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팔코네 - 메리메 단편선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정장진 옮김, 최수연 그림 / 두레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메리메의 주요 단편 모음집이며, 수록된 작품은 다음의 세 편이다.

마테오 팔코네
타망고
일르의 비너스

<마테오 팔코네>는 코르시카 섬을 배경으로 사나이로서의 의리를 저버린 어린 아들을 죽이는 비정의 아버지를 다루고 있다. 작품 자체는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그 여운은 만만치 않은데, 무엇보다도 자식을 죽이는 부모라는 소재 자체가 범상치 않은데 연유한다.

하늘이 내린 윤리[천륜(天倫)]와 인간이 만든 윤리[인륜(人倫)] 간 무엇이 보다 우선순위를 지니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코르시카 섬의 보다 엄격한 의리 중시 문화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남자들의 의리는 남녀 간의 애정, 부자간의 사랑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도덕률의 하나이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도 소위 조폭 영화에 빠져드는 현상도 여기에 무관하지 않다.

다만 대상자가 성인이 아니라 열 살밖에 안 되는 아이라는 게 갈등의 핵심이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고, 아직까지 이성보다 감성과 충동에 더 몸을 움직이는 아이에게 그러한 극단적 조치가 타당할까?

당대의 일반적 도덕률과 코르시카의 특유성, 그리고 마테오 팔코네의 개인적 가치기준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간단하지는 않다.

<타망고>는 배경이 일변하여 아프리카, 그리고 노예선이다. 노예무역을 당사자인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다루었다는 점이 신기한데, 소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럽 각국의 상선들은 노예무역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었다.

대립적인 두 인간이 등장하는데, 노예선 선장과 바로 노예사냥꾼인 자신이 흑인인 타망고이다. 먼저 르두 선장은 악인이 아니다. 그는 당대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로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인 노예무역에 종사한다. 이는 그의 양심에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믿을 정도이므로.

한편 타망고는 노예를 백인에게 넘김으로써 부를 누리는데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마저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보통은 체념하고 말텐데 타망고는 집념과 끈기로 마침내 족쇄를 풀고 풀려난 흑인들과 함께 백인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그런데 배를 조종할 사람이 없게 되어 결국 모두가 죽어가고 혼자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영락한 생을 살다가 죽는다.

작가의 시선은 양비론(兩非論)이다. 선장도 타망고도 작가의 눈에는 긍정적인 인간형은 아니다. 특히 주인공 타망고는 자신이 동료 흑인을 팔아넘긴데 대하여 가책을 갖지 않으며, 흑인들을 이끌고 선원들을 모두 죽이는 한치 앞도 모르는 무모함마저 가지고 있다.

작가의 시선 자체도 또한 양면적이다. 그는 분명히 노예무역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흑인들의 무지몽매함과 미신에의 편향 등 여러 악덕들을 보여줌으로써 은근히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을 드리우고 있다.

<일르의 비너스>는 이미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어 낯설지 않다. 다만 이탈리아어 번역본과 원작인 프랑스어 번역본과의 차이점이 혹시 있지나 않을까 싶어 다시 보았다. 결론은 당연하지만,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비너스의 악의적 이미지가 가져오는 음산한 효과는 여전한데, 이는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여신과 상반되는 것이다. 조소하는 비너스, 사랑의 제물을 요구하는 비너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번역상의 오류로 생각되는 어휘가 있다. ‘스카시’가 그것인데, 알퐁스가 마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운동경기다. 이탈리아어 판본에서는 ‘테니스’로 옮기고 있다. 스카시는 역주에서도 밝혔듯이 네 벽이 막힌 경기장에서 하는 스포츠인데, 작중에서는 야외의 넓은 운동장이 스카시 구장이라고 하여 자체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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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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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멘 - 지만지고전천줄 25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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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흔히 그렇듯 원작과 그 응용작은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응용작이 원작의 충실한 모방이라면 응용작 만의 독자적 개성을 상실하니 의의가 약해진다. 응용작이 제목만 빌려왔을 뿐 원작과 동떨어져 있다면 원작에 대한 배신이다. 따라서 응용작은 언제나 원작과의 관계 설정, 즉 충실성과 고유성의 줄타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제의 카르멘과 메리메의 카르멘의 개성은 분명하다.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을 꿈꾸는 집시 여인. 하지만 비제는 메리메의 카르멘이 지나치게 악독하다고 여겼음인지 다소 순화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물론 돈 호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는 무대에 올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연 후 혹독한 비난에 시달렸으니.

아, 카르멘! 그녀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인형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생명력이 충만하며, 지적이고 고상하지 않지만 야성미가 흘러넘치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혼을 빼앗아가는 마력적인 섹시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야만 순진한 돈 호세가 그녀를 저주하면서도 그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시달리기를 원치 않으며, 특히 명령을 받는 것은 더욱 싫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게 살며, 또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는 거예요.” (P.117)

“당신은 나의 롬이니, 당신에게는 당신의 로미를 죽일 권한이 있어요. 그러나 까르멘은 언제까지나 자유로울 거예요.” (P.129)

카르멘은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야생 동물을 울타리나 새장 속에 억지로 가두어 둔다면, 살아있으되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처럼, 카르멘은 사랑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 거리낌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카르멘이 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각광받는 매력적 캐릭터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카르멘의 악덕마저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분명히 웃으면 칼을 찌르고 총을 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다, 자신이 직접 그렇게 나서지는 않지만. 그녀는 남을 속이고 강도나 살해당하기 좋은 장소를 돈 많은 사람들을 유인하며, 밀수도 서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십이분 충분히 활용한다.

원작만을 보면 카르멘은 매우 개성적이고 관심 가는 인물이지만, 만만치않게 비중이 큰 인물이 바로 돈 호세다. 그는 카르멘에 빠져 인생을 깊은 나락에 빠뜨리는 불행한 캐릭터다. 오페라에서는 부족하였던 그의 남성적이며 강렬한 카리스마(오페라에서는 오히려 투우사 에스카미요가 남성미를 상징하며, 돈 호세는 순수한 청년으로만 표현된다)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는 카르멘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 그가 그녀를 칼로 찌른 행위를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카르멘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카르멘의 존재로 인한 사회의 선한 사람들의 도덕률로 회귀하는 영웅적 결단이다.

돈 호세와 카르멘, 그들은 사랑하지만 결합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더욱 나았을 것이다. 서로에게 충실하기에는 카르멘은 너무나 자유로웠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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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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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롬바 지만지 고전선집 41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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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완역본이 아님을 밝혀둔다. 옮긴이에 따르면 원전에서 약 60% 정도를 발췌 번역하였다고 한다. 국내 번역본에서는 대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다. 역자는 지만지에서 완역본을 출간할 것이라고 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표제에서 언뜻 예상되는 로맨틱이나 연애 내용을 담은 소설이 아닐까 섣부른 추측은 터무니없음이 몇 장 넘기지 않아서 드러났다. 이 작품은 코르시카 섬을 배경으로 부친 살해에 대한 복수를 다루고 있다. 메리메는 코르시카 섬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마테오 팔코네>도 그러하다.

코르시카는 18세기 말까지 독자적인 정체(政體)와 언어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존재하는데, 당대에는 현행법보다 더 우세하였다. 즉 명예에 관한 건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되갚아야할 의무이며, 이를 등한시하면 섬에서는 제대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빚을 갚은 사람들은 소위 산적이 되어 경찰에 쫓기면서도 주민들의 존중과 지원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오르소와 꼴롬바의 바리치니 가문에 대한 보복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부친의 살해범에 대한 응징에 대한 오르소와 꼴롬바의 인식차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오르소는 본토에 나와서 군대에 복무한 장교로서, 많은 부분 조금 더 프랑스 내지 주류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고향의 관습과 본인에게 쏠린 기대와 의무를 이해하면서도 조금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길을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다.

반면 꼴롬바는 철저한 코르시카 여인으로서 그 문화와 관습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따라서 명예에 관한 한은 오빠보다도 한층 적극적이고 과감하다. 그녀는 망설이는 오빠를 침묵으로 압박하며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길로 몰아가기도 한다. 복수에 대한 그녀의 의지는 합당한 정도를 넘어선 집념과 집착으로 비치기도 한다.

“야만적 명예에 광신적으로 집착하고, 이마에 오기가 드리워져 있으며, 냉소적인 미소로 입술이 일그러진, 그 늘씬하고 강렬한 여인이 음산한 전쟁터 같은 곳으로 무장한 젊은이를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P.71)

“꼴롬바의 음성과 태도에는 위압적이고 무시무시한 그 무엇이 있었다. 코르시카 사람들이 겨울밤이면 서로에게 들려주는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속의 요정, 그 악의적인 요정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꼴롬바는 팔짱을 끼고 입술에 경멸의 미소를 띤 채, 적들의 집으로 시신들을 운구해 가는 정경과 서서히 흩어지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P.130)

우연히 피사에서 만난 쇠락한 바리치니 노인을 보고 내뱉은 말을 보라.
“두 녀석 모두를 없앨 수밖에 없었어. 이제 가지들은 모두 잘렸고, 그루터기도 썩지만 않았다면 뽑아버렸을거야. 그렇게 칭얼거리지 마. 고통받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는 두 해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았어.” (P.144)

이 작품은 냉혹하다. 작품 제목으로 삼은 주인공의 언행이 그러하고 작품의 스토리가 또한 그러하다. 법규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그러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독자의 감정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꼴롬바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여전히 차갑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 좀 봐라.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틀림없이 흉조가 어려 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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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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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곱스카야 공작부인 / 우리시대의 영웅 지만지 고전선집 156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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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은 레르몬토프의 미완성 소설이다. 국내 초역인데 완역은 아니며, 전체 9개 장을 50%~80% 발췌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기는 발간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더 이상 무슨 투정을 부리겠는가.

내용을 보면 무척 흥미로운데, <우리 시대의 영웅>의 전편 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의 이름도 페초린으로 동일하며, 페초린의 첫사랑 베라가 등장하며, 리곱스카야 공작부인도 등장한다. 물론 전작과 후작의 인물이 동일한 캐릭터는 아니며, 다만 유사성이 높아서 두 작품 사이에 친연성(親緣性)이 깊다고 염두에 두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먼저 페초린을 주인공으로 하여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집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중에 작품 전개 또는 인물 설정이 본인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중단한 것이 아닐까. 이는 <우리 시대의 영웅>에 등장하는 페초린과 미완성작의 페초린을 비교하여 보면 유사성보다 대비점이 두드러지는 특성을 보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본론보다는 서론적인 연애담이 장황하게 전개되어 작품의 초점이 흐려지는 문제점도 노정되어 있다.

그래도 레르몬토프의 대표작에서 과도한 생략으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페초린과 베라의 관계를 이 작품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점은 크나큰 소득이다.

또한 하급 관리 크라신스키를 등장시켜 페초린과 갈등 관계에 놓고 페초린 주위에 베라와 네로구바의 삼각관계를 설정하는 등 나름대로 후작과는 차별되는 작품 구도를 가진 점도 흥미롭다. 후작이 페초린을 중심으로 하지만 다소 연결성이 느슨한 단편소설 모음의 형식을 취한 것과는 작품 전체의 통일성에서 보다 강화되어 있다.

소설은 본격적인 사건과 갈등이 전개되기 직전에 펜이 멈추어졌다. 따라서 작품의 진면모를 우리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작을 완성작과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유념하고 먼저 일독 후 <우리 시대의 영웅>을 펼친다면 훨씬 매끄럽고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영웅>은 원전의 약 80%를 발췌 번역하였는데, 이미 국내에도 완역본이 있으므로 민음사본과 문학동네본 중에서 취사선택하기를 권하고 싶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단상을 밝힌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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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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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의 아빠
알퐁스 도데 외 지음, 최복현 옮김 / 글읽는세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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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작품을 찾아 읽는 여정에 마주친 책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프랑스 단편소설 명작모음집이다. 전문적인 문학 번역서라기보다는 눈높이를 약간 낮추고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겉표지에 나온 대로 “가장 소중한 당신께 읽어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용도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전체 4부로 하여 작품들을 지혜, 사랑, 행복, 희망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대체적 분위기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페데리고>는 한마디로 황당하지만 재밌는 작품이다. 노름에 빠진 귀족이 예수님을 대접하여 세 가지 소원을 받은 후, 이를 활용하여 본인은 물론 지옥에 떨어진 순진한 노름 희생자의 영혼을 구제하여 천국으로 이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압권은 지옥을 찾아가서 지옥의 왕 프루통과 벌이는 노름 대결 장면과, 천국 입구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하여 결국 천국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또한 죽음의 신을 골탕 먹여서 두 번이나 생을 연장하는 부분도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주목할 곳은 페데리고가 노름에서 무조건 승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깨닫게 된 사실, 즉 자신이 파멸시킨 젊은 노름꾼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직한 노름꾼”(P.19)이었다는 점. 이것이 페데리고의 영혼을 근본에서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르셀 에메가 어떤 작가인지 네이버 검색을 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척 흥미로운 작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이 책에서는 <착한 개>와 <금언>을 수록하고 있다.

소경 주인을 위해 소경을 바꾼 개를 배신한 나쁜 주인, 고양이가 개를, 생쥐가 고양이를 대신하여 소경이 되는데, 게으른 나쁜 주인은 거지 몰골로 개에게 나타나지만, 결국 생쥐와 소경을 대신하다. 생쥐가 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는 앞 못 보는 나쁜 주인에게 달려간다. 착한 개! 정말로.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예전과 현대가 다르다. 과거에는 부자간에 대를 이어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신분제 사회라는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탓이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숙련된 솜씨와 풍부한 경험으로 인한 노하우는 어린 아들에게는 존경스럽고 장차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다. 재벌가의 자식이 아닌 이상, 아버지의 직업을 승계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시골은 도시로, 도시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기를 꿈꾼다. 부자가 모두 함께. 이런 판국에 어설픈 아버지의 권위는 오히려 자식의 조소를 유발할 따름이다. 루시앙은 아버지 쟈코탱을 원망하지만, 문득 너무나 약하고 위태로운 아버지의 지위를 깨닫는다. 슬픈 아버지의 초상화여!

알퐁스 도데의 작품도 두 편이나 실려 있다.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과 <아를르의 여인>. 이미 도데 작품집을 읽었으니 새삼스럽지 않으나, 코르니유 영감이 웅변하는 옛것과 새것의 갈등은 요즘 되새겨볼 만하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장인정신이니, 친환경, 수제(手製) 등을 내세우면 더욱 각광받는 현실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결국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못 이긴다.

쟝에게 사랑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반추한다. 누구에게 사랑은 일부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부다. 대개는 여성들이 전부 아니면 전무를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방스의 쟝은 단순하며 순진하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있다면 그야말로 순애보로 대서특필될 만하다. 오히려 사랑을 방해한다고 일가족을 죽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련만.

앙드레 모르아의 <광산귀신>은 은광을 둘러싼 부패세력과 여기에 대항한 광산기사의 비참한 말로를 잘 보여준다. 광산귀신이 허위이며 거대한 빼돌리기의 위장막임을 알면서도 책임자들은 외면한다. 올곧은 사바티니가 본사에 이를 알렸지만, 그 후 사바티니는 광산업계에서 매장당하였다,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용감한 처사에 공로상이라도 주어야 하건만. 더 큰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악의 자행을 감수해야 하는 게 타당한가. 입맛이 씁쓸하다. 광산귀신이 저 먼 볼리비아의 산 속이 아니라 우리 사회 각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

단편소설의 거장 모파상의 작품은 의외로 그다지 읽은 기억이 없다. 여기에 수록된 세 편 <보석>, <시몽의 아빠>, <포로>와 이전에 읽었던 <밤>을 상기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보다 풍부한 그의 문학세계를 탐구할 생각이다. 죽은 아내의 지혜로운 재테크로 졸지에 갑부가 된 사연은 재미와 여운을 동시에 안겨준다. 아내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경이로운 노력을 기울였던가, 졸부 남편은 그 후 진정 행복에 넘친 삶을 누렸을까? 재혼한 아내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우 괴롭혔다고 씌어있으니 아닌 것 같다. 소시민 남편과 갑부 남편 중에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한 삶인가 생각해 본다. 물론 현대인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릴 수 없겠지만.

편모슬하의 자식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냉대는 그나마 차츰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그것이 매우 심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별이 아닌 경우에는 결사적으로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않았던가? 일본의 황혼이혼은 과거 유산의 슬픈 잔설(殘雪)이다. 시몽과 그의 어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하나, 타인과 사회의 차디찬 시선을 막아줄 아빠와 남편의 존재. 다행히 시몽은 좋은 아빠를 만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항상 그러할지는 알 수가 없다.

<포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로운 삼림간수의 딸이자 아내인 베르틴느의 행위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독일 병사들을 속임수를 써서 포로로 잡은 그녀. 하룻밤 머물고 그들은 숲을 떠날 것이다. 그녀가 독일군을 머물게 했다고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선량한 사람을 기만하였다. 단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현대에서 전쟁은 군대끼리만 하는 것으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대내외적으로 지탄받는다. 베르틴느의 가슴 속에 독일군에 대한 조용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문득 몸서리쳐진다.

샤를 루이 필립은 서민의 보다 일상적인 삶의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노인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을 뒤따른 노인의 사연이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된 일상을 생활할 수 없다. 먹어도 허전하며, 일 하다가도 멍하니 있곤 한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마냥. 부부가 동고동락하며 백년해로하면 서로의 몸과 마음이 반 정도 겹쳐지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이 떠나면 남은 사람은 반토막 된 심신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혼과 이혼, 재혼이 밥 먹듯 손쉬운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동생>은 출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룻밤 이웃집에 맡겨진 아이들의 웅숭깊은 생각을 잘 보여준다. 작년에도 동일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 후 막내가 생겼다. 그럼 이번에도? 자잘한 일상의 모습에서 평범하지만 소박한 가정의 모습, 그것이 참으로 정겹고 아름답다.

<순박한 사람들>은 중의적이다. 아내가 떠나간 슬픔을 호소하기 위해 방문한 이웃집 남자의 사연을 듣는 여성 화장. 그리고 문득 깨닫는 현실. 떠난 사람은 이웃집 여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남자도 함께라는 것을. 인생에는 행복보다 많은 불행과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그속에 찰나의 행복은 아침이슬처럼 영롱하다. 쟌과 이웃집 남자는 슬픔에 잠긴 채 각자의 인생 여정을 힘겹게 걸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행복과 대면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순박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야심에 찬 시골청년의 상경. 그는 힘겹게 분투하면서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이. 그의 성공가도에 지난 날의 인연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과감한 뿌리침.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라인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같은 순수문학은 물론 무수한 TV 통속극에 등장한 식상한 소재. 하지만 언제나 공분을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수와 코페의 <연애편지>도 마찬가지다. 시적 재능이 떨어지는 시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바친 여성의 생전 편지를 출간하여 화려한 명망을 누린다는 가슴아픔과 분노의 동시 유발. 일반적으로 이러한 유는 결말이 대체로 두 가지다. 자신의 죄악에 자책을 느껴 자멸하는 방향과 아니면 여인의 처절한 복수극으로 이어지는 방향. 코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인은 죽고, 마리우스 카반느는 여전히 당당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일상을 누린다.

프랑시스 잠의 <삶의 병>과 <인생여정>. 주인공은 작가처럼 시인이다. 자신의 분신인 듯. 마음을 좀먹는 불안에 시달린 시인은 시골로 떠난다. 거기서 순박한 시골여인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의 불안 증세는 씻은 듯 사라진다. 잠시 도시로 돌아간 시인의 귀에 들린 자신의 몰락에 대한 소문, 시인은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는 어머니에게 시골로 가자고 권한다. 창백하고 까칠한 도시인, 그들은 외관상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을 누리지만, 내면으로는 우울과 불안과 고독에 시달린다. 아이들의 아토피도 시골에 가면 대개 사라지듯이, 시골은 도시의 병폐를 치료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시골여인은 건강한 삶, 건전한 생활관을 가지고 시인을 건강하게 한다. 시인을 몰락한 게 아니라 삶의 질을 크게 업그레이드하였음을 도시의 속물들을 알지 못하리라, 영원히.

<인생여정> 역시 시인의 잊고 지낸 진정한 삶을 상기시킨다. 수호천사의 이끌림에 따라 그는 시골의 냇물과 숲, 개울 옆 무덤 가를 산책하며, 물총새의 하늘빛, 산비둘기의 솜털, 나뭇잎들의 속삭임, 첫사랑의 미루나무 여인 등을 회상한다. “가시덤불과 쐐기풀, 장구채풀이 우거진 조용하고 조그만 무덤 가”가 시인의 길이고 잠들 곳이며, 그의 산책 여정은 바로 그의 인생여정이다. 시인은 곧 우리들 자신이다.

J.A.위스타슈의 <산책 나간 두 개의 종>은 파리의 한 종탑 종들의 연대기다. 옛적에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준 그윽한 종소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계화된 모터로 작동하는 무감각한 소리로 변모하고 말았다. 성목요일 미사 후 교황의 축복을 받으러 여행을 떠난 종은 성토요일 미사 때맞추어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앙리에트 루이즈와 마리라는 두 종은 잠시 그들의 노정을 벗어나 자유로이 유럽을 종횡한다. 거기서 그들이 보는 것은 비옥한 들판과 푸른 초원, 은빛 바다, 종탑에 자유를 억압당한 종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자연과 인간들의 여유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도 생의 본질은 여전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구세주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었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슬프지만 그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버리고 사회의 엄혹한 현실에 눈뜨게 된다. 아이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이지만 어른 입장에서는 대견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상반된 감정을 품게 된다. 프랑수와 모리악은 <곱슬머리 금발>에서 아이의 실망감과 배반을 좀 더 극단으로 몰고 간다. 쟝 드 브레는 어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실제로 산타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그 확신이 깨지는 순간 확신의 정도만큼 배신감은 강해지는 법, 배신은 곧 반항으로 이어지고 그의 삶의 불행한 결과는 매우 극단적이다. 작가의 집요한 상상력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동생의 말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화자, 프론트낙은 위태롭지만 슬기롭게 고비를 넘어선 통상의 우리들의 어린 모습이다. 넘을 때는 몰랐지만 뒤돌아보니 가파르기 그지없는 능선이었음에 새삼 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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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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