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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부르크 왕자 - 클라이스트 희곡선집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수록작품:
암피트리온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홈부르크 왕자
세 작품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유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는 아니다.
클라이스트는 극을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하게 이끌어간다. 그래서 감초 역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극 분위기는 결말을 알 수 없이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래서 독자는 해피엔딩이면서도 환호의 박수를 쉽사리 보내지 못하며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만다. 그것이 클라이스트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암피트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배경을 두는데, 제우스 신이 남편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남편으로 변장하고 부인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후일 태어난 아들이 유명한 영웅 헤라클레스가 된다.
작가는 여기서 남편 변장의 주피터 신과 진짜 남편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부부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또한 암피트리온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진다. 나아가 선의의 인간이 전능한 신 앞에 무력해지는 장면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도 드러낸다. 즉 단순한 신화극이 아닌 것이다.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와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는 주피터 신의 개입으로 파탄으로 이어진다. 주피터 신의 한때의 유희로 인간 사회와 가정은 절대적 위기 상태에 이른다. 남편의 의심을 자신에 대한 불신과 남편의 식어버린 애정으로 오인한 아내 알크메네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크메네는 진짜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한 주피터 신을 선택하는데, 과연 남편을 몰라보았는지 의문스럽다. 변장한 주피터 신은 끊임없이 자신이 암피트리온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알크메네의 마지막 대사 “아!”와 긴 탄식은 자신의 배반이 무위로 돌아갔음과 주피터 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음에 대한 크나큰 절망의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암피트리온 구분하기.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수단은 너무나 미약하다. 외모, 언행, 습관, 기억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동일한 다른 존재가 자신임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나 자신이 틀림없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확신, 그것은 외부로 보여주어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나아가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나를 나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에서 볼 때 무수한 관계로 형성된 상대적 평가의 산물이다.
암피트리온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는 테베의 왕으로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영웅이다. 그는 아내에게도 헌신하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저항할 수도 없는 외적 요인에 의하여 지위와 가정, 자신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날 운명에 처하였다. 주피터 신이 그나마 돌아갔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여생은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한 주피터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제 종전과는 동일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와 신에 대하여 더이상 믿지 않는다. 그에게는 절대적 단독자의 순간에서 겪게 된 개체적 고독만이 남아있다.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순결한 소녀 케트헨은 어느 순간 슈트랄 백작을 보자마자 자석에 이끌린 듯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발뒤꿈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거나 먹고 한데서 잠을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은 슈트랄 백작이 케트헨에게 마법을 걸어 유혹했다고 케트헨의 아버지가 고발을 하여 비밀재판을 열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중세풍을 물씬 풍기는 설정이자 배경이다.
슈트랄 백작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는 황제의 딸과 혼인하게 되리라는 예지몽의 실현을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과 토지 문제로 갈등을 겪는 투르네크 가문의 쿠니군데를 우연히 위험에서 구해주고, 그녀의 가문이 작센 황제 가문의 방계 후손이라는 점에서 꿈의 실현으로 오인한다.
극은 여기에서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쿠니군데가 사실은 마녀라는 점과 케트헨이 실제로 황제의 딸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실로 중세 동화적 사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황녀 케트헨은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달성하게 되고 쿠니군데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 퇴장한다. 선인은 복을 많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결말이 확연하다.
그런데 케트헨은 어찌보면 노력의 결실만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과 고난은 감탄과 안쓰러움을 갖게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딸이 된 것은 우연적 요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즉 순전한 개인적 성취는 아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용어대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데 지나지 않는다.
극에서 이런 우연성의 발현에 대하여 클라이스트는 일단 케트헨의 인물을 상찬하여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리며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대중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반면 너무나 확연한 우연성을 제시하며 외부에서 행운이 주어지는 고전적, 중세적 가치관을 슬며시 재고하게 만든다.
<홈부르크 왕자>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한마디로 문제적 작품이라고 평할 만하다. 여기에는 클라이스트가 길지 않은 생애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거의 모든 테마가 함축되어 녹아들고 있다. 따라서 이해부득하기조차 한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전개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데, 작가는 자신의 최후작을 독자들이 가볍게 넘기는 것을 싫어하였던 듯 하다.
작품의 커다란 골격은 법질서의 준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대립이다. 홈부르크 왕자는 스웨덴 군과의 전투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병력을 움직이는 말라는 선제후의 명령을 거역하고 뛰어들어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명령 불복종의 사유로 재판을 열어 왕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한다. 여기서 의견이 상충한다. 국가와 군의 골격을 이끄는 법질서의 우위를 주장하는 선제후와 명령 위반은 인정되지만 이를 뛰어넘는 탁월한 전과를 더 크게 인정하자는 왕자와 신하들의 주장.
“그는 법이 지배하든, 자의가 지배하든 우리 조국엔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P.271)
“나는 우연히 생겨난 사생아처럼 찾아오는 승리를 원치 않는다. 나에게 승리의 건강한 자손을 낳아주는 내 왕관의 어머니인, 법을 지지한다.” (P.291)
“적이 자기들의 군기를 내동댕이치고 폐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적을 격파하기 위한 규칙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군을 격파한 규칙이 바로 최고의 규칙입니다!” (P.291)
이는 오늘날도 곱씹을만한 소재가 아니던가. 결과가 좋으면 과정(절차)에 잘못이 있어도 문제없다는 결과론자와, 과정의 적법성에 무게를 두는 과정론자.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절차를 중시하여 최선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를 피하려는 장치다. 그럼에도 결과만 좋으면 그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는 사후 결과를 가지고 사전의 행동 및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성공적 결과는 잘못을 판단할 때 참작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 이성의 결론이다. 그런데 홈부르크 왕자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며 이성과 비이성을 방황한다. 그런 그에게는 ‘마음의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원 참 코트비츠 대령! 당신은 왜 그렇게 천천히 말을 몹니까? 당신은 공격하라는 마음의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까?” (P.240)
“선제후께서는 의무가 명하는 대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P.257)
홈부르크 왕자도 죽음이 명백한 절대적 순간에는 삶을 애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솔직해진다고 한다. 목숨이 갈리는 상황에서 체면이고 허위도 부릴 여유가 없다. 여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통렬한 진실, 즉 생명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만약 법률이 그러하다면 저를 파면시켜 군에서 추방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제 무덤을 본 이래로, 저는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명예로운지 어떤지는 결코 묻지 않겠습니다!” (P.265)
이제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왕자. 그는 이미 삶을 단념하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 선제후의 제안, 만일 그가 판결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파기하겠다! 그를 풀어주겠다!(P.272)는 여전히 매우 해독하기 어렵다. - 마음의 명령에 따른다.
“아, 영원불멸이여, 너는 지금 완전히 내 것이야!...내 양쪽 날개에 날개가 솟아남을 느낀다. 내 정신은 고요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P.302)
이제 그에게 삶과 죽음은 더이상 둘이 아니다. 그는 절대적 순간에 자신에 이르는 각성을 통해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였다.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꿈꾸는 홈부르크 왕자로 시작한 드라마는 새로운 꿈을 꾸는 대단원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