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다음 이야기 2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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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그래도 1권의 혼란스러움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북조의 경우 무수한 왕조가 난립했던 극도의 혼란기를 일차적으로 전진(前秦)이 정리하였으며, 전진 멸망 후 잠시 어수선한 상황을 재차 수습한 게 북위(北魏). 북위가 이후 동서로 나뉘고 각각 북주와 북제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남조의 경우는 더욱 단순한데, 동진에 이어 송, , , 진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새 왕조의 개창 과정이 대개 평화롭지 않기에 혼란과 살상이 수반되지만 어쨌든 단일 왕조이므로 북조에 비해서는 따라가기가 용이한 편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교체사를 접하다 보면 비슷한 유형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걸 알 수 있다. 한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 혼군 또는 암군이 나타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족 간 다툼과 권신의 발호가 잇따르는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권신이 결국 명목뿐인 왕좌를 찬탈한다. 북조도 그렇지만 남조의 왕조 교체가 대부분 이런 패턴을 따른다.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를 다룬 책을 보면서 국가 간 전쟁에서 수십만 병사를 생매장하는 등의 잔혹 행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훑다 보니 이 시대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한족과 호족의 대립이 시대적 틀을 구분 짓기에 동족이라는 인식이 약하며 이로 인해 잔혹 행위가 일반화된 측면도 있다. 게다가 유학이라는 사회이념마저 무너지다 보니 권력자의 기분 여하에 따라 인명은 그야말로 파리목숨에 불과하다. 사치, 살인, 고문, 강간에 갖은 패륜 행위 등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악행을 이 시대에 한꺼번에 목도할 수 있다. 중국사의 여러 분열 시기 중에 위진남북조 시대가 단연코 가장 어지러운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한다. 이때의 영웅은 <삼국지연의>의 조조처럼 간웅(奸雄)이어야 하지 유비 같은 정인군자형의 영웅은 나오기도 어렵고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권만 하더라도 남조에서 송의 개창자 송무제 유유와 송문제, 양의 창건자 양무제 소연, 북조에서 북위의 태무제와 효문제가 대표적이다. 모두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들이지만 공과가 극명하기에 그들을 위대한 영웅이라 기리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남연(南燕)의 모용덕을 기억하고 싶다. 단명한 왕조이고 세력도 약하였기에 자체로서는 주목받기 어렵지만, 창건자 모용덕이 혼돈의 시기에 덕정을 베풀어 백성을 안정시킨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항상 그러하지만 그가 더욱 오래 살았거나 계승자가 다소나마 더 현명하였다면 남연의 수명이 그리 짧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유는 크게 안심하며 성 위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북벌의 거동은 이로써 중지됐다.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며 관중을 손에 넣었다가 이내 다시 잃은 것은 유유의 일생에서 최대 실패작에 해당한다. (P.55-56)

 

송무제 유유가 동진의 명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두 가지 실책을 지적한다. 먼저 유유는 동진을 평정한 후 북벌을 감행하여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장안과 낙양을 점령하였다. 이른바 중원을 차지하였으니 민심을 수습하고 세력을 공고히 하였으면 이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그는 빨리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얼른 도성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벌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동진을 뒤엎고 새 왕조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유유는 동진의 황제를 살해함으로써 이후 하나의 악습의 시조가 되었다. 후환을 없애겠다는 단순한 의도였으나 후대에서는 더욱 확장하여 황제뿐만 아니라 왕실과 씨족 전체를 도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송문제는 원가지치(元嘉之治)’라는 수식어로 알 수 있듯이 혼란의 시대에 나름 30년 가까이 안정기를 구축한 군주다. 이때가 송의 최전성기였는데 시호로 알 수 있듯 그는 문치(文治)의 임금이었다. 말년의 그는 북벌을 가볍게 생각하고 북위를 공격하다가 일패도지하고, 후사 문제로 자식에게 시해를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현명한 군주가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져 비명횡사하는 사례는 후대의 양무제도 있다. 양무제는 양나라의 개창자이다. 그는 거의 50년 가까이 재위에 있었는데 86세에 궁궐에서 굶어 죽었다. 일단 그렇게 노년에 이르기까지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고, 사실상 양나라의 건국과 패망에 동시에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노망이 날 때까지 옥좌를 유지하지 않고 태자에게 일찌감치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아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관리하였다면 자신의 삶과 양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으리라. 문득 조선의 영조가 떠오른다.

 

북위는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왕조다. 북위가 없었으면 북주, 북제도, 당도 없었다. 북위의 포용성은 남북조 이후의 왕조가 대제국으로 존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북위가 없었다면 한족과 이적은 영원히 융합될 길이 없었다. (P.63)

 

전진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한 왕조가 북위다. 북위는 난립했던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본격적인 남북조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북위 태무제의 강력한 무력을 실감하는 동시에 내치를 전담한 최호의 피살은 역시 토사구팽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기에 거리낌 없이 제거하였으리라. 태무제가 영토 면에서 북조를 통일하였다면, 효문제는 한화 정책을 통해 한족과 호족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였다. 풍태후의 섭정 기간을 그의 업적에 포함하는 게 온당한지 의론이 갈릴 수 있겠으나 낙양 천도와 한화 정책은 그의 큰 업적이다. 당대의 시각으로서는 평이 엇갈리고 공과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중국 역사 전체로 보아서는 획기적인 결정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효문제 탁발굉이 이룬 업적은 한족 학자들이 아무리 폄훼할지라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인들은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탁발굉이야말로 남북 민족이 하나로 융합해 현대의 중국 민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는 게 21세기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평이다. (P.182)

 

북위의 이주씨 일족과 고환, 남조 양나라의 후경이 수행한 역할은 결과적으로 유사하다. 전자는 북위를 무너뜨리고 동위와 서위 분열을 촉진하였고, 후자는 양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부의 침략에 나라가 무너진 게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당당한 국가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더욱이 후자의 경우 양무제가 후경의 투항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탄압하려는 시도에서 그의 도발을 촉발하였으니 양무제의 횡사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주목할 것은 후경의 난을 계기로 소륜과 소절, 소역을 비롯해 왕승변, 왕림 등 모두 북조를 향해 스스로 번국으로 칭한 점이다. 이는 분열 시대에는 한족 중심의 강남이 정통성을 잇는다는 이른바 강남정삭(江南正朔)’의 신화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종전의 정통이 부용으로 전락하고, 비정통이 일약 정통이 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P.347-348)

 

저자는 후경의 난이 남북조 시대에서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우선 양나라의 내홍을 틈타 북주와 북제가 야금야금 양나라의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서위(西魏)는 형주와 촉 땅을 점령하여 영토적으로 양나라는 물론 북제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양나라를 이은 진나라는 양자강 이남의 동쪽 지역을 차지한 소국으로 쪼그라들어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양나라의 왕족들이 저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와중에서 든든한 배후를 기대하며 북제와 북주의 신하로 자처한 점이다. 원래 동진 이후부터 남조의 한족 국가가 정통이었다면 이제 정통이 오랑캐 국가인 북조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영토와 정통에서 일대 우위를 점한 북조 국가, 특히 북주(北周)와 계승 국가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된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임금이 성군 또는 명군인데 나라가 패망하는 경우는 없다. 대개 왕국의 마지막 임금은 폭군, 혼군 또는 암군이거나 나이 어린 명목상의 군주인 경우가 많다. 남조 제나라의 임금들은 하나같이 암울하였으며 진후주 진숙보는 암군으로 악명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진나라의 멸망은 진선제 진욱이 앞당긴 요인도 있다. 그는 자국의 역량을 알지 못한 채 북주의 꾐에 빠져 북제 공격에 동참하였으니, 참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모른 셈이다.

 

저자는 남조 국가의 잇따른 몰락 원인을 노장사상과 불가사상의 횡행으로 해석한다. 도가와 불가는 개인적 차원의 수양에서라면 올바른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국가 통치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에서는 질서유지와 생계보전이 중요하다. 모두가 선약을 복용하거나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유학이 통치이념인 한나라를 뒤이은 시대임에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악행이 빈발하였다. 여기에는 외부 요인인 호족의 침입도 한몫 크게 하였지만, 남조의 몰락은 이처럼 이념적, 도덕적 퇴행의 영향도 크다.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완고하였던 유가사상에 대한 반발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이 시대를 단순히 혼돈과 퇴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새로운 질서 수립을 향한 과도기적 혼란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의의를 상기한다. 1권에서 이미 밝혔듯이 저자는 기존 한족 중심의 왜곡되고 폄훼된 중화주의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중국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제언한다. 중국사는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중국 지역에 출몰한 여러 민족과 왕조들의 지분을 공정하게 배분하고 인식하는 것, 그것은 비단 중국사뿐만 아니라 역사 해석에 있어 기본적 태도일 것이다.

 

한족 중심의 기존 사서를 거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중국사가 한족의 역사가 아닌 북방 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역사적 진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사를 한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족과 몽골족 및 만주족 등 북방 민족 전체가 함께 만든 동아시아의 역사로 봐야 하는 이유다.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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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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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낯선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보다 이후 작가의 이름에서 파생된 한 심리학적, 병리학적 용어로 대중에게 더 낯익다. 마조히즘, 즉 피학성애라는 변태성욕에 빠진 남성과 그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어쨌거나 적절한 명칭을 붙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가로서는 기분 나쁘고 불만을 품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게 해줘요. 아주 거만한 모습을 보여 줘요. 폭군이 되어줘요.” 나는 극히 격앙되어 소리쳤다. (P.54)

 

그렇게 오만해져 봐요.” 나는 소리쳤다. “발로 나를 밟아줘요.” (P.77)

 

나를 때려줘요.” 나는 애원했다. “무자비하게 때려줘요.” (P.81)

 

제베린이라는 한 신사가 반다라는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친분을 나누다 보니 그의 독특한 성적 취향을 반다가 거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른바 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제베린의 되풀이되는 피학 욕구는 그녀에게 잠재된 가학적 본능을 일깨우고 양자는 채찍의 휘두름과, 자발적 노예 학대 행위를 통해 그들만의 사랑을 지속해 간다.

 

나는 당신을 더욱더 깊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나를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당신을 사모하고 숭배할 겁니다. 지금까지 내게 한 당신의 행동은 나의 피에 불을 붙여 주고 온 감각을 도취하게 만들었습니다.” (P.130)

 

이것이 마조히즘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인해 가학성애, 즉 사디즘은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고통과 학대에서 쾌감을 얻는 심리상태는 쉽사리 동감하기 어렵지만, 순전한 상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움도 알고 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므로.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제베린을 다분히 일반적 사람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 여인이 아니라 돌로 된 비너스상에 애정을 품는다든가, 사춘기 시절 친척 아주머니에게 호되게 매질을 당해 남자다운 태도를 포기한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 제베린은 남달리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내 경우엔 모든 것이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기서 자양분을 섭취하지요. 나는 조숙했으며 극히 민감했어요.” (P.69)

 

이런 요인들이 한데 섞여 그의 성적 취향을 형성하였지만 이를 실현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피학은 가학을 전제로 하는데, 자신에게 기꺼이 학대를 가할 여성을 찾는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여기서의 반다처럼. 더구나 비정상적인 애정 관계에 보수적인 유럽 문화도 한몫하였으리라. 두 사람이 만나고 마조히즘 행위를 실현하는 무대가 카르파티아 산속의 조그만 휴양지”(P.22)로 유럽 본류와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곳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동전의 양면이다. 한 쌍이 상반되는 성애 감각을 지녀야 행위로 성립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제베린에 호응하는 반다도 흥미롭다. 미모의 젊고 부유한 과부인 그녀는 제베린의 구혼에 유보적 태도다. 자신이 진정으로 내키지 않는데 굳이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애정관은 보면 볼수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적이다. 당대로서는 이상하고 마뜩잖게 여겨질 의견을 반다는 서슴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에서 그녀가 쉽게 제베린의 바람을 실현시켜 줄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주저하였음을 작가는 보여준다. 그녀는 거듭해서 제베린에게 경고한다. 그의 피학 욕구가 점차 그녀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으며, 그녀 또한 억제하지 못할 가학 욕구가 강해지고 있음을 말이다. 전통적 모럴과 배치되는 욕망이므로.

 

! 당신은 정말이지 여자를 철저하게 타락시킬 남자군요!” (P.67)

 

너는 내 기질 속에 잠들어 있던 위험한 성향을 일깨운 거야.” (P.84)

 

난 너 따위 인간을 조소하고 경멸해. 나같이 돼먹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여자한테 눈이 멀어 자신을 노리갯감으로 내놓다니! 넌 이제 내 애인이 아니야. 생사가 내 기분 여하에 달린, 노예일 뿐이야.” (P.146)

 

반다를 향한 제베린의 애정은 한결같지만, 반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제베린은 애정이지만, 반다는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남자에게 애정을 잃는다. 그녀가 진정 바라는 남성상은 제베린 유형이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젊은 그리스 남자다. 여성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는 거친 수컷으로서의 남성.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그에게 소유 당하고 싶은 남성. 이른바 나쁜 남자 또는 B형 남자에게 이끌리는 여성의 일면이리라.

 

나는 그 사람을 반드시 소유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P.197)

 

여자란 무릇 우러러볼 만한 남자를 원하거든.“ (P.209)

 

제베린에 대한 반다의 감정은 처음엔 분명 진정이었다. 처음엔 부탁을 들어주려는 마음과 일종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일시적 쾌감을 느꼈겠지만, 계속해서 자신에게 무릎 꿇고 노예 취급당하며 채찍 맞기를 소망하는 남자에게 지속 가능한 애정을 품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리스 남자와 합작하여 제베린에게 처절할 정도로 매질을 가한 행위는 훈육적 의도가 아예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안점이 아님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돌연 나는 끔찍할 정도로 분명하게 홀로페르네스와 아가멤논 이후로 눈먼 열정과 욕망이 남자들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배반하는 여자의 덫, 그물 속이고, 고난과 예속과 죽음이다.

나는 꼭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P.224)

 

우리는 흔히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변태 성애라 지칭한다. 변태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정상적인 성애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단순히 개인적, 사회적 도덕 감정에 저촉하는지 여부를 적용하면 괜찮은가. 이의 위배는 교정과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P.104)

 

작가는 사랑의 맹목성을 인정한다. 이성과 도덕률로 사랑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며, 문학과 예술은 무미건조한 장르로 낙후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채찍질에도 황홀감을 느끼며 더 많은 학대를 갈구하는 제베린을 섣불리 비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 독일 화가는 반다를 마녀로 부르는데, 비난보다는 경외와 찬탄,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을 압축한 표현으로 봐야 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런 내용의 소설을 썼으니 확실히 센세이셔널하다. 요즘이야 워낙 자극적인 내용이 각종 매체에서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작가의 표현은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사드 후작과 달리 자허마조흐는 이 작품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비록 자신으로서는 사디즘과 나란히 불리는 것에 불만스럽겠지만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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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 생명의 경제학 -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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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내가 경애하는 작가다. 예술평론가로서도 탁월하지만 후세에 남긴 그의 영향은 단연 사회사상가로서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소개된 내용을 본 이후 김석희 번역본을 두세 번 읽었는데, 대강의 내용은 어렴풋하게 다가왔지만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낀 채 방치하였다. 수년이 경과한 시점에 새로운 번역본으로 재차 도전해 본다.

 

이 책은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에 대한 반론이다. 그가 보기에 아담 스미스에서 비롯하여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집대성된 경제학-러스킨은 상업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은 학문의 목적 자체를 잘못 지향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학문인데 인간이 아닌 사물과 로봇을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단지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학에 관심이 없듯이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P.27)

 

전통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에서 출발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중요성이 이어진다. 판매자는 최고의 가격에 재화를 판매하는 게 당연하고, 구매자는 최저의 가격에 재화를 구매하는 게 합리적이다. 시장 구성원이 각자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에 매진하는 와중에 발견하는 사실은 적정한 수준의 가격보다 높거나 낮을수록 일방에게는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나의 이익이 상대방에게 어떤 결과를 헤아릴 필요 없이 가능한 가장 큰 이익을 구하는 게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오히려 권장되기조차 한다. 따라서 고용주와 고용인은 대립하는 상호 이해관계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전투적인 관계로 악화되기 마련인데, 러스킨은 이러한 관계를 거부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최대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정의와 애정이다. (P.32)

 

작가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앞서 온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라고 말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먼저 와서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와 게을러서 늦게 온 노동자에게 똑같은 대우를 한다면 누가 성실하게 일하겠는가?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보편적 인식룰이다. 러스킨의 미덕은 여기서 시작한다.

 

싼 가격의 상품이 고품질의 상품을 구축하고,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력이 비싼 노동력을 대체하는 현상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소비자로서 한정된 예산으로 값싸게 지출하면 현명하며, 경영자로서 지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 모든 게 인간과 무관하다면 말이다. 무한정한 가격 경쟁이 벌어지면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입을 얻지 못한다. 인간이 배제된 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러스킨의 질문이다.

 

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P.72)

 

러스킨은 부를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인간을 죽어가게 하고, 사회를 타락시키는 부는 참다운 부가 아니다. 부는 인간과 사회를 살아가게 하고 생명이 약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부의 본질이므로.

 

가치 있다는 말은 곧 생명에 유용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P.156)

 

생명이 곧 부다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P.195)

 

이것이 러스킨의 경제학을 생명의 경제학이라 지칭하는 까닭이다. 인간과는 동떨어진 창백한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정의로운 부를 구현하기 위한 경제학, 즉 정치경제학이 그의 관심사다. 나중에 온 노동자에게도 동일한 임금이 지불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노동자로서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할 적정 수준의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기존 노동 계층의 삶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정당한 임금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노동에 대한 공평하고 정당한 보수는 그 일을 하기 원하는 노동자의 숫자에 전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119)

 

그러면 부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러스킨은 정의의 역할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의 편중을 막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부에 함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 그에게 부와 정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러스킨은 국가와 개인에게 각각 요구한다. 국가는 단순히 노동자의 고용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에 유용한 고용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다수의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국가가 부유한 국가라고 하면서. 개인도 마찬가지다. 최저 생존에 급급해하는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삶이 가능하도록 주장해야 한다.

 

그대여! 먹고 살 권리를 주장하되, 거룩하고 온전하고 순전한 삶을 살 권리를 보다 큰 목소리로 높여 주장하라. (P.201)

 

러스킨의 주장은 일견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보인다. 전통경제학에 기반한 자본주의 비판에서는 맥락이 닿아 있지만, 사유재산권의 강화와 개인의 가치에 대한 중시에서는 결이 다르다. 영국 노동당의 정신적 지주가 그의 사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럴듯하다. 게다가 그는 수동적인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 노력을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그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예시하고 있다. 전혀 생소하지 않고 근년 들어 유행하는 공정무역의 기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당초 잡지에 연재하다가 갑작스레 중단된 내용을 정리하여 출판한 게 이 책이다.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갖춘 저작이 아니기에 얼핏 산만해 보이지만 실은 고도로 함축적이고 예언적이다. 낯선 논의에 당황할 수 있지만 그의 문장과 주장에서 느끼는 따스함은 비할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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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삼국유사 시리즈
정진원 지음 / 맑은소리맑은나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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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를 다룬 대표적인 두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 중 확실히 후자의 대중적 인기가 월등히 더 높다. 모 출판사는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포함할 정도니까. <삼국유사>는 순수한 역사서 외에도 그 안에 수록된 시, 설화 등으로 인한 흥미와 문학사적 가치도 인기를 높이는 일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유사>의 여러 인물과 이야기 중 여성에 초점을 두고 파헤쳐 소개하고 있다. 여성 대상 불교 잡지에 연재하였던 연유로 불교적 내용과 함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있음을 유념하고 읽으면 도움이 된다.

 

전체 개의 장으로 나눠서 첫째 장은 삼국유사 삼대 미녀인 수로부인, 도화녀, 선화공주 소개와 사금갑 고사의 재해석을 다룬다. 둘째 장은 개국시조 어머니들인 유화부인, 알영부인, 허황후를 부각한다. 셋째 장은 성모와 국모 격에 해당하는 선도산 성모, 지소태후와 신라의 세 여왕을 재조명한다. 넷째 장은 고승을 뒷받침한 여인들이며 마지막 장은 관세음보살을 집중 조명한다.

 

두 편의 향가 창작의 배경이 되었던 수로부인의 정체를 추적하면서 그녀와 신적 존재의 접촉은 단순한 납치 행위가 아니라 신령함을 얻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새롭다. 서동요로 유명한 선화공주도 일방적인 뜬소문과 피해의 운명을 개척하여 당당히 백제 왕비로 거듭나는 모습을 부각한다. 이처럼 저자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새로운 관점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주인공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스쳐 지나갔던 역사 속에서 새삼 반짝이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크다.

 

유화부인은 단순히 주몽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역사 속의 대모신이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은 사실상 신라 건국의 쌍두마차였다고 강조한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어린 진흥왕의 섭정이었음과 미실을 능가하는 화려한 행적을 통해 신라의 국모였음도 웅변한다. 선덕여왕의 뛰어남에 관한 확인과 함께 무시당하고 폄훼된 진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실체가 사서 기록과 다를 가능성도 제기한다.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며 유실되거나 영웅성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여성의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었으니. 이를 역사상의 자연적 흐름으로 이해할 건지 아니면 남성의 고의와 음모가 야기한 날조와 왜곡 행위로 간주할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가 되풀이하는 문구가 있다. “<삼국유사> 속에는 훌륭한 남자 뒤에 항상 열 배 뛰어난 여인이 숨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실 것.” (P.137). 연재 대상을 지나치게 고려하였던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의 원래 성향인지 모르겠으나 저자는 잊히고 무시된 여성 인물의 제자리를 찾는 데서 한발 나아가 역할과 중요성을 더욱 힘주어 말한다, 때로는 무리라고 할 정도로.

 

선덕여왕의 일화인 여근곡과 옥문지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과 성적 해석이 결부되어 일반인에게도 제법 알려진 일화다. 저자는 여왕의 탁월한 정치력을 강조하고자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어렵다. 이 사건은 수천 명의 백제 군사가 아무도 모르게 신라 국토를 횡단하고 도성 가까이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토록 당시 신라의 국방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해결 안 되어 수모를 받으면서도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겠는가. 진덕여왕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평정하고 나당 동맹을 맺은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과소 평가된 여왕으로 힘주어 말하지만,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일개 여왕이 무슨 대단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진흥왕의 초반 업적을 모두 지소태후의 것으로 돌리는 것과 비교하면 모순된 태도에 가깝다. 진덕여왕은 역시 허수아비로 보는 게 맞다. 하물며 진성여왕은? 그녀가 능력자라면 쇠망하던 신라를 중흥시켰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박혁거세에 가려 이름만 남아 있던 알영은 단순히 알영부인이 아니라 신라 건국의 이성(二聖), ‘알영여왕으로서 당당히 신라역사를 열었던 그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P.62)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다양한 변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애닯게 죽었는데 성모나 신모가 되었으면 좋겠고 망부석이라도 남아 기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P.89)

 

알영부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 혁거세와 알영을 낳은 선도성모와 서라벌의 선도산 성모,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의 주인공의 연관 관계는 흥미롭다. 망부석이 된 줄 알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이야기 갈래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으로 달라지는 대목에서는 설화의 속성과 함께 당대인의 바람도 엿볼 수 있어 유익하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지소태후의 대단한 행적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신라 불국토 프로젝트를 위해 애쓴 미실과 선덕여왕, 그리고 자장율사의 이야기는 새롭다. 의상대사, 원효대사에, 김유신의 남매 이야기는 원래 유명하지만.

 

신라의 본격적인 여왕 제도 시행에는 지소태후의 섭정이라는 막강한 성공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지소는 신라의 왕과 여왕을 길러낸 명실상부한 신라의 어머니, 신라의 국모인 것이다. (P.99)

 

저자가 <삼국유사> 속의 자잘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다듬어서 세상에 소개하는 까닭은 스스로도 밝혔듯이 풍부한 문화유산 콘텐츠로 자리 잡고 이것이 문화적 한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임은 프롤로그와 본문 속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지자체의 문화콘텐츠, 그 중에서도 역사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발굴하거나 조성할 수 있고 그 내용을 연관 지을 수 있는 K-Culture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K-Culture의 바탕이 삼국유사와 같은 K-Classic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P.21)

 

확실히 이 책을 보면 <삼국유사>에 이런 인물 또는 이야기가 있었나 싶은 소재를 저자가 잘 소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읽은 지 한참 된 <삼국유사>를 다시 정독해 보고 싶은 욕구마저 생길 정도다. 이 책의 미덕이 부차적 요인으로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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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전 - 중국의 전설
선용 엮음, 홍의남 그림 / 신아출판사(SINA)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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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유명한 설화다. 일전에 중국 신화와 전설, 지괴소설에 관심을 가졌을 때 언급되었는데 의외로 국내에 번역본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도 시중 서점에서 백사전을 검색하면 학습만화를 제외하면 이 책이 유일하다. <중국 민간전설 백사전>은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데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백사전 연구 논문이다. 지금 이 책도 아동문학선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아쉬움이 있지만 원작을 대강이나마 맛본다는 측면에서 대안이 없다.

 

전생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여인으로 변신하여 은인의 아내가 되는 천년 묵은 흰 뱀 백소정. 허선은 아내의 도움으로 약국 종업원에서 당당한 약국 주인으로 변신하게 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 남았다. 정말 그럴까. 중국 설화에서 중대한 금기사항 중 하나는 요괴가 인간 세상에서 인간처럼 사는 일이다. 인간으로 변신한 요괴의 선과 악은 여기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하기에 어울려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교유는 세상 만물의 원리와 질서를 흩뜨리기에 엄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다.

 

백소정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너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우리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와서는 안 될 인간 세상으로 와서 괜한 근심거리를 만든 거야.” (P.135)

 

백소정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허선과 결혼하고 의원과 약방을 차려 병자를 구제하는 일체의 행위는 오로지 세상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의 소산이다. 그녀가 비록 요괴라고 하지만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례를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허선과 백소정은 이 이야기에서 오로지 선한 캐릭터로 존재한다. 백소정이 딱 한 번 세상을 뒤흔든 경우가 있는데, 법해 선사로부터 자신의 남편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존재의의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법해 선사와 천신들과, 백소정과 소청의 무리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이 전설의 기본 바탕은 매우 불교적이다. 백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천년 동안 수행을 한다는 설정 외에 법해 선사라는 지극히 도력이 높은 스님의 존재, 그것도 모자라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 등. 한편 도가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백소정의 정체를 처음으로 허선에게 일깨우는 도사, 의식을 잃은 허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소정이 영약을 구하려고 찾아가는 신선들이 사는 선산 등.

 

허선과 백소정이 대체로 점잖고 온화하며 수동적인 인물인 데 비해, 소청은 이야기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 인물이다. 푸른 뱀이 변신한 소청은 비록 도력에서는 백소정에 딸리지만 호수의 물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능력자다. 그녀가 허선과 백소정을 엮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지극정성이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화려한 언변에 뛰어난 재치를 겸비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하겠다.

 

언니, 설마 우리에게 며칠 더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 있지. 그러나 인연이란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야. 만나야 하는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인가 또 만나게 될 거야!” (P.36)

 

편자도 그렇고 작중 인물들도 그러하고 인연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연은 불법의 종교적 의미로서도 중요하지만, 세속적 관점에서도 깊은 중요성을 지닌다. 허선과 백소정의 만남은 전생에서부터 예정된 인연이었고, 백소정과 소청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허선과 백소정의 결합은 인연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앞당긴 부작용으로 인해 법해 선사가 상황 정리에 나서게끔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분이 없다는 것입니까?”

있지요. 분명 연분은 있습니다만 그녀가 수행을 다 끝내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만나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니랍니다.” (P.157)

 

자체로서는 종교, 사랑, 그리고 환상이 결합한 흥미로운 전설이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정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관세음보살과 법해 선사는 시종일관 백소정의 잘못을 지적한다. 천년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수행을 도중에 파하고 인간 세상에 침입하였다고 말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흰 뱀인 백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천년이란 긴긴 시간을 엄격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수행 끝의 깨달음은 백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 책에서 관련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수행은 무조건적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를 중도에 깨는 것은 금기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 백소정이 남편과 아이와 영원히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단오절에 소청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 덕분에 허선은 백소정에게 웅황주를 마시게 할 기회를 얻는데, 소청이 숨어야 하는 연유는 이 책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은 영단 한 알을 꺼내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내가 한 번만 도와주지. 이 영단을 그에게 먹이면 바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 빨리 산속으로 되돌아가서 하던 수행을 계속 하여라.” (P.149)

 

백사전 전설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해피엔딩이다. 백사도 원래 수행으로 돌아가고, 청사 역시 수행의 길에 나선다. 법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계획을 품고 있다. 모두가 불도의 세계에 들어서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르다. 요괴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태를 떠나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냉혹하게 끊어버리는 종교의 냉혹함이 두드러진다. 천년 수행이 과연 백사의 자발적 의사인지 알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숨어버리려는 청사는 법해 선사에 잡혀 반강제적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허선의 의사에 관계없이 선사는 허선을 출가승으로 만들 생각을 품고 있다.

 

독서 대상을 아동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엮었기에 원작 전설의 풍요로운 원형이 얼마만큼 유지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백사전 전설의 줄거리와 중요 사건들이 대강이나마 들어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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