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국지 다음 이야기 2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평점 :
2권은 그래도 1권의 혼란스러움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북조의 경우 무수한 왕조가 난립했던 극도의 혼란기를 일차적으로 전진(前秦)이 정리하였으며, 전진 멸망 후 잠시 어수선한 상황을 재차 수습한 게 북위(北魏)다. 북위가 이후 동서로 나뉘고 각각 북주와 북제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남조의 경우는 더욱 단순한데, 동진에 이어 송, 제, 양, 진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새 왕조의 개창 과정이 대개 평화롭지 않기에 혼란과 살상이 수반되지만 어쨌든 단일 왕조이므로 북조에 비해서는 따라가기가 용이한 편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교체사를 접하다 보면 비슷한 유형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걸 알 수 있다. 한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 혼군 또는 암군이 나타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족 간 다툼과 권신의 발호가 잇따르는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권신이 결국 명목뿐인 왕좌를 찬탈한다. 북조도 그렇지만 남조의 왕조 교체가 대부분 이런 패턴을 따른다.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를 다룬 책을 보면서 국가 간 전쟁에서 수십만 병사를 생매장하는 등의 잔혹 행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훑다 보니 이 시대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한족과 호족의 대립이 시대적 틀을 구분 짓기에 동족이라는 인식이 약하며 이로 인해 잔혹 행위가 일반화된 측면도 있다. 게다가 유학이라는 사회이념마저 무너지다 보니 권력자의 기분 여하에 따라 인명은 그야말로 파리목숨에 불과하다. 사치, 살인, 고문, 강간에 갖은 패륜 행위 등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악행을 이 시대에 한꺼번에 목도할 수 있다. 중국사의 여러 분열 시기 중에 위진남북조 시대가 단연코 가장 어지러운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한다. 이때의 영웅은 <삼국지연의>의 조조처럼 간웅(奸雄)이어야 하지 유비 같은 정인군자형의 영웅은 나오기도 어렵고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권만 하더라도 남조에서 송의 개창자 송무제 유유와 송문제, 양의 창건자 양무제 소연, 북조에서 북위의 태무제와 효문제가 대표적이다. 모두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들이지만 공과가 극명하기에 그들을 위대한 영웅이라 기리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남연(南燕)의 모용덕을 기억하고 싶다. 단명한 왕조이고 세력도 약하였기에 자체로서는 주목받기 어렵지만, 창건자 모용덕이 혼돈의 시기에 덕정을 베풀어 백성을 안정시킨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항상 그러하지만 그가 더욱 오래 살았거나 계승자가 다소나마 더 현명하였다면 남연의 수명이 그리 짧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유는 크게 안심하며 성 위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북벌의 거동은 이로써 중지됐다.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며 관중을 손에 넣었다가 이내 다시 잃은 것은 유유의 일생에서 최대 실패작에 해당한다. (P.55-56)
송무제 유유가 동진의 명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두 가지 실책을 지적한다. 먼저 유유는 동진을 평정한 후 북벌을 감행하여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장안과 낙양을 점령하였다. 이른바 중원을 차지하였으니 민심을 수습하고 세력을 공고히 하였으면 이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그는 빨리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얼른 도성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벌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동진을 뒤엎고 새 왕조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유유는 동진의 황제를 살해함으로써 이후 하나의 악습의 시조가 되었다. 후환을 없애겠다는 단순한 의도였으나 후대에서는 더욱 확장하여 황제뿐만 아니라 왕실과 씨족 전체를 도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송문제는 ‘원가지치(元嘉之治)’라는 수식어로 알 수 있듯이 혼란의 시대에 나름 30년 가까이 안정기를 구축한 군주다. 이때가 송의 최전성기였는데 시호로 알 수 있듯 그는 문치(文治)의 임금이었다. 말년의 그는 북벌을 가볍게 생각하고 북위를 공격하다가 일패도지하고, 후사 문제로 자식에게 시해를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현명한 군주가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져 비명횡사하는 사례는 후대의 양무제도 있다. 양무제는 양나라의 개창자이다. 그는 거의 50년 가까이 재위에 있었는데 86세에 궁궐에서 굶어 죽었다. 일단 그렇게 노년에 이르기까지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고, 사실상 양나라의 건국과 패망에 동시에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노망이 날 때까지 옥좌를 유지하지 않고 태자에게 일찌감치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아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관리하였다면 자신의 삶과 양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으리라. 문득 조선의 영조가 떠오른다.
북위는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왕조다. 북위가 없었으면 북주, 북제도, 수‧당도 없었다. 북위의 포용성은 남북조 이후의 왕조가 대제국으로 존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북위가 없었다면 한족과 이적은 영원히 융합될 길이 없었다. (P.63)
전진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한 왕조가 북위다. 북위는 난립했던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본격적인 남북조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북위 태무제의 강력한 무력을 실감하는 동시에 내치를 전담한 최호의 피살은 역시 토사구팽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기에 거리낌 없이 제거하였으리라. 태무제가 영토 면에서 북조를 통일하였다면, 효문제는 한화 정책을 통해 한족과 호족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였다. 풍태후의 섭정 기간을 그의 업적에 포함하는 게 온당한지 의론이 갈릴 수 있겠으나 낙양 천도와 한화 정책은 그의 큰 업적이다. 당대의 시각으로서는 평이 엇갈리고 공과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중국 역사 전체로 보아서는 획기적인 결정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효문제 탁발굉이 이룬 업적은 한족 학자들이 아무리 폄훼할지라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인들은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탁발굉이야말로 남북 민족이 하나로 융합해 현대의 중국 민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는 게 21세기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평이다. (P.182)
북위의 이주씨 일족과 고환, 남조 양나라의 후경이 수행한 역할은 결과적으로 유사하다. 전자는 북위를 무너뜨리고 동위와 서위 분열을 촉진하였고, 후자는 양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부의 침략에 나라가 무너진 게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당당한 국가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더욱이 후자의 경우 양무제가 후경의 투항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탄압하려는 시도에서 그의 도발을 촉발하였으니 양무제의 횡사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주목할 것은 후경의 난을 계기로 소륜과 소절, 소역을 비롯해 왕승변, 왕림 등 모두 북조를 향해 스스로 번국으로 칭한 점이다. 이는 분열 시대에는 한족 중심의 강남이 정통성을 잇는다는 이른바 ‘강남정삭(江南正朔)’의 신화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종전의 정통이 부용으로 전락하고, 비정통이 일약 정통이 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P.347-348)
저자는 후경의 난이 남북조 시대에서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우선 양나라의 내홍을 틈타 북주와 북제가 야금야금 양나라의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서위(西魏)는 형주와 촉 땅을 점령하여 영토적으로 양나라는 물론 북제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양나라를 이은 진나라는 양자강 이남의 동쪽 지역을 차지한 소국으로 쪼그라들어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양나라의 왕족들이 저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와중에서 든든한 배후를 기대하며 북제와 북주의 신하로 자처한 점이다. 원래 동진 이후부터 남조의 한족 국가가 정통이었다면 이제 정통이 오랑캐 국가인 북조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영토와 정통에서 일대 우위를 점한 북조 국가, 특히 북주(北周)와 계승 국가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된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임금이 성군 또는 명군인데 나라가 패망하는 경우는 없다. 대개 왕국의 마지막 임금은 폭군, 혼군 또는 암군이거나 나이 어린 명목상의 군주인 경우가 많다. 남조 제나라의 임금들은 하나같이 암울하였으며 진후주 진숙보는 암군으로 악명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진나라의 멸망은 진선제 진욱이 앞당긴 요인도 있다. 그는 자국의 역량을 알지 못한 채 북주의 꾐에 빠져 북제 공격에 동참하였으니, 참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모른 셈이다.
저자는 남조 국가의 잇따른 몰락 원인을 노장사상과 불가사상의 횡행으로 해석한다. 도가와 불가는 개인적 차원의 수양에서라면 올바른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국가 통치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에서는 질서유지와 생계보전이 중요하다. 모두가 선약을 복용하거나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유학이 통치이념인 한나라를 뒤이은 시대임에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악행이 빈발하였다. 여기에는 외부 요인인 호족의 침입도 한몫 크게 하였지만, 남조의 몰락은 이처럼 이념적, 도덕적 퇴행의 영향도 크다.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완고하였던 유가사상에 대한 반발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이 시대를 단순히 혼돈과 퇴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새로운 질서 수립을 향한 과도기적 혼란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의의를 상기한다. 1권에서 이미 밝혔듯이 저자는 기존 한족 중심의 왜곡되고 폄훼된 중화주의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중국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제언한다. 중국사는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중국 지역에 출몰한 여러 민족과 왕조들의 지분을 공정하게 배분하고 인식하는 것, 그것은 비단 중국사뿐만 아니라 역사 해석에 있어 기본적 태도일 것이다.
한족 중심의 기존 사서를 거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중국사가 한족의 역사가 아닌 북방 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역사적 진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사를 한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족과 몽골족 및 만주족 등 북방 민족 전체가 함께 만든 동아시아의 역사로 봐야 하는 이유다. (P.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