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니니 - 세기의 마에스트로 현대 예술의 거장
이덕희 지음 / 을유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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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감상 심화학습 제2편이다. 글렌 굴드에 이은 토스카니니. 강렬한 개성을 뿜어내 한 시대를 호령한 거인이다. 이런 유형의 저작은 위인전기와는 읽는 포인트가 다르다. 여기에서 거창하고 위대한 업적을 찾아내거나 본받을저믈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음악감상에 조금 더 깊숙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음악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연주가나 작곡가나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토스카니니의 개인적 삶의 이력은 흥미롭지만 신변잡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가 무척이나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정의 가치에 대한 숭고한 믿음을 지녔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이혼한 친구 및 사별했으나 곧 재혼한 친구와는 절교를 했다는 점도.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아직까지 지휘계의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양대 산맥이다. 요즘와서는 후자에 대한 인기가 더 높지만 말이다.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감상은 소위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나 기계적 현대사회의 반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낭만적 풍조가 지배하던 시절, 토스카니니는 이성에 바탕을 둔 음악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이었으며 그는 한치의 주저와 망설임도 허용하지 않고 평생을 진력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중후반기에 이르러 비합리적 음악 관행이 일소되었던 것이다. 조지 셀, 카라얀 등의 후배 지휘자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은 물론 최근의 대세인 시대악기 해석의 선구자는 바로 토스카니니이다.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는 라이벌이 될 수 없는 관계다. 토스카니니의 최전성기인 1930년대, 그는 60대에 접어든 노거장이었고, 푸르트벵글러는 이제 전성기의 길에 들어선 40대의 장년이었다. 게다가 푸르트벵글러의 명성은 독일내에 국한되었지만, 토스카니니는 유럽은 물론 미국마저 휩쓴 말할나위없는 최고의 거장이었다. 이는 이 책의 2부 '토스카니니와 빈필'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와 나치의 관계를 보면서 새삼 토스카니니에 대한 외경심이 우러나온다. 그의 철저한 반파시즘적 태도는 음악가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표가 될 만하다. 무솔리니가 토스카니니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렇게 노력할 정도였고 별도 파일로 관리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토스카니니는 음악 그 자체만을 지향하였다. 그 점에서 이른바 대중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주의를 쏟았던 일부 지휘자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에 얽힌 수많은 일화는 대부분 순수한 음악정신의 옹호와 관련된 것이 많다. 그토록 그는 순수했는데, 후인들은 그의 진면모를 알지 못하니 슬프기조차하다.

오늘날 그의 자취는 주로 만년에 NBC 교향악단과 남긴 음반을 통해 접하게 된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최고가 아니었고, 녹음은 너무 메마르고 각박하였다. 토스카니니는 자신의 음반을 싫어했다고 한다. 또 공연장에서 토스카니니 지휘를 들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늘날 전하는 음반의 사운드는 실연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부 악곡에서 그의 연주는 가히 전설로 남아있을 정도이니 그의 대단함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의 음반이 조금만 더 좋은 녹음으로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그저 허망한 바램에 그칠뿐.

* 토스카니니 지휘의 개인적 선호음반 (오페라는 빼고, 잘 모르니까)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레스피기의 로마삼부작
베르디의 레퀴엠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 (w/호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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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 / 정원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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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내가 경애하여 마지않는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다. 그동안 음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접했다면, 이제야 비로소 그의 육성을 듣는다.

리흐테르는 가까이하기 녹록치않은 인물이다. 그는 청자에게 바싹 의자를 당기지 않는다. 연주자를 화려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음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게 연주자의 진정한 자세라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보다 더 개성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서고 싶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반쯤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깊은 맛을 느끼게 주었던 리흐테르. 글렌 굴드 못지 않은 독특하지만 또다른 깊이를 보여준 바흐의 평균율.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비슬로키가 아니라 잔데를링 협연)에서 보여준 선입관을 깨뜨린 중후하며 강단있는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주력이었던 슈베르트, 슈만 등은 여전히 귀에 설다.

인간 리흐테르가 어떤지는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의 연주력과 해석의 배경에 대해서도. 그의 기이한 교육시절은 어떠한지도.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부는 그가 몽생종에게 털어놓은 회고담이다. 죽기 몇 해 전, 그는 뭔가를 예감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견딜 수 없어했는지도.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더 연주를 잘 한다." (P.126)

그의 연주 자세를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인기에 무덤덤했고, 자신의 연주에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타인의 연주에 대해서도 엄격함은 여전했다. 글렌 굴드, 미켈란젤리, 가브릴로프, 콜라르, 데즈 랑키 등등.

그는 연주자의 화려한 쇼맨십도 혐오하였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233)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P.245)

표피적 아름다움을 버렸기에 그의 음악은 성실하며 진실하다. 스스로를 안에 가두어 내적 충만을 얻었으므로 그의 터치는 대체로 화려하지않고 소박하며 묵직하다.

회고담을 통해서 그는 공연 취소를 자주 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불식시키려 하였다. 그는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누구처럼 전용 피아노와 전속 조율사, 또는 요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련시절 연주 활동을 보면 조그만 시골동네 마을 회관이나 학교에서도 즐겨 연주하였다. 다만 그는 몇 년 후의 스케줄을 예약하거나 꽉짜인 틀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자유로움에서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특히 흥마로운 점 중의 하나는 그와 프로코피에프, 그와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다. 프로코피에프와는 깊은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쇼스타코비치와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건 두 사람의 성격에도 연유한다. 외향적인 프로코피에프와 내성적인 쇼스타코비치. 요즘 연주자들은 프로코피에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의 독자는 리흐테르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가 놀라게 된다. 스스럼없이 동료 후배 연주가들과 어울려 즐겁게 보내는 그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후반부는 그가 반평생에 걸쳐 적어두었던 음악 수첩이다. 연주자는 대개 타인의 연주회 또는 음반을 잘 듣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는 틈만 나며 음악을 가까이 하였다. 여기서 나와 같은 일반 음악감상자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 그는 또 다르구나 하는 차이점과 아울러 공감대도.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몇 부분을 발췌한다.

먼저 말러의 6번 교향곡의 수첩을 들여다본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제발 1악장 다음에는 스케르초가 아니라 안단테로 연주해 주면 좋겠다! 그 편이 훨씬 낫다!" (P.292)

"나는 이 오페라를 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통째로 외우고 있다. 만일 이 작품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P.459)

프란츠 슈레커의 <아득한 울림>이라는 낯선 작품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다. 아울러 강렬한 호기심이 생긴다.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나도 한번 들어봐야지.

마지막으로 원본에 없는 서울 공연(1994.4.15/4.18) 감상평을 번역본에서 실어놓았다. 리흐테르가 방한 공연도 했던 모양이다. 정명훈 지휘의 오페라 살로메와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평하였는데, 오페라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휘자는 높게 평가했는데 괜시리 내 기분도 흐뭇해진다.

"하지만 지휘자가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과 매우 의지가 강하고 열정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P.499)
 
"지휘자는 갖가지 훌륭한 자질과 진정한 열정을 겸비하고 있다...이 지휘자가 한국의 청중을 상대로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500)

이제 리흐테르의 연주를 듣는 내 마음가짐은 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높이 평가했던 작곡가(림스키-코르사코프, 브리튼 등)나 연주자(올레그 카간, 나타샤 구트만, 갈리나 피사렌코! 등)의 음악에도 관심을 더 기울여 볼 생각이다.

이렇게 짤막하게 촌평을 남기지만 이 책은 일회성이 아닌 재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아울러 몽생종의 영상물도 꼭 찾아 보려고 한다. 비바 리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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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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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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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사학자 이덕일의 근래 역작이다. 남작으로 인한 옥석의 구분은 독자의 몫이지만 어쨌든 일반 독자의 호응을 받는 이가 이덕일이다.

역시 이덕일의 장점은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을 접근하여 재평가를 내리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필 유성룡일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추천하고 옹호한 이, <징비록>의 저자. 이것이 우리가 유성룡에 대해 대체로 아는 바다. 그래서 TV 사극을 보더라도 이순신은 주인공으로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는다면 유성룡은 무난한 중견 연기자가 맡는게 통상이었다.

저자는 사실 유성룡이야말로 임난 극복의 일등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재건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그 공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무대에 쓸쓸히 파묻힐수 밖에 없는 참담한 진실도 알려준다.

유성룡의 소위 동인의 거두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는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당파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동인 '이라는 딱지는 남들이 붙인 것이지 그는 당파에 무심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임란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서도 동과 서의 대립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일은 여기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유성룡의 반대라는 신화적 허구를 고찰한다.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하여 왜침을 대비못했다는 원죄라는 설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완벽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자신의 우너조인 율곡을 높이기 위한 요즈말로 역사왜곡을 시도한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역사는 결코 불편부당하지 않다. 작금 뉴라이트 일각에서 대안 역사교과서를 만든다고 법석이다. 거기서는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중대하게 다루어지고 백범 선생은 스쳐지나간다. 419의거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한 바도 제법 평가해준다 등등. 철저하게 극우파, 아니 친일파의 후손다운 자세다. 그래야 자신들의 뿌리가 당당할 수 있으니까.

유성룡의 새로운 면모는 눈부시다. 대동법을 선구적으로 시행하였고, 실효를 상시한 제승방략제를 진관제로 변경하였으며, 능력있는 이는 신분을 타파하고 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반도 병역의무를 이행하게 하였다. 극심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업을 통한 물자 교류를 장려하기도 한다.

이 모든 정책은 단기적으로 임란 극복을 위함이자 장기적으로 조선의 재생과 이상사회의 건설을 도모함이다. 반면 지배계급에는 중대한 특권침해로 다가왔다. 특히 신분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임란 위기의 종결이 임박하자 유성룡은 바로 개혁 역품을 맞아 향리로 쫓겨났고 그의 개혁은 수백년으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이는 사대부의 반발과 유성룡의 명성에 대한 임금 선조의 시기심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

수년전 이순신의 고뇌와 내면에 맞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오랜만에 서애 유성룡 역할을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게 되어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계는 어쩔수 없는 듯, 용두사미를 보게 된다.

부제처럼 유성룡은 '설득과 통합'으로 이 모든 결과를 낳았다.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았으니 힘의 우세를 과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국론 분열로 희대의 국란이 발생했으므로 사분오열된 민심과 국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반대파를 설득하고 백성을 통합하는데 주력하였다. 그에 공감하고 함께 일한 이가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이다. 그의 추천을 받아 크게 등용된 이가 권율, 이순신 등이다. 이것만 보아도 역사에 대한 그의 공적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 무심하였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아직 당파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천혁명과 대국민사기극이라는 극단적 주장이 난무한다. 어찌되었든 자기 세력을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강행한다. 잘하면 아우 대통령에 형님 국회의장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부부 대통령이 탄생한 남미나, 정권을 계속 붙잡기 위하여 대통령이 총리가 되는 러시아마저도 놀랄지 모르겠다.

새삼 유성룡 같은 이가 그리워짐은 나만의 소회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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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3.2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세상 중심에 서다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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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경과 경영학의 접목을 시도한 책이다. 구약의 느헤미야서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호감가는 유형의 저작은 아니지만, 직장 상사의 선물이라 예의상 한 번 읽어보다.

저자는 현재 온누리교회 목사이며, 이 책도 교회의 설교를 토대로 살을 붙여 펴낸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인 배경을 볼 때 매우 기독교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따라서 신자에게는 남달리 뜻깊고 큰 공감을 이끌어낼 것으로 생각된다.

바벨론의 유수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재건을 도모하지만 주변 부족의 견제로 수십년이 경과하도록 성을 쌓지 못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고위관료인 느헤미야가 사정을 알고서 자원하여 이스라엘로 와서 유대인들을 통합하고 독려하여 불과 52일만에 성을 쌓았다. 비로소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은 느헤미야서를 단락별로 풀이하고 해설을 더하며 이를 경영 리더십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목차도 기도로 시작하는 리더, 함께일하는 리더, 위기를 돌파하는 리더, 성공을 관리하는 리더, 개혁을 완성하는 리더로 되어 있다.

수많은 리더십 관련 서적에서 경천동지할 리더십의 비법을 찾아낼 것으로 생각하면 순진한 발상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속언 그대로다. 진리는 단순하다. 다만 이를 따르기 어려울 뿐이다. 모든 성공학, 경영학이 다 그렇다. 각종 재테크 책이 난무해도 성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며, 행하는 것과 성공하는 것도 별개다.

수많은 리더십 서적과의 차별점은 바로 '하나님'과 '기도'의 강조에 있다. 느헤미야는 결단에앞서 그리고 행동에 앞서 항상 기도를 드린다.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낸 후 마찬가지로 기도를 드린다. 그의 모든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잠시 몇 마디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은 당신 삶의 최우선 순위여야 하고, 당신 인생 모든 것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P.75)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믿습니다!"만 앞세우면서 치밀하게 자신이 해야 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사고사 나기 쉽다...하나님의 일을 할 때 조그마한 일이라도 철저히 준비하자." (P.77)
"하나님의 리더십 원칙은 다르다. 남보다 더 일하면서도 티내지 않는다. 특별한 대가를 더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 할 뿐이다." (P.83)

"진정한 헌신은 바쁜 사람이 없는 시간 쪼개어 살면서 드리는 것이다." (P.84)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섬기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P.146)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 자신의 예루살렘에 가서 살아야 한다." (P.156)

"진정한 국가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 되는 데서 온다. 말씀을 통한 영혼의 회복과 개혁, 거기서부터 축복이 시작된다." (P.170)

"오늘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게 피하고 싶은 곳,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는 도시 예루살렘이 있는가? 몸을 드리고, 나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곳이 있는가?" (P.215)

"교회는 항상 예배를 통한 살아있는 말씀 선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크고 작은 문제가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그것들을 끊임없이 여과해 나가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된다." (P.228)

기독교의 색채만 배제하면 꽤 그럴듯한 유익한 사고를 접하는 장점이 있다. 그것을 가려서 수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만.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적의 시각, 사마리아인과 아랍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이 예루살렘 성을 세우도록 허용해서는 당연히 안된다. 유대인은 어울려 사는 민족이 아니라 지나치게 배타적이다.

"백성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나가서 이들 이방민족들을 모두 이스라엘민족으로부터 분리시켰다." (P.227)는 기록은 그 편협성을 보여준다. 이를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저자는 부연하지만 그렇다면 종교차별도 아니란 말인가? 타종교를 관용 못하는 유대의 폐습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도 면면히 흐른다.

종교에 기반을 둔 각종 계몽서와 지침서 류를 날카로운 이성의 눈으로 되새김해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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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2008.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스트램프 제3권 - 용고개의 지하 신궁
천하패창 지음, 곰비임비 옮김 / 엠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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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공상(환상)에 빠져드는가? 혹자는 현실이 각박해질수록 환상에서 위안을 구한다고 말한다. 현실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잘 해보고 싶은데 모두가 탄복할만큼 당당하고 싶은데 내생적 내지 외생적 연유로 그러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공상에서라면 다르다. 그 무엇도 나를 가로막지 못한다. 모든 게 마음 먹은대로 행복한 결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현실과의 대비는 공상(환상)의 미덕을 한층 부풀린다. 그래서 공상과학소설과 공상과학영화가 우리를 사로잡는 모양이다. 아니 과거부터 그러하다. 옛날 신화는 무엇이며, 구운몽과 홍길동전은 무엇이란 말인가?

때로는 공상(환상)에의 탐닉이 지나쳐 현실을 망각하는 폐해가 나타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란 말인가. 장자는 이러한 혼돈의 시조격이다. 현실도피는 단순한 공상(환상) 외에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가능하다. 고상함을 자랑하는 예술을 통해서, 아니면 병적인 성적 갈구도 예외는 아니리라. 위험하게는 흡연과 음주, 그리고 마약에 이르기까지. 요즘이라면 인터넷 중독이 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활동하는 인구도 제법 있다고 한다. 하긴 사이버 세상이 더 현실같다고 하는데 이 정도야 약과가 아니겠는가.

인생은 철저한 현실 추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신처럼 완전하지 못하다. 아 그러고보니 가장 커다란 도피처인 종교를 깜빡하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극도로 지성적인 이도 교회에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 인간과 종교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은 무엇엔가 의지를 원한다. 그것이 근원적 불안감과 공허함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찰나적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틈으로 미신과 불신이 스며든다. 그리고 음모와 모함이 난무하며 인간사는 한층 복잡다단해진다.

거꾸로 환상이 없는 인간사회를 그려본다. 모두가 냉철한 이성에 의지하고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두는 삶을 영위한다. 모든 문장과 어휘는 지극히 합논리적이다. 불필요하게 문장을 꾸미거나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조차 필요성이 의심받는다. 직선이 판치는 세상, 여기에는 곡선이 없다. 별로 재미는 없을 듯 하다.

이 <고스트램프> 시리즈는 순이론적 시각으로는 영양가가 없는 유형이다.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기여할 법 하지 않다. 존재가치가 있나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베스트 셀러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책을 사고 읽는 근원적 동기가 궁금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날씨 좋은 날 공원에서 손잡고 다정하게 걷는 연인, 손에 풍선을 들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젊은 부부, 지팡이를 들었지만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

삶에 인위적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삶은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가 있다. 여백이 더 소중한 동양화처럼 삶도 그러하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조급함을 지그시 발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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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6.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