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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3 - 스텝에 부는 바람 ㅣ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덧 <나는 걷는다>도 제3권을 펼치게 되었고 지은이도 종착지 시안을 향한 쉼없는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기존 두 권이 각 1년간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한 권에 2년의 여정을 같이 수록했다. 왜 그럴까하는 의구심은 지은이와 함께 중국을 횡단하면 자연 알게 된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후예와는 달리 중국인은 대개 외부인에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반응을 보였다. 올리비에는 도보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의 살내음에 부딪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중국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중국어에 무지했기에 이전의 국가와는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데 한계가 쉽게 노정된 문제도 자못 크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지? 나도 며칠전에 50km 못 미치는 거리를 걸은 경험이 있다. 가벼운 차림에 시원한 밤에 걸었는데도 간신히 끝내고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나이가 예순이 넘은 분이 도대체 왜? 여기 그의 답변이 있다.
"아직 다리도 튼튼하고, 눈도 밝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p.171)
에필로그에서 또다시 피력한 대로 서양에서 노인은 변두리로 밀려나는 퇴물의 존재다. 저자는 자신의 젊음을 다른 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투루판, 하밀, 선선 등 귀에 익은 지명이 나오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 다시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올리비에가 진정한 여행을 한 것이라면 나는 단지 짧은 관광객에 불과하였다. 난 그저 중국이라는 커다란 수박의 작은 겉을 핥은데 지나지 않았다. 반면 그는 잘 익은 수박 속살을 마음껏 향유하였다. 그가 본 중국이 기대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중국의 진면모라면 말이다.
그는 "영원한 중국"의 고갱이를 찾아냈다. 거대한 기념물이 아니라 "오로지 농부들의 성실함과 용기가 원동력이 되어 만들어낸 작품", "살아서 변화하며 매년 더 아름다워지는(p.400)" 그것. "위대한 작품이란 반드시 피와 눈물을 치러야 하고, 그 슬픔만큼 가치를 가질 수 있다"라는 그릇된 생각에 화가 치미는 저자에게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심지어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전쟁과 압제를 칭송하고, 스위스가 인류문화에 기여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하는 엉터리들도 난무한다.
실크로드를 도보하면서 무언가 뜻깊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한 저자는 언명된 목표에 비하면 그다지 성과가 미약한 듯 보인다. 수백년의 세월과 인간사를 겪으며 무수한 유적이 황폐해졌다. 조금씩 각성이 생기지만 마슬로우의 욕구단계론이나 위생요인 대비 만족요인을 보더라도 그들에게 일단은 먹고사는 게 우선이다. 그들을 그리 비난하지는 말자. 우리 자신도 언제부터 조상의 유산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육십살이 넘은 프랑스의 은퇴한 신문기자, 그는 4년간에 걸쳐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 2천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하였다. 이 간단한 한 문장에 담기에는 그가 맞닥뜨린 난관과 고초는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다. 짝짝짝!!!
그리고 이 한 마디가 얼핏 무모해 보이는 도보여행자의 정신을 대변하고 일깨운다.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 장-자크 루소, <에밀> 중에서" (p.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