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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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동료가 한 번 보라고 주어서 그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단순한 축약본이 아니라 만화 형태이므로 딱딱함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을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축약하여 전달하고자 하면 불가피하게 편집자의 자의성이 개입되는데, 이게 때로는 약이 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싫어하는 것도 그 지나친 자의성이 거슬렸던 탓이다. 어쨌든 저자는 방대함 중에서 정치사에 한정하여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도저할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였고 그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역사적으로 중종시대는 사화로 물든 시기의 한복판이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실권이 없어 공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다시 이를 내치다가 마침내는 김안로라는 희대의 간신을 잉태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다. 작가는 이와같이 반정공신세력과 조광조, 김안로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을 종축으로 삼고 중종의 심중을 횡축으로 삼아 당대 정치사를 명쾌하게 그리고 있다. 모델링의 장점이 바로 현상의 단순화를 통한 이해의 증대가 아니었던가.

작가의 말마따나 중종에게는 성군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아무 욕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신하에 의해 쫓겨난 임금, 이는 언제든 자신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종에게는 왕좌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차대한 과업이며, 조광조는 주군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향년 38세의 나이, 며칠후면 내 나이가 그리 된다. 조광조는 비록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만 후대에 성인 소리를 들으며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니 무익한 생은 아니리라.

작가의 쾌도난마에만 함몰되지 않는다면 무척 흥미롭고 유익하게 볼 수 있다. 문득 작가의 나머지 책들도 손에 들고 싶다. 그나저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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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윤내현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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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였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하는 드라마들-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바로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더우기 이들 프로그램은 그 스토리를 기존 학계의 정설보다는 재야사학 내지 야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어 생경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다. 그 심연의 한복판에 바로 고조선의 문제가 얽혀있다. 저자는 정통 강단사학계 출신이지만 통설과 다른 가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오랜동안 학계에서 소위 '왕따'를 당했다. 선배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정보기관에 투서까지 하는 등, 어찌보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다.

저자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고대사에 접근하게 되었고, 기존 학설에는 한계점이 잇었다고 한다. 고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 이어져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은 심각하게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역사의 시초부터 잘못 이해되어 우리 민족은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천여년간이나 받는 열등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걸 그렇다고 강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군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므로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인류의 고대사는 사라져야 한다. 트로이도 발굴되기 전까지는 한갓 호메로스가 전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강단사학계는 학문탐구에 있어 좀 더 개방성을 보여야 한다.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때로는 터무니 없다고 하더라도 '철학'이니 '문화'니 '경제'니 하는 어휘에 집착하여 사료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대로 사료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정말로 합리적 증거와 추론에 갑능 두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영역에서 만주와 중국을 아우르는 초대국까지 시각에 따라 고무풍선과 다름없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WTO가 생기고 UR이 열리때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지역적 블록의 벽은 견고하고 민족적 자존심은 무너뜨리기 어렵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만은 세계화의 궁극적 승리는 올리브 나무를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다. 올리브 나무가 렉서스를 덮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인간적 가치, 전통의 가치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가 곧 수구주의는 아니다. 민족주의가 나치와 파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민족주의는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타인을 상대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이루는 엔진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가 통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리고 그것이 순기능을 하도록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종전의 분열적 시각이 아닌 통합된 역사적 시각은 올바른 역사 교육에서 나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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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윤내현 외 지음 / 지식산업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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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윤내현의 저서이다.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가 비교적 가벼운 성격-내용은 그러하지 않지만-의 저작이라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만이 아니라 고대 복식사와 고인돌 연구자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서.

먼저 나는 고조선에 대한 윤내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음을 밝혀둔다. 단군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며, 초기 연대를 올려잡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자조선과 이를 뒤집은 위만조선의 강역은 단군조선 전체가 아니라 서부 변경 지역이라는 등등. 민족적 자존심을 달래는 그의 가설을 따라가자면 무한한 즐거움과 자긍심이 샘솟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저자가 순수한 학문적 자세로 고조선 연구에 매진하였듯이 나 또한 보다 비평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싶다.

우선 윤내현의 고조선 강역 연구는 다른 연구자와는 달리 매우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하여 사실에 꽤 근접하고 있다. 타연구자가 무시하거나 빠뜨리거나 곡해하는 부분을 그는 철저히 파고들어 바로 중국사료로써 고증하고 있다. 이로써 고대의 요수와 요동이 지금의 랴오허와 랴오둥과는 다름을 명쾌히 집어내고 있다. 그외에도 그의 고조선 연구는 남들과 구분되는 독창적이면서도 탄탄한 논리적 배경을 지니고있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저자가 다른 곳에소 토로하였듯이 학문적 문제를 비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고조선이 수도를 4번 옮겼다는 주장은 아직 근거가 취약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기반한 고조선의 영역 팽창도 한반도-만주-한반도라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또 위만조선의 멸망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단군조선의 멸망과정은 어찌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고조선의 '강역'에 집중하는 관계로 논의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책에서의 윤내현의 연구만 가지고는 고조선 논의를 매듭짓지는 못하리라 여겨진다.

한편 박선희의 복식을통한 고조선 연구는 꽤나 흥미롭다. 기존 문헌에 치우친 연구와는 달리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을 토애 나는 비로소 고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 본토보다도 선진적인 문화를 전개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문화가 중국과는 초기부터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는 지나치게 문헌에만 치우친 점이 없지 안았다. 부족한 사료를 파헤치다보니 글자 한 자의 해석에 목매달고 절대시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고고학과 가타 학문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사학도는 보디 폭넓은 시각을 배양하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논란은 많지만 천문기상학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재조명한 것은 참으로 갈채를 보낼만한 시도이다.

하문식도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에 접근하고 있는데 앞의 두 저자에 비해서는 상관성이 다소 처짐을 느끼게 한다. 특히 만주와 북한의 고인돌에 집중하여 남한의 고인돌은 생략하고 있어 한반도 남쪽이 진짜로 고조선의 강역에 속하는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어렵다.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싶다.

이 책 하나로써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오히려 이 책의 주장은 또다른 논쟁의 출발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새롭고 보다 합리적인 가설 제시와 반론은 학문발전의 기본 동력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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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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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을 필두로 한 일련의 최근 드라마는 고대사에 대한 오랜 열망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우리 교과서는 고조선의 주무대가 한반도 내이며, 마찬가지로 한사군의 위치도 국내로 비정하고 있다. 뿌리깊은 인식의전환은 그리 쉽지 않음을 강하게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인식의 밑바탕은 조선 후기 소위 소중화사상에 젖은 고루한 유학자에게 연원이 있지만 일제식민사학자에 힘입은 바가 더욱 크다. 해방후에도 한동안은 큰 변함이 없었는데 나도 어릴적에 이와같은 내용을 철썩같이 믿고 줄줄 외우다시피 했었다. 좋다, 모든걸 긍정하는 의미에서. 과거에는 학문의 연수고 길지 않았고 깊이도 깊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설익은 가설이 역사적 진실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음을. 하지만 최근들어 눈부시게 발전한 학문연구의 성과마저도 외면한채 수구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학문의 자세인가.

개인적으로 작가 이덕일에 대해서는 감탄하지만 사학도 이덕일에 대해서는 조금 우려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다작을 넘어 남작을 하는게 아닌가하는 걱정 탓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의 감탄은 <장군과 제왕>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고 슬쩍 들쳐본 다른 책들을 통해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대중이 호감가게 만드는 그의 능력에 감탄한다. 전문적인 내용을 평이하게 변환하는 기술, 핵심내용의 지속적 반복을 통한 각인 기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이나 사건의 종횡적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 등. 그럼에도 일개인이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수는 없는데 하는 아쉬움. 그래서 <장군과 제왕>에서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의 초기작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와 광채가 안 보이기에. 그래서 이 책의 구입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윤내현)를 앞서 읽었기에 자연히 비교가 된다. 확실히 이 책은 보다 대중친화적이다. 어떤 의심스런 점에 대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해답을 구하기 보다는 문제의 소지를 밝히고 으심나는 부분의 근거를 일정 부분 던져놓고 최종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그리고 보다 깊은 내용은 전문연구서를 보도록 유인한다.

뿌리없는 민족은 역사의 미아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계 각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화 시대에서 정체성은 더더욱 존재의의가 커지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저 현재 지배하는 강역에 대한 정당화 작업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쩌면 중국의 속내는 압록강을 넘어서는데 있다는 주장에 코웃음치기가 두렵다.

이 책 자체로는 다소 미진한 면도 있지만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다면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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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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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 / 지식산업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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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교수의 저작을 한두권 접하다보니 이 책에 오게끔 되었다. 700여면에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완독에 시일이 소요되었지만 그래도 꽤나 흥미롭게 대할 수 있었고 매우 유익하였다. 결론적으로 기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사각을 갖게 되었다고 평하고 싶다.

우선 우리역사에서 열국시대란 용어자체가 낯설다. 흔히 열국시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일컫는 용어로 알고 있다. 그래서 '열국지'라는 소설도 있지 아니한가. 여기서 저자는 고조선 말기부터 사국시대 내지 삼국시대가 정립되기전까지를 열국시대로 정의내린다. 교과서에서는 고대국가의 성립은 삼국시대로 그것도 각각 율령이 반포된 이후로 한정하고 있다. 가야는 고대국가 진입직전에 좌절하였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은 부족국가로 진정한 국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고조선이 완전한 국가형태를 갖춘 마당에 그 뒤를 이은 열국이 역사적 퇴보를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저자의 관심영역은 무척 광대하고 그 깊이는 한없이 깊다. 이 책을 통하여 나는 기존 통설과 배치되는 낯선 역사적 주장을 심심찮게 접하였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러한 가설을 도출한 논리와 근거를 살펴보는 것 자체로도 타성적인 역사관에 자극제가 된다고 본다. 출간된지 십년 가까이 경과하였지만 여전히 내용이 참신하다.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부족한 연유이리라.

전 세편으로 구성되어 열국의 건국과 주체세력, 열국의 발전과 내외활동 그리고 열국시대에 관한 종합 검토를 담고 있다. 각 편의 여러편의(주로 국가별) 자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이 자체로 논문상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 따로 보아도 크게 지장은 없다. 이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도 작용하여 동일 인용과 표현의 반복이 잦다는 인상을 준다.

전체 내용을 아우를 역량이 부족하므로 내게 새롭게 다가온 가설을 몇가지 언급하고 싶다.

삼한을 제외한 열국은 출발은 오늘날 중국 난하일대라고 가리킨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거수국이 위만조선이 세력을 확장하다가 한무제에게 멸망당한 곳이다. 이때는 고조선의 말기로 통치력의 약화로 인하여 이 일대의 많은 부족들이 화를 피하여 동부와 남부로 이주하여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부여, 동예, 동옥저 등의 국가명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주전 국가명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한편 고구려, 낙랑국, 대방국 등과 같이 이주전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사서에서는 그들의 연한이 700년 전도라고 하지만 스스로는 900년이라고 주장한 차이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중국의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하여는데 후에 제후국들이 각기 독립하여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고조선도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거수제를 실시하였는데 열국들은 모두 고조선의 거수국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는 열국들 중 한(마한/진한/변한)과 가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요즘 드라마 '주몽'이 대단한 인기다. 나도 열렬한 시청자다. 온조의 부인인 소서노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의 전부인 자식인 유리가 후에 나타나서 태자가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그 이론(異論)많은 비류국과 백제국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백제국의 건국자는 비류라고 한다. 그런제 비류가 후게자없이 단명하여 온조가 계승하였고 후에 온조의 자손들이 선조를 미화하기 위하여 신화를 윤색하였다는 것.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 또한 저자는 백제의 건국지가 하남위레성이 아니라 임진강 유역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백제의 중국 동부지배는 교과서에서도 변형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다. '고대상업세력'이라는 표현이 기억난다. 고대에 그 얼마나 상업과 무역이 활발했는지 의문스럽다. 저자는 백제가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때를 틈타 지금의 난하 서쪽인 요서지역을 공략하고 차례를 세를 확장하여 동부해안 일대 대부분과 남부지역 일부를 수백년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에 웅크린 쪼잔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신채호선생은 삼국중 백제가 가장 호전적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것은 약자의 피난이라는 시각 외에 중국의 식민지를 기만으로 하여 국가부흥을 도모하는 원대한 대계가 아닐까한다. 이러한 백제의 꿈은 분열된 중국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는 과정에 중국영토를 상실하면서 물거품이 되었고 백제의 급격한 몰락의 원인이 되었던게 아닐까.

일제식민사학의 폐해로 가장 크게 지목되었던 임나일본부설은 여전히 일부에서(그리고 일본에서는 지배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관개토대왕릉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임나'는 가야인가하는 의문도. 여기에 저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임나는 가야를 가리키는데 한반도의 가야가 아니라 일본열도에 세워진 유민들의 국가며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들의 국가도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고구려, 난랑국, 대방국 등이 이주전 구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듯이. 재밌지 아니한가?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궁금한 로망. 강대국 고구려는 왜 중국 본토를 지배하기 위한 공격을 하지 않았을까. 중국역사는 흉노, 돌궐을 비롯한 수많은 이니족들의 침략과 한족의 수성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도 한번쯤 시도해 볼만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고구려는 중국이 분열된 시기에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통일중국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 한나라와의 지속적 공방전과 수나라, 당안라와의 국운을 일대 대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저자는 그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이념을 갖고 있었던데 연유한다고 본다. 즉 요서를 장악하고 신라, 백제를 복종시키면서 다물을 오나성한 고구려는 중국에서 현상을 깨트리지 않는한 자신들도 국경선을 유지하고 싶어하였다는 것.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세계의 중심이고 자실들이 천손의 자손이니 굳이 중국땅을 탐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와같이 무섭도록 참신하며 생경하기조차한 주장들이 봇물터지듯 한다. 그럼에도 황당한 재야사서와는 달리 엄밀한 사료고증과 고고학 성과, 그리고 합논리적 추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있다.

기존 우리역사의 서술에 만족못하거나 역사의 새로운 시각과 접근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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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2.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