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미래 - 총.달러 그 이후... 제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지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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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압감을 주는 표제와 두툼한 분량에 괜히 기가 죽어서 사는 것도 읽는 것도 한참이나 뜸들이다가 이제사 읽다. 읽고 난 소감은? 읽을 만하다. 더 정확히는 흥미롭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과 유사한 점이 제법 있다.
미국인들의 사회과학 저작물의 특징은 풍부한 사례에 있다. 일세를 풍미했던 앨런 토플러와 최근의 각광받는 토머스 프리드먼과 다르지 않다. 이론적인 부분은 서두에 또는 말미에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문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각종 예화로 빽빽이 채운다.
에이미 추아의 이 책의 핵심적 논지는 이미 서문에 모두 드러나 있다. 관용을 발휘한 국가는 초강대국(제국)이 되었고 관용을 상실한 순간부터 제국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진다. 저자가 표제에서 밝히는 현대의 제국은 바로 미합중국이다. 냉전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확산되는 현실에 비추어 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언하고자 하는 게 저자의 저작 목적이다.
 
예로 든 역사적 사례는 흥미진진하고 다채롭다. 순간 저자가 법학자가 아니라 사학자로 착각할 정도로 역사적 통찰과 서술에 빛을 발하고 있다. 고대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로마 제국, 중국 당나라, 몽골 제국, 근세의 네덜란드, 대영제국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스페인, 오스만 투르크, 중국 명나라, 무굴 제국, 그리고 현대의 독일과 일본을 성공하지 못한 반대 예화로 언급한다. 한편 당대의 미국의 부상을 살펴보고, 잠재적 도전자라 할 중국, 유럽연합, 인도 등이 과연 경쟁자가 될 수 있는지 훑어보며 다시 미국의 미래로 책을 마친다.
 
저자는 역사상 초강대국(미국을 포함하여)의 필수 요소는 ‘관용’이라고 단언한다. 관용은 인종, 종교, 문화 등에 있어 개방적 태도를 의미한다. 자국의 영토 내에 이질적인 요소를 끌어안을 수 있고 물리적, 화학적 통합을 이루어 낼 때 변방의 소국은 대국으로, 지역의 강국으로 그리고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저 타국보다 조금만 더 관용을 베풀면 된다. 그러면 관용은 인재와 재화를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변한다. 한편 저자는 초강대국의 쇠락을 이끈 도화선도 관용임을 지적한다.
불관용이 쇠망의 원인인지 아니면 쇠망으로 불관용이 촉발되는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어떤 임계점(저자는 극적인 변화 지점으로 표현한다)이 존재함은 사실이다. 관용의 허용 수준은 임계점 이전은 성장을, 임계점 이후는 쇠퇴를 가져온다고 단정하면 지나칠까. 하지만 이 임계점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사회 발달 단계와 내부 결속력(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접착제)의 존재에 따라 임계점은 조기에 다가올 수도 아니면 상당한 기간 지연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후자의 경우이다. 아케메네스조와 몽골 제국은 전자에 해당하겠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거대국가의 위상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친미와 반미는 지나치게 유아적 반응이다. 아마존의 밀림에 사는 원주민들도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에 침을 흘린다. 우리는 어떤가? 미국사회와 우리사회 간 연대감은 우리사회의 당대와 50년 전 과거를 능가한다. 국경을 초월한 동질감에 비하면 시간차의 이질감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반미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제국의 미래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서문 말미에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미국은 제국을 상실하지만 초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다. 관용의 미덕을 발휘하는 미국은 자신을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해야지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미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낙인찍힌다는 것이다(P.461).
 
저자 자신과 그 가족은 중국계로서 이미 미국의 관용 정책에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가난하고 암울했던 조국에 대비하여 기회와 번영의 땅, 미국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이민자로서 성공하여 그 국가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이런 저서를 발표한다는 자체가 이민자 국가로서 미국의 관용의 효력을 강하게 웅변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관용’을 떠올린다. 우리에게 관용은 가진 자의 선심 내지 패배자의 자위에 불과하다.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이 바로 이곳이니까.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경청과 겸손보다 억지주장과 허위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우리 사회다. 우리는 타 인종, 종교, 문화에 관용을 베푸는가? 이런 질문을 하기조차 부끄럽다. 무의식적인 백인숭배 및 유색인 멸시풍조. 국제결혼과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독선의 종교 등.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은 이민자의 나라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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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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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여인의 편지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441
프랑수아즈 드 그라피니 지음, 이봉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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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서간체 소설이다. 사실 서간체 소설은 그리 흔한 형식은 아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간>을 필두로 루소의 <신 엘로이즈>,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 그리고 괴테의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나마 유명하다. 그 중에 내가 읽어본 작품은 괴테가 유일하다.

이 소설은 몇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위에 언급했듯이 형식상으로 서간체라는 독특성이며, 다음으로 제재 면에서 페루 여인이라는 보기 드문 배경의 인물과 제재를 채택하였다. 또한 내용상으로는 어떤가. 애정소설과 계몽소설의 절묘한 결합이 그것이다. 이것의 문학사적 가치는 후에 여성주의와 결합하며 특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작가 그라피니 부인은 계몽시대의 한복판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계몽철학자 볼테르와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알면 대충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용이하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정불화와 남편의 사별로 후반생은 가난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작품에 은연히 배어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녀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페루 여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본다. 일단 이국적 취미를 만족시키는 측면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낯선 미지의 세계에 커다란 흥미를 느낀다. 이는 신비성을 부여하는 효과도 있다. 또한 작가가 몽매한 프랑스를 자극하는 계몽적 각성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타자의 시각에서 프랑스의 잘못된 점을 발언하고 지적해야 보다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 받아들일 여지가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이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단 문학작품이므로 문학적 재미가 최우선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독자들의 예술적 감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외 다른 목적 내지 의도는 유명무실하다. 따라서 작가는 만이공통의 테마인 지고지순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 스페인의 침략으로 무너진 잉카제국의 신녀 질리아가 약혼자인 왕자 아자에게 보내는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질리아를 향한 프랑스인 데테르빌의 애정과 우정의 갈등.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삼각관계가 성행하는 연유와 별 차이 없다.

계몽과 애정의 절묘한 결합과 변주가 작품의 근본적 추진력이라면, 아자의 변심과 데테르빌의 우정, 여성주의 시각은 작품에 변주를 부여하는 양념의 역할을 한다. 특히 비유럽인이자 여성인 질리아가 바라보는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여성 문제의 날카로운 비판은 그것이 더욱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호소력이 높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작품이지만 현학적이고 난삽하지 않으므로 내용 이해와 작품 감상에 어려움이 없다. 다만 완역이 아니라 발췌역으로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만 번역된 것이 아쉽다. 완역은 후일을 기다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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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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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날개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9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권영경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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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009

작품집 <젤트빌라 사람들>에 수록된 ‘옷이 날개’와 ‘고양이 슈피겔’의 번역본이다. 다른 책에 비해서 두 편을 수록해서인지 문고판이지만 그래도 볼륨감이 있다.

이 두 작품의 두드러진 특성은 바로 동화라는 데 있다. ‘고양이 슈피겔’이야 부제로 동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옷이 날개’도 이야기 속성 자체가 이미 동화에 가깝다.

한 가난한 재단사가 입은 옷 덕분에 우연히 귀족으로 오인 받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비단 이 작품 외에 이따금 볼 수 있는 소재이다. 물론 귀족이 된 재단사를 둘러싼 주위의 에피소드를 유쾌한 필치로 묘사하는 것도 잊지 않지만, 켈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재단사의 내적 갈등과 신분 폭로 이후 남녀의 진실한 사랑의 전개를 그리고 있다.

“영주가 아무 노고 없이 봉토와 봉신을 얻고, 신부가 아무런 신념 없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자만심에 빠진 선생이 학문적인 연마를 통한 최소한의 지식도 쌓지 않고 조그만 후원도 하지 않으면서 숭고한 교직의 명성과 이익만 누린다면...이들 모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울지 않는다...하지만 우리의 재단사는 너무도 괴로워하며 울고 있었다.” (P.62)

한편 당대 시민사회의 결혼과 관련된 법적 견해를 엿볼 수 있는데, 성인이 된 여성은 자유의사에 따라 결혼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봉건적 관습에 지배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며, 동시대 및 그 이후의 우리네 관습과 비교해 볼만하다.

“아버지인 시의원에게는, 딸의 자유는 법적으로 분명히 보장된 것이므로, 모든 강제적인 행위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P.84)

‘고양이 슈피겔’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진지한 동화이다. 슈피겔은 시민으로서의 고귀한 덕성을 모두 갖춘 고양이지만 주인 노파가 죽은 이후 기아와 냉대에 시달려 그 덕성을 상실해 간다.

“슈피겔은 먹잇감에 온 신경을 기울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갔다. 그 일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도덕성을 갖추는 것조차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얼마 되지 않아 예전의 사색적인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P.95)

그래서 마법사 피나이스와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에 동의하였다. 이는 언뜻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 간에 이루어진 계약을 상기시킨다. 한편이 청춘과 영혼의 교환이라면, 여기서는 배부름과 목숨의 주고받음이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이 소품의 압권은 슈피겔의 재치로 결합하게 된 마법사 피나이스와 마녀에게 있다. 악이 더 큰 악에 지배당하는 광경을 여기서 보게 되니 마법사에게 동정이 가게 되기조차 한다.

이 책이 다른 <젤트빌라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성은 유려한 번역에 있다. 동화책을 읽듯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흐름은 ‘이야기’로서의 노벨레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제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 국내 번역본도 마지막이다. <초록의 하인리히> 이후 켈러에 오래 매진하였다. 다만 서구에서 그의 명성과 가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존재감은 너무 희박하다. 편견과 편향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잃지 않는 것,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 사고와 행동의 정당한 가치를 평가하고 걸맞은 대접을 하는 것, 이것은 비단 문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서 부족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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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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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열림원 이삭줍기 6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정서웅 옮김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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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에 이어 그의 또 다른 명작 <젤트빌라 사람들>이다. 독일어 노벨레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집인데, 열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전편은 ‘뾰로통한 아들 팡크라츠’, ‘레겔 암라인 부인과 막내아들’, ‘세 명의 정의로운 빗 제조공’,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은 고양이 거울이’로 이루어져 있고, 후편은 ‘옷이 날개다’, ‘행복한 대장장이’, ‘악용된 연애편지’, ‘디테겐’, ‘잃어버린 웃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 국내에는 완역본이 나와 있지 않으며, ‘세 명의 정의로운 빗 제조공’과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은 고양이 거울이(고양이 슈피겔), 그리고 ‘옷이 날개다’ 만이 문고판형의 소책자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노벨레 문학은 일반적인 단편소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잠깐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확인해 보자.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 내용의 전개는 로망(소설)과는 반대로 어떤 갈등에 집중시켜 그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종말로 유도되는 점이 드라마(희곡)와 흡사하다. G.보카치오 이래의 ‘새로운 사건’을 중심으로 한 노벨레는 뷔란트, 괴테 및 낭만파를 거쳐, 심리적인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여 그 내용의 이상성(異常性)을 주인공의 영혼에까지 추구하려고 했다. 19세기의 독일은 A.슈팁터, 마이어, H.T.슈토름, T.폰타네, H.V.클라이스트 등의 작가에 의하여 노벨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것으로 보아 노벨레는 ‘신기한 사건’을 중점적으로 하여 간결하게 구성한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책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작품 해설을 제외하면 100면 남짓의 짧은 분량이다. 스위스의 가상 마을 젤트빌라에서 벌어진 사랑의 죽음 사건을 제재로 하고 있다. 영국의 대선배 작가에게서 제목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만큼 두 작품의 제재가 유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소시민의 덕성과 그 한계이다. 농부 만츠와 마르티는 19세기 시민사회의 평범한 일원으로 근면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도덕률은 깨뜨린 것은 두 사람 소유의 밭 가운데 방치되어 있는 버려진 황무지 밭이다. 농부의 토지 소유 욕구는 상인의 돈 욕구만큼이나 자제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밭 소유권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자신과 가족을 영락과 타락의 길로 이끌며, 이들은 이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귀인하고 더욱 원망한다.

셰익스피어의 봉건사회와 달리 시민사회에서라면 잘리와 브렌헨은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희망 없는 가족을 떠나서 다른 도시에서 또는 이웃 국가로 가서 두 사람 만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방안이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 세계에서는 명예롭고 양심에 거리낌없는 결혼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감정이 그(잘리)는 물론 브렌헨의 마음속에도 살아 있었다.”(P.102)

그렇다. 당대의 가치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금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날 결혼에서 부모의 찬성과 동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잘리와 브렌헨의 시대에서 그것은 필수 요건이며 나아가 당사자들의 의사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켈러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담백하면서 다소의 문학적 색채를 불어넣어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유도한다. 해설에서는 이것을 ‘시적 사실주의’로 칭하고 있는데 과학적 사실주의에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스위스의 소박하며 아름다운 자연이 작가의 마음과 글에 시적 정감을 불어넣어준 것이리라. 
 

* 작곡가 델리어스가 이 작품을 오페라 형식으로 작곡하였다고 한다. 한번 감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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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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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 2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60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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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과 제4권은 전반보다 분량이 더욱 길다. 600면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과 양장본의 외형은 소설이 아니라 딱딱한 학술서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으로 속단하지는 말자. 통근시간 외엔 틈을 내지 못해 지하철 안에서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지만 읽는 도중에 지루하다거나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선 두 권에서 작가는 하인리히 레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순수하고 아련한 스위스 시골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다소 굴곡은 있지만 주인공의 소심하면서 열정적인 성격은 도시와 학교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숲과 호수의 자연에서 위안과 풍요로움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안나와의 풋풋한 사랑도.

후반부에서 하인리히는 시골과 스위스를 떠나 미술 수업을 위해 독일로 간다. 그 계기는 안나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안나와 유디트는 주인공의 사랑관의 극점인 동시에 접점이기도 하다. 순수함과 정신적 사랑, 그리고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육체적 사랑. 사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일방을 배제한 한 방향의 사랑은 건전하지 못하다. 하인리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

독일로 간 그는 미술 수업과 작품 활동 보다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우정과 애정세계에 관여하기도 하며, 대학 강의 청강에 흥미를 느껴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등 청춘다운 부주의함과 태만으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의 서서히 스러져가는 희망처럼 작품 전개의 톤은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다. 그런데 켈러는 여기서 모종의 장치를 마련한다. 즉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독자가 지나치게 하인리히의 처지에 몰입하는 것을 억제하며 교양소설에 부족하기 쉬운 다양한 사건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즉 동반자 두개골의 주인 쯔비한의 일화, 친구 리스와 에릭슨 그리고 아그네스와 로잘리에의 애정사, 사육제의 떠들썩한 정경 등 어찌 보면 그다지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우울한 유머, 가벼운 문체와 결합하여 어둡되 암울하지 않은 작중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제4권의 후반부에서 하인리히의 인생은 그야말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우연의 남발로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이 자체가 이미 허구인 만큼 심각하게 지적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의 습작의 가치를 알아본 백작과의 만남, 뜻하지 않은 유산 상속과 도르트헨에 대한 연모. 귀향을 꾸물거리다 마주치게 된 어머니의 쓸쓸한 말년에 대한 자책. 잿빛 공직 생활과 유디트와의 재회.

19세기에 씌어진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지니는 가치는 무엇일까? 스위스와 독일 사람이라면 조금 더 직접적인 공감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물설고 말도 선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여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은 젊은 영혼의 자유로운 삶의 모색과 치열함이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현상이기에 그렇다. 하인리히가 펼치는 신학적 관점과 소위 포이에르바흐에 감화된 사상의 편린을 언급할 때 오의와 진의를 해득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순정과 열정에 마음 한켠이 끌린다. 문득 이문열의 초기작이 연상되는 것은 어떠한 연유인지. 치열한 인생구도?

교양소설이라는 진지한 외피에 흥미를 못 느낀다고 하면, 지난 세기 시골과 도시에서 스위스인들이 꾸려가는 일상의 모습을 탐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꽤나 읽어볼 만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양태는 시공간적 배경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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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4.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