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 / 정원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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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내가 경애하여 마지않는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다. 그동안 음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접했다면, 이제야 비로소 그의 육성을 듣는다.

리흐테르는 가까이하기 녹록치않은 인물이다. 그는 청자에게 바싹 의자를 당기지 않는다. 연주자를 화려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음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게 연주자의 진정한 자세라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보다 더 개성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서고 싶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반쯤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깊은 맛을 느끼게 주었던 리흐테르. 글렌 굴드 못지 않은 독특하지만 또다른 깊이를 보여준 바흐의 평균율.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비슬로키가 아니라 잔데를링 협연)에서 보여준 선입관을 깨뜨린 중후하며 강단있는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주력이었던 슈베르트, 슈만 등은 여전히 귀에 설다.

인간 리흐테르가 어떤지는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의 연주력과 해석의 배경에 대해서도. 그의 기이한 교육시절은 어떠한지도.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부는 그가 몽생종에게 털어놓은 회고담이다. 죽기 몇 해 전, 그는 뭔가를 예감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견딜 수 없어했는지도.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더 연주를 잘 한다." (P.126)

그의 연주 자세를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인기에 무덤덤했고, 자신의 연주에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타인의 연주에 대해서도 엄격함은 여전했다. 글렌 굴드, 미켈란젤리, 가브릴로프, 콜라르, 데즈 랑키 등등.

그는 연주자의 화려한 쇼맨십도 혐오하였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233)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P.245)

표피적 아름다움을 버렸기에 그의 음악은 성실하며 진실하다. 스스로를 안에 가두어 내적 충만을 얻었으므로 그의 터치는 대체로 화려하지않고 소박하며 묵직하다.

회고담을 통해서 그는 공연 취소를 자주 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불식시키려 하였다. 그는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누구처럼 전용 피아노와 전속 조율사, 또는 요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련시절 연주 활동을 보면 조그만 시골동네 마을 회관이나 학교에서도 즐겨 연주하였다. 다만 그는 몇 년 후의 스케줄을 예약하거나 꽉짜인 틀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자유로움에서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특히 흥마로운 점 중의 하나는 그와 프로코피에프, 그와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다. 프로코피에프와는 깊은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쇼스타코비치와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건 두 사람의 성격에도 연유한다. 외향적인 프로코피에프와 내성적인 쇼스타코비치. 요즘 연주자들은 프로코피에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의 독자는 리흐테르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가 놀라게 된다. 스스럼없이 동료 후배 연주가들과 어울려 즐겁게 보내는 그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후반부는 그가 반평생에 걸쳐 적어두었던 음악 수첩이다. 연주자는 대개 타인의 연주회 또는 음반을 잘 듣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는 틈만 나며 음악을 가까이 하였다. 여기서 나와 같은 일반 음악감상자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 그는 또 다르구나 하는 차이점과 아울러 공감대도.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몇 부분을 발췌한다.

먼저 말러의 6번 교향곡의 수첩을 들여다본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제발 1악장 다음에는 스케르초가 아니라 안단테로 연주해 주면 좋겠다! 그 편이 훨씬 낫다!" (P.292)

"나는 이 오페라를 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통째로 외우고 있다. 만일 이 작품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P.459)

프란츠 슈레커의 <아득한 울림>이라는 낯선 작품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다. 아울러 강렬한 호기심이 생긴다.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나도 한번 들어봐야지.

마지막으로 원본에 없는 서울 공연(1994.4.15/4.18) 감상평을 번역본에서 실어놓았다. 리흐테르가 방한 공연도 했던 모양이다. 정명훈 지휘의 오페라 살로메와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평하였는데, 오페라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휘자는 높게 평가했는데 괜시리 내 기분도 흐뭇해진다.

"하지만 지휘자가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과 매우 의지가 강하고 열정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P.499)
 
"지휘자는 갖가지 훌륭한 자질과 진정한 열정을 겸비하고 있다...이 지휘자가 한국의 청중을 상대로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500)

이제 리흐테르의 연주를 듣는 내 마음가짐은 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높이 평가했던 작곡가(림스키-코르사코프, 브리튼 등)나 연주자(올레그 카간, 나타샤 구트만, 갈리나 피사렌코! 등)의 음악에도 관심을 더 기울여 볼 생각이다.

이렇게 짤막하게 촌평을 남기지만 이 책은 일회성이 아닌 재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아울러 몽생종의 영상물도 꼭 찾아 보려고 한다. 비바 리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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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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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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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사학자 이덕일의 근래 역작이다. 남작으로 인한 옥석의 구분은 독자의 몫이지만 어쨌든 일반 독자의 호응을 받는 이가 이덕일이다.

역시 이덕일의 장점은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을 접근하여 재평가를 내리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필 유성룡일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추천하고 옹호한 이, <징비록>의 저자. 이것이 우리가 유성룡에 대해 대체로 아는 바다. 그래서 TV 사극을 보더라도 이순신은 주인공으로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는다면 유성룡은 무난한 중견 연기자가 맡는게 통상이었다.

저자는 사실 유성룡이야말로 임난 극복의 일등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재건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그 공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무대에 쓸쓸히 파묻힐수 밖에 없는 참담한 진실도 알려준다.

유성룡의 소위 동인의 거두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는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당파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동인 '이라는 딱지는 남들이 붙인 것이지 그는 당파에 무심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임란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서도 동과 서의 대립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일은 여기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유성룡의 반대라는 신화적 허구를 고찰한다.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하여 왜침을 대비못했다는 원죄라는 설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완벽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자신의 우너조인 율곡을 높이기 위한 요즈말로 역사왜곡을 시도한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역사는 결코 불편부당하지 않다. 작금 뉴라이트 일각에서 대안 역사교과서를 만든다고 법석이다. 거기서는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중대하게 다루어지고 백범 선생은 스쳐지나간다. 419의거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한 바도 제법 평가해준다 등등. 철저하게 극우파, 아니 친일파의 후손다운 자세다. 그래야 자신들의 뿌리가 당당할 수 있으니까.

유성룡의 새로운 면모는 눈부시다. 대동법을 선구적으로 시행하였고, 실효를 상시한 제승방략제를 진관제로 변경하였으며, 능력있는 이는 신분을 타파하고 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반도 병역의무를 이행하게 하였다. 극심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업을 통한 물자 교류를 장려하기도 한다.

이 모든 정책은 단기적으로 임란 극복을 위함이자 장기적으로 조선의 재생과 이상사회의 건설을 도모함이다. 반면 지배계급에는 중대한 특권침해로 다가왔다. 특히 신분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임란 위기의 종결이 임박하자 유성룡은 바로 개혁 역품을 맞아 향리로 쫓겨났고 그의 개혁은 수백년으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이는 사대부의 반발과 유성룡의 명성에 대한 임금 선조의 시기심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

수년전 이순신의 고뇌와 내면에 맞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오랜만에 서애 유성룡 역할을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게 되어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계는 어쩔수 없는 듯, 용두사미를 보게 된다.

부제처럼 유성룡은 '설득과 통합'으로 이 모든 결과를 낳았다.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았으니 힘의 우세를 과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국론 분열로 희대의 국란이 발생했으므로 사분오열된 민심과 국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반대파를 설득하고 백성을 통합하는데 주력하였다. 그에 공감하고 함께 일한 이가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이다. 그의 추천을 받아 크게 등용된 이가 권율, 이순신 등이다. 이것만 보아도 역사에 대한 그의 공적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 무심하였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아직 당파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천혁명과 대국민사기극이라는 극단적 주장이 난무한다. 어찌되었든 자기 세력을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강행한다. 잘하면 아우 대통령에 형님 국회의장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부부 대통령이 탄생한 남미나, 정권을 계속 붙잡기 위하여 대통령이 총리가 되는 러시아마저도 놀랄지 모르겠다.

새삼 유성룡 같은 이가 그리워짐은 나만의 소회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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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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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중심에 서다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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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경과 경영학의 접목을 시도한 책이다. 구약의 느헤미야서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호감가는 유형의 저작은 아니지만, 직장 상사의 선물이라 예의상 한 번 읽어보다.

저자는 현재 온누리교회 목사이며, 이 책도 교회의 설교를 토대로 살을 붙여 펴낸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인 배경을 볼 때 매우 기독교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따라서 신자에게는 남달리 뜻깊고 큰 공감을 이끌어낼 것으로 생각된다.

바벨론의 유수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재건을 도모하지만 주변 부족의 견제로 수십년이 경과하도록 성을 쌓지 못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고위관료인 느헤미야가 사정을 알고서 자원하여 이스라엘로 와서 유대인들을 통합하고 독려하여 불과 52일만에 성을 쌓았다. 비로소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은 느헤미야서를 단락별로 풀이하고 해설을 더하며 이를 경영 리더십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목차도 기도로 시작하는 리더, 함께일하는 리더, 위기를 돌파하는 리더, 성공을 관리하는 리더, 개혁을 완성하는 리더로 되어 있다.

수많은 리더십 관련 서적에서 경천동지할 리더십의 비법을 찾아낼 것으로 생각하면 순진한 발상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속언 그대로다. 진리는 단순하다. 다만 이를 따르기 어려울 뿐이다. 모든 성공학, 경영학이 다 그렇다. 각종 재테크 책이 난무해도 성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며, 행하는 것과 성공하는 것도 별개다.

수많은 리더십 서적과의 차별점은 바로 '하나님'과 '기도'의 강조에 있다. 느헤미야는 결단에앞서 그리고 행동에 앞서 항상 기도를 드린다.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낸 후 마찬가지로 기도를 드린다. 그의 모든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잠시 몇 마디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은 당신 삶의 최우선 순위여야 하고, 당신 인생 모든 것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P.75)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믿습니다!"만 앞세우면서 치밀하게 자신이 해야 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사고사 나기 쉽다...하나님의 일을 할 때 조그마한 일이라도 철저히 준비하자." (P.77)
"하나님의 리더십 원칙은 다르다. 남보다 더 일하면서도 티내지 않는다. 특별한 대가를 더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 할 뿐이다." (P.83)

"진정한 헌신은 바쁜 사람이 없는 시간 쪼개어 살면서 드리는 것이다." (P.84)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섬기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P.146)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 자신의 예루살렘에 가서 살아야 한다." (P.156)

"진정한 국가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 되는 데서 온다. 말씀을 통한 영혼의 회복과 개혁, 거기서부터 축복이 시작된다." (P.170)

"오늘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게 피하고 싶은 곳,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는 도시 예루살렘이 있는가? 몸을 드리고, 나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곳이 있는가?" (P.215)

"교회는 항상 예배를 통한 살아있는 말씀 선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크고 작은 문제가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그것들을 끊임없이 여과해 나가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된다." (P.228)

기독교의 색채만 배제하면 꽤 그럴듯한 유익한 사고를 접하는 장점이 있다. 그것을 가려서 수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만.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적의 시각, 사마리아인과 아랍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이 예루살렘 성을 세우도록 허용해서는 당연히 안된다. 유대인은 어울려 사는 민족이 아니라 지나치게 배타적이다.

"백성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나가서 이들 이방민족들을 모두 이스라엘민족으로부터 분리시켰다." (P.227)는 기록은 그 편협성을 보여준다. 이를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저자는 부연하지만 그렇다면 종교차별도 아니란 말인가? 타종교를 관용 못하는 유대의 폐습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도 면면히 흐른다.

종교에 기반을 둔 각종 계몽서와 지침서 류를 날카로운 이성의 눈으로 되새김해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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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2008.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스트램프 제3권 - 용고개의 지하 신궁
천하패창 지음, 곰비임비 옮김 / 엠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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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왜 공상(환상)에 빠져드는가? 혹자는 현실이 각박해질수록 환상에서 위안을 구한다고 말한다. 현실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잘 해보고 싶은데 모두가 탄복할만큼 당당하고 싶은데 내생적 내지 외생적 연유로 그러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공상에서라면 다르다. 그 무엇도 나를 가로막지 못한다. 모든 게 마음 먹은대로 행복한 결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현실과의 대비는 공상(환상)의 미덕을 한층 부풀린다. 그래서 공상과학소설과 공상과학영화가 우리를 사로잡는 모양이다. 아니 과거부터 그러하다. 옛날 신화는 무엇이며, 구운몽과 홍길동전은 무엇이란 말인가?

때로는 공상(환상)에의 탐닉이 지나쳐 현실을 망각하는 폐해가 나타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란 말인가. 장자는 이러한 혼돈의 시조격이다. 현실도피는 단순한 공상(환상) 외에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가능하다. 고상함을 자랑하는 예술을 통해서, 아니면 병적인 성적 갈구도 예외는 아니리라. 위험하게는 흡연과 음주, 그리고 마약에 이르기까지. 요즘이라면 인터넷 중독이 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활동하는 인구도 제법 있다고 한다. 하긴 사이버 세상이 더 현실같다고 하는데 이 정도야 약과가 아니겠는가.

인생은 철저한 현실 추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신처럼 완전하지 못하다. 아 그러고보니 가장 커다란 도피처인 종교를 깜빡하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극도로 지성적인 이도 교회에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 인간과 종교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은 무엇엔가 의지를 원한다. 그것이 근원적 불안감과 공허함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찰나적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틈으로 미신과 불신이 스며든다. 그리고 음모와 모함이 난무하며 인간사는 한층 복잡다단해진다.

거꾸로 환상이 없는 인간사회를 그려본다. 모두가 냉철한 이성에 의지하고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두는 삶을 영위한다. 모든 문장과 어휘는 지극히 합논리적이다. 불필요하게 문장을 꾸미거나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조차 필요성이 의심받는다. 직선이 판치는 세상, 여기에는 곡선이 없다. 별로 재미는 없을 듯 하다.

이 <고스트램프> 시리즈는 순이론적 시각으로는 영양가가 없는 유형이다.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기여할 법 하지 않다. 존재가치가 있나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베스트 셀러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책을 사고 읽는 근원적 동기가 궁금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날씨 좋은 날 공원에서 손잡고 다정하게 걷는 연인, 손에 풍선을 들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젊은 부부, 지팡이를 들었지만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

삶에 인위적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삶은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가 있다. 여백이 더 소중한 동양화처럼 삶도 그러하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조급함을 지그시 발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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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6.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스트램프 제2권 - 정절국 여왕
천하패창 지음, 곰비임비 옮김 / 엠빈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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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히 읽게된 제1권의 재미에 옴팍 빠져들어 제2권을 펼쳐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 이후 이른바 판타지 장르가 독서계에 부담없이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종래에는 기획이나 출판을 꿈도 꾸지 못했을 작품들이 대거 출판되고 있다. 이 <고스트램프>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제1권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다소 구성이 산만한 면이 있었다. 배경 소개와 아울러 중국 동북부와 내륙 깊숙한 지역을 순차적으로 다루는 제1권에 비해 정절국 여왕의 무덤을 찾기 위한 타클라마칸 사막 여정에 전부 할애하는 제2권은 집중도가 높다고 하겠다. 스피디함과 보다 가벼움을 원하는 독자는 다소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미덕인 책장을 술술 넘기는 재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서역은 머나먼 이국이다. 중국사람들도 별로 가보지 않았고 문화와 언어, 민족도 상이한 이방인들의 따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사막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으니. 사하라와 마찬가지로 타클라마칸도 시초부터 황량한 곳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초기 문명시대와 오아시스 문명의 흔적이 모래속에 파묻힌채 그대로 전해오는 신비의 지역이기도 하다.

사막 유적을 찾다고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미국 국적의 중국계 2세가 탐험대를 조직하고, 주인공 호팔일과 뚱보가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 그들은 나름 충분한 준비를 하고 사막에 발을 내딛지만 저주가 내린 사막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초반부터 모래폭풍을 맞닥뜨려 고생하더니 서야고성 유적을 거쳐 찰격랍마 산에 들어간다. 여기서 기이한 독사의 습격을 받아 인명의 희생을 당하면서도 마침내 정절국 유적을 발견한다.

정절국의 역사적 배경은 알지 못한다. 작가가 단순히 이름만 빌려왔는지 아니면 가급적 전해오는 사실과 전설을 혼합했는지. 귀신동굴의 어두운 힘을 끌어쓰는데 격분한 신의 분노로 멸망하였다고 하는 귀동족과 마지막 여왕. 여와의 관을 지키는 사체화의 환각으로 일행의 수는 또 줄고 만다. 현실과 환각이 교묘히 교차하여 생사를 선택하게 만드는 절체의 순간. 그들은 간신히 무덤을 탈출하고 찰격랍마의 유적은 모래폭풍속에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사막의 저주가 풀린다 등등.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황당하기조차한 줄거리를 감칠맛 나게 구성하고 읽는 재미를 어떻게 제공하는가이다. 그 점이 천하패창의 글솜씨이자 <고스트램프>가 성공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번역자들의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번역도 큰 역할을 한다.

도시기담도 언급되지만 역시 이런 류의 작품 배경은 확실히 미지의 신비한 무대가 제격이다. 그런 점에서 내몽골, 곤륜산 그리고 타클라마칸 등이 장소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광활한 중국대륙 가운데도 오지 중의 오지인 탓이다. 잘 모르는 것은 두려움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게다가 사람은 두려움 가운데 호기심을 느끼는 희안한 취향을 지닌다.

각설하고 제3권을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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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3.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