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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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구입한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나와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걸 보니 작품성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선택의 결과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소설의 핵심적 시대 배경이 되는 1991년 5월. 그때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훈련 초기라 TV나 신문같은 매체는 접근조차 할 수없는 암담한 시기. 한편 덕분에 머릿속은 말끔해졌다. 어느덧 훈련도 중기로 접어들고 드디어 처음으로 훈련소 외부교정을 나가는 날이었다. 열심히 구령에 맞추어 군가를 복창하고 팔 다리를 흔들면서도 모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없었다. 그리고 길가 전봇대에서 '강경대 사건'라는 단어를 보았다. 흠, 근처 강경에도 대학이 있었군. 그런데 무슨 사건이 터졌나? 학내 분규? 그후 강경대 사건은 내 오랜 마음의 빚이었다. 사회가 그리 시끄러운데 신병 훈련을 핑계로 아무 생각없이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그것은 역사의 큰 줄기를 망각한 것과 진배없었다.

광고 카피를 보고 옳거니 손뼉을 쳤다. 드디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는 순간이구나. 전반부의 운동권 대학생 커플의 소꿉장난에서 시대적 정서상의 동질감을 발견하고 잠시 대학시절을 떠올리기도 하였는데. 후반부에서 급반전을 이루면서 소설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내 눈에는 이길용/강시우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지나친 작위성이 개재되었다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이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정민의 삼촌. 이들의 조우와 인연이 절묘하게 엮이고 비껴가는 장면에서 갑자기 지나친 주제의식의 과잉으로 문학의 본질적 측면이 훼손됨을 느낀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빛을 발해야 한다. 작가는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좀더 곰삭이는 편이 나았을 듯 하다. 아니면 좀 더 분량을 늘여 여유를 갖고 세부 기술에 할애하였다면, 또는 곁가지를 치고 줄기 그 자체만으로 들이대던가.

전반부의 주인공인 나는, 후반부에서 이길용/강시우의 행적을 그리는 조역으로 물러난다. 결국 이길용/강시우의 행적과 사상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아야하는가. 무슨 의미를? 파란만장한 삶에서 참과 거짓, 장주와 나비가 혼재하는 인생의 분별 불가능성을?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운동권에 대하여 마음의 부채를 지닌 듯하다. 세계 변혁을 꿈꾸고 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는 원대한 희망. 그것이 공산주의의 몰락과 운동권의 퇴조,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왜소해지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거대 담론이 자아내는 신비한 색채, 그것에 환상을 품었는가. 어쩌면 작가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햇살에 드러내어 한 시기를 정리하는 의도도 있는 듯.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통해 마음의 꺼림칙함을 벗어버리려는 나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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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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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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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잘 팔린 소설이다. 표지디자인도 그러하고 소재와 주인공도 많은 젊은 여성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나중에 TV 드라마의 소재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바로 직전에 읽은 소설과 이것과는 상대적 측면에서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남과 북, 고정간첩이 등장하는 대척점에 30대 초의 미혼여성의 삶과 사랑이 펼쳐진다. 그리고 지향점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비록 오은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문득 <오만과 편견>이나 <이성과 감성>이 떠오르는 것은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된 테마의 공통성일 것이다.

오은수를 포함한 소위 삼총사는 평범하다고 할 만한 사랑의 귀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도피처로 결혼을 하였다가 곧 이혼한 재인. 깨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 이제는 자식있는 이혼남이 된 그에게 다시 끌린 유희. 이렇게 오은수의 친구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오은수 자신은 어떠한가. 한동안 7년 연하의 대학생과 동거 비슷하게 지냈으나 결국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노처녀로 남는 게 두려워 재미는 없지만 무난한 남자와 결혼하려고 서두른다. 이들 세 친구의 모습을 우리 시대 미혼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섣부른 오해는 금물이다. 소설의 극적 효과를 위해 한 자리에 모았을 뿐이다.

도시의 독신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으로 무의식중에 절감한다. 얼핏 화려한 나날. 하지만 한 겹 안으로 들어가면 오은수처럼 불안감에 젖어 있다. 한해 두해 흐를수록 기회를 상실하고 영원히 뒤처질 것 같은. 이윽고 화려한 연애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필요해지는 시점. 여기서 요즘 여성들의 변화된 성의식을 느낄 수 있다. 신체건강한 성인여성으로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의 책임하에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념. 여기에는 필요시 자발적인 유혹도 포함된다.

오은수가 김영수와 결혼에 성공했다고 치자.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낼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아마 오은수 부모와 같이 처음엔 밋밋하지만 무난한, 나중에는 서로 남남처럼 지낼 것이다. 그것은 결혼을 화려한 싱글의 퇴락을 구해줄 피난처로 삼는데 연유한다. 남들도 다 하고 그냥그냥 살아가니까 별 고민없이 나도 하련다. 이것의 어려움은 상호간의 노력없이는 만족스러운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재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영수와 깨진 것은 오은수에게 다행이다.

오은수와 태오의 결합은 불가능하였을까? 아마 태오가 영화판에 쫓아다니지 않고 공부와 취업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실 오은수와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 이는 태오가 아니던가. 오은수는 사랑과 꿈만으로 인생을 올인 할 나이는 아니다. 반면 태오는 아직 실현여부에 대한 큰 고민없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바를 시도할 나이다. 이 둘의 비극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런 면에서 과감히 자신의 소망에 충실하려는 유희가 당장은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 수술로 풍만해진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며 뮤지컬 오디션에 또다시 도전할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어떨까? 유희는 내일도, 모레도 당당할 수 있을까?

여성이 독자적 주체로서 자리잡으려면 여러 요인을 충족시켜야 될 것으로 본다. 경제적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심리적(정신적) 자주성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하나가 평상시에 당당한 여권을 주장하다가 어떤 순간에는 남성에게 미루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지적이다. 결혼을 탈출구로, 도피처로 여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늦게 하는 것과 아예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연한 태도를 취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유희가 어쩌면 '당장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고 한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유로 재인이 비록 아픔을 한번 겪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정도를 밟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 도시는 외관상 눈부시게 화려하다. 거리에는 명품과 고급레스토랑으로 넘쳐난다. 게다가 온갖 치장을 아끼지 않는 선남선녀들은 왜 그리 넘쳐흐르는지.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새벽의 거리에 나가보라. 거기에는 삭막함만이 흩어져 있다. 지난밤의 흔적은 악취가 되어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렵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구석에는 쓰레기와 함께 신문지를 덮은 노숙자들이 아직 다른 세상의 감미로움에 젖어 있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 첫입은 달콤할지언정 뒷맛은 쓰디쓰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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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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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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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읽고 나서 관심이 간 소설이다. 솔직히 문예지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이렇게 모르고 있던 작품에 인지의 빛을 던져준 공로만은 인정하게 된다.

스토리는 엉뚱하면서도 터무니없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아직 첨예한 대치가 계속되는 분단국가라는 데 있다. 남파 고정간첩이었던 주인공이 스스로 간첩이라는 사실마저 입고 살던 그가 거의 이십년이 다 되어 급작스레 소환통지를 받으며, 만 하루동안에 겪게되는 내외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 썩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사실 또한 그러하다.

그럼 이 소설의 미덕은 무엇일까? 철저한 이중구조가 주는 대비와 그 속의 모순과 갈등이다. 간첩이자 소시민인 주인공, 본디 조국은 북이지만 현재는 남에서 뿌리내린채 살고 있다. 평화로와 보이지만 사실은 붕괴 직전의 부부관계. 부인 기영과 교사 소지, 학생 아영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 풍토.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거북함과 착잡함을 안겨준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라면 두말할 나위없이 성공작이다.

특히 마리와 대학생 성욱과 그 친구 간에 벌어지는 삼각정사의 묘사는 한편으로는 우리 소설의 표현 한계가 많이 넓어졌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소위 '야설'을 연상시킬 정도다. 하긴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부패를 덮어 가리는지 백주대낮에 드러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영에게 북도 나름대로 살 만한 곳이다. 조금더 불편하고 조금덜 자유롭지만 말이다. 그래서 처음 명령을 확인한 후 그는 월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만약 그가 혼자였다면 아마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빛'의 영역은 딸 현미에게 있다. 어쩌면 현미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내내 긍정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의 밝음은 기영은 남에 붙들어 놓는데 일익을 하였으면 또한 진국에게서 철이를 떼어놓게 될 것이다. 기영과 마리의 완전히 까발려진 관계가 장차 어찌 수습될지는 모른다. 다만 현미의 눈에는 간밤에 부모가 섹스를 했던가 아니면 다툼을 벌인 것으로 생각될 따름이다.

타이틀이 왜 '빛의 제국'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말미에 르네 마그리트의 연작이 언급되었다. 이런, 책표지가 바로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늘은 대낮, 집과 그 주변은 한밤.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기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리, 현미, 소지 등등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모두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겉으로는 빛나고 환하지만 내면으로는 음울하고 괴로워하는...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그림을 보고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연유는 이 사회에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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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7.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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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는 독특한 작가다. 특이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장 정통적인 소설작법을 구사하고 있다. 요즘 톡톡 튀는 신세대 작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지친 독자라면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다. 재기발람함을 압도하는 성실함과 우직함이 그의 소설 미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의 이면>에 이어 두번째 펼쳐든 작품에서도 그의 특성은 큰 변함이 없다. 칠년이 경과하였지만 그는 섯부른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사랑'을 다룬다. 그의 사랑이란 표피적이고 찰나적이지 않다. 어쩌다 술김에 하룻밤 같이 자고 가벼운 말다툼 끝에 절교를 선언하는 그런 유치함과는 비교하지 말자. 그의 사랑은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박부길과 기현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이 사랑의 뜨거운 표출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기현은 순미의 집에 찾아가는 무모함을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를 뜨겁게 맞아줄 것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사용설명서를 한번 훑어본다. 기본 작동이야 할줄 알지만 세부기능을 알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휴대폰 제품상자에는 두툼한 설명서가 따라온다. 반면 제대로 사랑하기 위하여 또는 잘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랑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퍽이나 선구적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대하여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P.220)

이 한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우현은 때죽나무와 소나무를 보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순미와의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남천의 야자나무는 기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사랑했던 사람의 사랑의 아이콘이다. 또한 우현과 순미를 잇는 연결점이기도 하다.

해설에서도 지적했듯이 기현-순미-우현의 단선적 삼각관계는 아버지-어머니-비서관으로 이어지는 선행 관계의 복사판이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기현은 나직이 되뇌인다. 상호간의 뜨겁고 격렬한 사랑에서 나무처럼 한발 떨어져서 고요하고 은은한 사랑까지. 일방적 사랑과 쌍방적 사랑은 어떠하며 다자간의 사랑은 무엇인가. 작중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혀 표출되지 않는 사랑도 있다.

이승우는 이지적이며 냉혹한 작가이다. 박부길이나 기현은 따뜻하고 바람직한 가족생활을 누리지 못하였다. 박부길은 어머니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를 불태우고 고향을 떠난다. 기현은 어떤가. 건조한 가정에서 우수한 형에게 가리워져 소외당하다가 형의 사진기를 들고 역시 가출한다. 그리고 이것의 파장으로 형은 두 다리를 잃고 정신적 장애마저 겪는다. 어설픈 해피엔딩의 미덕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현의 욕정을 달래주기 위하여 어머니가 그를 업고 연꽃시장을 드나드는 모습은 쓰디쓴 모정의 착잡함을 안겨준다.

그나마 사랑에 실패하는 전작에 비해 조금이나마 상황 호전의 여지가 엿보이는 점에서 일말의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한데 과연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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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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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공지영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이 있었다. 본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것인데,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전남편이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 아무리 작가가 사실을 토대로 한 허구라고 하여도 어리석은 우리네 범인(凡人)들은 여전히 사실과 허구를 혼동한다. 아니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소설들을 만든다...독자들의 의식 속에서 소설가가 쓴 글들은 너무 쉽게 글쓴이를 지향한다.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P.170~171)

지금 내가 읽는 <생의 이면>은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삶 자체를 재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범인(凡人)이 우대받는다. 소설과 사실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아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신선하지 못한 접근방식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리 나의 삶과 똑같을까 무르팍을 쳐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작중 박부길과 나는 삶의 환경과 궤적이 천양지차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와 내적 심리는 때로 나를 당혹하게 할 정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책장을 접은(난 인상 깊은 대목은 책장 끝은 살짝 접어놓는다. 그래야 나중에 재음미하거나 감사기를 적을 때 유용하다) 적은 처음이다.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성실함의 징표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아니었다...거기 적은 내용도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고...대부분 내면의 수상한 움직임들을...포착한 것들이었다.” (P.91)

지금은 거의 일기를 쓰지 않지만 한때나마 간헐적으로 몇 자 끄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의 일기 쓰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였다. 며칠에 한 번 뭔가 삶에 강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인식이 있을 때만.

박부길의 필화사건(P.92~93)을 읽다보니 지나간 나의 필화사건들이 떠오른다. 돌아보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다. 초등학교때 난 나름 문학소년 이었다. 그땐 상상력이 풍부했는지 시흥에 겨워 곧잘 시 몇 구절을 쓱 적어나가곤 하였다. 그때 노트가 아직 남아있으면 재밌으련만. 어머니께서 군인이신 첫째 작은아버지께 위문편지를 쓰라고 시켰는데, 난 쓰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재촉하다가 내가 편지는 쓰지 않고 시 나부랭이만 끄적거리니 화가 나신 당신은 내 시작(詩作) 노트를 빼앗아 확 찢어버리셨다. 그때 이후로 난 시를 쓰지 않는다.

고3 들어서 학기 초에 담임이 모두에게 편지를 쓰라고 지시한다. 수신자는 부모님. 내용은 이제 고3이 되었으니 정신 차려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겠다 등등. 다음날 난 편지를 써 가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이 불려나왔다. 일장 훈계 후 내일까지 써올 사람은 들어가라고 하였다.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담임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안 써올 거냐고 묻는다. 난 쓸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 해오던 것이라 별도로 편지를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손찌검이 뒤따랐고, 난 교무실로 끌려갔다. 난 결국 편지를 쓰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모든 오만의 기본 정서는 슬픔과 울분, 또는 스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임을 나는 안다.” (P.106)

나 역시 세상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여전히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세상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옛적의 은자(隱者)처럼. 고독하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한동안은 이러한 심경이 나를 약간의 우울증 증세로 몰고 가기도 하였다.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가 감당하기에 힘들다고 우려하던. 이제 나이가 제법 든 탓인가 예전같은 흔들림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쓰라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을 뿐.

“내가 살던 자취방은 이상스레 어두웠다...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불을 켜지 않고 살았다...나는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넓고 깊은 품에 푹 잠기기를 좋아했다. 어둠은 얼마나 아늑한지,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한지...”(P.110)

중학교 때 나도 내 방을 굴속같이 어둡게 한 채 종일을 보내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조명을 겨지 않고 커튼을 치면, 북향인 내 방은 그야말로 은둔지로서 제격이다. 대낮의 어둠속에서 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백일몽을 꿈꿀 수 있었다. 거기서는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래서일까 난 아직도 빛 보다는 어둠을 선호한다. 환한 빛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눈을 아프게 만든다.

“그 시절, 나는 아주 간절하게 동지를 찾고 있었다...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귀지 못했다. 누구에게서도 동질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P.112)

내가 찾은 인생의 반려자는 동질성을 지닌 동지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과도한 경건성과 정신성의 갈구로 나를 지치게 하지 않는. 어느 정도 나의 취미를 공유하고 그리고 적어도 나라고 하는 괴팍하기 그지없는 유형의 인간에 대해 조그마한 이해를 품은. 하지만 결혼에서 그런 거창한 포부를 찾는 이여, 일치감치 망상에서 벗어나라. 결혼은 말 그대로 생활을 그대에게 몰고 올 뿐.

"나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사랑은 평화라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그러나 나의 사랑은 도무지 평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그렇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 (P.216)

박부길과는 다르지만 내게도 사랑이 있었나보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탈 고독 욕구가 아니었을까 회의도 든다. 아니면 약간의 동정심과 정욕의 복합체. 뭐라고 지칭하건 내게 결혼이라는 걸 해보게 한건 그녀, 그리고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부담스러워 하였다. 그땐 난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몰랐다.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도 미처 없었다.

만물이 그러하듯 생(生)도 양면을 지닌다. 보통의 우리는 생의 긍정적인 면, 생의 밝은 면만을 주목하고 바라본다. 고통과 슬픔 없이는 참다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생의 드러나지 않은 면, 즉 어둠속에 숨어있는 부분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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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