 간 낯 붉히는 일은 현대사회도 비일비재하다. 남은 부모가 재산이 별로 없다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말고 끝까지 움켜잡으라는 조언도 있지 않는가.

 

전에는 한 적 없던 일을 할 거야. 난 살 작정이다!” (P.147)

 

너희 어머니가 자신의 관심사가 있고 인생이 앞으로 절반은 더 남은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으면 좋겠구나.” (P.148)

 

여기서 맥퍼슨 부인의 반전이 뒤따른다. 남은 재산은 부인에게 이미 소유권이 이전되었음과 그녀가 불린 재산의 절반을 갖고 혼자서 살며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 주장이라고 해야겠다.

 

여성에게 모성애는 불가피한 속성이다. 여성의 삶을 모성애로만 주장할 수 없지만, 극단적 편협한 모성애가 아닌 건전한 모성애는 시대의 간극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유효하다. <엄마의 자격>은 모성의 가치에 대한 일종의 담론이다.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전형으로 양자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털 하나 뽑지 않을 거라고 맹자에게 비난받는다.

 

엄마의 의무는 자기 자식이야! 에스더는 다른 가족을 돌보느라 자기 자식을 방치했어. 주님께서 에스더에게 다른 애들을 돌보라고 주신 적이 없잖아!” (P.60-61)

 

자기 아이를 희생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바람직한 행동 선택과 가치는 무엇인가. 다른 사안이지만 자율주행차의 윤리적 딜레마와도 비슷한 선택이다. 우리는 엄마의 자격이 없는 엄마라고 에스더를 비난해야 마땅한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작가 나름의 해법 제시다. 전자에서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줄리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 육아에 쩔쩔매는 상황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모성을 이유로 모두가 불행한 처지를 감내하라는 요구는 무리해 보인다. 다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대안이기에 현실성이 부족한 느낌도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온전한 이해, 시어머니의 뛰어난 육아 능력과 의사. 현대사회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어느 가정도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정숙한 여인><전화위복>은 작가가 지향하는 여성주의 해법이라는 생각이다. 양자 모두 남편은 윤리와 책임을 저버리고 가출하거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와 초래할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것을 이해받길 기대한다.

 

전자에서 메리는 전남편의 방문을 받고 자신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심사숙고한 후 그를 거절한다. 후자에서 매로너 부인은 남편에게 오히려 남인 듯이 응대한다. 부부간 관계는 사랑과 신뢰가 결합한 사이며, 일방이 우위와 지배, 다른 일방이 복종과 피지배의 관계는 아니다.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인상은 아마 메리가 아닌가 싶다.

 

건강했고 자기 일을 좋아했으며, 마을에서 존경과 호평을 받는 인물이자 자유주의 교회, 진보적인 여자 모임, 도시 개선 협회의 유능한 구성원이었다. 메리는 평온, 안전, 평화를 거머쥐었다. (P.101)

 

<누런 벽지>는 그런 점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성 이해에 실패한 사례이다. 외견상 의사와 남편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처방을 사용한 것이며, 아내의 예민한 신경에 무관심한 게 아니냐는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아내 역시 너무나 유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병세를 악화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작가는 미치게 되는 사람을 구하고자 쓴 이야기”(P.184)라고 밝히는데, 부적절한 요법에 대한 비판을 벗어나 여성주의의 전형으로 간주한다면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의견으로 참다운 여성주의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성성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여성성의 가치를 되살리고 남성성과 동등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남성성을 공격함으로써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편적이며 교각살우에 가깝다. 진정한 여성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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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 최면 / 아내의 편지 / 라일락 / 데지레의 아기 / 바이유 너머 얼리퍼플오키드 1
케이트 쇼팽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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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최면

아내의 편지

라일락

데지레의 아기

바이유 너머

 

케이트 쇼팽은 장편 <각성>과 몇몇 단편을 읽었지만, 그다지 애호하는 작가는 아니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아카디아 무도회>, <폭풍우>를 보면 제재의 참신성과 반전의 결말이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가운데, 외관상의 포용성과는 다른 왠지 모를 냉소감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단순한 여성주의로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뭔가가 작품 속에 확실히 들어 있다.

 

결혼한 남녀 관계, 즉 부부는 모든 사회와 국가를 물론 하고 바람직한 전형으로 찬미하는 인간관계다. 두 사람의 인연이 사랑, 즉 자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죽을 때까지 지극히 아름답고 굳건한 애정과 믿음으로 이어져야 할 테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수많은 불협화음과 파국으로 점철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아내의 편지>, <데지레의 아기>가 바로 이러한 제재를 다룬다. 결혼을 자유의 상실, 속박으로 받아들인다면 온전한 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 각자는 자유의 회복을 꿈꾸며, 결혼의 종결을 상상한다.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의 맬라드 부인처럼.

 

이제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도 된다고 믿는 이의 아집으로 인해 감정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P.10)

 

그녀의 죽음은 일견 슬프지만, 차라리 다행이기도 하다. 그녀의 남은 결혼 생활은 아마도 지옥에 가까울 테니까. 맬라드 부인 같은 결혼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권하는 결혼 생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내의 편지>의 남편 처지는 맬라드 부인과 흡사하다. 그는 아내와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내의 편지 뭉치가 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남편은 아내의 겉껍데기만 차지했을 뿐, 아내의 속마음은 기실 다른 남자에게로 향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편지 뭉치를 없애면 될 터인데, 이것을 남편에게 떠맡긴 아내의 잔인성이여. 편지 꾸러미를 강물 속에 빠뜨려 없앤 것과 별개로 남편의 마음속에는 묵직한 의혹이 자리 잡는다. 차라리 편지가 없었다면 남편의 마음은 슬픔 속에 평온함과 추억을 가지고 아내를 기릴 수 있었을 텐데, 더 이상 그의 삶에서 평안은 없다.

 

심신이 피폐한 가운데 엄청난 위해가 가해져 존재 자체가 산산이 조각나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남편에게는 자신이 손수 강에 던져버린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간절한 소망뿐이었다. (P.52)

 

결혼과 출산은 부부 사이의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다. 서로 간에 한 남자, 한 여자와 법적, 성적 관계를 오로지 유지한다는 것. 따라서 사랑의 결실인 아기는 부부의 유전자를 공유함으로써 개체로서의 생명체는 사멸하더라도 종으로서의 생명체는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는 만큼 어느 사회를 막론하더라도 중시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 문제가 발생하면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데지레의 아기>처럼.

 

어릴 적 입양된 데지레는 아르망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곧 아기를 낳는다. 누가 봐도 앞날이 행복으로 창창한 데지레이지만, 그녀의 행복은 삽시간에 어둠에 드리워진다. 남편은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주변에서는 작은 소리로 그녀를 향해 수군거린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자신의 아기와 혼혈 소년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신음을 내뱉게 된다.

 

백인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순수 백인이 아니라면 아기에게 유전자를 전해 준 생부와 생모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면 누구인가, 아르망인가 데지레인가. 아르망은 냉정하다.

 

쟤는 백인이 아니야. , 당신이 백인이 아니란 뜻이지.” (P.90)

 

출신이 분명치 않은 데지레인 만큼 완전한 부인은 불가능하다. 데지레의 항변은 비웃음으로 스러질 뿐. 데지레는 아기를 안고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데지레의 물건을 불태우는 과정에 발견된 아르망 엄마의 편지 다발은 충격적인 진실을 아르망에게 전달한다. 사실 작품 중간에 모종의 암시를 작가는 깔아놓았다. 이를 눈여겨본 독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독자는 아르망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 당대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그가 이를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므로. 남편에게 버림받음과, 아기의 피부색을 이유로 한 데지레의 극단적 선택도 아쉬울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제삼자의 시각에서 아르망과 데지레 이야기를 말하기는 쉬워도 요즘 시절에도 친자 여부를 둘러싼 시시비비가 적지 않다고 하니 남의 말 하듯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면>은 부부 이야기지만,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르다. 장기 부재중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잘 돌보도록, 여자친구를 혐오하는 친구에게 최면을 건 그레이엄. 최면에 걸려 싫어하는 여성과 사랑을 하고 결혼하게 된 패버햄.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던 남자친구의 친구의 다정함과 매력에 빠져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하게 된 폴린. 언뜻 보면 끝장 드라마의 설정이다.

 

이 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최면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촉발되었지만 끝내 최면의 작용을 거부한 사랑의 힘에 대한 모두의 공감이다. 그레이엄은 여자친구를 되찾는 데 실패했지만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최면의 효과와 한계를 생생하게 목도하였으며, 사랑의 힘이 갖는 진정한 위력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여자친구를 잃은 게 아니라 행복한 한 쌍의 친구를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의 에너지, 사랑 그리고 위엄 있는 주문이 남자의 잠재의식 안에서 짧고 강렬하게 갈등하고 투쟁한 결과 사랑이 승리한 듯했다. 그레이엄은 이를 의심 없이 믿었다. (P.35)

 

<바이유 넘어>는 극한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라 폴의 이야기다. 바이유 늪지대에서 홀로 살아가는 흑인 여성 소작농 미친 여자. 어린 시절 겪은 무시무시한 공포로 그녀는 늪지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농장주의 어린 아들의 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신이 아이를 안은 채 늪지대를 건너거나 아니면 아이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행동은 시작하기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한계는 한번 뛰어넘으면 다음부터 더는 한계가 아니다. 이제 그녀는 바이유 너머를 성큼성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비단 걸음 이상임을 독자와 라 폴 모두 알고 있다.

 

난생처음 바이유 너머의 새롭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라 폴의 얼굴에 경이와 만족감이 조금씩 자리하기 시작했다. (P.109)

 

<라일락>은 묘한 작품이다. 라일락이 필 무렵이면 수녀원을 방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는 귀부인 에드리언. 그녀는 속세의 부산함을 떠나 수습 수녀 시절의 경건하고 순수했던 내면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가스 수녀는 다른 수녀보다 조금 더 에드리언을 향한 기쁨과 행복이 클 뿐이 아니겠는가. 설혹 그녀가 에드리언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경계할 정도로 신중하고 차분하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고, 사랑하고 공감해줄 준비가 된 하늘에 계신 우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마음과 이 마음이 혹시 다르지는 않을까 걱정돼요.” (P.62)

 

원장 수녀가 에드리언의 방문을 금지한 까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에드리언을 향한 아가스 수녀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였음을 감지한 것일까. 에드리언이 매년 몰고 오는 세속의 바람과 물욕이 수녀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가스 수녀의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었다. 그렇다면 에드리언이 차마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P.72)던 것은 나중의 까닭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해설에서는 이 작품을 동성애 코드로 풀이하고 있는데, 작중에는 동성애 관련한 직간접적인 묘사와 기술이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과거 수습 수녀였던 에드리언의 수녀원 정례 방문과, 그녀를 환영하는 수녀들, 특히 아가스 수녀의 기쁨과 행복을 동성애라는 한 마디 정의와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는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은 케이트 쇼팽의 작품세계를 좀 더 알아보기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느낌을 먼저 언급하면, 여전한 반전의 미학이 인상적이다. 독자는 어지간하면 작품의 결말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반전의 결과는 여성의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이어진다. 신뢰, 사랑, 부부, 의지 등 보편적 인간성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여성성의 맥락에서 어떤 형태를 보이는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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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반란 - 갈라 드레스/ 뉴잉글랜드 수녀/ 엇나간 선행 얼리퍼플오키드 3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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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엄마의 반란

갈라 드레스

뉴잉글랜드 수녀

엇나간 선행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를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나의 궁금증이 애호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엄마의 반란>을 보자. 남편의 전횡을 참다못한 엄마가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는 유쾌한 설정을 다루고 있다. 남편에 비해 여러모로 엄마가 고매하고 탁월한 인격의 소지자임이 작품 속에 여러 번 되풀이되어 소개된다.

 

코와 입으로 이어지는 선은 순해 보였지만, 남자에게 고정된 눈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 살려는 기개가 엿보였다. (P.8)

 

그런 엄마이지만 남편을 위하고 순종적인 삶을 지향한다. 화가 난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묵묵히 파이를 굽는 엄마의 모습이 눈물겹다. 남편이 아내에게 한 약속, 즉 새집을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열심히 불필요한 창고를 지어대면서까지 새집을 짓지 않는 건 솔직히 억지에 가까운 설정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당당하지도 않으며 그저 언급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맙소사, 여보. 난 당신이 이 정도로 강한 사람인 줄 몰랐어.” 애덤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P.40)

 

결말은 허탈할 정도다. 아내의 과감한 시도에 기가 꺾인 남편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이다. 아내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깔보던 한심한 남편의 비참함이란.

 

<갈라 드레스>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중산층 신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노처녀 자매. 사교모임에 나갈 때 입을 드레스가 한 벌밖에 없어 둘이 동시에 나가지 못하고 한 명만 교대로 드레스를 수선해 입는 장면은 짠하기조차 하다. 여적여란 말처럼 그녀들의 친구이자 시샘하는 마틸다로 인해 그녀들은 곤경에 처한다. 독자는 주인공을 동정하는 만큼 마틸다를 미워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그녀를 동정할 수밖에 없다. 낮은 신분의 그녀는 모임에 나갈 드레스조차 갖고 있지 못한 처지이므로. 우연의 도움으로 두 벌의 드레스를 갖게 된 자매가 자신의 헌 드레스를 마틸다에게 주는 장면에서 아마도 여자들만 절절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엇나간 선행>도 역시 자매가 등장하는데, 둘 다 늙은 데다 해리엇은 귀가 먹고 관절염이 있는 데다, 샬럿은 눈이 먼 처지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자신들의 낡은 집에서 어떻게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나가는 그들, 물론 가끔씩 마을주민이 그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만 그네들은 결코 그것을 바라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섀턱 자매가 주민들의 선행을 거부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상으로 여건 좋은 양로원에 들어갔지만 그네들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힘겹게 탈주하고 자신들의 옛집으로 돌아간다. 언뜻 딱하고 무모해 보이는 그네들이지만 샬럿이 자주 하는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주민들의 선행이 자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한 것임도 알게 해준다.

 

! 해리어, 여기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땐 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배추나, 채소에 싼 돼지고기를 먹으면 빛이 느껴질 텐데!” 샬럿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P.115)

 

<뉴잉글랜드 수녀>는 작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만큼 벌써 세 번째 읽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감흥이 남다르다. 루이자와 같은 생각을 품는다면 이 세상에 결혼은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결혼이란 남남의 결합이니만큼 다소간 불편과 양보와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사랑과 정 아니겠는가. 루이자는 스스로를 수녀처럼 만들었다. 루이자를 향한 작가의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판단하기 어렵다.

 

루이자는 세속과 격리되지는 않았으나 수녀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그리며 기도하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P.97)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녀가 확실히 여성주의 작가라는 사실이다. 수록작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여성들의 주체적 삶을 강조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다만 남성과 여성의 대비에 치중하지 않으면서 <갈라 드레스><엇나간 선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여성,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 삶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점이 여타 여성주의 작가와는 구별된다.

 

윌킨스 프리먼의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전혀 진부하지 않으며 하나하나가 뜻밖의 설정과 결말을 지니고 있어 읽는 재미와 동시에 곱씹을 만한 뒷맛을 남긴다. 천만의외로 그녀의 더 많은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이 출간되어 있으니 놓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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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하나
윌라 캐더 지음, 정선우 옮김 / 아토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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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지방주의 작가로 알려진 윌라 캐더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작품이다. 네브래스카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지역색이 두드러진 대표작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지역을 배경 삼는다. 주인공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나의 안토니아><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 또는 그의 관구 내에서 삶을 꾸려나간다. 더 넓고 더 큰 꿈을 향해 지역을 떠나고자 하는 이상을 품지 않는다. <우리 중 하나>의 클로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고향에서의 삶에서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기에 유럽의 전쟁터에 자원한다.

 

주인공 클로드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양분된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를 체격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범하거나 낮은 수준으로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가 주립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만 거기에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신학대학에 보내는 판단이 그렇다. 어머니 휠러 부인은 모순적이다. 그녀는 클로드의 마음속에 가진 한 가닥 불꽃의 존재는 의식하지만, 그것의 의미랄까 중요성은 둔감하다. 기독교에 푹 빠져 있는 그녀의 정신세계는 종교와 남편의 의사 양쪽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뿐 자신의 독자적 판단은 거의 없다.

 

반면, 가족이 아닌 주변인들은 클로드를 높이 평가한다. 주립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 부인인 에를리히 부인과 그녀의 사촌 슈뢰더-사츠는 클로드가 완벽한 사윗감”(P.64)이며, 결혼시킬 딸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글래디스는 이니드보다도 클로드의 가치를 더 높이 알아차린다. 그녀는 클로드가 이니드와 결혼함으로써 다른 많은 남자처럼 생활의 함정에 빠져버릴 것을 우려한다. 자기 형이 글래디스를 염두에 두지만 않았더라도 클로드는 글래디스와 결합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며, 이때 그의 미래가 어찌 변했을지 알 수 없다.

 

보람 없고 평범한 농장일, 괴로운 침묵을 안겨주는 가족,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속에 클로드는 괴로워한다. 자신에게 내재한 발전과 성취의 욕구, 인생에서 뭔가 의미 있고 중대한 것을 찾으려는 욕망에 그는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래? 난 가끔 딱 한 번뿐인 인생에 엄청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아.” (P.56)

난 아직 만족감을 주는 일을 한 적이 없어. 나도 분명히 뭔가 잘할 텐데.” (P.140)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시도인 이니드와의 결혼도 행복하지 못하다. 존중과 공경을 하지만 결코 애정은 없는 두 사람의 관계. 게다가 이니드는 머나먼 타지에 기독교 전도를 하겠다는 강렬한 꿈을 품고 끝내 언니를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난다. 이후 그녀는 클로드의 기억 속에 단 한 번 나타날 뿐 더 이상의 존재감을 보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방관하던 미국은 마침내 참전을 결정한다. 클로드는 망설임 없이 군입대를 자원한다. 답답한 현실 탈출과 삶의 의미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4장부터의 후반부는 전쟁소설에 해당한다. 미군을 프랑스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항해 장면, 나름대로 저마다의 이상과 모험을 꿈꾸며 지원한 각 지방의 여러 청춘. 열악한 선상 생활에서 질병으로 미처 시도조차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들. 그 속에서도 클로드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옳은 선택을 하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마치 세상이 계속 커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자신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 같았다. 다른 동료들이 병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배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302)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여타의 반전문학과는 궤를 달리한다.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레마르크와 달리 캐더는 전쟁의 잔혹감과 무의미함을 기술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클로드와 게르하르트는 진지한 우정을 쌓아가며, 수녀원 터에서 적십자 활동을 하는 올리브와의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삶의 행복과 슬픔을 깨닫게 한다. 클로드의 깨달음은 차라리 삶의 달관과 해탈에 가깝다. 인류사적 거대 인식에 도달한 듯하다.

 

이상은 구시대적이고, 아름답지만 무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진정한 인간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는 운명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P.408)

 

임시 중대장이 된 클로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버텨내고 매우 위험한 진지를 사수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 클로드. 강력한 포격과 무자비한 총격 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지켜내리라 다짐한다. 끝내 그는 전우들을 향해 공허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인간의 최대 공포인 죽음을 초월한 행위는 독자에게 언제나 감동적인 전쟁 서사에 해당한다.

 

코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만 느꼈다. 자신이 이 훌륭한 사람들을 지휘했다는 것을. 데이비드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예상한 그들에게 지원을 왔고, 그들은 모두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죽기 전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순 없었다. (P.442)

 

실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작가이기에 전쟁과 전투의 생생한 묘사와 박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전쟁 속 인물과 전투는 다른 의미에서 관념적이고 사색적이다. 비난조가 아니라 그 속에서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이 찾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셈이다. 그의 삶과 인식이 밟아온 길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는 잘못된 길을 따라가서 귀중한 시간을 버렸고, 불행을 충분히 목격했지만, 마침내 올바른 길로 돌아왔고, 그 누구도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P.302)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23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캐더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하기엔 논란이 있는 작품임에도 그녀에게 수상의 영예가 부여된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지닌 전쟁 속 주인공의 긍정적 지향성에 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전으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애국심 고취와 전쟁에서 삶의 의의를 발견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이야말로 미국 사회가 바라 마지않던 인물상과 주제 의식 아니겠는가.

 

클로드가 단연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여러 주변 인물의 거취도 궁금하다. 작중에서 동생에게 그토록 경멸받는 베일리스는 어찌 살고 있을까. 형 클로드에게 자극받은 랄프의 삶은 어찌 변했을지. 중국에 간 이니드는 행복할까, 정년 클로드를 그리는 마음이 일도 없는가. 유일하게 클로드의 가치를 알아차린 글래디스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에를리히 부인네 가족의 그것과 함께 매우 궁금증을 자아낸다. 클로드를 잃은 휠러 부인과 프랑스에서 고군분투하는 올리브 쿠르시는 어떤가 등등.

 

워낙 좋아하는 작가의 대표작이지만, 솔직히 읽을지 말지 고민하였다. 워낙에 번역 품질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아서였다. 캐더의 대표작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 한번 부딪쳐 보자는 투쟁심, 어찌 되었든 국내 초역인데 뛰어난 후속 번역본을 언제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 등이 겹쳐 그럼에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읽기 잘하였다는 것. 지적대로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점이 두드러지며, 이따금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단락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글 분위기, 작가가 지향하는 작품의 성격 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적어도 일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견해다, 다만 구입 여부는 신중하도록.

 

이 번역본에서 도저히 요령부득한 대목이 있어 참고 차원에서 소개한다.

 

그들이 프랭크포트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글래디스는 클로드의 미적 대리인이었다. 남자가 너무 깨끗하거나, 옷차림과 예의범절을 따지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점에서 나무랄 데 없는 소녀를 뽑아 같이 라틴어를 공부하고 실험을 한다면, 그녀의 개인적인 매력은 전부 그의 공로였다. (P.113)

 

[로이스]는 자신이 클로드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방대한 경험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육체적인 비참함처럼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곳에서 고군분투했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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