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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ㅣ 셰익스피어 전집 33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소네트라는 시 형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당 작품은 처음 읽는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엄격한 운율 구성과 특정 구조를 가진 14행의 시”(P.164) 유형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었던 듯하며 잉글랜드식 소네트의 대표 시인이 바로 셰익스피어다. 그의 소네트는 모두 154편이 전한다.
세 개의 4행과 2행으로 귀결되며 「abab cdcd efef gg」의 운율의 14행 연구시는 16세기에 셰익스피어식 소네트라고 불리며 이탈리아식-페트라르카식과 대별되는 소네트의 대상과 표현방식으로 보급되었다. (P.166)
당연히 번역과정을 거치므로 원무의 운율 구성은 눈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14행의 구조를 외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의 소네트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주로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체로 이해에 어려운 편은 아니다. 순서대로 읽어나가다 보면 개개의 시편이 독립적이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한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중년 남성 시인과 여자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남청년의 사랑은 언뜻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시인의 사랑의 감정 서술과 묘사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애틋하여 남녀 간 사랑의 감정과 밀도를 능가할 정도다.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양자 간의 사랑은 평탄하지 않게 마련이다. 오해와 서운함이 켜켜이 쌓이면 갈등으로 증폭되며 분노와 미움이 시너지 화하여 회복할 수 없는 다툼과 감정의 벽이 생기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 소네트집에서는 그러한 감정의 파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독자를 더욱 절절히 공감하게끔 하고 있다.
시인은 청년의 빼어난 미모가 너무나 아깝다. 그가 나이 들면 미모도 스러지게 마련이며 그가 죽으면 다시는 재생 불가능하다. 시인은 청년에게 결혼하라고 되풀이 권유한다. 청년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인물의 권리이자 의무는 자손을 후대에 남기는 것이라고. 소네트 1편에서 17편까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장미가 죽지 아니하도록 함은
아주 아름다운 사람들이 번식하도록 소망하는 지라,
그러나 나이든 자가 때가 되어 죽은들,
젊은 자손이 그의 모습을 이어받으리. (P.9, 1편)
아무래도 미남청년은 결혼에는 아직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결혼 권유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시인은 자신이 직접 글로써 청년의 미모를 증거하여 후대에 남기려는 소망을 품는다. 그래야 후인들도 미남청년 같은 유일무이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소유자가 실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제아무리 뛰어나게 묘사하더라도 문장은 한계가 있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시인이 그런 노력을 자신의 필생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소네트 18편부터 이후에 해당하는 시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리석도, 왕후의 금빛 찬란한 기념비도
이 힘찬 시보다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대는 오욕된 세월에 더럽혀진,
씻지도 않은 비석보다는, 이 시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리라. (P.63, 55편)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일편단심 사랑은 지칠 줄 모르며 그에 대한 찬가는 제아무리 읊어도 지겨워할 줄 모른다. 시인은 그에 대한 사랑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서양 사회에서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끝없는 종교적 찬미와 여성을 향한 세속적 예찬만이 정상적으로 용납된다고 볼 때 소네트 시인의 미남청년 숭배는 양자의 열정과도 흡사하다.
나의 사랑을 우상숭배라 부르지 마오.
나의 애인을 우상시한다고 하지 마오.
나의 노래와 찬사는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에게,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P.113, 105편)
두 사람의 사랑 관계에 변화가 발생한다. 시인의 시재(詩才)를 능가하는 더욱 뛰어난 새로운 시인이 등장하여 미남청년을 향한 찬미가를 짓기 시작한다. 미남청년도 보다 새로운 시인의 신선미와 작법에 마음이 쏠리는 모양이다. 시인은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씁쓸한 감정 상태에 놓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신이 봐도 새로운 시인은 한층 탁월하므로. 자괴감에 빠진 그는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다, 다만 한가지는 밝히고. 자신이야말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 진실함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바탕을 두고 미남청년을 향한 시를 지었음을 자부한다고. 따라서 자신을 멀리하길 원한다면 근처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껏 미워하라고 자신은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을 지닐 것이라고 하며.
이제는 나의 우아한 시는 쇠퇴하리니,
병든 나의 시신은 다른 자에게 가버렸다오.
사랑하는 임, 그대의 사랑스러움을 주제로 하여
보다 훌륭한 시인이 맡아서 수고할 일이오. (P.87, 79편)
어디 미남청년에게만 일이 생기랴. 시인에게도 새로운 애인이 생긴다. 그녀는 미남청년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하양과 검정, 밝음과 어두움, 정신과 육체, 성(聖)과 색(色) 등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의 변심에 다소 지친 시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버린다. 시인의 맑은 이성과 올바름을 지향하는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이끌림에 저항도 거부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빠져든다. 타락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지금껏 시인의 가치관과는 배치되는 그녀의 존재는 시인의 상념에 계속적으로 물결을 일으킴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매혹되었음도.
옛날에는 검은 빛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하여 미라고도 부르지 않았노라.
그러나 지금은 검은 것이 미의 정통 상속자이니,
미는 서자라는 오명으로 비방되노라. (P.135, 127편)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과 시인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전환하는 인물인 동시에 양자 관계를 삼자 관계로 심화, 확대, 변질시키는 존재다. 검은 여인은 엄격한 도덕률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일상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많은 남자를 일거에 매혹할 수 있는 강력한 페로몬과 같은 마력을 지닌다. 거기에 미남청년도 빠져들고 이를 바라보는 시인은 안타까움과 무력감에 좌절한다. 이런 내용이 소네트 127편에서 거의 끝 편에 해당하는 152편까지 담겨있다. 검은 여인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실체적 여성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이를 상징적 은유로 봐서 인간 내심의 선과 악 개념으로 접근할 수도 있으려니.
내게 애인이 둘 있으니, 위안과 절망이오며,
두 요정인 듯 언제나 나에게 소곤거리노라.
더 나은 천사는 수려한 남자요.
더 나쁜 요정은 빛이 검은 여자라. (P.152, 144편)
영어 원작을 읊조리면 분명 이상의 내용이 운율적 외형과 부합하여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문에 의지하는 제한된 접근을 통해서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갖는 매력의 가치는 절멸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40편에 가까운 희곡이나, 여러 시 작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제재와 표현을 다루지 않았다. 그의 희곡은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해서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며, 소네트와 다른 시들도 분명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야기체로 풀어놓거나 구술하기 용이한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으리으리한 후광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그의 작품 완독을 마치는 소감이다.
※ 부록
셰익스피어 전집에 따라서는 몇 편의 시를 추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최종철(민음사)은 <불사조와 산비둘기>를, 신상웅(동서문화사)은 <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 <불사조와 산비둘기>를, 이상섭(문학과지성사)은 <불사조와 비둘기>, <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간과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에 이상섭 번역본으로 세 편의 시를 읽는다.
<불사조와 (산)비둘기>는 새를 전면에 내세운 우화시다. 4행 13연의 본문과, 3행 5연의 애가로 구성되었는데, 한 쌍의 연인을 불사조와 비둘기에 비유하여 그들의 죽음을 사랑과 정절의 죽음으로서 애도한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진실한 결합의 한 쌍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것조차 고귀한 정절로 기리고 있는데, 작품 전반적으로 셰익스피어로서는 예외적으로 형이상적 뉘앙스를 풍긴다.
<연인의 탄식>은 7행 47연의 제법 긴 분량의 이야기 시다. 미모의 청년에 굴복하여 애정을 바쳤으나 결국 배반당한 처녀가 애인의 변심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롭기조차 하다. 우월한 외모와 절묘한 어조와 그럴듯한 연기로 여러 처녀, 심지어는 수녀의 정조마저 후리는 바람둥이 청년의 거짓된 언행을 비난하고 처녀는 복수를 다짐한다. 압권은 마지막 연의 마지막 단락이다. 아무리 원망하고 미움이 가득하더라도 청년에 대한 연정의 끈을 처녀는 놓지 못한다. 마치 나쁜 남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자를 보는 듯하다.
그 모든 꾸민 감정, 꾸어온 표정이
한번 속은 여자를 다시 속이고
뉘우치는 처녀를 또다시 망치겠죠.
<열정의 순례자>는 셰익스피어 단독의 창작이 아니다. 여러 편의 시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 자신의 작품은 물론 당대 몇몇 시인의 시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것도 순전한 창작보다는 소네트 중 일부, 희곡에 등장하는 소네트도 기꺼이 재수록하고 있다. 특히 비너스와 아도니스 이야기를 여러 편의 소네트로 삽입하고 있는데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련성과 보완성 측면에서 흥미롭다. 오히려 여기에서 표현의 대담성이 두드러진다.
조금 전에 보니까 잘생긴 청년이
이 숲에서 멧돼지한테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정말 끔찍하더라.
내 허벅지를 쳐다봐. 상처가 이쯤 되었어.
하면서 보여주니, 상처는 하나 이상이었다.
낯 붉힌 소년은 그녈 두고 달아났다.
‘여러 가지 가락에 맞춘 시편들’이라는 소제목에 딸린 여러 편의 시들은 해학미가 돋보인다. 여하튼 모두가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음은 공통이다. 마지막의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새들’과 ‘애가’는 <불사조와 산비둘기>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이 작품집은 수록작의 일관성보다는 다양성의 묘미를 즐기는 데 감상의의를 두어야 할 텐데 여전히 창작 배경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