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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전쟁 2 - 이덕일의 영웅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7년 1월
평점 :
백제와 고구려는 어이없이 쉽사리 무너졌다. 특히 백제의 갑작스러운 멸망은 의외였다. 동맹국 고구려에서 뭔가 방도를 강구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고구려가 수십년간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공세를 격퇴한 것과는 비교된다. 그만큼 백제의 국세가 허약하지는 않았음은 그후 백제부흥군의 활동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은 왜 계백의 5천 결사대 외에 의지할 수단이 없었을까? 신라가 5만을 원정군을 보냈다면 최소한 이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지녀야하는게 당연할터인데 말이다. 이는 의자왕이 웅진(공주)로 피신후 별다른 대응없이 곧바로 항복한 것과도 관계된다. 넓디넓은 호남벌과 남쪽 영역으로 피난가서 기치를 새로이 했다면 그리 허망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는 본시 경기도에 기반을 둔 국가였다. 수백년간 한성이 수도였다. 충청, 호남은 그들이 정복한 옛 마한 강역이었다. 장구한 세월 한성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밎 역학을 해왔는데 장수왕의 남하로 부랴부랴 웅진, 이어 사비로 천도를 하지 않을 수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왕의 권위는 뿌리째 흔들리고 귀족세력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조성하였다. 의자왕 즉위초 대대적인 신라 공세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왕권이 확립될 수 있었겠지만 김유신의 등장으로 무위에 그치고 많은 손실을 보게 되어 후년에는 현격히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한 탓으로 자연 향락에 기울게 된 것이다. 즉위초의 강성한 의지를 지닌 그였다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그리 맥없이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고구려의 원군을 받게 되어 위기를 넘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그리고 호남에서 번격을 도모하지 않은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중심지는 한강 유역이었고 금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백여년에 불과하므로 당시 호남은 머나먼 변방에 지나지 않은 탓이리라.
이처럼 백제가 왕권과 신권의 다툼으로 멸국을 초래했다면 신라는 양 다툼에서 왕권이 확립됨으로써 삼국정복의 대업을 성취하였다. 여기서 새삼 김유신의 활약상이 주목된다. 화랑의 우두머리(오늘날로 하자면 군부정권 시절 육사 생도대표?)로 탄탄출세가 당연해 보였지만 가야계라는 태생의 한계로 한직을 전전하던 그가 나이 50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그는 김춘추와 의기투합하는 등 실망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선덕과 진덕여왕 시절 잇따른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물리친 김춘추를 왕위에 올려놓아 드디어 왕권 중심의 신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위만조선, 백제, 고구려 등의 멸망에서 알 수있듯이 군민이 합심하면 외세의 침략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게 우리네 역사이다. 항상 분열과 반목으로 내부의 배신자가 나타났을때 왕성은 무너졌다.
저자가 '위대한 전쟁'이라고 지칭했던 일대 휘몰아침은 가라앉았다. 수백년간 중원과 자웅을 겨루었던 고구려는 나라를 상실했고 백제는 신라의 강역으로 흡수됐다.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국호를 일신하여 독립국의 첫발을 떼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달성했지만 후세에서는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의 배신자이며, 아울러 광활한 대륙을 상실하고 반도에 주저앉게 한 원흉이라는 것이다. 신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역사는 후대 관점에서 당대를 되돌아보는 법이다.
그리고 비록 발해가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계승하였다고 하지만, 발해에게 부족한 점은 고구려가 지니고 있던 그 치열한 '천손의식'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대신 중원과 타협하여 형식적이나마 그들의 지배구조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작금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오늘날 영토의 크기가 곧 국력의 지표는 아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국토에 대한 미련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다만 그들의 정신과 기상과 기백을 일허버리지는 말자. 그게 소위 '위대한 전쟁'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르침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