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뉴 -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
키몬 스코르딜스 지음, 송인엽 옮김 / 오늘의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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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국가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UN군의 기치 아래 16개국이 참전하였다. 그 중에서 이색적인 것은 남미의 콜롬비아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의 파병이다.

이 책은 그저 우리나라에게 있어 가난하고 비참한 아프리카의 한 약소국으로 인식되는 에티오피아가 당시 머나먼 아시아의 자그마한 분단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전투 병력을 파병하고 그들의 전투 활약상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에티오피아의 한국 파병부대명은 ‘강뉴’인데, 현지어로 ‘초전 박살’과 ‘혼돈에서 질서를 세우다’를 뜻한다고 하며,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가 파병부대에 직접 하사한 부대명이라고 한다. 강뉴 부대는 대대 규모로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총 5진이 파견되었으며, 전원이 최정예인 황실근위대에서 선발되었다.

이쯤에서 에티오피아 황제가 파병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독특한 종교, 문화적 독자성을 가진 국가다. 기독교 국가로서 수천 년간 독립 국가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전반에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수년 간 강점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부당한 침공에 맞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원조를 호소하였으나 국제연맹은 이를 외면한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불법 침공이 묵인되는 것을 지켜본 나치의 히틀러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가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당시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의 불법 침공을 강력히 제재하였다면 그 후 세계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어쨌든 약소국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집단안보가 최선의 방법임을 인식한 에티오피아는 UN군에 적극 참여한다. 비록 과거 자신은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UN 결성 후 최초로 집단안보를 선언한 한국전쟁에 동참하는 길이 후일 자신들의 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인류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하고 이상적인 수단으로 집단안보를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는 집단안보 정신이 결여되어 1935년부터 이탈리아에 의해 5년 동안 점령되었던 뼈아픈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집단안보의 결여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P.27)

한국전쟁에서 강뉴 부대의 엄정한 규율과 과감한 용맹성은 많은 우방국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들은 크고 작은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으며, 단 한 명의 포로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한 그리스 종군기자가 그들의 활약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펜을 들어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4년에 출간하였고, 그것이 이제 50여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순전히 책의 내용만을 살핀다면 단조롭고 평면적이다. 구체적인 전투의 기록이 생생하게 묘사된 게 아니라 부대의 지휘관 소개와 전투일지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흥미로운 전쟁 다큐를 기대하고 책을 집어 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그동안 외면당했던 한국전쟁에서 에티오피아 군대의 의의와 역할을 재발견하고, 그들이 머나먼 타국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목숨을 바치러 온 연유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데 있다.

강뉴부대 출정식에서 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축사를 잠시 들어보자. 황제의 축사는 과거의 체험과 맞물려 피를 토하는 절규가 느껴진다.

“집단안보 장치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동료애가 있는 어떤 작은 나라도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어떤 국민도 유엔의 집단안보 장치에 의해 그 독립이 보호되어야 한다...(중간생략)...집단안보에는 국경도 물리적 거리도 초월하도다. 이곳에서 머나먼 극동의 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집단안보 원칙에 참가하는 데에는 아무런 주저도 없으며 단지 유엔에 대한 회원국의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도다.” (P.280~282)


우리나라는 집단안보 덕택에 국가의 명운을 존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UN의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지원을 제공하는 유일한 국가, 세계가 주목하는 모범국가로 발전하였다. 이제 우리의 역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가난하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가난하고 처참한 처지였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국제사회에 진 영원한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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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험
세르반떼스 지음 | 조구호, 임효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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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르반테스의 최후 작품이다. 일단 탈고는 하였으나 최종 교정을 마치지 못한 채 그는 임종 하였고,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따라서 작가의 세심한 손길이 다소 미흡하여 산만하다는 인상이 곳곳에 드리워진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 (P.9)

그렇다.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다. 그렇다고 세르반테스답게 무겁고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재기발랄하고 곳곳에 유머와 해학이 넘친다. 이게 세르반테스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작은 활자로 빽빽하게 5백면을 훌쩍 넘기는 분량을 사실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으로 분책하는 것이 독자에게 심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일 것이다. 막상 책장을 넘기게 되면 다종다양한 모험이 잇따르기 때문에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품 속에 등장하고 전개되는 무수한 인물과 사건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진지하고 구축적인 작가라면 에피소드 하나 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편은 거뜬히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이므로.

세르반테스는 <사랑의 모험>에서 <모범소설>과 <돈키호테>의 스타일을 결합시키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편력 및 우연한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후자를, 그리고 에피소드들의 제재 즉 인생과 사랑이라는 점에서 전자를 계승한다.

주인공 뻬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는 북구 출신(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임이 밝혀진다)의 왕자와 공주인데, 각기 뻬리안드로와 아우리스뗄라라는 가명을 쓴 채 남매로 위장하고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의 목적은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성스러운 도시인 로마로 가서 서원하는 것, 즉 성지순례이다.

그들의 배는 폭풍우를 만나서 조난당한 채 북해와 발트해를 떠돌아다닌다. 야만족들의 섬에서 목숨을 뺏길 뻔하고, 얼음바다에 갇혀 죽음을 기다린 적도 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통해 더욱 단련된다.

여기에서 아우리스뗄라의 불세출의 빼어난 미모를 연모하는 덴마크 왕자 아르날도와의 경쟁 관계는 흥미를 배가하는데, 그를 포함한 야만족 출신의 안또니오와 여동생 꼰스딴사 등 개성미 넘치는 인물들의 등장은 소설에 재미를 배가하지만, 한편 혼란스러움과 산만함 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북구에서의 고난을 마친 채 마침내 포르투갈에 당도한 일행은 육로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로마로 입성한다. 여기서 작품의 분위기는 일대 전환한다. 전반부의 북유럽 장면이 신화와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면, 남유럽의 순례 길에서는 보다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요소가 강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집에서와 매우 흡사한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세 가지 축은 사랑, 순례, 신앙이다. 이 삼 요소는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인공들은 삼 요소를 지키고 달성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의 결실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우직하고 무모한기도 한 그들의 선택은 차라리 현실 세계의 불의와 부조리에 지친 작가가 꿈꾸는 참다운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작가는 사랑과 인간에 대하여 너그럽다. 늙은 뽈리까르뽀 왕의 아우리스뗄라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그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음험한 계획은 주인공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였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음에도 작가는 그리 비판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면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충분히 변명되는데, 사랑의 열정이 한 사람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 어떤 추리력으로도 사랑의 열정을 알아 맞출 수 없고, 그 어떤 이성도 사랑의 열정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P.266~267)

한편 당대의 사랑은 여인의 외모에 대단히 집중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아우리스뗄라의 비견할 수 없는 미모는 뭇남성들의 혼을 빼놓는다. 불행한 뽈리까르뽀 왕은 물론, 아르날도 왕자를 더불어 방랑하게 만들며, 네무르스 공작도 불원천리 달려오게 만들 정도다. 그런데 주술사의 저주로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시들자 상황이 변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랑이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듯, 아우리스뗄라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사랑도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무덤에 도착할 때까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영혼 속에 많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 추한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것인가 보다.” (P.537)

이런 사례는 작가의 <모범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외적 아름다움에 빠진 구혼자는 아름다움의 상실에 실망하며 여인을 떠난다. 오직 진실한 구혼자만이 외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대로임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말대로 기적적인 경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의 시대나 21세기 현대의 우리 사회나 미모지상주의에 대한 선호 풍조는 변함없다.

이 소설이 <돈키호테>와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물 유형의 창조에서도 주제와 작품 전개의 집중력과 일관성 면에서 확실히 어수선한 인상이 강하다. 역시 작가의 죽음에 기인한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굳이 세계 최고의 명작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체로서의 재미를 찾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당시의 추세-작가의 <모범소설>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임을 이해한다면 보다 너그럽게 열린 가슴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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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발
앤드류 새먼 지음, 박수현 옮김, 안도섭 감수 / 시대정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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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남북한 간의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UN군을 비롯한 다수의 국가가 참전한 국제전이다.

소위 민주주의 진영의 참전국은 16개국인데, 절대다수의 병력과 병참 및 총사령관을 맡은 게 미국이라 아무래도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과 시각은 미국 위주로 편향되기 쉽다.

영국은 UN군에 여단 병력을 파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의 양국 간 정치적 유대관계 상 협조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파견된 29여단은 한국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에도 일반에게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재한 영국인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여성과 결혼하였다. 자연스레 한국과 영국의 관련 사안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잊혀진 전쟁’의 ‘잊혀진 전투’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29여단은 3개 대대-글로스터 대대, 라이플스 대대, 퓨질리어스 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1951년 초 오늘날의 송추인 해피밸리에서 라이플스 대대가 중심이 된 여단은 중국군과 혈투를 벌였고, 같은 해 4월 말에 적성 임진강 유역에서 여단 전체가 생사를 건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이때 글로스터는 대대 자체가 궤멸되었다.

한국전쟁의 무수한 전투 중 영국군의 전투가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전면 북진을 감행한 UN군에 대해 중국군은 두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가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서 전면 철수를 하게끔 만든다. 이어서 임진강을 넘어 3차 공세를 벌였고 해피밸리 전투는 이때 치러졌다. 영국군은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맹공을 버텨냈다. 하지만 전선 동쪽 한국군 라인이 붕괴되면서 결국 UN군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을 포기한다. 그것이 유명한 1.4 후퇴다.

잠시 소강상태 후 UN군은 조금씩 치고 올라가 임진강 유역까지 재수복하자 중국군은 UN군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하여 제5차 공세를 계획하여 막대한 병력을 투입한다.

“중국군의 팽 원수는 놀고 있던 게 아니었다...팽의 5번째 공격은 서울을 함락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지 않았다...공격은 쓸어버리는 데 목적이 있다.” (P.235)

이윽고 한탄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적성 일대에 주둔하던 29여단을 중국군 63군(3개 사단으로 구성된)이 파상공격을 해온다. 29여단은 수일에 걸친 처절한 항전으로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좌우의 UN군이 철수하면서 적군에 포위되고 만다. 죽음을 건 돌파로 겨우 여단의 전멸은 피했지만, 글로스터 대대를 잃고 말았다. 영국군의 저항은 보답을 받았다. UN군을 궤멸시키려던 중국군의 작전 의도는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UN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군의 5번째 공세’ 지도(P.446)를 보면, 중국군이 얼마다 대담한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29여단의 전투의 결과가 갖는 중요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전황 자체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국내의 한국전쟁 관련 저서가 대체로 전쟁 발발의 원인에 집중하며, <콜디스트 윈터>가 거시성과 미시성의 조화를 도모한 반면, 저자는 여기에서 전투 자체라는 미시성에 주목하고 이를 철저히 기술하는데 충실하다. 뜬구름 잡는 거대담론이 아닌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하지만 생생한 사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험담을 쓰듯 역사를 쓰기 원했다. 불안, 공포, 흥분, 환희를 담고자 했다.” (P.7)

이 책에서 흔히 인해전술로 오인되고 평가절하 되는 중국군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살아남은 영국군들은 중국군이 진짜 전사라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그들은 대체로 장비가 부족하고 효율적 작전전개와 대응을 하지 못하였을 뿐 개개인의 매섭고 끈질긴 전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을 과소평가하였던 전쟁 초기 미군이 유인책에 말려 큰 실패를 겪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만일 미국이 중국을 공격해 들어온다면, 해안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 험준한 내륙으로 적을 끌어들여 보병 위주의 근접전투를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근접전과 야간 작전이 그것이다.” (P.103)

“이는 인민해방군 전략가들이 꿈꿔왔던 기회였다. 그들의 적들은 평탄하지 못한 산악지형 깊숙이 유인되어 들어오고 있었고, 바로 그곳은 자신들이 싸움을 벌이기 선호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P.118)

중국군마저 인정할 정도로 무서운 용맹을 발휘한 영국군 개인이지만, 시선을 올려서 부대 단위에서 볼 때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용기를 인정하는 것과 미비한 측면을 지적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먼저 그들은 측면의 한국군 및 미군 부대와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상급부대의 지휘를 받아 전방을 주시하며 싸우는 데 주력하였다. 임진강 전투는 뼈아픈 경험을 제공하였다.

“임진강 전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군 대대들은 자신들의 측면에 위치한 부대들과 상호 균형을 맞추는 데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P.449)

또한 영국군은 적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는 데 관심과 자원을 집중하였다. 보다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지뢰 매설, 철책 설치 등의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래서 중국군에게 근접 접근을 허용한 채 전투에 임하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인 동시에 그만큼 중국군의 병력과 전투력에 대하여 경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충분한 방어 준비를 갖추었더라면 여단의 대규모 피해는 상당히 감소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주저항선을 요새화 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지뢰도, 철조망도, 적을 고착해 사살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장애물도, 벙커도, 아군이 안전하게 기동할 수 있는 통신 참호도 없었다.” (P.517)

“(임진강 전투 이후) 라이플스의 부관 한 명은 “한국전 들어서는 처음으로 대대가 본격적으로 지뢰지대와 철책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포화를 견딜 수 있는 벙커 구축을 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 (P.450)

영국군을 포함한 UN군의 분전은 보답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유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날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을 보면,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의 청춘과 목숨을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책은 이렇게 마친다.
“오히려 내가 이런 말이 하고 싶어, ‘저한테 감사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든 건 여러분입니다. 내 자신을 돋보이게 해준 사람 또한 여러분입니다.’” (P.551)

그래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대다수의 민간인들에게 전쟁은 자신들의 땅과 가족과 사회를 짓밟는 대학살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전쟁이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이 없었다.” (P.181)

전쟁은 필요악도 아니며, 전쟁의 참혹성을 볼 때 전쟁 영웅의 예찬과 전쟁의 불가피성 옹호는 어불성설이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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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피타 히메네스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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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60

후안 발레라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시기를 살아간 작가이지만, 이 작품은 어느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적 필치와 섬세하며 그윽한 묘사, 그리고 차분하지만 침잠하지 않는 은근한 어조,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작품에 독특한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고자 하는 젊은 미망인 페피타.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어찌 보면 부도덕할 수도 있는 관계의 두 사람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돈 루이스는 성직에 대한 염원과 제어할 수 없는 연정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성(聖)과 속(俗), 천상의 사랑과 지상의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페피타에 대해 돈 루이스의 호기심은 처음엔 아버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기를 합리화한다.
“제가 사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만물이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P.35)

서서히 그의 내면에 갈등이 비롯된다. 그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걱정”을 느낀다.
“모든 곳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감각적인 열락은 제 자신에게서 보다 높은 희구와 열망을 향한 마음을 순간순간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P.35)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 못지않게 신에 대한 사랑의 신학적 문제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영혼이 창조주를 무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바칠 지상의 대상을 발견한지 못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창조한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확신할 수 있을까요?” (P.31)

돈 루이스의 서신으로 꾸며진 전반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젊은이의 섬세한 내면적 갈등과 서서히 피어오르는 사랑의 싹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매혹시킨 페피타 히메네스는 어떤 인물인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점입니다.” (P.12)
“그녀에게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기운이 풍겼고, 외모에서는 평화가 느껴졌습니다.” (P.25)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27)

본당 신부는 그녀를 “성녀”(P.27)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성인”(P.23)으로 지칭하는 것과 절묘하게 들어맞고 있다. 성인과 성녀, 즉 두 사람은 천생연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늙은 남편의 죽음이 일년반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던 페피타는 어느 날 갑자기 사교모임을 마련하고 상복을 벗는다. 즉 그녀 내면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페피타에 대한 돈 루이스의 감정의 변화는 나날이 깊이와 강도를 더해간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P.53)로 비교적 담담함을 유지하지만,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염려”(P.66)가 되며,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내면에 토로(“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구나”(P.67))하는 단계가 된다.

이윽고 페피타와의 숲 속 만남에서 둘 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그의 내면은 “경이로운 변화”(P.69)를 겪는다. 그는 사랑을 자각한다.
“이상하게도 페피타의 모습이 제 영혼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제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P.77)

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오랜 바램과 신에 대한 갈구는 여전히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낳는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 페피타 히메네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떠날 것이며, 그녀를 잊을 것입니다.” (P.79)
“언젠가부터 제 삶은 투쟁이 되었습니다.” (P.91)
“그녀 곁에 있으면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멀리 있으면, 그녀를 증오합니다.” (P.93)

이윽고 페피타의 뜨거운 시선과 미소, 그녀의 집에 들어가면서 인사를 할 때 맞잡는 두 손, 그리고 두 줄기 눈물은 그의 이성과 의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러나 여전히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포기하지 않고 떠나려는 그. 이때 페피타의 하인 안토뇨나가 기지와 수고(P.153)를 발휘하여 작별인사차 방문 하도록 승낙하게 만들면서 작품은 최고조에 달한다.

심야의 만남에서 두 사람 만의 진지한 대화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팽팽한 인식 차이도. 돈 루이스의 사랑관은 상상과 이데아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페피타의 현세적, 현실적 사랑관이 힘을 발한다. 그녀의 사랑은 오히려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현대적이다.
“처음 당신을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당신에게 제 깊은 마음의 은밀한 자유의지를 빼앗겼던 것입니다...저의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제 안에서 죽었고, 당신 안에서 새로 태어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P.167)

결국 페피타가 이겼다. 아니 두 사람 모두가 승리한 것이다. 이는 인성(人性)에 대한 신성(神性)의 패배를 뜻하지 않는다. 후에 그의 숙부이자 주임신부가 지적했듯이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의 신앙은 굳건한 대지가 아니라 시적 공상이라는 모래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신부가 되는 것보다는 제때에 자신의 성향을 깨달아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은 살아가게 되는 편이 훨씬 나은 일”(P.199)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사 자체보다도 주인공 내면의 심리 변화의 정밀한 묘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세심한 절차탁마가 작품에 단순한 사랑 소설 이상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이를 의식한다.
“환상에서 나온 일화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 하기보다 미세한 상황과 심리를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 흡족함을 느낀다.” (P.153)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인용을 통해 후안 발레라의 문학 특성을 재확인해본다.
“우아한 예술 표현 양식과 스타일, 그리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발레라 고유의 문학적 특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아함과 고상함의 정서는 언어와 표현, 문체와 묘사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며, 그러한 일관성은 예술에 있어서 형식미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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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합작 발표한 작품집이다. 이후에도 몇 편을 공동으로 창작한 그들의 관계는 통념적 시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한 일면이 있다.

보르헤스는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줄거리를 창작해 낼 수 없는 금세기의 전형적인 대중 장르인 탐정 소설은 신비의 베일에 싸인 사건들을 언급한 뒤에 합리적인 사실에 의거하여 그것을 증명하고 보여 줍니다.”

보르헤스의 논평은 비단 <모렐의 발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사레스의 이 작품집 역시 유형상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에 분류될 수 있다.

주인공 이시드로 파로디는 “범죄 수사를 기록하는 연보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죄수 탐정”(P.17)이다. 그는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감방에 수감되어 보낸 세월로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탐정 소설은 대체로 행동 지향적이다.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의뢰를 받은 후 사건 현장을 살피고 사실 관계를 추적한다. 여기에서 빼어난 추리 능력이 결부되어 명탐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인물들이 그러하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는 주인공을 죄수-273호 감방 안에 갇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돈 이시드로는 죄수가 되어야만 할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카사레스는 <모렐의 발명>과 <러시아 인형>에서 현실을 닮았지만 현실이 아닌 순전한 환상의 시공간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과 세계는 매우 현실적이지만 순수한 가공품이다. 인간이 살면서 환상, 공상, 꿈을 만들어 내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성적 두뇌가 방심하고 있을 때이며, 육체적 활동이 정지 상태에 있을 때가 그러하다. 잠잘 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아무 실체적 할 일이 없을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물과 장소적 특성을 감안할 때, 작품 전개의 방식을 대화로 이루어진다. 주로 방문객이나 의뢰인의 긴 설명이 이어지고 며칠 후 주인공이 사건의 전후 진실을 밝히는 형식이다.

의외로 지루하지 않은 것은 사건 의뢰인의 다양한 배경과 그들 언행의 허식적, 위선적 태도와 사건의 기묘성이 흥미로움을 자아내 평면성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서 연유한다.

탐정 소설답게 사건의 진실은 언제나 상식선을 뛰어넘는다. <황도십이궁>에서 신문기자 몰리나리에게 씌워진 혐의는 드루즈 교도들의 기자 희롱과 내분의 절묘한 결합에 따른 결과이다. 삼류배우 몬테네그로(<골리아드킨의 밤>에서)는 팬아메리칸 특급열차에서 남작부인, 젊은 시인, 군인, 유대인과 여정을 같이한다. 그에게 씌워진 유대인 살인 혐의는 다이아몬드에 얽힌 치열한 암투의 결말이었음을 파로디는 명쾌하게 밝혀낸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죽음의 복수, 배신한 아내와 정부(情夫)에 대한 타데오 리마르도의 복수, 중국 한 지방의 도난당한 종교 성물(聖物)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추적의 결말 등 나머지 작품들도 드러난 진실은 통상적 추론을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 이것이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독자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건의 진실이라면 맥 빠지지 않겠는가.

이시드로 파로디는 자신의 추론을 적극적으로 사법당국에 개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밝히길 꺼리는 듯 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죄수 신분이므로 그의 진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돈 이시드로가 무고로 갇힌 것처럼, 당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감의 반영이라고 이해함이 올바르다.

작가가 이시드로 파로디를 죄수로 설정한 것은 또한 두 작가가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공인물의 필명을 사용한 이유와 유사하다. 두 작가는 자신들의 개별적 고유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한 자신들과 작가를 분리함으로써 한결 여유로운 심적 상태로 작품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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