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삼국지 三國志 세트 - 전10권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익히 알려져 있듯이 <삼국지>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 원명이 ‘삼국지연의’인 나관중 작의 소설은 흔히 ‘삼국지’로 통칭된다. 역사소설이 정통 역사서를 대중적 인기에서 압도하는 형국이다.

삼국지가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수많은 판본의 삼국지가 국내 출판계에서 범람하고 있다. 베스트셀러인 이문열 평역본, 김구용 정역본, 거기다가 황석영, 김홍신 등, 1980년대 이전의 판본들을 제외하더라도 손꼽히는 것만도 여럿이다. 각 판본마다 독자적인 개성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고 순수한 번역 외에 역자의 가치관과 사고가 삽입된 것도 다양하니 작자명을 굳이 나관중이라고 표기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다양한 삼국지 판본 중 가장 독특한 유형은 바로 고우영이 만들어 냈다. 바로 만화 삼국지다. 만화란 장르의 특성상 시각적 압축 효과를 통해 글자가 주는 것과는 상이한 매력을 주지만, 내용면에서 있어서는 상당한 압축과 생략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작가의 주관이 또한 개입한다.

따라서 고우영 삼국지는 지극히 개성적이다. 그리고 달리 표현하자면 ‘민중(民衆)’ 삼국지이기도 하다. 그에게 동탁, 이각과 곽사는 말할 것도 없고 조조, 손권 등도 겉으로는 허울좋은 대의명분을 내걸지만 속으로는 결국 권력을 잡고자하는 내심의 은밀한 욕망을 사정없이 까발리고 있다. 그 점에서는 유비도 피해갈 수 없다. 유비의 백성 애호적, 도덕적 인간관계의 진의는 결국 후한의 뒤를 이어 대륙을 통일하고 지배하는 데 본심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고우영의 그의 대작 첫머리를 유비도, 관우도 아닌 장비로부터 시작하여 상당 분량을 할애하는 뜻은 장비야말로 사심없이 민중의 솔직담백한 면모를 체현한 인물로 파악한데 있다. 단순하고 성격이 급하지만, 극히 인간적이며 사술을 부릴 줄 모르는 성격.

작가는 제갈공명에 대하여 두드러지는 두 가지 요소를 부여하고 있다. 그점에 대해서는 호오가 갈릴 수도 있겠다. 먼저 제갈양은 폐결핵 환자로 규정하고 있음이다. 도처에 공명이 피를 토하는 장면을 반복하여 공명이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점을 강하게 예시하고 있다.

또한 제갈공명은 완전한 인간의 표본이 아닌 현세적 인간으로 격하시킨 점이다. 그는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될 여지가 있는 인물은 기를 꺾거나 아니면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방통과 관우의 죽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방치하였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특히 관우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유비의 신임을 다투는 라이벌 관계로 묘사한다. 결의형제로 문무에 뛰어난 관우를 제압해야만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그를 의식한다.

물론 실제적으로 제갈공명이 관운장의 죽음을 방치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개인 관우의 죽음이야 설혹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관우의 죽음은 형주의 손실을 의미하며 이는 곧 유비와 공명 자신의 구도인 익주와 형주의 양대 축을 기본으로 삼국 통일을 기한다는 거대전략이 어긋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하나의 가설로 극화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고우영은 제갈양의 죽음을 대단원으로 삼고 있다. 소설에서는 그의 사후 강유의 분투와 촉과 오의 멸망, 조씨의 몰락과 사마씨의 등장 등 파란만장한 전개가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의 관심과 자신의 판단을 통해 보건대 더 이상의 극화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 것 같다.

이 작품이 1970년대에 연재 및 출간되었는데, 화타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자행되는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고문 장면은 작가의 대담성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당시 검열에 통과되었든 아니면 삭제되었든 그러한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한다. 아울러 고문 담당 관리의 평온한 얼굴 및 동료와의 인간적 대화 장면은 고문의 비인간성을 한층 철저히 노정하고 있어 몸서리를 치게 만든다.

고우영 삼국지를 삼국지 초보자에게 추천할 수는 없다. 단지 만화 형식이라고 중학생 이하에게도 추천하기 어렵다. 이러저러 여러 판본의 삼국지를 섭렵한 열혈 독자가 식상함을 지우기 위해 맛보는 딱 한 번의 별미로 추천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0.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우영 십팔사략 세트 - 전10권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만화는 개인적으로 열광도 무관심도 아닌 중간적 애호가의 수준이다. 만화의 재미성을 인정하지만 목적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물론 <열혈강호>의 희로애락에 푹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조금 보면서 어쩌면 만화가 딱딱한 분야의 접근을 위한 부분적 보완재의 구실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되었다.

만화가 고우영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더욱이 그가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마저도. 솔직히 누가 빌려주던가 아니면 이번처럼 반값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이 만화책을 볼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중국 역사를 어려워하는 이도 많다. 삼국지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는 알지만 개괄적 걸개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중국 역사는 단편적 사실들의 무차별적 나열에 불과하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면에서 ‘십팔사략’이라는 책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 것이며, <만화 십팔사략>도 미덕을 상실하지 않는다.

중국 상고시대부터 남송의 멸망까지 방대한 시기를 다루고 있으므로 몇 권의 책으로 속속들이 심도 깊은 역사 이해를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커다란 흐름을 깨우치도록 하며 도중의 중요한 사건이나 일화 소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관련 서적들을 -물론 번역본으로- 보았다. <서경>, 사마천의 <사기> 전집, 사마광의 <자치통감> 처음 몇 권 등 역사서를 포함하여,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등 역사소설류. 특히 <삼국지>는 다른 번역본을 수차례, 고에이 컴퓨터게임 등을 섭렵하였다.

따라서 이 만화책 세트를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심심파적 삼아 간만에 중국사를 통사적으로 훑어보자는 심정뿐. 그럼에도 남북조 시대는 역사서에서 상세히 다루지 않는 부분이므로 이 책을 통해서 그 정신없음과 잔혹성을 여실히 알게 되었다.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도 사람 목숨은 여전히 파리 목숨이며, 권력욕 앞에서 부자, 부부, 형제 간의 정리는 진부한 도덕률이다.

이 책을 누구에게 추천할 수 있을까. 일단 초등학생은 제외하자, 어쨌든 기본적 이해력과 인식수준을 사전에 요구하므로. 내용에 다소간 선정성과 폭력성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망설이면서 중학생 정도 이상이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의 방대함에 연유하는지 작가는 큰 줄기를 쫓아가기에 바쁘다. 역사의 주인공은 역사 그 자체이다. 그 안에 명멸을 거듭하는 수많은 영웅과 인간 군상을 역사를 드러내는 부품과 배경 역할에 불과하다. 작가의 유머와 해학은 등장인물 각각을 뚜렷이 구별되게 하는 놀라운 차별성을 보여주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보고 읽는 <만화 삼국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만화 형식을 통한 충실한 중국사 이해가 주목적이라면, 이 책은 매우 좋은 입문서다. 하지만 작가 고우영의 창의성과 체취를 짙게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장일단은 존재한다. 다만 독자의 선택일 뿐이다. 나라면 어떨까? 지하철 통근하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는 정도면 충분하려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9.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그라지엘라
알퐁스 드 라마르틴 / 책세상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는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영원한 예술의 소재다. 더구나 그것이 비극적 결말을 갖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라면 한층 더할 것이다. 

라마르틴은 특히 슬픈 사랑의 구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라파엘(호반의 연인)>은 과연 사랑의 찬가이지만, <그라지엘라> 또한 이에 못지않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젊은 날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묘하게 섞여 있다. 갓 스무살 넘은 라마르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소녀와의 풋풋한 사랑의 추억이 여기에 그대로 녹아있다.

본질적으로 <그라지엘라>는 사랑의 이야기이지만, 사랑담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전반부는 오히려 주인공의 이탈리아 편력기 인상을 주며, 나폴리에서 친구와 함께 어부의 배를 타고 뱃사공 생활을 하다가 폭풍에 난파당하는 장면은 해양문학에 가깝다. 그리고 주인공이 도시문명을 벗어나 이스키아섬과 프로치다섬을 돌아다니며 자연 그 자체의 소박한 삶을 누리는 모습에서 언뜻 자연파적 가치관마저 풍긴다.

주인공과 어부 가족, 특히 그라지엘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은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소설의 낭독이다. 이전에 열정과 혁명을 다룬 책이나 타키투스의 저작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가족들이 모두 바싹 다가와 귀 기울이며 탄식하는 장면은 인위적 겉치레를 벗긴 순수한 인간과 그 사랑의 아름다움과 호소력을 웅변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육지로 떠난 주인공이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그들을 찾으면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며, 이윽고 사촌 체코의 청혼으로 가출한 그라지엘라와 주인공이 대면하면서 내재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진부한 사랑이라는 단어로로 오염되지 않은 문자 이전의 사랑 그 자체이며, 그것의 세속적 현현은 그들의 뇌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씩 사랑을 확인해 나가던 그들의 사랑은 부모님의 갑작스런 호출에 따라 주인공이 프랑스에 와있는 동안 그라지엘라의 죽음으로 허무한 종결을 맞이한다. 그라지엘라는 가출하던 날 프로치다섬에서 추위에 떨면 한밤을 보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라파엘(호반의 연인)>에서 라파엘과 줄리의 사랑은 육욕적 측면을 극력 억제한 관념적, 종교적 사랑으로 나아갔다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연령이 아직 10대이므로 풋풋한 내음을 드리운다. 이것이 과연 사랑인지 아니면 좋아함과 사랑의 중간단계인지 주인공 자체도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같이 있을 때 즐겁고 행복하다는 게 아닐지.

작중에 낭독되어 작품 전개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폴과 비르지니>는 비단 내용상뿐만 아니라 작품 형성의 측면에서도 작가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십대 소년 소녀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 장소도 프랑스를 떠나 이국적(인도양의 섬과 지중해의 섬)이며 또한 세속문명의 허울을 떨치려고 하는 점도 마찬가지인 동시에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 점도 그러하다.

주인공의 편력과 두 어린 연인의 슬픈 흔적을 더듬어 보려고 구글 지도로 나폴리와 이스키아섬, 프로치다섬을 마우스로 오르내리고 스크롤하여 줌인 줌아웃을 해보며, 그들의 사랑과 그라지엘라의 넋을 위로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0.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호반의 연인 밀레니엄 북스 45
알퐁스 드 라마르틴 지음, 김인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세출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는 서양 고전음악사에서 이른바 ‘교향시’의 창시자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10여 편의 교향시를 남겼는데 그 중 제3번 <전주곡>은 동 분야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리스트는 이 작품을 라마르틴의 <명상시집> 중 한 시의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한다. 요지는 인생이란 죽음을 향한 전주곡이라는 것.

작가 라마르틴은 프랑스 낭만주의를 온몸으로 부딪혀나간 시인이다. 그의 인생에서 젊은 시절 풀제 호반의 온천지에서 만난 샤를 부인과의 사랑 체험이 없었다면 그의 여러 시와 소설 작품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정치인 라마르틴으로만 기억될 터.

이 작품 <호반의 연인>은 자신의 체험담을 짙게 풍기고 있다. 읽다 보면 이것이 소설인지 수기(手記)인지 헷갈릴 정도다. 연상의 유부녀와의 사랑. 어찌 보면 비도덕적이고 타락적인 요소가 강한 관계이다. 하지만 라파엘과 주리[줄리]의 사랑은 세속을 초월하여 범인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극치!

이성간에 우정이 불가능하며 애정만이 가능하다면, 에로티시즘을 떠나 완전한 플라토닉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에 작가는 라파엘과 주리의 사랑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그들의 사랑의 양태가 예사롭지는 않다.

주리는 라파엘보다 연상이며, 나이 많은 남편도 있다. 저명한 학자인 남편은 주리를 보호해주기 위해 부녀 같은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나 젊은 주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녀의 사랑이 아닌 남녀의 사랑. 악화된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 요양 온 온천 호반에서 주리가 만난 사람이 라파엘. 주리는 진심으로 라파엘을 사랑하며, 그들의 사랑은 남편도 이해하고 인정한다.

처음부터 둘의 사랑이 육욕을 초월한 것은 아니다. 라파엘은 응당 자연스러운 사랑을 원했으나 주리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욕정을 버리기로 한다. 이러한 종교적 정화 과정(P.95~96)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마치 경건한 종교 참회록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 결과 라파엘은 ‘관능적이고 천한 정욕’을 버리고 ‘신과 그녀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종교적 행복감을 누린다.(P.99~100) 라파엘의 주리에 대한 사랑과 찬사는 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절대적 찬가이다.

한편 주리 또한 라파엘로 인해 크나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육신은 나날이 쇠약해진다. 작품 후반부에서는 라파엘에게 건강 우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주리와, 개인과 집안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주리 곁에 머무르려고 애쓰는 라파엘, 이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의 분투가 눈물겹게 펼쳐진다.

연인은 호젓한 둘 만의 공간과 시간을 원한다. 연인 간의 대화를 들어보면 제삼자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사소한 내용이지만 이런 시간과 대화 자체는 연인들의 애정을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라파엘과 주리가 만나서 하는 행동은 오로지 온갖 소소한 대화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중차대하며 행복을 자아낸다.

지고의 사랑은 언제나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순수는 오염되기 쉬우며 세월의 때를 타기 마련. 연인의 부부 결합은 로맨스에서 일상으로 이끈다. 따라서 가슴 아픈 이별, 특히 사별(死別)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죽음’이다.

오랜만에 사랑과 순수함이 깃든 글을 읽으니 내 마음조차 한없이 가볍고 투명해진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가. 세상에 참 사랑이 없다고 믿는 이, 티 없이 깨끗한 사랑을 갈망하는 이라면 한번 읽어봄직한 작품이다.


* <호반의 연인>의 원제에 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표지에도 해설에도 인터넷의 온갖 서적 정보를 다 뒤져 보아도. 최종적으로 출판사 문의(가능성은 낮지만...) 또는 번역자 연결(현직에 있지 않다...)에 앞서 혹시나 하고, 영어 번역본(불어는 모르므로...)으로 가능성이 높은 작품의 본문 내용을 검색해 보다가 마침내 원제가 <라파엘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레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9.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오렐리아 - 지만지고전천줄 77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삼독(三讀)이다. 읽을수록 색다른 묘한 작품이다.

처음엔 우려와는 달리 이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무난한 작품으로 판단하였다. 이것은 섣부른 생각임이 재독(再讀)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으며, 삼독에 이르러서는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꿈과 몽상을 이야기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몽환의 안개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속깊은 내용이 무엇인지 점점 어려워진다.

여기서 작가는 죽음의 임박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자서전을 쓰는 심경으로 네르발은 한줄 한줄 써내려간다. 꿈의 세계가 그러하듯 때로는 전후가 단절되는 곳도 빈번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은 여일하다. 그것은 “광기의 가면을 쓰고 있는 숙명적 진실”(P.67)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토로했나 보다.

“어쨌든 인간의 상상력이 이 세상에서, 또는 저 세상에서 생각해 낸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보았던’ 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P.65)

“내가 이해하기로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며, 다만 부주의나 정신적 무질서가 그에 대한 분명한 관계들을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며,...” (P.135)

네르발의 작품을 일람하면, 그는 진정한 방랑자임을 알게 된다. 현실에서건 아니면 몽상에서건. 그의 육신과 영혼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삶이 죽음과 만나는 곳까지.

저승을 목전에 둔 이는 진지한 종교적 반추와 각오를 새기는 경우가 있다. <오렐리아>의 제2부는 사랑과 신앙의 고백과 실현이다. 네르발은 비기독교적 정신의 소유자이며, 여기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과 동방 오리엔트의 신비주의 그리고 북유럽의 창세 신화까지 이음매없이 종횡한다. 따라서 문화적 배경이 받쳐주지 않는 경우에 그의 작품을 기저까지 쉽사리 이해하기란 만만한 게 아니다. 제2부에서 네르발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조금씩 정통 기독교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모성회귀(母性回歸)?

모성(母性)이야말로 네르발의 원점이다. 누차 언급하지만 상실한 모성의 갈망은 그의 작품의 추동력이다. 네르발의 영원한 여인상은 모두 모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이시스 여신에게서 이를 찾고 있다.

“나는 마리아와 같고 그대의 어머니와 같으며, 그대가 온갖 모습으로 언제나 사랑한 존재와 역시 같으니라.” (P.107)

이시스 여신은 그에게 시련의 진정한 의의를 밝혀주며, 말미에 와서는 시련은 이제 끝났음을 선언한다(P.125).

그의 심경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감미로운 기분(P.125)이 되었다. 이제 그는 죽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더없이 평온함을 느끼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1.2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