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테질레아 지만지 고전선집 660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이원양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2011년 클라이스트 사망 10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역이다. 하반기에는 연극 공연도 이루어질 계획이라니 무척 관심 깊다.

작품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두고 있다. 아킬레스[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그리스 군이 승세를 올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인족 군대가 질풍같이 달려들어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을 모두 공격한다.

극은 여인족 군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들의 가공할만한 공격력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아마존 여인군은 연합을 모색하는 트로이군을 격파한 후 그리스군에 도전하여 그들의 여왕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와 결전을 벌인다.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아킬레우스와 그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펜테질레아. 두 남녀 영웅의 대결을 다시 이어지고 아킬레우스는 펜테질레아를 쓰러뜨리고, 그리스군은 아마존 여인군에 강력한 반격을 펼친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펜테질레아의 안정을 위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패배한 것으로 위장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때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그리스군을 공격하는 이유를 밝힌다. 역공을 펼친 여인군으로 그리스군이 다시 패퇴함에 따라 아킬레우스는 싸움의 진실을 밝히고 남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고집 피우다 헤어진다. 아킬레우스는 여왕과 재대결을 요청하고 일부러 싸움에 질 생각이나, 여왕은 오해와 집착으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나중에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 뒤를 따른다.

단막의 전 25장으로 이루어진 극은 발단의 정체모를 여인군의 등장과 그들과의 전투장면을 관찰자의 시각에서 전언 형태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중간도 이따금씩 그러하다가 결말 부분 역시 발단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무대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재현하기는 용이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존 여인국에 대한 설화는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다. 작가는 스키타이, 즉 오늘의 카프카즈를 아마존 국으로 설정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최후에 관하여는 파리스의 화살에 죽었다는 설 외에, 아마존 여인족과 관련되어 죽었다는 설도 존재하는데, 클라이스트는 후자의 가설을 극화한 것이다. 아마존은, 가슴이 없는 여인들이란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 없는 여성들만의 국가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활을 잘 쏠 수 있도록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었다. 그들의 본질은 남성의 독재와 횡포를 벗어나 평화와 온화함을 희구함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살육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극중에 계속 반복되는 ‘장미 축제’로 알 수 있듯이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초적 목적에 근거한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의 관계는 처음에 적대적 대결자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는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전투에 나서고, 펜테질레아는 그를 알지만 그를 꺾으려고 한다. 따라서 대결 장면은 긴장이 팽배하여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아킬레우스는 후에 펜테질레아에게 전사이자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거짓 패배로 둘 사이의 관계는 온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극단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신이다. 전사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그들. 특히 펜테질레아는 자신이 쓰러뜨린 남성을 파트너로 삼아야 하기에 더욱 필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외양만 달리할 뿐 본질상 그들은 동일하다. 여자를 데리고 그리스로 가고자 하는 아킬레우스, 남자를 데리고 테미스키라로 가고자 하는 펜테질레아. 그들은 타협하지 못한다.

여기서 펜테질레아의 돌변하는 인격 변화가 흥미롭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꽃답고 아리따운 처녀로서 언행에 있어 모범적이었음이 결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고 격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그녀의 아킬레우스에 대한 사랑은 외골수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남성을 갈구하는 일개 동물적 여성으로 타락한다. 이는 그녀의 거친 욕설과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이는 아마존 여인족의 본성과 배치되며, 그들의 신의 뜻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극중의 그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지칭이 여왕에서, 미친 여인, 암캐로 점점 추락하며,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예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디아나]의 관계로 비정하며, 펜테질레아의 광란성과 야수성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열광하는 여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왕이자 아들이며, 동생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일화와 연계한다. 또한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우연히 엿보게된 불행한 악타이온의 최후도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멀지 않다. 이는 작가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정말로 미래를 선취한 극작가이다. 고전주의가 득세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의 격동성, 실존주의의 치열한 존재에 대한 의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풍성하다. 후대 작가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를 선구자로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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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부르크 왕자 - 클라이스트 희곡선집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수록작품:
암피트리온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홈부르크 왕자

세 작품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유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는 아니다.

클라이스트는 극을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하게 이끌어간다. 그래서 감초 역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극 분위기는 결말을 알 수 없이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래서 독자는 해피엔딩이면서도 환호의 박수를 쉽사리 보내지 못하며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만다. 그것이 클라이스트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암피트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배경을 두는데, 제우스 신이 남편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남편으로 변장하고 부인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후일 태어난 아들이 유명한 영웅 헤라클레스가 된다.

작가는 여기서 남편 변장의 주피터 신과 진짜 남편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부부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또한 암피트리온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진다. 나아가 선의의 인간이 전능한 신 앞에 무력해지는 장면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도 드러낸다. 즉 단순한 신화극이 아닌 것이다.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와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는 주피터 신의 개입으로 파탄으로 이어진다. 주피터 신의 한때의 유희로 인간 사회와 가정은 절대적 위기 상태에 이른다. 남편의 의심을 자신에 대한 불신과 남편의 식어버린 애정으로 오인한 아내 알크메네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크메네는 진짜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한 주피터 신을 선택하는데, 과연 남편을 몰라보았는지 의문스럽다. 변장한 주피터 신은 끊임없이 자신이 암피트리온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알크메네의 마지막 대사 “아!”와 긴 탄식은 자신의 배반이 무위로 돌아갔음과 주피터 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음에 대한 크나큰 절망의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암피트리온 구분하기.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수단은 너무나 미약하다. 외모, 언행, 습관, 기억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동일한 다른 존재가 자신임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나 자신이 틀림없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확신, 그것은 외부로 보여주어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나아가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나를 나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에서 볼 때 무수한 관계로 형성된 상대적 평가의 산물이다.

암피트리온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는 테베의 왕으로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영웅이다. 그는 아내에게도 헌신하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저항할 수도 없는 외적 요인에 의하여 지위와 가정, 자신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날 운명에 처하였다. 주피터 신이 그나마 돌아갔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여생은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한 주피터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제 종전과는 동일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와 신에 대하여 더이상 믿지 않는다. 그에게는 절대적 단독자의 순간에서 겪게 된 개체적 고독만이 남아있다.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순결한 소녀 케트헨은 어느 순간 슈트랄 백작을 보자마자 자석에 이끌린 듯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발뒤꿈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거나 먹고 한데서 잠을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은 슈트랄 백작이 케트헨에게 마법을 걸어 유혹했다고 케트헨의 아버지가 고발을 하여 비밀재판을 열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중세풍을 물씬 풍기는 설정이자 배경이다.

슈트랄 백작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는 황제의 딸과 혼인하게 되리라는 예지몽의 실현을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과 토지 문제로 갈등을 겪는 투르네크 가문의 쿠니군데를 우연히 위험에서 구해주고, 그녀의 가문이 작센 황제 가문의 방계 후손이라는 점에서 꿈의 실현으로 오인한다.

극은 여기에서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쿠니군데가 사실은 마녀라는 점과 케트헨이 실제로 황제의 딸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실로 중세 동화적 사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황녀 케트헨은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달성하게 되고 쿠니군데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 퇴장한다. 선인은 복을 많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결말이 확연하다.

그런데 케트헨은 어찌보면 노력의 결실만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과 고난은 감탄과 안쓰러움을 갖게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딸이 된 것은 우연적 요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즉 순전한 개인적 성취는 아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용어대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데 지나지 않는다.

극에서 이런 우연성의 발현에 대하여 클라이스트는 일단 케트헨의 인물을 상찬하여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리며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대중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반면 너무나 확연한 우연성을 제시하며 외부에서 행운이 주어지는 고전적, 중세적 가치관을 슬며시 재고하게 만든다.

<홈부르크 왕자>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한마디로 문제적 작품이라고 평할 만하다. 여기에는 클라이스트가 길지 않은 생애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거의 모든 테마가 함축되어 녹아들고 있다. 따라서 이해부득하기조차 한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전개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데,  작가는 자신의 최후작을 독자들이 가볍게 넘기는 것을 싫어하였던 듯 하다.

작품의 커다란 골격은 법질서의 준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대립이다. 홈부르크 왕자는 스웨덴 군과의 전투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병력을 움직이는 말라는 선제후의 명령을 거역하고 뛰어들어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명령 불복종의 사유로 재판을 열어 왕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한다. 여기서 의견이 상충한다. 국가와 군의 골격을 이끄는 법질서의 우위를 주장하는 선제후와 명령 위반은 인정되지만 이를 뛰어넘는 탁월한 전과를 더 크게 인정하자는 왕자와 신하들의 주장.

“그는 법이 지배하든, 자의가 지배하든 우리 조국엔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P.271)

“나는 우연히 생겨난 사생아처럼 찾아오는 승리를 원치 않는다. 나에게 승리의 건강한 자손을 낳아주는 내 왕관의 어머니인, 법을 지지한다.” (P.291)

“적이 자기들의 군기를 내동댕이치고 폐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적을 격파하기 위한 규칙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군을 격파한 규칙이 바로 최고의 규칙입니다!” (P.291)

이는 오늘날도 곱씹을만한 소재가 아니던가. 결과가 좋으면 과정(절차)에 잘못이 있어도 문제없다는 결과론자와, 과정의 적법성에 무게를 두는 과정론자.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절차를 중시하여 최선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를 피하려는 장치다. 그럼에도 결과만 좋으면 그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는 사후 결과를 가지고 사전의 행동 및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성공적 결과는 잘못을 판단할 때 참작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 이성의 결론이다. 그런데 홈부르크 왕자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며 이성과 비이성을 방황한다. 그런 그에게는 ‘마음의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원 참 코트비츠 대령! 당신은 왜 그렇게 천천히 말을 몹니까? 당신은 공격하라는 마음의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까?” (P.240)

“선제후께서는 의무가 명하는 대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P.257)

홈부르크 왕자도 죽음이 명백한 절대적 순간에는 삶을 애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솔직해진다고 한다. 목숨이 갈리는 상황에서 체면이고 허위도 부릴 여유가 없다. 여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통렬한 진실, 즉 생명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만약 법률이 그러하다면 저를 파면시켜 군에서 추방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제 무덤을 본 이래로, 저는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명예로운지 어떤지는 결코 묻지 않겠습니다!” (P.265)

이제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왕자. 그는 이미 삶을 단념하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 선제후의 제안, 만일 그가 판결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파기하겠다! 그를 풀어주겠다!(P.272)는 여전히 매우 해독하기 어렵다. - 마음의 명령에 따른다.

“아, 영원불멸이여, 너는 지금 완전히 내 것이야!...내 양쪽 날개에 날개가 솟아남을 느낀다. 내 정신은 고요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P.302)

이제 그에게 삶과 죽음은 더이상 둘이 아니다. 그는 절대적 순간에 자신에 이르는 각성을 통해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였다.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꿈꾸는 홈부르크 왕자로 시작한 드라마는 새로운 꿈을 꾸는 대단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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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슈로펜슈타인 일가>와 비교할 때 너무나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보면 확실히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천재적 소질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전작과는 월등한 성취에 도달하여 동일 작가의 작품인지 의심마저 일으킬 정도다. 독일 연극사의 3대 희극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 작품은 완벽한 희극이며, 법정극이자 심리극이기도 하다. 단 1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장면간 고조되는 박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의 절묘한 의도라고 하겠다. 확실히 초반 아담 판사의 인물을 형상화하는 부분에서 리히터 서기관과의 대화를 통해 아담 판사의 면모가 짐작된다.

항아리를 깨뜨린 범인을 놓고 벌이는 공방전은 얼핏 하찮고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은 피고 루프레히트의 약혼녀 에바의 정절과 순결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만만치 않다.

“네 명예가 이 항아리에 달려 있었던 거야...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항아리와 함께 네 명예가 깨진 거야.” (P.42)

에바의 어머니 마르테 부인은 따라서 심야에 에바의 방에 있다가 항아리를 깨뜨린 사람이 루프레히트가 되어야만 도덕적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루프레히트는 약혼녀 에바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으로 생각하고 분개한다. 에바는 명확한 해명을 주저한다.

다른 인물들의 성격이 고정되어 크게 변함이 없는 반면, 아담 판사는 극적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한다. 호색하고 욕심 많으면서도 교묘한 척 하지만 사실은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엄숙한 판사에서, 희극적 언행을 보이다가 어떻게 하면 곤경에서 벗어날까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재판을 교묘하게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루프레히트를 범인으로 몰기 힘들자 또 다른 청년, 이어서 악마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웃음과 동정이 교차하는 아담 판사의 인물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실제 무대에서는 대단히 뛰어난 배우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의 연기에 따라 극 전체의 분위기와 흥망이 좌우된다.

검열관 발터와 서기관 리히트는 사건의 실상을 밝히고 이른바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구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매우 상반된다.

발터는 모범적 검열관이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독일판 재현이라고 하겠다. 그는 아담 판사의 두서없는 태도와 모호한 행적에서 사건을 직감하고 교묘히 압박해 들어간다. 그리고 최후에 사법 정의를 선언한다.

서기관은 어떠한가? 그는 아담 판사의 하급자인 동시에 상급자 유고시 판사를 대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실제로 앞마을에서 검열관은 부정을 저지른 판사를 내쫓고 서기관을 판사로 임명하였다. 리히트는 초반부에는 온순한 듯하지만 암암리에 아담 판사를 의심하고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후반부에는 오히려 사건 심리를 주도하여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다. 하지만 새로운 판사 리히트는 과연 아담 판사보다 나은 인물일까?

“공탁금이라던가 이자 절취라던가, 그런 걸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누가 그런 데 대해서 근사한 연설을 하겠나?” (P.18)

이 작품은 아담 판사의 흥미진진한 캐릭터 변화를 지켜보는 즐거움이 넘친다. 또한 자기가 스스로를 재판하면서 범인이 아니게끔 유도하는 우스꽝스러운 시도에서 재판의 역설을 만끽한다. 그리고 아담 판사의 추잡한 에바 유혹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에바의 순결이 빛을 발하며 에바와 루프레히트가 행복한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게 한 치의 삐걱거림도 없이 맞물려서 극적 고양감을 드높이는 수법은 대가의 연륜마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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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펜슈타인 일가
배중환 엮음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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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트는 짧은 생애 동안 8편의 단편소설과 8편의 희곡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비중과 의의를 감안할 때 그의 주력은 단연 희곡이며, 괴테와 실러의 뒤를 이은 19세기 독일 최대의 극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다행히 국내에는 그의 희곡 작품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이제부터 찬찬히 그의 희곡들을 훑어나갈 계획이다. 희곡의 장르적 특성상 문자만으로 온전한 감상과 이해는 어렵겠지만 수박겉핥기나마 그와 그의 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슈로펜슈타인 일가>는 그의 첫 극작품이다. 독일 슈바벤 지역을 배경으로 슈로펜슈타인 가문의 두 가계인 로지츠 가와 바르반트 가의 갈등과 대립, 파멸과 극적인 화해를 서술하고 있다. 착상은 분명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이라는 배경 및 작가의 성향 차이로 어둡고 무거우며 긴박감을 자아내는 극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상속자가 없으면 전 재산이 다른 가계로 넘어가게 되는 오래된 상속계약은 상대방이 자신의 가계를 단절시키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낳게 되고, 이것이 우연한 사고를 오해로 빚게 하고 갈등은 증폭된다. 재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속설은 여기서도 동서양의 구분을 가리지 않는다.

오해와 증오로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 합리적 이성과 설득은 외면되고 처참한 대접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은 오토카르와 아그네스 두 가계의 미래 상속자 간에 싹튼 사랑과 행복한 결합. 하지만 사태는 그들의 사랑을 밝은 빛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만남 사실은 마지막 치명타를 날릴 좋을 기회로 인식되고 만다.

두 젊은 남녀의 죽음으로 양 가계는 극적인 화해를 하는데, 이 화해가 온전할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루페르트의 화해의 손에 질베스터는 얼굴을 돌리고 손을 내미는 장면이 이를 암시하는 게 아닐까.

제재의 선택과 긴박한 구성은 이의 없이 매우 뛰어나다. 가문간 대립과 개인간 사랑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클라이스트 특유의 갈등 증폭적인 긴박한 글쓰기 수법이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다만 우연성의 개입과 인물 대화와 행동의 과도한 비개연성이 작품에의 몰입과 깊은 이해에 역작용을 하고 있어 아쉽다.

<로베르 귀스카르>는 미완성작이다. 현재는 당초 구성에서 단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로베르 귀스카르’ 또는 ‘로베르 기스카르’는 11세기의 실존 인물로서 노르만 왕으로 당시 교황과 연계하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비잔틴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국을 세웠다. 나아가 그는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자 진격하던 중 그리스에서 병사하고 만다.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미완성작이니만큼 전체적 구조와 연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 어렵다. 다만 페스트에 발목 잡혀 귀국을 청원하는 병사들, 병마에 시달리지만 굴복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귀스카르,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는 아들 로베르와 조카 아벨라르 등 극의 재미와 긴장을 강화하는 대립적 요소들이 중첩하고 있어 편린에서나마 흥미진진함을 느낄 수 있다. 완성본이 존재했다면 어쩔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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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진일상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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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으로 서거 200주년을 맞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모음집이다. 짧은 생애 동안에 쓴 8편이 모두 실려 있다.

- 미하엘 콜하스
- O... 후작 부인
- 칠레의 지진
-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
-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
- 버려진 아이
-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 결투

일독 후 클라이스트의 작품 특징에 대한 섣부른 상념은 사건 중심의 서술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묘사가 생략되어 있거나 극히 간략하다. 오직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작품전개가 이루어진다.

더구나 단편에 장편 분량의 사건이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작품의 극적 박진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긴박한 사건전개로 팍팍하여 여유를 갖기 어렵게 한다. 또한 배경묘사 및 심리묘사 등의 부재로 사건의 미묘한 뉘앙스나 암시 등을 느끼기 힘들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골조로만 이루어진 집 같다고나 할까. 그의 글에서 풍윤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클라이스트는 사건 구성과 인물 행동도 매우 극단적이다. 살인, 방화, 교수형, 지진, 타살, 강간 등 상상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인간성의 극단적이고 어두운 면모에 대한 집착, 그의 작품은 결코 밝고 따스하지 않다. 이러한 한계상황의 설정은 인간의 본질적 면모(정신, 행동 등)는 이 순간 드러난다고 생각한 탓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실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대표작 <미하일 콜하스>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고 가정과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정의감은 콜하스를 강도와 살인자로 만들었다.” (P.7)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당한 모욕에 대해 명예를 회복하고, 미래의 시민들에게 질서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P.16)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P.32)

융커에 대한 공격 선언은 점증하는 시민의식과 체제 반동적 귀족제도 간의 갈등 심화 및 폭발을 보여주며, 미흡하나마 정의가 실현되고 자신의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믿기에 콜하스는 행복한 심정으로 단두대에 오른다.

현재의 시각에서 콜하스는 황제-제후에 대한 태생적 의존과 기존 체제의 틀 내에 안주하였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당대에 그의 급진성은 많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O... 후작 부인>은 여주인공의 고독한 양심이 인상적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순결한 그녀는 겸손하지만 의연하게 비난에 대처하며 운명적 삶을 감수하려고 한다. 섣부른 자결을 하지 않고 꿋꿋함으로 버티며, F...백작의 청혼을 거부하는 그녀에게서 20세기 이후 진취적 여성상을 예감할 수 있다.

<칠레의 지진>은 인간성의 연약성과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헤로니모의 자살 결심과 이어진 대지진 후 생의 기쁨 표현은 가식 없는 인간성의 본성이다. 한편 압도적 재난과 불행의 결과로 달라진 지진 후 사람들의 태도는 나중에 부정적 집단정신의 처참한 표출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특히 교회와 광장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비극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야수성으로, 인간정신의 부정적 극한이다.

<버려진 아이>에서 니콜로의 추악함에 치를 떨면서도 참회를 거부하고 지옥에 가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피아치에게 공감도 비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의 불완전성과, 이성과 진실에 대한 작가의 불확실성을 인식하게 한다.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과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는 어떠한가. <버려진 아이>에서 피아치를 통해 형식적 종교의례를 거부한 작가는 일변하여 오히려 신의 [무정한] 섭리를 드러낸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처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선악의 경계와 무관하지만 인간은 대항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구스타프가 토니에게 총을 쏜 원인이며, 외관상 중상을 입은 프리드리히가 멀쩡하고 가벼운 상처를 입은 야코프 백작이 종양으로 죽어가게 된 근본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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