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지만지 고전선집 449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임이연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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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크리스토퍼 말로의 주요 작품집을 읽고 난 후 이 작품의 출간 소식을 안 마당에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가뜩이나 셰익스피어에 밀려 국내 인지도가 떨어지는 작가인데, 일말의 동정심도 작용하였다.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소재를 이끌어 왔다. 장장 십년간에 걸쳐 그리스와 혈전을 치른 트로이가 소위 트로이의 목마로 어처구니없이 멸망당한 후, 트로이의 왕족이자 장군인 아이네이아스는 유민을 이끌고 조국의 재건을 위해 이탈리아로 항해하다가 도중에 폭풍으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난파된다.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는 사랑에 빠지고 아이네이아스는 정착하여 카르타고를 제2의 트로이로 만들려고 하는데, 신탁을 좇아 결국 이탈리아를 향해 디도를 떠난다. 한편 버림받은 디도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만다는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다.
 
아이네이아스와 디도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통해 후대에 더욱 퍼져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 작품을 비롯하여, 타르티니의 소나타 <버림받은 디도> 등을 낳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를 신과 인간의 갈등 관계로 파악한다. 신은 인간사에 자유로이 개입한다. 유노의 방해로 아이네이아스는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어머니 베누스와 사촌 큐피드의 도움으로 디도의 맹목적 사랑을 얻게 되며, 조브 신의 의지에 따라 디도와 카르타고를 떠나 이탈리아로 떠나고 만다. 한편 디도는 인간의 신에 대한 예속과 저항을 보여준다.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된 것이 신의 작용이라면, 연인이 떠나갔을 때 순응하지 않고 신을 원망하며 배신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으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저항의 표출이다. 그녀가 아이네이아스에게 실망한 것은 단순한 사랑의 배신뿐만 아니라 신의 뜻에 쉽사리 굴복하는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의 허약함에 좌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릇된 아이네이아스여 살아라, 진실한 디도는 죽도다.”(P.139)
 
말로는 절대 신성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성 발견의 르네상스기에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하여 진부한 과거의 유습을 타파하는 선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개성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여 어찌 보면 극단적(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다. 디도의 사랑, 바라바스의 물욕, 탬벌레인 대왕의 권력욕, 파우스투스 박사의 지식욕. 아마도 중세적 몰개성의 대척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과도기적 특성으로 이해된다.
 
한편, 그리스와 트로이의 역사적 대결구도는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를 통해 카르타고와 로마(트로이의 후손)로 이어진다. 그 최후의 대결이 포에니 전쟁이다. 말로는 결말에서 디도의 탄식의 독백을 통해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몸이 불탈 재 속에서 정복자가 일어서서
 그의 나라를 칼로 쟁기질하도록 하여
 여왕에 대한 이 반역을 응징하도록 해주소서,
 이 땅과 저 땅 사이에 결코 화합은 없으리니,
 해안 대 해안, 파도 대 파도, 무기 대 무기로
 후손들도 계속 싸우기를 기원하노라.“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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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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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4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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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는 세계 문학의 일대 걸작이다. 그런데 이 대작의 제재가 괴테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라 당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전설에 토대를 둔 것임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괴테의 걸작보다 200여년 이나 앞서 말로가 그려낸 이 작품은 보다 초기의 순수한 형태로서의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후대의 작품에 비해서 약 1/4의 분량 밖에 되지는 않지만 원형은 그대로 담겨 있다. 텍스트A와 B가 따로 전해져 약간의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데, 괴테의 작품과 비교하면 악마와 영혼을 대가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공통인 반면 괴테의 것에 등장하는 그레트헨과의 애사 장면은 없다. 또한 괴테는 악마에게 끌려가는 파우스트를 결국 구원하지만, 말로는 전설에 충실하게 그대로 지옥에 끌려가도록 한다. 여기서 이 주인공과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사고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두 텍스트를 비교하면 대체로 A가 기본 스토리에 충실한 반면 B는 A에 누락되거나 축약된 일화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놓은 점이 발견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교황을 찾아가서 브루노를 풀어주는 장면,  카롤루스 5세 황제를 방문하여 마술을 보이면서 무례한 한 기사를 놀려주는데 이 기사가 앙심을 품고 파우스투스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장면, 술집에서 말 장수와 짐마차꾼 들이 파우스투스에게 골탕먹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 이어 그들이 반홀트의 공작과 함께 있는 파우스투스를 찾아가는 장면, 약속한 기일이 끝나고 영혼을 데리러 악마들이 오기 직전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 악마들이 파우스투스의 영혼을 끌고간 다음날 학자들이 그 시체를 보게되는 에필로그 등이다. 이처럼 두가지 텍스트를 한데 합치면 보다 그럴듯한 구성의 작품이 된다.
 
파우스트 전설이 오랜 기간 동안 서구에서 관심을 끈 것은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대가로 마술에 탐닉하다가 지옥에 빠진다. 매 장면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의를 하고 후회를 하면서도 결코 결정을 철회하지 못한다. 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잘못을 회개하고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그것,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관념의 하나이므로 파우스트 전설을 통해 참된 종교[기독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한편 죄인 줄 알면서도 여기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쩌면 그 자체가 인간적인 면모, 이에 대한 르네상스 이후 작가들의 관심이다. 그래서 괴테는 파우스트가 말년에 와서 토지 개척사업을 벌이도록 매우 창조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의지의 강건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타락한 지식인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달관한 숭고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된다.
 
지옥으로의 나락과 천국으로의 비상, 이것이 말로와 괴테, 선후배 희곡작가의 선택 분기점이며, 또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가 빚어내는 인간성과 종교의 역전된 위상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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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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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4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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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서구의 정통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 예수를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유대인에 대한 서구의 증오와 억압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문학 작품에서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간보다도 재물을 우선시하는 악독함은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한 일조를 한 것이다. 물론 사회 정치 방면으로의 진출이 차단당한 상황에서 유대인의 탈출구는 돈벌이와 예능 외에는 별 수가 없으리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의 <몰타의 유대인>은 셰익스피어의 선구자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이 여기에 자극을 받아 씌어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유대인 바라바스는 몰타의 거상이다.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라 국제무역을 하는 대규모 상인이다. 그가 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몰타에 해악을 가져오는 악인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유대인일 뿐이다. 이런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악의 사다리를 밟도록 내몬 존재는 결국 기독교인이다. 그의 전 재산을 강탈하고 내쫓은 그에게 남은 것은 악다구니 뿐이다. 총독 페르네즈의 발언은 정의를 가장한 위선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딸 아비게일의 개종은 바라바스에게 한조각 남아있던 인정을 증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아비게일의 유대인과 터키인의 비난 발언(P.289)은 일종의 자기 부정으로 당대의 기독교 독자와 청중의 종교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투적 덫이다.
 
오히려 작가의 날카로운 기독교 비판이 작품 곳곳에 예리한 송곳 끝을 숨기고 있다.
"그래, 그것도 순결한 처녀로.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군."(P.300). 베르나딘 수사의 탄식은 기독교도로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자신이 건드릴 사이도 없이 죽는 꽃에 대한 아쉬움의 반영이다.
 
또한 바라바스의 발언은 어떠한가. "매년 임신을 하고서도 끄떡 없이 살았으니 말이야"(P.301).
따라서 이 작품은 유대인의 사악성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역으로 부패한 종교적 편향의 가치관에 의해 보통의 유대인이 악으로 내몰리는 비가역적 과정을 그렸다고 보는 게 옳다. 그래서 바라바스는 죽는 순간까지도 회개하지 않고(당시의 통념에 따르면 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오히려 저주를 퍼붓는다.
 
<탬벌레인 대왕>과 비교해 보면 구성의 극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주인공의 승승장구와 적들의 패배와 나락을 대비하며 상대적으로 주인공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등 대체로 평면적이다. 후자는 주인공의 굴곡진 삶과 어울릴 수 없는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주인공의 극적인 죽음 등 역동적 성향을 보인다. 또한 대사에서도 전자는 수사적인 고전적 화려체인 반면 후자는 현실적, 직접적인 대사 전달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희곡 작품으로서의 기본적 충실성과 적합성에서 <몰타의 유대인>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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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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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4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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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탬벌레인 대왕은 티무르 제국의 창건자 티무르를 모델로 삼고 있다. 티무르를 서구에서는 태멀레인(Tamerlane)으로 불렀다고 한다. 탬벌레인의 지칠 줄 모르는 정복욕 또한 티무르를 닮았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탬벌레인은 자신의 고향이 사마르칸트라고 밝힌다)에서 세력을 일으켜 남으로 페르시아와 인도 북부를 점령하고 서로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한다. 한편 신의 분노이자 응징이라고 몽골군을 지칭하는 표현을 빌려 사용하기도 하였다.
 
2. 줄거리
 
극의 전체적 줄거리는 이러한 티무르의 정복 순서를 유사하게 좇고 있다.
1부는 탬벌레인이 페르시아와 투르크 및 이집트, 아라비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한편 제노크라테를 잡아서 마음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부는 투르크의 잔존 세력이 기독교 국가들과 연합하려다 배신당하고 탬벌레인에게 전멸당하며 이때 제노크라테가 병사한다. 탬벌레인은 바빌론을 정복하고 투르크 황제의 아들이 이끄는 또다른 도전 세력을 물리친 후 역시 병사한다.
 
3. 르네상스인으로서 탬벌레인
 
중세의 종교적 억압에 시달리던 서구인들이 점차 인간 개성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르네상스는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종교적 가치관과 자유의 발산이라는 상반되는 가치관이 대립, 충돌하게 된다. 이 작품에 무수히 등장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관습호칭에 대하여 작가는 탬벌레인과 다른 인물의 대사를 빌려서 혹독히 비판한다.
 
 "신도 왕보다는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하늘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지상에서 왕이 누리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P.47, 테리다마스)
 
동맹을 약속해 놓고 배신한 기독교국들에 대한 오르카네스의 비난(P.146~147)은 또 어떠한가. 게다가 병에 걸린 탬벌레인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신들과 맞서 싸워서 신들의 죽음을 알리겠다는 대담한 발언(P.216)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코란을 불태우며 마호메트를 조롱하는 탬벌레인의 대사(P.209~210)를 통하여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고 있지만, 신학 공부를 하였던 그가 무신론자로 고발당하는 것은 작품에서의 이런 배경 탓이다.
 
그럼에도 탬벌레인은 개인 욕망의 철저한 추구와 지칠 줄 모르는 집념(탐욕으로도 볼 수 있다)으로 중세의 나약하고 소극적인 인간성의 껍질을 깨부수고 있다.
르네상스적 인간 정신은 왕성한 호기심과 욕심에 연원을 둔다. 그것이 대항해시대를 촉발한 원동력이고 여전히 세계에 우위를 차지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탬벌레인은 양치기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들에게 세계지도를 펼치며 나머지 지역을 모두 아우르라고 주문한다. 일직선으로 앞으로 내달리는 선형적 사고는 뿌리가 깊다.
 
4. 작품의 특성
 
셰익스피어 당대의 연극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지나칠 만큼 화려하고 수사적이며 장황한 대사를 특징으로 한다. 야만인으로 폄하되는 탬벌레인의 대사를 보면 웅변을 장기로 하는 로마제국의 내로라하는 연설가와 철학자들에 못지않다.
각 부가 100여면 남짓,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으나 각 부마다 숨쉴 틈 없는 사건의 전개가 이어져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장편소설을 단편으로, 대하소설을 단권의 장편으로 압축시켰다고 할까, 따라서 보다 철저한 성격 탐구와 집중 및 사건의 세밀한 구성은 건너뛰고 있다.
 
5. 기타
 
탬벌레인의 제노크라테에 대한 사랑은 비록 폭력적인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나 종시에는 지고지순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제노크라테가 탬벌레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도 단순한 위협이나 영웅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의 순전한 애정을 발견해서였다. 이는 야만인 탬벌레인으로서는 특이한 면모지만 이를 통해 작가는 탬벌레인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한편 탬벌레인의 장남 칼리파스는 부정적 성격의 인물이다. 언뜻 보면 폭력과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듯 보이나, 실상 그는 나약하고 비겁하다. 그는 편하고 안전하게 왕위를 물려받아 여색에 빠져들 공상을 하면서도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한다. 전시에서는 장자 상속보다 적자 상속이 대세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를 범한 것이다.
 
* 등장인물 중 나톨리아의 왕 오르카네스가 있는데, 나톨리아라는 지명이 당최 짐작이 가지 않아 확인해 보았다. 명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 또는 고원을 가리키는 이름을 변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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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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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 - 20세기 클래식史를 이끈 위대한 지휘자 34인
안동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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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에서 거장 지휘자들의 시대는 이미 종언을 맞이하였다. 그 시점을 19세기에 태어난 전설적인 명지휘자들의 마지막 활동시기인 1960~70년대로 추산하든 아니면 20세기 초에 태어난 거장들의 세상을 떠난 1990년대를 산정하든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20세기의 인물이지 21세기를 이끄는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 안동림이 누구인가.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과 <이 한 장의 명반 오페라>로 국내 음반 가이드 방면에서는 최고 권위자이자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죽하면 그의 저작과 추천을 딴 음반 시리즈가 발매되고 있겠는가. 그의 전작 책들을 보면 SP와 LP 시절의 음반에 대한 깊은 내공이 자연스레 배어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 뭐래도 연륜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부제가 ‘20세기 클래식史를 이끈 위대한 지휘자 34인’로 정해진 점은 당연하다.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거장들이 포디엄을 지배하던 옛 시절의 정취를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과거에 대한 일말의 향수도 곁들여져 있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발터, 라이너, 셀, 뵘 등 음악애호가라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명지휘자들의 명단이 줄줄 이어진다. 그 시절 음악회에 가는 것은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었을까. 비단 푸르트벵글러의 주술뿐만이 아니다. 청중은 객석에 앉아 단상의 지휘자가 뿜어내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매혹되어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바그너 등 음악의 신들을 숭배하였다.


연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독설은 활화산 같은 토스카니니의 리허설 장면을 듣게 되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지휘자는 존재하지 않으면 그러할 수도 없다. 지금은 21세기이며, 문화예술에서 클래식 음악은 변두리의 극소수 매니아들이 선호하는 장르일 따름이다. 그것은 발생지인 유럽도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의 지휘자는 단원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협력자 내지 동반자의 태도로 악단을 이끌고 있다. 청중도 더 이상 음악회장에서 종교와 철학, 도덕을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변화된 환경에서 거장 지휘자들의 추억을 더듬고 그들의 위대한 유산을 반추하는 것은 안동림의 작업이다. 그가 다루는 34인의 지휘자는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가장 소장이라고 해봤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쥬세페 시노폴리이다. 음악회의 생생한 현장에서 경험을 공유할 수 없게 된 그들의 음악세계는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세월의 경과에 따라 애호가들에게도 잊혀지고 있다. 저자는 현대의 지휘자들은 대소를 불문하고 과거의 거장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음악의 표면에 함몰되지 않고 깊은 내면을 응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새로운 음악관을 실현하는 젊은 지휘자들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전통의 권위와 무게를 떨쳐 버리고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음악을 순수하고 즐거워야 하지 사변과 관념의 시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에게는 자칫 유희와 가벼움으로 치부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베를린 필의 전임 아바도와 현임 래틀, 마젤과 바렌보임, 메타와 레바인 등에게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클렘페러의 재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래틀은 의도적으로 음악에서 심각성을 배제한다. 바렌보임은 음악을 통해 문명 간 화합을 추구하며, 메타와 마젤 등은 음악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겨냥한다. 포디엄의 고독한 절대자의 이미지는 더 이상 없다.


안동림과 볼프강 슈라이버의 비슷하지만 상이한 저작의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20세기와 21세기 지휘자의 성격을 규정함이다. 안동림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슈라이버는 음악이란 과거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와 미래에 충실한 음악관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양자 중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아니 선택 자체가 가능하며 필요한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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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