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하인리히 1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9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위스의 독일어권 작가인 켈러는 이 작품으로 ‘스위스의 괴테’라는 찬사를 받는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다소 의아한 데 괴테가 비록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걸출한 교양소설로 선구자적 위치를 점했지만 괴테의 성명을 후세에 드날리게 한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로,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은 그의 본령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여튼 괴테에 비견될 평가를 받게 된 것으로 보아 그 작품의 탁월성은 충분히 예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국내 초역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대형서점의 서가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무수한 세계문학 전집은 무엇인가.

괴테와 켈러 등의 교양소설은 시대적 산물이다. 고전적 시민사회가 근대사상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때, 작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추론해 본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충분히 체감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사고와 가치의 지주 역할을 했던 시민사회가 구시대로 물러나고 있음에 대한 애틋한 비애. 불안하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기대로 충만하여 호기심을 이끄는 다가오는 근대에 대한 동경. 즉 비애와 동경이 교양소설을 전개하는 원동력이다. 교양소설의 명작이 괴테와 켈러는 물론, 노발리스와 횔덜린과 같이 고전과 낭만의 전환기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양소설은 20세기 들어 성장소설로 변모한다. ‘교양’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고 만 탓일까.

교양소설의 속성 상 주인공은 젊은이가 된다.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거쳐 한 인간으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 교양소설을 읽는 행위는 전기를 읽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전자는 허구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또한 역사적 위인이 아니라는 점이 구별된다.

이 <초록의 하인리히>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항상 초록색 옷만 입고 다녀서 붙은 별명이다.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하인리히 레. 그는 소심하면서도 열광적인 성격으로 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시골에서 외삼촌 및 사촌들과 함께 지내며 화가의 꿈과 천사같은 안나에 대한 사랑을 키운다.

기본 뼈대를 둘러싼 숱한 에피소드와 정경 묘사 등이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번역을 통해서도 원작의 재미와 분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음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점에서는 번역자의 공이 자못 크다. 여하튼 합쳐서 900면에 달하는 두 권으로 된 문학작품을 어지간해서는 독자에게 지리함을 안겨주기 쉬운데, 첫 권을 빠르지 않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저자의 또 다른 자아다. 일찍이 청년 시절에 발표하여 세간에 외면 받았던 이 작품을 그는 노년까지 붙들고 개작하여 명작을 낳은 것이다. 하인리히가 그림에 관심을 쏟았던 것처럼 켈러 자신도 인정받는 화가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전화위복이라고 하겠다. 그는 결국 후대에 추앙받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명성이 국내에도 퍼지기를 희망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4.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태위태하다. 그리고 처절하다.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을 읽으며 연상되는 단어가 이러하다. 한강은 예술과 통속의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아슬아슬함을 자아내는 감각적 즐거움이 그의 작품에서 물씬 배어나온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의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발은 평범하다. 전개는 무난하다...결말은 상궤를 벗어나 참혹하다.

화가 서인주의 죽음과 강석원의 글에 대하여 작중 ‘나’인 이정희의 심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누구보다도 서인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내적으로 자신하였던 나, 따라서 강석원에게 딱 부러지게 응대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와 서인주의 삼촌 간에는 남모를 추억이 배어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녀가 몰랐던 서인주에 대한 다른 사실을 접하였을 때 반응은 한마디로 상실감이었다.

“입술을 악물었다...모든 것을 잃은 걸 같았다. 모든 것에 굴복한 것 같았다. 모든 것에 버림받은 것 같았다.” (P.149)

그리고 ‘나’는 서인주의 자살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강석원의 책에 반박하기 위하여 서인주와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친우 인주의 숨겨진 과거. 따라서 일부 평자의 말대로 탐정소설의 성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문득 궁금하다. ‘나’와 서인주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끈끈했기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인주의 마지막과 죽음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통상적인 절친한 교우의 수준에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 자신의 일상을 중단하면서 이미 죽은 이를 위하여 타인의 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상례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토록 깊숙한 관계를 서인주와 맺고 있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나’의 심리적 소유욕과 자신감에 상처와 배반감으로 함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P.241)

소설은 ‘나’의 현재 상황과 ‘나’와 서인주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나’의 힘겨운 노력의 정당성을 지지하게끔 유도한다. 한편 서인주의 삼촌의 죽음, 인주의 부상, 그리고 화가로의 전이 등을 통해 서인주의 삶이 결코 안온하고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독자에게 비쳐준다. 감질날 정도로 조금씩, 그리고 독자가 다가올 사건 전개를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단편적으로.

상류와 중류의 거칠고 굴곡진 흐름을 마친 강물이 보다 느릿하고 유유한 하류로 흐르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급류와 암초가 난무하는 협곡을 만나면 모두들 당황하게 된다. 한강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결말이 꼭 그러하다.

우연과 필연으로 만나게 된 상담소장과의 조우. 그리고 그로부터 알게 된 서인주의 어머니와 상담소장 자신, 그리고 그들이 학생시절 가르치던 과외학생과의 천길 낭떠러지 위의 병적인 관능의 죽음에 이르는 일탈.

작가는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니면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와 함께.

오히려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강석원의 행동은 서인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철저히 회귀하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이었다. 사십년 전 진수 학생과 상담소장의 불완전한 마무리를 그는 깔끔하게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하나의 신화로 부활하여 영생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나’의 존재와 행위를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 아니면 ‘나’ 둘 중에 하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머리 속으로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머리 밖에서 실제로 ‘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이 둘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독자는 강석원을 증오할 수 없다. ‘나’의 처지에 전적으로 동정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면서 우울한 상념에 빠져든다. 한강의 글쓰기 양식이 원래 이러한가. 극한의 상황으로 인물과 독자를 몰고 가는 것. 물론 절대 극한에서 인간은 솔직하고 겸허해지며, 여기서 종교가 비로소 탄생한다.

그런데 꼭 이렇게 백천간두에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할까. 병적인 집착이 그의 주인공의 트레이드마크임은 섣부른 속단일 수 있겠으나 자꾸만 뇌리에서 맴도는지.. 정녕 알지 못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5.1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국내 역사소설의 흐름은 김훈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전까지 역사소설은 박종화, 유주현 등으로 이어지는 소위 사실주의 역사소설로 부를 수 있다. 정사를 중심으로 야사를 섞지만 본질은 사실(史實)에 두고 작가의 상상력은 여백을 채우는 데 있다. 한편 김훈 이후 심리주의 역사소설은 시대와 장소를 과거에서 따왔지만 역사적 사실(史實)의 정밀한 재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개인의 고뇌와 심리적 흐름을 주로 서술한다.

김인숙의 <소현>은 그런 점에서 소위 김훈 류의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병자호란 후 청에 대한 항복의 대가로 심양에 볼모로 잡힌 소현세자의 상황과 내적 갈등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조선을 존청(尊淸)으로 포장 해야 하는 소현.
적에게 잡혀와서 적의 쇠망을 기원하나 나날이 강성해지는 적을 바라보는 소현.
인질에서 풀려나려면 적이 강해야 하나 그러면 조선에서 설 자리가 없는 소현.
청의 우의와 임금의 의심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소현.

그래서 작중의 소현은 고독하다.

한편 소현에 비친 임금도 그러하다. 타인의 의지로 임금이 되었고, 오랑캐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며, 언제 옥좌에서 내몰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임금. 끝내 아들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아야만 하는 임금.

적의 수장 도르곤(섭정왕)은 어떠한가. 임금의 귀염 받는 막내아들로 태어나 죽음보다 힘든 삶을 겪은 왕자. 황상 대신 황제를 만드는 킹메이커를 선택한 이. 살아서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으나 죽은 후 몇 년 안 되어서 부관참시와 멸족을 당한 이. 그도 또한 고독하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고독하다. 만상, 막금, 요망한 여인 흔... 따라서 소설 자체가 고독하다. 이 작가의 글쓰기 유형이 원래 고독함의 원천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시대적 상황은 그만 나열하고 소설적 재미를 헤아려본다. 이 책은 글 읽는 속도감에서 한참 뒤처진다. 흡입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등장인물과 둘러싼 정경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독자는 소현의 고독에 동정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 없다. 만상과 막금과 흔의 처지를 욕하거나 딱해 할 수는 있어도 더불어 웃거나 울지 못한다. 지나치게 건조하다. 이것이 김훈의 성공한 작품과 차이점이다. 김훈은 치열한 상황 및 심리묘사로 극적 긴장을 배가하고 여기에 현학적인 문체로 작품에 윤기를 덧붙인다.

김인숙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하여 아직 그 특성을 모른다. <바다와 나비>는 가물가물하고 <칼날과 사랑>은 너무 멀리 있다. 근년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작가 김인숙. 나의 촌평이 그저 허접 데기에 불과하고 대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소설의 근원은 상상력에 있다. 그리고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해와 오해는 독자의 몫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5.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슈페사르트 산장 레인보우 북클럽 5
빌헬름 하우프 지음, 김희상 옮김, 박기종 그림 / 을파소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빌헬름 하우프와는 <카라반>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교양계층의 자녀들을 위한 동화 연감> 중 일부이다. 문득 나머지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총 3편인데 <카라반>이 소개되었다면 다른 작품도 소개되지 않았을까 하여 검색하여 보니 적지 않은 책들의 목록이 죽 나온다. 구하던 <동화 연감>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하우프의 동화 몇 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 스님은 동화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동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글이다 보니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 서려 있다. 동화를 거듭 읽다 보면 내 영혼도 순수해지지 않을까.

작가 소개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빌헬름 하우프가 ‘근대 동화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동화 연감>의 진상이다. 제1권이 <카라반>이며, 제2권이 <알렉산드리아의 족장>, 제3권이 <슈페사르트 산장>이라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마음을 비운 선택이 당초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흥미로운 한편 흐뭇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족장>과 <슈페사르트 산장> 역시 액자소설의 틀을 지키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은 이집트를 배경으로 족장 알리 바누가 납치당한 아들을 찾기 위하여 노예들을 해방하면서 이야기를 한 편씩 하는 형식을 취한다. 반편 <슈페사르트 산장>은 독일의 슈페사르트 숲속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산장에서 하루 묵는 도중 도적떼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철야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3부작이 형식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지만 액자와 그림의 유기적 조화와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역시 후기작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에는 ‘난쟁이코’, ‘아브넬, 아무것도 보지 못한 유대인’,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 ‘갓 구원 낸 머리’, ‘영국 청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앞의 ‘족장 알리 바누’와 맨 뒤의 ‘알만소르 이야기’를 통해 수미를 맞추고 있다. 역자에 따르면 총 여덟 편의 이야기 중 그림 동화 두 편을 수록하지 않았으며,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도 편역을 하였다. 수록 작품 중에서도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과 ‘갓 구워 낸 머리’는 다른 작가의 작품이다.

<슈페사르트 산장>은 ‘사슴 금화 한 닢의 예언’, ‘차가운 심장’, ‘자이드의 운명’, ‘스텐폴의 동굴’로 비교적 긴 이야기 중심이다.

동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하다.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수용하여 성실한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 따라서 동화의 진정한 묘미는 교훈이 아니라 작품에 불어넣은 상상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

사실 하우프의 3부작은 명목상 동화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것이 과연 올바른 분류인지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잔인하고 어두운 부분이 강렬하여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슈페사르트 산장>에 실린 이야기들이 특히 그러하다. 독자층으로는 어린이 보다는 청소년 수준이 보다 적합하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어른들도 역시 흥미롭게 읽겠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에는 작가의 동화론(童話論)이 전개되어 있어 흥미롭다. 노인의 입을 빌려서 하우프는 동화의 매력을 상상의 날개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P.91~92)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동화를 애들 장난쯤으로 바라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동화는 우리의 정서를 따스하게 보듬어 준다(P.199~200)는 것이다. 이어서 동화와 소설의 구분에 대하여 명확히 하고 있는데(P.200~205) 제법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빌헬름 하우프의 3부작은 일단 순수한 창작물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차용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라비안 나이트> 등의 외국과 독일의 민담 및 설화를 각색하여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하우프를 소위 ‘근대 동화의 아버지’로 평가하는 부분은 동화론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낱 흥밋거리가 아닌 진지한 대면을 동화와 나누고 있다는 데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6.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알렉산드리아의 족장 레인보우 북클럽 9
빌헬름 하우프 지음, 김희상 옮김, 배정식 그림 / 을파소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빌헬름 하우프와는 <카라반>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교양계층의 자녀들을 위한 동화 연감> 중 일부이다. 문득 나머지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총 3편인데 <카라반>이 소개되었다면 다른 작품도 소개되지 않았을까 하여 검색하여 보니 적지 않은 책들의 목록이 죽 나온다. 구하던 <동화 연감>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하우프의 동화 몇 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 스님은 동화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동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글이다 보니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 서려 있다. 동화를 거듭 읽다 보면 내 영혼도 순수해지지 않을까.

작가 소개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빌헬름 하우프가 ‘근대 동화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동화 연감>의 진상이다. 제1권이 <카라반>이며, 제2권이 <알렉산드리아의 족장>, 제3권이 <슈페사르트 산장>이라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마음을 비운 선택이 당초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흥미로운 한편 흐뭇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족장>과 <슈페사르트 산장> 역시 액자소설의 틀을 지키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은 이집트를 배경으로 족장 알리 바누가 납치당한 아들을 찾기 위하여 노예들을 해방하면서 이야기를 한 편씩 하는 형식을 취한다. 반편 <슈페사르트 산장>은 독일의 슈페사르트 숲속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산장에서 하루 묵는 도중 도적떼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철야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3부작이 형식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지만 액자와 그림의 유기적 조화와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역시 후기작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에는 ‘난쟁이코’, ‘아브넬, 아무것도 보지 못한 유대인’,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 ‘갓 구원 낸 머리’, ‘영국 청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앞의 ‘족장 알리 바누’와 맨 뒤의 ‘알만소르 이야기’를 통해 수미를 맞추고 있다. 역자에 따르면 총 여덟 편의 이야기 중 그림 동화 두 편을 수록하지 않았으며,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도 편역을 하였다. 수록 작품 중에서도 ‘가난의 수호천사 슈테판’과 ‘갓 구워 낸 머리’는 다른 작가의 작품이다.

<슈페사르트 산장>은 ‘사슴 금화 한 닢의 예언’, ‘차가운 심장’, ‘자이드의 운명’, ‘스텐폴의 동굴’로 비교적 긴 이야기 중심이다.

동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하다.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수용하여 성실한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 따라서 동화의 진정한 묘미는 교훈이 아니라 작품에 불어넣은 상상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

사실 하우프의 3부작은 명목상 동화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것이 과연 올바른 분류인지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잔인하고 어두운 부분이 강렬하여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슈페사르트 산장>에 실린 이야기들이 특히 그러하다. 독자층으로는 어린이 보다는 청소년 수준이 보다 적합하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어른들도 역시 흥미롭게 읽겠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족장>에는 작가의 동화론(童話論)이 전개되어 있어 흥미롭다. 노인의 입을 빌려서 하우프는 동화의 매력을 상상의 날개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P.91~92)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동화를 애들 장난쯤으로 바라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동화는 우리의 정서를 따스하게 보듬어 준다(P.199~200)는 것이다. 이어서 동화와 소설의 구분에 대하여 명확히 하고 있는데(P.200~205) 제법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빌헬름 하우프의 3부작은 일단 순수한 창작물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차용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라비안 나이트> 등의 외국과 독일의 민담 및 설화를 각색하여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하우프를 소위 ‘근대 동화의 아버지’로 평가하는 부분은 동화론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낱 흥밋거리가 아닌 진지한 대면을 동화와 나누고 있다는 데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6.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