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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팽 양 ㅣ 열림원 이삭줍기 18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걸작이자 마이너리티의 명작.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가로 저명한 테오필 고티에의 존재는 내게 있어 우선적으로 제라르 드 네르발의 친우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서문과 소설로 구분되는데, 서문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갖고 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불과 23세의 젊은 고티에는 나폴레옹 이후 왕정복고 시절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공리주의자들의 예술 검열을 단호히 거부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P.41)
고티에의 공리적 비평가들에 대한 공격은 화려하고 현란하며 재기발랄하다. 서문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보다도 고티에의 대담하며 재치 있고 유려한 문체에 매혹된다. 엄격하고 정연한 이성적 논리를 찾지 말자. 그것은 고티에의 영역을 벗어난다. 고티에는 비판의 화살마저도 아름답고 화려한 세공과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서문과 소설 <모팽 양>이 결합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비록 <모팽 양>은 서문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였지만 서문을 의식하고 지은 글은 아니다. 이 작품은 고티에의 평소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견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몇 가지 초점을 생각해본다.
먼저 관음증의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즐거움이다. <모팽 양>은 도덕 교사나 윤리 교사의 시각에서 볼 때 썩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주인공 달베르의 애인을 갖고자 하는 열망과 아쉬운 대로 로제트와 지내는 정사의 나날이 그러하며, 또한 테오도르 즉, 모팽 양의 남장 차림과 아름다운 미모로 로제트의 열렬한 애정의 육탄공세에 시달리는 모습이 줄타기를 하듯 펼쳐진다. 게다가 테오도르의 시각으로 여성이 보는 남성, 여성이 보는 여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것을 여과 없이 보게 된다. 마지막의 여성으로 돌아온 테오도르와 달베르의 정사 장면은 아름답고 관능적이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남장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은 외형은 어찌되었든 본질에서 있어서는 여성 동성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요즘이야 성적 소수자들의 커밍아웃 목소리가 커지면서 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상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한층 더 음지에 머물던 소재가 아닌가.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테오도르(외관상 남성)에 대한 달베르의 남성 동성애적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테오도르(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로제트의 여성 동성애적 사랑이다. 후자의 경우 물론 로제트는 한치도 모르고 있지만, 테오도르는 이를 의식하고 있으며 가벼운 부분에서는 받아들여 즐기기도 하며, 외부적 방해가 없었으면 선을 넘어갔을 수도 있다. 더구나 마지막에서 테오도르가 떠나기 전 로제트의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다는 표현은 매우 복합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온 사람들로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남성과 남성간, 남성과 여성간, 여성과 여성간에 주고받는 사상과 행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성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연인과 부부간이더라도 완전한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장 여성 테오도르가 바라보고 겪게 되는 남성 사회와 남성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은 여성에게는 충격이며 그들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식적으로 대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며, 외형상 우아하고 정중한 남성일지라도 돌아서서는 바로 술집여자를 품에 안을 정도로 흐트러지고 방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여성에게 남성은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못 된다. 이것은 남성의 본질에 대한 여성주의의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분석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고티에 자신도 예술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문체, 표현과 수사 등에서 최고로 절차탁마함으로써 더더욱 Z을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티에 작품은 매우 아름답고 한편의 아름다운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바라보는 심미안적 즐거움과 호사를 누리는 기쁨을 제공한다. 비평가가 아닌 이상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아름다움을 제쳐놓고 분석을 하려는 미련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티에의 작품은 주제의 심오함과 진지함을 고민하지 말자. 고티에의 미덕은 독자를 아찔하게 하는 빼어난 표현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에 유달리 집착하는 달베르(P.181)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테오도르가 남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는 여자와 같은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갖가지 직업의 남성을 풍자적으로 야유하는 장면(P.424)은 신랄한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테오도르가 달베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치는 연유가 되는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결코 국내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문학계와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깊은 감동과 심오한 사상을 기대한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달리 사랑받는 것이며, 주제의 진지함 대신에 구성의 경쾌함, 문체와 묘사의 탁월함, 재기와 풍자의 신랄함을 주특기로 삼는 작가가 저평가되는 것이다. 아, 물론 후자의 경우 번역상의 난점이 크다는 현실적 장벽도 무시 못 한다.
테오필 고티에를 모르는 이, 고티에를 알지만 이론가로만 알고 있는 이,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는 이,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진부하지 않으며 색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싶은 이의 일독을 권한다.
*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대체적 얄팍함에 익숙하였다면, 섣불리 이 책을 펼쳐들면 큰코 다친다. 판형도 제대로고, 분량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티에의 글은 속도감과 전혀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