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셀레스띠나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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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쓰인 스페인의 고전문학이다. 이 작품의 의의는 “‘만일 스페인에 <돈 키호테>가 없었다면 대신 그 영광을 누렸을 작품’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된다.”(P.5)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수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이 인류 최고의 문학 유산으로 손꼽는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택하고 있다. 대화체 소설 또는 희곡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어 명확한 장르 규정이 어렵다. 아직 문학의 세밀한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이렇게 형식상 혼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우리 고전문학에서 판소리와 판소리체 소설의 관계와 유사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갈리스또와 멜리베아. 갈리스또는 멜리베아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중개인으로 셀레스띠나를 요청한다. 셀레스띠나의 계책으로 멜리베아도 갈리스또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다. 이때 중개 성공에 대한 보상의 분배로 갈리스또의 두 하인은 셀레스띠나와 다투다가 죽이게 되고 자신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한편 갈리스또는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급히 넘어오다가 실족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절망한 멜리베아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문학상 영원한 테마인 남녀 간의 사랑이 이 작품의 핵심 소재이다. 하지만 여기엔 사랑과, 탐욕, 질투와 시기 등 인간사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져 있다. 중세의 신성을 벗어나 서서히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과정의 세계상이다.

갈리스또는 당당하게 멜리베아에게 청혼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결혼 등 미래에 대한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문 간에 철천지원수 사이도 아니다. 귀족과 평민(또는 천민) 등 신분상 격차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통상적인 만남과 교제 절차를 따랐다면 연인 간, 하인과 셀레스띠나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갈리스또는 처음부터 은밀하게 만남을 주선할 방책만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셀레스띠나가 개입할 여지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옮긴이는 해설을 덧붙인다. 갈리스또는 정통 스페인 귀족가문이며, 멜리베아 집안은 개종한 유대인이라는 사실. 따라서 귀족이라는 타이틀은 획득했지만 정상적인 통혼은 꿈도 꾸지 못할 관계라는 것.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갈리스또와 멜리베아의 세간의 이목을 피하는 사랑과 괴로움이 다소 이해된다.

작품의 표면상 주인공은 두 연인이지만, 실질적 주인공은 셀레스띠나다. 그래서 작품 표제도 변화하였다. 셀레스띠나는 마녀로 불리는 노파로, 창녀들의 포주이며, 마을의 만능해결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약품을 사용하여 창녀의 머리털 색을 바꾸거나,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심지어는 숫처녀로 감쪽같이 위장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사기꾼이기도 한 셈이다. 여하튼 그녀는 복합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서, 작품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갈리스또의 두 하인, 셈쁘로니오와 빠르메노, 그리고 셀레스띠나와 같이 지내는 두 창녀, 엘리시아와 아레우사도 각기 당대 서민사회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두 하인의 탐욕, 특히 빠르메노의 충직한 하인에서 일탈하는 과정은 과연 갈리스또라는 인물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뛰어난 인물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갈리스또와 멜리베아의 귀족적 고상과 우아함과 대비되는 속인들의 생생하면서도 비속하기까지한 일상을 네 남녀는 말과 행동으로 숨김없이 예증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셀레스띠나는 멜리베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숨겨진 불이요, 즐거운 상처며, 맛있는 독약이며, 달콤한 비통에, 유쾌한 아픔에, 즐거운 고통, 그리고 달고도 쓰라린 상처에 부드러운 죽음이죠.” (P.112)

그리고 이 작품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바로 철저한 현세주의다. 인생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것, 한창 젊고 아름다울 때 인생을 즐겨라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 너희들 고유의 일이란 즐기는 것뿐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면 어느새인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리는 게 젊음이야.” (P.58)
“오늘 먹을 것이 있는 한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 많이 가진 자나 가난한 자나 죽는 건 매한가지.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게 아니잖아요? 즐기자구요.” (P.70)

<라 셀레스띠나>는 중세 엄격주의와 신성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발인 셈이다.

* 이 책은 완역본이 아니다. 옮긴이는 스페인 문부성에서 라디오 방송용으로 각색한 작품을 참조하였다고 적어놓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맛보기 또는 소개작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근에 옮긴이가 새로이 완역본을 출간하였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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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판도라의 상자 독일현대희곡선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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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킨트를 대표하는 작품은 소위 이 ‘룰루’ 2부작이다. 룰루는 2부작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베데킨트의 극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알반 베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더욱 유명하다.

룰루 2부작은 등장인물의 파격성과 사건 전개의 극단성, 그리고 적나라한 성(性)의 노출 등으로 당대에 매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오랜 세월 음지에서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숭배 받다가 근자에 들어서 서서히 베데킨트 재평가에 힘입어 빛을 쐬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작품해설에 따르면 음란물로 취급받기까지 한 대담한 성적 표현은 초판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베데킨트는 후일 작품을 수정하면서 이를 대폭 온건하게 손보아 현재의 수정본에서는 암시적으로만 그려진다.

룰루는 사회 밑바닥층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신분 상승과 안락한 생활을 이루어낸다. 그녀에게 사회적 윤리와 도덕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현세의 즐거운 유희와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지표다.
“룰루는 현재 자신의 존재 이외는 달리 누가 생각해 주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평가가 어떠하던 개의치 않는다.” (P.217)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쉐엔 박사이다. 쉐엔 박사는 어린 그녀를 수렁에서 구해준 인물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룰루를 병원장인 골 박사에게 넘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화가 슈봐르츠와 결혼시킨다. 이어 슈봐르츠의 자살 후에는 무대에 올려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남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룰루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지령>을 보자. 젊은 룰루를 감시하다가 늙은 골 박사는 사고로 죽게 된다. 슈봐르츠는 룰루의 과거를 알고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쉐엔 박사는 어떠한가. 그는 결국 룰루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젊고 부유한 귀족 약혼녀와 파혼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이제 행복한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되지만, 룰루는 한 남자에 매이는 여성이 아니다. 쉐엔 박사는 주위의 모든 남자들, 심지어는 자기 아들 알봐마저 룰루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악연을 끊기 위해 룰루에게 자살을 요구하다 룰루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드리고 크봐스트는 룰루를 위협하다가 룰루의 계략에 의해 쉬골흐에게 목숨을 잃는다. 알봐 쉐엔은 매춘에 나선 룰루를 견디다 못해 그녀가 데려온 남성을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앞당긴다. 여성동성애자인 게슈뷔츠 백작부인은 룰루를 위해 대신 감옥살이도 하고 일생을 헌신하지만 살인마 잭에게서 룰루를 구하려다 오히려 처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이렇게 룰루는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에게 파면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발산하려 애쓰는 면에서 그녀는 분명히 그러하다. 반면 그녀는 관능이 뚝뚝 배어나오는 그러한 유와는 다르다. 겨우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아직 소녀티를 간직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와 행동도 때로는 여인보다는 소녀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쉐엔 박사를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뭇남성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이란 즐거운 파티이며, 파티에서 다른 사람에게 잠시 웃음과 수작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과 상충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눈 뜨는 봄>에서 청소년들의 성(性)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성애를 언급하기도 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슈봐르츠 백작부인을 등장시켜 본격적인 여성동성애를 드러낸다. 비록 작중에서는 미묘한 암시로 제시하고 있지만, 슈봐르츠 백작부인의 처절한 헌신은 연민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룰루에게 매혹당하지 않는 존재, 그럼으로써 극중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쉬골흐다. 그는 룰루의 아버지인 동시에 때로는 연인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파악하기 힘든 묘한 인물이지만, 그는 룰루의 육체에 물론 관심을 가지지만 그녀를 이용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이며, 마지막에는 룰루를 매춘으로 내모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다. 그는 성과 속, 선과 악에 초연하다.

<지령>은 쉐엔 박사, <판도라의 상자>는 아들 알봐 쉐엔이 각각 룰루의 파트너로 나온다. 아버지의 살인자와 결혼하는 아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알봐에게 룰루의 매력은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알봐는 믿고 있던 주식이 휴지쪼가리로 바뀌면서 영락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며 중병에 걸리지만, 룰루가 매춘에 나서는 것에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임을 알면서도 내면으로는 인정하지 못한다. 전편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양보로 가슴속에 꾹 눌러 담았고, 후편에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룰루에 충실한 알봐 쉐엔이야말로 이 연작에서 가장 충실하면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룰루의 본질을 알면서도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신의 타고난 재주 때문에 누구나 자기 주위 사람들을 모두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범죄자로 만들고 말어...언젠가 자기 내부가 온통 무너져버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어. 자제력에 얽매여 있는 남자일수록 더욱 쉽게 쓰러지고 말지. 그럴 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P.104)

주위 사람들을 불나방으로 만든 룰루는 자신도 결국 살인마에게 끔찍한 최후를 당하게 된다. 그녀는 비극의 우아한 주인공으로 끝맺지 못한다. 그것은 룰루의 속성 내지 본질에 기인한다.
“룰루는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보잘 것 없는 짐승처럼 죽게 된다. 룰루의 속성은 변태 살인자 잭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모두 파멸되어 있었던 것이다.” (P.217~218)
실제 사건에서 참조한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변태살인자다. 그에게 룰루의 육체, 특히 음부는 더할 나위 없이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다.
“지에미!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조갑지는 처음 보았어.” (P.204).
초판본을 보면 이후 대사는 현재의 수정본과는 매우 다른 성격임을 알 수 있음을 해설을 통해 알게 된다. 룰루 2부작은 어찌 보면 룰루의 높은 의학적 가치를 갖는 음부가 빚어낸 비극적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룰루 2부작은 과격하다. 거칠고 적나라하여 구성과 표현에서 숨김이나 주저함이 없다. 귀족계급과 시민사회의 고상하고 우아함에 젖어있던 당대 사회의 관념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하다. 등장인물은 모두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누가 룰루를 악녀라고 매춘부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겠는가. 또한 룰루에 의해 스러져가는 인물 군상도 복합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회의 내재하는 모순적 이중성을 헤집어 대낮에 환히 드러내고 있다. 그 상처는 햇볕에 쓰라리다. 쓰라림은 거부를 일으킨다. 그러나 상처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다. 다만 제대로 된 도서라고 하기엔 오자(誤字)가 너무 많다. 전혀 교정을 보지 않은 듯하다. 겉표지의 작가명이 ‘프랑크 붸데칸트’로 나와 있으니 본문의 무수한 오류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런 책이 저명한 대학교의 출판부 이름으로 게다가 <독일현대희곡선>이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오다니 의의를 찾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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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봄 (반양장) 지만지 고전선집 157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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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크 베데킨트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희곡 부문에서 소위 문제적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억압된 성(性)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작품 <눈뜨는 봄>(또는 <사춘기>)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에 대한 관심과 무지, 반면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와 교육관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춘기는 ‘제2의 탄생’ 또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릴 정도로 청소년들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신체는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정신적 성장은 아직 불완전하며, 가정과 사회적으로 그들은 미숙아로서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찬 꿈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장의 신체적 변화와 자연적 욕구의 성장에 당혹감을 품는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문화의 확산이니 성개방 풍조니 하는 일각에서 우려하는 현상도 앞서가는 서구에서도 1960년 이후에나 발생한 추세다. 따라서 이 작품이 배경을 삼고 있는 19세기 말은 전적으로 전근대적 보수적 사고관이 지배하던 시기임을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성은 무조건 감추어야 하는 것,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장 궁금한 질문, 즉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적당히 에두르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우리의 경우,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식으로.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다. 황새가 굴뚝을 통해 들어와서 아이를 주고 간다는 식으로. 그래서 벤들라의 호기심에 엄마 베르크만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국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부인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결혼 후에야 깨우친 내용이므로.

“열네 살짜리 딸한테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태양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했을 뿐이란다.” (P.138)

제6장에서 벤들라가 멜히오어와 우연한 경험을 갖게 된 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미소 짓는 걸 어머니가 보시니까. 넌 왜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난 몰라. 난 정말 몰라.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길이 마치 양탄자 같아....” (P.89)

이 형연할 수 없는 느낌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당사자들의 성적 무지와, 어른들의 허위와 가식적 도덕관이 잘못 결합한 결과다.

모리츠의 자살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교사 회의의 면면을 보자. 베데킨트는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는 어른들, 즉 교사들을 비꼬고 있다. 원숭이 비계, 몽둥이, 주린 띠, 골절상, 혀 놀림, 파리 시체, 일사병 등의 이름을 가진 교사들이 제대로 사안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들이 답답한 실내 환기를 위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설전을 보라.

벤들라는 잘못된 임신중절로 죽게 되고, 모리츠는 자살을 한다. 멜히오어는 청소년 감화원에 갇힌다. 에른스트와 핸셴은 동성애 관계를 가진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성인 중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인격을 갖춘 이는 멜히오어의 어머니 가보어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면에서 솔직하며 사실에 기반을 둔 가정교육을 한다. 그녀는 학교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을 따름이다. 아들이 남녀의 성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화원에 들어갈 중죄에 해당되는가?

다만 당대는 가보어 씨의 다음 의견이 지배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소수자의 발언으로 치부되며, 그녀의 교육관과 그 결과는 다수와 충돌한 것이다.

“멜히오어가 쓴 것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면 깊숙이 썩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골수가 상한 거예요...그 글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솔직한 의도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 자연적 성향, 부도덕한 경향 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부도덕한 것이기 때문이오...” (P.123)

멜히오어가 묘지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순간 나타난 복면의 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어 지평을 환상적인 방법으로 확대시킬 수 있도록”(P.151) 해준다고 약속한다. 즉 그에게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을 빠짐없이 알게”(P.151) 해주겠다고. 작가는 멜히오어를 죽음에 몰아넣어 완전한 비극으로 구성할 수 있었는데도 복면의 신사를 등장시켜 그를 구제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유사한 인상을 준다. 둘 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의 김나지움을 무대로 한다. 베데킨트가 좀 더 성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양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인습적인 교육의 폐해를 노정한다. 엄격하고 보수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욕망을 죄악시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그것을 억누르는데 급급하다.

여기서 양육과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되새겨본다. 자녀를 본성과 자질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발로로 유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순응적이고 보다 성공하기에 유리한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인가? 문득 이런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학부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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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지만지고전천줄 78
작자 미상, 최낙원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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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왜소한 책은 외양과 달리 스페인 문학사,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바로 스페인 문학이 창시한 피카레스크 소설, 소위 악한(惡漢) 소설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본격적인 악한 소설은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마테오 알레만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라고 한다. 다만 이 작품은 국내 번역본은 나와 있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다.

이 책은 16세기 중엽에 씌어졌는데, 주인공 라사로가 자신의 삶과 인생역정을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라사로를 ‘악한’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본격적 피카레스크와 차이점이다. 라사로는 사회 밑바닥 생활을 겪으면서도 가슴 한켠에 따뜻한 온정을 놓지 않는다. 그는 무정하고 냉혹한 악한이 될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한데도 저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는 더 가진 것도 없고, 더 가질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었으니까요. 사실 그에 대해서는 미운 마음보다는 연민이 앞섰습니다.” (P.106)

이 작품은 당대 로망스와 기사 문학이 판치던 시기에, 왕공(王公)이 아니라 평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귀족 생활의 구름 위 세상이 아니라 두 발로 단단히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겪는 사람과 사회의 모습은 결코 우아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남을 속이기를 밥보다 더 자주 먹듯이 하고(맹인, 면죄부 포교사), 인색하기가 자린고비를 능가하며(맹인, 신부), 온통 허세와 위선(하급 귀족, 수석 사제)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속세뿐만 아니라 성직 사회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성직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곳곳에 나타나 있어 한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된 적도 있다.

“주님,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살고 있으며, 주님을 위해서는 조금도 고통을 받으려 하지 않는 저들이 정말 별것도 아닌 하찮은 명예를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P.89~90)

라사로는 가난(대부분은 심한 배고픔)과 고달픈 운명을 벗어나기 위하여 인색한 주인과 속고 속이기를 거듭한다. 그에게 인생의 최고선은 기아를 벗어나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허위와 기만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옛말에도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라사로는 최소한 동냥을 했지 훔치거나 강탈하지는 않는다.

“궁핍은 항상 위대한 스승인지라 저는 밤낮없이 온통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에만 생각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P.74)
“그것은 단지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운명은 왜 그렇게도 나에게 잔인한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P.89)

라사로는 후에 포고 담당 공무원이 되어 자리를 잡고, 수석 사제의 도움으로 그의 하녀와 결혼도 하게 되어 안정된 삶에 다가선다. 비록 그의 아내와 수석 사제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에게 이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라사리요 토르메스의 파장은, 마테오 알레만을 거쳐 그 유명한 세르반테스에게까지 흘러간다. 세르반테스의 <모범 소설>과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의 작용과 반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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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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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단편소설 : 칠레의 지진, O... 후작 부인,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로카르노의 거지부인, 주운 아이, 성녀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미하엘 콜하스
2. 일화 : 일상의 사건, 프랑스인의 정의, 당황한 시장 외 28편
3. 우화 : 개와 새, 교훈 없는 우화, 정원사의 조건
4. 소품 :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세상의 흐름에 대하여, 숙고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
5. 편지 :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3편], 울리케 누님에게

이 책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중 극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으로도 그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조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일화, 우화, 소품 중 일부는 옮긴이의 다른 책 <헤르만의 전투>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새삼 클라이스트의 문학세계에 대해 재삼재사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소설집과 희곡집의 독서단상을 통해 기본적 문학관과 개인적 소회를 밝혀놓았다.

여기서는 그의 산문 소품과 편지에 대한 인상이 주된 관심이다. 당대 비주류의 작가 클라이스트,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영역이 이들이다.

일화로 분류된 31편의 짤막한 단편은 엄밀히 말해 문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클라이스트는 작가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동도 하였다. 여기 일화는 아마 신문 또는 잡지에 게재하기 위해 채집 내지 작성한 듯하다. 요즘도 신문에 보면 일종의 토픽이나 해외화제 등의 흥미로운 단편소식을 전하는 코너가 있는 것처럼.

소품 중에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와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이 비교적 유명하다. 다만 <독일인의 교리문답>은 당대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클라이스트의 일면을 보고, 그의 애국적 작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유익하지 현시점에서는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완전한 생각과 구상이 아니라 모호한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함에 따라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틀을 이룬다는 견해이다.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에 그 모호한 생각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놀랍게도 인식은 복잡한 부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을 이루게 된다네.” (P.363)

“마음에 있는 생각을 진짜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그 표현은 나란히 진행되어 가고, 정신 활동은 그 양자에 똑같이 호응한다네. 이 때 언어는 정신의 바퀴에 붙은 제동기와 같은 족쇄는 아니고, 정신의 바퀴와 병행하여 달리는 동일한 차축에 붙은 제 2의 바퀴와 같네.” (P.36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독창성이 아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누구나 최소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론 보다는 그가 내세우는 예증이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미라보의 사례와, 라퐁텐의 한 우화를 언급하고 있다.

<인형극에 대하여>는 작가와 인형극에도 열성적인 오페라 수석 무용수 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에 따르면 인형극은 간단한 조종만으로도 우아하며 리드미컬한 동작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동작 간에 불필요한 휴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예찬한다.

작가는 그의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의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방해한다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와 무용수는 각자 자신의 체험담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미를 이렇게 장식한다.

“우아함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이거나 또는 무한한 의식을 가진 인체에, 다시 말하면 인형이거나 신에게 가장 순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식의 나무 열매를 다시 한 번 더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것이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입니다.” (P.383)

클라이스트가 평생에 걸쳐 사랑과 우정을 쌓았던 여인은 세 명이다. 전 약혼녀, 그리고 이복누나 울리케, 자신을 잘 이해해주던 친척 마리. 여기에는 그들에게 썼던 서신들을 짤막하게 수록하고 있다.

먼저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클라이스트의 작품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그 유명한, 소위 ‘칸트 위기’를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혹은 그저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소...나의 유일한 최고 목표는 사라졌소. 나는 이제 다른 목표도 없소...” (P.406)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자살을 감행하기 며칠 전과 당일의 기록이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삶의 욕구를 포기한 자신을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동반자 포겔 부인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는 인생을 체념한 자에게만 엿볼 수 있는 편안함과 경쾌함마저 배어나 씁쓸하기조차 하다.

금년은 클라이스트 서거 200주년의 해다. 그는 사후 서서히 재평가 받아 오늘날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에 견주는 대작가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 그의 성가는 미미하다. 그의 작품은커녕 이름조차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사와 작품 특성 상 단시일 내에 국내에 인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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