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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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한 번은 봐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구입하였다. 독서 후 소감은 우선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것.

요즘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가 다가오면 언론에서 괜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국내 작가도 수상할 때가 되었다느니, 이번에는 아시아권이 차례가 되지 않겠냐 등등. 일부 작가도 부화뇌동에서 괜히 들썩거린단다. 가소롭다. 노벨문학상이 대륙별, 국가별 안배로 정해지는 나눠먹기라도 되는지. 그렇게 노벨상을 받고 싶으면 뛰어난 작품을 쓰던가. 솔직히 모 시인이 후보라는 사실조차 나는 아연해지고 만다. 이름은 자자하지만, 그 시인의 대표작이 뭐더라.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난 뭐지?

이 단편 모음집에서 레싱의 특질을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본다. 장편 작가에게 단편은 말 그대로 개인과 사회의 편린을 살짝 비쳐주는 수준이므로. 그럼에도 레싱을 통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런던의 속살, 런던의 사람사는 내음을 얼핏 맡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문체는 간결하고 화려하지 않다. 언뜻 평범하지만 오히려 고졸(古拙)하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노작가의 담담함과 사물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각이 배어나온다. 제목 그대로 관찰과 스케치를 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도 작가의 눈을 빌려 런던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아,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사는 방식은 우리랑 별 차이없네, 이런 동질감은 안도감을 자아낸다.

'데비와 줄리'에서 미혼모가 되어 낳은 아기를 몰래 버리는 어린 여성. 우리나라도 점차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문제다. '참새들'과 '공원의 즐거움'은 스케치라는 느낌에 가장 부합한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의 장면들, 왠지 웅장하고 극적이어야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대에, 진실은 작고 단순한데 있다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공명한다.

'흙구덩이'와 '진실'은 헝클어진 부부관계를 보여준다. 이혼이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 전자는 그래도 심리적 타격이 여전히 극심함을 나타낸다. 너무나 닮았기에 상반되는 여성에 이끌려 가정을 떠난 남자.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편안함이 소중하게 다가와 전처에게 다가온다. 전처의 선택은? '진실'은 이혼 부부와 각각의 재혼 파트너의 관계를 다룬다. 이혼하면 원수처럼 지내는 것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문화인지 이들은 친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주말동안 같이 지내면서 새로운 파트너들은 한 가지 불편하지만 명확한 진실, 즉 원래 커플이 다시금 재결합하는 게 옳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 실려있는 18편은 분량상 단편과 꽁트를 넘나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길게 어떤 것은 매우 짧게. 그야말로 스케치의 형식에 부합되게. 그렇다면 스케치의 정신은? 작가의 시선에 비친 런던 사람들, 나아가 현대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변이, 궤적이다.

사족. 적어도 단편소설의 수준은 국내가 매우 뛰어나다고 느꼈다. 우리 작가가 원래 단편에 강한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국내 단편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미묘한 암시, 극적인 반전과 진지한 결론 등 재밌으면서도 탁월한지 재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네 작가들이여, 더 힘을 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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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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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을 읽고난 후 갑자기 도킨스에 궁금증이 생겨 집어들었다. 실제 책을 구입한지는 꽤 됐지만서도. 덧붙이자면 이 짤막한 소감도 읽은지 두 달여만에 적는다.

출간된 지 삼십여년이 경과하였음에도 이 저작의 내용은 도전적이다. 진화의 주체는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개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보조하는 기계라고 한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몇십년 전에 이런 주장을 과학 이론으로 전개해 나가니 신심깊은 자와 보수파에서 질색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도킨스는 당당하다. 자신은 반대증거가 제시되면 언제든지 이 가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요는 아직까지는 이보다 유효적절한 이론은 없다는 것. 그의 이런 굳은 믿음이 드디어 신(神)의 영역에까지 침범한 것이 신작이다.

간단한 개념만 정리하면,

1. 이기적 유전자가 곧 이기적 개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 유전자는 복제자, 개체는 운반자.
3. 다윈의 진화론은 개체수준에서 유전자수준으로 조정되는 전제에서 타당하다.
4. 게임이론을 통해 이타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협력적 관계 생성 및 육성이 가능하다.
5. ESS : "독립된 이기적 단위의 집합이 어떻게 해서 단일 조직화된 전체를 닮게 되는가를 비로소 분명히 가르쳐 줄 것이다."(P.166)
6. Meme(밈) : 문화적 유전자

이 책은 분명 자연과학서다. 하지만 뛰어난 과학서가 으레 그러했듯이 기다란 인문학적 스펙트럼을 흩뿌리고 있다. 어쩌면 그 가치는 자신의 본래 영역보다도 훨씬 클지도 모른다.

진화론에 대한 거부감은 대체로 독실한 종교인일수록 큰 편이다. 사람이 어찌 원숭이의 후손일 수 있겠는가? 맞다. 사람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니라 단지 사촌일뿐이다. 선조는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단세포 생물이리라. 태초에 신이 있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논리는 쉽지만 근원적 약점이 있다. 신과 같은 완전체는 누가 창조하였는가? 그냥 저절로 있었다는 주장은 회의론자의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도킨스는 용의주도하다. 유전자의 맹목적 이기성을 제시한 다음, 그것이 공멸이 아닌 공생으로 귀결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개체간에는 게임이론을, 집단간에는 ESS 개념을 도입한다. 미워하지만 대의를 위하여 연합하는 인간들처럼 유전자와 개체는 그렇게 협력한다. 그리고 인류는 진화한다.

개정판은 끝장에서 잠시 후속작 <확장된 표현형>울 소개한다. 이기성이 유전자와 개체 수준을 뛰어넘어 타 개체를 조종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밈을 빼놓으면 안 된다. 아직은 정착된 개념은 아니다. 영원히 주변을 맴돌 수도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유전자만큼 직관적이지는 못하다. Gene 이 생물학적/유전학적 정보를 복제한다면, Meme 은 문화적 정보를 복제하여 후손에 남긴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아직은 미심쩍다.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개체는 단순한 운반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고 있는 복제자를 압도하여 타고난 이기성을 희석시키는 역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살은 유전자적 차원의 사건인지 아니면 개체수준의 사건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공헌은 분명하다. 비논리성이 존중받는 예술과는 달리 과학의 영역에서 적어도 합리적 사고의 세계에서는 그의 친구 이기적 유전자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준다면 말이다. 훗날 탁월한 대체이론이 등장한다면 그때 은퇴시켜도 된다. '불편한 진실'이란 용어는 앨 고어가 특허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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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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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뇌리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맹렬한 찬반의 논의가 봇물 터지듯 하던 한때가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논의의 중점은 먼저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면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비록 내전으로 피폐해져 있다고는 하나 절대적인 이슬람 신앙국가에 기독교를 포교(대외적으로는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방향인가? 그들의 종교는 무시하고 정복할 대상인가 아니면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종교상대론의 입장을 취할 것인가 등등.

또한 포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택하였을 경우라도 안전상의 중대한 위협이 예기되어 정부에서 여행금지를 권유하는(당시에는 강제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없었음을 상기하라) 상황에서 그렇게 지침을 무시하면서 강행하는 게 올바른 태도인가도 쟁점의 하나였다.

결국 인질이 된 그들을 풀려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는 테러단체와 협상을 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공식적으로는 몸값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믿으랴)하는 금전적 손해와 아울러 국제적 수모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위해 소모된 국민의 혈세에 대해 일반 국민들이 납득할 것인가? 비록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언론은 종교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인터넷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리도 광신적 신앙에 대해서는 종교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그 시점에 절묘한 타이밍을 갖고 등장하였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 달이 넘도록 간단한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였던 것은 종교 자체에 대한 공격인 도킨스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스스로도 쉽사리 방향을 정하지 못한데도 연유가 있다.

저자가 관심을 갖는 종교는 유대교와 이에 연원을 둔 기독교(개신교/가톨릭)와 이슬람이다. 물론 출생배경을 고려하면 기독교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신랄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도킨스는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종파가 득세하면서 소위 창조론이 과학의 옷을 입고 세력을 늘리기 시작하는 현상을 우려한다. 양의 껍질을 쓴 늑대처럼 교묘하게 과학으로 위장한 채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진화론을 옹호하고 창조론의 허구성을 설파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진화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면 언제라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현재로는 이를 지지하는 증거만이 발견되고 있으니 여전히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

그는 광신적인 종교가 문제라는 세간의 주장을 타파한다. 정상종교이건 광신이건 구분 없이 종교 자체가 수많은 인간문제의 원인이다. 아프간인도 종교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십자군과 수많은 종교전쟁 등이 이를 다 입증한다. 911사건도 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팔레스타인 사태도 종교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종교 없는 세상’이 되면 최소한 이로 인한 상당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종교의 순기능이 있으니 유구한 세월에 스러지지 않고 인류에게 남아있는 게 아닐까라는 소박한 반문이 있다.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뭔가 경건하고 모범적이며 존경할 만한 인품의 소유일거라는 환상이 내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비종교인이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그건 인간 자신의 도덕률에 따르면 된다고 한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 거짓말은 나쁘다, 불쌍한 이를 도와야한다 등은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온 본연의 가치다. 어찌 보면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약중독자는 마약의 해로움을 의식 못한다. 애연가에게는 담배의 해독을 아무리 귀 아프게 설교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이성적인 이들은 마약과 흡연, 지나친 음주 등을 멀리하고 있으므로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일단 믿고 몰입하면 맹목적이 되는. 그것이 비록 벼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도킨스는 은인자중하고 있는 세계의 무신론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요청하고 있다. 잘못된 믿음을 배격하고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만국의 무신론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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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잃어버린 지평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3
제임스 힐튼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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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국 정부는 운남성 중전(中甸)을 샹그릴라[샹그리라]로 개명하였다. 제임스 힐턴의 소설에 나오는 동명의 지역과 여러 면에서 가장 유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은 어떤 작품인지?

동양 사회에서 이상향의 대명사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서구 사회에서 그것은 유토피아에 해당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상향은 말 그대로 이상향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힐턴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가 사회적, 문화적 혼란에 빠졌을 때다. 소위 이 시기를 문학계에서는 ‘잃어버린 세대’ 또는 ‘길 잃은 세대’로 일컫는데, 전통적 가치관이 전쟁으로 일거에 무너짐에 따른 정신적 위기의 심각함을 지칭한다. 따라서 힐턴의 이 소설도 결국은 서구에서 상실한 이상향의 자치를 동양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모색의 한 과정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하필 샹그리라를 중국 티벳 동부에 비정하였는가? 20세기 초까지 서구는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세계 각지를 재발견하였다. 이제 세계의 웬만한 곳은 모두 탐사가 끝났고, 아프리카와 광대한 유라시아의 내륙 오지만이 미답사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밀림 지대는 문명사회로 설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결국은 이국적인 문화와 종교를 지닌 독자적인 문명지역, 히말라야와 곤륜 산맥의 험준함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죽음의 방패로 둘러싸여 접근이 어려운 티벳 지역이 보다 설득력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모국인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인도와 가깝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 용이한 측면도 있다.

여하튼 이 소설은 인물과 사건이 주인공이 아니다. 샹그리라의 존재가 작품의 핵심이다. 독자는 샹그리라의 위치, 운영, 가치관, 사람들에 대해 마치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등장인물들과 함께 서서히 접근해 가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생경하지만 그윽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등장인물 중 유독 콘웨이가 샹그리라의 후계자로 지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일찍이 옥스퍼드의 수재였던 그는 다재다능한 능력과 출중한 외국어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의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끼던 중 자신의 지향과 일치하는 샹그리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은 이미 탈 서구, 친 샹그리라적이었고, 그는 ‘세계의 광기’(P.92)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는 최고를 이상으로 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에 자주 비속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P.60)

그런 그에게 샹그리라는 점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샹그리라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거짓없는 진실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앞날이 대단히 매력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긴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태양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즉 깊은 고요함, 원숙한 예지, 명석한 추억의 매력 등을 얻게 될 것이오...” (P.199)
승정과의 대화에서 승정은 콘웨이에게 샹그리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며 그곳에 머물러 일원이 될 것을 권유한다. 승정이 묘사한 모습은 당대 서구의 ‘전쟁이나 욕망과 잔학 행위’와 대조적이다.
“즉 그는 예지에 있어서가 아니라 저속한 정열과 파괴의 의지에서 점차 강화되어가는 나라들을 보았소.” (P.203)

샹그리라의 매력은 너무나 확실하다.
“‘푸른 달’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모든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연못을 스쳐 흘러나오는 하프시코드의 은방울 같은 단조로운 곡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풍경과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P.228)

샹그리라는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다. 샹그리라는 인류의 예지와 미덕을 파괴에서 보존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서와 음악과 명상과 더불어 지내며 멸망해가는 시대의 덧없이 우아한 것을 보존하고 그 저속한 정열이 타버린 뒤 인류가 필요해 마지않는 예지를 찾아 구할 것이오. 우리는 소중히 보존하고 후세에 양도해야 될 유산이 있소.” (P.205)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종결되지 않았다. 이미 자체에 더 큰 전쟁의 배아를 잉태하고 있어 세계는 알지 못한 어둠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아마 세상이 아직 보지도 못하던 폭풍우가 되겠지요. 무력으로 안전할 수 없고, 권력에 의지해도 구할 수가 없고, 과학의 힘으로도 해명이 안 될 것이오, 모든 문명의 꽃들이 짓밟히고 모든 인간 거대한 혼미 속으로 던져질 때까지 폭풍우는 불어 날뛸 것이오.” (P.252)

세상이 어두울수록 샹그리라의 존재 의의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멋진 곳에서 지내는 삶은 제법 훌륭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콘웨이는 막판에 맬린슨과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차기 승정으로 샹그리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로 한 그는 무슨 연유로 그곳을 떠나는가?

샹그리라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상상과 관념 속의 산물일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 나타난 그 순간, 이미 이상향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샹그리라에 대한 맬린슨의 인식을 단순히 젊은 서구인의 어리석음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상향의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인식하였다.
“이런 곳은 박살이 나야 돼요. 불건강하고 불결해요. 더구나 당신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만약 사실이라면 더욱 구역질이 나요!...더러워요...” (P.269)

맬린슨과 로첸의 관계에 대하여 듣는 순간 콘웨이는 결심을 한다. 로첸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의 표출은 아닐 것이다. 그는 샹그리라가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린다. 완벽한 이상세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 그것을 로첸의 행위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현실과 최초로 직면했을 때, 모든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꿈이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다...아무리 자신이 분기해보아도 자신의 상상 세계의 회랑이 충격을 받아 비틀려나가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각은 붕괴되고 모든 것이 폐허로 화하려 하고 있었다.” (P.275)

샹그리라에 대한 콘웨이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맬린슨과 로첸과 더불어 탈출을 시도한다. 간난신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정신을 되찾은 후 그는 다시 혼자서 샹그리라를 찾아가려고 시도한다. 그의 시도가 성공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닌가. 언제나 현실과 이상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존재. 샹그리라는 머나먼 곳일 수도 있고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다.

제임스 힐턴은 당대 서구인들의 마음을 뿌리부터 흔들어놓는데 성공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갈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하지 않고 이상향의 미묘한 이중성의 진실을 갈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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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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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애란이라는 작가가 마음에 든다. 그의 문체와 스타일이 흥미롭다. 그는 설렁탕에 나오는 싸한 깍두기같은 존재다.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그러저러하게 끄적이는 글에서 그의 글은 한층 빛을 발한다.

<달려라 아비>에서부터 그의 개성은 마니아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신작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작과 동질감을 자아낸다. 언제나 무대는 중하층의 평범한 가정과 개인. TV 드라마의 배경이 대체로 부유한 상류층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일부 여성작가들의 골드 미스급 솔로 생활과도 차이는 뚜렷하다. 소설의 배경이 이렇게 침침함은 그것이 소설 구성에서 유리한 연유인지 아니면 원래 소설가들이 가난한 탓인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김애란의 글쓰기는 무겁고 울적하지 않다. 어깨가 축 처질만한 일도 그의 손끝에 걸리면 '그래도 한번 힘을 내볼까'하고 사뿐히 발을 내디딜수 있도록 바뀐다. 놀라운 능력이다. 슬픔과 고통을 슬쩍 빗겨나서 발아래 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은 단순한 상상력만으로 그려낼 수 있지 않다. 그 점이 그의 장점이자 내가 좋아하는 특질이다.

'도도한 생활'은 반지하방에 들어앉은 피아노라는 소재를 사용한다. 반지하방이 어떤지 경험해 본 사람은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피아노에 어울리지 않으며, 피아노에 나쁜지를. 그래도 생활은 남루할지언정 자존심은 도도하게 지켜야 한다.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내용. 그래서 슬픔이 더욱 강조된다. 절묘한 엮음의 미학.

'침이 고인다'는 이미 창작과비평에서 읽은 바 있다. 학원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주인공. 불쑥 찾아온 학교후배. 마음약한 그는 원룸에 후배를 들이고 만다. 풍선껌을 씹으며 어릴적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후배는 그때를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한다. 버림받음과 침의 관계.후배는 다시 침이 고이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그에게는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혼자있는 자유로움, 나만의 것이 점차 사라지면 옆의 존재는 부대끼는 법. 사회생활로 심신이 지쳐있는 그에게 후배의 생리자국은 도화선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계기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그에게는 후배랑 같이 지내는게 불편하다는 암묵적 사실. 후배가 떠난 자신의 방에서 모처럼 여유있게 영화도 다운받는 모습은 오히려 개체적 삶에 익숙하고 편안해하는 현대인의 삶을 잘 드러내준다.

'성탄특선'은 시니컬하다. 가난하기에 오누이가 방 하나에 살고 있는 상황. 여동생은 애인과 마음졸이지 않는 멋진 성탄맞이 섹스를 하고자 이리저리 시내를 헤맨다. 그런데 성탄대목에 보텔은 모두 동이 나고 아침이 다되어 겨우 추레한 여인숙 방을 구할 수 있을 뿐. 거기서 몸을 섞을 기분이 나지 않아 아침일찍 귀가한다. 여동생은 괴롭고 지쳐있지만, 오빠는 처음 같이 보내는 성탄의 시간이 과히 나쁘지 않다. 확실히 보다 젊은층의 성의식은 많이 변모했나보다. 결혼과 상관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것도 이십대 후반의 여성작가의 글에서. 하긴 전에 읽은 정이현의 작품도 그러했지만. 이걸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일부 문학에 등장하는 에외적 현상의 과대포장일까. 하여튼 젊은층의 성풍속도라는 점에서 재밌다.

김애란은 어린 작가다. 그의 글에서는 경쾌함과 싱싱함이 뿜어나온다. 이런 싱싱함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애란 만의 미덕이다. 시간이 지나 그가 변하듯 그의 글도 변화하겠지만 후에 이런 미덕을 상실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계속 김애란을 좋아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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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