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전 - 중국의 전설
선용 엮음, 홍의남 그림 / 신아출판사(SINA)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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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유명한 설화다. 일전에 중국 신화와 전설, 지괴소설에 관심을 가졌을 때 언급되었는데 의외로 국내에 번역본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도 시중 서점에서 백사전을 검색하면 학습만화를 제외하면 이 책이 유일하다. <중국 민간전설 백사전>은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데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백사전 연구 논문이다. 지금 이 책도 아동문학선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아쉬움이 있지만 원작을 대강이나마 맛본다는 측면에서 대안이 없다.

 

전생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여인으로 변신하여 은인의 아내가 되는 천년 묵은 흰 뱀 백소정. 허선은 아내의 도움으로 약국 종업원에서 당당한 약국 주인으로 변신하게 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 남았다. 정말 그럴까. 중국 설화에서 중대한 금기사항 중 하나는 요괴가 인간 세상에서 인간처럼 사는 일이다. 인간으로 변신한 요괴의 선과 악은 여기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하기에 어울려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교유는 세상 만물의 원리와 질서를 흩뜨리기에 엄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다.

 

백소정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너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우리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와서는 안 될 인간 세상으로 와서 괜한 근심거리를 만든 거야.” (P.135)

 

백소정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허선과 결혼하고 의원과 약방을 차려 병자를 구제하는 일체의 행위는 오로지 세상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의 소산이다. 그녀가 비록 요괴라고 하지만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례를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허선과 백소정은 이 이야기에서 오로지 선한 캐릭터로 존재한다. 백소정이 딱 한 번 세상을 뒤흔든 경우가 있는데, 법해 선사로부터 자신의 남편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존재의의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법해 선사와 천신들과, 백소정과 소청의 무리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이 전설의 기본 바탕은 매우 불교적이다. 백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천년 동안 수행을 한다는 설정 외에 법해 선사라는 지극히 도력이 높은 스님의 존재, 그것도 모자라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 등. 한편 도가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백소정의 정체를 처음으로 허선에게 일깨우는 도사, 의식을 잃은 허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소정이 영약을 구하려고 찾아가는 신선들이 사는 선산 등.

 

허선과 백소정이 대체로 점잖고 온화하며 수동적인 인물인 데 비해, 소청은 이야기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 인물이다. 푸른 뱀이 변신한 소청은 비록 도력에서는 백소정에 딸리지만 호수의 물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능력자다. 그녀가 허선과 백소정을 엮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지극정성이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화려한 언변에 뛰어난 재치를 겸비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하겠다.

 

언니, 설마 우리에게 며칠 더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있지. 그러나 인연이란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야. 만나야 하는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인가 또 만나게 될 거야!” (P.36)

 

편자도 그렇고 작중 인물들도 그러하고 인연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연은 불법의 종교적 의미로서도 중요하지만, 세속적 관점에서도 깊은 중요성을 지닌다. 허선과 백소정의 만남은 전생에서부터 예정된 인연이었고, 백소정과 소청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허선과 백소정의 결합은 인연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앞당긴 부작용으로 인해 법해 선사가 상황 정리에 나서게끔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분이 없다는 것입니까?”

있지요. 분명 연분은 있습니다만 그녀가 수행을 다 끝내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만나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니랍니다.” (P.157)

 

자체로서는 종교, 사랑, 그리고 환상이 결합한 흥미로운 전설이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정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관세음보살과 법해 선사는 시종일관 백소정의 잘못을 지적한다. 천년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수행을 도중에 파하고 인간 세상에 침입하였다고 말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흰 뱀인 백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천년이란 긴긴 시간을 엄격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수행 끝의 깨달음은 백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 책에서 관련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수행은 무조건적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를 중도에 깨는 것은 금기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 백소정이 남편과 아이와 영원히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단오절에 소청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 덕분에 허선은 백소정에게 웅황주를 마시게 할 기회를 얻는데, 소청이 숨어야 하는 연유는 이 책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은 영단 한 알을 꺼내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내가 한 번만 도와주지. 이 영단을 그에게 먹이면 바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 빨리 산속으로 되돌아가서 하던 수행을 계속 하여라.” (P.149)

 

백사전 전설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해피엔딩이다. 백사도 원래 수행으로 돌아가고, 청사 역시 수행의 길에 나선다. 법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계획을 품고 있다. 모두가 불도의 세계에 들어서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르다. 요괴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태를 떠나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냉혹하게 끊어버리는 종교의 냉혹함이 두드러진다. 천년 수행이 과연 백사의 자발적 의사인지 알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숨어버리려는 청사는 법해 선사에 잡혀 반강제적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허선의 의사에 관계없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생각을 품고 있다.

 

독서 대상을 아동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엮었기에 원작 전설의 풍요로운 원형이 얼마만큼 유지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백사전 전설의 줄거리와 중요 사건들이 대강이나마 들어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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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 밖을 나서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2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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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옛 지도를 들고 떠나는 걷기 여행 특강 2>라고 되어 있다. 전작인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의 후속작임을 강조하는 뜻이다. 이 책이 여타 답사 서적과 차별되는 지점은 지은이가 역사지리학자라는 데 있다. 역사와 지리, 내가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대표적인 두 영역이다. 양자의 결합이라면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저자는 후속작에서 서울 도성 밖을 나선다. 경계가 사대문을 벗어나 주변으로 확산하는 과정은 한양이 서울로 변하는 근현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서울의 근원이 사대문 안쪽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 서울의 실질적 중심부는 더는 아니다. 도성 밖의 면적과 거주하는 인구만 헤아려 보아도 서울 사람 대부분은 성 밖 주민들이다. 성 밖의 서울을 살펴볼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울은 넓다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서울의 역사적 변화과정은 공간적으로 넓어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넓어지면서 한양과 달라진 도시가 서울특별시입니다. (P.11)

 

천만 인구가 서울에 거주한다. 수도권이라 지칭하는 서울에 기대어 사는 인구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들은 서울의 역사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조선 시대 사대궁궐을 열거하고, 사대문의 이름을 언급할 줄 안다면 박식한 축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서울에는 25개 구가 있다-에 대해서는 아마 거의 모를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이미지라기보다 단순 거주와 재테크의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집을 바라보는 게 요즘 세태다. 자신이 임시로 머무는 공간에 굳이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

 

지리학의 관점, 공간과 장소의 맥락에서 서울을 나누어 봅시다. 저는 서울을 네 영역으로 나눕니다. 사대문을 기준으로 한 도성 안, 한성부에 포함되었지만 도성 밖에 해당하는 지역, 한강, 현재 서울특별시에 포함되는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P.20)

 

서울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독자에게 친밀하게 소개해주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내가 사는 동네가 조선 시대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합집산하다가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저자는 차분한 어조로 들려준다. 일종의 향토사적 접근이 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조선 시대의 한양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서울은 매우 거대한 도시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경기도는 계속 축소되었다. 그게 아주 오래전이라 아니라 좀 멀게는 1960년대에서 가깝게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서울 끄트머리의 동네는 대부분 최근에야 특별시에 편입된 곳이다. 한 끗 차이의 운이 서울과 서울 아닌 곳의 경계가 되었다.

 

25개구 이름이 서울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서울이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는 데는 구 명칭과, 언제 이 구가 생겼는지, 서울의 어느 방향에 있는지, 그 구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P.26-27)

 

단순히 말로만 설명하면 와닿지도 않고 지루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지도를 활용한다. 해당 지역을 소개할 때면 서두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 도성도, 지방 지도 등을 활용하여 옛날의 지역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현대 지도와 사진 자료를 곁들여 시대적 간극을 비교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공간적 인식을 일깨운다.

 

아무래도 지명에 얽힌 유래를 비로소 알게 되고 새삼 머리를 끄덕이며 당대와 현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비교할 때 흥미로움이 더 커진다. 몇 가지를 언급하면 경마장이 과천으로 옮겨지기 전에 뚝섬에 있었던 까닭이 우선 그러하다.

 

중랑천 동쪽의 뚝섬 일대에 많은 목장이 있었습니다. 옛 문헌에 양주 살곶이 목장이라고 적힌 곳이 현재의 중랑천변 뚝섬 일대입니다. 한양대에서 건국대 사이에 옛 목마장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경마장이 과천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경마장은 서울숲에 있었습니다. (P.84)

 

성동구 지역에 응봉이란 지명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이 책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뚝섬과 아차산 일대는 조선시대에 왕의 사냥터 역할도 하였습니다. 도성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숲과 산이 있으니, 왕이 매사냥하기에 적합했을 듯합니다. 당시 최고의 전통적인 여가는 매사냥이었습니다. 응봉, 매봉 같은 지명은 매사냥과 관련이 있습니다. (P.86)

 

경기도 시흥시와 서울시 금천구의 시흥동을 계속 헷갈렸다. 무슨 인접한 지명을 혼동하게끔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는지 한심해한 적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금천과 시흥은 원래 같이 지역이었는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라지면서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동작구에 보라매공원과 보라매병원이 있다. 볼 때마다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역시도 이 책을 통해서 유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의도공원의 전신이 국제공항이었다가 공군기지였으며, 보라매공원에 공군사관학교가 있었다는 사실도. 역시 뭐든지 사유는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알면 흥미롭고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잊힌 옛 서울의 흔적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저자도(楮子島)를 알려준다. 이름만 섬인 뚝섬의 동남쪽에 있는 진짜 섬이었는데, 강남개발 당시 이 섬의 흙을 퍼서 사용했기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비운의 섬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불가피하였겠지만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그 섬이 남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하고 아쉽다.

 

한양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용산호가 있다. 옛날에는 한강의 본줄기가 남쪽 기슭 밑으로 흘러가고 또 한줄기는 북쪽 기슭 밑으로 돌아 들어와서 십리나 되는 긴 호수였다. 서쪽으로는 염창의 모래 언덕이 물을 막아 물이 흐르지 않아 그 안에서 연()이 자랐다.” (P.120)

 

<택리지>의 기록이다. 용산 지역에 길다란 호수가 있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한강의 물길이 이렇게 큰 변화가 있었다니 말이다. 한강도 황하만큼이나 다스리기 어려운 존재였나 보다. 석촌호수가 그걸 알려준다. 나는 석촌호수가 완전한 인공호수인 줄 알고 있었다. 1895년대의 잠실 인근 지도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오늘날의 한강 흐름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는 위쪽으로 더 큰 물길이 지나갑니다. 이 물길이 현재 잠실 북쪽으로 지나는 한강입니다. 옛 물길이었던 곳이 지금의 석촌호수입니다. 옛 물길은 남쪽으로 흘렀기에 잠실은 한강 북쪽의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P.197-198)

 

원래 섬이었던 잠실은 1970년대 한강 개발을 통해 내륙이 되었다고 하며, 그때 막은 물길이 석촌호수였다고 한다. 불과 수십 년 후 잠실과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을 들고 서울 곳곳을 걷고 답사하기는 무리다. 도성 안과 비교하면 걷기에 광활한 지역이다. 그저 일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정도만 둘러봐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우연히 해당 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도 의의가 충분하다고 본다. 저자의 말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 없으며, 옛날의 기억에만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대문 밖이 예전에는 모두 경기도 양주였다는 사실, 오늘날 강남은 경기도 과천과 광주에 속한 지역이었다는 사실 등이다. 한양에서 서울로의 확장은 우리나라에 자본주의가 확산하고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기와 맞물린다. 서울과 비서울, 강남과 비강남으로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데 과거에는 한 지역이었다는 공유 기억이 지역 간 갈등 완화에 이바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옛 지도를 보고 옛 추억에 잠겨 회고적 관념으로 퇴행하지 않는 동시에 서울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유의미하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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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셰익스피어 전집 33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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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라는 시 형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당 작품은 처음 읽는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엄격한 운율 구성과 특정 구조를 가진 14행의 시”(P.164) 유형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었던 듯하며 잉글랜드식 소네트의 대표 시인이 바로 셰익스피어다. 그의 소네트는 모두 154편이 전한다.

 

세 개의 4행과 2행으로 귀결되며 abab cdcd efef gg의 운율의 14행 연구시는 16세기에 셰익스피어식 소네트라고 불리며 이탈리아식-페트라르카식과 대별되는 소네트의 대상과 표현방식으로 보급되었다. (P.166)

 

당연히 번역과정을 거치므로 원무의 운율 구성은 눈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14행의 구조를 외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의 소네트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주로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체로 이해에 어려운 편은 아니다. 순서대로 읽어나가다 보면 개개의 시편이 독립적이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한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중년 남성 시인과 여자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남청년의 사랑은 언뜻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시인의 사랑의 감정 서술과 묘사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애틋하여 남녀 간 사랑의 감정과 밀도를 능가할 정도다.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양자 간의 사랑은 평탄하지 않게 마련이다. 오해와 서운함이 켜켜이 쌓이면 갈등으로 증폭되며 분노와 미움이 시너지 화하여 회복할 수 없는 다툼과 감정의 벽이 생기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 소네트집에서는 그러한 감정의 파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독자를 더욱 절절히 공감하게끔 하고 있다.

 

시인은 청년의 빼어난 미모가 너무나 아깝다. 그가 나이 들면 미모도 스러지게 마련이며 그가 죽으면 다시는 재생 불가능하다. 시인은 청년에게 결혼하라고 되풀이 권유한다. 청년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인물의 권리이자 의무는 자손을 후대에 남기는 것이라고. 소네트 1편에서 17편까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장미가 죽지 아니하도록 함은

아주 아름다운 사람들이 번식하도록 소망하는 지라,

그러나 나이든 자가 때가 되어 죽은들,

젊은 자손이 그의 모습을 이어받으리. (P.9, 1)

 

아무래도 미남청년은 결혼에는 아직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결혼 권유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시인은 자신이 직접 글로써 청년의 미모를 증거하여 후대에 남기려는 소망을 품는다. 그래야 후인들도 미남청년 같은 유일무이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소유자가 실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제아무리 뛰어나게 묘사하더라도 문장은 한계가 있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시인이 그런 노력을 자신의 필생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소네트 18편부터 이후에 해당하는 시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리석도, 왕후의 금빛 찬란한 기념비도

이 힘찬 시보다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대는 오욕된 세월에 더럽혀진,

씻지도 않은 비석보다는, 이 시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리라. (P.63, 55)

 

미남청년을 향한 시인의 일편단심 사랑은 지칠 줄 모르며 그에 대한 찬가는 제아무리 읊어도 지겨워할 줄 모른다. 시인은 그에 대한 사랑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서양 사회에서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끝없는 종교적 찬미와 여성을 향한 세속적 예찬만이 정상적으로 용납된다고 볼 때 소네트 시인의 미남청년 숭배는 양자의 열정과도 흡사하다.

 

나의 사랑을 우상숭배라 부르지 마오.

나의 애인을 우상시한다고 하지 마오.

나의 노래와 찬사는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에게,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P.113, 105)

 

두 사람의 사랑 관계에 변화가 발생한다. 시인의 시재(詩才)를 능가하는 더욱 뛰어난 새로운 시인이 등장하여 미남청년을 향한 찬미가를 짓기 시작한다. 미남청년도 보다 새로운 시인의 신선미와 작법에 마음이 쏠리는 모양이다. 시인은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씁쓸한 감정 상태에 놓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신이 봐도 새로운 시인은 한층 탁월하므로. 자괴감에 빠진 그는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다, 다만 한가지는 밝히고. 자신이야말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 진실함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바탕을 두고 미남청년을 향한 시를 지었음을 자부한다고. 따라서 자신을 멀리하길 원한다면 근처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껏 미워하라고 자신은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을 지닐 것이라고 하며.

 

이제는 나의 우아한 시는 쇠퇴하리니,

병든 나의 시신은 다른 자에게 가버렸다오.

사랑하는 임, 그대의 사랑스러움을 주제로 하여

보다 훌륭한 시인이 맡아서 수고할 일이오. (P.87, 79)

 

어디 미남청년에게만 일이 생기랴. 시인에게도 새로운 애인이 생긴다. 그녀는 미남청년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하양과 검정, 밝음과 어두움, 정신과 육체, ()과 색() 등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의 변심에 다소 지친 시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그를 사로잡아 버린다. 시인의 맑은 이성과 올바름을 지향하는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이끌림에 저항도 거부도 하지 못한 채 그는 빠져든다. 타락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지금껏 시인의 가치관과는 배치되는 그녀의 존재는 시인의 상념에 계속적으로 물결을 일으킴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매혹되었음도.

 

옛날에는 검은 빛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하여 미라고도 부르지 않았노라.

그러나 지금은 검은 것이 미의 정통 상속자이니,

미는 서자라는 오명으로 비방되노라. (P.135, 127)

 

검은 여인은 미남청년과 시인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전환하는 인물인 동시에 양자 관계를 삼자 관계로 심화, 확대, 변질시키는 존재다. 검은 여인은 엄격한 도덕률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일상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많은 남자를 일거에 매혹할 수 있는 강력한 페로몬과 같은 마력을 지닌다. 거기에 미남청년도 빠져들고 이를 바라보는 시인은 안타까움과 무력감에 좌절한다. 이런 내용이 소네트 127편에서 거의 끝 편에 해당하는 152편까지 담겨있다. 검은 여인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실체적 여성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이를 상징적 은유로 봐서 인간 내심의 선과 악 개념으로 접근할 수도 있으려니.

 

내게 애인이 둘 있으니, 위안과 절망이오며,

두 요정인 듯 언제나 나에게 소곤거리노라.

더 나은 천사는 수려한 남자요.

더 나쁜 요정은 빛이 검은 여자라. (P.152, 144)

 

영어 원작을 읊조리면 분명 이상의 내용이 운율적 외형과 부합하여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문에 의지하는 제한된 접근을 통해서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갖는 매력의 가치는 절멸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40편에 가까운 희곡이나, 여러 시 작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제재와 표현을 다루지 않았다. 그의 희곡은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해서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며, 소네트와 다른 시들도 분명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야기체로 풀어놓거나 구술하기 용이한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으리으리한 후광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그의 작품 완독을 마치는 소감이다.

 

 

부록

셰익스피어 전집에 따라서는 몇 편의 시를 추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최종철(민음사)<불사조와 산비둘기>, 신상웅(동서문화사)<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 <불사조와 산비둘기>, 이상섭(문학과지성사)<불사조와 비둘기>, <연인의 탄식>, <열정의 순례자>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간과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에 이상섭 번역본으로 세 편의 시를 읽는다.

 

<불사조와 ()비둘기>는 새를 전면에 내세운 우화시다. 413연의 본문과, 35연의 애가로 구성되었는데, 한 쌍의 연인을 불사조와 비둘기에 비유하여 그들의 죽음을 사랑과 정절의 죽음으로서 애도한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진실한 결합의 한 쌍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것조차 고귀한 정절로 기리고 있는데, 작품 전반적으로 셰익스피어로서는 예외적으로 형이상적 뉘앙스를 풍긴다.

 

<연인의 탄식>747연의 제법 긴 분량의 이야기 시다. 미모의 청년에 굴복하여 애정을 바쳤으나 결국 배반당한 처녀가 애인의 변심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롭기조차 하다. 우월한 외모와 절묘한 어조와 그럴듯한 연기로 여러 처녀, 심지어는 수녀의 정조마저 후리는 바람둥이 청년의 거짓된 언행을 비난하고 처녀는 복수를 다짐한다. 압권은 마지막 연의 마지막 단락이다. 아무리 원망하고 미움이 가득하더라도 청년에 대한 연정의 끈을 처녀는 놓지 못한다. 마치 나쁜 남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자를 보는 듯하다.

 

그 모든 꾸민 감정, 꾸어온 표정이

한번 속은 여자를 다시 속이고

뉘우치는 처녀를 또다시 망치겠죠.

 

<열정의 순례자>는 셰익스피어 단독의 창작이 아니다. 여러 편의 시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 자신의 작품은 물론 당대 몇몇 시인의 시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것도 순전한 창작보다는 소네트 중 일부, 희곡에 등장하는 소네트도 기꺼이 재수록하고 있다. 특히 비너스와 아도니스 이야기를 여러 편의 소네트로 삽입하고 있는데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련성과 보완성 측면에서 흥미롭다. 오히려 여기에서 표현의 대담성이 두드러진다.

 

조금 전에 보니까 잘생긴 청년이

이 숲에서 멧돼지한테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정말 끔찍하더라.

내 허벅지를 쳐다봐. 상처가 이쯤 되었어.

하면서 보여주니, 상처는 하나 이상이었다.

낯 붉힌 소년은 그녈 두고 달아났다.

 

여러 가지 가락에 맞춘 시편들이라는 소제목에 딸린 여러 편의 시들은 해학미가 돋보인다. 여하튼 모두가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음은 공통이다. 마지막의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새들애가<불사조와 산비둘기>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이 작품집은 수록작의 일관성보다는 다양성의 묘미를 즐기는 데 감상의의를 두어야 할 텐데 여전히 창작 배경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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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와 아도니스 셰익스피어 전집 33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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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리스의 능욕>이 고대 로마의 전설적 역사에 기반하였다면,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지은 1,194행의 장편 이야기 시다. 비너스[아프로디테]과 그의 젊은 연인 아도니스의 사랑, 그리고 아도니스의 불행한 죽음과 꽃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시인이 원작에 커다란 변형을 주어 이야기 전체의 틀을 뒤바꿔 놓았다는 사실이다. 애정이 넘치는 연인 사이였던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계가 여기서는 연인이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처지다. 비너스는 끊임없이 아도니스에게 구애하지만 아도니스는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고 달아나려고 애쓴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신이지만 욕정에 무관심한 아도니스의 눈에는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훼방꾼. 아마 평범한 인간 여성이었다면 분연히 떨치고 가버렸겠지만, 여신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도니스가 딱할 따름이다.

 

시인은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되묻고자 한다. 아도니스가 아직 어려서 사랑을 모른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가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는 까닭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과 비너스가 요구하는 사랑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해서다.

 

비너스는 미의 여신인 동시에 사랑의 여신인데, 여신이 대변하는 사랑은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에 가깝다. 비너스는 남녀의 짝을 짓고 성욕을 통해 출산을 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여신에게 있어 고매한 정신적 사랑은 무의미하다. 육체적 교접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비너스의 본질이다. 비너스가 집요할 정도로 아도니스를 쓰다듬고 껴안으며 열렬한 키스를 갈구하는 연유가 이 때문이다.

 

그녀는 아도니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는 얼굴을 찡그려 / 꾸짖기 시작하나, 그녀는 곧 입술을 포개고 / 키스로 사이사이에 욕정에 허덕이며 말하니, (P.14)

 

참을 수 없는 격정은 그녀의 하소연을 막으며, / 끓어오르는 욕정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오. (P.29)

 

여신이 아도니스에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사랑은 가벼운 것이고 아름다움의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등 정신적 교감보다는 육체적 의미를 중시한다. 특히 아도니스를 사슴에, 자신을 사슴동산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거침없이 구사한다.

 

여신과 아도니스의 극명한 시각 차이는 고삐를 끊고 발정 난 암말을 쫓아 달려 나간 준마를 바라보는 장면에 있다. 말을 잃어버려 친구들과 사냥에 나설 수 없게 된 아도니스는 짜증이 날 뿐이다. 반면 본능으로서 욕정의 힘의 위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므로 비너스의 눈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신은 아도니스에게 오히려 준마에게서 배우라고 간청할 정도다. 이에 대한 소년은 반응은 냉담할 따름이다. 여신의 뜨거운 구애에 그는 차갑고 멸시하듯 응대하며 경멸의 웃음을 짓는다. 여기서 비너스의 사랑과 아도니스의 사랑은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입술은 정복자며, 소년의 입술은 굴복하니, / 승리로 오만한 자가 바라는 바 몸값을 치르네. / 그녀의 독수리 같은 탐욕은 한껏 몸값을 높이며, / 그의 입술의 풍요한 보화를 바닥까지 빨아들이네. (P.56)

 

비너스의 연기에 깜빡 속아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여신은 소년을 품에 안고 입술을 탐닉하는 데 성공한다. 정복의 기쁨에 한껏 오만해진 여신을 묘사하는 시구에서 문득 남녀의 성관계에서 여성을 정복하였다는 우쭐함을 과시하는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적 교감에 바탕을 두지 않은 육체적 교합은 양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억측일까.

 

아도니스는 끝내 비너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신의 위력에 복종할 뿐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여신을 모욕하는 듯한 말을 할 정도이다. 이어서 아도니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참다운 사랑을 설파한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마오, 사랑은 천상으로 사라졌으니, / 이 땅에서 땀으로 얼룩진 육욕이 그 이름을 빼앗은 때문이라오. / 사랑이라는 수수한 모습으로 차리고, / 음욕은 신선한 아름다움을 먹어치워, 추한 죄로 더럽혔소. (P.77)

 

사랑은 포식하지 않으나, 욕정은 과식해서 죽는 것이라. / 사랑은 온통 진실이나, 욕정은 허위로 차있으니. (P.77)

 

여신의 무서운 예언에 무신경하게 아도니스는 멧돼지 사냥을 떠나고 불행한 예견은 적중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탄식과 절망으로 다가오고 결실을 보지 못한 사랑의 여신은 사랑 전체에 저주의 씨앗을 뿌린다. 앞으로 사랑의 기쁨은 더 큰 슬픔을 동반하며, 사랑은 불화와 불평불만을 조성하리라고.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너스의 과도한 애욕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아도니스의 사랑의 무지함에 한숨짓고자 함인가. 흔히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결합에 있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비너스가 좀만 덜 아도니스에게 추근거리고 은근한 애정을 표현했더라면, 아도니스가 고삐 끊은 준마의 사례에서 육체적 욕정이 추잡하고 거부할 본능이 아니며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으로 깨달았더라면.

 

이상은 이상에 그칠 뿐 그렇기에 현실에서 이상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팽팽한 대치와 끝내 아도니스의 떠남과 죽음으로 귀결되었듯이 말이다. 다만 이로써 후대 인간 세상은 사랑의 불씨가 빚어내는 온갖 변덕과 기만, 인색과 의심, 불안과 비참의 파노라마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니 가엾은 인간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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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리스의 능욕 셰익스피어 전집 3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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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아닌 시인 셰익스피어가 고대 로마의 여인 루크리스[루크레티아]에 관한 유명한 사건을 다룬 총 1,855행의 장편시다. 옮긴이에 따라 <루크리스의 겁탈>, <루크리스의 강간> 또는 <루크레티아의 능욕>으로 표제가 조금씩 차이 난다. 표현을 달리하지만 가리키는 내용은 동일하니 루크리스가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이는 바로 왕자 타퀸[타르퀴니어스]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자에게 아름다운 여성이 겁탈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남달리 의의를 가지는 까닭은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가 이를 계기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시를 이야기 시라고 한다. 시의 분류 체계에 이야기 시가 따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서사시와 같이 어떤 사건 또는 이야기를 시 형식으로 풀어낸 성격이라고 보면 무방하리라. 시인은 친절하게도 사건의 줄거리도 작품 서두에 따로 마련하여 작품 배경에 낯선 이들을 배려하고 있다. 시는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은 욕정에 눈먼 왕자 타퀸이 장군 콜라타인의 집을 방문하여 부인 루크리스를 겁탈하기까지의 경과를, 후반은 능욕당한 루크리스가 정신적 방황을 겪는 모습과 남편에 복수를 요구하며 자결하는 장면을 그린다.

 

사건 자체가 워낙 단순하고 분명하기에 시인으로서는 배경 묘사 또는 쓸데없는 주변 인물의 행동을 등장하여 시를 길게 이끌어갈 수 유혹에 빠질 수 있었으련만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의 내면 묘사와 행동에 집중한다. 외관상 명명백백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인물의 사고와 심경은 어떠하였을까를 상상하고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그로 인해 단순한 드라마는 더할 나위 없이 극적인 격정을 품게 된다.

 

욕정에 눈이 먼 타퀸은 이런 위험을 범하려 하니, / 욕정을 치르려고 그의 명예를 걸어야하고. /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자신도 버려야만 하오. (P.24)

 

그의 마음은 욕정과 공포 사이에서 크게 동요하오. / 한쪽은 달콤하게 아첨하고, 다른 쪽은 무섭게 겁을 주고, / 정직한 공포는 추잡한 욕정의 매력에 홀리오니. (P.25)

 

루크리스에게 매혹당한 타퀸은 욕정에 이성을 놓는다.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루크리스가 장군 콜라타인의 아내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뒷수습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부인이 타인에게 정절을 빼앗긴 사실을 공개하는 치욕을 감내할 것인가, 쉬쉬하면서 드러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면서 숨길 것이라고 예단했으리라. 그는 루크리스의 외모만 관심을 두었지 그녀의 정절과 지조, 올곧고 대범한 성품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그렇더라도 막 나가는 폭군이 아닌 이상 평민이나 노예가 아닌 귀족의 부인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타퀸 또한 막판까지 고민한 대목은 자신의 욕정과 이것이 현실화하였을 때 가져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결국 욕정이 이성과 공포를 압도하였으니 인간에게 있어 욕정은 개체적 존재의 근원인 본능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의 성립을 위한 통제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욕정에 굴복한 타퀸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오명의 길로 나아간다.

 

욕정은 나의 키잡이요, 아름다움은 나의 포획물이라. / 이런 보물이 바다에 있다면, 누가 빠지기를 겁내랴? (P.32)

 

나도 알거니와 이 행위 뒤에 후회의 눈물이 계속되는 것도, / 비방과 경멸, 그리고 무서운 증오가 뒤따르리라. / 그러나 나의 악명을 가슴속에 껴안고자 노력할 것이요. (P.48)

 

타퀸의 급습에 놀란 루크리스의 항변은 은근하지만 집요하다. 어지간한 침입자라면 제풀에 자책하고 사과하며 물러났을 것이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타퀸에게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타퀸은 비열하게도 루크리스의 명예 손상을 위협 도구로 사용한다. 자칫하면 부정한 여자로서 죽음을 맞게 되고, 명예를 잃은 채 남편과 세상의 오해를 되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녀로서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었기에 그의 겁탈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은 강제로 여인을 취한 왕자의 허망함과, 정조를 잃고 허탈한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의 상반되는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하여 보여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기가 저지른 죄로 자신을 증오하고. / 그녀는 절망으로 자신의 몸을 손톱으로 찢는다오. / 그는 죄의 두려움에 땀을 흘리며 맥없이 줄행랑이라. / 그녀는 남아서, 무섭던 그 밤을 한탄하며 소리지르고. (P.65)

 

절망에 빠진 그녀는 슬픔과 비탄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녀의 처참한 심경에는 만사가 모두 원망스럽다. 타퀸의 만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을 원망하며, 그의 능욕을 가능케 한 기회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마찬가지로 능욕을 허용하도록 악용당한 시간에 대해서도 처절한 원성을 토로한다. 이처럼 비통한 루크리스는 주변의 모든 것에 시비를 걸면서 신화 속의 필로멜[필로멜라]과 자신을 같은 치욕을 당했다는 점에서 동일시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치욕을 감내한 이유가 분명하기에.

 

그러나 나는 죽지 않으리라, 불시에 죽는 이유를 / 콜라타인이 알게 되기까지는. / 나의 슬픈 임종시에, 이 목숨을 끊게 한 그자에게 /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남편이 하기까지는, (P.97)

 

남편과 아버지와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공개하고 복수를 약속받은 루크리스의 자결은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시인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남편 콜라타인과, 그녀의 피 묻은 칼을 들면서 복수를 외치는 브루터스를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남편은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런 주도적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난다.

 

시인은 루크리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써 귀족들이 합심하여 만행을 저지른 타퀸을 쫓아내도록 브루터스의 숨겼던 영웅성을 일시에 드러내고 있으니 여기서 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브루터스의 후손이 훗날 공화정을 지키고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그 브루터스[브루투스]라고 한다.

 

타퀸의 사악한 죄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하며, / 그 일이 바로 신속하게 실행되오니, / 로마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는지라, / 타퀸을 영원히 국외로 추방하기로. (P.145)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줄거리에서 설명하였던 역사적 의의를 슬며시 외면하고 오로지 루크리스를 위한 사적인 복수에만 국한한다. 왕자 타퀸이 중죄를 저질렀다면 그를 내쫓으면 되며, 나아가 타퀸의 아버지인 왕도 추방하면 그뿐이다. 다시 새 왕을 추대하여 정체(政體)를 이어가면 됨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아예 왕정을 폐지하는 기회로 삼아버렸다. 이 말은 타퀸의 루크리스에 대한 능욕은 단지 방아쇠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누적되었던 왕정의 폐해에 분노를 삼켜오던 귀족과 대중의 분노가 루크리스의 죽음을 계기로 화산처럼 분출하였기에 정체(政體)의 변경에까지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어디까지나 루크리스의 능욕을 개인적 복수로 해결할 뿐, 사회적 폭압으로까지 해석하지 않는 제한적 태도를 보여준다. 아마도 시인이 처한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였으리라.

 

이 작품에서 이채로운 부분이 있는데, 겁탈당한 루크리스가 날이 밝아오기를 불안하게 기다릴 때 트로이의 이야기를 담은 명화에 눈을 돌리는 대목이다. 그녀는 그동안 무심하게 넘겼던 그림 속 내용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설적인 고대 왕국의 멸망을 이끈 인물 헬렌과 패리스를 비판한다. 그들의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욕정은 타퀸의 그것과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더욱이 트로이인을 기만한 시논은 순진한 외양을 한 채 다가와서 순수한 천성의 상대방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타퀸과 흡사하다. 그에게 향한 그녀의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 분출은 시논이 아닌 타퀸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전쟁을 일으키게 한 창부 헬렌을 보여다오. / 내 손톱으로 그 고운 얼굴을 찢어줄 것이니. / 어리석은 패리스, 불타는 트로이가 짊어진 이 분노의 짐은 / 그대의 격한 욕정이 초래한 것이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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