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팽 양 열림원 이삭줍기 18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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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걸작이자 마이너리티의 명작.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가로 저명한 테오필 고티에의 존재는 내게 있어 우선적으로 제라르 드 네르발의 친우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서문과 소설로 구분되는데, 서문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갖고 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불과 23세의 젊은 고티에는 나폴레옹 이후 왕정복고 시절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공리주의자들의 예술 검열을 단호히 거부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P.41)

고티에의 공리적 비평가들에 대한 공격은 화려하고 현란하며 재기발랄하다. 서문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보다도 고티에의 대담하며 재치 있고 유려한 문체에 매혹된다. 엄격하고 정연한 이성적 논리를 찾지 말자. 그것은 고티에의 영역을 벗어난다. 고티에는 비판의 화살마저도 아름답고 화려한 세공과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서문과 소설 <모팽 양>이 결합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비록 <모팽 양>은 서문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였지만 서문을 의식하고 지은 글은 아니다. 이 작품은 고티에의 평소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견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몇 가지 초점을 생각해본다.

먼저 관음증의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즐거움이다. <모팽 양>은 도덕 교사나 윤리 교사의 시각에서 볼 때 썩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주인공 달베르의 애인을 갖고자 하는 열망과 아쉬운 대로 로제트와 지내는 정사의 나날이 그러하며, 또한 테오도르 즉, 모팽 양의 남장 차림과 아름다운 미모로 로제트의 열렬한 애정의 육탄공세에 시달리는 모습이 줄타기를 하듯 펼쳐진다. 게다가 테오도르의 시각으로 여성이 보는 남성, 여성이 보는 여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것을 여과 없이 보게 된다. 마지막의 여성으로 돌아온 테오도르와 달베르의 정사 장면은 아름답고 관능적이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남장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은 외형은 어찌되었든 본질에서 있어서는 여성 동성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요즘이야 성적 소수자들의 커밍아웃 목소리가 커지면서 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상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한층 더 음지에 머물던 소재가 아닌가.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테오도르(외관상 남성)에 대한 달베르의 남성 동성애적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테오도르(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로제트의 여성 동성애적 사랑이다. 후자의 경우 물론 로제트는 한치도 모르고 있지만, 테오도르는 이를 의식하고 있으며 가벼운 부분에서는 받아들여 즐기기도 하며, 외부적 방해가 없었으면 선을 넘어갔을 수도 있다. 더구나 마지막에서 테오도르가 떠나기 전 로제트의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다는 표현은 매우 복합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온 사람들로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남성과 남성간, 남성과 여성간, 여성과 여성간에 주고받는 사상과 행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성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연인과 부부간이더라도 완전한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장 여성 테오도르가 바라보고 겪게 되는 남성 사회와 남성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은 여성에게는 충격이며 그들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식적으로 대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며, 외형상 우아하고 정중한 남성일지라도 돌아서서는 바로 술집여자를 품에 안을 정도로 흐트러지고 방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여성에게 남성은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못 된다. 이것은 남성의 본질에 대한 여성주의의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분석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고티에 자신도 예술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문체, 표현과 수사 등에서 최고로 절차탁마함으로써 더더욱 Z을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티에 작품은 매우 아름답고 한편의 아름다운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바라보는 심미안적 즐거움과 호사를 누리는 기쁨을 제공한다. 비평가가 아닌 이상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아름다움을 제쳐놓고 분석을 하려는 미련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티에의 작품은 주제의 심오함과 진지함을 고민하지 말자. 고티에의 미덕은 독자를 아찔하게 하는 빼어난 표현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에 유달리 집착하는 달베르(P.181)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테오도르가 남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는 여자와 같은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갖가지 직업의 남성을 풍자적으로 야유하는 장면(P.424)은 신랄한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테오도르가 달베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치는 연유가 되는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결코 국내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문학계와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깊은 감동과 심오한 사상을 기대한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달리 사랑받는 것이며, 주제의 진지함 대신에 구성의 경쾌함, 문체와 묘사의 탁월함, 재기와 풍자의 신랄함을 주특기로 삼는 작가가 저평가되는 것이다. 아, 물론 후자의 경우 번역상의 난점이 크다는 현실적 장벽도 무시 못 한다.

테오필 고티에를 모르는 이, 고티에를 알지만 이론가로만 알고 있는 이,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는 이,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진부하지 않으며 색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싶은 이의 일독을 권한다.

*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대체적 얄팍함에 익숙하였다면, 섣불리 이 책을 펼쳐들면 큰코 다친다. 판형도 제대로고, 분량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티에의 글은 속도감과 전혀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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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비르지니 - 그린북스 92 그린북스 92
생 피에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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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과 비르지니>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하다가 라마르틴의 <그라지엘라>에 비중 있게 작품내용이 소개되면서 구체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가이드북으로 삼고 있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가람기획)에도 작가와 작품소개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번역본은 참으로 구하기가 어려웠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1960년대 박영사 판(이헌구/이상로 공역)과 1980년대 청목사 판(김종건 역)이 전부다. 하지만 둘 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어 시중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웠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동안 끙끙대다가 중고서점을 통해 간신히 입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용으로 기획된 청목사 판이다.

사연이 남달랐던 만큼 무엇보다 작품내용이 궁금하였다. 비극적 결말의 순결한 사랑의 명작으로 세간에 알려진 평가가 정말로 적정한지...

작품은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 상의 당시 프랑스 식민지 프랑스 섬(현재의 모리셔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문명의 손때가 덜 탄 열대의 섬, 이는 단순한 지역적 배경이 아니라 폴과 비르지니의 순수한 사랑이 잉태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작가는 섬의 자연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일찍이 이 섬의 기행기를 썼던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

폴과 비르지니의 어머니들은 각기 프랑스 본토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섬에 흘러들어왔다. 주류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당대 사회의 패배자이며 주변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상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들과 자녀들의 삶을 꾸려나간다.

생-피에르는 계몽사상가 루소에게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인위와 겉치레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작품 내내 시종일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화자인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긍정적 인간상으로 그려진 반면, 비르지니의 어머니의 백모로 대변되는 프랑스 본국의 사람은 부정적 인간상으로 대비된다.

작품 전반부는 섬에서의 행복한 목가적 생활에 대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찬미가다. 그 속에서 폴과 비르지니의 사랑은 가족에서 연인의 감정으로 서서히 자라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소박하며 아름다운 삶을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밝고 따뜻하며 때로는 감미롭기조차 하다.

작품의 그림자는 비르지니가 프랑스로 떠나게 되면서이다. 부유한 백모에게 수년간 머물며 유산 상속을 받은 후 폴과 결혼하여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주변에서 권유한 결과다. 그 후 작품의 분위기는 급격히 어둡고 무거워진다. 프랑스로 쫓아가고자 하는 폴과 이를 만류하는 화자 간의 기나긴 대화는 세상사의 가식과 허위, 모순, 부패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비르지니가 본국에서 결코 순탄하고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리라는 것의 암시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진지한 대화이므로 오히려 전반적 작품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느낌마저 든다.

조금씩 암시를 드리우며 불길하게 예고된 결말은 마침내 비르지니가 탄 배가 폭풍우로 인하여 섬 앞에서 좌초하고, 비르지니가 거치적거리는 옷을 벗고 구조되기를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본국에서 몇 년간 교육의 결과는 그녀에게 문명인의 수치심을 목숨보다 중시하도록 만들었다.

비르지니와 가족의 비극은 그들이 그릇된 문명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순수한 자연성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폴과 비르지니가 노동을 하며 땀 흘리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만족하였다면 눈물을 웃음이 대신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태의 먼지에 물들어 삶과 사랑의 순수성에 쉽게 감동하지 못하지만 이 작품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제대로 출판되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영어판 중역이 아니라 프랑스어 원전으로 반듯한 새 번역본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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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물고기
J.H.B. 드생 피에르 지음, 채운정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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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인도의 초가집[오두막]>이며, 1790년 작이다. 이 책도 후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재출간 되었을 때는 <인도의 초가집>이라는 원제로 정정하였다.

생-피에르는 <폴과 비르지니>라는 순결한 애정소설을 대표작으로 남긴 작가로 서양에서는 꽤 유명하다. 물론 국내에서는 아는 이가 별로 없지만. <폴과 비르지니>를 읽기 위한 전초 단계로 이 책을 읽는다. 시중에서는 구판과 신판이 모두 절판 상태이다.

번역자의 약력과 겉표지 상단의 독일어 표기를 통해 이 책이 프랑스어 원전 번역이 아니라 독일어 판본의 번역본임을 알 수 있다. 출판 당시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는 거의 잊혀진 작품이라고 작품 해설에서 알려주고 있다. 이 경우는 원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번역하여 출판해 준다는 자체에 무조건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비교적 간단한 구성의 작품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도 명료하다. 영국 왕립 학회에서 진리 탐구를 위하여 파견한 한 철학자가 인도의 최고 브라만 승려를 방문하지만 실망에 싸여 돌아오던 중 폭우를 만나 우연히 몸을 피한 파리아 계급, 즉 불가촉천민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담화를 나누다가 진정한 진리와 행복의 길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이국 취향[인도]을 배경에 깔고, 인위와 허식을 배격하고 자연과 순수를 예찬하는 정신을 높게 옹호하고 있다. 그가 브라만 승려계급의 아집과 독선, 그리고 허식을 간결하지만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이에 바탕을 둔다.

반면, 파리아 계급의 한 남자를 통해 그가 찾고자 한 것, 즉 “어떻게 해야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과연 어디서 그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P.37)에 대한 해답을 깨우친다.

“인간은 순수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 진리를 자연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진리는 오로지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말할 일입니다.” (P.129)

파리아 사내는 자신의 타고난 불행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듣고 본 황제와 귀족들의 자신에 대한 노예가 되는 삶을 통해서 자유롭고 소박한 자연 속 삶의 미덕을 발견하였다.

“저는 그래서 자연보다도 더 현명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정한 법칙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지 않았죠.” (P.104)

생-피에르가 글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대체적으로 동양적 가치관에서 참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지만, 이것만이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세련된 사교계의 취향이 당대를 휩쓸던 서구에서는 미지의 신비스런 동양의 것은 감성적 호기심과 아울러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파리아 사내의 가치관이 보통의 전통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우리 선조들도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가.

오히려 작가의 도덕적 훈육보다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로 받아들여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흐뭇하게 하는 정서적 진정 효과를 만끽하면 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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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운정 2011-04-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군지 정말 글 잘써놨네요
 
나체즈 족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366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지음, 문미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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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의할 점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먼저 이 책은 원작의 요약본이다.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원전의 약 34%를 발췌 번역하였다. 따라서 원전과 같은 문학적 흐름과 향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만 국내 초역인 이 작품의 개괄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그쳐야 한다.

다음으로 이 책 단독으로 읽어도 괜찮지만, 가능하면 <아탈라>와 <르네>도 같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두 작품은 작품의 독자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체즈 족>의 일부이기도 하며 배경과 사건과 인물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으로는 완전한 이해에 부족하다.

나체즈 족은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 주를 중심으로 미시시피 강 동안 중남부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인디언으로서 프랑스 군의 탄압으로 종족이 몰락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 중이던 샤토브리앙은 나체즈 족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명작을 포함한 대작을 구성하였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이국취미의 발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국 프랑스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으로 몰락하는 힘없는 피압박민족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일 수도 있다.

<르네>에서는 소홀히 취급되었던 나체즈 족에 정착한 르네의 신대륙 생활이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르네의 우울과 고뇌가 <르네>에 못지않게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어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도자라는 작가의 명성을 헛되지 않게 하고 있다.

“르네는 무료한 시선으로 자신의 은둔 생활을 둘러보았다. 그의 행복은 참회를 닮았다. 그는 사막과 한 여인과 자유를 원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소유를 망치고 있었다.” (P.85)

“나는 삶이 지겹습니다. 나를 삼킬 듯한 권태에 늘 괴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것들에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나는 기쁨이 없는 덕망 있는 자입니다...나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영원히 잊혀진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P.122)

자신에 대한 우투가미즈의 우정을 보답하고자 셀루타와 결혼하지만 그는 아무런 열정도 기쁨도 갖지 못한다. 그의 마음속에 뿌리깊은 슬픔과 우울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이 아멜리와의 이루어지지 못할 근친상간적 연정의 작용인가 아니면 프랑스 대혁명 전후 당대에 떠돌던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에 대한 작가 자신의 예민한 감성의 기인인가.

작품의 결말은 시사적이다. 르네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나체즈 족은 근거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악인 옹두레는 우투가미즈에 의해 처단된다. 르네는 그 불신앙의 처벌을 받은 것이며, 옹두레는 악의 대가를 받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나체즈 족의 불운과 셀루타의 불행은 무슨 잘못인가? 역시 불신앙과 서양에 대한 불예속의 과오의 대가인가.

이 작품은 한 고독한 프랑스인과 불운한 인디언 종족에 대한 웅장한 비극적 일대 서사시이다. 이 작품이 후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대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탈라>와 <르네>가 제대로 포함된 완역본을 읽을 수 있다면 샤토브리앙이 나체즈 족의 운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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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딸라르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
샤토브리앙 지음, 신곽균 옮김 / 새미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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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 샤토브리앙의 대표작 모음이다. 샤토브리앙?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당장 네이버 검색에 도움을 요청한다. 아, 안심 스테이크의 일종이란다. 샤토브리앙의 요리사가 개발하였다고 하니 샤토브리앙의 까다로운 미식가적 취향을 알 만하다.

어쨌든 국내에는 명성만이 자자한 샤토브리앙의 작품집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지만지고전천줄로 발간된 <나체즈 족>의 요약본이고, 작가 이문열의 이름을 빌린 편집판에 <르네>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샤토브리앙의 명성에 비하여 국내 소개가 미약한 연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조금씩 해소되었다.

<아탈라>와 <르네>는 <기독교의 정수>라는 총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샤토브리앙은 기독교의 호교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영광과 승리를 찬양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도 작품의 기본 입장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순문학적 의의와 가치는 논외로 하고, 작품의 제재와 작가의 주장은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우리나라의 보편적 정서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 영국에 망명하는데, 이 기간에 신생 아메리카대륙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방문하여 신대륙의 문물을 체험한다. 이때 알게 된 나체즈 족은 순진한 무지와 신앙의 영광이라는 테마를 작가에게 각성시킨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이 문학으로서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낭만주의 문학의 개시를 알리는 듯 한 우울과 알지 못할 불안의 정서가 이국적 취향과 결합되어 독자에게 묘한 설레임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문체의 특징으로 생각되는데, 정물화의 박제된 듯 한 세부 묘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듯한 역동적이고 현란하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영탄적 수법 등. 한마디로 독자를 작중 인물에 몰입시키는 능력이 대단하다.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당대에는 소위 세기병이 유행하였다고 하며, 그의 감화를 입지 않은 자유로운 작가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세 작품의 공통점은 참된 신앙 즉, 기독교의 승리다. 인디언인 아탈라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으며 샥타스의 애정에도 신에게 바쳐진 언약을 죽음으로 수호한다. 아멜리는 동생 르네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면서도 수녀원에 들어가서 신에 대한 헌신으로 생을 마친다. 그리고 마지막 아벵세라지인 아벵 하메트와 스페인 귀족의 딸 블랑카는 열렬히 사랑하지만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나 결국 아벵 하메트가 굴복하고 만다.

작가는 독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요령을 알고 있다. 선남선녀의 깨끗하지만 아슬아슬한 사랑, 엇갈리는 사랑과 신앙의 약속, 그리고 순결한 죽음과 카타르시스.

여기에는 단순한 종교적 태도 외에 갈등과 비판이 은연중에 내재해 있다. 아탈라는 굳이 독약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헌신 약속은 정당한 권위를 지닌 신부가 파기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광신적 신앙과 종교적 무지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와 아멜리의 사랑은 남매간의 근친상간적 요소라는 위험하면서도 줄타기의 재미를 제공한다. 외로운 처지의 남매간에 끈끈한 애정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은 이를 점차 인식하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당대의 가치관과 인륜에 위배된다. 아멜리의 선택은 동시대의 수많은 귀족 미혼여성들의 선택처럼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불같은 열정 대신에 물의 평온을 선택하였다.

아벵 하메트와 블랑카의 사랑은 조금 더 복합적이다. 여기에는 종교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다. 블랑카는 이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멋진 아벵 하메트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신앙은 사랑보다 우월하다. 서로는 상대가 신앙을 바꾸기를 기다리면 세월을 보내는데, 무수한 사랑의 예에서 보듯이 결국 남자가 지고 만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행복한 결합을 맺지 못한다. 각자 쓸쓸한 여생을 보낸다. 왜일까? 신앙의 차이는 극복하였지만, 조상의 직접적 원수라는 인륜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 편의 작품은 작가의 종교관을 배제하고 문학적 접근만으로도 상당한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르네>에서 전반부의 르네가 말하는 모호한 우울과 멜랑콜리는 진정 낭만주의의 선도라고 할만하다.

다만 조금 더 세밀한 번역이 뒤따랐으면 좋겠다. <마지막 아벵세라지인의 모험>에서 블랑카와 돈 카를로스의 관계가 누나와 남동생 관계인지 아니면 오빠와 여동생 관계인지 혼용하고 있어 작품 이해를 방해하고 있음은 용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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