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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황건 옮김 / 청미래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에는 제대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 완역본이 없다. 그것은 곧 우리 인문학 및 번역계의 수준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바로미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끝없이 찍어내면서 이백여년 전의 고전은 이렇게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하기사 그런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고, 이들은 그나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가련함에 비하면 오히려 행복한 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님에 일차로 놀랐고 그럼에도 역사학자를 능가하는 안목과 지적 능력에 이차로 탄복하게 된다. 제목그대로 '로마제국 쇠망사'이므로 로마의 성립과 포에니전쟁을 겪으면서 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하게 되는 찬란한 로마의 영광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절정을 구가하던 로마가 어떤 연유로 쇠락의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를 복합적인 시각에서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게 18세기 후반이다. 그때는 계몽주의가 득세하는 동시에 제국주의가 발아하기 시작하였던 시기다. 오스만투르크는 굳건히 그리스와 소아시아, 중동일대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기번의 시각이 현대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언제나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단견과 편견, 인식의 한계가 곧 눈에 띄게 되기 마련이므로. 따라서 너그러운 마음자세를 갖추고 책장을 넘겼다.
전성기의 로마는 유프라테스강과 도나우강, 라인강 그리고 대서양, 사하라사막에 의하여 제국의 경계가 획정되었다. 그 이상은 기후도 척박하여 무리를 무릅쓰고 정복을 해봤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탄탄한 국방력의 도움을 받아 내부에서는 유례없는 영광을 향유하게 된다. 스스로 로마가 세계 그 자체라고 인식한게 적어도 서양권에서는 전혀 오만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이다.
맛좋은 꿀이 있으면 벌이 날아오고, 군침도는 음식이 있으면 파리가 꼬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번영은 이방인들에게 끊임없이 로마경계를 침탈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로마는 강대한 국가이지만 사방의 이민족들에 의하여 지속적인 충돌이 빚어지다보니 군비확대로 점차 경제가 어려워지게 되는 법. 근근이 유지하던 국경선은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의 서쪽과 남쪽으로의 이동에 의하여 일거에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서로마제국은 급격한 쇠락을 겪다가 이윽고 명을 다하게 되고 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어떤 국가도 현명한 군주가 계속 등장하여 통치를 이룰 수는 없다. 절대권력을 가진 만인지상의 말 한마디와 동작 하나는 곧 자체로 법이요 명령인 것이다. 이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게 절대권력자가 절대권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장친인 것이다. 공화정시기의 로마에는 그것이 가능하였다. 원로원의 권세가 막강하였으며 권력은 집정관, 재무관, 법무관 등 여러 보직자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무능한 황제의 등극은 제국의 난맥상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정치체제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역사적 경험을 배태한 산물이라고 칭하고 싶다. 범용한 최고권력자라도 무난한 임기를 마칠 수 있는 체제. 최고를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최악은 막아낼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이 현대의 민주주의체제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지만 동로마제국은 그후로 1,000여년간을 더 존속하였다. 그럼에도 서로마제국에 법통을 인정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뿌리요 기둥이었던 이탈리아가 서로마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로마제국은 가톨릭이 아닌 정교라는 점도 차이를 보여준다. 동로마황제의 권력체제는 오히려 동양의 절대군주정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고. 하지만 국외자의 눈에는 이 모든 논의를 초월하여 오늘날 서양 문명국의 대다수는 서로마제국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탓이 아닐까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서로마제국의 판도는 지금의 영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일부, 동유럽 일부와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유럽지역의 중추를 차지한다. 서양적 사고가 암묵적으로 깊숙이 뿌리내린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동로마보다는 서로마를 자신들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높이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기독교의 세력확대가 로마제국의 쇠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기번은 주장한다. 기독교는 탄압속에서도 꾸준히 신도를 포섭하여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 공인되었고 얼마후부터는 국교로까지 옹립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가난한 신민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기보다는 파벌게임에 몰두였으니 아리우스파등 각종 분파를 모두 이단으로 추방하여 내쫓은 것이다. 신앙상의 차이를 포용하기 보다는 격렬한 대립을 통하여 가뜩이나 어려워진 로마의 내정을 혼란케 하는데 일조 하였으니 이런 지적이 나와도 별달리 할말은 없을 것이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웅장한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로마제국은 어딜까? 미국이 그러하다면 미국은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낮추고 항상 주변국과의 친선관계를 도모하는게 역사적 교훈을 놓치지 않는 방법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