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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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고 프랑스의 중세 우화내지 민담소설격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미하일 바흐찐의 연구서를 읽기 위한 전초작업이라고 해야겠다. 내용은? 글쎄, 터무니없고 황당하고 적나라하다. 작품연도순은 팡타그뤼엘이 먼저지만 내용순으로는 가르강튀아가 선행한다. 아무래도 팡타그뤼엘의 아버지니까.

섣불리 펼치고 도전하는 무모한 인간은 대번에 미끄러져서 코가 깨지기 딱 쉽다.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중세시대에 빠삭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수많은 각주를 읽다 보면 도대체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건지 아니면 중세의 풍속학술도서를 보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다. 작가의 탁월한 지식에 경이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숨은 비경을 진작부터 알아차린 선구자에게도 존경의 념을 금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난해한 편은 아니고 허황하면서도 우스꽝스럽지만 일면 교훈적인데 문제는 상징과 은유적 표현이 너무 많아서 각주를 빠뜨리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흠, 그렇다고 두 번 읽기는 싫은데.. 하여튼 읽고 나서 뒤돌아보니 흔히 번역되는 작품에 속하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다. 단순히 불어불문을 잘 안다고 해서 대뜸 뛰어들었다간 유희의 함정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테니.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커다란 목구멍'이라는 의미의 가르강튀아, '완전히 목마른'이라는 뜻의 '팡타그뤼엘'은 오히려 점잖은 편. 거기에 크기와 수량의 뻥튀기는 점입가경이다. 툭하면 수만개는 예사이며, 물통도 작은게 수백리터들이니,원. 압권은 '팡타그뤼엘'의 진술자이자 시종이 그의 입속 세계를 탐험한 장면이다. 입안 이쪽과 저쪽 사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목구멍 안쪽으로도 거대한 대도시가 우뚝우뚝 솟아났다나. 게다가 며칠전에 먹은 마늘냄새로 뱃속에서 전염병이 되어 수많은 인명이 쓰러지게 되었다니 이렇게 황당함은 처음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과 허풍스러움의 측면에서 움베르토의 '바우돌리노'를 연상시키지만 좀더 시사비판적이고 해학적인 면에서 라블레가 한수 위라는 생각이다. 가톨릭교리의 굴레에 갇혀있던 중세인들에게 라블레의 이 작품들은 어떠한 충격과 파격을 선사했을까? 풍자와 해학은 직설적으로 비판을 하기엔 위험한 시기에 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현명한 방편이다. 마녀사냥이 난무하고 종교의 폐해가 절정을 달하던 때, 세상사를 한낱 희화화하면서 진실로 세상을 진무하는 현실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으면 인간 본연의 자유분방과 감정표출의 소중함을 은연중 깨닫게 되지 않을까. 엄숙주의자에게 음란하고 지저분하고 품위없게 보이는 그것이 민중들의 솔직한 삶의 태도라는, 그래서 오늘날 더욱 그 의의가 높아지고 있는 이 작품을 번역하고 출판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러한 유형의 책이 얼마나 팔릴지는 우리 모두 대충은 예상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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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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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몽유록 - 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
김광수 지음, 서신혜.박종훈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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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 짙은 베스트셀러와 자기계발,어학 등 실용서 외에는 신문지면 상에서 책 광고는 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대학교출판부들이 연합하여 전면광고를 낸 것을 죽 훑어보니 제법 대중이 관심을 기울일 책들여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을 먼저 끌어당겼던 것이 이 <만하몽유록>이다. '몽유록'이면 꿈에 의탁하여 작가의 소망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소설계통인데. 그냥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음쳐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있다.

작가 김광수는 19세기말 20세기초를 살았던 인물이다. 삼십대 초반에 사망했으니 요절이라고 칭할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게 불과 이십대 중반이라니 갑자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조차 한다.

그냥 조선시대의 고전소설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집어든 게 사실은 1907년작이니, 이게 도대체 고소설인지 아니면 신소설에 포함되는지 난감하다. 아울러 옛 묵향을 느껴보려던 계획도 차질이 생긴 듯하다.

도대체 조선말 시골선비가 순한문으로 기록한 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튼 대출을 해왔으니 어떻게 끄적거렸는지 보기나 하자. 이런 심정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박람강기'니 '박학다식'을 들어봤어도 이러한 지독함은 처음 겪는다. 이런 젊은이가 언제 사서삼경과 제자백서, 시문 등을 두루 익혔는지 기가 막히다. 도처에 순수한 인용문과 패러디가 넘실거린다. 도대체 한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음미도 하지 못하겠다. 본문보다 각주 읽기에 급급한 처지가 되버렸으니.

사실 고소설의 마지막 불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의 시골뜨기의 자기만족인지 우려했는데, 장이 넘어가면서 역시 시대상은 속일 수 없음을 발견한다. 여자가 대학에 가고 소위 개화되는 실정,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패망해가는 조국에 대한 울분을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옥황상제에게 상소를 올리나 이미 정해진 운세를 하늘이라고 어이하리오.

신선의 말과 배를 빌려타고 중국 각처의 사적과 명승지를 밟으며 감회에 젖어 시를 읊는 작가에게 능동적으로 접근하고 속여서 마침내 사랑을 얻는 옥낭에게서 진취적 여성상을 잠시 볼 수 있으나 곧 한계에 직면한다.

저자는 천성적 시인이었나 보다. 이리 다양한 형태의 시가 많이 들어간 소설류는 처음이다. 한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천천히 음미해야 참맛을 느끼겠지만, 천학한 나는 그저 한글 번역만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몸이 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기의 다른 지식인들이 선택한 길을 그는 걸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약함에 몸을 떨었는지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문학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토해내고 싶은 시대적 격정은 몽유록이라는 형식과 순한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감동을 받지 못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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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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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칭기스칸이 화두다. TV에서는 중국에서 제작된 대하사극이 프라임타임에 방영되고 있다. 곳곳에서 칭기스칸과 그 후예들이 거둔 전대미문의 성취를 찬양하고 그 비결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에게 칭기스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일까? 이 시점에서 그걸 되새겨 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칭기스칸은 동양의 울타리에서만 판단하기에는 그 활동범위가 너무 크다. 잭 웨더포드는 칭기스칸과 그가 남긴 자취를 좇아서 수년을 탐사하고 연구하였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칭기스칸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먼저 근대 유럽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타타르)는 바로 모든 악마적이고 저열함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저주를 내렸다고 할 정도다. 왜 그랬을까? 몽골 제국이 유럽에 어떤 타격을 입혔단 말인가. 사실 몽골의 발흥에서 치명타를 입은 것은 중국과 아랍세계였다.

저자는 칭기스칸의 일생을 중심으로 몽골부족의 봉기와 세계제국으로의 발전, 그리고 칭키스칸 사망후 후예들의 통치와 제국의 몰락을 개괄적이며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단순한 역사서라고 선입견을 갖지는 말자. 저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개인사가 아니다.

칭기스칸이 몽골부족을 통일시킨 것은 그의 어떤 자질이 발휘되었는가 통치철학과 시스템을 정밀하게 파헤친다. 아울러 취약해 보이는 몽골 대제국이 100년이상 유지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몽골 제국은 문자그대로 '세계제국'이 갖춰야 할 바람직한 시스템 구성요소를 제대로 배합하였다. 인종적, 종교적 편견없이 인재를 등용하였고, 잘 닦인 교역망으로 쉴새없이 제국내 물자가 분배되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몽골의 몰락은 이러한 안정적인 시스템이 깨진데 기인한다.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지도층의 타락, 지난친 수탈체제, 라마교에의 몰입 등이 기억난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처음듣는 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페스트의 횡행이다. 남부중국에서 발생한 페스트가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럽까지 퍼지면서 사회,경제체제를 무너뜨리면서 몽골의 교역시스템이 가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지배층이 부적절하게 대처하면서 허무하게 대제국은 무너진다. 신기하기 그지없다. 발해의 멸망원인에서 언급되지 않는 화산폭발과도 같은 자연재해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현상이랄까.

우리는 그동안 동양의 시각에서 칭기스칸과 몽골을 바라보았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 균형추를 놓는 역할을 한다. 몽골을 이렇게 보면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한국사람이라면 중간에 굉장히 기분이 나쁜 지도가 나온다. 몽골의 강역도에 고려도 포함되어 있다. 격렬한 대몽 항쟁을 한 우리 고려가 어찌!하고 울분을 응당 토해냄이 당연하다. 한편 생각해 보면 저자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어쨌든 항복을 하였고, 이후 멸망시까지 몽골의 간섭을 받았으며 더우기 일본정벌에는 병참기지, 조선소에 선봉장 역할도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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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성서밖의 예수 - 믿는다는것 2
일레인 페이젤 / 정신세계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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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는 명성과는 달리 내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성서 밖의 예수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혹시나 예수의 숨겨진 삶의 궤적,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생활과 자식 등에 대한 기대를 품은 나같은 독자들에게는 꽤나 실망이다. 원제는 'Gnostic Gospels' 이니 '영지주의 복음서'라고 해석이 가능하겠다. 즉 지금은 이단으로 낙인찍혀 잊혀진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 신약성경은 꽤나 정련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출발부터 완비된 상태에서 성경이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견해와 논의가 백화난만하던 시기, 기독교는 발전의 도상에서 방법론을 가지고 크게 대립하였다. 그것이 정통파와 영지주의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익히 알고 있듯이 정통파의 승리이고, 정통파의 최고사제는 가톨릭의 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리운다.

20세기 후반에 발견되어 놀라움을 안겨준 나그 함마디 문서를 통해 저자는 이단시되었던 영지주의가 주장하던 내용이 무엇이고 이들이 어떤 연유로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차분하게 풀이하였다.

영지주의는 어찌보면 불교의 소승불교 혹은 선불교와 유사점을 지닌다. 예수, 하나님으로부터의 외적 구원이 아니라 내적 깨달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누구나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을 깨닫는 과정이 곧 신앙이며 깨달았을때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영지주의는 인간 예수가 아닌 성령적 존재에 초점을 맞추었고 따라서 신도들이 헛되이 순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영지주의는 정성적인 특성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수행과정이 용이치 않은 단점 때문에 스스로 소수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순교가 주는 효과는 너무나 강렬하다. 뭐든지 비둘기보다는 매가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더구나 정통파는 예수를 믿고 사도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면 신자로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이 투철한 수련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가 유럽 각국 나아가 세계종교화하는 과정에서 결국 영지주의는 도태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정통파의 탄압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영지주의의 몰락은 차라리 자체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영지주의의 교리는 여전히 유효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각종 종교개혁이 발생한 것이 그러하다. 또한 기독교의 엄격한 남성중심적 권위체제는 반여성적 멍에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고정된 사제의 직위가 존재하지 않고 남녀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고 비교적 평등하게 인정받았던 영지주의는 현대의 페미니스트에게 환영받은 소지가 다분했을텐데.

그동안 몰랐던 성경의 숨겨진 측면을 새로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꽤나 유익하다. 특히 창세기 인류의 탄생을 두고서 정통파와 영지주의가 중시하는 구절이 상이한 점도 인상적이다. 조물주와 하나님을 구별하여 독선적 조물주를 갈파한 점도 흥미롭다.

요컨대 기존 성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성경이 맘에 안들어서 삐딱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방대한 원서 '나그함마디 문서'를 이해하는 첩경이 되는 책으로서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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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1.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황제내경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6
황제 지음, 이창일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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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은 어려운 책이다. 기본적으로 동양의학서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맥을 짚는 법, 침을 놓는 법 등 일반독자로서는 불필요한 내용도 많이 있다.
그리고 방대하기조차 하다. '소문'편이 3권, '영추'편이 2권으로 나와있다. 어렵고 방대한 책을 눈앞에 들이대고서 그냥 고전이니까 읽으라고 한다면 누가 좋다고 할까? 그래서 이렇게 입문본 내지 요약본이 필요한 법이다.

오랫동안 <황제내경>에 주목하였다. 실용적 관점보다는 근저에 흐르는 동양사상의 깊은 맥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음과 양을 주축으로 한 오행론에 입각한 동양의학은 현대에도 여전히 그 효과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 뿌리가 <황제내경>이다. 그래서 김용옥은 한의대에 들어가 한의사로 개업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수천년 동안 동양의학의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해설부분에서 역자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언급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그 말은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동시에 진리는 통시대성을 지닌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어디에서도 음양오행은 쫓아다닌다. 산모가 출산일과 시각을 좋은 때로 맞추어 정한다. 이사할 때 길일을 정한다. 결혼날도 역시 길일을 택한다. 매년 토정비결로 운세를 점치고, 관상이나 손금은 어디서나 흔하다. 결혼을 앞둔 짝은 사주와 궁합을 본다. 묘를 쓸때 풍수지리는 어떠한가. 길가와 찌라시신문에 도배하는 철학관은 더욱 맹위를 떨친다. 한의학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그 근본이 완전히 다르다고 떼쓰는건 억지다.

<황제내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소문'은 일반이론이다. '영추'는 실제시술 방법론이다. 동양의학도는 후자에게 큰 관심이 갈 법하지만, 나같은 문외한이자 평범한 독자는 소위 동양의학의 기본정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소문'편이 흥미가 간다.

이 책은 전체적인 내용을 재편집하여 초입자가 비교적 용이하게 <황제내경>에 접근하도록 돕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마냥 재밌거나 하지는 않으니 과도한 기대는 금물.

언제 기회가 닿으면 <황제내경 소문>전체를 공부하고 싶다.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같은 대지에서 동일한 기의 운행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다. 그 정신이 20세기 후반부터 사회적 병폐에 허덕이던 서구권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어 역사의 퇴물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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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2.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