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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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4년 김훈은 다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다. 4년간의 시차, 이전과 이후의 그는 변함없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당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그만큼 그의 자전거 페달이 주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환희와 좌절의 순간도 겪었다.

이제 그의 바퀴는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4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었던가. 늙은 것은 전국의 산하와 마을을 누빈 풍륜인가 아니면 그 길을 여는 허벅지인가. 어쩌면 훌쩍 떠날 촌음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 유명 작가의 허울이 주는 속박인가. 자전거는 다시금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횡적 범위가 축소된 반면 종적 깊이는 그 웅숭깊음을 더해간다.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둔 일산 신시가지와 김포 전류리 포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착잡하다. “강력하고 완강한 변하는 것들과 위태로워서 사소한 변하지 않는 것들”의 전복된 가치를 안타까워하며, 현대 도시문명의 특징인 “단절로서의 변화”를 “수용으로서의 변화”와 대비하여 사색한다. 일산 신도시만 가지고도 이럴진대 최근의 김포 한강신도시와 파주 교하신도시에 대한 작가의 소회는 더욱 궁금하다.
 
말라가고 있는 남양만 갯벌과 사라지는 염전 등 소멸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보면 아, 김훈은 영락없는 작가임을 깨닫는다. 슬픔에 대한 본능적인 친연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성공하거나 성공을 꿈꾸는 소시민들은 방조제에서 자연을 뒤엎는 인간의 힘과 개발의 부푼 희망을 웅변할 것이다.
 
방조제와 갯벌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 정리된 듯하다. 기존에 진행 중인 방조제공사(간척사업)는 아마도 새만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환경단체들의 맹렬한 저항과 환경파괴에 대한 정치권의 부담감은 신규 공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갯벌과 기수역(밀물과 썰물의 교차수역)에 대한 향후 과제는 기왕에 만들어 놓은 방조제와 하구언 처리에 관한 것이다. 강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영산강 중류로 고깃배가 드나들고 갯벌에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여 바지락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생을 꾸려갈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이 보다 아름답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 보전보다는 개발이 우선순위를 지녔다. 당장 배고파서 죽어 가는데 보전은 먼 훗날의 얘기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큼 되자 환경과 보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 시내의 수많은 복개하천의 복원 정책을 보라. 대세는 복원이다. 아, 그런데 내가 사는 동네의 조그만 하천은 언제나 복원되려나. 주변에 변변한 산도 공원도 없는 삭막한 주거지역인 그곳.
 
남한산성을 돌아보는 작가의 시선을 남다르다. 이미 소설의 구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나 보다.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었다...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고,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P.203~204) 작가는 남한산성을 통해 치욕도 삶의 일부라고 삶이든 역사든 온전할 수는 없음(P.208)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을 다소 모호한 소설의 숨은 목소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남한산성의 현질사든 아니면 아산의 현충사 등 이러한 아쉬운 기념과 추억의 자취를 반기지 않는다. 이러한 흔적은 태평성대에는 세워지지 않는다. 난세와 전란의 시기에만 추앙된다. 그래서 나는 충신의 등장을 원하지 않는다. 충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선호한다.
 
김훈이 차기작의 소재는 무엇이 될 까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에 답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양수리(두물머리)가 유력하지 않을까? 정다산. 치욕과 침묵이 함께하는 모순적인 내면과 외면의 압박. 작가의 펜끝이 언젠가는 다산에게 다가올 것으로 감히 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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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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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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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99년 가을에서 2000년 여름까지 자전거 여행기다. 책머리에서 작가는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라고 일성을 외친다. 얼핏 픽 웃음을 자아내는 이 한 마디가 내게는 절대로 엄살이나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자전거 여행 당시 그는 미문을 구사하는 전직 신문기자 출신의 산문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말이 좋아 작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알아주는 이 별로 없는 무명인의 처지다.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사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그 다음 작품인 <칼의 노래>는 속된 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한 몸에 받고 문학상마저 수상했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바처럼 그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것이 불과 1년 만인 2001년의 일이다. 역시 인생사는 새옹지마다. 작가가 앞일을 미리 예측했다면 책머리의 절규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훨씬 더 비싼 자전거값도 월부로 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칼의 노래>의 예감이 여기 자전거 여행에 나와 있다. 진도대교편,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산문작가 김훈에서 소설가 김훈으로의 변환점이 진도에서 드러난다.

김훈의 문체적 특징은 꼭 산문에 적합하다. 천상 산문작가인 셈이다. 그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현의 노래>는 읽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화장’을 읽어보면 어눌하고 진솔하게 읊조리는 듯 한 어투에 문장에 표현상 변형을 주면서 반복하는 방식의 문체는 다른 작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속도감 있지 않지만 축축 처지는 감도 없는 뚜벅이 황소걸음. 이는 <자전거여행>에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나직이 내면으로 울부짖는 목소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심금을 울린다.

이러한 김훈의 특장이 발휘되는 소설적 영역이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절대 순간이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조국을 난도질하는 적을 한없이 단순하지만 순결한 칼을 휘두른다. 외부의 적은 차라리 상대하기 쉽지만 그 단순성과 순결성을 의심하는 내부의 적은 다루기가 어렵다. 내부의 적을 따르자면 외부의 적을 벨 수 없고 외부의 적을 아니 베면 그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어떤가. 무력한 주전론과 속터지는 주화론의 평행 대치. 그러는 동안에 식량은 떨어지고 원군은 오지 않는다. 결국 성 안에서 육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성 밖에서 정신의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 의미에서 <현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김훈의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됨은 지극히 당연하다. 거기에는 생사 갈림길의 팽팽한 대치가 빠져 있을 테니.
 
무명작가 김훈은 가난하지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김훈이 자전거 풍륜의 페달을 밟고 마음껏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소박한 민초들의 일상에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아, 자전거 여행. 그것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한심한 이 몸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한 가닥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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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세계문학사
존 메이시 / 종로서적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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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내용보다도 책 자체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된 종로서적(종각역 출구 바로 앞이라 만남의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던 곳이다)이 한창 출판에도 힘을 쏟던 1981년에 발간한 단행본이다. 책 뒷면을 보면 1981년 3월 1일이 발행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미 단종된 지 상당한 시일이 경과한 책이라 관심있는 독자라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중고서점을 배회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다시 언급하련다.
 
저자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존 메이시는 1887년 미국 미시건 주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일생을 문학 연구에 바쳤다. 처음에는 모교의 강사를 지낸 뒤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론 잡지 NATION 지의 문학부장 일을 맡았다. 그동안 여러 문학 잡지에 비평-평론을 썼고, 여러 저서도 출판하였다. 1925년에 이 책을 저술하였고, 1933년에 사망하였다.

저자의 약력을 보아서 알겠지만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씌어진 것으로 내용 상의 충실성을 떠나서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옮긴이의 표현대로 '꿩 대신 닭'이라고 국내에 마땅한 세계문학사 개설서가 부재한 데 연유한다. 하긴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변함없다. 청소년을 위한 간략한 개설서와 조동일의 성격 규정이 다소 모호한 책을 제외하면 서양문학이 아닌 세계문학 전반을 다룬 책은 시중 서점에서 찾을 수 없다.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와 같은 한국문학사 대작도 나온 마당에 아직 국내 학자들이 세계문학 통사를 저술하기엔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려운 일임은 충분히 예상하지만 그래도 주체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세계문학사가 나올 수 있도록 연구자들의 분발을 바랄 뿐이다.

존 메이시의 생몰연대를 통해서 이 책의 일차적 한계는 명확하다. 즉 20세기 중후반부에 대거 등장한 현대 문학가들에 대한 정보와 평가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편집인이 추가한 장을 통하여 윤곽을 훑어볼 수는 있지만 언땅에 오줌누기 격이다. 아무래도 고대와 중세를 제외하면 르네상스 이후부터 출발하여 19세기까지를 저자는 관심 영역에 두고 있다.

또한 저자가 자신의 머리말에서 표명하듯이 당시 지적 역량의 한계가 눈에 띈다. 미국 출신이기에 영미권 문학은 자연스러우며,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등 주류 유럽 제국에 치중하고 있다. 비주류 국가의 작품은 영어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마당에 저자가 그 탁월성을 이해하기는 다소간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시대적 배경이 제국주의가 한창 세력을 떨치던 시기라 아무래도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므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권의 문학은 전혀 배제하고 있다. 중국 문학과 일본 문학의 소개도 없는 마당에 우리나라에 대한 언급을 기대하기는 난망한 일이다.

저자는 대체로 시대별 분량을 장(chapter)별로 균등하게 할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학사를 특정 시대 또는 지역별로 편중하지 않고 고르게 고찰하려는 나름 균형을 살리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에는 태생적 제약요인이 존재한다.

세계지도 제작 기법 중에 메르카토르 도법이 있다. 일반적인 종이 지도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둥그런 지구를 평면에 펼쳐놓다보면 매끄럽게 되지 않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래서 적도 부분은 영역 크기의 척도가 바르게 되어 있으나 극지방을 억지로 잡아늘려 꿰어맞춘 바람에 척도가 매우 왜곡되어 나타난다. 시베리아, 캐나다, 그린란드 등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린란드 섬이 호주보다 크게 나타나 있고, 알래스카가 미국 본토의 절반만 하다. 이 도법의 특성을 이해하는 지적 수준을 지닌 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어린이나 문외한 같은 경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우려가 크다.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 이 책에도 나타난다. 뛰어난 작가는 시간과 장소에 결코 균일하지 않다. 어떤 시대는 암흑기라고 불릴 정도로 명작 부재의 시기가 한동안 존속되기도 한다. 또 갑작스레 특정 시기 특정 국가에서 세계적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평준화의 논리에 집어넣는다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침대에 맞추기 위하여 사지를 절단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예컨대 누구라도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의 문학사적 의의가 알프레드 드 뮈세(19세기의 프랑스 시인)보다 월등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구체적 작품 소개도 없는 데 비해 뮈세는 그의 시 한 편의 전문을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미지의 가작을 발견하는 기쁨이 왜곡의 우려를 능가해서는 안된다. 더우기 저자는 다른 문학 장르 보다 시(poetry)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왠만한 시인은 단편적으로라도 시 한 수를 소개하는 열성을 보이는데 비해 소설이나 희곡, 수필 등은 보통 간단하게 대략적 의의와 문체적 특징만을 언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운문이 산문보다 내적 서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장르의 우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한편, 존 메이시는 문학의 영역은 순수문학에 국한하여 파악하지 않는다. 역사가,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링컨에 대하여 한 면을 할애하고 있다!) 등의 각종 저술과 산문을 문학적 관점에서 포착함으로써 문학의 외연을 폭넓게 확장하여 이해하려는 미덕을 보인다. 이는 순수문학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는 편협한 현대인들의 자세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지나친 환원주의 폐해는 문학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작가를 문학자들, 수필가들, 시인들, 소설가들로 분류하는 것은 인위적인 데가 있고, 인간 정신에 대해 불성실한 것으로 간주한다(P.473 참조).

서양의 덜 부각된 작가들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전문 문학인 외의 인물이 쓴 글에 대한 문학적 가치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된 점은 유익하다. 이는 다른 저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 책만의 독자적 가치라고 하겠다.

다만 처음으로 세계문학 전반을 이해하고자 이 책을 집어드는 초심자에게는 오히려 문학사의 커다란 조망과 이해를 흩트러뜨리는 부작용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불친절을 낳았다고나 할까. 굳이 이 책을 읽겠다면 그 한계를 염두에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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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2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서양문학의 이해
김성기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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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완독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보니 우선 세계문학사의 거시적 흐름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개개의 작품을 고립된 개체가 아닌 문학사의 커다란 틀에서 개체군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싶었다. 더불어 세계문학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대하고 싶기도 하였다. 현재 수준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상식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세계문학사를 다룬 책들을 찾아보았다. 의외로 거의 없다. 정말로 뜻밖이다. 지역문학사를 다룬 것은 그나마 몇 권이 있으며, 우리문학사도 조동일의 걸출한 '한국문학통사'가 있는데 세계문학사를 쓴다는 것은 광대한 지적 밑받침이 없다면 도전하기 어려운 과제인 듯하다.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가람기획)은 일단 사전에 가까운데다 가까운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재고가 없어 내용 확인이 불가능하고 가격도 비싸 일단 제쳐둔다. 한국문학사의 조동일이 쓴 '세계문학사의 전개'가 있는데 통상적인 수준의 개론서 유형은 아니다. 저자의 고유한 문학사관을 투영하여 세계문학사를 논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이것이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전부다다. 물론 청소년을 위한 세계문학사가 한 종 있는데, 인터넷 미리보기를 해보니 중학생 정도를 대상으로 한 듯하다.
 
할 수 없이 도서관을 찾아가보니 몇 종류가 더 있어서 그 중 '서양문학의 이해'(한국외대출판부), '세계문학사'(존 메이시/종로서적), '세계문학사'(정판룡/세계)를 대출하였다. 정판룡 판본은 중국 연변에서 간행한 조선족 교과서로 동서양을 아우르지만 중국이 빠져 있고 사관의 편중이 예상된다. 존 메이시는 오래된 사람이다. 20세기 전반까지의 서양문학 중심이라 현대성과 동서 균형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일단 한국외대출판부 판본으로 먼저 접근하기로 하였다.
필진은 모두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문학과 교수들이다. 저작 의도도 교양과목을 위한 교과서로 삼고자 한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마땅한 개론서가 없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리스 로마문학, 중세문학, 르네상스 문학, 고전주의 문학, 낭만주의 문학,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 상징주의 문학, 모더니즘 문학, 실존주의 문학,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다. 대체로 시대적 배경을 장의 모두에 소개하고 지역별, 장르별로 죽 훑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중요 작가 및 작품은 별도로 줄거리와 의의를 짧게는 반 페이지에서 길게는 몇 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문체도 평이하여 일반적 수준의 독자라면 이해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후반부의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제외하고는.
 
이런 유형의 저서는 필자가 여럿이다 보니 그 수준이 균일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러시아문학 전공자는 물론 서양문학사의 개론을 어느 정도까지는 기술할 수 있지만 러시아문학에 비해서 그 정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매 장마다 문학 용어, 문체, 서술 방식의 차이가 존재하여 일관된 흐름이 부족하다. 더욱이 교정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무수한 오자의 존재는 눈물겹기 그지없다. 아마도 학기에 맞춰 출판에 급급하다 보니 교정은 건너뛴 듯하다.
 
그럼에도 일부 유명한 고전에만 편중되었던 인식 기반을 외연적으로 확대하는 데는 상당히 유용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비극과 희극은 물론이고 코르네이유, 라신느, 몰리에르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겨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만 해도 자못 역할이 크다.

또한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상찬이 아니라 그의 작품성의 한계에 대해서도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는 것은 서양문학에 대한 지적 경도로 인한 맹목적 세뇌를 방지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양문학을 깊이있게 이해하고자 함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서양문화에 대한 올바른 관계형성을 위한 동반자적 자세이며,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균형잡힌 재정립을 도모하고자 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기왕 학문 수입이 과도한 서양 편중이라는 발달사적 출발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되 우리 아닌 것을 내치지 말아야 한다.
 
세계문학과 우리문학은 공존할 필요가 있다. 문학에 있어 일방적 우월성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고유의 언어에서 벗어나면 시(詩)는 가치의 99%를 상실한다. 소설과 희곡 등도 배경과 구성, 사건만 살아남으니 60% 밖에는 건지지 못한다. 따라서 원서가 아닌 번역본으로 작가의 진정한 미덕을 체감하기란 참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그런 면에서는 우리말로 씌어진 우리문학이 정서적 공감대를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우리는 좀 더 우리문학을 사랑할 책무가 있다. 그것이 '서양문학의 이해'를 읽은 개인적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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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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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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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집단의 바램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화는 당대 사람들의 삶의 양태와 동시에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소망마저도 감싸 안는다.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은 대표적인 사례다. 릭도스와 텔레투사의 딸 이피스의 경우 아버지의 말을 통해 원시 모계사회에서 고대 부계사회로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많이 하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딸은,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오. 불행히도 나는 딸을 먹여살릴 만큼은 넉넉하지 못하오. 그러니 그대가 딸을 낳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오. 만일에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P.55)"
 
불행히도 여자로 태어난 수많은 이피스들에게 남은 생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면 제2의 성으로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외에 대안이 없었다. 이따금씩 자신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
 
근친상간 내지 근친결혼도 마찬가지다. 올림포스의 신들이야 당연히 허용된 이 사항이 인간 사회에는 금기사항이었다. 복수의 여신이 가장 크게 화를 내는 죄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몰약이 된 뮈라'(P.83)는 아버지 키뉘라스 왕을 속이고 이 금기를 어겼다. 또 오빠를 사랑한 누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성장하면서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이성은 가족 내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정과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서 가족 간, 나아가 근친 간의 교배는 집단구성의 원리 상 인정될 수 없다. 따라서 근친 간의 이성적 사랑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랑이므로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강도는 더욱 처절하기 마련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유명해진 트로이 전쟁에 대한 내용도 이 책에 등장한다. 여기서 인상적인 대목은 아킬레오스(아킬레스)의 유품을 둘러싸고 아이아스와 오뒤세우스 간의 대결이다(P.181~207). 힘으로는 그리스 제일가는 용사와 지혜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수. 그들이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야말로 적격자임을 강조하는 웅변은 무려 삼십면 가까이 전개된다. 아이아스의 발언에서 호메로스의 또 다른 영웅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일방적인 찬사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당한 결투를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육체의 미덕을 찬양하는 시대에서 꾀와 지혜, 속임수도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에서 아이아스는 구시대를, 오뒤세우스는 신시대를 대표한다. 그리고 영예는 오뒤세우스가 차지하고, 아이아스는 자살을 택한다. 사회 가치관의 변천을 두 인물의 극적인 결말의 대비로 잘 보여준다. 오뒤세우스는 그 지혜로 아킬레오스의 유품을 차지하고 꾀로써 트로이를 멸망시키지만, 그 대가로써 귀향길에 십년 간의 방황을 하게 됨은 아직도 그 지혜에 대한 세인들의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음을 반영한다.
 
오비디우스는 피타고라스의 주장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낸다.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처음의 모양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이 우주에 소멸되는 것은 없습니다. 변할 뿐입니다. 새로운 형상을 취할 뿐입니다...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습니다."(P.300~303)
 
이 대목은 이 책의 제목인 변신의 근거인 동시에 자연관의 표상이기도 하다. 표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현대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상기시킨다. 고대 그리스인의 자연관은 우주가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네 가지 원소의 상호작용으로 수많은 변용과 변신이 발생하였으며 이것을 신들의 개입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이 책 '변신 이야기'다. 즉 이것은 단순한 신화 모음집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에 대한 문학적 종교적 풀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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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1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