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임진왜란 1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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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물론 이순신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참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오로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급급해서 인간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그후로도 큰 진전이 없었던 듯. 어쩌면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러한 정체된 이순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꼭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위 재야사가들의 연구가 정통학계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젠가는 다방면에서 참신한 접근법과 발상을 갖고 우수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순식역사연구회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징비록><난중일기>를 비롯한 역사고전과 '불멸의 이순신'드라마, 각종 시중 문헌을 참조하면서 이순신의 위대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다. 과거의 이순신 상이 단순한 무장에 그쳤다면 요즘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새로운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아픔과 슬픔을 겪고 괴로워 할줄 아는 진실한 한 인간임에 더욱 친근함을 접하게 된다.

이순신의 해전 전략전술에 관하여 구체적 분석이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역시 이순신이 나서니 잘했구나 하는 인식과 아울러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고, 거북선으로 들이받아서 이겼다고 믿을 뿐. 하지만 잠시 되짚어보니 전쟁이란게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닐듯 싶다. 적 또한 나 못지 않게 이성과 감성을 갖고 똑같이 이기고 살아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준비하고 내가 힘쓰는 동안 그들이 그냥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처음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보고 비교분석한 점은 글자그대로 참신하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막연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논리는 순수한 역사전공자 또는 일개인으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고 할때 다방면의 연구집단이 이루어낸 업적인 것이다.

2권 중반부터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경사학(經史學)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저자의 견해처럼 너무나 전통의 학문접근을 등한시하고 서양과학에 몰입되었는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여튼 공리공론에만 치중을 한 당시 조정의 무능과 격물치지에 충실한 이순신은 정말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후반부터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에서, 아니면 문경새재에서 또는 한강이나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는데 우왕좌왕하여 막지 못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저자들의 답답한 심경이겠지만 이런 연구서에 그렇게 토로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부산에서 한강에서 대동강에서 어선과 협선들을 활용하고 화포무기를 적극 활용하였다면 당연히 임진왜란의 흐름은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대비를 못하고 피난가서도 당쟁에 몰두하였던 것이 당시의 조정과 집권층이었음을 왠만한 이라면 충분히 인지하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들 못지 않게 읽는 나도 짜증스러운데 그걸 동어반복으로 읽자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와 <징비록><선조실록>을 일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훑어나가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이 책이 보여주려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무찌른 전략과 전술, 전시경영의 참모습 등이지 당시 무능한 조정의 잘못을 한줄한줄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차라리 비판하려면 그렇게 한심하고 썩어빠진 선조와 집권층이 전쟁후에도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고 썩은내 나는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연구서이며 성과도 남다르다. 특히나 정발의 부산성전투와 송상현의 동래성전투에 얽힌 신비화의 껍질을 벗겨내어 잘못된 우상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데서 참으로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히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마추어로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점에서 후속작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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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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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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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을 때 기분이 흐뭇해지는 유형의 책이 있다. 절로 마음을 느긋하고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이 바로 그러하다.

영풍문고에서 2월중에 일부도서에 한하여 세일을 하였다. 그래서 여러권을 나름대로 충동구매하였는데, 제목과 디자인을 보고 마음에 들어 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였다. 결국 사지는 않았지만 뇌리에 어른거려 그만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페이지 사이에 중독성 물질이라도 뿌려놓았는지.

한마디로 <월든>에 못지않다. 소로우가 사람을 피해서 숲속에서 생활한다면 여기 저자는 도시적 삶을 버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에 정착한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따스한 눈과 마음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더불어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다. 부럽다.

여행자가 낯선 고장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면 여행기가 된다. 여기서 여행자는 결국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행기는 주마간산 격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조금은 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로 여행온게 아니라 정착하러 즉, 살러 왔다. 첫 일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보고 듣고 느낀 소회를 솔직 담백하게 적어 내려갔다. 이때 열린 마음으로 프로방스 사람들을 대했다는게 뛰어난 점이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문화에 마주치면 으레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걸 비난한다면 좀 곤란하다. 그건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반사적 행동이니깐. 프로방스라면 프랑스에서도 따뜻한 남쪽나라의 오지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로 치면 남해안 어디쯤이 되겠지. 세련된 도시인이 보기엔 그들이 얼마나 투박하고 촌티 풀풀나겠는가마는 그래도 글쓴이의 태도는 일단 긍정하고 본다. 그것이 다소 재밌고 우습게 읽혀지지만 오히려 악의적으로 비추어지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나도 이런데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는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겠지. 저자 부부만 하더라도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대대적인 개보수공사를 한다. 그리고 외식도 자주 하고.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일단 등 따습고 배 불러야 여유가 생긴다는 이치려나.

보통 우리가 접하거나 듣는 것은 프랑스에서도 파리라는 대도시의 소식이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문화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처럼 파리도 마찬가지다. 다소 불편함이 있더라도 시골에서 오히려 참다운 그 지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겠지.

우리에겐 여전히 어려운 포도주를 리터단위로 주전자에 담아서 받아오는 모습도 재밌다. 그리고 미스트랄이라는 강풍의 위력도 몸소 겪고 싶다. 그나저나 프로방스에 가면 너무나 음식을 많이 먹어서 금방 배불뚝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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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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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1 - 탄생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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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월한 인종이 미개한 인종을 정복하고 지배하는게 자연법칙 상 정당하다면 난 차라리 자연법칙을 거부하련다.

- 인간의 멸종을 가져올 잠재적 위협요인이 바로 인간 자신이다.

책을 덮고 난 뒤 머리속에 되뇌이는 상념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통하지 아니하며 문화가 상이하다는 차이 때문에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는 역사적으로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소위 제국주의 시대, 서구에 의한 아시아, 유럽, 중남미 침탈이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일찌기 <수탈된 대지>라는 저작에서 외세에 의한 남미의 근세사가 왜곡되고 변질된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이제 그는 좀더 시야를 넓히고 깊이를 더하여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초기에서부터 다시금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기다. 일단 방대한 작업에 감사하고 싶다.

콜럼버스에 의한 소위 신대륙 '발견'은 아메리카인에게는 한마디로 재앙의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미대륙 전체에서 소위 아메리칸 인디언의 숫자는 몇이나 남아있을까? 더구나 그들의 삶의 수준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신의 땅으로 힘을 앞세운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동족과 혈육을 살인하고 이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황금에 눈이 먼 당시 서구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예외없다 -들에 의하여 황금의 '金'자라도 첨부된 모든 문화유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피해자들은 백보 양보해서 불행하다 치더라도 가해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지도 못하였다. 약탈경제에 의존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그후 유럽의 변방국가로 몰락하고 말았으니 황금이 아니라 차라리 '독'이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하였음이야.

콜럼버스 이전 역사에 대한 기록은 구할 수 없기에 저자는 신화와 전설, 옛이야기를 인용하여 풍부한 문화유산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소박하기에 소중하고 적기에 귀한 기억들.

인디언에 대한 유럽인의 착취는 교회에서 열렬한 공인과 지지를 받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인디언은 재산이며,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착취의 선두에는 당시 가톨릭교회와 신부들이 있었다. 가톨릭이 아무리 참회하고 개선한다 하더라도 과거의 범죄 흔적은 결코 지우거나 숨기지 못할 것이다.

침략자의 언어와 문화가 오늘날 지배적인 체제가 되었음은 차라리 눈물을 자아내는 한편의 코미디일 뿐이다. 남아있는 자기 것이 없기에 그리고 빼앗긴 지 너무 오래되어 되찾을 수 없기에 그들은 침략자의 마지못한 유산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도 더러운 폐악마저.

어디 인간 지배와 착취가 옛이야기일 뿐일까.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수단으로 변경되었을 뿐 수탈의 형식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억'을 되지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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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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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왕실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86
김현수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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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표제를 '유럽왕실의 탄생'이라 하였지만, 저자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는 영국 왕실의 탄생이다. 이러한 점만 유의하여 두껍지 않은 책을 살펴나가면 흥미롭게 볼만한 가치가 제법 있다.

유럽왕실의 뿌리는 게르만왕국인 프랑크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크왕국이 베르덩조약과 메르센조약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로 분할되며 이 테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의 다툼은 공동의 선조를 둔 자손들간의 갈등인 것이다.

영국의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은 자생적으로 유럽의 주력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노르만공국의 정복왕 윌리암에 의하여 지배세력이 교체당하였다. 노르만공국의 바이킹의 일파이니 곧 프랑스와 영국과는 다른 왕국의 출발선상에 놓인 셈이다. 현대의 영국 왕실은 노르만왕조의 후손들이다.

노르만에 의한 영국 정복이 있었다는 史實은 역사책에서 익히 보았지만 그 과정은 잘 알지 못하였다. 이 책에서는 정복세력과 토착세력의 혈투인 헤이스팅스 전투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 전투의 의의를 크게 부각하고 있다. 왜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일제에 의한 조선왕조의 패망 이후 왕실의 개념은 소멸되었다. 조선말 혼란과 집권층의 무능에 크게 상심한 민초들에게 해방 이후 왕실이 등장할 여지는 전혀 없다. 비록 요즘 TV 드라마에서 만약 조선왕실이 현재에도 존속하는 것을 가정한 <궁>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서도.

무수한 해외토픽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의 왕실의 에피소드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다이내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태자비의 아들낳기 노력도 멀찌감치 지켜보는 우리네야 우습기 그지없지만 당사국은 절박한 심정인 모양이다.

대다수의 선진국에서 왕실은 상징적 존재이다. 그들은 자의 내지 타의에 의하여 직접 통치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순전한 명예와 부라고나 할까. 우리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자리잡고 있는 탓이다. 어린아이의 가슴속에는 가난한 부모 대신 부자 부모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왕실은 권력과 폭력에 의하여 자신을 다른 계층과 구분지었다. 비록 다른 방식이지만 오늘날 특수한 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지속적인 금력에 의존하니, 곧 재벌이다. 대통령은 5년 뿐이지만 재벌 총수는 수십년을 이끌어간다. '삼성공화국'이니 하는 말이 다 거기서 유래한다. 솔직히 말해서 삼성그룹의 총수가 옛날 왕을 부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수많은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벌벌 떨었던 것처럼 수십만명의 임직원이 일개인 앞에서 허리를 굽힌다.

인간이 사는 한 그 양태는 달리하더라도 모든이가 평등을 누리는 사회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왕실의 탄생'은 유럽에 국한하지 않고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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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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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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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엄마의 말뚝'의 작가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사실 이 소설도 신간 여행기를 구입하여 덤으로 얻은 것이니 진짜 관심이 있어서 펼쳐든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여행기마저 내게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니 덤이야 말할 필요조차 있겠는가.

다 읽고 난 후 갑자기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쿤데라의 열혈 독자에게는 돌맞을 소리겠지만 일단 '농담'이라는 어휘를 통해 연결이 이루어진다. 쿤데라의 경우 농담 한마디로 일시에 반동으로 몰려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완서의 경우는 어떨까. 어릴적 농담 한마디로 존경받는 의학박사 영빈은 수십년 만에 만난 동창과 밀회를 거듭하게 된다. 연관성은 전혀 없다. 더우기 박완서의 소설에서 불륜관계는 한 축의 역할을 수행할 뿐 작품 전체를 끌고가는 구동력은 지니지 못한다.

처음에는 중년 남성과 여성 간의 불륜을 그린 줄로만 받아들였다. 너무나 모범생적인 인생을 살아온 나름대로 성공한 중년 남성에게 평온하지만 재미없는 가정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을 것은 십분 이해한다. 그런데 국민학교 시절의 결혼하겠다는 불순한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여자 동창을 만나니 갇혔던 물꼬가 터지듯이 그의 감정이 분출한 것이려니.

그런데 어느 순간 이야기는 영빈의 동생 영묘에게로 넘어가 있다. 준재벌가의 맏며느리가 되었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시한부 인생으로 삶의 색채가 달라지고 죽음을 기다리며 그리고 죽음을 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철저히 돈으로 결부된 시댁의 인간관계에 몸저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빈의 아내로 공은 돌아간다.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모른 상태에서 딸만 둘인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고 늦동이 아들을 갖기 위한 주도면밀한 작업을 진행한다. 남편이 구박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기막힌 사실은 그녀가 일자무식도 아닌 교사라는 그래도 합리적 이성과 판단을 하리라고 여겼던 직군이라는 점이다.

이 세 유형의 가족 관계가 서로 고리를 물고 있다. 어느 관계가 더 낳는가를 따지는 것은 오십보백보일 뿐. 흔히들 가족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지고지선한 기둥으로 칭송하기 급급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최고의 미덕은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실상에서 가족간에 바람직한 이상적인 관계형성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 작품의 가족처럼 위악적인 가면을 드리우는 밋밋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설을 통하여 작가 박완서의 주된 관심사가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영묘 시댁을 통하여 속물자본주의의 근성이 물씬 풍기고 있다. 또한 가부장적 가족관계에 대한 차가운 비난도 명백하다. 그렇지만 보다 더 큰 제재는 위선적 가족에 대한 소묘가 아닌가 싶다.

박완서는 연배에서는 지식인 작가다. 일찌기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었고 나이 마흔에 등단하였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지적이며 정제된 문장과 어휘를 구사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너무도 깔끔하다. 언제라도 감성은 이성의 필터를 거쳐서 표출된다. 그의 글에서 뜨거운 감정의 분출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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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