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토프 문학의 이해와 감상 78
고일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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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와 같이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몇 편 되지 않아 번역본만으로는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망하기 힘든 경우 삶과 문학세계를 소개한 책이 매우 유용하다.

레르몬토프는 20대 후반에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충분한 성숙단계에 도달한 바로 그 순간에 때 이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푸슈킨과 후대를 잊는 군소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과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읽고 나서, 그의 서정시집을 일독한 후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도 푸슈킨과 바이런의 세례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들의 영향을 극복하고 독자성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확실히 <시인의 죽음> 이전 그의 단시들은 서경적, 서정적 낭만성으로 충만하였다. 이따금 보이는 환멸과 나태 등 면도 아직은 관념에 머물고 있다.

다수의 장시 내지 서사시를 통해 레르몬토프의 본령이 단시에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희곡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였음도 알게 된다. 레르몬토프는 일부 무지한 자들이 생각하듯이 우연히 끄적거린 한 편의 시와 소설로 명성을 얻은 운 좋은 유한귀족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불어와 영어를 철저히 공부하였고, 아랍어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이미 십대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조숙한 문인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비로소 <우리 시대의 영웅>의 페초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페초린, 그리고 희곡 <가면무도회>의 아르베닌과 장시 <악마>의 인간적인 면을 지니는 악마. 이들은 모두 레르몬토프 자신의 분신이다. 당대 전제 군주정의 압정에서 자유의 공기를 압살당하고 운신이 제약받는 선구적 지식인이 겪는 시대와 사회와의 불화. “사회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또한 사회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는 극복될 수 없다.”(P.83)

그 속에서 주인공은 사회와 겉돌고 사랑에 무정하며, 자신에 체념한다. 이는 내면에 대한 자기비판과 외부에 대한 냉소 및 공격성으로 발현된다. 가슴속 한켠에 따스한 불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차가운 이성으로 불빛의 발산을 가로막는다.

“타인에게 행복은 안겨 주는 게 아니라 불행을 안겨 주는 운명을 타고난...이 점에서 이들은 철저히 비극적인 주인공이요, 악마적인 형상이다.” (P.92)

이러한 부조화와 억제된 갈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이 조그만 충격이나 열에도 맹렬한 연소 작용으로 이어져 폭발하듯이. 현실의 레르몬토프는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존경하던 대선배의 뒤를 따라서. 작중의 페초린은 결투에서 상대에게 죽음을 안겨주고 페르시아로 총총히 떠난다. 그는 공녀 메리에게 사랑의 쓴맛을, 벨라에게는 사랑의 죽음을, 그리고 막심 막시므이치에게는 우정의 환멸을 안긴 채 조국을 떠난다. 아르베닌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며, 악마는 사랑을 얻자마자 자신의 본성으로 사랑을 빼앗기고 만다.

레르몬토프의 요절은 향후 문학세계를 무한한 발전을 예상해 보면 참으로 아쉽지만 그의 작품 인물들의 행보를 통해서 이미 운명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결투로 죽음을 맞이하기 5개월 전에 발표한 시 <유언>이 이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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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26 마이페이퍼로 쓴 글을 이동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미하일 레르몬또프 지음, 임채희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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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의 시작품집이 이미 10여년 전에 번역 출간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우연히 레르몬토프가 아니라 레르몬또프로 검색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외국어도 그렇지만 특히 러시아어는 우리말 표기가 혼재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여기에 실린 67편의 시는 그의 많은 시작품 중에서 서정시만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사적 장시들은 제외되어 그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조감해 보기에는 불완전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기대치 않은 번역본의 존재는 의외의 기쁨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경향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개인적 소회를 토로한 시들, 특정인(여인)을 수신자로 하는 시들, 역사적 소재를 다룬 시들, 현실비판적 사회시 등등. 그 중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개성의 발현과 역량 발휘를 억압하는 체제 속의 소외된 자아를 그린 시편들이다.

어차피 언어가 같지 않으므로 원시가 지니는 형식적, 예술적 묘미를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므로 하릴없이 인상에 남은 몇몇 시의 내용만 잠시 되새겨 보련다.

<터키 인의 하소연> : “노예 제도와 쇠사슬 때문에 사람들이 신음”하는 “내 조국”을 터키가 아니라 러시아로 대치해 보자.

<독백> : 십대의 어린 시절에도 이미 그의 시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재능과 자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요?/우리는 언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우리의 삶은 음산합니다./.../조국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고,/...”

<파도와 사람들> : “공허한 소음” “보잘것없는 무리” 등의 어휘와 “그들의 영혼은 파도보다 더 차갑다!”는 표현의 분위기가 어둡고 스산하다.

<보로지노 들판>, <보로지노> :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후자에서 “용사들은-너희들이 아니야!” 문구를 서두와 말미에 반복 사용함으로써 과거 러시아 인민들의 힘과 역량을 상기하여 현재의 억압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나는 살고 싶다> : 작가는 억눌린 평온이 아니라 치열한 삶, 폭풍우와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누리고 싶음을 토로한다.

<인어> : 희생된 용사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지식인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차갑고 말이 없어요./그는 잠들어 있어요...”

<돛> : 앞의 <나는 살고 싶다>와 같은 심경이다. “반항아인 그는 폭풍우를 바라고 있다./마치 폭풍우 속에 평온이라도 있는 듯이!”

<시인의 죽음> : 뿌쉬낀[푸시킨]의 죽음에 자극받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로 작가의 문명을 떨친 계기가 되었다. 시사성을 제외한다면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다만 존경하던 대선배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권력층을 “쓰레기”와 “사형집행인”과 같이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비난을 퍼부은 바람에 작가는 생애 내내 고초를 겪는다. 하긴 권력층 입장에서도 대놓고 자신들을 욕하는 사람을 어찌 가만두겠는가.

<누렇게 익은 곡물밭이 물결치고> : 레르몬토프로서는 보기 드물게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작품이다. 작가는 조숙한 만큼 초기작에서도 어둡고 비판성이 내재한 시를 써왔다. 여기서는 자연으로부터의 위안과 행복을 상찬한다.

<명상> : 자기비판과 반성이 강하게 드리운다. “나는 슬픈 듯이 우리 세대를 바라본다!/.../위험 앞에서는 수치스럽게 소심하고/권력 앞에서는 경멸스런 노예들이다./.../우리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리라,/...”

<시인> : 다마스크 강철 단검이 쓸모가 없어져 장식용으로 전락한 것처럼 시인도 사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자괴감. “비웃음당한 예언자여, 그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는지,/.../그 황금 칼집에서 다시는 뽑지 않을 것인지?...”

<얼마나 자주 나는> : 시인은 현재의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비상을 꿈꾼다. “나는 영혼 속에서 지난 옛날의 꿈과/망쳐버린 세월의 신성한 소리를 어른다./.../나는 자유로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간다./..."

<울적하고 슬프다> : 글자그대로 울적하고 슬픈 시상. 희망, 사랑, 정열의 덧없음이여...

<편집인, 독자 그리고 작가> : 편집인과 독자, 작가가 등장하여 진정한 작가상과 작품관을 논하는 독특한 시편이다. “도대체 언제 메마른 러시아에서/거짓된 허식과 결별하고 나서/사상은 평범한 언어와/정열의 고상한 목소리를 얻게 될까?”

<먹구름> : 먹구름에 작가의 심경을 이입하여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영원히 차고 영원히 자유로운 너는/조국도 없고, 너에겐 추방도 없다.”

<유언> : 작가의 죽기 1년 전,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는 듯, 유언을 남기고 있다. 유언과 실제 작가의 죽음이 묘하게 중첩되어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발레리끄> : 14면에 걸친 이 책에 수록된 가장 긴 작품이다. 발레리끄 강에서의 전투를 담고 있다. 레르몬토프는 수신자를 염두에 둔 서신 풍의 시작을 여럿 남기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 <유언>과 같은 사세구(辭世句)다. “안녕, 잘 있거라, 씻기지 않는 러시아여.”

<절벽> : 여전히 담담한 씁쓸함을 자아낸다.

<따마라[타마라]> : 장시 <악마>에도 동일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루지야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데, 레르몬토프는 카프카즈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을 남기고 있다.

<나뭇잎> : 나뭇잎과 작가 자신은 동일한 신세다. “참나무 잎은 태어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잔혹한 폭풍우에 내쫓긴 채 초원으로 굴러갔다./그 잎은 추위와 무더위, 슬픔 때문에 마르고 시들었으며/마침내 흑해에까지 굴러갔다.”

<나는 홀로 한길로 나간다> : 3장에서 작가의 체념적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시인은 이미 삶에 지쳐 있다. “이미 나는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지나간 그 무엇도 나는 애석해 하지 않는데./내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나는 나를 잊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바다의 공주> : 바다의 공주의 순진한 사랑의 기대는 잔인하게 배신당한다. 시인의 순진함도 당대에 배신당하였다.

<예언자> : 시인을 무엇보다도 괴롭히는 것은 무지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비난이다. 그들은 예언자, 즉 시인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며 헐벗고 가련하다고 경멸한다.

레르몬토프는 프랑스대혁명이 몰고 온 자유의 바람이 반동체제의 강화로 굳게 억압되던 숨 막힐 듯한 시대의 불운아였다. 그는 당대의 조국에 좌절하였으나 결코 조국의 자연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시 <조국>을 보자.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기이한 사랑이다!
나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피로 산 영광도
당당한 확신으로 가득 찬 평온도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전설도
내 속의 유쾌한 몽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 - 나 자신 그 이유를 모르지만 -
조국의 초원의 차가운 침묵,
그 끝없는 숲의 흔들림,
바다와 같은 그 강들의 범람을 사랑한다.
나는 짐마차를 타고 시골길을 질주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밤의 그림자를 느린 시선으로 꿰뚫어 보면서,
묵어갈 곳을 찾아 사방에서
슬픈 마을들의 가물거리는 불빛을 마주치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불탄 그루터기의 가는 연기,
초원에서 밤을 지새는 짐마차 행렬
그리고 누런 곡물밭 한가운데 언덕 위
흰빛의 자작나무 한 쌍을 사랑한다.
남모른 기쁨을 가지고
나는 꽉 찬 곡식 창고와
짚으로 덮힌 오두막집
그리고 조각한 덧창문을 바라본다.
명절에, 이슬 맺힌 어느 저녁,
술취한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 불며 춤추는 것을
한밤중까지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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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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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씨야 2014-09-1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혹 이 시집 가지고 계신가요? 품절센타 통해서도 구할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읽어보고 싶어서요.

성근대나무 2014-09-2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씨야님, 미안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라서...

루씨야 2014-09-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어느 도서관인지?? 좀 알려주세요..네??

성근대나무 2014-09-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도서관에서 빌렸기 때문에 어려우실꺼고요. 서울시 통합도서관 사이트(http://lib.sen.go.kr)에서 책제목으로 자료검색하면 5군데가 나오니까 이용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루씨야 2014-09-2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대나무님!!
 
과수원지기의 개 지만지 희곡선집
로페 데 베가 지음, 윤용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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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의 대가이자 국민연극의 창시자인 로페 데 베가의 국내 두 번째 번역본 출간이다. 외국문학의 다변화 측면에서 경하할 일이다.

일단 당대의 극작품들이 그러하듯 로페의 이 작품도 운문 희곡 또는 시극 형태를 갖추고 있어 번역에는 언어적 제약 외에 장르적 한계라는 이중적 어려움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운문의 묘미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 작품의 번역본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 메시지 및 구성 등을 조금이나마 접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데 만족할 뿐이다.

이 극은 남녀 간의 사랑의 갈등과 결합을 다루고 있다. 사랑과 조건이 일치한다면 사랑의 결실에 방해 요소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조건이 불일치한다면? 특히 여성에 비해 남성의 조건이 월등히 뒤처진다면 그 사랑을 성사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이나 과학적 지식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개인적 자질이 우수한 여성(특히 외모)이 결혼을 통해 상위 계층에 편입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반면 우수한 남성이 상위 계층의 여성과 연을 맺는 것은 가족과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로페 데 베가는 바로 이런 경우를 그리고 있다. 젊은 여백작과 하인 신분인 그녀의 남자 비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여백작이며, 그녀에게 구혼하는 귀족들이 끊이지 않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비서에게 마음을 애태운다.

비서 테오도로는 어떠한가? 그는 젊고 패기 있으며 자신만만하지만, 출세를 위해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여인을 거침없이 버리는 비정한 남성. 훗날 스탕달과 드라이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유형의 선배 격에 해당한다. 테오도로의 여주인에 대한 감정은 당초 상하관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아나의 눈과 말에서 감정을 알아채고는 일순간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밀회를 위하여 심야에 방에 뛰어들던 그가 이제는 마르셀라를 외면한다. 그녀의 편지를 찢고는 스스로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천명한다.

“마르셀라는 참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P.63)
““나의 남편, 테오도로에게.” 뭐? 남편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P.77)
“진지하게든 장난으로든, 이제 내 이름을 당신 입에 올리지 말아요.” (P.110)

디아나 백작은 번민한다. 그녀의 내심에서 감정과 명예가 맹렬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심은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내면의 열정적 감정은 사랑을 최우선시 한다. 그래서 테오도로에 대한 그녀의 언행은 극과 극을 달리며, 냉탕과 온탕을 넘나든다. 일면 이해가 간다. 현대에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당대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귀족과 하인, 더구나 남성이 신분이 떨어지는 사례는 통상적으로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나와 같은 신분이었다면 그의 고상함과 우아함에 내 마음은 떨렸을 거야.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나는 나의 명예가 더 소중해. 나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에 대해 존중해 주길 원해.” (P.35)

표제 ‘과수원지기의 개’는 테오도로에 대한 디아나의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과수원지기의 개는 언제나 먹을 것이 넘쳐나 자신이 먹기는 싫지만, 누가 와서 가져가려면 사납게 짖어댄다. 디아나는 테오도로가 마르셀라와 사랑을 속삭이는 걸 견딜 수 없다. 맹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순간적 감정의 폭발과 차가운 이성의 자제. 곁에서 지켜보는 이에겐 영락없는 과수원지기의 개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시종 트리스탄의 기지로 신분을 위장한 테오도로. 더 이상 디아나가 명예심으로 고뇌할 필요가 없다. 테오도로와 결혼을 선언하는 디아나. 양심에 걸린 테오오도로가 진실을 토로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격. 그녀에게 이제 명예심은 불 꺼진 재에 불과하다.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동시에 어리석군요. 당신이 저에게 당신의 숭고함을 보여 준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저와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저는 당신의 천한 사회적 신분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색깔을 찾았어요. 기쁨은 신분적 고귀함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원하는 영혼의 결합에 있는 거랍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거랍니다.” (P.171)

작가는 사랑의 소중함을 강조할뿐더러 곁들여 세인들의 신분 지향적 태도변화를 꼬집고 있다. 테오도로가 하인이 아니라 백작의 자제라고 드러나자 모두들 앞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기에 급급하다. 일순간의 태도 급변은 이전의 상황과 대비되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신분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기사 이것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TV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소위 ‘출생의 비밀’을 보라.

모두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불쌍한 마르셀라. 그녀는 잘못은 테오도로를 사랑한 것 외에 없다. 그녀의 사랑은 배신으로 보답 받고 그녀는 강제로 파비오와 결혼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당대 사회에서 하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나를 그와 결혼시키는 거예요. 나에 대한 당신의 경멸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부추겼어요.” (P.156)

남녀 주인공의 진실한 결합이라는 해피엔딩에 열광의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지만, 마르셀라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디아나와 테오도로에게 환호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귀중함만 알지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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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지음, 김원중.최문희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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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경에 롱고스(Longos)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랑 이야기다. 전원을 무대로 한 산문 구성의 목가적 사랑 이야기의 고전으로서 후대 많은 작품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골에 버려진 아기, 아기의 신표, 빼어난 외모, 순진하고 자연 순응적인 삶, 주인공의 고난과 사랑의 성취, 그리고 밝혀진 출생의 비밀, 행복한 결말 등. 과거나 현재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고전적 사랑담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 있다.

무대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여류시인 사포로 유명해진 곳이며, 레즈비언의 어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섬 주민들은 제우스 신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판과 님프들을 공경하는 고대문화의 유습을 독실하게 지니고 있다. 아직 기독교의 세례가 미치지 않아 볼 수 있는 이러한 이교도적 문화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진부함을 떨쳐내 작품에 소박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겨 색다른 재미를 준다.

다프니스는 염소를 치며, 클로에는 양을 돌본다. 그들은 한 곳에 양과 염소를 풀어놓고 나무 아래에 다정하게 앉아 다프니스의 팬파이프를 반주삼아 클로에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푸르르고 상쾌한 하늘, 새들은 지저귀고 샘물이 졸졸졸 흘러가는데 미풍은 귓가를 간지럽힌다. 상상만 하더라도 절로 가슴 속이 흐뭇하고 시원해지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천진무구 자체이다. 자연의 본능에 따라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며 옷을 벗고 나란히 누워서 행복함을 즐기나 아직 이성 간의 육체적 성 관계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뭔가 답답하고 미진함을 느끼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를 가르쳐주는 이는 없다. 이웃의 유부녀인 리카이니온의 사랑 수업으로 성교의 즐거움을 알게 된 다프니스, 하지만 그는 첫 성교가 클로에를 아프게 할까봐 그녀와 행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위적 도덕률과 가식적 경건함의 외피를 두르지 않는다. 아직 문명의 위선이 들어오기 전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거리낌 없이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잃어버린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해적의 노략질과, 이웃 마을 메티나의 침공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폭력과 전쟁의 그늘을 당대에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간난신고는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실에 필수적 통과의례이다.

롱고스의 글은 자체로서도 고전적 격조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만,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화가 마르크 샤갈의 빼어난 그림의 역할이다. 20세기의 뛰어난 화가인 샤갈은 1961년에 롱고스의 작품에 삽입할 칼라 판화 작품을 완성하였다. 총 41편의 그림은 글을 읽지 않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하지만 역시 글과 그림의 결합이 목가적 글에 환상적 분위기를 더해주어 글과 그림의 행복한 만남의 미덕을 가시적으로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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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랑의 이야기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344
후안 루이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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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전반에 발간된 이 작품은 장편 운문 소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원전이 방대하고 수록한 내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소실된 경우도 있어 체계적 이해가 어렵다는 평이 있다. 게다가 이 번역본은 원전에서 3분의 1 정도를 발췌하여 번역하고 있어 번역의 질을 떠나서 작품의 전체적 이해가 매우 곤란하다.

이타의 수석사제 신분인 작가는 이 작품의 의도를 ‘나쁜 사랑’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계도하는데 둔다. 여기서 나쁜 사랑은 속세의 미친 사랑을 지칭하며, 좋은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어서 작가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 상 미친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미친 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제대로 된 미친 사랑을 하는 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작가의 진정한 의도가 이 중에서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 작품에서 표제[비록 작가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지만]와는 달리 좋은 사랑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화자인 작가가 사랑을 하고자 뭇 여성에게 구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사랑과 여성의 의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여인이 남자에게 나쁜 것이라면, 남자의
몸에서 만든 여자를 남자에게 동반자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토록 귀족적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P.44)

따라서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구애를 하는 것은 당연한 본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인에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의인화된 사랑(Amor)이 당시의 미인관을 들려준다.(P.77~78, 81~82)

애석하게도 화자의 노력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번번이 헛수고에 그친 화자는 마침내 사랑(Amor)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비너스에게 하소연한다. 비너스의 조언을 받아들인 화자는 매파, 즉 뚜쟁이를 통해 도냐 엔드리나에 대한 구애에 성공한다. 매파와 뚜쟁이는 종이 한 끝 차이인데, 뚜쟁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라 셀레스티나>의 원형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애에서 매파의 중요성이 강조되므로 매파 우라카가 죽었을 때 화자의 상실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화자는 매파를 데려간 죽음을 비난하며, 묘비명을 적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화자의 연애담은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화자와 여성 간의 담화 중에 인용하는 숱한 우화 및 일화가 작품의 재미를 더해 준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 간에 일어난 이야기
사자와 여우에 대한 우화
땅의 출산에 대한 우화
알카라스 왕의 아들에 대한 예언
도둑과 개에 대한 우화
세 명의 여자와 결혼하고자 했던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
주피터에게 왕을 청했던 개구리들에 관한 우화
늑대와 학의 우화
화가 나서 자살한 사자의 우화
개구리를 믿은 두더지에 관한 우화
같은 여인을 동시에 사랑한 두 명의 게으름뱅이에 대한 이야기
화가 피타스 파야스에 대한 이야기
귀도 심장도 없는 당나귀에 대한 우화

이런 이야기들이 작품 속에 들어가 있으며, 게다가 ‘육체 씨와 사순절 양의 싸움’이라는 우화는 별도 장으로 길게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무수한 단편의 모자이크로서, 민간 구비전승이 문자로 정착하는 시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발췌본이 아니라 하루빨리 완전본이 나와야 작품의 진면목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좋은 사랑에 대한 작가의 속내는 무엇일까? ‘탈라베라 사제들의 노래’를 보면, 정부를 두지 말라는 대주교의 칙령으로 모든 성직자들이 낙심하고, 일부는 집단으로 불복 상소를 내기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내심을 슬쩍 표현한 게 아닐까?

“만일 주교가 그 일을 나쁘게 본다면
여러분들은 선행을 버리고 악행을 행하시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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