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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ㅣ 쏜살 문고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캐서린 맨스필드 사후에 작가의 남편이 편집하여 발간한 동명의 단편집이다. 총 25편 중 13편을 수록하였는데, 이 단편집은 작가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의 표제명은 콜리지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전적인 또는 영화적인 사랑의 장면은 자연적이며 운명적인 조우에 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은 미숙하고 유치하지만 그렇기에 항상 마음속 깊은 여운을 드리운다. 남녀의 사랑이 이성으로서 자각될 때 더 이상 천연스러움은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과는 떨어져 둘만의 은밀한 공간을 찾게 될 때 말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나면 – 그러니까 – 서로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고 나면 모든 것들이 달라질 듯 느껴져 – 그러면 우리는 지금처럼 당당하고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뭔가 비밀스러운 짓을 하게 되는 거겠지. 우리가 더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 아니게 될 거잖아. (P.29)
헨리의 손길을 항상 피하던 에드나가 문득 그에게 키스를 원하는 감정을 고백했을 때 헨리와 그녀의 관계는 크게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분명한 길을 보여 주지 않는다. 헨리는 어둠 속에서 전보를 손에 든 채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새 드레스들>의 두 딸 로즈와 헬렌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각은 상반된다. 부모인 앤과 헨리는 헬렌을 구박하며 문제아 취급한다. 할머니와 의사 맬컴 선생은 헬렌에 동정적이다. 특히 맬컴 선생은 오히려 로즈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들여다보면 앤과 헨리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할머니의 정신은 오락가락하여 설득력이 없다. 맬컴 선생은 할머니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 말이다, 내게는 맬컴 선생이 썩 호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마치 꿍꿍이를 품은 듯한 느낌이.
‘노인네랑 대화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그는 생각했다. ‘내 말의 의미를 반만큼도 못 알아듣고 있잖아. 그저 헬렌에게 인형을 못 사 주게 된 일만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야! 저러니까 도대체 발전이라곤 없지.’ (P.112-113)
맨스필드는 삶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네 삶은 참과 거짓, 선의와 악의가 뒤섞여 있다. 이러다 보니 겉보기와 실질이 합치 안 한다거나 가까운 과거와 미래에 감정과 태도가 표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것도 중차대한 사안 보다는 한낱 하찮기 그지없는 사소한 건으로 말이다. 사랑과 미움 역시 마찬가지다. 부부간, 연인 간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 같지만 실상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에 국한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라. 보통의 사람들 누구나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렇게 작가는 주장한다. 인생은 모순이자 역설로 점철되어 있다.
<검은 모자>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요양 간다며 거짓말하고 서둘러 애인을 만나고자 하는 여자의 열망이 전반부에 두드러진다. 어쨌든 불륜 남녀는 즐겁게 만남을 가졌을까? 아니다. 여자는 애인이 쓴 검은 모자가 못마땅하고 그 흉측한 모습에 치를 떤다.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한심한 외모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인정 못 한다. 문득 남편이 그리워진다. 제정신을 차리고 남편을 향해 마차를 되돌린다.
<진실한 모험>의 화자는 브뤼주에 홀로 여행하면서 낯설고 불친절한 경험에 마주친다. 조각배를 타고 뱃길을 관광하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안내원에게 미움을 받기조차 한다.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와 남편이 런던과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브뤼주 관광을 제의하자 화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브뤼주로 향하는 여행>의 화자 역시 기차와 선박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 – 짐꾼, 두더지, 남녀 커플, 노부인 - 을 보면서 인간성의 실체를 발견한다. 남녀 커플을 보면서 사랑의 힘을 찬미하다가 거만한 노부인의 아양을 보면서 악몽 같은 연애에 치를 떤다.
<독>의 연인은 사랑하지만 결혼 관계는 아니다. 여자는 법률 계약에 얽매이기를 꺼린다. 여자는 절대적 자유를 희구하고 남자는 그 공허함, 허무함을 덜 수 있기를 바란다. 뉴스에 실린 아내를 독살한 남편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은 시각이 엇갈린다. 누구나 내심에 배우자의 독살을 상상할 거라며, 다만 남자는 심약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그러면 여자는? 문득 와인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
하나님 맙소사! 혹시 내 상상이었을까? 아니, 상상이 아니었다. 그 음료에서는 분명히 싸늘하고, 씁쓸하고, 기묘한 맛이 났다. (P.195)
<로자벨의 피로>와 <시소>도 위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소소한 부조화를 그리고 있다. 가난한 로자벨의 실감 나는 상상의 허무한 뒷맛, 늙은 두 아기와 어린 두 아기가 각자 벌이는 인생의 소꿉놀이는 별 차이가 없다. <밀리>는 어떠한가. 밀리 에반스는 사람을 죽였다는 아이에게 연민과 보호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인도주의적 감상에 흐뭇함마저 느낀다. 새벽녘 말을 훔쳐 도망가는 아이와 추격하는 남편 일행을 바라보며 밀리의 마음에 싹튼 감정은 무엇일지? 그녀의 감정이 일순간에 표변한 까닭은 무엇일지 알 수 없다.
밀리의 마음 속에서는 낯설고 광적인 기쁨이 피어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짓눌러 버렸다. 밀리는 맨발인 채 길 위로 황급히 내달렸다. -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고 흙먼지 속에서 손전등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아하! 그 녀석을 쫓아가, 시드! 아아아! 그놈을 잡아, 윌리! 얼른 가! 그렇지, 시드! 총으로 쏴 버려. 총으로 쏴 버리라고!” (P.124)
한편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 주는 전형적 작품이 <펄 버튼이 어떻게 유괴되었는지에 관하여>와 <잘못 찾아온 집>이다. 전자에서 어린 펄 버튼은 유괴를 당한다. 집시일까 방랑유람단일까 유괴자들의 정체는 분명치 않지만, 천만다행히도 오래 지나지 않아 펄 버튼을 찾는 일행이 등장한다. 이제 펄 버튼은 행복을 되찾을 수 있겠지. 어찌 된 일일까,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생각해보니 어린아이는 유괴된 곳에서 기쁘고 신이 나서 즐겁게 놀고 있었으며, 유괴자 여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지. 반면 펄 버튼을 구출하러 오는 무리에 대한 그의 인상은 이러하다.
작고 푸른 남자들이 달려온다, 그를 향해,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를 삑삑 내며 – 상자처럼 일렬로 똑같이 늘어선 집으로 그 애를 다시 데려가려는 작고 푸른 남자들 한 무리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P.64)
후자의 노부인의 평온한 삶은 잘못 찾아온 장의 마차로 완전히 틀어진다. 일순간 그는 삶이 종지부를 찍었음을 절절하게 체험한다. 비록 그것이 잘못 찾아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앞선 놀란 심정이 저절로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에게 다시 찾아올 수 있으므로. 죽음 앞에 아무 준비 없이 노출된 노부인이 쥐어짜서 죽음을 거부하는 손짓은 일체의 과장이 없으므로 더더욱 우리네 현실과 부합한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야? 이 소리의 의미는 대체? 사람 살려, 신이시여! 그의 나이 든 심장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정신없이 벌떡거리다 아래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P.181)
<무모한 여행>은 <독>과 <이 꽃>과 결을 같이한다. 화자는 홀로 군대가 통제하는 전방의 마을로 찾아간다. 욕구에 충만한 군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굳이 그 시기에 그녀는 이모와 삼촌을 만나려고 가야만 했을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마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를 키 작은 상등병이 뒤따른다. 후반부는 술집을 배경으로 한다. 화자와 키 작은 상등병은 어느덧 커플이 된다. 일행은 푸른 눈의 군인이 말한 ‘딱-월한’ 위스키를 맛보려고 야간통금령도 어기며 몰래 다른 술집으로 가서 들이킨다. ‘무모한 여행’은 전반부의 여행을 지칭하는지 또는 후반부의 무모한 술집 탐방을 뜻하는가. 또는 전후반부 모두에서 그녀가 보이는 행보를?
<이 꽃>은 워낙 은근하고 미묘하게 묘사하여 도대체 어떤 사건 또는 행위를 기술하는지 한참 생각했으나 역시 단서는 있었다. 의사, 은밀한 처치, “삶의 흐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P.173), “그것은 그녀를 태(胎) 안으로 받아들였다”(P.174), 하마터면 끝장났을 거라는 그의 탄식. 그렇다, 이 작품은 은유적으로 낙태를 기술한다. 남녀 간 열렬한 사랑, 그런데 사랑의 결실은 이렇게 거부당한다. 무슨 이유인가? 결혼 준비가 안 되어서? 드러낼 수 없는 불륜의 관계이기에? 요즘에도 낙태는 완전한 자유권이 주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작가 당대에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암암리에 빈번히 벌어지는 현상. 원하는 사랑의 원치 않는 생채기라고밖에는.
여전히 맨스필드의 글쓰기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슬처럼 깨끗하고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독자의 눈과 마음에 던져주지 않는다. 이슬이 쉽게 오염될 수 있음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는 피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외면하려고 한다. 작가는 굳이 우리의 눈과 귀에 현상과 다른 실체가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