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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
조철수 지음 / 김영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수메르 신화 전문가 조철수 님이 쓴 책이라 일단 관심이 갔다. 게다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우리 신화를 연관 짓는 서제를 보니 뭔가 획기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네이버 서평을 보니 평가가 엇갈린다. 추천과 비추천이 혼재한다. 비추천의 요지는 신빙성이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이제 책을 다 읽은 후 소감은 나 역시 비추천에 가깝다는 것이다. 서제 자체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농후하다. 언뜻 보면 수메르 문명과 신화를 통해서 우리 신화 즉, 고대사를 재검토하는 듯이 생각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다소 거리가 있다. 내가 수정한 서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로 재해석한 우리 신화’ 정도이다. 이것이 조금 더 책 내용과 가깝다고 판단한다.
여러 곳에 연재한 관련 논문을 한데 모은 탓인지 각 장들 간에 체계성이 부족하므로 개별적으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는 신화소(神話素)의 개념을 거듭 중시한다. 신화소는 신화의 구성단위로 이해하면 될 듯한데, “작은 단위의 이야기가 한 신화소를 이루는 것”(P.6)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 마름모 모양의 물결무늬, 연못 모양, 활과 화살 등 신석기 시대의 신화소를 통하여 고대 근동 문화와의 동서 교류의 흔적을 재음미하고 있다.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석탈해, 처용설화를 통해 우리는 이미 서역과의 교역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서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신화소들은 근거로 고대 근동에서 세계 각지로 문명이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신화는 수평적일 수도 있다. 사람이 모여 사회를 형성하는 단계에서 시기적으로 선후는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 양식은 유사하다. 공통된 신화소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타 문명에서 전파되었다고 추단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물론 공통의 신화소로 다른 문명권의 신화를 분석하는 것을 신화 이해의 폭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단군 신화에서 환인의 서자 환웅을 수메르 신화의 신들의 아버지 안의 장자이자 신들 중에서 넘버 투인 엔키를 비교하여 환웅의 스토리를 분석해 보는 것을 매우 흥미롭다. 동일한 방식을 저자는 두무지와 인안나를 견우직녀 설화에 적용하는데 이것은 다소 무리한 확장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신화 이해에 있어 극적 상상력을 강조하는데, 상상력이 지나치면 창작 내지 허구가 될 우려가 존재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화 이해는 결코 문학 창작이 아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길가메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삼목산 산지기 후와와(훔바바)와 우리의 귀면(鬼面)을 비교하여 귀면에 새겨진 존재가 후와와에서 유래하였다고 추론하는데, 대체로 근거가 희박하다. 수년 전 귀면 속의 존재는 도깨비가 아니라 용의 형상화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된 적이 있었는데 곰과 용은 거리가 멀다. 저자가 이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동양의 십이지간의 유래가 고대 근동의 황도 십이궁에서 유래되었다는 저자의 논거 역시 궁금하다.
한편 참신한 분석도 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우선 민요 아리랑에서 아라리의 의미다. 아라리 고개는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는 고개로 아리랑은 망자가 생자로부터 멀어짐과 버려짐을 애통해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심청전과 바리공주 신화는 어떠한가.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고 인당수에 뛰어들고, 바리공주가 서역으로의 갖은 고생을 무릅쓴 것은 그래야 저승(용궁과 서역)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저승 세계에 다녀옴으로써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권능과 오구대왕의 죽은 몸을 살릴 권능을 얻게 되는 한편 자신은 존귀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시비를 떠나서 자체로서 음미할 대목이다.
덧붙이자면 훈민정음 창조를 옛 히브리 문자와 연관시킨 부분은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하지만 가림토 문자가 기록된 사서의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가운데 중간 단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전체 토대가 불안정하다는 맹점이 있다.
대체로 이 책은 우리 옛 신화와 설화를 전통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저자가 오랜 기간 연구한 수메르 문명의 신화소를 도입하여 분석하고 있는 점에서 상찬 받아 마땅하다. 다만 화제 유발을 의도한 과도한 상업성의 서제로 말미암아 이 책의 진면모가 오해받고 가려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저자와 출판사의 책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