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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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 이 책은 다소 관심이 있었지만 구입 자체는 망설이고 있었다. 표제에서 풍기듯 이런 유형의 저작물은 대체로 소개하고 주장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경험 내지 추정때문에. 나중에 학교 도서관에서 한번 빌려보면 충분하다는 현실적 생각도 한몫한 듯. 하지만 1+1이라고 헤르만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도 같이 준다고 하여 그만 덜컥 구입하고 말았다.

사실 이 책을 읽은지는 조금 시일이 된다. 순서대로 한다면야 <한국열국사연구>에 선행해야 하나 다소간 사정으로 이제야 몇자 끄적거린다.

저자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쓴 책이라서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듯 담담한 어조로 글은 이어진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라고 하니 저자와 죽음의 관계는 오랜 동반의 공유하고 있다면 어폐일까? 처음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깨달은 바를 독백 형태로 서술하는 형식인 줄 알았는데, 사례를 토대로 한 저자들의 서술이 잘 정리되어 개개 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유사한 교훈을 담은 저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번역자 류시화 시인의 브랜드 네임이 크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고야 일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는..하고 꼬리표가 달리기 십상이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장 솔직하고 현명해진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의 생애는 수많은 잘못과 시행착오와 오해, 갈등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삶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라야 삶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266면)"는 것이다. 더이상 가질 필요가 없을때 의식은 투명하게 빛나고 삶의 반추는 때늦은 후회감으로 들먹이게 된다.

한번 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대단히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무리 좋더라도 '나 아닌 남'의 것에는 별로 감흥을 못 느끼기 마련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무수한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 메시지가 난무한다. 어지간한 이라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럼에도 세상이 보다 도덕적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자 굴레이다.

얼마전 이 책의 표절이 지상에 오르내렸다. 표지와 본문에 사용된 삽화의 외국 원저자가 사용허락을 하지 않자 출판사에서 표절하여 실었다는 내용이다. 양서에 나쁜 관행이 병존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사실 삽화가 꽤 분위기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책밖과 책속 세계의 괴리가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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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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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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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헤세 자신이 꾸민 저작이 아님. 후세 편집자가 헤세의 글 중 헤세가 특히 사랑했던 정원에 관계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오랜만에 헤세의 글을 읽는다. 집중적으로 헤세의 작품(소설)을 독파하고 나름대로 잡설을 끄적거린게 아득하다. 책장을 뒤적거리니 1993년 1월 10일자에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나타난 인식 경향'이라고 적혀 있다. 요지를 대충 옮기면, 헤세는 초기의 '자연'에서 방랑, 각성, 문명비판과 동방정신 수용, 새로운 정신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인식과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의 인식범위는 개인 자신으로 초기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각성이후 범위는 확대되고 심화되어 드디어는 온 인류로 발전하였다. 인류를 위한 새 정신의 모색과 인류에 대한 봉사, 그것은 헤세 자신의 모습으로서 유희 명인 크네히트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뭐 대강 이렇다. 새삼 훑어보니 낯뜨거운 동시에 대견하기도 하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은듯.

이 책에서 나는 헤세의 좀 더 내밀한 삶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전투구로 점철된 사회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자연과 벗삼아 삶을 영위하는 헤세, 바로 은둔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에 묻힌 삶을 선호하는 것은 그의 후천적 천성이 아닐까? 하지만 그도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파를 비껴가지 못한다. 30대 후반의 헤세에게 그것은 가혹한 체험이었으리라. 여기서 새삼 초기 작풍과 명확히 구분되는 중기 작풍을 생각해 본다. 당시 <서구의 몰락> 등 서구문명의 쇠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을 당시다. 야만성에 대한 대안 모색이 바로 헤세의 주테마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기를 읽어보니 헤세에 대한 독일 내 평가는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인에게는 조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안온한 생을 영위하는 헤세가 못마땅할 수도 있었으리라. 어찌보면 죽림칠현이 아니겠는가. 이는 표피로 현상을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에 다름아니다.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는 철학과 문학을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성 회복에 대한 웅변이며 침묵을 깨뜨리는 행동에의 의지다.

'정원에서 보낸 시간'은 역시 운문이므로 원어를 모른채 번역본으로는 제 맛을 음미하기 어렵다. 언제 독일어 공부를 하려나. '꿈의 집'과 '아이리스'가 특히 흥미롭다. 전자는 헤세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후자는 헤세가 평생을 천착해 온 주제를 동화의 형식을 빌려 간결하며 깨끗하게 그린다.

'꿈의 집' 중 부자간의 대화에서 소개되는 최고의 곡인 바흐의 '악투스 트라기쿠스'(칸타타 106번)과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듣고 싶다. 나아가 헤세의 전작을 다시금 읽으면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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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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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전쟁 2 - 이덕일의 영웅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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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는 어이없이 쉽사리 무너졌다. 특히 백제의 갑작스러운 멸망은 의외였다. 동맹국 고구려에서 뭔가 방도를 강구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고구려가 수십년간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공세를 격퇴한 것과는 비교된다. 그만큼 백제의 국세가 허약하지는 않았음은 그후 백제부흥군의 활동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은 왜 계백의 5천 결사대 외에 의지할 수단이 없었을까? 신라가 5만을 원정군을 보냈다면 최소한 이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지녀야하는게 당연할터인데 말이다. 이는 의자왕이 웅진(공주)로 피신후 별다른 대응없이 곧바로 항복한 것과도 관계된다. 넓디넓은 호남벌과 남쪽 영역으로 피난가서 기치를 새로이 했다면 그리 허망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는 본시 경기도에 기반을 둔 국가였다. 수백년간 한성이 수도였다. 충청, 호남은 그들이 정복한 옛 마한 강역이었다. 장구한 세월 한성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밎 역학을 해왔는데 장수왕의 남하로 부랴부랴 웅진, 이어 사비로 천도를 하지 않을 수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왕의 권위는 뿌리째 흔들리고 귀족세력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조성하였다. 의자왕 즉위초 대대적인 신라 공세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왕권이 확립될 수 있었겠지만 김유신의 등장으로 무위에 그치고 많은 손실을 보게 되어 후년에는 현격히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한 탓으로 자연 향락에 기울게 된 것이다. 즉위초의 강성한 의지를 지닌 그였다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그리 맥없이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고구려의 원군을 받게 되어 위기를 넘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그리고 호남에서 번격을 도모하지 않은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중심지는 한강 유역이었고 금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백여년에 불과하므로 당시 호남은 머나먼 변방에 지나지 않은 탓이리라.

이처럼 백제가 왕권과 신권의 다툼으로 멸국을 초래했다면 신라는 양 다툼에서 왕권이 확립됨으로써 삼국정복의 대업을 성취하였다. 여기서 새삼 김유신의 활약상이 주목된다. 화랑의 우두머리(오늘날로 하자면 군부정권 시절 육사 생도대표?)로 탄탄출세가 당연해 보였지만 가야계라는 태생의 한계로 한직을 전전하던 그가 나이 50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그는 김춘추와 의기투합하는 등 실망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선덕과 진덕여왕 시절 잇따른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물리친 김춘추를 왕위에 올려놓아 드디어 왕권 중심의 신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위만조선, 백제, 고구려 등의 멸망에서 알 수있듯이 군민이 합심하면 외세의 침략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게 우리네 역사이다. 항상 분열과 반목으로 내부의 배신자가 나타났을때 왕성은 무너졌다.
저자가 '위대한 전쟁'이라고 지칭했던 일대 휘몰아침은 가라앉았다. 수백년간 중원과 자웅을 겨루었던 고구려는 나라를 상실했고 백제는 신라의 강역으로 흡수됐다.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국호를 일신하여 독립국의 첫발을 떼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달성했지만 후세에서는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의 배신자이며, 아울러 광활한 대륙을 상실하고 반도에 주저앉게 한 원흉이라는 것이다. 신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역사는 후대 관점에서 당대를 되돌아보는 법이다.

그리고 비록 발해가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계승하였다고 하지만, 발해에게 부족한 점은 고구려가 지니고 있던 그 치열한 '천손의식'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대신 중원과 타협하여 형식적이나마 그들의 지배구조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작금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오늘날 영토의 크기가 곧 국력의 지표는 아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국토에 대한 미련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다만 그들의 정신과 기상과 기백을 일허버리지는 말자. 그게 소위 '위대한 전쟁'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르침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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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3.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그 위대한 전쟁 1 - 이덕일의 천하통일 영웅대전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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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대중역사가인 이덕일의 신작이다. 이전 작인 <오국사기>의 개정판이다. 부제가 '이덕일의 영웅천하'로 중국 수나라 통일이후 여수전쟁에서 시작하여 신라의 삼국토일과 일본의 성립까지 격동의 동아시아사를 다루고 있다.

요즘 SBS에서 방영주인 드라마 '연개소문'과 왜국을 제외한 내용에서는 상당 부분 시기적으로 중첩되므로 비교하여 읽어나가면 많은 도움이 된다.

약 100년 간의 기간이지만 어마어마한 격랑이 휘몰아쳤던 시기인지라 그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2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약사(略史)도 전사(全史)도 아닌 애매한 성격의 저작이 되었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된다. 이를 나관중처럼 대하역사소설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작가가 나타난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일찍부터 나름대로 우리고대사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던터라 내용 자체가 참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 당대사를 통해 우리민족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소위 '위대한 전쟁'이란 가능한가?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뺏는 사건이 전쟁이다. 어떤 생명체가 제 정신으로 동종의 생명체를 멸절시키지 못해 안달일까? 이렇게 보면 인류는 뇌구조의 근본적 흠결을 지닌 이상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위대한 전쟁은 있을 수 없으며, 인류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억압 시도에 대하여 필요 최소한도의 무력 사용이 그나마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명분으로 함부로 '국익'을 논하지 말라. 당사자 개인에게 그것은 하나뿐인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며, 그것은 생물체의 가장큰 존재이유인 것이다.

한편 '영웅'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영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혜성같이 등장하여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초인적 존재. 그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다. 다소간의 강압과 폭력과 부정과 잘못은 눈감아주자. 성과만 위대하다면 제도와 법규는 무시해도 좋다. 그래야 진정 영웅이 아닌가? 후훗,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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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3.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몰이라는 매춘부이야기
다니엘 디포우 지음 / 세계문학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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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다니엘 디포의 다소 이색적인 소설 작품이다. 여기서 이색적이라 함은 <로빈스 크루소>로만 작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의외로 다가올 수 있음이다. 물론 디포 자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인도 표류기가 특이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책의 해설과 같이 사회 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며, 또한 피카레스크 소설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몰 플랜더즈라고 불리는 한 여인의 일생의 회고담 형식을 빌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의 삶은 전형적인 피카라, 즉 여성 피카로의 그것이다.

작품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은 몰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다룬다. 중간 부분은 하녀로 들어간 지주 집안에서 연애와 결혼으로 시작되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남성 편력(?). 셋째 부분은 드디어 몰 플랜더즈라는 유명한 도둑으로 명성을 날리는 시기이며, 마지막 부분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이다.

남성 피카로의 일탈 행위는 초기에 가난, 나중에는 사회적 반발심에 기인한다. 즉 그는 피카로의 삶을 떨쳐버릴 수 있음에도 능동적으로 피카로의 삶을 선택한다. 여기서 베티 부인이 몰로 전락하는 과정도 가난에 기인한다. 특히 그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경제적 궁핍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미약하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남들보다 우월한 몸뚱아리,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외모를 수단으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남자를 끊임없이 구한다. 그 기간은 수년에서 짧게는 한 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옮긴이는 몰을 매춘부로 낙인찍는다. 몰 자신도 스스로를 매춘부라고 인정한다.

형무소에서 죄수의 딸로 태어나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에게 사회적 도덕관념과 높은 양심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녀는 너무나 일찍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정조보다 금화에 얼굴이 환해지고 시선이 향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기대를 품고 몸을 맡겼던 장남 대신 그의 동생과 결혼한다. 비록 금전의 유혹으로 시작되었지만 장남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자못 순수하였다. 다만 자신의 말마따나 그 사랑은 과도하고 무절제하였다(P.66). 어쨌든 동생과의 결혼 생활이 길게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는 외톨이가 되었다. 돈 많은 젊은 미망인으로.

이후 그녀의 삶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처절한 분투의 노력이다. 단순히 정부와 남편의 품을 그리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남편 없는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솔직히 많은 재산을 은행에다 맡겨두고 이자만으로도 편하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텐데도. 제인 오스틴이 젊은 여성들이 좋은 결혼에 목매다는 당시의 경향을 고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거의 일백 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몰이 살았던 당대를 보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적 관념은 거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이 사회 소설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도 연유한다. 작가는 몰의 입을 통해 남성 편의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여성의 낮은 사회적 대우를 질타한다.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너무나 처참한 것이다. 여자들은 스스로 보통 이하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고 있다. 예전부터 그들 스스로를 비하시킴으로서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수치를 겪어오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P.81)

몰의 인생은 원제의 타이틀처럼 행운과 불운의 연속이다. 세 번째 남편과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여기서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 외적 요인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친남매 간임을 알게 된 것이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사랑함에도 헤어지고 만다. 다섯 번째 남편인 은행가와도 그녀는 비교적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누렸지만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나름 안온한 삶도 완전히 깨지고 만다.

이렇듯 그녀는 끊임없이 생활의 안정을 갈구하였지만 운명과 사회는 그녀의 삶이 평온하게 꾸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은행가와의 결합에 앞서는 그녀는 자신의 무절제한 삶을 반성한다.
“가난이라는 악마의 가장 악랄한 유혹에 의해 나는 다시 타락의 생활로 돌아가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나의 필요성을 채우는 타락한 매춘 뚜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P.187)

이제 질식한 것 같은 가난으로 몰락한 그녀에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우리말에도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힘겹게 삼년의 시간을 버티어내었고 더 이상은 견딜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나이도 오십을 넘겨 미모에 기댈 수도 없는 형편. 결국 몰 플랜더즈의 길로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 것이다.

이쯤해서 작품의 구조적 측면을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오십년에 걸친 그녀의 생을 기술하는데 소요된 분량은 180면 정도이다. 그런데 이중 상당량은 그녀의 성적인 무절제와 자칭 부도덕하다고 일컫는 어두운 면에 할애되어 있다. 첫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몇 줄에 지나지 않고, 행복했던 셋째 남편과의 경우도 근친상간 관계임을 알고 절망하며 다투는 장면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음에도 유복한 결혼생활에는 한두 면을 할애할 정도로 인색하다. 이후에도 밝고 행복한 대목보다는 어둡고 부정한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 작품이 몰 플랜더즈의 일생의 어두운 잘못을 회고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후의 전설적인 도둑 겸 소매치기로 유명하게 되기까지의 그녀의 잇따른 성공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의 함의가 궁금하다. 장장 70면에 걸친 그녀의 갖가지 도둑질 장면은 마치 대도가 자신의 성공담을 의기양양하게 술회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를 작가의 내밀한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외관상 당대의 도덕률과 검열을 의식하여 몰의 부도덕과 불법을 지탄하고 있지만 작가는 내심 그녀에게 자신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녀의 도둑질을 통해 당대 런던 사회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효과를 노리기도 한 게 아닐까?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하층민이다. 상류층은 자신들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하류층은 목을 치켜세우고 끊임없이 높은 곳만 바라본다. 세상은 왕과 귀족, 지주들만 사는 게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간과된 사실을 일깨우는 것,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도 충분히 인식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낮은 목소리. 그것이 피카레스크의 본령이며, 사회소설의 출발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들도 허구보다는 교훈적인 사실에 그리고 단지 이야기로 생각하기 보다는 현실 적용에 그리고 주인공의 인생보다는 작가의 결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희망해 본다.” (P.13)

또한 작품 말미에도 이렇게 몰의 입을 통해 술회하고 있다.
“나의 인생의 이야기를 이렇게 출판하는 것은 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도덕성을 위해서이다. 혹은 모든 독자들에게 교훈, 주위, 경고, 혹은 성장을 주기 위해서이다.” (P.314)

정말로 이 소설은 교훈을 주기 위하여 창작되었을까? 몰은 이따금씩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저와 후회의 상념을 슬쩍 비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멈추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다. 몰은 결국 뉴게이트 형무소에 잡혀가 교수형이 선고되었음에도 용케 처형을 모면한다. 가벼운 도둑질도 목숨을 대가로 바치는 판국에 그녀는 참회와 회개의 눈물로 목사를 감동시켜 ‘유명한’ 도둑이자 상습범임에도 유배형으로 형량이 낮추어진다. 이것이 도덕성과 교훈에 부합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그녀의 유배 생활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녀는 도둑질로 마련한 돈으로 땅을 사고 농장을 꾸려서 오히려 지주, 즉 농장주가 된다. 여기다 결합하지 못했던 제미, 즉 랭커셔 남편과 재결합을 하고 많은 돈을 벌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늘그막에 영국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이것이 정말로 회개의 삶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마지막까지도 방어막을 치는데 소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살았던 죄많은 생을 진정으로 회개하며 여생을 살기로 했다.” (P.329)

디포의 <몰 플랜더즈>는 부도덕한 피카라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워 개인의 부정과 불운한 삶은 물론 여성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취약성으로 인한 세상의 풍파를 도덕성이라는 외피에 숨겨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가 나면서부터 창녀이자 매춘부가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몰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너무 낯간지럽다. 이것이 디포가 노리는 숨은 의도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이 소설은 당대는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도 굉장한 문제작이다.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의아스럽다. 재평가가 필요하다.

현재 있는 유일한 번역본은 그나마 절판된 지 오래인지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 게다가 번역 자체도 솔직히 추천할 정도가 못 된다. 단순히 영한사전을 펼쳐놓고 글자 대 글자, 문장 대 문장으로 번역한 듯 하며, 번역투도 매끄럽지 못하고 딱딱하여 전문번역가의 작업치고는 함량 미달이다. 보다 좋은 번역, 제대로 된 대우를 절실히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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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세븐 2014-07-0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때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아닌가요? 우리나라로는 영조 시대쯤일텐데, 저런 제목으로 책을 냈다니 놀랍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