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베스트셀러 미니북 20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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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코프를 일컬어 ‘천재적인 스토리텔러’라고 평한다. 또 진정한 러시아를 이해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레스코프를 읽어야 한다는 전언도 있다. 또 톨스토이도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대단한 작가로 여겨지지만, 사실 웬만한 세계문학사에는 그의 이름 한 줄 들어가 있지 않다. 그의 진가가 지난 세기 들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재평가 받고는 있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이제 갓 시작단계일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과소평가의 연유를 생각해 본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 장르에서 스토리의 역할과 의의를 평가하는 잣대에 따라 통상적으로 서사 중심의 경향은 지난 세기 전반 이후 급격히 퇴조를 보였다. 웬만한 순수 문학 작가는 전통적 서사 구조를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치중하고 대중의 이해에 난해하게 다가오는 작품이 수준높은 문학으로 은연중에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이런 기조는 동일하다. 순수 문학은 대부분 비대중적이며, 쉽게 읽히는 작품은 대중적, 통속적이라고 평가절하 된다. 그러기에 레스코프에 대한 국내 인식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하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의 원제는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다. 사실 내게 이 제목은 레스코프 소설보다는 쇼스타코비치의 동명의 오페라로 더 익숙하다. 젊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공산당 기관지의 혹독한 비판으로 그가 표면적으로나마 전향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때 음악을 들으면 궁금했던 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과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 궁금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원작을 읽으며 의문이 다소 해소되었다.

이 작품의 카테리나 리보브나와 <쌈닭>(원제는 <여전사>)의 돔나 플로토노브나는 모두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상이다. 모두 므첸스크 군 출신의 근대화되고 도시화되기 이전의 원형적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카테리나 리보브나가 처음부터 지독한 악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시골의 삶을 살다가 부유한 상인의 후처가 되어 외관상 그럴듯하나 아무 할 일도 없이 지루한 나날을 시간 죽이며 보내는 유한마담이다. 야생 동물을 우리나 새장에 가둬놓은 격이라고 할까.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세르게이에게서 억제된 본능과 사랑의 충동을 일깨우게 되었고 이후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철저히 제거하였다.

즉 활달하고 자유분방한(때로는 드세고 거칠기까지 한) 러시아 여인의 에너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된 것이다. 여기에 난봉꾼 세르게이의 야심과 사랑의 배신도 한몫 하여 그녀는 죄악의 구렁텅이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냉혹함, 반면 사랑하는 이에게 맹목적 순정을 바치는 지고지순함, 이 상반되는 이미지를 한 몸에 품고 있는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단순히 악녀라고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다. 결과가 아닌 그녀의 배경과 내면을 다소나마 이해하는 독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카테리나 리보브나가 비극적 인물상이라면 <쌈닭>의 돔나 플로토노브나는 희비극적 인물이다. 그녀의 언사와 행동은 무모할 정도로 단순하여 과연 그녀가 진행하는 사안의 귀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열을 내어 장시간 화자에게 들려준 레카니다 페트로브나 이야기는 레카니다의 이기적 영악함과 돔나의 우둔한 집요함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례다. 레카니다는 돔나를 원망하지만 매춘부로 전락한 것은 스스로의 타락이다, 물론 돔나가 압박하여 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돔나가 들려주는 체험담은 외형상 우습지만 내면상으로는 오히려 슬프고 비참한 당대 러시아 민중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풍경 소묘이다. 특히 세상사에 통달한 듯한 돔나가 젊은 청년에 대한 사랑에 빠져 어이없이 영락해 가는 마지막 장면은 희극적 웃음을 넘어 오히려 인간적 동정을 자아낸다.

카테리나 리보브나와 돔나 플로토노브나, 그들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허구적 인물이 아니라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존재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건강한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당대의 현실은 그들을 건강하게 살도록 하지 못하게 한다. 한 명은 박제된 마네킹을 강요받고, 다른 한 명은 소박한 선량함을 집요한 우둔함으로 변질시켰다.

이들이 그저 2세기 전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일까 생각해본다. 

- 2011. 1. 14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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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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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사에서 야심차게 출간한 창비세계문학 시리즈의 프랑스 편이다. 다른 출판사와 달리 창비세계문학은 국가별로 한권씩 총 9권에 정선한 단편작품들을 수록하여 차별성을 꾀하고 있으며, 짧고 굵은 접근법을 택한 점도 신선하다.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의 환상소설>과 체재가 유사한데, 작가 및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 및 분석에 이어 작품 본편이 등장한다. 물론 작품 분석이 보다 세밀하고 나중에는 작가의 더 읽을거리를 소개하고 있어 차이점을 두고는 있다.

한편 상기의 유사성을 배가시키는 요인은 이 프랑스 편의 경우 이탈로 칼비노의 편집본과 고티에와 모파상의 작품이 중복된다는 점이다.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편 전체를 통틀어 대체로 환상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이것이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특성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 소개된 주류 문학세계를 배제한 예기치 못한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다.

작가와 작품 경향이 개성적이고 차별적이므로 일괄하여 감상 소회를 적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개별 작품마다 별도로 단상(斷想)을 붙인다.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드니 디드로)

제논의 역설만큼이나 이 또한 역설이다. 디드로는 소설을 쓴 것인가 아닌가? 소설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며, 소설이라면 소설이 아님을 선언하는 소설을 소설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소설의 진정한 요소는 무엇인가 등등.

여기서 작가가 소개하는 착한 남자와 덜 착한 여자(따니에와 레메르 부인), 착한 여자와 덜 착한 남자(라 쇼 양과 가르데유)의 이야기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사실 흔한 소설의 소재가 바로 탐욕과 사랑의 배신이 아닌가?

그럼에도 화자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님을 재삼 강조하고 있으며, 은근슬쩍 자신의 저서에 대한 라 쇼 양의 공헌을 언급하며 실화로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이미 샤미소의 작품을 통해서 접하였으므로 새삼스럽지 않지만, 작품 전체를 일관하여 이 작품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보다 사실적이고 절박감이 강하게 내비치고 있어 생생함을 배가하고 있다. 순수한 이야기체가 아닌 구성, 이것이 이 작품의 개성과 묘미가 아닐까? 이것이 소설이든 아니든.

* 붉은 여인숙 (오노레 드 발자끄)

어느 정도는 발자크의 소설을 부러 외면한 측면이 있다. 성격상 뿌리를 뽑아야 할텐데 그의 <인간극>은 너무 방대하다. 그의 작품만 읽으면서 한 해를 보내는 것은 미리부터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이탈로 칼비노가 엮은 책에서 <영생의 묘약>을 읽고 이제 다시 <붉은 여인숙>을 읽는다. 사실주의의 거장이지만 단편에서는 오히려 환상적인 요소가 강하다. 환상주의와 사실주의 두 측면에서 발자크를 이해해야 그를 잘못 알지 않게 될 것이다.

붉은 여인숙에서 재물에 눈이 멀어 살인을 거의 저지를 뻔한 군의관은 오히려 그가 살인을 범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작가는 기이한 긴장감을 고조하고 있다. 따라서 군의관 자신은 물론 독자도 그의 혐의에서 완전한 떳떳함을 주장하기 어렵게 한다.

따이유페르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또 다른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명백한 살인자로서 그를 압박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부여하지만, 그의 딸에 매료되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이중적 면모. 살인자는 죽음을 맞이하고 딸은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 딸과의 결합이 정당한가 부당한가가 관심의 대상이다. 그리고 한 신사의 이 한마디.

“멍청한 녀석, 왜 그에게 보베 출신이냐고 물었어!” (P.88)

발자크를 본격적으로 펼쳐들 시기가 멀지 않았다.

* 푸른 방 (프로스뻬르 메리메)

솔직히 이 책은 메리메의 <푸른 방>을 읽기 위하여 골라 들었다. 몇 편 되지 않은 메리메의 작품들을 찾아 읽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빼놓기엔 너무 허전하였다.

레옹은 그의 연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파리 근교의 호텔을 찾는다. 푸른 방은 그가 묵은 객실의 별칭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연인은 항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둘만이 있기를 바란다. 불륜 여부는 중요치 않다. 당당한 연인들도 호젓한 장소를 원한다. 남들 눈에 뜨이면 곤란한 스킨십이 아닌 단순한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옹과 그의 연인의 행동을 십분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데, 레옹은 열차에서 우연히 알게 된 영국인이 살해당하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옆방에서 번져 다가오는 피로 인하여 레옹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정의 도덕 실현을 위해 과감하게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연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외면할 것인지. 이 작품의 묘미는 시시각각 두 사람을 덮쳐오는 긴장과 압박이 주는 숨 막힐 듯한 스릴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순간의 어이없을 정도의 긴장 해소. 이 정도면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적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술의 효용을 체감하게 된다.
메리메는 장황하게 글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글에 간결함과 상상력을 불어넣어 역설적으로 생생함을 더해 주고 있다. 바로 다음이 그의 신조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쓸데없는 세부묘사를 싫어하는데다가, 독자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죄다 말하거나 NOOO의 호텔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시간대별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P.101)

* 무신론자들의 저녁식사 (쥘-아메데 바르베 도르비이)

도르비이는 쉽지 않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작품은 복합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전반부는 늙은 메닐그랑과 그의 아들 전 연대장 메닐, 그리고 메닐그랑이 주재하는 정기적 무신론자들의 만찬에 대하여 다소 지루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찌나 지리한지 책을 보면서 중간에 꾸벅거리기도 몇 차례 하였다.

후반부는 메닐이 털어놓는 성당 방문의 이유가 된 이야기, 즉 수줍어하는 창녀 로잘바와 이도프 소령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 특히 로잘바가 세세하게 그려지는데 그녀는 성(聖)과 성(性)을 넘어드는 다중적 얼굴을 보여준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수줍어하고 정숙한 로잘바는 확실히 좋든 나쁘든 매혹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압권은 로잘바와 이도프 소령 간의 난투극 장면이다. 잔인하고 혐오스럽기 그지없고 인간의 모든 추악이 여실히 드러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역자가 해설에서 도르비이에 대해 쓴 말, 즉 발자끄, 스땅달, 보들레르를 정당하게 평가했으며, 그의 소설은 대체로 병적인 열정과 기괴한 범죄를 다루는 공포소설이라는 언급이 떠오른다.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되었다는 소설집 <악마같은 사람들[마녀들]>을 읽어보고 싶다. 그래야 도르비이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게 될 듯하다.

* 죽은 여인의 사랑 (삐에르-쥘 떼오필 고띠에)

이탈로 칼비노 편의 <세계의 환상소설>(민음사)에 몇 줄 적었던 내용을 가져온다.

그 유명한 뱀파이어가 출현하는 작품 중 하나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여자 뱀파이어다. 사제를 유혹하는 팜므 파탈. 클라리몽드에 빠져 낮과 밤, 성(聖)과 육(肉)에서 허우적거리는 로뮈알드. 그는 점차로 자신이 사제인지 젊은 귀족인지, 사제 생활이 실제인지 흥청대는 귀족생활이 비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는 클라리몽드가 살아있는 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므로.

세라피옹 신부의 도움으로 이중생활에서 벗어나고 흡혈귀는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데, 꿈에서의 클라리몽드의 마지막 탄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불쌍한 사람! 불쌍한 사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왜 그 신부의 말을 들은 거죠?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다고 가여운 내 묘지를 파헤치고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나를 그대로 드러낸 거죠? 우려 영혼과 몸이 맺은 모든 관계가 이제 끝났어요. 잘 있어요, 당신은 나를 아쉬워할 거예요!” (P.296)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과거 다른 이들처럼 목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몇 방울의 피로 둘 사이의 행복이 계속될 수 있다면 로뮈알드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동서양의 고금을 막론하고 망자(亡者)와의 사랑을 그린 여러 이야기들이 전래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의 법칙에게는 위배되지만 그만큼 그들의 사랑은 절실하고 슬프기조차 하다. 클라리몽드는 로뮈알드를 만난 이후 과거 흡혈귀 시절의 잔재를 떨쳐내 버렸다. 로뮈알드가 사제가 아니었고, 도덕적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둘의 사랑은 생사를 초월한 한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이 이 짤막한 이야기가 통상의 흡혈귀 물과 차별되는 점이다.

* 밤 (앙리 르네 알베르 기 드 모빠쌍)

이탈로 칼비노 편의 <세계의 환상소설>(민음사)에 몇 줄 적었던 내용을 가져온다.

어느 날 세상 모든 빛이 사라지고 모든 생물이 사라진 사회를 연상해보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기시감(旣視感)이 아니라 현대영화가 근대 환상소설에 지고 있는 빚의 무게이다.

밤의 분위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화자는 문득 주변 공기가 바뀐 걸 깨닫는다. 인적이 끊기고 한치 앞도 분간 못하는 암흑이 된다. 아무리 외쳐보아도 다가오는 이도 없다. 인가도 시장도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여기에는 악령이 등장하거나 기이한 초자연성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의 순간에 단지 살아있는 존재와 빛이 사라졌을 뿐이다. 일상 속의 공포!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겨 동 분야의 세계적 작가인 모파상은 환상소설에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어 족적을 뚜렷이 하고 있다. 당대의 환상소설은 유명작가들도 손을 댄 또 하나의 주류였다.

* 그림자들의 대화 (조르주 베르나노스)

드디어 20세기 작품의 등장이다. 레옹과 그의 연인처럼, 여기서도 자끄와 그의 연인 프랑쑤아즈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메리메와는 달리 베르나노스는 관찰자가 아니라 두 사람간의 대화로 내용을 전개한다. 또한 이십대의 풋풋함이 아닌 중념 남성과 젊은 여성의 어찌 보면 덜 당당한 사랑 이야기는 시대의 간극을 상기시킨다.

프랑쑤아즈는 현대적 여성상이다. 자끄의 청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며 자발적으로 그에게 구속되는 정부(情婦)를 희망하는 그녀의 태도는 상식적 가치관의 범위를 벗어난다. 반면 순결하지 못한 과거로 인하여 떳떳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양자 모두에게 피해가 될 것이라는 그녀의 판단은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자끄는 그녀에게 성녀(聖女)의 이미지를 바라지만, 프랑쑤아즈는 스스로 속녀(俗女)의 계단으로 내려온다.

* 난쟁이 (마르쎌 에메)

서커스단의 난쟁이가 어느 날 키가 자라서 당당한 청년이 되었다. 당연히 그는 행복할 텐데 사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난쟁이 시절,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신체 탓으로 동정과 배려의 대상이었다. 이제 그는 성인이 되었지만, 잘생긴 젊은이는 어디에나 흔하다, 즉 그는 더 이상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다.

키 큰 발랑땡은 더 이상 난쟁이 역할을 할 수 없고, 그는 다른 재주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아껴주던 곡마사 제르미나 양으로부터도 관심을 끄는데 실패한다. 난쟁이가 발랑땡이 되는 순간,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을 떠나던 때부터 겪게 되는 의무의 이행이다. 이는 또한 난쟁이가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진정한 인간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발랑땡의 선택은 불가역적이다. 그는 다시 난쟁이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그 시절의 소박하면서 따스하고 훈훈한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갈 수 있더라도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서커스장의 무대 뒤에 있다가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겨 관객의 시각으로 서커스를 바라보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서커스가 끝나고 그는 자연스럽게 인파에 휩쓸려 서커스장을 떠난다. 그는 평화로운 내해를 벗어나 자유롭지만 거친 대양으로 출항하는 범선과도 같다.

이때 단장은 그를 바라보다가 내뱉는다. “난쟁이는 죽었소.”(P.281). 우리 모두는 난쟁이로 태어난다. 그리고 시간의 장단 차이는 있지만 모두 성인이 되어 가정[서커스단]을 떠나 독자적 삶을 모색한다. 그때 비로소 유년 시절은 종말을 고하고 어른이 된다.

*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

중국의 고사에 연원을 둔 작품인데, 사실 배경과 등장인물 이름만 중국일 따름이지 그 추구하는 내용은 동서양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황제와 왕부의 대화 장면이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왕부의 그림을 바라보며 성장한 황제의 눈에 세상은 왕부의 그림만큼 아름답지 않다. 왕부는 그림을 통해 황제를 기만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왕부의 입장은 무과실에 따른 무죄이지만, 황제의 입장은 인식있는 과실에 따른 유죄이니, 법리 논리상으로 고려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왕부의 손을 거치면서 미완성된 그림은 세계로 구체화되고 확장된다. 궁궐 가득 푸른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죽은 제자가 젓는 나룻배에 올라탄 왕부는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그림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 부류들만 남긴 채.

이렇게 왕부는 예술로 구원받는다. 예술이 현실을 감싸 안고 변용시킬 때 예술은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는 현실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예술은 완전한 자유를 전제로 하는데, 현실 세계는 예술에 항상 통제와 간섭의 욕구를 지닌다.

* 씰랑스 (장 지오노)

확실히 19세기 이전과 비교하여 20세기 작품답게 슬슬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현대예술과 난해성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한계에 부닥친 예술가들의 탈출구인 동시에 복잡성과 우연성, 반논리성, 대량성과 개체성이 종횡으로 압축되는 인간과 사회 현상을 예술에 반영하기 위한 사투의 결과이다. 다만 그것은 대다수 예술 향유자에게 불편하고 딱딱하게 다가온다. 그러기에 현대 예술은 대체로 인기가 없다.

장 지오노의 이 작품도 줄거리는 단순하다. 다만 여기에서 줄거리는 부수적이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대화다. 특히 후반부의 피에 대한 예찬은 섬찟하다.

피는 관성화된 일상을 타파하고 변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흘린 피는 아름답고 온전한 자유를 가져온다. 사랑, 가족, 아름다운 꽃은 일시적 위안이 될 뿐 근본적으로 새로움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흘린 피를 맛볼 때 인간은 비로소 본능에 내재된 내밀한 욕망에 눈뜨고 상투화되고 박제된 삶에 숨과 피를 불어넣게 된다고...

이 한 편으로 장 지오노의 문학세계를 추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리라. 그의 작품이 비교적 많이 번역되었다고 하니, 그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기회가 닿으면 봐야겠다.

* 바닷가 (알랭 로브-그리예)

누보로망의 대표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통상적인 소설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 일단 분량 면에서 짤막하다. 기본적 줄거리 구조를 배제하느니만치 여타 소설처럼 장편으로 나아가는데 자체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절벽과 바다 사이의 모래밭을 걸어가는 세 아이, 그 앞을 갈매기 무리가 앞서서 걸어가고 있다. 파도, 절벽, 노란 모래, 갈매기의 움직임 등이 몰개성적으로 반복된다. 그나마 말미에 나직이 들리는 종소리로 인하여 세 아이간에 간단한 대화가 생기는데, 그들은 여전히 빠른 발놀림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전체적 분위기는 영상의 한 장면을 감정이입 없이 나레이션한다면 이해가 용이하려나. 이것이 소설의 주류가 된다면, 소설 읽는 재미는 많이 상실될 것이다. 그저 아름다운 영상 다큐나 풍경화를 바라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

* 코프튀아 왕 (쥘리앙 그라끄)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해하지도 않으며, 독자의 몰입과 흥분도 요구하지 않는 특이한 작품이다. 다채로운 수사적 표현은 작품에 화려함 보다는 산만함을 풍겨 내용 이해를 저해하는데 작가의 의도인지 궁금하다.

여기서는 모든 게 불투명하다. 친구의 초대를 받아 파리 교외를 방문하는 화자, 정작 친구는 없고 의외의 여인, 안주인 같기도 하고 하녀 같기도 한 여인만이 그를 응대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멀리서 울리는 끊임없는 포성, 미약한 촛불에만 의지하는 어둡고 흔들거리는 영상, 침묵을 암묵적 강요하는 여인의 태도와 집안의 분위기. 이 소설은 감각의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이다. 어둠과 촛불의 시각, 그저 하나의 배경인 양 반복되는 포성의 청각.

안주인-하녀와의 하룻밤 정사는 예정된 수순처럼 자연스럽다. 그녀는 이 빈 집을 지키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친구는 왜 화자를 초대하고 집을 비우는가? 전쟁, 파리 교외, 빈 집, 여인... 이러한 요소들은 마치 하나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로서 화자의 사고와 행동을 구속하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 하고 불현 듯 생각했다...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앞쪽의 모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빨리 걸었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철문을 다시 닫았다...” (P.386)

마을의 중심가로 오고 나서야 비로소 화자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느긋한 생각에 젖어들 수 있게 되었다(P.387).

* 륄라비 (장-마리 귀스따브 르 끌레지오)

륄라비는 학교에 가지 않고 마을을 벗어나 여행을 한다. 그녀의 여행은 미지의 먼 곳이 아니라 근교의 가까우면서도 낯익지 않은 곳을 향한다.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는 돌아와야 하므로 먼 곳에 갈 수도 없다. 륄라비의 내면과 환경에 무슨 연유가 있는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부모는 이혼 내지 별거하였고, 어머니는 사고를 당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눈치 챌 뿐. 이것이 륄라비의 여행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어쨌든 륄라비는 바닷가를 거닐며 멱을 감기도 하고, 절벽 끝자리에 있는 외관만 아름다운 빈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녀의 충만한 행복감은 번잡한 일상사를 팽개쳐두고 훌쩍 길을 떠난 경험을 가져본 사람만이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

륄라비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날 마주친 낯선 남자의 존재로 그녀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진정 소중하고 그리운 것은 오래 붙잡을 수 없다.

륄라비는 학교로 돌아온다. 그녀는 이전의 그녀가 아니다. 그녀의 변모와 성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필라삐 선생님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행운아다. 많은 학생들은 손 내밀어 주는 사람 없이 방랑하며 어긋난 길은 선택하는 게 현실이다.

* 낙서 (다니엘 불랑제)

크리크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크리스띠안은 데스따끄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녀는 판사인 남편에게, 그는 제라늄만 소중히 여기는 아내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혼외정사는 조용히 유지되거나 잦아지든지 아니면 법적 관계의 청산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남편 로즐리에는 부인의 외도를 알면서 묵인한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 것일까? 그는 말없이 일기쓰기 만을 계속한다. 그렇다고 일기 속에 대단한 내용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크리스띠안이 남편의 일기를 조금 훔쳐본 후 방치해 버렸을까? 그럼에도 로즐리에 판사에게 일기쓰기는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의 의식이다.

부정녀(不淨女)는 흔히 부적절한 성격으로 그려지기 쉬운데 크리크리는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일상과 부도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애인과의 관계를 양성화하고자 하며 발레를 배우고, 붓과 페인트로 선거벽보판에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표현한다.

작가는 행복하지 못한 결합에 안주하며 체념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삶을 개선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와 행복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어깨를 웅크린 채 자신의 좁다란 영역을 고수하는 데스따끄 부인에 대해 세인들이 반감을 품는다. 

- 2011. 1. 12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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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아 이야기 (구) 문지 스펙트럼 18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지음, 정서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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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이며, 국내에서 ‘방랑아 이야기’, ‘어느 건달의 생활’, ‘명랑한 방랑아’, ‘어느 무위도식자의 삶에서’ 등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다양한 표제로 번역되는 것은 타우게니히츠(Taugenichts)의 미묘한 의미에 기인한다.

타우게니히츠는 본래 건달, 쓸모없는 놈, 무위도식자 등의 의미로 사실은 매우 부정적인 지칭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헨도르프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이를 뒤집어 긍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원제 그대로 번역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살리지 못한다고 하여 일부 번역본에서는 ‘방랑아’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작품 내용상으로 볼 때는 이편이 보다 근사치에 가깝기도 하다.

이쯤에서 딱딱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작품 자체로 뛰어들자. 그러면 독자는 이 경장편 소설에서 신선하고 파릇파릇하며 아침이슬처럼 반짝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다. 문학작품을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는 한계가 절실하지만, 어차피 나는 비평가도 아니므로 현학적 표현을 쓸 능력도 이유도 없다.

주인공이자 타우게니히츠인 화자는 넓은 세상에 나가 행운을 잡아보기 위하여(P.14) 이른 봄 집을 나선다. 아버지의 호통은 단순한 계기일 뿐 화자의 심중에 내재한 자연스런 충동의 발로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연의 여정과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연모의 정, 이탈리아로의 모험 등 동화의 장면들이 잇달아 전개된다. 그렇다, 이 작품은 청년과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청년에게는 꽃다운 청춘 시절, 물질적인 현실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세상을 향해 커다란 걸음을 옮기라는 방랑의 부추김을 알리는 동화이다. 어른에게는 잃어버린 청춘 시절을 가슴 저미게 회상하며, 현실에 추락하지 말고 가슴 한켠에 여전히 자연과 환상을 품고 살라는 요청의 동화이다.

이 작품을 동화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많은 비판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건달과 방랑생활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을 하게 되는 부적절한 결말 도출, 소박한 실생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반사회적 메시지, 더 나아가 당대 독일 사회의 정치적 침체상황에서 생성된 시대착오적인 목가적 비더마이어 경향의 예찬 등.

현실은 냉혹하더라도 따뜻한 가슴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과 같은 소박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감명받고, 오래오래 되새긴다. 아이헨도르프의 이 작품은 상기 작품들의 확장판이며, 독자에게 주는 기본 정서는 동질적이다. 이 작품이 당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독일 내외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부담 없는 분량에 수록된, 소박하면서 한없이 아름다운 자연예찬, 성과 정원의 귀족적 우미함, 화자의 솔직하고 명랑한 성격과 행동 및 깊은 신앙심, 화자의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순수하며 열정적인 사랑, 화자의 항로를 기로에서 절묘하게 구해주는 우연한 행운, 그리고 화자와 아름다운 아가씨의 행복한 결합으로 이어지는 결말, 그리고 방랑아이자 예술가로서 화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 그리고 음악 연주 등. 이 작품을 빛내주는 요소들의 목록은 이처럼 길게 늘어난다.

화자 타우게니히츠는 건달이고 방랑아이지만, 그는 건전하고 명랑하며 순수하다. 이것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경묘하게 만들어 책을 읽는 독자의 심경도 자연스레 화사하게 만든다. 긍정적 타우게니히츠의 예찬, 이것은 점차 자본주의화, 산업화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작지만 힘찬 반론 제기다.

덧붙여 화자의 샘솟는 방랑정신은 오늘날 현대적 유목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하고 나는 외쳤다. “영원히, 하늘이 푸른 곳이면 어디까지든!” (P.45)

“방랑아보다 멋진 사람이 누굴까? 우리들은 낯선 곳을 방황하면서 항상 새로운 세계를 호흡하는 것이다.” (P.52)

““자, 모두들 잘 있거라!”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마차가 날 어디로 데려다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P.79)

※ 아이헨도르프는 서정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많은 시편들이 당대와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독일가곡으로 작곡되기도 하였다.

<달 밤>

그건 마치 하늘이
대지에 조용히 입 맞춘 것 같았다.
꽃에 달빛이 비치는 지금
대지는 그 하늘을 꿈꾸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바람이 들판에 불어오고,
이삭들이 가볍게 움직인다.
숲에서는 나직이 소리가 나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내 영혼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저 멀리
조용한 대지 위를 날아간다.
마치 집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밤의 꽃>

밤은 고요한 바다와 같다.
기쁨과 슬픔과 사랑의 고뇌가
얼기설기 뒤엉켜 느릿느릿하게
물결을 몰아치고 있다.

온갖 희망은 구름과 같이
고요히 하늘을 흘러가는데
그것이 회상인지 또는 꿈인지
여린 바람 속에서 그 누가 알랴.

별들을 향하여 하소연하고 싶다.
가슴과 입을 막아버려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희미하게
잔잔한 물결소리가 남아 있다.  

- 2011. 1. 6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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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이삭줍기 3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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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페터 슐레밀'은 서양문학에서 꽤 유명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작가 샤미소가 만들어낸 페터 슐레밀이라는 작중인물의 성격이 개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데 연유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개설서에는 제약 조건 상 비록 그의 작품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서문에서 선구적인 그의 면모를 외면하지 않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그림자를 악마에게 팔아넘긴 인물을 그린 환상소설이기에 이름이 나게 된 것이 아니다. 중편에 해당하는 적은 분량이지만 여기서 독자는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나름 진지한 모색을 하게 된다.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어떠한 가치를 지닐 것인가? 존재도 희박하고 값어치도 거의 없어 보이는 그림자, 그것을 무한한 금전과 교환한다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것은 19세기의 슐레밀 뿐만 아니라 항상 금전적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도 공통적이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아넘길 따름이지만 알게 모르게 제법 많은 이들이 자신의 육체적인 장기를 갈취당하고 있다. 전혀 우습지 않은 우스개소리지만 신체포기각서를 쓰기도 한다.

전에는 그림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이 거부가 된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알고 외면하며 손가락질한다. 그는 사람이되 올바른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사실상 그는 악마와 같은 부류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넘기고 젊음을 되찾지만, 슐레밀은 그래도 영혼을 넘기지는 않는다. 그림자는 제2의 자아를 상징할 때, 그림자를 넘겼다면 다음 수순은 영혼도 파는 것일 텐데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합을 눈물을 흘리며 포기하면서 슐레밀은 악마와의 추가적 거래를 거부한다. 이것이 슐레밀과 파우스트와의 차이점이며, 슐레밀이 결국 마술장화를 얻게 된 계기가 된다.

사랑과 세상과, 그림자의 댓가인 ‘행운의 자루’를 포기한 그는 이제 마술장화를 신고 속세를 떠나 은둔자의 삶을 누린다. 인간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고독한 삶 속에서 슐레밀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내심이 결코 편안하지 못함은 북극곰에 놀라 남북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정신을 잃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병원에서 요양하면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생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슐레밀은 자본주의 속 우리들 자신의 선구적 자아상이다. 누구도 금전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누구는 존 씨처럼 영혼을 넘기지만, 대다수는 슐레밀처럼 갈등을 겪으며 악마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 작가 샤미소는 독특한 인물이다. 식물학자이기도 한 그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는 시집도 발표하였는데, 남자이면서도 여자 특유의 내밀한 심적 상태와 삶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작곡가 슈만이 8개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한 동명의 리트로서 더욱 유명하다.  

- 2011. 1. 4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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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 - 알퐁스 반 월덴의 14일
얀 포토츠키 지음, 임왕준 옮김 / 이숲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다음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도저히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재미와 몰입도.

언제부터인지 소설이 재미를 추구하면 통속적, 대중적이라는 비평 아닌 비난에 시달리는 사례가 자주 있다. 난해하면 할수록 고도의 순수성을 추구한 것으로 갈채 받고 독자의 층은 갈수록 엷어져 간다.

이 작품만큼 진가가 가리어지고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인 경우도 드물 것이다. 작가도, 작품도 논란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또한 이 작품만큼 독자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앗아가는 경우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진정 숨어있는 고전이라 하겠다.

알퐁스 반 월덴이라는 스페인 장교가 임지로 가는 도중 겪게 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기록한 글로 모두 66일 중 14일의 분량을 수록하였다. 전권의 판본은 폴란드어 사본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로제 카유아가 당시 프랑스어로 구할 수 있는 14일의 내용만 출판하여 이것이 일종의 정전(正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제1권과 제2권만이 오리지널로 인정받고 나머지는 위작으로 의심되는 상황과 비슷한 경우이다.

솔직히 민음사판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이탈로 칼비노 덕택이 아니었으면 포토츠키와 이 작품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민음사와 칼비노에 사의를 표한다.

이 작품은 일종의 액자소설이다. 그런데 단순 액자가 아니라 액자가 중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독서에 주의를 요한다. 그리고 액자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 알퐁스가 겪게 되는 모험을 직간접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알퐁스가 경험하는 사건과 마주치는 인물들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의 관점에서도 이단 내지 아웃사이드적 성격을 지닌다. 즉 교수형당한 쌍둥이 형제의 악령, 정체모를 쌍둥이 자매의 성적 유혹, 은자, 강도 조토, 카발라 유대 랍비 남매, 집시 등이다. 14일 동안 알퐁스는 여전히 시에라 모레나 산맥을 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초자연과 외설이 난무하는 이러한 작품을 남긴 포토츠키도 대단하지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외면당한(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유도 분명하다. 당대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단순히 허황된 잡설이 아니라 깊은 역사적, 지리적, 인문학과 종교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작품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람은 배가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말미의 카발라 비의주의는 상당히 깊숙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아, 내가 느끼는 재미와 감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저 한번 읽어보라고 손목을 끌어서 책을 건네주는 것 외에.

여기 소설에 등장하는 액자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헛소리는 집어치우련다. 짧은 것은 두 면 남짓하나 긴 것(예컨대 조토 이야기)은 웬만한 단편 소설은 거뜬하다. 또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책의 내용을 수록한 것도 있어 다채롭기 그지없다.

에미나와 주베이다 이야기
카사르 고멜레즈 성 이야기
악령에 홀린 자, 파체코 이야기
알퐁스 반 월덴 이야기
라벤나의 트리불체 이야기
페라라의 란둘페 이야기
조토 이야기
파체코 이야기
카발라 학자 이야기
티보 디 라 자케르 이야기
송브르 성 미녀 이야기
리키아의 메니포스 이야기
철학자 아테나고라스 이야기
집시 촌장 판데소나 이야기
기울리오 로마티와 몬테 살레르노 공주 이야기
몬테 살레르노 공주 이야기
레베카 이야기 

- 2011. 1. 2 마이페이퍼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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