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국 도시희극선 - 구두장이의 축일, 동쪽으로, 각자 기질대로, 왈패 아가씨 ㅣ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41
토머스 데커 외 지음, 이미영 옮김 / 아카넷 / 2013년 7월
평점 :
<수록작품>
1. 구두장이의 축일 (토머스 데커)
2. 동쪽으로 (조지 채프먼, 벤 존슨, 존 마스턴)
3. 각자 기질대로 (벤 존슨)
4. 왈패 아가씨 (토머스 데커, 존 미들턴)
약 700면에 가까운 두툼한 양장본. 겉표지에는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이라는 부기가 달려있다. 누가 봐도 심오한 학술서 번역본이구나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셰익스피어 당대의 유명한 희극 모음집이다. 얄팍한 단행본으로 분책하여 나오면 딱 좋겠지만 이 책이 발간된 십년 전만해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만하다. 현재까지도 <왈패 아가씨> 정도만 별도 번역본이 <왈가닥 여자>라는 표제로 시중에 볼 수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은 도시희극의 대표작만 수록하였다. 도시희극은 신화 또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왕과 귀족계급을 작품소재로 삼지 않고, 17세기 영국 사회, 그 중에서도 대도시 런던에 살고 있는 몰락한 귀족, 신흥 중산층 상인 및 수공업자, 매춘부, 사기꾼 등의 실제적 인물을 등장시켜 기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는 와중에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벌이는 이러저러한 행동 양태를 희극적으로 그려낸 극작품을 지칭한다.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개별 희극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내용을 들여다보고 기록을 남긴다면 너무 분량이 많아질 것이므로 지양하고 수록작 네 편을 뭉뚱그려 살펴보고자 한다. <왈패 아가씨>는 별도 번역본에 대한 촌평이 있어 사정이 낫지만 다른 세 편은 아쉽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먼저 각 희극의 중심인물의 신분을 보자면, <구두장이의 축일>은 구두 장인인 사이먼 에어다. 요즘과 달리 당시 구두장이 기능공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사회적 위상이 꽤 높은 듯하다. 구두 만드는 기술을 ‘양반의 기술’로 칭할 정도이니 말이다. 에어는 무역 투자로 부자가 되고 런던 시장으로 임명된다. <동쪽으로>에서는 금세공사 터치스톤과 그의 도제 퀵실버와 골딩, 그의 아내와 맏딸이 벌이는 귀족으로의 신분상승 소동이 중심 에피소드다. <각자 기질대로>는 뚜렷한 중심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신사, 상인, 가짜 군인, 물지게꾼, 하인, 판사 등 다양한 유형의 런던 시민들이 표제처럼 각자 자신의 기질을 발휘하여 한몫하고 있다. <왈패 아가씨>는 당연히 소매치기 몰이다.
이처럼 중심인물만 놓고 보더라도 신분이 보다 대중화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의 발전 모습을 문학에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이다. 이의 부수적 효과로 산문체의 비중이 늘어났고, 등장인물의 대사 또한 고상함에서 평이함과 비속함을 넘나들고 있어 나쁘게 보자면 품위가 없지만 좋게 보자면 보다 실제적이고 생동감이 돋보인다. <왈패 아가씨>에서는 10장에서 아예 대놓고 소매치기들의 전문 용어를 죽 나열하고 있다. <각자 기질대로>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명시한다.
(프롤로그) 단지,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행동으로, / 희극이 이 시대를 반영하여 보여 주고자 할 때 / 선택할 만한 인물들을 골라서, / 인간의 죄가 아니라 어리석음만을 조롱할 겁니다. (P.302, 프롤로그)
희극이 온전한 웃음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웃음 속에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체념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이 숨겨진 경우가 많다. 도시희극은 칼날을 왕과 귀족에서 도시민으로 향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구가 급증하며 돈이 최고의 가치로 급부상하는 가운데 전통적 신분구조에 대한 집착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오락가락하는 가치관을 보이는 사람들의 양태야말로 웃음거리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다.
<구두장이의 축일>에서 전통 귀족 링컨 백작과 신흥 시민 오틀리 경은 서로 배척하는 태도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동쪽으로>는 한층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다. 터치스톤은 중산층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기에 도제 골딩을 사위로 삼는다. 반면 터치스톤 부인과 맏딸 거트루드는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최우선시한다. 귀족이라는 허명에 속아 넘어가 페트러늘 경과 결혼하면서 으스대며 부모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대목과, 뒤이어 가난한 처지로 영락하여도 어쨌든 귀족 신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장면은 극도로 대조적이고 적나라한 비판을 보여준다. <각자 기질대로>는 누구 특정인물에 국한하기 보다는 등장인물 대다수가 풍자의 대상이 된다. 노우웰 노신사의 헛된 계략은 무위로 끝나고, 스티븐과 매슈는 대놓고 우스갯감이다. 보바딜 대위는 사기꾼처럼 등처먹는 존재며, 카이틀리는 똑똑한 척 굴지만 의처증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변신을 거듭하는 하인 브레인웜 만이 유독 돋보인다면 과찬일까. <왈패 아가씨>는 겉모습만 보고 몰을 창녀로, 괴물로 편견을 지닌 채 바라보는 편협한 보수적 시각을 풍자한다.
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흥미롭다. 칼싸움으로 랙스톤을 단번에 제압하는 실력, 전통적 여성복장을 탈피하고 남장을 하는 자율성, 결혼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등. 단연 특이하면서도 흥미롭고 매혹적인 인물이다.
(몰) 제가 언제 결혼할 건지 말씀 드리지요. / 한량들이 채권 추심원을 두려워하지 않고, / [......] / 처녀들이 순결을 간직한 채 늙어 간다는 소식을 / 공께서 듣는 날이 오면, / 바로 그 이튿날 나도 결혼하겠어요. / 만약 그때까지도 내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요.
(놀랜드 공) 마치 최후의 심판 날처럼 들리는군.
(몰) 그날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 그래야 결혼을 후회해도, 곧 쉬게 될 테니까요. (P.653, 11장)
희극 중에도 즐거운 희극과 분명히 희극이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은 희극이 있다면, <구두장이의 축일>은 시종 유쾌하다. <왈패 아가씨>와 <각자 기질대로>는 왔다갔다 하지만 대체로 희극풍이다. 반면 <동쪽으로>는 매우 통렬하고 진지하며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어 비록 말미에서 희극으로 전환하지만 작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구두장이 에어의 여유롭고 너른 도량과 쾌활하고 활기찬 분위기는 작품 전체를 축일처럼 만들고 있어 특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오죽하면 왕조차도 그를 즐거운 마음에서 “미치광이 시장님”(P.140, 21장)이라 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작품 성격이 다른 것은 작가가 런던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성 여하에 좌우된다. <구두장이의 축일>과 <왈패 아가씨>는 긍정적이고 화합지향적이다. <동쪽으로>와 <각자 기질대로>는 속물주의와 허위의식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구두장이의 축일>에 나오는 축제적 활기도 있고, <동쪽으로>의 탐욕과 속임수도 난무하며, <각자 기질대로>의 과장된 악당들이 여전히 활보하는 그런 세계이다. [......] 즉 도시희극 후기작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선과 악, 헌신과 속임수, 공평함과 차별이 공존하는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세계이고, <왈패 아가씨>는 그런 런던을 따뜻하면서도 풍자적인 시각으로 구석구석 그려내고 있다. (P.684-685, 작품해설)
이들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외설적 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 상대방을 놀리고 비하하거나 가볍게 웃음을 유도하기에 성적인 표현처럼 적절한 요소도 드물 것이다. 셰익스피어 조차도 자신의 희극에서 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였으니 도시희극처럼 중하층 계급이 대거 등장하는 장르에서는 아예 대놓고 남발할 정도이며, 표현수위도 한층 높다. 다만 어쨌든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노골적이지만 언어적 유희로 돌려까기하는 대사가 곳곳에 난무한다. 모든 인물이 다 그렇지는 않으며 이를 전담하는 몇몇 역할이 있다. <구두장이의 축일>은 기능공 퍼크, <동쪽으로>는 도제였던 악당 퀵실버, <동쪽으로>에서는 의처증이 있는 상인 카이틀리, <왈패 아가씨>는 랙스톤, 고스호크, 그린위트 같은 신사들이 성적인 농담과 대사를 연기한다. 자칫 눈살을 찌푸릴 수 있겠지만 당대의 윤리 관념과 오락으로서 희극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퍼크) 살이 부푸는 게 느껴진다고요? 혹시 임신하신 건 아니고요? 그런데 우리 주인님이야말로 새신랑처럼 가운 입고 반지까지 끼셨으니 아랫도리 살이 부풀어 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마님 솜씨가 좋으시니 곧 주인님 기운을 빼놓으시겠지만 말이에요. (P.54, <구두장이의 축일> 7장)
(퀵실버) 수레바퀴에 매여서 계속 돌아야만 하는 개라도 마님의 수레바퀴 같은 성욕에 나리처럼 비참하게 묶여 있진 않을 거예요. 개가 바퀴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건 구르는 바퀴 꼭대기가 개보다 밑으로 내려올 때뿐이듯이, 나리도 마님을 밑에 깔고 있을 때만 마님을 꼭대기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P.192, <동쪽으로> 2막 2장)
이 번역본 자체에는 굉장히 만족한다. 뛰어난 책 만듬새에 덧붙여 충실한 번역, 세세한 주석, 분량은 많지 않지만 알짜배기 작품해설 등. 다만 솔직히 영국 고전 희곡의 매니아가 아닌 이상, 이 두껍고 무거우며 딱딱한 책을 펼쳐 읽는 독자는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처럼 불멸의 대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더더구나 유인이 약하다. <왈패 아가씨>처럼 각 희극작품들이 낱권으로 출간되어 보다 접근성이 용이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구두장이 에어의 활기와 쾌활을 드러내는 대사를 더한다.
(에어) 그럼 식탁 백 개를 또 만들고, 또 만들면 되지. 내 유쾌한 견습공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 구두장이들의 명예를 위해 깊이 건배하자고. 하지, 다들 신나게 마시고 있나? 퍼크, 모두 재미있게 놀고 있어? (P.129, <구두장이의 축일> 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