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3 - 인도차이나 남부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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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통해 본 한비야의 삶은 도전과 새로움의 추구의 연속이다. 그녀의 도전정신은 평균적 남성들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녀의 무모하게도 비치는 개척정신의 근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단순한 호기심일까?

본인의 말대로 "불확실성과 낯섬을 대단히 즐기는"(P.185) 그녀도 "오래된 것이 갖는 소중함"(P.185)에 대한 인식도 빠뜨리지 않는다. "매일 사용하며 손때 묻은 것, ...앞뒷장이 다 찢어진 세계지도와 일기장."

텔레비전 커피 광고에 유사한 내용이 나온 적 있다. 업무는 새로운 걸 추구하더라도 일상은 손에 익은 것을 택한다는. 현대 사회는 무서운 스피드로 달리고 새로움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잠깐 정신을 가다듬어 보면, 인간 자체는 새로움 보다는 익숙함에 더 연결고리가 있다. 요새 관심가지는 도보(걷기)에서도 멋있는 새 신발보다는 발에 익은 신발을 더 권하고 있음을 떠올린다.

한비야가 이끄는 '월드비전' 구호단체의 태동은 그녀의 여행중에 형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대적으로 오지와 분쟁 지역을 여행한 탓인지 기아와 고통으로 허덕대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어른들도 안쓰러운데 하물며 어린이들은 더더구나 눈시울을 시큰거리게 한다. 한 달에 우리돈 천 원도 안되는 수업료가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미얀마 아이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방글라데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엾다는 생각보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앞서는"(P.218) 것은 비단 한비야 뿐만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거쳐 태국과 미얀마를 지나고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을 통과하고 카라코람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간 한비야. 여행은 그녀에게 인내와 안목과 체험을 안겨준 동시에 분노와 의기소침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의욕을 다진다.

"길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가...그 낯선 길에는 무슨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설렌다."

나도 한비야 못지않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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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6.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2 - 중남아메리카 알래스카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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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비야의 글은 시기순대로 작성되지는 않는다. 가장 나중에 한 아프리카가 제1권에 나오고 티베트가 가장 마지막으로 출판된 걸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기억을 더듬어 과거를 회상하듯이 말이다.

어릴 적에 삼중당문고로 나온 김찬삼 세계여행기를 인상깊게 읽곤 하였다. 특히 중남미를 다룬 부분이 여전히 뇌리에 남는다. 칠레였나, 그 지역 아가씨들이 너무 미인이라는. 그래서 로맨스가 생길 뻔하였다는. 그때부터 나는 세계여행을 꿈꾸었고 남미는 나의 로망이 되었다. 대학 들어가서 제2외국어를 생뚱맞게 스페인어로 한 게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비록 그 꿈은 여전히 꿈으로만 머물고 있지만.

칠레의 아타카마사막과 엘 타티오 간헐천, 페루의 잉카유적과 티티카카호수, 멕시코의 아즈텍유적, 과테말라의 마야유적 등 이름만 들어도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쫙 펼쳐진다.

한비야의 특기는 그 자연스러운 활달함 내지 넉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어 실력이 큰 보탬이 되기는 했겠지만 성격의 뒷받침 없이는 지역 주민의 마을에서 며칠간이나 민박을 하는 등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렇게 보면 기본적인 현지언어 구사능력, 성격, 체력, 없어서 못 먹는 입맛 등의 요건에 운(運)을 보태야 성공적인 해외 배낭여행이 가능한 셈인가.

또 하나 지배층보다는 민초에 대한 증대하는 관심과 우려와 동정심은 그의 앞날을 예상하는 기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흥미롭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구김살없이 살아가는 가리푸나 마을의 훌리안 가족의 이야기와 그 바로 전의 설사병으로 죽은 꼬마 수엘라는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들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하며 따라서 조그마한 관심도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여행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한다. 한비야도 이 여행을 통하여 난 사람(아니면 든 사람?)에서 된 사람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관광을 넘어선 여행은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음 권에서 한비야는 인도·동남아시아를 순회한다고 한다. 빨리 동참하고 싶다.

그런데 개정판이 나오면서 표지그림이 바뀌었다. 내가 본 책은 한비야가 초록색 인디오 치마를 펼치는 모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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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6.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 -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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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나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는다. 여행 안내서로 이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책도 감히 없을 것으로 단언한다. 덕택에 한비야는 일거에 유명인으로 급부상하고 현재는 비중있는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당시를 돌이켜본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는 잔치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선진국 모임인 OECD에도 가입하고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을 향해 맹질주를 하고 있을 즈음, 그동안 좁은 국내에 갇혀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외여행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고 관련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때 한비야의 책이 시중에 나온 것이다. 한비야 이전과 이후에도 좋은 여행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천운은 존재하나보다.

이제 웬만한 이는 누구나 한 번은 다 보았던 이 책을 나는 새삼스레 처음 펼친다. 그동안 대중적이고 진부한 것에 대한 맹목적 거부심리의 발동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여전히 첫 페이지부터 확 풍기는 상업성에의 배려. 이란에서 반정부 운동가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 그건 시선을 잡아보려는 얄팍한 시도가 아닌가.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읽은 후라 그 극적인 대비는 더욱 부정적으로 비친다.

더구나 언제 어떻게 여정이 이루어지는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는 산만한 구성. 전체 분량의 삼분지일이나 지나서야 여행의 첫걸음으로 돌아간다. 자아를 한층 성숙시키는 것이 건강한 여행(특히 한비야처럼 오지탐험을 통해서)이 권장되는 주된 이유라고 할 때, 여행기의 순서는 역시 시간배열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내가 너무 삐딱한 시각으로 이 책을 대하는 게 아닌가 자문해 본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변했지만 배낭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한 나 같은 촌놈에게는 한비야가 겪는 갖가지 에피소드, 낯설지만 흥미로운 이국적 풍모, 귀가 솔깃한 정보는 여전히 새롭다. 워낙 저개발국가인 탓일까. 지금 당장 그 나라에 가더라도 크게 변해 있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오지 배낭여행을 하더라도 한비야처럼 즐겁고 활기차게 해낼 수 있을 자신감은 없다. 그만큼 그녀는 능력과 성격은 배낭여행의 정신에 딱 들어맞는다. 어딜 가든 현지인처럼 먹고 자고 하는 것은 말로는 쉽지 실제로는 너무나 어려운 이이다. 치안과 위생이 빈약한 오지는 더더군다나 위험하다.

처음의 어수선함과 못마땅함은 책장을 넘길수록 미지의 세계로의 흥미로움에 함몰되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시리즈의 나머지 책들도 끝까지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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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6.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아메리칸 버티고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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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번 발생한 일은 다시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고 하던가. 베르나르의 책에서 잠시 손을 떼자마자 또다른 베르나르가 내게 바싹 다가온다. 심히 당황스럽게도. 원래는 베르나르의 제2권과 제3권 사이의 막간극으로 볼 예정이었다. 베르나르도 일년의 시차를 둔 것처럼 나도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게 예의가 아닐까 싶어서.

일단 여기 베르나르는 경력이 화려하다. 철학자에 저널리스트이며,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게다가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단다. 그런 그가 미국의 '월간 애틀랜틱'이라는 잡지사의 의뢰를 받고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발자취를 좇아 21세기의 미국을 재조명한다는 원대한 기획안에 따라.

자동차를 몰고 동북부 뉴포트에서 시애틀까지 일차 미대륙을 횡단하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서 중남부 방면으로 재차 역횡단을 하는 그의 여정은 미국 사회를 나름대로 구석구석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의 산물이다.

토크빌은 내게 있어 이름만이 자자한 대가이다. 그의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이 미국에서는 매우 유명하고 심도깊게 연구되는 모양이지만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온지 불과 수 년 안쪽이다. 또 안티아메리카니즘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은연중 거부감을 갖게 만든다.

토크빌이 동료와 함께 신생 미국에 온 것이 미국의 교도소를 시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베르나르도 미국의 여러 교도소에 관심을 기울인다. 뉴욕의 라이커스 아일랜드에서 쿠바의 관타나모 형무소까지. 사실 관타나모가 쿠바 영토에 있는 줄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매년 형식적인 4천달러의 임차료를 전달하는 가식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미국. 땅주인이 거부하는데 힘센 세입자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주저앉는 형국이다. 기가 찰 노릇..

민주주의의 아성인 동시에 불법감금이 자행되는 나라. 자유라는 미명하에 총기소지와 거래가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나라. 미국인 히스패닉이 멕시코인 히스패닉을 단속하는 나라. 베르나르와 함께 나도 미국에 어지러움을 느낀다. 아직까지 깊은 뿌리를 남기는 인종차별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안즈에서 피해자는 가난한 자와 흑인들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대부분 흑인이다.

역시 미국은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개의 얼굴"(p.380)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미국의 면모는 외부 관찰자는 물론 미국인 자신들에게도 현기증을 안겨준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래서 베르나르는 책 제목을 '미국의 현기증 or 현기증나는 미국'이라고 붙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국의 미덕이 악덕만큼 아니 그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번영과 존립은 인류사의 수치가 될 것이므로. 베르나르는 "미국이 절망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p.389). "내부의 문명 전쟁이나 분리의 위험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p.389)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체제에 대하여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는 베르나르이지만 미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보다 긍정적이다. "새로운 질서에 따라 정돈된 옛 파라미터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구성"(p.396)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은 언제나 추상적으로 존재했었다. 언제나 미국은, 어떤 기억을 공유했다기보다는 어떤 욕망과 이념을 공유하는 것 외에 다른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 기원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이었다." (p.397)

"미국은 실체 없는 국가다...한마디로 미국은 불가지론적인 국가다." (p.398)

이렇게 보면 미국에 대하여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저자 베르나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미국을 들여다보는 우리들도 어지럽다. 미국 시스템 자체도 현기증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미국인은 어떨까? 그들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지 않으려나 궁금하다. 

그나저나 또다른 베르나르가 이 책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 사람은 뚜벅이로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여기서는 안락하게 자동차로 미국을 돌아다닌다. 숲을 보는 이와 나무를 보는 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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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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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3 - 스텝에 부는 바람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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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덧 <나는 걷는다>도 제3권을 펼치게 되었고 지은이도 종착지 시안을 향한 쉼없는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기존 두 권이 각 1년간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한 권에 2년의 여정을 같이 수록했다. 왜 그럴까하는 의구심은 지은이와 함께 중국을 횡단하면 자연 알게 된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후예와는 달리 중국인은 대개 외부인에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반응을 보였다. 올리비에는 도보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의 살내음에 부딪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중국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중국어에 무지했기에 이전의 국가와는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데 한계가 쉽게 노정된 문제도 자못 크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지? 나도 며칠전에 50km 못 미치는 거리를 걸은 경험이 있다. 가벼운 차림에 시원한 밤에 걸었는데도 간신히 끝내고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나이가 예순이 넘은 분이 도대체 왜? 여기 그의 답변이 있다.

"아직 다리도 튼튼하고, 눈도 밝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p.171)

에필로그에서 또다시 피력한 대로 서양에서 노인은 변두리로 밀려나는 퇴물의 존재다. 저자는 자신의 젊음을 다른 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투루판, 하밀, 선선 등 귀에 익은 지명이 나오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 다시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올리비에가 진정한 여행을 한 것이라면 나는 단지 짧은 관광객에 불과하였다. 난 그저 중국이라는 커다란 수박의 작은 겉을 핥은데 지나지 않았다. 반면 그는 잘 익은 수박 속살을 마음껏 향유하였다. 그가 본 중국이 기대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중국의 진면모라면 말이다.

그는 "영원한 중국"의 고갱이를 찾아냈다. 거대한 기념물이 아니라 "오로지 농부들의 성실함과 용기가 원동력이 되어 만들어낸 작품", "살아서 변화하며 매년 더 아름다워지는(p.400)" 그것. "위대한 작품이란 반드시 피와 눈물을 치러야 하고, 그 슬픔만큼 가치를 가질 수 있다"라는 그릇된 생각에 화가 치미는 저자에게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심지어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전쟁과 압제를 칭송하고, 스위스가 인류문화에 기여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하는 엉터리들도 난무한다.

실크로드를 도보하면서 무언가 뜻깊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한 저자는 언명된 목표에 비하면 그다지 성과가 미약한 듯 보인다. 수백년의 세월과 인간사를 겪으며 무수한 유적이 황폐해졌다. 조금씩 각성이 생기지만 마슬로우의 욕구단계론이나 위생요인 대비 만족요인을 보더라도 그들에게 일단은 먹고사는 게 우선이다. 그들을 그리 비난하지는 말자. 우리 자신도 언제부터 조상의 유산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육십살이 넘은 프랑스의 은퇴한 신문기자, 그는 4년간에 걸쳐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 2천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하였다. 이 간단한 한 문장에 담기에는 그가 맞닥뜨린 난관과 고초는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다. 짝짝짝!!!

그리고 이 한 마디가 얼핏 무모해 보이는 도보여행자의 정신을 대변하고 일깨운다.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 장-자크 루소, <에밀> 중에서"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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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5.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