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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김산해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그리스 신화의 연원과 이집트와의 관계를 구하는 글을 접한 적 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안겨 준다. 나름 고고학 내지 역사학에 대한 관심으로 다소간 지식을 갖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을 일순간에 깨뜨려 버린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서구 역사와 신화는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수메르 신들의 이름과 계보는 낯설기 그지없다. 신들의 대부 안/아누, 신들의 제왕 엔릴/엘릴, 지혜의 신 엔키/에아 등등. 첫 대면의 생소함은 신화의 줄기에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점점 친밀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와 성서의 신화 뿌리가 수메르임을 알게 되었다. 수메르 신화는 작가들의 허구가 아님을 수천 년을 견뎌온 수많은 점토서판들이 입증하고 있다.
수메르 어로 ‘신’을 ‘딘기르’라고 하는데, 유라시아와 태평양 민족들의 텡게리, 틴기르, 텡그리, 탄그라, 단구스, 그리고 우리말의 단군 등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뒷목이 띵하여 왔다(P.45). 인류 문명 전개과정의 공통 조상에 의한 유사성인지 아니면 문명 간 전승 관계의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유사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역사적 시간대로 추정해 볼 때, 수메르 신화는 그리스와 성서는 물론, 나머지 3대 문명권보다도 시기적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엔릴과 엔키의 관계는 형제간이면서 적자와 서자의 뿌리 깊은 갈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갈등이 성서의 인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사악, 이사악의 아들 에사오와 야곱, 야곱의 아들 르우벤과 요셉 등 장자상속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엔키와 엔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P.55).
또한 신들의 어머니 닌투/닌후르쌍의 별칭이 마미, 맘무였는데, 여기서 마마, 맘이 유래하였다고 보는 장면도 꽤나 그럴듯하다(P.61).
바빌론의 건설과 어원을 언급한 대목은 어떠한가. 바빌론이 ‘신들의 문’(바빌리)을 뜻함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수메르 신화에 대한 전반적 줄기를 이해하는 가운데, 압권을 뭐니 뭐니 해도 ‘에누마 엘리쉬’와 ‘베레쉬트’, 즉 바빌로니아의 창세기를 모방하여 유대인들이 야훼에 의한 창세기를 창작하는 과정을 추론하는 대목이다. 바빌론 인들은 수메르 신화를 뒤집어 엔릴 계가 아닌 엔키의 아들 마르둑을 신들의 전쟁을 종식하고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변용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민족의 영광을 빛내기 위하여 이를 따르고 있다. 수많은 신들은 오직 하나 유일신 야훼로 수렴되었다. 그리고 아담(신의 피와 흙으로 빚어낸 존재)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본질적 사유와, 대홍수가 불가피하였던 연유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는 성서 전승을 비판할 의도였겠지만 비신자인 내게는 순전한 역사적 관점에서 성서의 서사적 틀에서 미진한 부분을 수메르 신화를 통해 메울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신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소위 ‘만물의 영장’을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다. 노동에 시달리는 작은 신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신을 대신하여 노동할 수 있는 적당한 지능의 존재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노동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다. 조금은 씁쓰름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담과 이브의 관계 또한 통념과는 다르다.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부분을 근거로 여성에 비해 남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혹자들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메르 신화를 근거로 갈비뼈 자체가 성서 작가의 오역임을 밝힌다. 수메르 어에서 갈비뼈를 뜻하는 ‘티’라는 단어는 생명이라는 뜻도 지닌다고 한다. 즉 이브를 창조한 것은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의 생명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달의 여신 닌티는 갈비뼈의 여신이 아니라 생명의 여신이듯이(P.204).
수메르는 예수 탄생 수천 년 이전에 문명이 쇠퇴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는 앗시리아가, 남부에서는 바빌로니아가 대치 상태를 유지하다가 신바빌로니아가 통일을 수립하고, 후에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당하면서 역사에서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재발견되고 쐐기문자가 잇달아 해독되기 시작하면서 그 유구하고 찬란한 유산이 인류에게 드러나고 있다.
아, 수메르 신화는 수만 장에 달하는 점토서판을 통해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고대와 현대를 바로 잇는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기 위한 사전적 학습 차원에서 가볍게 접근했던 이 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적 충격과 자극을 받게 되었다.
서구 편중적인 우리 문화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메르 전승에 관심을 기울일지 솔직히 의문스럽다. 그래도 척박한 환경에서 저자 김산해와 조철수 같은 수메르 어를 원전으로 해독할 수 있는 이들이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문화적 편식을 예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나마 강구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 방대한 신화 전승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