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반 - 고려대학교청소년문학시리즈 12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12
빌헬름 하우프 지음, 김용현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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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012

19세기 초 독일의 작가 빌헬름 하우프는 25세로 요절한 탓에 짧은 활동 기간을 가졌다. 몇몇 작품 중에서 <교양 계층의 자녀들을 위한 동화 연감>이 매우 유명하다. 국내에도 제법 여러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동화 연감>에 수록된 작품이다. <동화연감>의 구성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짧은 장편 정도에 해당하는 이 작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채로운 구성이 아닐까 추측한다.

‘카라반’은 우리말로 ‘대상(隊商)’이다. 사막을 가로질러 낙타 떼를 몰고 가는 상인들. 친숙한 광경이다. 웬만한 이라면 어릴 적 TV에서 신밧드의 모험 등 애니메이션을 숱하게 보았을 것이다. 카라반이 나오는 장소는 사막, 따라서 당연히 아랍과 이슬람이 주된 배경이 된다. 이 작품 역시 메카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여정을 택하고 있다.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는데, ‘황새가 된 칼리프 이야기’ ‘유령선 이야기’ ‘잘린 손 이야기’ ‘파트메의 구출’ ‘난쟁이 무크 이야기’ ‘가짜 왕자에 관한 동화’가 그것이다. 카라반 들이 여행을 하면서 중간에 심심파적 삼아 재밌는 이야기를 서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유형이라면 대표적으로 <데카메론>이 연상된다. <아라비안 나이트>도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따라서 각 이야기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심지어는 개별 이야기의 우연한 집합에 불과한 경우도 있지만, 하우프는 ‘빨간 망토의 남자’ 도적 오르바산을 등장시켜 이야기 간 유기적 체계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는 전혀 낯설지 않다. 어디에선가 들어봤음 직하거나 최소한 분위기라도 생소하지 않다. 그러다가 문득 ‘난쟁이 무크 이야기’에서 가서 불현 듯 깨달았다. 바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중심으로 각색 내지 윤색하였다는 사실을. 아랍문학의 최초이자 최고봉은 누가 뭐래도 <천일야화>가 아니겠는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유럽에 아랍 열풍이 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수년 전부터 아시아권에 소위 ‘한류’가 득세했던 것처럼 서구 기독교 세계에 아랍, 보다 정확히는 오스만 투르크(흔히 터키로 불리운다)로 대표되는 이슬람 문화가 유행하였다. 괴테가 <서동시집>을 쓰고, 모차르트가 터키 행진곡을 작곡한 게 우연은 아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사람과 문화, 이것들은 어린이들(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요소다. 빌헬름 하우프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단편들을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각색하였다. 사실 각각의 내용을 음미해 보면 동화라고 하기엔 잔혹한 측면이 강하다. 소위 잔혹 동화 류인 것이다. 즉 하우프는 동화의 형식을 빌어서 유럽인에게 두려움과 호기심의 대상인 아랍인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고 있다. 그것이 당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문화적 이해가 부족하거나 어설픈 교훈 도출 등 약점이 눈에 띄지만 동화는 동화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므로 너그럽게 흘려 넘기자. 

참고로 고려대학교출판부 판본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므로 판형이나 문체는 동화체는 아니다. 몇 군데서 본격 동화 형식으로 출간하였으므로 진짜 동화로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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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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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매직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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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세기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작품으로, 소설의 고전적 원형이라고 하겠다. 시기적으로 보면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과 롱고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중간에 위치한다.

소설은 현대에도 가장 강력한 문학 장르이다. 근대 이전 아직 소설이 양식적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씌어진 소위 ‘이야기’는 소설의 본질적 속성이 서사의 핵심이다. 소설은 서사시와 명확히 구별된다. 서사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산문과 운문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소설은 신화와도 다르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에서 인간은 부수적 존재에 불과하다. 반면 소설은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나서 자라고, 사랑하고 싸우다가 죽는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의 전체 또는 부분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소설의 시대가 등장했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주인이 되는 때가 도래했음을 반영하는 사실이다.

아풀레이우스는 <황금당나귀>에는 많은 신화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마법사의 주술적 요소가 사건 전개의 원동력이지만, 당나귀로 변신한 루키우스의 모험과 고난은 곳곳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당대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로마 제국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그들이 지배하고 점령한 지역의 모든 신들을 한데 끌어 모았다. 루키우스가 작품 말미에서 이시스 여신에게 탄원하여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 부분은 당대 로마에서 이집트 출신의 이 여신과 남편 오시리스 신이 얼마나 막강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는 또한 아직 기독교가 제국을 휩쓸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독교의 확산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난 장면은 흥미로운 동시에, 중세의 혹독한 시절에 이 작품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묘미는 당나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루키우스는 하필 당나귀로 변신하였을까? 당나귀는 당시에 “우주에서 가장 천한 짐승”(P.375)로 간주되었다. 즉 루키우스는 로마 시민에서 가장 밑바닥의 동물의 처지로 전락하여 숨어있던 세상의 진면목을 겪게 되는 것이다. 후대 스페인의 유명한 후배 작가가 쓴 <개들이 본 세상>과 의도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당대 세상은 후대의 종교적 선입관과는 달리 전혀 성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비열하고 천박한 동시에 음란으로 넘쳐난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며, 약자에 대한 동정보다는 악인의 횡행이 두드러진다. 당나귀는 도둑들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 간신히 도망쳤으나, 목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내시 사제들의 가증스러움을 목도한다. 방앗간으로, 이어서 가난한 채소 재배업자에게 팔리는 등 당나귀의 고초는 한이 없다.

작가는 당나귀의 고행 중간 중간에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일화와 신화의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성과 속을 아우른다. 세속의 일화는 인간사의 다양한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신화의 에피소드는 작품의 분위기 전환을 도모하는 동시에 예술적 향기를 더해주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쿠피도[큐피드]와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후대 무수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한데, 프쉬케라는 이름이 여기에 연관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시스 여신의 구원으로 포르투나의 속박에서 벗어난 루키우스. 마지막 장은 그가 이시스 여신의 사제가 되어 입신 의식을 치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제까지 분위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종교적 분위기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단순히 당나귀의 고행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마법의 거짓 유혹에 빠진 루키우스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정화되어 드디어 만인이 우러르고 선망하는 사제가 되어서, 마침내 황금당나귀로 승화된 것이다.

세르반테스와 보카치오가 가식 없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한 시초로 알고 있었는데, 일천 여년을 훌쩍 앞선 아풀레이우스의 존재는 매우 놀랍다. 그의 글은 시대적 제약을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성을 밝혀낸 진정한 원형의 가치가 있다. 더욱이 전혀 진부하지 않으며 재미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진정한 고전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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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멘호수 외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우호순 옮김 / 혜원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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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멘 호수>만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라는 슈토름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 달리 있을까? 다시 읽어 보아도 절제된 감정 묘사, 비유적 상황 암시가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인상을 갖도록 한다. 게다가 은은하면서 애상적인 분위기가 작품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따금 밝은 장면조차도 구름 사이로 간혹 내비치는 햇살과도 같이.

이미 작품의 결말은 서두 부분에 예시되어 있다. 나중에 인도로 같이 가자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엄마와 같이 가야한다고 망설이다가 결구 같이 간다고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네겐 용기가 없잖아.”(P.15)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 후 이어지는 홍방울새와 카나리아의 대비는 결정적인 암시가 되며, 아무리해도 다가갈 수 없는 흰 수련의 존재는 곧 엘리자베스에 다름 아니다.

결국 ‘푸른 산 뒤편에 사라진 청춘’은 모든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돌이킬 수 없는 첫사랑을 지칭한다.

<대학시절>은 신분제 사회에서 한 여성의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연히 맛보게 된 상류사회의 화려한 단면, 하층계급에 속하는 자신의 신분으로는 자력으로 헤어나갈 길이 없다. 그대로 단념하고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현실에 안주하며 마음 한 편에 밀어두며 살아나가면 되련만 뜨거운 욕망은 이를 용납지 않는다. 결국 댄스파티에서 상류층 자제와 가까워지나 그의 진심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일개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도 없게 된 그녀의 선택을 달리 없었다.

여기서 필립은 로레 보르가르를 좋아하지만 신분을 초월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로레의 반박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난 다 알아. 언젠가는 너도 저 고상한 숙녀들 중 한 명하고 결혼할 거라는 걸.”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반박에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에 대해 대답할 말이 없었다.“ (P.130)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민계급의 당당한 일원인 필립에게 로레와의 풋사랑은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가볍게 여겨졌다. 그래서 필립은 이 일을 한낱 추억으로 기억하게 된다.

여기서 로레 보르가르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자신의 처지와 한계를 돌아보지 않고 헛된 꿈만 쫓아다니는 허망한 여성이라는. 하지만 개인적 선택과 관계없이 선천적인 요인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계급사회의 틀이라는 함정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수많은 로레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슈토름의 ‘대학 시절’은 미래의 푸른 꿈이 아닌 잿빛 회상이 낮게 드리워진 시절이 되고 만다.

<인형의 집>으로 여성해방을 드높이 외친 헨릭 입센의 동시대에 슈토름도 여성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삼색 제비꽃>이 바로 그러한 작품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가정문제라고 하겠다. 계모와 전처소생의 자식 간의 관계.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갈등의 소재가 되어 왔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전>을 보라.

독일에서는 제비꽃을 계모꽃이라고 한다는데,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가정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내를 잃은 루돌프의 후처가 된 이네스는 전부인의 딸 네지와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그녀에겐 그 집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모두 전부인의 그림자에 싸여 있다. 남편인 루돌프조차도 전부인 마리를 못 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네스의 괴로움은 스스로를 더욱 옥죄는데, 후처로서 전처의 모든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연유한다. 루돌프의 말대로 저택의 모든 곳에 전처의 손길이 닿아 있으니 말이다.

많은 재혼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는 많은 사유가 이네스와 같은 태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부인 또는 전남편의 자취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억지로 생부, 생모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야 그들의 자식들도 보다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말미에 가서 죽음을 앞둔 이네스가 병석에서 일어나고 새로운 삶과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현실을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토름은 철저한 사실주의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풍은 항상 압축과 생략, 비유와 상징을 선호한다. 따라서 치열한 갈등과 고뇌가 작품에 우러나오지 않으니 <임멘 호수>와 같은 서정적인 작품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대학 시절>이나 <삼색 제비꽃> 등에서는 뭔가 모를 아쉬움 내지 부족감을 채울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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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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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의 기사 대산세계문학총서 43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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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43

<꼭두각시패 풀레>를 읽어보려고 펼쳐들다가 <백마의 기사>도 이참에 다시 한번 읽다.

<백마의 기사>는 묘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언뜻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아서 평범하게 여겨졌는데 가슴 한구석에 계속 여운을 남기고 되새기게 만든다. 하우케 하이엔의 성격과 행동이 과연 영웅적 속성을 지닌 것인지에 대한 의문, 올레 페터스의 악인적 속성에 대한 의문, 작중 인물로서 트린 얀스 노파의 의미 등. 그렇게 보면 이 작품만큼 텍스트 읽기에 따라 극단적 해석이 존재하는 작품도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옮긴이 해설에서는 하우케 하이엔을 부정적 인간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전통과 끈끈한 미신, 그리고 모든 비이성적 세계관에 대한 완고한 적대자”(P.257)이다. 계몽적 관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는 공동체에 어울리지 못하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삶을 영위”(P.257)하게 되며 새 제방도 자신의 능력과 업적에 대한 과시욕에서 독단적으로 건설을 시작한다. 따라서 건설 과정에서 사람들의 협조와 동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와 억압으로 작업이 진행되다 보니 새 제방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만다.

어찌 보면 작가 자신도 하우케 하이엔에 대하여 혼재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이성적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그리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조화를 거부하고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나아가는 그는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백마의 기사>가 처음 히틀러 시대에 처음 영화화되어 나치와 히틀러의 선전용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텍스트의 통상적인 외적 표현에만 현혹된 결과로서 결국 하이엔과 히틀러는 몰락했다는 공통점에서 일종의 역설이라고 하겠다.

구글 지도를 통해 작품의 배경인 북프리슬란트와 작가의 고향인 후줌을 찾아보았다. 독일과 덴마크의 경계인 유틀란트 반도 서부의 북해 연안에 위치하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고 저지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북해에서 높은 파도가 몰아치면 개펄은 금방 물에 잠겨버리므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제방 축조는 지역 사람들의 생존이 걸린 중대한 과제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꼭두각시패 폴레>는 시적 사실주의 대표작가로서 슈토름의 명망을 상기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임멘 호수>와 비슷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전자가 보다 시적이며 차분하고 다소 어두운 정서를 품으며 결말도 해피엔딩이 아닌데 반해, 후자는 한결 밝아졌으며 주인공도 보다 현실적이며 적극적이다.

시민사회에서 꼭두각시패 즉 광대는 하층계급에 속해 있어 파울젠이 리자이와 결합하는 것은 계급의 봉건적 틀을 타파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형극 연희 장면의 세부적 묘사는 이 노벨레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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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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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멘 호수.백마의 기사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10
테오도어 슈토롬 지음, 이은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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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청소년문학시리즈 010

테오도어 슈토름은 19세기 중반 소위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이다. 여러 노벨레 작품으로 명망을 누렸으며 특히 대작 <백마의 기사>가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대학시절> <삼색 제비꽃> <꼭두각시 폴레>가 번역되어 있다.

<임멘 호수>는 그나마 여러 번역이 나온 편인데, ‘첫사랑’ 또는 ‘호반(湖畔)’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원제목은 아니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사실 ‘임멘 호수’라는 표제보다는 독자의 감성에 대한 호소력이 더욱 뛰어나다고 하겠다. 영화 <워털루 브리지>를 <애수>로 바꾼 것처럼.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의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릴 적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쌍방의 적극적 열정이 동반되지 않고 있다. 특히 엘리자베트는 사랑보다도 관습에 순응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가 이년을 기다려달라고 했음에도 끝내 이를 지키지 못하고 에리히와 결혼한다. 후에 노랫말이 가리키듯 ‘어머니의 뜻’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라인하르트가 고향을 방문하여 에리히의 집에서 엘리자베트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만남은 손을 맞잡고 외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에 간직한 체념한 사랑으로 수렴되고 이에 라인하르트는 길을 떠난다. 여기서 엘리자베트의 모습은 ‘흰 옷을 입은 소녀 같은 여인’(P.50)으로서 호수에 피어있는 ‘하얀 수련’으로 상징화된다.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건만 아무리 헤엄쳐도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존재.

전체적으로 잔잔하면서 간결성과 투명성이 돋보인다. 일체의 정념이 체념의 경지에 스며들어 있는 독특한 문체이다. 첫사랑의 기쁨을 그리기 보다는 첫사랑의 가슴 아픔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하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욱 애절한 법이니.

<백마의 기사>는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방향의 작품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또는 사회)의 대치 구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하우케 하이엔의 성격과 행동은 밝음과 어둠의 혼재로 드러난다. 그의 결단과 의지는 결과적으로 선을 향하지만 내면적 충동은 부정적 사상으로 강화된다. 따라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한다.
“그 순간 이들에 대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젊은이의 가슴에 명예심과 사랑 이외에도 공명심과 증오가 자라기 시작했다”(P.159)

이렇게 보면 하우케의 새 제방 축조도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 제방감독관으로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면 거짓이리라. 절차에서도 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해당사자인 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대신 관청의 힘을 빌려 시행을 강제하고 있다. 따라서 후에 홍수로 제방이 곤경에 봉착하였을 때 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매우 시사점이 크다. 결과적 정당성이 과정의 정당성을 상쇄하는 것은 이미 구시대적 관념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최선의 정책이 절차 정당성을 얻지 못하여 묻혀버리고 차선의 정책을 선택되는 경우가 다반사고 오히려 이것이 보다 정당하다. 하우케는 이 점을 등한시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하우케가 중인(衆人)들과 다른 점은 종교적 관습을 지키지 않는데도 있다. 그에게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이성적 판단에 적합하지 않은 미신적 관습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자연은 엄혹하지만 충분히 대처 가능한 존재이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꼼꼼한 감독으로 자연의 변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근대인이자 계몽인이기도 하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전근대인이며 봉건인이다. 작품 말미에서 하우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이 “유능한 인사를 단지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이유로 유령이나 귀신 들린 자로 만드는 일은 어느 시절이나 있기 마련이지요”(P.294-295)라는 평가가 이를 명확히 하는 작가의 하우케 변론이다.

이 두 작품은 다른 제재를 택하고 있지만, 한구석에 뿌리치지 못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탈봉건과 근대성의 기치를 내걸고 있음이다. 전자는 사랑을 얽어매는 낡은 관습, 후자는 봉건적 인습을 뿌리치는 근대인의 강인성과 자연 개발 의지. 이 점에서 슈토름의 노벨레는 단순한 시적 사실주의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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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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