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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포네, 또는 여우 - 벤 존슨 희곡선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42
벤 존슨 지음, 임이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평점 :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다. 나이로 보면 살짝 후배에 가깝다. 오늘날 벤 존슨의 성가는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성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최초로 2절판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사실상 최초의 계관시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생전 그의 인기가 선배 못지않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만만찮은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통상 그를 도시 희극의 대가라고 일컫는다. 주로 영국 런던이라고 하는 당대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중하층 계급의 삶, 특히 권력, 돈, 섹스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상공업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연극 향유 계층도 귀족에서 시민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궁정과 왕실보다는 자기네와 같은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작가들은 도시적 삶에서 기존의 전통적 가치보다는 물욕과 금전욕 같은 일차원적 욕망이 팽배한 적나라한 사회 현실을 풍자하였다. 따라서 벤 존슨의 작품은 오히려 현대적이다.
존슨의 희극이 근래에 들어 재평가되고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존슨이 풍자하는 인간의 탐욕과 대도시의 생활상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P.400)
이 책에 수록된 두 작품도 모두 희극이다. 사기꾼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속여 넘기는 내용에서 공통성을 띤다. 선량한 시민들이 사기꾼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까닭은 탐욕에 있다. 그들은 독신 부자 노인의 상속자가 되어 거액의 유산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또는 현자의 돌을 얻어 희대의 부를 누리려는 욕망 등과 같은 저마다의 욕심에 현혹당한다. 탐욕에 지배당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조잡하고 유치한 사기극에 그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빠져들고 도덕 윤리마저 쉽사리 내버리는 현실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량함이 현명함과 반드시 대응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모스카) 그자들이 뭘 보려 해야 말이지요. / 불이 너무 많으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에요. 각자 / 자기 자신의 희망에 가득 차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서는, / 자신의 희망과 반대되는 것은 / 그 이상 진실되고 명백할 수가 없고, / 그 이상 빤할 수가 없는데도, 그냥 거부하려는 거지요... (P.157, 5막 2장)
권선징악 또는 인과응보로 끝나는 결말에 우리는 대체로 익숙하다. 선인이 피해를 보고 몰락하는 것으로 끝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면서 해피엔딩이 된다면 우리네 양심이 용납 못 한다. 이는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속고 속이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극 중의 악인은 불행을 당하거나 엄혹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볼포네>에서 사기의 주역인 볼포네와 모스카는 물론, 피해자라고 할 법한 볼보테, 코르바치오, 코르비노가 모두 처벌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 사유다. 그들이 헛된 욕심에 법과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해서다. <연금술사>는 약간 다르다. 사기의 세 주역 중 돌과 서틀은 아무 이득 없이 쫓겨나다시피 한다. 페이스, 즉 제레미는 간계를 부려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한밑천을 단단히 잡게 된다. 역시 피해자인 매몬, 대퍼, 드러거와 트리뷸레이션 일행은 허망하게 재산만 날리고 만다.
(볼포네) 이제, 이 여우가 법에 의해 처벌되더라도, / 여러분께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 벌을 받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P.199, 5막 12장)
관객은 <볼포네>에서 사법적 정의가 잘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관객은 극 중에서 심적으로 내내 볼포네와 모스카 편이다. 왜 사기꾼을 편드냐고 하면 그들이 덜 어리석고 덜 탐욕적이어서다. 그들은 오히려 탐욕스러운 이들을 벌주는 역할에 가깝다. 그들의 악행은 더 큰 정의 구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할까나. 관객과 그들은 심리적 공범이므로 독자는 전적으로 그들을 욕할 수 없다. 작가조차도 이를 인식하고 있기에 사법적 단죄 후에 볼포네에게 다시 한번 무대에 설 기회를 부여한다. 그래야 엄혹한 결말로 마음이 불편했을 수도 있는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존슨은 탐욕보다 어리석음을 더 비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볼포네와 모스카의 술수와 책략을 전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편에 서서 같이 즐길 수 있게 된다. (P.401)
<연금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주인 러브윗은 집사 제레미의 불법 행위를 슬쩍 눈감고 오히려 동참한다. 그가 자신의 재산을 불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미모의 과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볼포네>의 판사처럼 위법 행위를 정죄하는 역할을 수행할 만한 배역이 이 작품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여기에서 엄격한 사법 정의를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 러브윗의 말을 들어보자.
(러브윗) 하인 덕분에 이렇게 부유한 미망인을 / 아내로 얻는 행복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 그 주인이 정직함을 조금 훼손해서라도, / 하인의 꾀를 관대하게 봐주지 않거나, / 하인도 한밑천 마련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 아주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P.395-396, 5막 5장)
그런데 사기를 당하는 등장인물들을 우리는 과연 선량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볼포네>에서 보나리오와 실리어의 고발로 진실이 드러날 뻔한 상황이 닥치자 볼토레는 자신의 사법 지식을 악용하여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코르바치오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며 불효자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코르비노는 최악이다.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자신의 아내 실리어를 제 손으로 볼포네에게 바친다. 이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퍼붓는 욕설과 악담을 듣다 보면 그의 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코르비노) 집에 가서, 그 양반을 준비시키게. 내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 그리고 기꺼이 아내를 보내는지 꼭 얘기하고. / 얘길 듣자마자 / 내 자진해서 그러기로 했다고 맹세했다고. (P.85, 2막 6장)
(코르비노) 이 역병 같은 메뚜기야, 하늘에 맹세코, 메뚜기야. 창녀, / 악어, 네년은 악어처럼 눈물을 준비했다가, / 때가 되면 흘리려고 그러지. (P.110, 3막 7장)
<연금술사>의 경우 대퍼와 드러거의 욕망은 그나마 순진하고 소박한 측면이라도 있다. 트리뷸레이션과 아나니아스는 종교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외피라도 지닌다. 매몬은 위선자다.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현자의 돌을 구하는 것처럼 표방하지만 그의 내심은 개인적 쾌락 충족에 있다. 관객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매몬) 이제 나도 / 솔로몬 왕과 맞먹는 숫자의 부인과 첩을 / 거느리려고 한단 말일세. 솔로몬도 / 나처럼 돌이 있었거든. (P.249, 2막 2장)
(매몬) 진귀한 고기 요리로 쾌락을 최고로 높일 준비를 합시다. / 그리고 다시 좀 하강했다가, 엘릭시르를 마셔 / 젊음과 기력을 새롭게 하며, / 영원히 즐기도록 합시다. / 인생과 쾌락을. (P.325, 4막 1장)
이 두 작품은 일부 선인도 존재하지만 비중은 크지 않을뿐더러 결말도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전편에서 유이하게 긍정적인 인물로 보나리오와 실리어가 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희생 당사자에서 벗어나지만, 부친과 남편의 처벌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후편에서 유일하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인물이 설리다. 그는 연금술이란 게 사람을 기만하는 술책임을 간파하고 그들을 징벌하려고 애쓰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이로써 권선징악이 작가의 목적이 아님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폴리틱 우드-비 경과 카스트릴은 광대역에 가까운 배역이다.
마지막으로 <볼포네>와 <연금술사>를 관통하는 특징 중 연극적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볼포네와 모스카는 코르비노, 코르바치오, 볼보테를 대상으로 각각 죽음에 임박한 환자 역할로 속인다. 볼포네는 한술 더 떠 약장사로 변신하여 실리어의 마음을 떠본다. 그가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법정 하사관으로 변장하다가 역시 볼포네의 상속자로 변신한 모스카에 뒤통수를 맞는 대목은 연극적 유희의 극치다.
<연금술사>에서 돌, 서틀, 페이스의 사기 행각은 자체로 연극이다. 그들은 각 고객의 신분과 유형에 맞춰 배역을 넘나들면서 분장과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해관계가 엇갈린 등장인물들이 교대로 등장하여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과정을 절묘하게 설계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연극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전편과 후편의 차이는 주요 인물의 다양한 배역과 변신이 후편에서 한층 더하다는 데 있다. 후편에서는 설리, 플라이언트 부인과 심지어는 집주인 러브윗마저도 변장에 동참한다.
존슨의 두 작품에 두드러지는 연극성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풍자하되, 웃음을 통해 그 악덕들을 유쾌한 문학 상품으로 포장하는 극작가의 전략인 셈이다. (P.407)
작품 해설에서는 이러한 연극성을 작가의 뛰어난 작법 솜씨인 동시에 중하층 관객을 향한 직접 비난과 자기반성을 통한 불쾌감과 반발을 희석하려는 장치로 이해한다. 대놓고 손가락질하면 기분 나쁘지만 코미디를 통해 풍자하면 웃음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