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의 사랑
사포 / 한겨레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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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의 호메로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시 부문에서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서정시의 대가 사포. 일찍이 플라톤은 그녀를 가리켜 열 번째 뮤즈라고 칭송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바로 그 인물, 서양철학사의 우뚝 선 거인 플라톤의 말이다.

도대체 사포는 어느 시절의 사람인가? 사료에 따르면 사포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삶을 누렸다. 중국의 공자보다도 선대라고 하면 가히 신화적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런 그녀의 시 작품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연적 소실 외에 중세 기독교도의 인위적 훼멸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한 악평, 즉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에 연유한다.

사포는 레즈비언일까? 레즈비언의 어원도 사포가 태어나서 살았던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하니 근거 없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를 보자.

“사포여, 너의 마음은 아프겠지만
네가 원하는 그녀가 떠나게 그냥 내버려 둬라.” (P.21, 아프로디테의 송가)

“나는 그리움으로 말라가고
그녀의 사랑에 허기져 있네.” (P.26, 주지 못한 사랑)

또, 다음의 시 구절은 어떠한가?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에 향기로운 향유를 발라 주었을 때
섬세한 너의 욕망은 만족했었지.” (P.37, 떠나는 아티스에게)

“그가 너와 마주 앉아
달콤한 목소리에 홀리고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P.38, 질투, 일명 아티스를 위한 노래)

시구만으로 판단컨대 여성 간의 단순한 애정 차원을 넘어서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명백한 연인의 심경이 느껴지지 아니한가.

한편, 그렇지 않은 시도 보자.

“달콤하고 상냥한 한 젊은이를
열렬히 그리워하도록
날씬한 아프로디테가
나를 꾀어 버렸어요.” (P.17, 마비)

“내 지금 바라노니
그대 여자 친구들을 돌려보내다오.
그리고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대로
나와 사랑을 맺기를.” (P.18, 조우)

여기를 보면 분명히 사포는 남성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게다가 사포의 삶을 보건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여 딸까지 낳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포에 대한 비난은 시기심과 유언비어에 의한 억울한 누명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여인 사포가 우리와 함께
하얀 도시 미틸레네로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딸을 거느린 어머니처럼.” (P.34, 아티스에게 4)

“저는 처녀들을 가르쳐
성스러운 신들을 섬기게 하겠습니다.” (P.156, 헤라 여신이여)

오히려 위 시구의 표현이 사포의 참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포는 젊은 여성들로 이루어진 처녀 가무단을 이끌었다. 레스보스 섬은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여성의 사회생활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한 보수주의자 및 후대 기독교도의 반감이 분방한 애정 표현으로 가득찬 시 내용을 곡해하도록 만든 것일 수 있다. 사포 자신의 말에 따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P.93, 이별)을 세진(世塵)에 물든 눈은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사포는 신과 영웅시대를 마감하고 인간이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시기에 걸맞는 서정시의 선구자다. 이제 올림포스 신은 사람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빛내는 조연으로 물러서게 된다.

사포가 노래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사랑, 그리고 청춘, 결혼, 삶의 예찬.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더 이상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

“부끄러운 욕망으로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아프로디테가” (P.90, 자신에게)

“그대를 사랑하기엔 너무 벅찹니다.
젊은 그대와 함께 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를 먹었습니다.” (P.95, 너무 늦은 사랑)

“사랑은 이제 나에게는
꿀도 아니고 꿀벌도 아닙니다.” (P.95, 사랑을 거절하며)

이제 세월의 흐름과 죽음이 사포의 시 세계를 사로잡는다. 때로는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삶을 긍정한다. 노쇠와 죽음마저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나 또한 계속 늙어가지만
나는 화려하고 찬란한 것을 사랑하네.
이것만이 나의 몫이요,
태양신처럼 빛나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라네.” (P.100, 세월)

“그리고 이제 나도 망각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리라.” (P.131, 망각)

사포의 명성은 단지 그녀가 개인의 감정을 노래했다는 데 국한하지 않는다. 그녀 말고도 당대 및 후대의 많은 시인들이 인간과 사랑을 개성적으로 노래하였다.

“사포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그녀의 시가 가진 특징은 감정의 격렬함과 솔직함,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분석, 절묘한 언어선택과 절제의 아름다움,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구성에 있다.” (P.198)

작품해설에 나오는 이러한 평은 실로 적확하다. 수백여 편에 달한다는 그녀의 시 가운데 그나마 비교적 온전히 전하는 것은 ‘아프로디테의 송가’, ‘아프로디테의 사원에서’, ‘질투’, ‘아나크토리아를 위한 노래’가 전부이지만, 단편에서도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격정적인 감정(’질투’와 ‘아나크토리아를 위한 노래’를 보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표현의 참신성은 단순하고 소박함과 맞물려 현재의 시각에서도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다.

“시원한 샘물은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흐르고
장미는 도처에 그늘을 드리우고,
흔들리는 잎새들은 나른한 졸음을 선사합니다.” (P.147, 아프로디테의 사원에서)

“아도니스가 깨어날 시간은 오지 않습니다.
봄은 아직 말이 없고 꽃은 피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P.152, 아도니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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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11-12-12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이 너무 읽고싶어 백방으로 찾다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제 블로그로 담아갔는데 혹시 내키지 않으신다면 말씀해주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다에 관하여 -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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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본절판


플루타르코스는 흔히 영어식 표기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서기 1세기 경의 로마 시대 그리스 출신이니 무척이나 오래된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런 그가 <영웅전> 외에 다른 글을 남겼다니 우선 놀랍기도 하고, 한편 남겨진 그의 글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쳐 몽테뉴의 <수상록>의 창작 계기가 되는 등 에세이의 원조로 일컬어진다고 한다.

역사성과 작품성은 같이 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별개로 구분되는 경우도 제법 적지 않다.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어디에 적용될지 궁금하다. 일단 번역자 권위 있는 천병희 선생인 것이 마음에 든다.

플루타르코스의 소위 <윤리론집>은 총 78편이 전해지는데, 이 책에서는 일단 6편을 번역하였다. 완역이면 좋겠지만, 분량도 상당히 방대할 터이고, 아직 검증도 안 된 작품을 일단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수다에 관하여’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결혼에 관한 조언’

이 단편들을 일관하는 키워드를 추출한다면 그것은 ‘이성’이다. 확실히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답다.

수다를 예방하는 길은 타인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인데, 수다쟁이는 계속 지껄여대므로 타인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우습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작가는 수다의 폐해와 증세를 면밀히 고찰하는데 수다를 병으로 인식하고 병의 치료를 위해 진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분노는 어떠한가? 작가는 분노를 “무엇보다도 허약함 탓에 혼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발생하는 것”(P.75)으로 인식하며, “자기방어의 의지로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혼의 긴장과 경련”(P.75)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분노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푸대접받았다는 감정”(P.85)에서 출발한다.

수다와 분노를 예방하려면 훈련을 통해 혼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부분을 길들이는 ‘감정의 습관화’(P.81)가 필요하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한다.

앞의 두 편이 윤리론 성격이라면, 아내에게 주는 글과 결혼에 관한 조언도 대상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삶의 지침을 담고 있다.

자신의 어린 자식이 죽었을 때 슬픔에 빠져있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서신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며, 어린 자식이 살아생전 부모에게 끼쳤던 즐거움을 상기하자고 조언한다. 그리고 미신적인 관습에 빠져 과도한 슬픔을 보이지 말도록 요청한다.

한편 예비부부에게 한 조언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2천년 전의 결혼 및 부부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들려준다. 플루타르코스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지위나 역할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부 상호 간의 배려와 사랑을 우선시하는 것은 요즘에도 유효적절하다. 특히 그는 신혼시절 신체적 매력에서 불타올랐던 사랑이 오래 지속되려면 “성격에 바탕을 두고 이성에 의해 유지”(P.213)되어야 함을 갈파한다.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는 신화에 바탕을 둔 일종의 우화다. 트로이 멸망 후 귀국하다가 바다를 방랑하는 오뒷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섬에 머무른 적이 있다. 이 일화를 배경으로 작가는 돼지로 변신한 사람의 말을 빌려 인간보다 동물의 삶이 얼마나 우월한지 설파하고 있다. 동물은 신체적 능력에서 인간보다 앞서며 욕망 충족도 자연에 따르며 절제할 줄 안다는 점, 생존을 위한 자족적 기술 습득과 같은 이성적 능력을 제시하며 오히려 오뒷세우스를 비웃는다. 당대 최고의 지성적 인간이라 일컬어지는 오뒷세우스가 한낱 돼지에게 밀리는 모습에서 단순한 웃음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계와 역사에서 발휘하는 부정적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수호신’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고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은 스파르타[스파르테]가 차지한다. 이때 테베[테바이]가 스파르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사에 성공하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나이를 방문한 거사 참여자 중 한 명을 통해 거사의 전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거사 참여자들이 초조하게 때를 기다리면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사건의 긴박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은 소위 소크라테스의 수호신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 해석을 주고받는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의 빛을 드리워준 수호신의 존재가 이성적인 것인지 비이성적인 것인지 논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 지나치게 현학적-기억에 따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렐레스가 그랬던 듯싶다-이고 진부한 내용이 아닐지 우려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설명을 위해 예시한 내용이 고대 그리스 역사이기에 요즘 관점에서는 지엽적이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은 점을 제외하고 내용상 고리타분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참신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과연 몽테뉴가 분발하여 <수상록>을 쓸 만했겠구나 싶다. 이왕이면 완역본도 흥미로울 듯싶지만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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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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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개그맨 최양락의 전성 시절, 로마황제 네로 역을 맡은 코너가 꽤 인기를 끌었다. 이때 궁정에서 비교적 건전한 상식과 비판의식을 가진 신하에 페트로니우스가 있었는데, 네로로부터 구박과 괄시를 받고는 하였다.

그렇다. 바로 그가 이 글의 저자라고 한다. 서기 1세기의 역사 속에 화석화된 인물이 아닌 자신이 남긴 글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말이다.

해설에 따르면 현존 원문은 전체 20권 내외 분량 가운데 14권에서 16권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한다. 완결된 작품으로 조망하기에는 앞뒤는 물론 중간에도 단락이 많이 있어 여의치 않으므로 오히려 남아있는 내용 자체의 미학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단 궁금한 것은 페트로니우스가 이런 작품을 남긴 의도이다. ‘품위 판관’으로 네로 황제마저도 인정해 마지않던 그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천박하기 조차한 내용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 중에서도 긍정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만 이를 발견할 수 없다.

만약 이 작품의 내용이 작가의 기이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고 당대 로마 민중의 삶의 이면을 묘사한 것이라면 작가는 풍속화가의 자질이 뛰어나다 할 것이다. 신과 영웅이 문학의 주인공이 되던 시기, 작가는 대담하게도 시정잡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도 모자라 비정상적인 성적 사랑의 관계가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사티리콘>은 고전 소설의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후대의 <황금 당나귀>보다 시대를 훌쩍 앞서는데 그치지 않으며, 거기에 결여된 악한소설적 면모가 확연하다.

주인공 엔콜피우스는 동행인 미소년 기톤과 동성애적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기톤을 사이에 두고 친구 아스킬토스와 다툼을 벌이기도 하며, 늙은 시인 에우몰푸스와도 대립한다. 그는 물건과 돈을 훔치기도 하며, 살인도 저지르며 용감한 척하지만 겁쟁이 기질도 다분하다. 부잣집 유부녀 키르케와의 정사 도중에는 성적 무능력이 되어 남근 신 여사제들의 치료를 받기도 한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결코 통상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아니다.

작품은 엔콜피우스 일행이 여행 도중에 머무르다가 겪는 소동과 에피소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공간적 배경도 푸테올리에서 타렌툼으로 가는 배, 다시 크로톤으로 옮겨진다.

푸테올리에서는 남근 신 프리아푸스의 여사제 콰르틸라 무리에 끌려가 방탕한 의식에 동참한다. 졸부 트리말키오의 연회에서 당대 로마 부유층의 호사스러운 연회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다. 세세한 묘사는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타렌툼으로 가는 배에서 맞닥뜨린 선장 리카스와 트리파이나가 어우러진 장면은 또 어떤가? 하인으로 분장하고 크로톤에서 보내는 삶 등.

이 작품에서는 제정 로마 초기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마 사회의 구석구석이 그대로 눈앞에 드러난다. 작가가 진정 페트로니우스가 아닐지라도 이러한 글을 남길 수 있는 이라면 웬간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소설인 동시에 풍속소설이기도 하다.

완전하지도 않으며, 내용도 천박하고 음란한 이 작품의 묘미는 바로 그 외설성과 천박성에 있다. 세상은 신실함과 고상함만으로 완전해지지 않는다. 사회 계층의 절대 다수는 평범한 시민 계급과 천민 계급이 차지한다. 그들의 가치관은 지배층의 거짓 엄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은 꾸밈없이 솔직하며 자연스럽다. 이 글에서는 귀족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트리말키오의 연회도 결국 모방에 불과하다. 이 모방이 실제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 아니면 심히 왜곡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연회 관습, 그들의 남성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시장과 여관에서, 공중목욕탕을 오가는 평범한 로마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흔한 분류로 나누자면, <사티리콘>은 순수 문학이 아닌 통속소설이며, 영화로 치자면 B급 영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는가? 사람들은 대중예술에 보다 열광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포르노가 겉으로는 쉬쉬하지만 안 본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울고 웃는 일상의 모습은 대중문화의 변천에서 보다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도덕성과 예술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이에게 이 작품의 일독을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해설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해설에서 알 수 있듯이 <쿠오바디스>의 작가가 창작에 참고하였고, <위대한 개츠비>의 초판본 표제가 <트리말키오>라는 점, 시인 엘리엇과 소설가 헨리 밀러가 경애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냥 무시하기 어려운 일면이 있다. 게다가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이를 다룬 영화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디스커버리 사의 다큐멘터리 <로마>의 중요한 대본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대 로마 사회의 일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데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하며, 여전한 음란성에도 불구하고 계속적 관심을 끄는 연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트리말키오는 졸부의 사치는 고대와 현대가 차이가 없음을 입증하는 자료 역할을 한다.

조금 낯설고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심각성과 진지함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책장을 넘기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게다가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이라는 특별 문구가 말해주듯이 20세기 대표적 삽화가의 거의 백편에 이르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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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 2000년을 이어온 작업의 정석
오비디우스 지음, 김원익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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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로마시대 초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의 또 다른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시의 형식을 택하고 있는데, 역자는 온전한 산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원전의 정확한 전달보다는 내용의 전달에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과 작가의 다른 작품 목록을 통해 보건대,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겠다. 그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에는 <사랑의 노래>와 <여걸들의 서한>, <여성의 얼굴 화장법> 등 요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이색적인 분야에 글을 남기고 있다.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면, 에리히 프롬의 동명의 저작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롬의 글이 철학적이라면, 오비디우스는 실용서에 가깝다. 전 3권으로 구성되는데,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기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이 그것이다. 표제만 보더라도 당장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구가 물씬 당기게 만든다.

현대에도 사랑과 연애의 기법을 다룬 책들이 난무하는데, 이 책은 이런 장르의 선구격이라고 하겠다. 시대적 배경 상,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이 소개되는데, 작가는 사랑의 기술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이의 증빙을 신화에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더욱 흥미롭게 작품을 읽어 나갈 수 있지만, 역으로 고전 신화를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영화나 미드로 유추하건대 당대 로마 사회는 현대 못지않게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임을 알게 된다. 간통은 처벌받지만 작가는 교묘하게 간통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사랑 조언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노골적이고 현대에 유용한 내용도 많다.

여자는 어디에 많은가로 시작하여 여자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자의 최측근을 활용하라, 선물과 편지를 자주 보내라, 아낌없이 칭찬하라 등.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언도 있다. 즉 먼저 여자의 입술을 훔치라, 그다음은 완력을 써도 좋다.

일단 사랑을 쟁취하면 그 후로는 수성에 힘써야 한다.

“정복은 우연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손에 넣은 여자를 지키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P.120)

그래서 남자들에게 교양을 쌓고, 부드럽게 대하고, 여전히 선물과 칭찬을 아끼지 말며, 혹여라도 외도 사실은 극비에 부치라는 등을 역시 조언한다.

오비디우스가 페미니스트임은 제3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여자의 입장에서 원하는 남자를 사로잡는 기술을 제시한다. 미모를 가꾸는 것은 기본이며, 노래와 시와 춤을 겸비하고, 남자들의 애를 태우며 쉽게 허락하지 말라는 등이다.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발끈하겠지만, 보편적 남녀의 시각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사랑의 치유>는 사랑이라는 열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책을 기술한다. 한마디로 오비디우스는 사랑에 관한 한 병 주고 약 주고를 다하는 셈이다. 여자와 관련있는 사람과 장소를 마주치지 말며, 다른 여자를 빨리 만나라, 여자의 단점을 찾도록 노력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라는 등 그 방안은 요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약초나 마법에 의존하지 말고 굳건한 의지와 심경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독려한다.

이렇게 오비디우스의 사랑론은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나 요즘이나 남녀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게 그 이유인 듯하다. 하긴 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다는 취지의 글이 씌어있다고 하니 인간의 본성이야 어디 갈 것인가?

사랑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풍성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것도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말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에서 신화를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오히려 어린 헬레나를 독수공방에 방치한 메넬라오스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 헬레나는 사랑을 좇아 간 것뿐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한 아가멤논을 죽인 악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인들에 절망하였다. 십년 간 고독의 대가를 아가멤논은 무참히 외면하였고 대가를 치룬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처 페넬로페 같은 이는 오히려 자고로 드물다.

역자는 라틴어 고전의 자취를 일부러 빡빡 지우고 있다. 고전을 현대의 독자에게 가깝게 하기 위하여 진부한 외피를 벗기는 것이다. 형식보다도 내용의 불멸성이 고전의 가치를 결정한다. 게다가 자칫 딱딱하게 흐를까 봐 예문의 고전 신화에 적합한 명화 수십 점을 컬러로 삽입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장점이다.

작가가 이러한 작품을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는 타락한 자유연애주의자인가?

“독자들이여, 정조의 상징인 머리띠와 발을 감싸는 레이스 장식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내 책이 외설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건전한 사랑의 기쁨이나 허가받은 은밀한 행위만 노래할 것이다.” (P.43)
“사람들은 내게서 방종한 사랑의 유희를 배울 것이다.” (P.185)

그가 도덕군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는 현실을 이해하며 인정할 줄도 안다.

“부부는 평생 으르렁거리면 산다. 싸움은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오는 지참금이다. 하지만 애인에게는 언제나 듣고 싶은 얘기만 하라! 너희들은 법에 따라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에게는 사랑의 신이 바로 법이다.” (P.134)
“여자들은 남자가 부자라면 야만인이라도 마음에 들어 한다. 현대는 바야흐로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P.144)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화가 없으면 사랑은 금세 식어버린다. 사랑은 불화를 먹고 자란다.” (P.305)

이렇듯 그는 어지러운 남녀 간 관계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이를 긍정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랑의 지침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사랑이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며, 막힌 데 없는 사랑의 건강한 흐름이야말로 개인과 가정과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의 행복에 가장 중요함을 깨달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자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사랑의 기술은 소위 카사노바의 기술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기술이다.” (P.330)

그의 사랑은 남녀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한 존재다. 사랑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P.177). 사랑에 관한 한 그는 과연 선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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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세트 - 전2권
사라 더넌트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속어로 나도 낚이고 말았다. 하긴 누구라도 "르네상스는 한 창녀에게서 시작되었다"라는 선전문구를 보고 지적 호기심이 끓지 않았을까. 아내조차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해인 것은 시간은 빼앗겼지만 도서관에서 대출하였기에 금전적 손실은 없었다는 정도.

내용은 광고문구와는 상당히 다르다. 르네상스 시기인 16세기 중반을 살다간 한 창녀(여기서는 고급매춘부를 의미하는데)에 관한 이야기다. 굳이 관계있다면 '우르비노의 비너스'라고 알려진 티치아노의 그림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점과 그래서 소설 중에 티치아노와 작가 아레티노가 등장한다는 사실.

그럼 순수하게 작품을 들여다 보자. 여기서도 주인공은 창녀 피암메타이지만 작중 화자인 난쟁이 부치노의 역할은 이보다 더 커서 부치노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마 최고의 매춘부였던 피암메타는 독일과 스페인의 로마 침공으로 로마가 함락당하자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고생끝에 안전한 베네치아로 온다. 그리고 여기서 피암메타는 상심을 극복하고 다시금 최고의 매춘부가 되기 위하여 분투한다.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렇다면 진부한 스토리를 탈피할 표현 기법상 탁월성이 존재하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당시 매춘부의 생활과 업무방식이 어찌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은 유익하다. 또한 베네치아의 거리 풍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소설에서 지식을 추구하는건 아닐텐데...

사라 더넌트는 2003년작  <비너스의 탄생>으로 세계적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작품은 어떤지 모르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약간은 회의적 인식을 받게되었다. 이게 그의 다소 침체작이기를 바란다.

각설하고 르네상스의 창녀는 일본의 게이샤, 우리나라의 기생과 유사한 것 같다. 위로는 고위층에서 하층민까지 이들 계층이 상대하는 스펙트럼은 폭넓다. 그래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여럿인가. 다만 창녀는 왠지 저수준의 느낌을 자아내는게 보다 직설적인 탓일까? 그렇다면 봄을 파는 매춘부는 조금 고상하려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도 피암메타와 유사한 직종이다. 육체를 파는 행위 보다는 사교계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보면 과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들 해어화의 존재는 공공연한 것이다. 새삼 우리나라의 매매춘 금지 제도의 시행 성과가 생각나다. 집창촌을 압박하면서 표면상은 감소하였지만 이들이 횡으로는 주택가로 확산되고 종으로는 각종 유사 성행위 등으로 변질되고 있음은 성인이라면 다들 알고 있다. 이쯤되면 창년의 존재는 사회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하수처리반과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 정부는 헤어날 길 없는 헛수고를 하는건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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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