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 까치글방 177
야콥 단코나 지음, 데이비드 셀번 영문 편역, 오성환 외 옮김 / 까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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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 상인이 마르코 폴로보다 3년 앞서 중국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수백년간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다가 원본 및 보관자는 비밀로 한다는 조건하에 마침내 공개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이만하면 꽤나 흥미진진한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내용 자체가 보잘 것 없다면 위작 여부가 딱히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두툼한 분량의 이 책은 흔해빠진 여행기는 아니다. 무역을 위해 이탈리아의 안코나에서 육로와 해상을 통해 중국의 짜이툰까지 오간 여정 중에서 상당 부분은 야콥이 짜이툰에 체류하면서 보고 듣고 겪게 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나마도 그가 짜이툰의 미래에 대하여 개인과 사회질서, 윤리 등에 대하여 중국의 학자 및 상인과 토론하는 내용이어서 뭔가 이국적인 것을 기대하는 이는 실망할 것이다.

13세기 중국에서 유대인 상인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민감한 사안도 포함하여 열성적인 토론을 거듭하는 장면은 이채롭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현대적인 점에서 오늘날과 차이를 찾기 어렵다. 그 때문에 오히려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로 위작이라면 이는 비난할 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편역자 데이비드 셀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야콥은 독실한 유대인으로 철저한 계율 준수와 회개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성인에 필적하는 믿음과 굳건함으로 태산같은 위엄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곳곳에 인간적 나약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등장한다. 50의 나이를 감안하면 의외의 장면이다.
 
"과거에 당한 불운이 생각나서 나는 다시 슬픔이 복받쳐올랐다...경전 연구를 잠시 제쳐둘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져 또 울기 시작했다." (P.44)
 
곳곳에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지만, 야콥의 주요 토론자이며 그를 높이 평가한 빠이따오꾸는 구시대의 질서를 대변하는 양반이다. 그의 발언을 통해 당시 사대부 계층의 도덕적 기준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에 따르면 상업이 득세하며 도덕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새옵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 계층이 자신의 직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당에서 빠이따오꾸와 상인들이 벌이는 논쟁(P.262~265)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대한 첨예한 대립적 시각과 유사하다. 상인들은 극단적 자유방임을 주장하며 개인과 사회의 일체의 의무 부과에 반대한다.

한편 젊은 지식인 안훵산과 야콥의 토론은 또다른 흥미를 제공한다. 종교적,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고 대변하는 야콥, 현대적 가치관을 지향하는 안훵산. 야콥은 그를 '나의 적'으로 지칭한다. 그만큼 강력함을 반증한다고나 할까. 그들의 견해는 아동교육론에서 의무교육과 자유교육으로, 형벌의 의의에 대한 처벌론과 교화론으로 대립된다. 솔직히 요즘의 시각에서는 안훵산의 주장이 시대를 초월한 신선함을 안겨준다. 그것이 야콥에게는 더욱 신경쓰인 모양이다.
 
그리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라센인의 관계에 대한 야콥의 설명은 그 반목의 깊이와 뿌리가 얼만 깊은 지를 웅변한다. 유대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역사는 이슬람교에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야콥 자신도 사라센인보다는 기독교도에 더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현실과 대조되는 사실에 역사적 아이러니가 표출된다.
 
야콥은 겸손한 유대교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투적이라고 표현함이 적합하다. 중국 학자들, 상인들과의 불꽃튀는 토론, 기독교 사제와의 격한 논쟁을 보자. 게다가 그는 상인의 직분을 넘어서는 과욕을 부린다. 즉 도시의 고문관이 되고자 한 것이다.

"지금 암흑속에 놓인 빛의 도시에 진리와 지혜를 일깨워주려던 내 노력이 사람들 앞에서 무참히 좌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P.401)
 
이러한 그의 오만은 빠이따오꾸와 상인들의 대립을 부추기는 기름 구실을 하게 되었고, 결국 빠이따오꾸의 죽음과 그의 필사의 탈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가 과연 순수한 도덕적 동기에서 타국의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그럴지 몰라도 나중에 그는 중국에서 봉건영주를 꿈꾸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국적 풍광을 담은 여행기로 접근하면 실망하기 딱 좋다. 대신 몽골 침략을 목전에 둔 남송 말기의 무역항 짜이툰 사람들로 대변되는 보편적 인간 군상의 사회적 면모를 되돌아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빛의 도시'가 사실은 '어둠과 맹목'(P.408)의 도시임을 야콥은 체험과 토론을 통해 현대의 우리들에게 몸소 입증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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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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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8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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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이 모다 고전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생생히 숨을 쉬고 싱싱함을 유지해야 참다운 고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서유견문>이 옛책과 고전 중 어느 위치에 놓일지 궁금했다.
 
사실 명성은 자자하지만 일반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저서도 참 많다. 누가 그랬던가. 다윈의 진화론은 삼척동자도 알지만 정작 <종의 기원>을 읽은 이는 극소수라고. 아마 <서유견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 제목을 보고서 개화기에 서양을 소개한 여행 개설서 정도로 이해했다. 저자 자신도 자신의 견문담과 남의 글을 짜집기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것은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라 견문록을 가장한 저자 자신의 정치론으로 이해되었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으로 당대 서양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인 유길준이 선진 서양에서 받은 문명적 충격과 이에 대비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비교하여 어떻게 하면 조국을 개화시킬 것인가를 견문록의 형식에 담아냈다.
 
그래서일까. 목차만 보더라도 서양 풍물보다 정치, 조세, 교육, 사회제도에 대한 분량이 압도적으로 비중을 차지하며, 상당 부분의 내용이 저자 자신의 주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국제정치 관계를 논하면서 증공국과 속국에 대해 장황한 논리를 펼친다.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구한말 당시의 정세를 상기하면 십분 이해된다.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은 조선말 개화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진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지식인에게 청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논리 개발은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그것이 증공국과 속국 논리로서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증공국이라는 것이다.(P.110~)
 
그런 유길준의 논리는 당당하다.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에도 또한 나라가 없다."(P.107)며, "강대국이 자기 나라의 넉넉한 형세를 휘둘러 약소국의 정당한 권리를 침범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폭거이며 무도한 악습"(P.110)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처럼 청에 대해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난 유길준이지만 후일 일본의 조선 침탈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연유가 궁금하다.
 
아직 개화 초기이다 보니 충분한 숙성을 통해 체화하지 못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스코틀랜드인, 아메리카 인디언 등에 대한 저자의 비판(P.123~124)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각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도 나타난다. 납세의 의무를 강조한 것은 소위 악법도 법이라는 지나치게 정권지배자 중심 시각이며, 군주제의 옹호는 주독자층이 누구인가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임금이 다스리는 정부의 국민들은...선대 임금들이 창업한 공덕을 만세에 받들어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다."(P.167)
 "임금은 그 아버지고 국민은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P.221)
 
물론 현대의 시각에도 유념할 부분도 적지 않다. 재산권 보호에 대한 그의 의견("전 국민에게 커다란 이익을 줄 만한 일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사유물을 해치게 되면 감히 시행할 수가 없다, P.144)은 극단화할 수는 없겠지만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부유층의 사익을 위해 공권을 동원하는 오늘날(얼마 전 재개발로 촉발된 용산참사를 보라)에 비하면 오히려 100년 전보다도 인식은 퇴보한 게 아닌가 씁쓸하다.
 
그리고 상인의 직분과 경계할 점 등 도리에 대해 설파한 항목(P.387-391)은 이 책이 단순한 서양문물 소개기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 역시 친일 개화파로서 나름의 견해가 없을 수 없다. 지혜로써, 용단으로써, 위력으로써 개화하는 방식(P.397)에 대한 주장에서 얼핏 갑신정변에 대한 비판과 변호의 인상을 풍긴다. 그의 사고에 따르면 갑신정변은 옳은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체제란 오랜 세월에 걸쳐 국민들의 습관이 된 것이다...급격한 소견으로 헛된 이치를 숭상하고, 실정에 어두우면서도 개혁하자고만 주장하는 자들은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과도 같다. 임금과 나라에 도움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P.176)
 
이 얼마나 통렬한 비판인가? 이 단락을 집필한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견했거나 아니면 그 실패한 결과를 목도하고 지적한 것이리라. 사실 갑신정변은 우리 근대사 기조를 바꾸어 놓았다. 일부 성급한 과격파에 의해 그 후 개화파는 친일의 앞잡이로 간주되었고, 자주적 개화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싹을 잘리게 되었다. 개화의 죄인은 개화의 원수보다 폐해가 더 크다.
 
오늘날 개화는 케케묵은 단어다. 글로벌 시대에 무슨 시대에 뒤처진 말인가. 그런데 실상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P.398)에서 우리는 허명의 개화를 따르는 것은 아닌가. 개화의 원수는 사라졌지만 개화의 죄인은 여전하다. 더욱이 "입에는 외국 담배를 물고..외국말을 얼마쯤 지껄이는...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한낱 개화의 병신"(P.400)이 곳곳에서 난무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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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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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땅
윌리엄 랑게비쉐 지음, 박미영 옮김 / 크림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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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을 비록 언저리지만 목도하고 손발로 체험한 이후 사막의 생생한 정경은 더더욱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미지의 곳, 오지 탐험에 대한 열망을 탐험기 또는 여행기를 통한 대리 충족으로 만족해야만 함이 못내 아쉽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북부를 차지한 지구 최대의 사막으로 그 면적만도 아프리카의 1/3이나 된다. 이 사하라를 도보로 횡단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차량으로 이동하더라도 도로 상태가 여의치 않아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랑게비쉐의 횡단 도전은 알제리에서 남하하여 니제르를 거쳐 서쪽으로 말리, 세네갈을 빠져나가는 노선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서부 사하라에 국한되지만 논쟁은 하지 말자. 어차피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려는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요 그 기록을 읽는 이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여행기의 미덕은 기이한 자연과 이국적 풍경 묘사 보다는 여정 속에서 만나는 개인과 사회의 재발견과 성찰에 있다.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가 뛰어난 점은 느릿한 여정 속의 자아 성찰과 마주치는 사람들을 편견을 배제하고 순수한 눈으로 대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서양인 여행자의 글에는 무의식적으로 우월주의가 스며들기 쉽다.
 
랑게비쉐도 나름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다. 그는 현직 기자답게 사물과 사람들을 한 발짝 사이를 두고 바라보는 직업적 습관이 배어있다. 자동차로 며칠이면 통과할 그 곳을 400면에 가까운 두터운 글로 채우자면 자연 곁가지로 새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사람 개인사 및 지역의 정세를 상세히 기술하는 것을 읽다보면 리포트가 아닌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체취를 원한다면 2프로 부족할 수도 있다. 반면 사하라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유용하다.
 
사막이 우리에게 주는 매혹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절대 고독이다. 처음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도  곧 단조로움으로 다가오고 생명의 자취가 끊어진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내면을 응시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완벽한 고독과 황폐함은 사람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준다...사막은 그 부족함으로 귀한 뭔가를 깨우친다."(P.18)
 
사하라는 남쪽으로 그 기세를 더해가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생존 영위를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거대한 차드 호가 이제는 거의 말라붙게 된 위성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조작할 능력은 없으니 자연에 대한 순응이 필요한데, 곤궁에 치일수록 인간의 집착과 탐욕은 적나라한 모양이다. 사하라 국가들, 리비아, 알제리, 니제르, 나이지리아, 말리, 부르키나파소, 모리타니아, 세네갈 등 서부 및 동부 사하라 국가들 중 착실한 운영을 하는 나라를 발견하기 어렵다. 궁핍 속에서 소수의 지배층은 더욱 독점하기 위하여 철과 피를 불사한다.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오랜만에 국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좌파 정권이 집권할 때도 이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파 정권의 좌파 야당 시절에는 흔한 장면이었는데. 역시 정치는 잘 바뀌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정치이게 요구할 수는 없다. 문제의 원인이 우파 집권인지 아니면 좌파 야당인지 애매하다. 아니면 절묘한 시너지 효과!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울 법도 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도 집권 시절에 마음껏 권력의 힘을 행사해 보는 건데 하고 말이다. 욱하는 심정을 억누르고 까칠한 상대와 소통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요즘은 마음에 안 든다고 사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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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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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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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 원인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지대하였다. 서양사상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제국이 그렇게 어이없이 일개 게르만족에게 무너진 사실에 대해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기본은 유명한 저작을 통해 로마의 멸망은 내생적 결함의 누적에 근본적 원인이 있고 외생적 충격은 방아쇠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통설로 굳어졌다.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저자 역시 기본에 동조한다.
 
피터 히더는 당대 로마사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반론을 편다. 로마제국은 내부적 한계를 내포하였지만 그럼에도 멸망 직전까지도 어느정도는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무수히 반복된 게르만족들의 연타에 의하여 제국이 회복될 기회를 놓치고 쇠약해져 멸망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성과를 유력한 증거로 뒷받침하고 있다.
 
"서로마제국은 분명 수많은 외부 집단들이 제국의 영토에 정착하고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멸망한 것이었다."(P.617)
 
"서로마제국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게르만 사회가 로마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제국의 힘에 대응하고 나섰기 때문에 몰락한 것이다." (P.648)
 
3세기 중반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로마가 큰 곤욕을 치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페르시아는 일시적으로 결지된 적대 세력이 아니라 로마처럼 강대한 문명국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를 상대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야 했고 서부전선 방어가 취약해졌다. 더욱이 강화된 군비와 과도한 징세 등으로 인한 수탈로 로마제국의 경제 사회적 토대는 급격히 취약해졌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즉 그런 어려움에도 로마 농촌의 경제력은 향상되었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결론적으로 과중한 세금에도 불구하고 제정 후기 로마의 농촌지역은 대체로 번영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P.170)
 
그래서 저자는 "제정 후기 로마는 기본적으로 성공한 국가였다"(P.206)고 평한다.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국가시스템의 한계에도 "4세기의 로마제국이 붕괴할 조짐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P.206)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로마제국에 대한 예찬론자로 볼 수는 없다. 다음 구절을 보자.
 
"로마제국은 영토만 넓었지 관료체계의 한계로 지주들이 중앙에 세금을 내고 정부군의 보호를 받는, 무력과 정치 담합이 얽히고설키는 지방자치체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았다" (P.352)
 
이 얼마나 혹독한 비판인가.
 
여기서 몇 가지 단편적인 사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다.

먼저 저자가 강조한 만족 상위집단의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게르만족은 단합된 정치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가 훈족의 침입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몇몇 유력한 상위집단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즉 준국가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알라리크의 고트족과 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양사에서 비수한 사례를 살펴보면 칭기즈칸의 몽골족과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그러하다. 로마제국은 고립된 부족들에 대한 통제는 성공했지만 강력한 상위집단들의 만족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은 이미 상실하였다.
 
스틸리코에 대한 평가는 양분된다. 그럼에도 스틸리코의 실각 이후 로마사는 그의 능력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이 된다. 고트족의 로마 약탈을 상기하자. 이렇게 보면 그는 이미 로마제국 역량의 한계를 인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게르만족과 공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선각적 지도자였다.
 
로마제국 붕괴의 도화선이 된 훈족에 대해 저자는 흉노족과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유라시아 초원의 양단을 횡단한다는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제국의 운명이 뒤바뀌었음은 인정한다. "훈족의 간접적인 영향은 아틸라가 입힌 직접적인 피해보다 제국에 한층 더 치명적이었다."(P.492). 더욱이 훈족 제국의 멸망은 "5세기 중반까지 서로제국의 기반이 되어준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P.519). 훈족의 지배하에 숨죽였던 게르만족들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로마에 대한 괴롭힘을 재개하였다. 즉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는 멸망에 이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역설적으로 훈족의 퇴장으로 그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여기서 서로마가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동로마는 왜 두 손을 놓고 있느냐는 불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무지의 소치임을 저자는 웅변한다. 과거에도 동로마는 서로마의 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468년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동 원정에 동로마는 거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곡창지대인 아프리카만 회복하면 서로마는 다시금 부활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 후 동로마의 재정도 위태로워졌고 반달족과 타협을 하는 외에 다른 방안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로마는 내적인 한계를 지닌 체제였지만 온갖 위기를 넘기면서도 성공적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훈족과 그 침입이 야기한 후의 게르만족들과의 대치 과정에서 국력을 상실하고 끝내 이를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동조할 지 여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그럼에도 파국을 극복할 기회가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측면을 중시하면 역시 내적인 붕괴론을 쉽게 배척하지 못한다.
 
이 책의 가치는 풍부하다. 서로마제국 후기와 멸망에 관한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 풍성한 읽을거리가 가득하며, 더구나 훈족과 게르만족들에 대한 미지의 사실을 획득하는 좋은 게기가 된다. 파란만장한 로마제국에 대한 관심이 큰 독자라면 일독할 가치는 매우 높다. <로마인이야기>에만 만족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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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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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의 유럽 침략
존 배그넬 베리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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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념할 사항이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는 1928년이다. 지금부터 무려 80여 년 전이다. 저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기에 활약했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의 의견이나 史實 가운데 일부는 현시점에서 보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동안 어떤 역사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구심이 완독 후에 내게 생겼다.
 
흔히 세계사 시간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항목으로 배우는 그 시기를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아시아에서 훈족이 서진하자 이를 피하여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로마제국으로 밀고 들어와 마침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일대 격변의 시기라고 하겠다. 동양사에서 비교하자면 5호16국 시대 정도라고 할까.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며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깨우치고 있다. 하기사 이 책은 저자가 행한 일련의 강의록을 편집한 것이므로 나 같은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보다 용이한 장점이 있다.
 
여기서 '바바리안'이라는 용어는 멸시적 의미가 아니라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 야만족과 비기독교도를 동시에 일컫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유력한 분파인 고트족(서고트족과 동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이 유럽 역사를 헤집어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만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반지>가 조상의 터전인 북구의 신화 및 전설과 많은 유사성을 내포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서기 375년에서 575년까지의 2백년 동안 유럽에 파고를 미쳤던 종족의 이름을 언급해 보자. 훈족(아시아계 유목민), 동고트족, 서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족, 색슨족, 수에비족 등. 이 모든 종족이 단지 흉포한 훈족의 침입에 겁을 먹어서 대대적인 부족 이동을 감행했을까? 침입자의 세력에 비하면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무력 면에서도 힘을 합치면 충분히 대결해 볼만할 텐데 말이다. 훈족의 서진 이전에 이미 바바리안들은 오늘의 독일과 동유럽 방면에서 서진을 감행할 충분한 동기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상 훈족은 이러한 추이를 앞당기는 방아쇠 구실을 하였을 따름이다. 훈족이 로마제국 해체 과정에서 촉진제와 지연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저자의 의견은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사실 역사를 참조하면 불가항력적인 순수한 외침에 의하여 국가가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체를 둘러싼 환경에는 언제나 건강에 적대적인 병인이 돌아다니고 있다. 인체가 튼튼하면 가벼운 감기에 그치지만 허약해지면 바로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로마제국이 이민족과 국경을 맞댄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초기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자체가 내부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기에 국경을 넘나드는 바바리안을 실체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오히려 바바리안에 제국의 운명을 맡기게끔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동로마는 멀쩡한데 서로마만 문을 닫은 이유를 저자는 군사편제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서로마에서는 군권이 총사령관 일인에게 집중되어 총사령관이 황제마저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휘두르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다섯명의 군사령관에게 군권이 배분되어 있어 상호견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권위와 권한이 상당 부분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P.46).

반달족이 서로마의 곡창지대인 아프리카를 접수한 과정을 보면 결국 제국의 배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서로마가 아프리카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바바리안에게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달왕국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로마는 연명에 급급하였고 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P.182-183). 이것이 세계사에서 반달족과 왕 가이세리크가 수행한 가장 큰 과업이다.
 
역사는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서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이 부적당함을 지적한다. 이는 로마제국 서부를 지칭하는 인습적인 표현이며 당시 로마인들은 오직 하나의 제국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오도아케르는 허울뿐인 서로마 황제를 단절시켰지만 여전히 로마제국의 형식을 인정하였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로마황제가 임명한 서로마(이탈리아)의 집정관이었다. 오도아케르를 축출한 동고트족의 테오데리크도 그 형식은 유지하였다. 그러면 이를 깨뜨린 것은 누구일까? 이 책에서는 명확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바로 프랑크족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과는 달리 출발부터 로마제국의 허울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크왕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분열되면서 유럽은 비로소 본격적인 중세시대로 이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찬란했던 로마문명의 후광을 일시에 암흑으로 몰아넣은 부정적인 인식 탓인지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시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싶다. 그러기에 오래된 이 책이 전혀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내용 구성이 난삽하지 않아 문외한도 비교적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다만 전문학술서와는 달리 체계가 다잡혀 있지는 않다는 약점은 강의록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면 너그러워진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은 저작을 읽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피터 히더의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출간이 반갑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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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